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흙이 된 일본인 ‘다쿠미’ 광복 60주년을 맞은 지금 우리는 아직도 일본 사람들을 미워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그들을 질타하고 있지만, 일본의 통치하에 서슬이 시퍼렇던 그때 잔인하고 포악한 일본 사람들 중에 우리의 공예문화가 좋아서 한국인을 사랑하고 한국인처럼 살다가 한국의 땅에 묻힌 이 사람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 : 1891.1-1931.4)를 한국의 공예인들, 특히 도자기를 사랑하는 도예인들이 한번쯤 가슴에 떠 올려 보았으면 하는 생각에서 이 글을 쓴다.
아사카와 다쿠미는 일제시대 때에 조선총독부 산하 임업시험소 용원으로 근무를 하면서 조선의 민예와 도자기를 무척이나 사랑했던 사람이다. 특히 그는 공예를 자기의 분신처럼 사랑하고 일생을 공예와 함께 하면서 공예이론을 정립하여 공예인들에게 공예의 길을 열어주었으며 조선인과 조선의 공예를 조선 사람들 보다 더 사랑하여 조선공예의 위상을 높여 준 사람으로 일본에서는 일본공예의 아버지라 불리며 동양에서 유일한 공예이론의 대가로 알려진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를 공예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데 결정적인 동기부여를 하여 주었던 장본인이다. 다쿠미는 야나기 보다 2살 연하였다.
조선의 선의 미술에 매혹이 되어 조선에 왔으며 조선에 와서는 조선의 도자기에 반해서 조선의 도자기를 수집하고 가마터를 발굴하면서 탐구에 열중하여 ‘조선도자기의 귀신’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손꼽히는 도자기 전문가로 명성을 얻었던 아사카와 노리다카(1884-1964)의 친 동생이다. 그는 형 노리다카보다 7년 후인 1891년 1월 15일에 야마나시현 기타코마군(현재:후쿠토시) 가부토무라(현재:다카네쵸) 고초다 294번지에서 아버지 ‘아사카와 조사쿠’와 어머니 ‘게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890년 7월 15일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 태어난 그는 사실상 유복자였다. 그는 아버지가 안 계신 대신 아주 엄하고 성실한, 여장부 같이 강한 홀어머니 슬하에서 강인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다쿠미는 또한 할아버지인 오비 시토모의 손에 의해서 키워졌으며 특히 할아버지를 많이 닮았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재능이 뛰어나 렌카(두 사람 이상이 일본 고유 형식의 시를 번갈아 읽어나가는 형식의 노래)에 능하셨으며 책 읽기를 좋아하시고 귀천을 가리지 않고 온정으로 마을 사람들을 인도하셔서 마을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심지어 할아버지는 사례금을 받고도 봉투 뜯어보는 일을 아주 싫어하셨다고 하는데 이런 할아버지의 성격을 다쿠미가 가장 많이 물려받았다고 한다. 다쿠미는 이런 할아버지에 대하여 1928년 시비가 세워진 뒤 1928년에 쓴 그의 저서 <조선의 소반>에 다음과 같은 헌사를 서두에 실었다.
경애하는 할아버님, 태어났을 때 이미 아버지를 여윈 저는 당신의 자애와 감화를 많이 받았습니다. 청빈한 생활에 만족하고, 일하기를 좋아하셨으며, 온정으로 마을사람들을 인도하시고, 마을일을 공평무사하게 처리하신 그 생애를 추모하게 되니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금년 여름(1928년 5월) 온 마을 사람들이 다같이 고장의 수호신을 모신 숲(아쓰다 신사)에 할아버지의 송덕비(사실은 시비였음)를 세웠다고 들었습니다만, 멀리 고향을 떠나온 지 어언 20년, 성묘조차 마음대로 못하는 몸, 어찌할 도리가 없어 이 보잘것없는 책을 제물대신 올립니다.
다쿠미의 외할아버지도 천성이 온후하였고 학문을 닦아 지역민을 위해 국학과 한학의 지도에 힘쓰셨으며 종교를 믿는 분이었다. 이러한 자질이 의지가 굳세고 독립심이 강하며 남을 보살펴주기를 즐겨하신 어머니를 통하여 다쿠미에게로 이어진 것 같다. 특히 어머니는 아주 성실하고 엄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일을 잘 돌봐주었다고 한다. 교회에 다니면서 경로회를 만들고 노인들을 집에 초대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잘 보살펴 주셨다. 그래서 그의 집에는 항상 다른 사람들이 와 있었으며 가족들만 식사하는 일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다쿠미는 이렇게 성실하고 봉사정신이 강한 집안의 가풍을 그대로 이어 받아 낙천적인 인도주의자였다. 또한 다쿠미의 생애에 그의 형 노리다카도 큰 영향을 끼쳤다. 다쿠미는 노리다카에 인도되어 고우후 교회에 나가게 되었고 1907년 6월 16일 하타노시로 목사로부터 세례도 받았다. 교회활동에서 아사카와 형제는 민예, 도자기, 회화에 조예가 깊은 고미야마 세이조(小官山 淸三)를 만남으로써 공예 쪽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다쿠미의 형 노리다카는 고미야마와의 친교로 인하여 조선에 건너가 된 계기를 얻게 되었다..
다쿠미는 1897년 4월에 무라야마니시 심상소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01년 아키다 심상고등소학교에 입학하였다. 고등소학교를 졸업하고 1년간의 보수과를 거쳐 1906년 야마나시 현립농림학교에 입학하였다. 어릴 때부터 나무를 좋아했던 다쿠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고 매우 낭만적인 사람이었다. 1909년 3월 농림학교를 2등으로 졸업하고 아키다현 오타테의 영림서에서 근무를 시작하였다. 그는 늘 조선으로 건너간 형 노리다카를 그리워하다 조선에 가기로 결심하기에 이른다.
결국 그는 1914년(24세) 5월 11일 고향 야마나시를 뒤로하고 조선으로 건너가 5월 17일 경성 독립문통의 3의 6에서 조선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조선에 건너온 그는 조선총독부 농상공부 산림과 산하 임업시험소의 용원으로 자리를 잡고 조선에서 생산되는 주요 수목과 외국에서 도입된 수종들을 재배하며 묘목 기르기에 관한 실험과 조사 등에 종사하였다. 다쿠미의 임무는 양묘였으므로, 종자를 채집하기 위해 조선 각지를 돌아다니게 되어 조선 사람들과 많은 접촉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식민지 조선을 깊이 이해하고 생생한 인식을 갖게 되었다. 다쿠미는 형인 노리다카와 함께 경성(지금의 서울) 아현리(아현동)에 살면서 형 노리다카의 조선도자기에 대한 남다른 관심에 공감하여 도자기를 좋아하였으며, 형과 함께 도자기를 찾아 조선의 산야를 헤매다니 다가 조선의 도자기는 물론 조선의 민예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깊이 연구하게 되었다.
