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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영탑(無影塔) 이야기
1. 佛國影池
조선후기 동도칠괴(東都七怪)가 현대의 삼기팔괴(三奇八怪)로 전승
1) 최초의 기록 동경잡기(東京雜記)로 추정
‘영제(影堤)’는 방어지리에 있다. 경주부에서 동쪽으로 30리 떨어진 곳에 있는데, 못은 23섬의 볍씨를 뿌릴 규모이다. 불국사와는 서로 10리 떨어진 곳으로, 불국사 뒷산의 나무와 단청이 비치지 않는 바가 없음으로 영제라 이름 하였다.
➣ 동경잡기(東京雜記)는 東京誌를 경주부윤인 1669년 민주면이 중수, 1711년 남지훈이 증보,
1845년 성원묵이 증보,
2. 동도칠괴(東都七怪)에 佛國影池
1) 일성록(日省錄) :
정조 4년 1780년 승지 김상집에 경주에 와서 들은 이야기를 기록
2) 청성잡기(靑城雜記) : 영조와 순조 대 성대중이 전하는 기록을 보고 정리
3. 무영탑(無影塔)
1) 고금창기 : 석가탑(일명 무영탑)
(1) 출전은 언전(諺傳)
(2) 불국사 창사 때의 석공은 당나라 사람이지만 이름은 없다.
(3) 석공을 찾아 누이 ‘아사녀’가 왔다.
(4) 그녀는 석공을 만나려 하였으나 공사 중이고, 더러운 몸이라 해서 허락받지 못한다.
(5) 대신 다음날 아침 십리 밖의 천연 못에 가면 볼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6) 아사녀가 그 말처럼 따라가 보니, 과연 맑은 못이 있었다.
(7) 그러나 탑 그림자는 비치지 않았다.
(8) 그래서 탑 이름을 무영탑이라 하였다.
2) 초의 의순(草衣 意恂) - 순조 17년 1817년 불국사 온 것은 기림사 천불 조성 관계
1820년 7월 경 「불국사 회고」에
뜰에 두 탑이 있었다. 하나는 무영탑인데 탑을 지은 석공은 당나라 사람이고, 아사(阿斯)라는 이름의 누이가 찾아와 영지의 언덕 밖에 있었다. 궁전의 당간과 탑이 모두 수중에 드러났지만 오직 뜰 가운데 있는 다보탑은 그림자가 없었다. 이로 인하여 이름을 무영탑이라 하였다.
4. 이광수의 ‘오도답파여행(吾道踏破旅行)’ -『매일신보』 1917년 8월 18일 53신 전반에
(1) 괘릉에서 경주로 오는 곳. 불국사 남방에 영지라는 맑고 작은 못이 있다.
(2) 옛날 김대성이 불국사를 지을 때 아사(阿斯)라는 소녀가 그를 사모하여 만나고자 하였다.
(3) 대성은 마음이 끌릴까봐 염불만 외우다가 끝까지 거절하지 못하고, 무영탑을 완성하는 날
만나기로 하였다.
(4) 소녀가 울면서 10년을 기다리니 꿈에 보살이 현몽하였다.
(5) 보살은 그가 쌓은 탑이 못 속에 비치면 만나게 될 것이니 못을 파라고 하였다.
(6) 소녀는 10년 동안이나 공들여서 못을 팠다.
(7) 어느 날은 불국사 그림자가 못에 비치며, 석가탑을 완성하고 기뻐하는 대성의 모습이 보였다.
(8) 그러나 그는 소녀가 사모하던 옛날의 대성이 아니고, 자기도 백발이 되었음을 알고, 한 곡조의 슬픈 노래를 부르고 못 속에 몸을 던졌다.
5. 오사카 긴타로(大坂金太郞)의「慶州の 傳說」과
오사카 로쿠손(大坂六村) 「경주의 전설」의 영지(影池) 條에
(1) 불국사역에서 남쪽으로 약 5, 6정(町)쯤 가서 (史等伊川을 건너면 두 개의 구릉이 있다.
(2) 영지는 두 구릉 사이에 있고, 토함산 그늘에 가려 정추가 그윽하다.
