궁예의 어머니 선화부인(善花부인)
글.동봉스님/월간불광 202호
한국불교를 인문사상사 쪽에서 볼 때, 삽입되지 않는 위대한 고승으로는 묘청이나 궁예, 신돈등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원효 못지 않은 인물인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불교내 자체에서도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분들이다.
오늘날 우리나라 역사책에서도 한결같이 이들을 요승이다 뭐다 해서 가르치고 있는데 이들 교과서가 역사를 완전히 잘못 전하고 있음을 우리는 한번 쯤 인식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조상들이 역사를 왜곡했다 치면 적어도 우리는 다시는 그러한 것을 사실로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역사의 왜곡이란 역사를 잘못 기록하고 잘못 가르치는 것만이 아니라 잘못된 역사인 줄 알고도 시정하지 않으려는 것도 포함된다.
자, 묘청이 왜 요승인가.
궁예나 신돈이 어찌하여 요승이란 말인가.
고문헌 이조실록 등에 또는 김부식 같은 사대주의 사가의 기록 때문인가.
아니면 우리의 역사교과서에 그렇게 되어서인가.
통일신라 이후로 흥청거리고 거들먹거리던 소위 국사니 왕사니 하는 이들보다 궁예나 신돈 화상 등이 훨씬 자랑스럽고 위대하게 생각됨은 웬일인가.
작가 김성동 선생이 에세이라는 형식을 빌어 묘청, 궁예, 신돈과 같은 위대한 고승 등의 행적과 당시의 사회적 배경들을 바로 잡으려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진정 역사학자들이 힘을 모아 왜곡된 부분을 바로 잡고 잘못된 교과서들을 아니, 심지어는 백과사전까지도 다시 간행하여야 할 것이다.
외세를 끌어들여 삼국을 통일한 김춘추니 김유신 같은 이는 영웅이다 뭐다 해서 추켜세우고 제 핏줄을 바로 찾고 제 잃어버린 강토를 수복하여 애썼던, 그리고 특히 남들은 형언할 수 없는 특권의식 속에서, 부리고 흥청거리던 그런 와중에서 경자유기전(耕者有基田)을 역설했던 궁예 화상이나 신돈 화상 등을 아직도 우리는 요승으로 치부해야 하는가. 왕건이나 이성계 같은 위정자들 때문에 옛 사가들은 설령 그렇게 기록했다손 치더라도 적어도 오늘날 우리들은 그러지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궁예는 생몰연대가 분명치 않으니, 신라왕자로서 경명왕 2년(918)에 입적한 것으로 되어 있다.
잃어버린 고토를 수복하고 후고구려를 건국한 위대한 고승이자 성왕(聖王)이다.
정권의 분쟁 속에서 서자라는 이유 때문에 밀려나 세달사에서 축발수계하고 수행을 시작한다.
법명은 선종(善宗)이었다.
20여년의 수행 끝에 그는 단안을 내린다. 진정한 구제는 움직이는 것이다.
정체성으로 중생은 구원되지 않는다. 100%사는 것이다.
그는 30대 초반에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토호와 지배계급들의 착취에 허덕이는 민중을 구원해야 한다.
그의 사상은 오로지 평등이교 해방이며 자비였다.
특히나 외세를 업고 침략하여 와 무차별하게 당했던 조상들의 울분을 설욕하고 잃었던 옛 강토를 수복하려는 일념이었다.
그러나 그의 그러한 위대한 업적의 수행에는 서민들을 어루만지고 민중을 평등히 대우받으며 살게 하려는 보살심이 있었다.
그는 폭력을 싫어했다. 다만 평등한 이상국가만 실현된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그였다.
그의 적은 토호들이었다.
수천 명의 노예를 거느리고 수만 평의 땅을 갖고 있던 기득권자들이었다.
그의 사상은 농사를 짓는 자에게 땅을 주어야 한다는 경자유기전 사상이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왕건을 비롯하여 홍유, 신숭겸, 복지겸, 배현경 등을 부하로 두었다가 하극상에 의해 인생을 마치게 되었다.
이 부하들이 모두가 토호세력들이었기 때문에 그것은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그는 20여권이나 되는 경전을 저술하여 백성을 가르쳤다.
물론 그 경전은 미륵부 경전에 대한 자신의 논문이었을 것이다.