다쿠미는 농림학교 시절에 동창생인 아사카와 마사토시의 누나인 아사카와 미쓰에와 1916년 2월 7일 결혼을 하였다. 1917년 3월 9일에는 장녀 소노에를 낳았다. 1921년 9월 29일 그의 아내가 서른 살의 나이로 병에 걸려 세상을 뜨게 되자 1925년 10월 20일 오키타 사키코와 재혼을 하였다. 다쿠미의 재혼은 거의 야나기의 주도하여 치르게 되었으며, 결혼식도 야나기의 집에서 거행되었다. 다쿠미는 사키코와 전처소생의 딸 소노에 이렇게 셋이서 경성에서 살았다. 다쿠미는 한복을 즐겨 입었으며 조선의 물품을 조선사람 보다 더 애용하였고 우리말을 할 줄 알았다.(당시 조선에 있던 일본인들은 거의 조선말을 배우지 않았음)
다쿠미의 집은 온돌방이었고 방안에는 조선 장롱을 두고 살았다. 야나기무네요시의 아내 야나기 가네코가 “그분은 정말 조선 사람이었어요.”라고 할 만큼 조선 통 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조선 사람으로 오해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매우 가정적이어서 여행지에서도 아내에게 자주 편지를 보내고 딸 소노에 에게도 애정 어린 편지를 보내곤 하였다. 그는 아이들을 귀여워해서 시내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과자 같은 것을 사 가지고 와서는 근처에 사는 조선 아이들에게도 나눠 주곤 하였다.
조선으로 건너와 3년째 살던 중 1916년 8월 처음으로 조선에 건너온 야나기 무네요시를 그의 형인 노리다카로부터 소개를 받고 바로 친해져서 두 주일동안 함께 골동품가게를 뒤지면서 다쿠미의 집에서 체류하기도 하였다. 이때 야나기는 다쿠미가 모아놓은 조선의 민예품에 매혹되었다. 이렇게 야나기가 다쿠미의 집을 방문한 뒤부터 조선의 민중적 공예품의 아름다움에 반해서 공예에 크게 눈을 뜨기 시작하게 됨으로써 다쿠미는 야나기가 공예와 인연을 맺도록 동기를 부여한 장본인이다.
이들 형제를 만난 야나기는 이미 조선의 공예품 수집을 시작하고 있던 아사카와 형제와 좋은 파트너가 되었으며, 특히 다쿠미는 야나기의 조선예술품 수집활동에서 최고의 안내자 역할을 하였다. 실제 야나기 본인도 내가 조선의 것을 알게 된 기회가 생긴 것은 무엇보다도 다쿠미 형제를 알고 나서부터였다고 후일에 회상하였다.
1920년 야나기가 ‘조선민족미술관’ 설립을 결심하게 만든 사람도 다쿠미였으며, 그리고 실제 미술관을 만드는 데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그해 초겨울 다쿠미가 아비코에 있는 야나기의 자택으로 야나기를 방문했을 때 두 사람사이에 미술관 설립에 대한 의견이 일치하여 조선민족미술관의 건립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미술관 건립을 위하여 두 사람은 기금마련에 온 힘을 쏟았다.
야나기는 아내 가네코의 음악회 수익금 전부를, 다쿠미는 지갑을 다 털어 부었다. 심지어 다쿠미는 어머니가 사키코 양과 결혼할 때 양복을 새로 사 입으라고 돈을 주었는데 나중에 어머니께서 “양복은 샀니?”하고 물으니, “모두 골동품이 되었어요.”라고 대답하였을 정도로 미술관에 들어갈 민예품들을 사들이는 등 그 일에 열정을 다 쏟았다. 이때의 다쿠미의 열정에 대한 이야기를 다쿠미의 저서 <조선의 소반>의 발문에서 야나기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
자네의 이해와 애정과 노력이 없었더라면 아무것도 이루어 내지 못했을 걸세. 나는 일본에 있었기 때문에 귀찮은 일은 자네가 다 도맡아 주었지. 장차 여기 수집된 그런 공예품들을 보고 누군가 기뻐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무엇보다도 자네의 노력에 감사할 것이네. 어떤 물건은 고물상의 컴컴한 구석에있다가 자네의 눈에 띄기도 했지. 또 어떤 것은 산속 민가에서부터 자네 등에 업히어 멀리 운반되어 온 것이고, 어떤 것은 생활비까지 털어 사들이기도 했지. 말하자면 자네가 이 물건들을 새로 탄생시킨 셈이네.
그 결과 1924년 4월 9일 경북궁안의 집경당에 ‘조선민족미술관’이 정식으로 개관하기에 이른다. 미술관을 개관한 후 1925년 4월에는 모쿠지키 불상 사진전을, 1927년 10월에는 조선의 미술공예품을, 1928년 7월에는 조선시대 도자전을 개최하는 등 매년 봄가을에 한 차례씩 전시회를 개최하였다. 이렇게 일본인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조선민족미술관’은 태평양전쟁 중에 집경당에서 근정전 복도 한쪽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1945년 일본의 패전을 맞아 일부가 훼손되어 다시 민족박물관에 보관되다가 지금은 한국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져 보관되어 왔다.
다쿠미가 사십년을 살면서 이룬 업적가운데 또 하나는 조선민예에 대한 연구인데, 그것은 바로 세상에 많이 알려져 훌륭한 저서로 높이 평가 받고 있는 1929년에 쓴 <조선의 소반>과 1931년에 쓴 <조선도자명고> 이다. 이밖에도 다쿠미가 남긴 글로는 1922년 <시라카바> 9월호에 게재된‘가마터를 순례하던 어느 하루’ 1925년 <아틀리에> 4월호와 5월호 연재한 ‘가마터 순례 여행을 끝내고’ 1927년 <대조화> 12월에 실린 ‘분원요적고’ 1930년 <제국공예> 2월호에 발표된 ‘조선의 선반과 장롱류에 대하여’ 1931년 다쿠미가 죽은 뒤 <공예> 5월호에 실린 ‘조선다완’과 7월에 게재된 ‘조선요업진흥에 관한 의견’ 그리고 1934년 <공예> 4월호에 발표된 ‘김해’등 7편의 글이 남아 있다.
다쿠미는 <조선의 소반>에서 “올바른 공예품은 친절한 사용자의 손에서 차츰 그 특유의 아름다움을 발휘하는 것임으로 어떤 의미에서 사용자는 완성자라고도 할 수 있다.”라고 자신의 공예관을 피력하였다. 이 말은 공예는 인간과 생활에서 함께 함으로써 더욱 아름다운 미를 갖게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는 “조선의 소반은 순박하고 단정한 자태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우리 일상생활에 친숙하게 봉사하고 세월과 더불어 우아한 멋을 더해 가므로 올바른 공예의 표본이라 해야 할 것이다”라고 소반에 대한 의미를 강조하였다. 특히 다쿠미의 유작인 <조선도자명고>에서는 기물의 종류에 따른 명칭, 도자기를 만드는 도구와 원료 그리고 가마터의 조사 등을 세밀하게 수록한 교과서 같은 책으로 매우 소중한 문헌이 되고 있다. 야나기는 <조선도자명고> 서문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어떤 지은이나 많건 적건 간에 앞선 사람이 지은 저서의 도움을 받는다. 그렇지만 이 저술만큼 지은이 스스로 기획해서 만들어내는 예는 드물 것이다. 아직 아무도 생각해 내지 못했고 시도하지도 않았으며, 앞으로도 아마 해낼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도자기를 만든 나라사람인 조선 사람들에게서도 기대하기 힘든 저술이다. 왜냐하면 젊은 사람은 옛 그릇을 모르고 , 나이든 사람은 그릇을 아끼는 습관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 어떤 일본인에게도 이와 같은 책을 기대하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책의 지은이를 제외하고는 그 어디에서도 조선의 도기에 대한 사랑과 이해, 지식과 경험 그리고 어학까지 골고루 겸비한 사람을 찾을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아사카와에게 걸 맞는 일이며 또 가장 아사카와다운 일이다.
