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섬과 조선의 양반들 -연북정, 비석거리, 오현단
- 탐방일 : 23.10. 24
오늘 제7강 탐방지로서 조선시대 제주도에 영향을 끼친 조선의 양반들에 대한 내용으로 연북정, 비석거리, 오현단이다.
1. 조선시대 제주도에 내려온 조선의 양반은 얼마나 될까?
조선은 유교의 나라이다.
그러므로 유학을 공부하고 벼슬을 한 양반이 지방관으로 간다면 당연히 모든 업무는 유학을 이데올로기로 한 조선통치 이념을 기반으로 백성을 지배하고자 목민관으로서 업무를 수행 하였을 것이다. 조선의 지방관 목사, 현령은 지금과 달리 행정업무 뿐 아니라, 사법, 군사업무등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목사, 현령이 파견되었다면, 그 지역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특히 제주섬 백성이 유교를 받아들이고, 생할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뱃길로만 외부인과 접촉할 수 밖에 없어, 제주의 관직으로 내려오는 양반들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교수님은 조선 시대의 양반들중 제주에 내려온 수는 목사 286명, 판관 286명 대정, 정의현감도 숫자 비슷하므로 대략 1,200여명이다.
이들의 관리 임기는 본래 5년인데 그나마 제주는 절반으로 감하여 2년 6개월 이였다. 이들은 제주도로 임명을 좌천으로 인식하였고, 부임하는 길 또한 남도 끝까지 천리길을 이동하고, 또 다시 뱃길로 이어지는 목숨을 건 긴 여정이였다. 최고위직 제주목사는 종3품으로 높은 직위였으나, 부임하고 싶지 않아, 가족, 본인의 병을 핑계로 거절한 사례가 많았다. 그래서 이들은 부임후 선정을 펼치기 보다, 유희, 가렴주구를 일삼는 관리가 많았다고 한다. 참고로 요즘과 비교해 보면 제주의 위상이 확실히 다른 것 같다. 실제로 나도 제주지점 발령받고 선택받은 사람이라고 부러움을 받으며 내려왔다.
그리고 유배오신분 200여명 있었다.
대략 계산해보며 1,500여명의 양반이 제주도로 내려왔으며 짧게는 몇개월에서 2년 6개월 임기동안 체류했으며, 유배로 10년 이상 생활한 양반(오현중 한분 동계 정온선생)도 있었다.
그러면. 조선 500년 역사에서 매년 대략 6~7명의 조선의 유학자이자 오피니언 리더가 제주에서 관직 또는 유배 생활동안 제주도 발전을 위해서 긍정적인 영향을 끼쳐거나 가렴주구를 일삼았을 것이다.
2. 나와 인연이 있는 제주섬 조선 양반
나는 조선의 양반과 제주섬 주제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특별한 인연이 있다.
선조35년(1602년) 제주목사(1602~1604) 동산공 김명윤은 나의 13대조로 할아버지이다.
나의 고향 창원시에는 이분을 모시는 사당과 사액서원인 도봉서원이 있다. 설,추석 명절에는 동산사에서 아버지와 동네 어른들의 자랑스런 설명과 함께 제사를 모셨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주인공을 제주목 관아 역대 목사 현황에서 직접 확인하고는 기분이 묘했다. 그리고, 연북정, 비석거리, 오현단의 역사와 제주 올레길을 완주하면서 마주쳤던 수많은 역사유적지 안내문에 어김없이 나오는 제주목사 아무개의 공과 기록을 보면서, 우리 할아버지는 제주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오현단의 어진 5명 양반처럼 제주발전에 이바지하였을까? 아니면 제주백성의 흑역사 주인공으로 기록이 나올까 걱정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했다.
나는 조선 왕조실록의 한 대목에서 관련기록을 찾았다.
선조실록 선조 36년(1603년)" 제주목사 김명윤 귤맛이 좋지 않음을 아뢰다,"
" 지난 임인년(1603) 11월에 큰눈이 내려는데, 평지에도 깊이가 2자가 넘어 겨울이 지나도록 녹지 않았고 정월이 되어도 겨울처럼 추워 꽁꽁 얼어붙었으니 근고에 없던 일입니다. 과일나무 가지와 잎은 마른 것 같고 과수원의 청귤은 모두 동상하여, 2월에 진상하는 청귤을 간신히 봉진했는데, 말라 맛이 좋지 않으므로 진상품으로 합당치 못하니 지극히 황송합니다.