(3) 경덕왕 때 재상 김대성이 천하의 묘공(妙工)을 모아, 불국사를 개축하였다.
(4) 석가탑을 쌓던 당인(唐人) 석공이 수년 동안 소식이 없자, 석공의 처가 찾아왔다.
(5) 여자는 부정하다 하여 “공사가 준공되면 누각과 탑 그림자가 연못 위에 비칠 것이니,
기다리라”는 말에 부인은 연못가에 기다렸다.
(6) 수년이 지나자 본당과 누각의 그림자는 보이지만, 남편의 석가탑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7) 슬픔에 절망한 부인은 연못에 몸을 내 던졌다.
(8) 석가탑을 무영탑이라 부르며, 연못을 영지라 부른 것은 이때부터였다.
6. 현진건
➣ 1929년 7월 18일부터 8월 19일까지 동아일보
「고도순례 경주」에〈무영탑 전설〉을 연재하였다.
(1) 시기는 신라 35대 경덕왕 때였다.
(2) 재상 김대성이 석공을 모아 불국사 불사를 시작하면서 당나라 석공에게는 석가탑을 맡겼다.
(3) 석공은 침식도 잊고 일에 매진하여 몇 해를 보내자 당나라에서 아내가 찾아왔다.
(4) 여인의 몸으로 신성한 절문에 들어가지 못한다며 거절당했다.
(5) 문지기가 어디가면 큰 못이 있고, 공사가 끝나면 석가탑의 그림자가 못에 비칠 것이니 그때
오라 하였다.
(6) 아내가 그 못가에 가서 기도하며 2년이나 기다렸으나 석가탑은 비치지 않았다.
(7) 아내는 아무리 기다려도 석가탑 그림자가 비치지 아니하자 못에 몸을 던졌다.
(8) 석공은 소식을 듣고 서둘러 공사를 마치고 찾아 왔지만 아내는 보이지 않았다.
(9) 석공은 밤낮으로 연못을 돌며 아내를 찾는데, 하루는 물가에 사람 그림자가 나타났다.
(10) 석공이 그 그림자를 잡으니 아내가 아니고 사람만한 바위덩이였다.
(11) 석공이 아내의 얼굴을 잊지 않으려고 조각을 시작하자 아내는 부처의 모습이 되었다.
(12) 조각이 완성되자 석공은 못에 몸을 던져 아내 뒤를 따랐다.
(13) 불국사 남서방의 영지(影池)는 아사녀와 당나라 석수가 빠져 죽은 곳이다.
➣ 1938년 7월부터 다음해까지 동아일보 소설을 연재
➣ 1941년에 「무영탑」간행
석공은 부여사람 아사달(阿斯怛)로 부인은 아사녀(阿斯女)로 설정
7. 영화 무영탑
1) 1957년 신상옥 감독, 주연은 최은희, 곽건, 한은진
2) 1970년 김수용 감독, 주연은 신영균, 김지미, 윤연경, 한은진
8. 신동엽의 시
1) 1960년 학생시집에 아사녀
2) 1963년 시집 아사녀
3) 1967년 『52인 시집』「껍대기는 가라」
9. 종합하여 무영탑 전설의 전승과 변이에 대한 논의를 정리하면
첫째, 무영탑은 석가탑의 다른 이름이다. 구체적인 전설은「고금창기」에 적혀 있으나 가장 오래된 기록은 경주부윤 민주면이 1669년에 간행한 「동경잡기(東京雜記)」이다. 이 책의 영제(影堤) 조, 「일성록」, 성대중의「청성잡기」의 ‘동도칠괴’와 김영기, 권오찬, 김정균의 경주 ’삼기팔괴(三奇八怪)‘ 가운데 하나인 ‘불국영지(佛國影池)’ 에도 무영탑의 전설의 흔적은 소락하며, 전설의 전체적인 모습은 화긴 할 수 없다. 이 자료 속의 무영탑 전설은 그 서사 구조나 의미가 완전히 변형된 형태이다.