다쿠미가 1914년 5월 24살의 나이로 조선에 와서 살다가 1931년 4월 2일 오후 5시 37분 급성폐렴으로 겨우 41살의 젊은 나이로 조선 땅에서 숨을 거둠으로써 17년간의 조선생활에 못다 한 일이 많음을 야나기는 이렇게 아쉬워하였다.
“다쿠미가 좀더 오래 살았더라면 많은 책을 썼을 것이다. 가까이는 ‘조선종이의 연구’ ‘조선의 멍석’ ‘ 은상감’ 등의 제목을 단 책들을 써주기로 되어있었다. 그리고 조선 옛 가마터에 대한 조사는 그의 형 노리다카의 노력과 더불어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을 터인데 지금은 이곳저곳에서 모아진 수많은 도편들과 메모에서 그 노력의 흔적을 엿볼 수 있을 따름이다.”
라고 그의 죽음을 무척 애석해 하였다.
다쿠미의 조선에서의 산 삶은 지극히 평범하였다. 이 땅을 도륙하는 높은 지위의 관료도 아니고 한국인이 벌벌 떠는 순사도 아니었다. 조선 총독부 산림과 용원, 조선임업시험소의 평 직원으로 17년간 일했을 뿐이다. 그런 그에게 어떻게 하여 그토록 아름다운 찬사가 내려졌을까? '조선도자의 귀신’이란 평을 들은 형 노리다카를 통해 조선 민예에 빠져 든 그는 수입을 쪼개 조선팔도의 도자기와 소반을 틈틈이 수집했다. 우리의 소반과 장롱을 닦고 어루만지던 그는 민예품에서 고아하고 견고하며 지극히 편리한 미를 발견하였던 것이다.
다쿠미가 죽은 다음날 많은 사람들이 소식을 듣고 달려왔는데, 특히 다쿠미의 죽음을 슬퍼하는 조선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모여 들었다고 한다. 누워있는 그의 시신을 보고 통곡하는 조선인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고 하였다. 다쿠미의 유해에 흰 조선 옷을 입혀 관속에 넣어 운구할 때에 이문리 마을 사람 중 평소에 다쿠미를 따르던 사람들이 서른 명이나 관을 메겠다고 나섰는데 그중에서 열 사람만 메게 했다고 한다. 그의 장례식 날은 청량리 일대의 교통이 마비될 정도였다.
이처럼 다쿠미는 한국인을 진심으로 정을 주며 사랑하고 그야말로 인간의 가치를 지니고 사람의 냄새를 물씬 풍긴, 한국인에게 진한 휴머니티를 남긴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이 어느 명사 못지않게 무척 많았든 것 같다. 1927년 무렵부터 다쿠미와 알게 되어 다쿠미가 죽을 때 까지 3년 넘게 가까이 지낸 경성제국대학 교수인 아베 요시게는 ‘아사카와 다쿠미를 애도한다’는 추도문을 썼는데, 이글은 경성일보에 5회에 걸쳐 연재되었다. 아베는 다쿠미의 죽음을 ‘인류의 손실이다’라고 쓰고 이렇게 적었다.
다쿠미씨의 자유로운 품격은 욕심을 부리지 않는 데서 말미암은 것이다. 다쿠미는 생전에 농담처럼 ‘나는 신에게 “돈을 모으지 않겠습니다.”라고 맹세 했다’는 말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농담 속에 다쿠미씨의 진면목이 있다. 다쿠미 씨의 생애가 이 말을 뒷받침해 주었음을 생각하면, 그것이 결코 단순한 허영심이나 겉치레가 아님을 알게 된다. 내가 생각하기로 다쿠미 씨는 아마 거기서 일종의 종교적인 위안을 얻으며 현실에 대처하였기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중략)
다쿠미의 동료인 조선사람 김이만(한국 임업시험장 고문-1985년 별세))씨도 1979년에 다쿠미 씨에 대해 이렇게 회고하였다.
아사카와 씨는 한국말이 아주 유창했으며 항상 한국말로 이야기 했다. 삼촌 사촌 같은 한국의 친척관계 촌수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한국인 동료에 대해 차별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고, 일본인 동료로부터 ‘당신은 한국인이냐’는 욕도 먹고 구박도 받을 만큼 한국인을 사랑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한복을 즐겨 입었고 저녁때는 바지저고리 차림에 나막신을 신고 집에 돌아갔다. 긴 담뱃대를 물고 중국 모자를 쓰고 새끼로 짠 꼴망태를 등에 메고 시장에 가서 한국의 골동품이며 도자기들을 사 모았다. 그리고 괴상한 모습 때문에 일본인 경관의 조사를 받은 적도 여러 번 있었다고 한다. 아사카와 씨는 임업시험장 안에 살면서 평소 한국인에게 친절하고 한국인들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정월이나 연말에는 많은 한국인 동료들이 그의 집으로 놀러갔다. 자기는 굶는 한이 있어도 어려운 사람은 도와주었고, 한국인 학생 몇 사람에게는 장학금을 주고 있었다. 대상은 주로 국민학교 학생들이었고 중학생도 두엇 있었다고 생각되는데, 대게 임업시험장 직원의 자녀들이었다. 아사카와 씨는 평소에 자기는 굶더라도 자기보다 가나한 한국인 동료나 노동자들을 도왔기 때문에, 별세했을 때 장례비조차 없었다. 또 ‘나는 죽어도 한국에 있을 것이오. 한국식으로 장사를 지내 주시오’라고 유언했다.(중략)
다쿠미의 장례를 끝내고 조선해협을 건너 일본으로 돌아가던 야나기는 배안에서 <공예>잡지에 실을 원고에 ‘다쿠미군은 내가 가장 애모하는 벗 중에 하나다. 사귄지 벌써 15년이나 된다. 평소 그렇게 건강하던 그 몸에 갑자기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두고두고 애석하게 생각한다.’라고 쓰고 일본에 도착한 뒤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아사카와가 죽었다.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이다. 그렇게도 속속들이 조선을 알고 있었던 사람을 나는 달리 알지 못한다. 그는 정말로 조선을 사랑하고 조선 사람을 사랑했다. 그리고 조선 사람들에게서 정말 사랑을 받았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조선인들이 보여준 뜨거운 정을 어디에도 비길 수 없었다. 자진해서 나선 조선인들이 상여를 메고 조선 공동묘지에 그를 묻어 주었다. 나와는 오래 사귀어 온 벗이다. 그가 없었더라면 조선에 대해 내가 한 일의 절반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조선민족미술관은 그 노력에 힘입은 바 크다. 그곳에 소장된 많은 물건은 그가 수집한 것들 이었다. 그가 좀더 오래 살았더라면 훌륭한 일을 많이 했을 것이다. 그 사람만큼 조선의 공예 전반에 걸쳐 실제적인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들이 서로 계획한 일도 많았다. 그 반밖에 이루지 못하고 죽음으로 헤어지다니 애석하기 짝이 없다. 그가 없는 조선은 가도 찾아갈 곳이 없는 듯이 느껴진다. 그러고 보면 내가 자주 드나든 까닭도 절반은 그가 거기 있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나는 그를 특히 인간으로서 존경했다. 나는 그 사람만큼 도덕적으로 성실한 이를 달리 알지 못한다. 그는 명석한 두뇌와 따뜻한 눈을 지닌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초월해서 나를 매혹시킨 것은 그 성실한 영혼이었다. 그 사람만큼 사심이 없는 사람은 드물다. 그 사람만큼 자기를 버릴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그리 많지 않다. 그의 도움으로 공부한 조선인들이 적지 않다. 나는 그가 하는 일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배웠던가. 나는 그가 내 벗이었음을 명예롭게 생각한다. (중략)
동경 대학교의 하루키 교수는 ‘땅에 몸을 붙이고 어두운 밤에도 제 몸에서 빛을 내어 주위를 밝게 하는 그런 사람’이라 평하였다. 그리고 조선 근대사를 연구한 쓰다주쿠 대학의 다카사키 소지 교수 (‘조선의 흙이 된 일본인’ 저자)는 다음과 같이 다쿠미를 회고하였다.
