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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 25일(화) 유배의 섬, 제주>
이번 답사의 리뷰는 우리 팀이 답사한 장소를 시간적 순서에 따라 기록하였고, 멈춰선 장소 마다 교수님의 주옥같은 설명을 중심으로 기록하여 보았습니다. 그럼 추사의 자취를 따라 함께 가실까요?
제주 추사관 주차장에서 이번 답사의 만남은 시작되었는데. 비가 오는 궂은 날씨 임에도 한결 같이 많은 선생님들이 참석하셨다. 모든 선생님들의 반가운 인사와 함께 인원 체크 후 추사 전시관으로 가기 위해 뒤돌아 선 순간, 자연스레 마주 보이는 나무는 뭔나무일까? 마음속으로 생각한 찰나 많은 선생님들이 합창이라도 하듯 “먼나무”라고 말씀해 주셨다. 모든 선생님들이 다 아는 나무였던 것을 재미있게 표현해 주신 거였다. 솔직히 여러번 추사 유배지를 왔었지만 이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 나는 몰랐다.(개인적으로 글쓴이는 꽃과 나무들에 대해 정확히 아는 것은 소나무, 대나무 정도라 할 만큼 문외한 입니다;;)
발길을 대정현성 쪽으로 옮기며 교수님은 대정현성 복원과 문화재 복원 방식의 문제점을 언급하신 후, 수시로 이를 알리고 있지만 개인으로서 힘에 부치는 게 사실이라 하셨다. 이를 바로잡기 위한 방법으로 문화재 관리나 복원에 대해 시민들의 인식과 공감대, 사회적 영향력들이 커져 문화재 하나를 복원하더라도 제대로 된 복원이 되어야 함을 또 다시 강조하셨다.
추사 유배지 안으로 들어서자 마침 오전 11시 해설 관람을 예약 할 수 있어, 우리팀은 예약 후 추사관 밖을 먼저 답사하기로 하고 우선 둘러 보았다.
맨 먼저 마주 한 것은 추사 김정희 동상. 그 앞에서 교수님은 어마어마 했던 추사 집안(서인 노론 계열의 경주 김씨 집안, 영조대왕의 사위인 추사의 증조부 김한신)과 추사 개인의 약력(병조 참판 역임) 등을 설명해 주셨다. 이런 추사 선생은 헌종 6년(1840년) 55세 되던 해에 제주에 유배(윤상도 옥사 사건에 연루)를 오게 된다.
머나먼 제주로 향하던 유배길에 추사 개인의 잘난척(?) 사례(사례1. 전주에서 이삼만을 만나 서예에 대해 논한 일화, 사례2. 제주도 귀양길에 해남 대흥사 일지암에서 초의선사를 만나 원교 이광사의 현판을 떼고 자신의 글씨를 달게 함)를 설명해 주셨는데, 제주 유배 생활 이전 추사의 자신감과 동시에 오만한 모습들이 머리에 그려졌다. 하지만 추사 선생의 입춘대길(立春大吉) 글씨체를 보고 재상 채제공이 장차 이 분야에서 크게 될 것을 예언했다는 일화를 보면 추사 선생은 어릴적부터 천재에 가까웠던 것 같다.
김천석 교수님은 유홍준 교수의 말을 빌려, “조선 시대 유배형은 학문과 예술에 전념할 수 있는 ‘강제적인 기회’를 제공했다는 것이며, 소위 추사 김정희 선생의 글씨도 또한 ”유배체”라 불릴 정도다.“고 말씀해 주셨다.
어찌 죄인의 유배 처소가 성안에 위치하고 있을까? 교수님은 질문하시며 추사 김정희는 소위 잘나가는 힘있는 집안 소생의 자손이자 조선 시대 관료로 그리고 예술가로 활약한 명망있는 인물이었기에 대정현성 안에 그의 유배지가 마련되었을 것이라 추측된다며 말씀하셨다.
