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cafe.daum.net/weedscafe/NKUV/9
소비자의 기호에 맞게
좀 더 다양한 식물을 갖추기 위하여
고민 끝에 일톤 트럭에 차체보다 높게
파이프를 그리고 천막을 쳤다.
요즈음 골목을 누비는 채소판매 차량이다.
수소문하여 경기도 안양에서
농장을 시작한 친구를 찾아가기로 하였다.
그때만 하여도 차량도
요즈음 처럼 많지 않았고
운전하는 사람도
그리 많지는 않았다.
이런 모양을 한차량은
고속도로를 달리면
받는다. 고속버스가 지나가면
핸들을 꼭 잡지 않으면
매우 위험하다.
보통 부산에서 과천까지 가면
휴식 시간을 포함
7시간 정도가 걸렸다.
승용차 처럼 빨리 달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과천과 구파발 안양 인덕원 근처에는
화훼류를 재배하는 농장이 많았다.
요즈음 처럼 대단위 판매장은 없었고
각 농장을 방문 상품이 될만한
식물을 구입 한 장소에 모아
차량에 적재를 하여야 했는데
많이 싣고 오려면
상당한 노우 하우가 필요했다.
박스에 넣을 수가 있는 식물.
그냥 세워서 싣고 와야 되는 식물,
물론 식물 하나 하나를 신문지나 비료,
샤료포대 종이로
포장을 하여야 한다.
포장은 식물을 판매하는
농장에서 하여 주었지만
차곡차곡 많이 실어야
하나 하나의 식물에 대한 운송비용이
적게 들기 때문에
조수석과 운전석뒤에 까지
식물을 실어야 했고
싣는것 보다 더 어려운 문제는
적당한 양을 맞추는 것이었다.
한번 서울을 다녀오면
도로비 연료 등등 왕복에 10만원이 들었다.
식물은 잘 실으면 약 100만원 정도의
상품을 실을 수가 있었다.
인건비를 제외한 운송 비용이
10%인것이다.
이십년 전 좋은 직장(?) 대졸 초봉이
약 35만원 정도 였습니다.
그 이후에는 많은 화훼상들은
운송비 절감을 위하여
보유 소형트럭을 가지고
식물을 지정된 장소에
모아 놓고 부산에서 많이
서울로 가서, 빈차로 부산으로 오는
어류냉동 탑차를 이용하기도 하였지만
내가 다닐 때는 몇몇 사람들이
이런 방법으로 경인지역의
식물을 운송하였다.
이런 차량은 화물에
냉난방이 되지않기 때문에
겨울과 여름의 운송 큰 문제였다.
겨울은 영하의 온도에
온실 식물이 영하의
저온에 노출되면 안되었고
여름은 환기가 되지 않는 상태에는 화물이
생명을 가진 식물인지라
고온에서 삶겨 버리면 속수 무책이다.
그래서 겨울에는 오전 10시가 넘어
기온이 영상의 온도가 되면 적재를 시작
11시30분 정도에 출발 열심히 달려야 했다.
그리고 여름에는 오후 6시 정도에 적재를 시작
오후 7시 30분정도에 과천에서 경부고속도로에 올려
부지런히 달리면 새벽 3시에서 4시 사이에
부산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야간에는 시간이 좀 더 걸렸고
객지에서의 피로가 겹쳐 얼마나 피곤했던지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잊지못하는것은
대전에서 대구까지의 구간이다.
하행길의 이 구간은 정말 지겨운 곳이다.
휴계실이나 인터체인지도 별로없고
달려도 달려도 끝이 없는것 같이 느껴졌었다.
지금은 차가지고 서울 가라고 하면 한마디로 못간다.
그때는 젊었고 용기와 체력이 넘쳤지만
이제는 다시하라면 못할것 같다.
도착을 하면 차곡 차곡 실었던 짐을 다 풀어 해쳐서
온실에 정리하여야 하는데
직원, 동생 등등 많은 인원이 동원되어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그때는 무선 호출기도 핸드폰도 없던 시절,
지금 생각하면 언양휴계소에서 전화 하고
오는 동안 그것도 추운 겨울 새벽에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들의 노고가
눈물날 정도로 고맙다.
그때는 지금과 비교가 되지않을 정도로
경기도 좋았고 새롭게 접하는 식물은
부산에 도착하면 다음날 다른 화원에서
절반 정도를 가져갔다.
지금 생각하면 순진하였다.
운송비만 플러스한 값으로 나누었다.
봉사한것이다.
세월이 오래 지난 요즈음
한번씩 생각이 난다.
그때 그 식물들을 나누어(?) 주었던 몇분은
지금도 근교 도시에 화원을 하고 있다.
이분들을 어쩌다 마주치지만
별로 그때의 일들을 기억 못하는것 같았다.
우리가 쓰는 단어중에 가장 잘못된것이
"식물인간"이라 생각한다.
식물은 사람이 주는 만큼
아름다운 꽃이나 탐스런 열매로 꼭 보여준다.
사람이 식물 보다 나은점이 무엇인지.......
부산이 화훼식물재배의 원조 이지만
서울 근교는 큰 시장이 가깝고
이제 막 시작된 새로운 왜래종 화훼류들이
속속 도입 재배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