미처 우리가 우리 전통미를 발견하지 못했을 때, 그것을 남 먼저 알고, 느끼고, 또 몸과 마음으로 그 미와 하나가 된 인물이다. 그는 우리의 민예에서 받은 미적 충격을 「조선도자명고(朝鮮陶磁名考)」․ 「조선의 소반」이란 연구 자료로 펴내어 도자 연구의 길잡이 노릇을 하였다. 그것은 전국의 흩어진 가마터를 두 발로 뒤지고 다님으로 얻은 결과로, 「조선도자명고」에서는 한국 사람도 모르는 그릇 본래의 이름과 쓰임새를 자세히 정리한 책이다. 연구 논문이 나오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다쿠미의 안목을 극찬했다. ‘조선 민예의 아름다움에 눈이 활짝 뜨게 되었다.’ 그는 영원히 한국인이고 싶어 죽어서도 한복을 벗지 못한 것이었을까? 이문동에 있었던 묘를 1942년 망우리로 이장하기 위해 묘를 팠을 때다. 그는 단정한 조선옷을 입고 동그란 로이드 안경을 낀 묻힐 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일제의 탄압이 극에 달했던 시절, 조선 사람까지도 일본인의 앞잡이가 되어 조선 사람을 핍박하고 대지주를 농락하면서 농민을 수탈하여 부를 쌓고, 조선인을 인간이하의 쓰레기처럼 생각하고 멸시하며 학대하던 악명 높은 일본인들 틈에서 다쿠미는 할아버지 오비 시토모나 형으로부터 이어받은 정신으로 본연의 임무인 조선의 녹화에 종사하면서 야나기 무네요시와 함께 조선민족미술관을 설립하고, 조선의 민예품을 연구하고, 직장이나 동네의 조선 사람들과 사귀면서 인간애를 보여주고, 이 땅의 문화와 자연을 사랑하다 41살의 젊은 나이에 이 땅에서 죽고 이 땅에 묻혀 한줌의 한국 흙이 되었다.
그의 생애는 한마디로 ‘아름다운 삶’이었다고 밖에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을 것 같다. 아름다운 그의 생애를 기리며 광복 60주년을 맞는 지금까지 그의 묘가 한국인의 이름으로 지켜지고 있음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마침 다쿠미의 성실한 인간성에 매혹되어 소중한 증언과 자료들을 정리하여 썼다는 일본인 다카사키 소지(高崎宗司)가 지은 저서(이대원 옮김) [조선의 흙이 된 일본인] 이라는 책을 읽고 필자도 이에 감동하여 여러 동료와 공예인들에게 전하고자 이렇게 몇 자 간추려 보게 된 것도 나에게는 더 없는 기쁨이다.
현재 다쿠미의 묘소는 1931년 4월 그의 유언대로 한줌 한국의 흙이 되고자 그가 살던 이문리 마을 뒤에 묻혔다가 죽은 지 11년이 지난 1942년 묘지근처에 도로가 새로 뚫리게 되어 망우리 공동묘지로 이장하여 묻혔다. 해방 후 훼손 된 그의 묘를 1964년 6월 20일 지장동료인 ‘한국임업시험장’ 직원들이 다시 복원하여 수복제를 올리고 그해 8월 25일 한글 묘비를 세웠다. 그리고 2년 뒤 1966년 6월에는 그의 공덕비가 세워졌다. 그의 묘비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다.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
아사카와 다쿠미의 생애를 기리고 추모하는 기념활동이 여기저기서 추진되고 있다. 다쿠미의 고향 다카네정(‘후쿠토시’로 통합)에는 아사카와 형제를 기리는 자료관이 설립되어 운영되고 있다. 2001년 4월 2일 다쿠미의 70주기 추도식이 한국전통문화교류협회에 의하여 개최되었는데 이때에 주한일본 대사관의 데라다 데루스케 대사의 추도사가 낭독되었으며 여기에는 다쿠미의 고향인 다카네정의 정장과 관계자들이 참석하였다. 이후 경기도 포천시에서는 다카네정과 자매결연을 맺고 다쿠미를 기념하는 공원을 국립수목원 인근에 만들고자 추진 중에 있다.
그리고 다쿠미에 대한 유명한 저서 하나가 또 있는데, 1994년 에미야 다카유키(江宮隆之)가 그 시대에 이런 일본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한일 양국민이 한 사람이라도 더 알게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썼다는 다쿠미의 일생을 그린 전기소설 [백자의 사람](‘백자의 나라에 살다’로 출간/ 박종균 번역/ 고려서적)이란 책이 있다. 그런데 최근 재일동포 이춘호(54ㆍ일본 나가노현 마쓰모토시 거주)씨가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하여 다쿠미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제작하려고 영화화를 추진하고 있다. 이춘호씨는 “조선백자의 아름다움을 처음 알린 선구자였음에도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으며, 조선인과 조선 문화를 사랑하고 자신의 뼈까지 한국 땅에 묻은 또 한명의 조선인을 기념하고 싶었다."고 영화제작을 결정한 배경을 말한다.
최근의 관련행사로는 2005년 6월 11-12일 장충동 국립극장의 해오름극장에서는 한국의 사물놀이를 대표하는 김덕수씨와 일본 최고의 북연주자인 하야시 에데스(林英哲)씨가 다쿠미를 추도하는 공연을 가졌는데, 이때 그들은 ‘아사카와 다쿠미는 한반도와 일본사이에 흐르는 수로에 아무도 모르게 피어난 연꽃과 같은 사람’이라는 뜻에서 ‘수로의 연꽃’이라는 제목의 북연주로 다쿠미의 영혼을 깨워 젊은 그의 주검을 달래주었다.