신축된 추사 기념관을 보고 지역민은 감자 창고라 불렀다고 했지만, 제주 추사관을 설계한 건축가(승효상)는 추사의 그림인 「세한도(歲寒圖)」에서 그 모티브를 얻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유배의 종류로는 죄의 경중에 따라, 본향안치, 주군안치, 중도안치, 위리안치, 절도안치가 있는데 이중 혹독한 유배형은 위리안치와 절도안치이다. 추사 선생에게 내려진 유배는 위리안치. 즉 울타리에 탱자나무(가시나무)를 심고 그 안에서만 활동을 하였던 것. 또한 추사 선생은 자신의 유배지를 귤중옥이라 당호를 붙였는데. 그 만큼 다른 지방에선 찾아보기 힘든귤나무가 주변에 많았던 까닭이였던 것.
추사 선생은 수선화를 좋아했다고 하는데 그런 수선화가 유배지 인근에 널려 있는 게 아닌가? 하지만 지역민들에게 농사가 한 창일 때 피어난 수선화는 오히려 귀찮은 존재였다. 이런 푸대접 받는 수선화를 보고 추사 선생의 처지와 비슷했는지 ”어떤 사물이 제 자리에 있지 않을 때 어려운 일을 겪는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교수님이 풀어 가셨다.
물론 추사 개인의 의견이지만 나는 좀 다른 생각을 해보았다. 추사 선생이 고단한 삶을 살았던 지역 농민들의 한 면만을 보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였을까? 또한 이 말을 추사 선생에게서 직접들은 농민들이 있었다면 추사 선생에게 뭐라 말을 했을까?(물론 위대한 예술가인 추사 선생을 깍아 내릴 의도는 없다. 추사 선생에게 제주의 수선화도 좋은 이미지로 남았다면 어떠하였을까 하는 필자의 생각이다.)
이렇게 한 개인으로서 수선화를 관조한 추사 선생에 대해 여러 생각을 하는 가운데 교수님의 보충 설명이 이어졌다. ”인근 지역 보성초등학교 및 대정여자고등학교의 교화도 수선화입니다.“ 그 때 나의 머릿속에 불연 듯 떠오른 사실!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제주 사대부고)의 교화도 수선화였다는 것. 풀과 꽃과 나무들에 대해 많이 모르는 나지만, 오래 전에 알고 있는 꽃 중에 하나는 바로 수선화였다.
추사 선생은 8년 3개월간 유배 기간 중 다양한 사람들과 편지 교류를 했다. 가족과 제자 그리고 가까운 지인 등 다양한 사람들과의 서신 교류였는데, 이것은 외롭고 쓸쓸한 유배 생활의 어려움을 편지로 위로 받은 것이라 볼 수 있다.(많은 서신 교환과 왕성한 작품활동으로 10개의 벼루를 구멍내고 1000개의 붓을 몽당 붓으로 만들어 버릴 정도라 전해 내려옴).
우선 추사 선생의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선 육지부의 장과 민어 그리고 김치 등을 보내라고 한 것을 보면 음식 재료를 쉽게 구할 수 없는 제주에서의 생활 모습을 짐작해 볼 수 있다. 헌종 8년(1842년) 11월 13일 추사 선생의 아내가 지병으로 사망하였는데-추사 선생이 그 부음 소식을 받아본 것은 한달 쯤 뒤인 12월 15일 경-그런 사실을 모른채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록정(麀鹿錠)을 자시어 보라’며 쾌차를 기원한 편지 내용은 왠지 짠한 마음이 들기도 하였다. 그리고 추사 선생님의 아내 사망으로 초의선사의 추사 유배지 방문 이야기를 교수님이 보충 설명해 주셨다. 역시 좋은 친구는 달라도 달라!
또한 제주의 기후와 풍토 환경에서 ‘독우(毒雨)·독열(毒熱)·독풍(毒風)’이 심하여 잦은 병치레를 한 것도 알 수가 있는데, 혹독한 환경의 유배 생활 속 추사 편지들은 대학자나 예술가 이전에 한 개인으로서의 인간적인 생활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제주 유배 기간은 추사 선생 자신의 내면을 다시 돌아보게 한 계기가 되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고 교수님은 덧붙여 설명을 해 주셨다.
