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필생즉사 필사즉생
必生卽死 必死卽生
이순신1) 장군의 묘비명은 『난중일기』에 나오는 말로,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면서 이르되, 병법에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만 하면 죽는다고 했으며,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사람이라도 두렵게 한다고 했음은 지금 우리를 두고 한 말이다."에서 비롯되었다. 묘비명에서처럼 죽기를 각오하고 싸움에 임했기에 명량대첩은 세계 해전 역사상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승리의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나라를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장군의 기상은 우리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필생즉사 필사즉생(必生卽死 必死卽生)이 어찌 싸움에만 한정된 말이겠는가.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임진왜란에서 큰 공을 세운 명장. 한산도에서 적선 70여 척을 무찌르는 등 공을 세워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노량해전에서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시문(詩文)에도 능하여 『난중일기』와 시조·한시 등 여러 편의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묘소는 아산시 어라산(於羅山)에 있으며, 왕이 직접 지은 비문과 충신문(忠臣門)이 건립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슬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사라지는 게
인생인가보다!
살아온 한 세상이
봄날의 꿈만 같구나!
일본 역사상 가장 출세한 인물로 손꼽히는 히데요시1)는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함께 리더십의 전형으로 현대 일본 사회에서 거론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왜란의 주범으로 평가받지만, 일본에서는 가장 일본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처세와 지략, 당당한 자신감으로 일본의 자본주의 정신을 확립했다. 대단한 야심가였던 그도 죽음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것도 중국 대륙 정복을 목표로 시작한 조선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후 그동안 자신이 쌓아 올린 모든 것들이 허망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자신의 거대한 업적도 한낱 이슬에 지나지 않게 하는 죽음 앞에서는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 일본의 무장·정치가.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잇는 무장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죽자 원수를 갚는 동시에 일본 통일을 이룩했다. 중국 대륙 침략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하여 우리나라를 공격하여, 임진왜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정유재란 중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않고 후시미성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1856~1950)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소설가로서 실패한 버나드 쇼1)는 사회주의자, 연설가, 논객, 극작가 등을 통해 자아를 찾았다. 그는 허위와 위선으로 가득 찬 빅토리아 시대의 무대를 생동감 있게 변화시키는 희곡을 쓰면서 극작가로 성공하게 된다. 버나드 쇼는 성공의 순간에 만족하지 않고 활동을 멈추지 않았는데 94세까지 살면서 유머와 풍자, 위트를 잊지 않았으며, 사상가로서 자기 위치를 더욱 견고히 했다. 그가 남긴 묘비명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울리는 경종과도 같다. 묘비명의 원문은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이다.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1856~1950)
아일랜드 출신의 영국 극작가 겸 소설가이자 비평가. 사회주의 선전문학가. 온건좌파 단체인 '페이비언협회'를 설립했다. 생명 철학에 기초한 작품 『인간과 초인』으로 세계적인 극작가로 발돋움했으며, 1925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17세기 이후 영국의 중요한 극작가로서 당시 뛰어난 희극작가 이상의 역할을 했다. 걸작으로 꼽히는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 『인간과 초인』, 『피그말리온』 등 다수의 작품이 있다.
노스트라다무스(nostradamus, 1503~1566)
후세 사람들이여,
그의 휴식을
방해하지 마시오
노스트라다무스1)가 죽은 지 400여 년이 지난 현재에도 세계를 흔들 만한 굵직한 사건이 생기면 여지없이 그의 예언서로 해석하는 호사가들이 줄을 잇는다. 때때로 세계의 종말을 예고하는 데에도 그의 예언서의 해석이 등장하곤 한다. 이렇듯 노스트라다무스가 남긴 예언서의 파급력은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그래서 묘비명 "He lived for 62years, six months and ten days, he died at salon in 1566. Do not be jealous of his rest, o you who shall follow in his footsteps."에서는 그의 예언으로 그를 괴롭히지 말라는 말을 남겼는지도 모른다.
노스트라다무스(nostradamus, 1503~1566)
르네상스기 프랑스의 의사·철학자·점성가. 어릴 때부터 유태의 신비로운 문학의 영향을 깊이 받았고, 신플라톤주의 사상과 은비사상을 접했다. 현대의 추종자들은 그를 예언자로 보고 있다. 그의 저서는 신비성 때문에 로마 가톨릭교회에 의해 금서가 되었다. 노스트라다무스가 집필한 『모든 세기』라는 예언서에는 총 1200여 편의 예언시가 실려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현재 약 1천 편이 남아 있다.