그리고 가장 최근인 2006년 4월 2일 75주기 추모일을 맞아 망우리 그의 묘소 앞에 수 많은 참배객들이 모여 들었다. 일본에서는 ‘조선의 흙이 된 일본인’의 저자 다카사키소지씨, 전기소설 ‘백자의 사람’의 저자 에미야 다카유키씨, 15대 심수관씨, NHK 기자, 신주TV 보도부장, 영화화를 추진 중인 이춘호씨를 비롯한 3-40여명의 일본인들이 대거 참배를 하였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의 업적에 대하여 가장 감사하며 그의 유덕을 기려야 할 사람은 일본인들보다도 한국인이어야 하며, 그중에서도 도예인을 중심으로 한 공예인들이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최근에 발간된 「아사카와 다쿠미 평전」(다카사키 소지 지음/ 김순희 옮김/ 2005 효형출판)을 비롯하여 전기소설 「백자의 사람」과 「조선의 흙이 된 일본인」등 여러 곳에서 그의 많은 활동과 업적, 그리고 민예에 대한 사랑이 모두 조선의 도자기에서 시발되었음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이곳 다쿠미의 묘소나 아니면 도자기의 고장에라도 우리 도예인들의 손으로 만든 기념비 하나쯤은 반드시 세워져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다쿠미가 아니었으면 잃어버렸을지도 모를 도자기의 명칭들을 아직도 사용하고 있는 많은 도예가들은 한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다쿠미가 지은 「조선의 도자명고」서문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과거가 아무런 아쉬움도 없이 희미하게 사라져가는 오늘날, 만약 이 저술이 10년만 늦었더라도 여기 모아져 기록된 명칭의 수는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다. 지은이는 잃어버리게 될 인간의 기억들을 교묘하게 보완해 주었다. 즉 묻혀버릴 뻔한 진리를 사라지지 않는 문자로 담아둔 것이다. 오늘날의 사람과 후대의 사람들로부터 감사를 받아야 할 저술이다.”
그렇다. 이런 그의 저술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그에게 감사를 해야 한다. 나는 도예인들의 손으로 기념비가 세워지기를 바라는 나의 바램이 꼭 언젠가는 이루어지리라 믿는다.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다쿠미의 묘소를 관리하고 지켜오면서 부실해진 ‘아사카와 다쿠미 기념사업회’를 주관하고 계시는 조재명 회장님(전. 임업연구원 원장)께 감사를 드린다. 금명간 ‘기념사업회’를 다시 일으킬 생각이다. 이에 우리 공예인과 도예인들의 관심과 참여를 당부 드리는 바이다. (ok)
2005년 가을 문옥배 / 현. 한국공예협동조합연합회 전무이사
조선의 흙이 된, 아름다운 영혼의 소유자 아사카와 다쿠미
수룡회의 일원으로 며칠간 일본을 다녀왔다. 이번 여행은 그 누구보다도 한국을 사랑했고 죽어서도 한국의 흙이 되기를 원했던 식민지시대의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淺川 巧, 1891~1931)를 위시해 그의 형 아사카와 노리타카(淺川佰敎, 1884~1964)와 조선미의 절대적 찬미자였던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99~1961)의 삶을 반추하고 그들의 흔적을 찾아보는 일로 일정이 짜여졌다. 그들은 조선의 백자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만났고, 누구보다도 앞서 조선미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깨달았으며, 그것의 학문적인 정리와 보존을 위해 한 평생을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여행 내내 난 그들이 남긴 공과보다는 오히려 그들이 만났던 장면 장면마다에 숨어있는 인간의 진정성과 애정을 느끼는 데 정신을 팔았다. 다쿠미처럼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사람이 그 시대에 살았다는데 놀랐고, 그들 것이 아닌 우리 것에 대해 그처럼 사랑할 수 있었던 신념과 의지에 놀랐고, 한 번 맺은 인연을 무엇보다 소중히 한 그들의 우의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여행에 앞서 모두는 에미야 다카유키(江宮 降之)가 쓴 「백자의 나라에 살다(白磁の 人, 유한회사 수립사, 2005)」라는 다쿠미에 관한 소설을 읽었으며, 몇몇 사람들은 망우리에 있는 그의 묘(묘비번호 203363)를 참배하기도 했다. 그것도 모자라 여행 내내 우리는 그 누구보다도 일본문화에 정통한 허 문도 전장관님의 해박한 설명을 들어야했다. 여정은 결코 가볍지 않았지만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우리가 찾아 나선 세 사람 중의 한 사람인 야나기 무네요시는 문예동인지 「시라카바(白樺)」의 동인으로 활동하며 민예운동을 일으켰고, 「일본민예관」을 설립한 철학자이자 미학자이다. 1924년, 경복궁내에 조선민족미술관(현재의 국립민속박물관)을 설립하는데 앞장섰기도 했던 그는 일찍이 우리 민예품의 아름다움을 간파하고 이의 학문적 토대를 세웠기에 우리에게 비교적 잘 알려진 인물이다. 수많은 저서 중 우리와 관련하여서는 「조선과 그 예술」, 「조선을 생각한다」가 있다. 1921년, 총독부가 광화문을 철거하려하자 「없어지는 한 조선건축물을 위하여」라는 글로 여론을 일으켜 지켜낸 일은 유명하다. 하지만 그는 「조선의 미」라는 제목의 글에서 조선의 예술은 피침의 역사가 낳은 「비애(悲哀)의 미」라 정의함으로써 많은 사람들로부터 반발을 사기도 했지만 지금도 그의 빼어난 안목과 글은 후학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처럼 야나기는 우리의 전통미술을 사랑하고 보존함은 물론 조선민예론을 주창하여 일본인들로 하여금 우리 전통미술에 관심을 불러일으켰지만 이는 많은 사람들이 경쟁적으로 몰려와 우리 미술품을 약탈하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그는 많은 공과에도 불구하고 일본제국을 도운 식민정책론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1984년, 정부는 우리나라 미술품문화재 연구와 보존에 기여한 공로가 크다는 이유로 외국인에게는 최초로 문화훈장을 수여한다. 반면 아사카와형제는 그들의 업적이 야나기에 비해 결코 모자라지 않건만 안타깝게도 이제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가고 있다. 그들은 일찍이 조선에 건너와 살면서 백자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이를 야나기에게 알려줌으로써 결과적으로 민예운동이 태동하게 한 소중한 인물이다. 아사카와형제는 야나기처럼 귀족가문도, 동경제대출신도 아니며 오피니언리더는 더더욱 아니었다. 일본열도의 중앙부에 속한 한적한 야마나시현(山梨縣)의 가부토(甲村, 현 高根町)에 터를 잡은 비교적 평범한 가정출신이다. 집안은 농사를 지으며 염색가게를 운영했으나 부친은 다쿠미가 태어나기 6개월 전, 31세라는 젊은 나이에 병사했다. 형인 노리타카는 미술교사로 그의 가족과 함께 조선으로 이주하여 당시의 경성부 남대문 공립심상소학교의 미술교사로 재직하며 조선도자기의 아름다움에 심취해 옛 가마터의 조사발굴을 패전 후에까지도 계속했다. 1947년 11월, 일본으로 귀국할 때에도 그가 한국에서 수집한 고려청자, 조선백자의 완형품은 물론 파편 한 조각, 조사결과 등 조선자기에 관한 모든 자료를 고스란히 한국에 남겨두고 떠난, 진정으로 한국의 도자기를 사랑한 사람이었다. 저서로는 「이조의 자기」와「이조-백자·염부(染付)· 철사(鐵砂)」가 있다. 동생인 다쿠미는 인물소설「백자의 나라에 살다」의 바로 그 주인공으로 일본이 한국인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유일한 일본인으로 여기는 그런 고귀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다. 다쿠미는 농림학교를 졸업하고 한때 임업에 종사하지만 형의 권유로 조선으로 건너온다. 그는 서울의 청량리에 살았고, 조선총독부 농상무부 산림과 임업기사로 근무하면서 형과 함께 조선백자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이에 관한 연구에 매진한다. 결코 길지 않은 생애를 통해 그의 관심은 조선백자는 물론 밥상을 비롯한 목공예품, 민화, 민속에 이르기까지 조선인의 전반적인 삶으로 확장된다. 특히 그는 연구자의 입장에서 벗어나 그 심오한 멋을 즐기는 진정한 조선인으로 살기를 원했다. 그는 바지저고리를 즐겨 입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어를 배워 그 누구보다도 한국말을 유창하게 구사했고, 그가 쓴 두 권의 책, 「조선의 밥상」과 「조선의 도자명고」가 모두 한국어로 쓰여졌다는 것만 보아도 그의 조선에 대한 사랑이 어떠했는지를 유추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일제에 의해 황폐해진 산을 푸르게 하기 위해,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조선오엽송(잣나무)의 노천매장법을 찾아내는 개가를 올리기도 했다. 우리는 그런 다쿠미의 행적을 몇몇 문헌을 통해 단편적으로만 확인할 뿐이지 왜 일본인들이 ‘우리는 아사카와 다쿠미를 가졌다’고 자랑했는지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가 죽었을 당시 그의 관을 멘 사람들은 다름 아닌 한국인이었고, 후에 그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황폐해진 그의 묘를 망우리 공동묘지로 이장하고 ‘한국이 좋아서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의 산과 민예에 바친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라고 묘비에 적었다. 그리고 경성제대 교수로 있으면서 그와 교분을 맺었던, 전후 시데하라 기주로(幣原喜重郞)내각의 문부대신을 역임했던 철학자 아베 요시시게(安倍能成)는 「인간의 가치」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그를 추모했다.