현재 추사 선생의 유배지는 강도순의 집으로 알려져 있는데, 4·3 당시 중산간 마을이 초토화 되며 함께 사라졌던 곳을 복원한 것이다. 이문거리, 안거리, 밖거리, 목거리, 연자마 건물 등 다섯채가 복원되어 있다.
조선시대 유배형(流刑) 규정에는 거리에 따라 2천리, 2천 5백리, 3천리의 세 등급이 있었는데, 추사 선생의 유배형은 3천리 등급이었다. 그런데 한양에서 제주도까지도 2천리까지 밖에 되지 않아, 3천리 유배형을 받은 사람일 경우 곡행(曲行: 한양에서 여러 지역을 돌아 최종 유배지까지 갔던 방법)이라 하는 편법을 쓰게 된 것이다. 이런 추사의 곡행 유배형을 건축적으로 구현한 것이 추사 기념관 지하 진입 계단이다. 추사 기념관을 설계한 현대 건축가(승효상)의 생각은 역시 남달랐다.
유배가 풀려 한양으로 되돌아 갈 때에는, 자신의 안전 복귀를 기원하기 위해 해신당(바다의 신(용왕)에게 무사 항해를 기원하기 위해 건립한 당: 제주시 화북 포구 위치)을 세우고 거기에 축문을 써서 기원하는 모습들도 있음.
추사 김정희 선생과 제주인들과의 문화 교류 및 영향도 빼 놓을 수 없는데, 제주에서의 제자로서 대표적인 사람이 매계 이한우(조선말 제주 출신 유학자로 유명한 영주 10경을 지어 소개함) 선생 등 여러 사람들이 있다.(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 이하응도 추사 김정희 선생님의 제자였다고 알려짐). 또한 대정향교의 동재(동쪽 기숙사) 현판(「의문당」)도 추사 선생이 써준 글로 제주 지역 교육 기관과의 교류를 보여주는 유물이다.
한편 김정희 선생이 쓴 「일로향실(一爐香室): 화로 하나있는 향기로운 방」 글귀도 매우 유명해서 서울 인사동의 여러 찻집에 「일로향실」을 걸어 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고 교수님의 경험을 말씀해 주셨음.
추사 선생은 24세 때 동지부사(冬至副使)로 가는 아버지를 따라 자제군관(子弟軍官) 자격으로 연경(燕京)에 갔다가 청나라의 석학인 옹방강(翁方綱)과 완원(阮元)을 만나게 되었고, 완원은 추사 선생을 그의 제자로 삼아 완당(阮堂)이라는 호를 내려 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추사 선생의 호 외에 병거사(病居士: 병에 걸린 거사) 등 수많은 호를 가지고 있는데, 추사 김정희를 연구한 유홍준 교수의 견해로는 100개 이상이 될 정도로 많은 호가 있다고 함.
제주도 사람들의 욕 중에 ‘육짓것’이란 말이 있다. 외부 세력에게 많은 시달림을 당했던 제주인들이 외지의 사람들에게 갖는 강한 배타성의 표현인데, 현대사의 아픈 과거인 4·3이나 제주도 지역 개발의 과정에서 경제적 이권을 빼앗긴 제주 사람들의 심리를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교수님은 이러한 외지인에 대한 경계 심리를 표현한 말들에 대해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해야 할 것인가? 라는 철학적(?) 질문을 던지셨다. 그래서 제주의 역사학자(이영권)의 책에 쓰인 내용을 소개해 본다.
제주의 어느 언론인이 남긴 유명한 말이 있다. “조상 대대로 제주도에서 살았다고 하더라도 제주의 자연을 자신의 돈벌이로만 생각하는 사람은 육짓것이며, 비록 어제부터 제주에서 살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제주의 자연을 생명처럼 아낀다면 그는 제주인이다.”