사관은 논한다. 제주에 내린 눈이 겨울이 지나도 녹지 않았음은 실로 재해인 것이다. 그런데 국가에서는 두려워하고 경계하며 반성한 사람이 있었는가?"
역시, 감귤 진상 장개(문서)에서 보듯이 제주감귤에 대한 조정의 관심으로 당시에도 제주감귤의 인기를 실감하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위 글에서 몇가지 생각할 내용이 있다. 사관도 기록에서 엄중히 논평하였듯이 폭설과 한파로 감귤 농사에 큰 재해가 있었으나, 국가는 이에 대한 대책을 수립하지 않았으며, 제주목사도 흉작인 감귤을 진상하였으며, 과수농가는 엄청난 피해에도 진상품을 내놓아야하는 고통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과거 제주 기후 재난으로 인한 대기근 기록을 여럿 확인할 수 있듯이, 당시에도 천재지변으로 인한 제주 백성들의 삶이 결코 녹록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오현단
오늘 수업의 주제는 조선시대의 양반은 제주섬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을까? 연북정, 비석거리, 오현단중 저는 오현단을 중심으로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1) 오현고등학교
오현단은 몰랐어도 제주의 명문 오현고등학교는 대학 선배의 자랑으로 일찍 알았다. 바로 이곳이 오현고등학교 옛터였다고 한다. 교수님도 오현고 출신이라 모두가 연북정에서 다시 이곳으로 모이는 동안 신나게 학창시절 추억을 말씀해 주셨다.
1946년 오현중학교로 시작한 제주도 최초의 인문계 고등학교였으며, 과거에는 주변에 귤밭이였다. 그래서 귤림서원이였구나!. 오현고등학교에서 많은 제주 인재를 배출하였듯이, 조선시대에는 제주도 대표 인재 배출 사학인 이곳 귤림서원에서 오늘의 주제 오현단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정리하면 흥선대원군때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귤림서원이 철폐되면서 오현단이 생기고, 아울러 장수각을 이어서 학문의 장소 오현고로 이어진 일련의 흐름이 술술 이해되었다.
2) 오현단
제주도 기념물1호로 지정된 오현단은 말 그대로 '다섯명의 어진 사람을 모시는 단'이라는 뜻이 담겼다. 시작은 이러하다. 조선시대에 제주도에는 유학이 널리 퍼지지않고 일반백성들의 배움이 부족하여 예에 어긋난 행동을 많이하는 무식한 사람들이 많았다. 과거에 급제하여 나라에 공헌하는 인재도 부족하였다. 조선시대에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서는 먼저 배움의 공간이 있어야 하는데 공립학교(향교, 성균관) 또는 사립학교인 지방의 서원이었다. 학교를 만들기 위해서는 학문의 대표격인 사(당)에 학자를 모시고 제에 공부할 강학공간을 만들게 되는데, 제주도에 서원을 만들기 위해서 사당에 모실 학자가 필요했는데, 조선시대에 제주도 출신으로 조정에 관직을 받은 학자가 많지 않았다. 그래서 제주도에 관직을 받고 조정에서 파견한 학자나 또는 제주도로 유배 온 학자 에서 서원에 모실 학자 다섯 분을 추대하여 사당에 모시게 되었고, 이것이 귤림서원의 설립배경이 된 것이다. 그러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귤림서원을 없앨 수밖에 없었고, 이에 따라 고종 29년(1892)에 제주 유림들(제주인 김의정등)이 건의하여, 그 동안 서원사당에서 모시어 왔던 다섯분의 위폐를 담아 귤림서원의 옆자리에 단을 모시게 되었으니 이를 오현단이라 이름하게 된 것이다.
3) 오현은 어떤 분들인가?
충암 김정(1486~1520), 청음 김상헌(1570~1652), 동계 정온(1569~1641), 규암 송인수(1487~1547), 우암 송시열(1607~1689)등 5현으로 꼽히는 다섯 사람의 위폐를 상징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오현의 위폐를 상징하는 높이 45cm의 조두석이 있는데 각자 33~35cm 간격으로 배열되어있다.