다쿠미씨의 생애는 대철학자요 사상가인 이마누엘 칸트가 말한 것처럼, 인간의 가치가 실제로 인간에 있고, 그 것보다 더 많지도 적지도 않다는 사실을 실증했다. 나는 마음으로부터 인간 아사카와 다쿠미씨의 앞에 고개를 숙인다.
이 글은 당시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렸었다. 한국인이든 일본인이든 그는 많은 사람들의 존경의 대상이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한·일간에는 좀처럼 해소되기 어려운 갈등이 존재하지만 이처럼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 땅에 묻힌 일본인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갈등은 치유될 수 있다는 희망적인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는 모두에게서 잊혀져가고 있다. 우리는 과거의 일을 모두 잊지 않고 기억할 수는 없으며 아사카와 다쿠미의 삶도 예외가 될 수 없음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를 잊는다는 것은 분명 아쉬운 일이다. 그처럼 아름다운 영혼을 지닌 사람을 만나기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행장을 꾸렸고 그 누구도 야마나시(山梨)로 가는 길이 멀다고 하지 않았다. 아름다운 영혼은 시간이 흘러도 그 향기가 바래지 않는 모양이다.
뜻밖의 만남-우리 문화의 전도사 전 용복(全龍福) 동경에 도착해 이와야마칠예(岩山漆藝)미술관 관장으로 있는 전 용복을 만났다. 원래는 시부야에 있는, 한국의 뽕짝과 일본 엔카(演歌)의 원조인 고가 마사오(古賀政男)의 음악박물관을 찾기로 일정이 짜여있었으나 떠나기 하루 전, 연락이 닿아 스케줄을 조정해 만나게 된 것이다. 누구보다도 조선을 사랑했던 세 사람의 일본인을 만나기 위해 떠난 여행의 초입에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인 장인을 만난 것은 우리의 여행을 더욱 풍성하고 의미심장하게 하는 절묘한 장치인양 생각되었다. 우리는 그가 있어 자랑스러웠고, 그 또한 우리의 이런 거동이 자랑스러웠으리라.
장소는 그 유명한 메구로 가조엔(目黑雅敍園). 전 용복과는 떼래야 뗄 수 없는 그런 운명적인 곳이다. 가조엔은 1931년, 호소카와 리키조(細川力藏)가 축조한 유서 깊은 곳으로 호텔과 연회장으로 구성되어있다. 호소카와가 선택한 예술은 뜻밖에도 나전칠기였으며 조선에서 많은 장인들을 불러와 어렵게 건물을 완공했다. 그로부터 50여년이 지난 1988년, 호소카와의 후손들은 가조엔을 12층의 현대식 건물로 리모델링하면서 낡을 대로 낡은 나전칠기작품의 복원을 시도하는데 전 용복은 일본의 수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일을 맡아 3년 만에 완성한다. 그곳의 수많은 벽과 방, 화장실, 심지어는 엘리베이터안까지 옻칠과 나전으로 꾸몄는데 기존작품의 복원은 물론 수많은 창작품을 제작해 가조엔을 새롭게 완성했다. 그런 이유로 그의 이름은 국내에서보다는 이곳 일본에서 더욱 잘 알려졌다. 문화는 만드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그것을 향유하는 사람의 것이라는 그들의 유연한 자세가 부럽기만 했다. 전 용복은 우리가 온다는 소식에 차로 2시간이 넘는 거리를 마다않고 달려와 가조엔의 구석구석을 친절하게 안내해주었다. 그는 며칠 후, 이곳의 대연회실에서 세이코시계의 「옻나무 콜렉션」작품발표회를 갖는다고 했다. 현미경을 이용하여 나전을 붙인, 정교하기 이를 데 없는 시계는 시대의 명인이 만든 작품답게 가격이 한화로 약 5억원에 이를 것이란다. 당일에는 장관도 참석할 예정이라니 일본 내에서의 그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대연회장은 새롭게 단장을 하느라 어수선했다. 우리는 전 용복이 있어 식비 외에도 상당한 입장료가 부과되는 금칠과 나전칠기로 꾸며진 호화로운 내실「남풍(南風)」과 「선유(仙遊)」에서 뜻밖의 호사를 누렸다. <v:f eqn="if lineDrawn pixelLineWidth 0"></v:f><v:f eqn="sum @0 1 0"></v:f><v:f eqn="sum 0 0 @1"></v:f><v:f eqn="prod @2 1 2"></v:f><v:f eqn="prod @3 21600 pixelWidth"></v:f><v:f eqn="prod @3 21600 pixelHeight"></v:f><v:f eqn="sum @0 0 1"></v:f><v:f eqn="prod @6 1 2"></v:f><v:f eqn="prod @7 21600 pixelWidth"></v:f><v:f eqn="sum @8 21600 0"></v:f><v:f eqn="prod @7 21600 pixelHeight"></v:f><v:f eqn="sum @10 21600 0"></v:f><o:lock aspectratio="t" v:ext="edit"></o:lock><v:f eqn="if lineDrawn pixelLineWidth 0"></v:f><v:f eqn="sum @0 1 0"></v:f><v:f eqn="sum 0 0 @1"></v:f><v:f eqn="prod @2 1 2"></v:f><v:f eqn="prod @3 21600 pixelWidth"></v:f><v:f eqn="prod @3 21600 pixelHeight"></v:f><v:f eqn="sum @0 0 1"></v:f><v:f eqn="prod @6 1 2"></v:f><v:f eqn="prod @7 21600 pixelWidth"></v:f><v:f eqn="sum @8 21600 0"></v:f><v:f eqn="prod @7 21600 pixelHeight"></v:f><v:f eqn="sum @10 21600 0"></v:f><o:lock aspectratio="t" v:ext="edit"></o:lock>
전 용복과 난 초면이라고는 하지만 오래된 친구를 만난 기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 또한 몇 년째 옻칠을 배우고 있기에 공통의 관심사를 가졌고, 다닌 학교만 다를 뿐이지 우린 유년시절을 부산의 가까운 곳에서 보냈다. 함께 간 친구와 그는 오랜 친구이다 보니 나 또한 초면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우리와의 짧은 만남을 아쉬워하며 그는 고맙게도 모리오카에 있는 자신의 공방에 한번 들려달라고 했다. 언제일지 알 순 없지만 우린 그곳에서 그의 무궁한 창작욕의 근원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조선미의 찬미자-야나기 무네요시