그가 당시의 모든 이름있는 승려들에게조차 신임을 받지 못했던 것은 그들 승려들이 대부분 귀족신분이거나 토호가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칭 미륵이라고 했다지만 미륵사상의 위대한 학자요 실천가였으며 그를 미륵이라고 한 사람들은 이 땅의 수많은 민중들이었다.
착취와 억압속에서 허덕이던 민중들이 그들의 편에 서서 평등사회를 부르짖은 궁예선종을 미륵 부처님으로 모셨음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가 출가할 당시 그의 어머니였던 선화 부인은 그를 정치인으로서가 아니라 수행자로서 키우고 싶었으며 그의 미륵사상, 즉 평등사상은 어머니인 선화부인에게서 받은 것이었다.
그 일화를 보자.
궁예가 일곱 살일 때 어머니와 함께 난을 피해 어느 한적한 곳에 은거하고 있었다.
어린 궁예에게 선화 부인은 정치가의 길을 가기보다는 수행자의 길을 가는 것이 훨씬 훌륭하다고 했다.
“어머니, 임금님과 미륵 부처님은 누가 더 높은가요?”
“그야 물론 미륵 부처님이지. 어떻게 임금님으로서야 비교가 되겠느냐?”
“미륵 부처님과 임금님의 차이는 무엇이며 미륵 부처님의 사상은 무엇일까요. 자상하게 좀
……”
“임금님과 미륵 부처님의 차이는 첫째로 국토를 갖고 있느냐와 아니냐란다. 임금님은 영토를 주재하지만 미륵 부처님은 영토가 없단다. 왜냐하면 미륵 부처님은 모두를 주재하시기 때문이란다. 게다가 임금님은 영토의 주재에만 국한되지만 미륵님은 영토와 역사, 즉 시간과 공간을 함께 주재하시니 다를 수밖에 없단다. 그리고 미륵 부처님의 사상은 만민평등이요 평화사상이란다. 모두가 함께 잘사는 세계가 미륵 부처님의 세계관이란다.”
“그러면 어머님, 저는 앞으로 어떻게 할까요?”
“너는 다른 데 뜻을 두지 말고 수행자의 길을 가거라. 너는 미륵 사상을 본받고 미륵의 실천자가 되거라. 너는 지금 보지 않느냐. 불교의 집권세력들의 행패를 말이다.
왕권과 토호들과 밀착하여 진정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고해의 중생들은 안중에도 없는 작자들을 명심해라. 너는 미시랑이니라. 미시랑은 미륵이라는 뜻이란다.
“제가 어떻게 미륵 부처님일수가 있겠어요? 듣자하니 미륵부처님은 앞으로 수억만 년을 지나야만 오신다고 하던데요.”
“딴은 그렇기도 하다만 그러나 미륵님은 반드시 그렇게만 오시는 분은 아니란다. 네가 미륵의 평등과 평화, 해방사상을 본받고 실천한다면 네가 바로 미륵이니라. 사회가 모두 아름다운 삶을 누릴 때 그것이 바로 용화세계니라.”
궁예에게 그렇게 말은 했지만 선화 부인의 마음은 궁예가 분명히 왕위를 이어받을 수 있는 데도 불구하고 출가를 해야하는 것이 참으로 가슴 아팠다.
어머니의 교육은 자식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하다.
선생님의 교육 못잖게 어머니의 가정교육이란 바로 인간의 심성을 길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화 부인은 아들을 왕의 시녀 노릇이나 하는 그런 아들로 키우고 싶지 않았다.
기성 승려들의 정경유착에 물들까를 염려했다.
적어도 자기 아들만은 가난하고 약한 자의 편이 되어주길 바랬다.
오늘날 우리의 어머니들이 겪는 자식에의 걱정도 마찬가지다.
40대 가정주부들의 고민이 무엇인가를 설문한 결과
첫째는 자식의 진학문제라 대답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그러나 선화 부인과 오늘날 우리의 젊은 어머니들의 생각은 약간의 차이가 있다. 아니 커다란 차이가 있다. 그것은 자신을 희생하여 남을 위해 일하라는 것과 어찌 되었던 너만 잘 되라는 생각일 것이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남을 지배하려는 마음을 심어주는 교육보다 모두를 살찌우려했던 선화 부인의 교육이 참 아쉽다.
첫댓글 음...궁예.신돈 분들을 다룬 각본된 드라마때문에 사람들의 인식이 요승이었다..하고 박혀있는거 아닐까요ㅠㅠ저도 이 글을 읽고 다시 생각하게 되었네요ㅎㅎ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