충암 김정은 조선 중종때 조광조와 함께 사림의 개혁 정치를 추진하다, 훈구 세력에 밀려 제주에 유배되 사사(임금이 독약을 내려 스스로 죽게 하던 일)된 인물이다. 그는 비록 제주에서 1년 가량 살다 숨졌지만 <제주풍토록>등 중요한 문헌을 남겨 우리가 당시 제주를 알 수 있게 하였다.
청음 김상헌은 1601년 안무어사(민심을 달래기 위해 파견된 관리)로 제주에 와서 약 6개월 동안 제주 전역을 돌며 민정을 살폈고, 현대에 중요한 자료로 여겨지는 <남사록>을 펴내기도 했다.
동계 정온은 1614년(광해군 6년) 광해군 집권기에 영창대군의 처형이 잘못임을 상소하다가 추사 김정희처럼 대정현에 유배되어, 젊은 사람과 나이든 사람들의 순서로 정해서 예의를 갖추도록 가르쳤으며, 10년간 귀양살이를 했다.
규암.송인수는 김정과 마찬가지로 중종때의 인물로 제주목사에 임명된 사람이나, 병을 핑계로 부임하지는 않았는데, 이 때문에 뒷날 사천으로 유배되었다.
우암 송시열은 숙종때 인물로 좌의정까지 지냈으며, 서인-노론의 영수, 주자학의 대가로 제주도 110일 유배로 제주의 공적보다는 학문적 위업과 명성으로 오현이 되었으며, 같은 집안의 송인수를 주장하여 모시게 된 것을 보아, 당시 송인수. 송시열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4) 오현단은 정말 제주인의 추앙을 받을 만한 선현들이었을까?
이점에 대해서 교수님도 " 오현으로 지정된 분에 대한 논란이 많으며, 제주를 교화하거나 지도한 것도 아니며, 오현에 대한 이념도 정신도 없고, 공적도 없었다고 평가하지만, 학문적으로 뛰어나고 명성이 높은 분을 모신, 그 시대 그 상황으로 봐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조선의 서원은 본질적으로 교육과 제사의 기능을 가졌다. 하지만, 이러한 역활이 실제로 명분에 그쳤다. 이면을 들여다보면 지방 양반들이 향촌을 지배하고 자기 세력을 넓히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귤림서원도 1667년 (현종 8년 ) 이 맥락 속에서 그 시대 그 상황에서 영향력이 높았든 오현을 배향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4. 귤림서원
귤림서원은 오현중에 한명인 충암 김정을 위로하기 위해서 시묘를 세운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현종때 제주목사 이괴가 장수당을 건립하고 그리고 제주목사 최지남이 김정의 시묘를 장수당 남쪽인 현재 오현단 안에 옮겨 짓고, 이를 사로 하고. 장수당을 재로 하여 귤림서원이라 현액하였다. 이후 귤림서원으로 사액을 하고 김정, 송인수, 김상헌, 정온의 4현을 봉향하다가 숙종때 송시열이 추향됨으로 5현을 배향하게 되었다.
5. 향현사
이 곳에 향현사는 현종(1843)때 제주목사 이원조가 영곡 고득종을 봉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이후 현종(1849) 제주목사 장인식이 명도암 김진용을 향현사로 모셔 병향하였다.
영곡 고득종(1388~1460)선생은 세종때 한성판윤 벼슬을 지냈으며, 기근에 시달리는 제주선인에게 1만석의 양곡과 100석의 소금을 보내게 하여 구휼했으며, 문장과 필법이 뛰어나 남방의 탁관으로 불렸다.
김진용(1605~1663)선생은 진사시에 합격하여 숙녕전 참봉에 천거되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1679년(효종 10) 이괴 목사에게 고득종의 집터인 오현단에 장수당 건립을 건의, 후학들을 가르치니 지역의 풍속과 교화에 큰 변혁을 가져온다. 그래서 훈학하며 살았던 마을의 이름을 그분의 호인 명도암으로 칭하게 되었다.
참고로 "사당에 모시는 기준 임금님의 시호(예, 문무공, 문예공, 충무공등)를 받은 분만 가능하다고 한다.