가조엔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1936년에 설립된 일본 민가의 전통을 살린 창고풍의 「일본민예관」은 오키나와민예품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하지만 2층의 전용전시공간에는 수십 점의 우리 민화와 도자기가 전시되고 있었다. 야나기는 약 3천점에 이르는 우리 민예품을 수집하였는데 그 중의 극히 일부다. 내가 보기에 전시품목의 면면은 수수하기 그지없었으며 국내외의 여타 사설미술관에 비해 그 질이 결코 우수하다고 할 수 없었다. 누구보다도 명품을 수집할 수 있는 유리한 여건에 있었음에도 그는 조선의 미술품은 조선에 있어야한다는 신념을 애써 실천한 때문이 아닐까한다. 전시품 중 17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되는 도자기 한 점이 눈에 띄었다. 자료에 의하면 조각가이기도 했던 아사카와 노리타카는 야나기 무네요시가 로댕의 조각을 소장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조그만 도자가 한 점을 들고 지바(千葉)현의 아비코(安孫子)로 그를 찾아간다. 야나기는 도자기를 보는 순간 단번에 매료되고 마는데 지금까지도 난 그 도자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던 터였다. 한 인간의 운명을 바꾸어놓는 도자기라면 분명 특출한 것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바로 이 눈앞에 있는 이 도자기가 바로 그 도자기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저 조그맣고 각이 진 도자기일 뿐이었다. 민예관의 길 건너에는 야나기 무네요시와 그의 가족이 1935년부터 1965년까지 살았던 사저가 기념관으로 남아있다. 2층으로 된, 결코 규모가 크지 않은 일본식가옥은 평소에는 개방이 되지 않지만 우리의 방문취지를 이해한 학예관은 기꺼이 대문을 열어주었다. 선각자요 대학자가 살았던 집은 일본 곳곳에 남아있는 사무라이의 고택처럼 휑하니 비어있었다. 다다미가 깔린 전통 일본식 가옥은 그 자체가 다실이나 다름없지만 가재도구가 치워진 집은 더욱 그런 분위기를 풍겼다.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였던 그의 실제 삶의 모습도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서재만큼은 옛날 모습 그대로 보존해 놓았다. 서가에는 그의 손때가 묻은 다양한 서적들이 가지런히 꼽혀있었다. 그의 지적 넓이와 깊이를 짐작하게 했다. 난 「백자의 나라에 살다」를 다시금 떠올렸다. 소설의 서장(序章)에는 야나기의 문하에 들어간 젊은 도예가 한 사람(후에 어렵게 확인한 결과 실제인물인 도예가 스즈키 시게오(鈴木繁男)다)이 생면부지의 아사카와 다쿠미의 존재를 확인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곳이 다름 아닌 이곳 서재였다. 서재의 벽에 걸린 사진 속 주인공에 대해 궁금해 하는 그에게 야나기는 한없이 온화한 목소리로 ‘이 분은 아사카와 다쿠미씨로서, 내가 젊었을 때 가장 존경하고 가장 신뢰한 분이셨네. 만일 이 분이 계시지 않았더라면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은 50%도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야. 언젠가는 자네에게도 중요한 존재가 될 것으로 생각하네’라고 말해준다. 야나기에게 있어서 다쿠미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인물로 가슴속에 자리매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몇 십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서재의 그 벽에는 다쿠미가 아닌 야나기 본인의 사진이 걸려 있다. 당연한 일이지만 섭섭함 또한 지울 수 없었다. 야나기와 아사카와형제와의 특별한 관계에 있어 두 점의 조선도자기가 등장한다. 한 점은 앞서 언급한 청화백자추초무늬모따기항아리(面取染付秋草文壺)이고 다른 한 점은 오사카 시립동양도자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청화백자진사연꽃무늬항아리(靑華辰沙蓮花紋壺)이다. 야나기는 노리타카로부터 받은 전자의 항아리를 보고 그 아름다움에 충격을 받지만 후자와는 비길 바가 못 되었다. 연꽃무늬항아리는 다쿠미가 자신을 방문한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며 자랑한, 높이가 45cm가 넘는 당당한 체구에 연꽃 몇 송이가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는 보기 드문 걸작으로 실은 형인 노리타카의 소장품이다. 얼마나 감동이 컸기에 야나기가 조선미술사를 집필하고 조선민족미술관을 설립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을까. 그 도자기를 나도 몇 번 사진으로 본적이 있는데 그 자태는 필설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 1997년 5월, 「조선의 미를 가르친 형제-아사카와 노리타카와 다쿠미」를 특집으로 다룬 게이주스신초(藝術新潮)는 이 항아리를 「운명의 연꽃항아리」라고 표현했을 정도다.
야나기는 노리타카로 인하여 조선도자기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1916년 8월, 처음으로 조선에 건너간다. 경성에 도착해서 그와 함께 한여름 염천을 매일같이 골동품가게를 뒤지며 시간을 보낸다. 이때 야나기는 다쿠미의 집에서 묵게 되었는데 다쿠미는 이를 계기로 조선 미술품에 더욱 깊숙이 빠져들게 된다. 두 사람의 관계는 이 운명적인 만남이후 15년간에 걸쳐 지속되는데 야나기의 다쿠미에 대한 애정은 지극하고 또한 감동적이다. 다구미의 어떤 면이 대철학자인 그의 마음을 그토록 파고들었을까? 야나기는 아사카와형제로 인하여 조선의 도자기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민예품에 대해 무한한 애정을 가지게 되었으며 정치적인 면에서도 조선을 비호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있은 직후, 야나기는 요미우리신문에 「조선인을 생각한다」라는 글을 발표했다. 이 글에서 그는 ‘우리나라는 올바른 길을 밟고 있지 않다. 독립이 그들의 이상이 되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다’라고 자신의 신념을 피력한다. 그리고 3년 후인 1922년, 「조선과 그 예술」의 서문에서 ‘조선 문제에 대한 공분(公憤)과 그 예술에 대한 사모(思慕)가 계기가 되어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심중을 토로했다. 야나기는 귀족신분이라는 배경과 그의 다방면에 걸친 영향력으로 인하여 암암리에 식민정책을 도왔다고 비난받기도 하지만 그는 진정으로 조선을 사랑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나는 야나기가 살았던 사저의 서재를 둘러보며 그가 우리 문화재를 연구하고 보존하였다는 이유만으로 뭇사람들을 제치고 외국인 최초로 문화훈장을 받았다기보다는 그것 이외의 다른 측면이 고려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아마도 조선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미술품을 대하는 그의 숭고한 정신 때문이었으리라. 그는 저서「수집이야기」에서 자신의 수집관을 피력했는데 ‘아무 것도 모른 채 잠든 사람이나 모든 일을 이성으로 처리하는 사람에게 수집은 어울리지 않으며, 가격이나 유명세에 너무 집착하면 수집된 물건도 생기를 잃는다’고 했다. 최근, 한 재벌의 주도하에 천문학적인 가격의 인기작가의 작품수집에 열을 올리는 몰지각한 세태에 대해 시대를 앞선 준엄한 꾸지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조선의 미술품은 조선 땅에 있어야한다는 지론을 펴 우리의 고개를 숙이게 한다. 그 어느 누가 피지배국의 미술품에 대해 이처럼 따뜻한 시선을 보내줄 수 있단 말인가. 밤을 새워가며 간신히 잡은 물고기를 아무 조건 없이 방생하는 조사의 마음에 다름 아니다.