둘째, 「고금창기」는 내용의 구체성과 시대순으로 보아 가장 대표성을 가진 원형자료이다. 이 기록에서 석공은 이름 없는 당나라 사람이고, 그를 찾아 서라벌로 온 사람은 누이 아사녀(阿斯女)이다. 그리고 석가탑의 그림자가 영지에 비치지 않아서 무영탑이라 했다는 것이다. 다음에 주목할 자료는 초의 의순(草衣 意恂)의「불국사 회고」라는 9수의 연작시이다. 이 시주(詩注)에는
석공은 당인(唐人)이고, 아사는 누이로 그려지지만, 다보탑을 무영탑으로 진술한 점이 특이하다. 이 두 자료에도 비극적인 결말이 없고, 단순히 탑 그림자가 비치지 않는다는 사실만이 기록되어 있다.
셋째, 경주에 전하는 ‘동도칠괴’, 경주에 전하는 ‘삼기팔괴’의 하나인 ‘불국영지(佛國影池)’가 있다. 이는 신라의 괴이한 일곱(여덟)가지 이야기의 하나인데, 무영탑과 관련된 수많은 전설이 후대에 오면서 ‘동도칠괴’, ‘삼기팔괴’의 하나로 변이 된 것을 확인하였다. 따라서 ‘불국영지’가 ‘불국사와 영지’ ‘불국사의 영지’라는 단순한 의미나 불국사의 영지 풍광이 아름답다는 단순한 의미를 넘어서는 깊은 의미가 있는 곳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넷째, 이광수의 ‘오도답파여행(吾道踏破旅行)’에 실린 무영탑 전설은 아사녀가 ‘영지에 투신’ 하는 슬픈 스토리로는 척 작품이다. 이런 모티프는 이 후 오사카긴타로(大坂金太郞), 오사카로쿠손(大坂六村)과 현진건에게 이어진다.
따라서 이광수의 이 기록은 『동경잡기(東京雜記)』, 『일성록(日省錄)』, 『청성잡기(靑城雜記)』, 『고금창기』, 초의(草衣)의「불국사 회고」에 나오는〈영지〉전설과 이 후에 나오는
오사카 긴타로, 현진건의〈영지(影池)〉전설을 연결하는 중간적 성격을 가진 작품이다.
다섯째, 일제 강점기에 출간된 오사카 긴타로의〈영지(影池)〉조에 와서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 후 그의〈영지〉전설에서, 석공은 이름 없는 당인(唐人)이지만 아사녀는 부인으로 바뀌었다. 남편을 기디리던 아사녀는 석가탑 그림자가 영지에 계속 비치지 아니하자 투신하고, 부인을 애타게 찾던 석공은 바위에 부인의 모습을 닮은 부처를 조각하고, 끝내 못에 투신하였다.
현진건이 1929년 7월『동아일보』에 연재한 「고도순례 경주」의〈무영탑 전설〉은『고금창기』, 오사카 긴타로의〈영지(影池)〉전설을 새롭게 정리한 것이다.
여섯째, 현진건은 1938년 7월부터 다음해까지 장편소설『무영탑』을『동아일보』에 연재했고, 1941년에는『무영탑』을 소설집으로 간행하였다. 이 작품은〈무영탑 전설〉을 다시 고친 창작물이다. 현진건은 1938년 이 소설에서 석공과 부인을 부여사람으로 묘사하고, 석공의 이름은 아사달(阿斯怛)이라 하였다. 아울러 서사구조를 복잡한 장편소설로 각색하고, 귀족의 딸인 구슬아기를 등장시켜 본격적인 갈등과 파국으로 이어지는 애정소설로 완성하였다.
일곱째, 현진건 이 후 아사달과 아사녀에 천착한 시인은 신동엽이다.
신동엽은 석공의 이름을 아사달(阿斯怛)에서 아사달(阿斯達)로 변경 정착시켜, 민중의 상징적 인물로 삼았음을 추정할 수 있다.
경주문화논총 15집 2012년, 경주문화원
무영탑 전설연구
강석근(동국대학교 교양교육원 교수)
2013년 8월 23일
발췌 정리 이 용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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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첫댓글 정리하신자료 감사합니다. 귀한자료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