이후 1871년(고종8) 대원군이 서원 사우 대동철폐령에 의하여 철사된 후 제주유생들이 고득종과 김진용의 덕행과 공적이 후세에 깊이 묻혀 잊어버리지 않기 위하여 오현단내 향현사 유허비를 세우고 제향하였다.
6. 장수당.
장수당은 1660년(현종1) 제주목사 이괴가 진사 김진용의 건의로 세종때 한성판윤을 지낸 고득종의 옛터에 세웠던 10칸의 강당이다. 이괴목사의 장수당기나 대제학 조경의 장수당기에는 목재를 구하고 역부를 고용하는 것까지 일체의 공사를 맡아 장수당을 지은 김진용의 업적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충암사( 김정의 사묘)가 장수당 남쪽으로 옮겨진 이후 명실상부한 귤림서원이 세워지게 되었다.
7. 마무리하며....
오늘 연북정, 조천 비석거리, 오현단을 돌며 조선의 선비들이 제주에 와서 어떤 역활을 했고, 그들이 제주에 어떤 영향을 남겼는지에 대해서 배우며 어느때보다 많은 생각이 들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어릴때 마냥 훌륭한 선대 할아버지로 알고 있었던 분이 제주목사로 2년 봉직하였다고 생각하니 더욱 만감이 교차하였다.
처음 사계 해안의 선사 문화에서 시작하여, 신들의 섬 제주-성산 일출봉, 탐라 개벽신화의 현장을 찾아-삼성혈, 삼별초 대몽항쟁-항파두리, 사람은 서울로 말은 제주로-가시리 갑마장길, 그리고 오늘 제주섬과 조선의 양반들을 주제로 연북정, 비석거리, 오현단까지 제주의 깊고 다양한 역사를 제주도민의 역사관점에서 강의하시는 교수님의 수업을 들으면 "승자의 기록만 역사의 진실일까?" 라고 어느 학자의 질문처럼 재해석한 제주역사를 조금씩 알게 되면서, 마음속 깊이 안타까운 마음이 느껴졌다. 제주도는 과연 삼국, 고려, 조선시대, 그리고 근대 대한민국에 이러기까지 한반도의 역사에서 어떠한 존재였을까? 하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다. 아직 많은 수업이 남았고, 제주 역사를 조금 알고 무엇이라 말하기는 이러지만. 탐라부터 제주도까지 이어지는 제주 역사는 육지세력에 의해서 이어지는 끝없는 수난의 역사일 뿐 아니라, 한반도의 문화 흐름의 마지막 종착지로서 신들의 섬 제주 문화 정체성을 무속으로 본다면, 불교, 유교로 이어지는 큰 문화적 충돌 속에서 살아남고자 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자연환경적인 측면에서도 거칠고 척박한 땅, 이곳 제주에 사는 것은 그 자체로도 모질고 힘든 삶이였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속에서 굳건히 살아온 제주민들의 삶이 더 자랑스럽고 대단하다고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저는 탐방지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을 정리하기보다는 좀 더 비판적인 입장에서 제주섬과 조선의 양반에 대해 정리해보려고 노력하였다. 하지만, 짧은 지식과 필역으로 저도 만족스럽지 못한 부족한 수기를 읽으시느라 힘들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함께 공부하고 의견을 나누면서 제주역사를 새롭게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동료와 좋은 강의로 리더해주시는 김천석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첫댓글 정리가 너무 잘 되있어서 또한번 수업받는 느낌으로^^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자세한 설명, 정리하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제주도의 다양한 역사 문화를 새로운 관점에서 정리하려는 노력과13대조부를 만난 행운에 박수를 보냅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결석한 저에게 정말 유익한 후기네요. 수고 많으셨어요. 감사합니다^^
김 샘에게 딱맞는 후기였네요.
수고하셨습니다.
조상때부터 제주와는 특별한 인연이 있었나봅니다.
역사 문화에 애정과 관심이 많으신것도 다 그런 유전자가 면면이 흐르는데 기인한게 아닌가 싶습니다.
제주를 올바로 이해하려 바라보는 시각들에 고마움을 느낍니다.
수고하셨어요~^^
감사합니다. 좋은 강의가 있어, 새롭게 바라보는 시각을 배우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기대가 됩니다.
우왕!!!~
넘수고핸요.
제주산지60년 된 저도 모른 내용갈켜줘서 땡큐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