이제 그 유명한 세한도 이야기를 할 차례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세한도(歲寒圖)」(국보 제180호)는 추사 선생이 유배 온 지 5년째(1844년)에 자신의 유배 생활의 처지를 빗대어 표현한 작품이며, 그 의를 지킨 제자 이상적(李常廸, 1804~65))에게 그려준 것이다. 그림 제목 옆 구절인 “우선시상(藕船是賞)”, 즉 “우선(이상적)이, 이것을 보게”란 뜻이다. 이 그림이 더 가치로운 이유는 이상적이 이 그림을 추사 선생으로부터 받고 그해 동지사를 수행하며 연경에 갈 때 청나라 학자 16명의 시와 글(청유십육가 제찬)을 받았기 때문이다.
세한도의 소장자 이동 과정은 정말 흥미로움을 넘어서 드라마틱할 정도다. 이상적이 소장하고 있던 그림은 당 시대의 세력가 민영휘와 민규식에게 차례로 넘어갔고, 이후 일본인 학자인 후지츠카가 소유하게 되었고, 2차 세계대전 속 일본 패망 직전인 1944년 일본으로 돌아간 후지츠카를 매일 찾아가 설득한 끝에 손재형이란 예술 작품 수집가가 주인이 되었다.(1945년 도쿄 대공습때 후지츠카의 서재가 폭격을 맞아 당시 세한도를 받아오지 못했더라면 영영 세한도를 볼 수 없었을 것이었다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후 손재형이 민의원(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며 세한도를 담보로 돈을 융통하며 돌려 받지 못해, 돈을 빌려주었던 이근태의 수집실에 소장되었다가 다시 손세기의 손으로 넘어갔고 그의 아들 손창근이 소장하고 있다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을 통해 우리가 마주하게 되었다.
11시에 예정된 문화관광해설사 선생님의 안내와 설명을 들으며, 교수님이 설명해 준 내용과 비교해 가며 박물관 견학을 진행해 나갔다.(추사 전시관에서의 문화관광해설사 선생님의 설명은 중복 내용이 많아 여기서는 따로 기록하지 않않습니다.)
마지막으로 교수님은 추사 흉상(임옥상 제작) 앞에서 문화해설사가 가져야 할 소양과 마인드 등을 강조하셨는데, “문화탐방지도사의 자질은 문화탐방 장소에 대한 전문적 설명도 중요하지만 그 장소와 관련된 다양한 사물에 대해서도 보다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어 나가는 노력하는 모습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백번 공감가는 말씀입니다!.
오늘 문화탐방해설사 8주차 주제인 <유배의 섬, 제주> 편의 리뷰를 모두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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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참 자세하고 재밋게 리뷰를
작성 허션네요~
제가 미처 얘기하지 못한 부분,
대충 두리뭉실 넘어간 부분까지도
확실하게 자료를 보충하여
디테일을 살리고 잘 마무리해 주셨습니다 ㅎㅎ
어찌 죄인의 유배 처소가 성안에 위치하고 있을까?
사또의 관리범위 안에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유배인들도 모두 성 안에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ㅎㅎ
수고하셨어요~^^
잘 읽었습니다.~~^.* 태훈선생님의 조금은 샤이하면서도 낮은 음성으로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모습이 그대로 떠오르는 글이네요!.ㅎㅎㅎ
선생님~ 지난주 불참으로 어떤 내용이 있었는지 몹시 궁금하였는데 감사합니다. 친절한 글과 사진이 더해지니 추사의 유배지와 기념관을 함께 다녀온 것 같습니다. 추사 김정희의 개인사와 유배지에서 지낸 세월을 자세히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덕분에 디테일한 부분까지 덤으로 복습했습니다.
ㅎㅎ
다시 한번 읽으니 추사 김정희의 생애와 세한도를 볼수 있는 (아슬아슬한 ) 무한한 감사함에 젖어 봅니다
역시 역사에 관심이 깊어 역사교사 자격도 겸하셨다더니 디테일한 사료도 보충해 주셔서 더 배우게 됩니다. 글도 조곤조곤 말하듯 해서 잘 보았습니다. 수고하셨어요^^
감사합니다. 이영권 선생님 글을 저도 언젠가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후기보다 본문에 버금가는 글 작성이 쉽지 않으셨을 텐데 중간 중간 무척 공감하며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