이소룡(Bruce Lee, 1940~1973)
브루스 리,
절권도의 창시자
이소룡은 "물에서 배워야 한다. 물은 담기는 그릇에 따라서 그 모양이 변한다. 상대에 따라서 그때 그때 바뀌어야 한다. 고정된 동작이나 자세는 죽은 자세다. 물에서 배워라. 물이 되어라. 이것이 절권도의 긴요한 뜻이다."라고 무술의 요점을 말했다. 그는 유명한 영화배우였지만 절권도라는 무술의 창시자로 많은 사람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또한 이소룡은 자기 극복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독서광이자 철학자였다는 사실은 그의 어록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기존의 질서가 아닌 자신에게 집중하라는 것이 그의 철학이었다.
이소룡(Bruce Lee, 1940~1973)
미국의 영화배우. 본명은 이진번. 1971년 영화 〈당산대형〉에 출연하여 크게 인기를 얻었다. 이후 〈정무문〉, 〈용쟁호투〉, 〈맹룡과강〉 등의 영화에 출연했다. 절권도를 창시하여 탁월한 격투가로 인정받았다. 다른 유파의 무술을 배척하지 않고 그 장점을 십분 발휘하여 자신의 기술로 만들었다
이상(李箱, 1910~1937)
일세의 귀재 이상은
그 통생의 대작 종생기
일편을 남기고
서력 기원후 1937년
정축 3월 3일 미시,
여기 백일 아래서
그 파란만장의 생애를 끝맺고
문득 졸하다
'모던 보이'로 일컬어지는 천재작가 이상1)은 그의 작품만큼이나 난해한 삶을 살았다. 작품이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파격적인 내용과 실험적인 글쓰기는 독자들에게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현실에 안주하거나 적응하려고 하지 않았다. 특히 소설 '날개'에서는 이상이라는 인물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다. 비상을 꿈꾸는 것이야말로 당시 어려운 시대에서 해방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자유와 해방을 꿈꾸는 젊은이들의 비상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종생기'에 묘비명을 써놓았다. 과연 그답다.
이상(李箱, 1910~1937)
본명은 김해경(金海卿). 보성고보를 거쳐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졸업한 후, 총독부 건축과에서 일했다. 1930년 『조선』에 '12월 12일'을 발표하면서 데뷔했고, 이후 「지주회시」, 「날개」, 「봉별기」, 「실화」, 「종생기」 등의 소설과 「이상한 가역반응」, 「거울」, 「오감도」 등의 시와 「권태」, 「산촌여정」 등의 수필을 발표했다. 구인회로 활동했으며 대표적 모더니즘 작가이다. 1937년 폐결핵으로 작고했다.
마타하리(Mata Hari, 1876~1917)
마르가레테
게르투르드 젤러
지금도 마타하리1)는 세기의 스파이로 불린다. 프랑스 정보기관에 체포된 그녀는 "마타하리가 빼낸 군사 기밀은 연합군 병사 5만 명을 죽일 수 있는 가치가 있다."는 재판관의 말과 함께 사형을 언도받고 결국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녀가 스파이였는지 여부에 대해 아직도 의견이 분분한데 여성이었기에 희생양이 되었다는 분석도 있다. 마티하리가 살아 있을 무렵 프랑스 여성들은 정치적 발언권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살아서는 매혹적인 여자 스파이였지만 죽어서야 본명을 찾았다.
마타하리(Mata Hari, 1876~1917)
본명은 마르가레테 게르투르드 젤러(Margaretha Geertruida Zelle)이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프랑스 사이를 오가며 스파이로 활동했다. 마타하리는 말레이어로 '새벽의 눈동자'라는 뜻으로, 그녀 이후 이 이름은 매혹적 여성 스파이의 대명사로 불린다. 1917년 보스를 만나기 위해 다시 프랑스로 들어왔을 때 반역죄로 체포되었으며 그해 7월 사형을 선고받고 10월 15일 총살당했다.
김옥균(金玉均, 1851~1894)
비상한 세대에
비상한 인물이
비상한 재주를 갖고 태어났으나
끝내 비상한 공을
이루지 못했다
조선 후기 개혁의 대명사로 알려졌던 김옥균1)은 여러 개혁 정책을 내세워 조선을 강한 나라로 만들고 싶은 꿈이 있었다. 그는 조선이 근대화되어야 자주국가를 이룩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개혁을 주장하였다. 그 개혁의 꿈은 갑신정변으로 표출되었으나 실패하고, 결국 김옥균 등 개화당의 집권은 삼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뛰어난 능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시대를 잘못 만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대는 한 사람의 천재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의 천재가 시대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천재인 것이다. 조선이라는 사회를 움직이기 위해서 백성의 마음을 먼저 움직여야 하지 않았을까.
김옥균(金玉均, 1851~1894)
조선 후기의 정치가. 조선의 근대 부르주아 혁명이라 일컬을 수 있는 갑신정변을 주도했고, 우리나라의 개화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다. 중국 상하이에서 자객 홍종우(洪鍾宇)에게 살해되었다. 저서에 『기화근사(箕和近事)』, 『치도약론(治道略論)』, 『갑신일록(甲申日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