아름다운 영혼의 소유자- 아사카와 다쿠미
이번 여행은 그 어느 여행보다도 목적이 뚜렷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여정은 매우 단순해서 여행이라기보다는 성지순례를 떠난 기분이었다. 우리는 아사카와형제가 태어났고 기념관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다카네(高根町)로 가는 길만을 지도에 표시해놓고 있었다. 이동시간에는 허 장관님의 이런저런 해설을 듣는 것도 모자라 야나기 무네요시의 「사라지려하는 한 조선건축을 위하여」와 아베 요시시게의 「인간의 가치」를 돌아가며 읽었다. 여행의 초미에 만난 전 용복도, 야나기 무네요시도 어쩌면 다쿠미에게는 들러리에 불과했다. 연어는 본능에 의해 목숨을 걸고 그가 태어낫던 곳으로 회유하고, 유대인은 몇 천 년 전의 인연을 끊지 못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지만 우린 그런 본능도 없었고 인연도 연결되어 있지 않았지만 한 인간의 체취에 이끌려 무작정 달려갔다. 후지산을 품고 있는 야마나시현의 풍광은 아름다웠지만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를 끌어 들일만큼 특별히 매력적인 곳은 결코 아니다. 차창에 스쳐지나가는 그저 그런 막연한 풍경일 따름이다. 하지만 우리는 순례자가 되어 다카네로 향했다. 아사카와형제 자료관은 마을의 주민센터 내에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가 방문한다는 연락을 받고는 나름대로의 준비를 해놓고 있었다. 우선 자료관의 입구에는 우리일행을 환영하는 팻말이 세워져 있었으며 뜻밖에도 세 사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름 아닌 「백자의 나라에 살다」를 쓴 바로 그 에미야 다카유키, 아사카와형제가 태어났던 마을을 대표해서 나와 자료관을 안내해준 70이 넘은 노인, 그리고 제일교포 2세로 30년간 수집해온 672점의 귀중한 미술품을 광주시립미술관에 기증한 하 정웅(河 正雄)이었다. 예상치 못했던 만남이었다. 조그만 인연이라도 소중히 했던 다쿠미는 우리를 위해 소중한 인연을 이처럼 곳곳에 마련해놓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십시일반 힘을 모아 그를 소재로 한 영화제작이 추진되고 있다니 하루빨리 그리되기를 간절히 바랄뿐이다.
나는 기념관을 둘러보며 줄곧 다쿠미의 인간됨을 생각했다. 일본에는 일기일회(一期一會, いち-ごいちえ)라고 해서 단 한 번의 만남이라고 할지라도 소중히 하라는 옛말이 있다. 짐작컨대 다쿠미는 40년이라는 결코 길지 않은 생애를 통해 만난 한 사람 한 사람과의 인연을 결코 소홀하게 다루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는 누구보다도 진솔하고 또한 다정다감하였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단지 3년여 교분을 맺었던 아베 요시시게가 그가 죽자 인류의 손실이라며 장문의 추도사를 신문에 연재까지 했을까. 또한 민예운동을 함께 했으며 뒤에 인간국보의 칭호도, 문화훈장도 사양한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인 도예가 가와이 간지로(河井寬次郞, 1890~1963)는 아사카와형제에 대해 존경심을 숨기려하지 않았다.
한일합방 이래 조선에 건너간 일본인이 그 나라사람을 어떻게 다루었는지를 생각하면 지금도 견딜 수 없다. 그럴 때 아사카와형제가 그러한 일들에 대해 속죄하던 일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정복자가 피지배자에 대해 저지른 잘못, 그러한 야만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는 가운데 그들이야말로 무지에 빛을 비추어준 사람들이었다.
아사카와 다쿠미는 야나기 무네요시, 가와이 간지로, 도예가 도미모토 겐키치(富本憲吉, 1886~1963)같은 민예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물론 수많은 조선인과도 두터운 교분을 나누었다. 특히 고려청자의 재현에 일생을 바친 지 순탁(地順鐸, 1912~1993)이나 유 근형(柳根灐, 1894~1993)옹도 그들 중의 한 사람이다. 이처럼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 외에도 그는 수많은 민초들과 함께 호흡하며 이 땅에서 살았다. 그랬기에 그가 죽었을 때 많은 비가 내리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어 상여를 메었다고 한다. 매우 감동적인 장면이었으리라. 아사카와 다쿠미는 진정으로 조선사람이 되고자 우리의 말과 글을 배웠으며, 그의 저서는 놀랍게도 한글로 씌어졌다. 그의 조선사랑이 얼마나 컸냐하면 첫 저서「조선의 밥상」에서 ‘피로에 지친 조선이여! 타인의 흉내를 내는 것보다 지금 가지고 있는 중요한 것을 잃지 않으면 곧 자신이 생기는 날이 올 것이다. 이것은 또 공예의 길뿐만은 아니다’라고 적었다. 조선의 독립을 염원하는 뜻으로 쓴 게 틀림없는 이 글로 인하여 출간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아베 요시시게의 도움으로 간신히 총독부의 검열을 피할 수가 있었다. 다쿠미는 야나기와 의기투합하여 민예운동을 주창하고 「조선민족미술관」을 설립하는 등 많은 일을 하지만 막상 그의 삶의 면면은 초라하기조차 하다. 18년 동안이나 산림과에 근무하지만 그의 직위는 판임관(判任官)의 기사에 불과했고, 수입 또한 많지 않았지만 주변 사람들을 도우는 데 쓰곤 했다. 그리고 가정적으로 본다면 어쩌면 그는 불행한 사람에 속할 것이다. 첫째 부인은 딸 하나를 낳고 병사했으며, 야나기의 소개로 결혼한 둘째부인은 아이를 하나 낳았지만 그 아이는 낳은 즉시 죽고 만다. 그리고 딸 소노에는 결혼도 하지 않고 야나기가 설립한 「일본민예관」의 일을 거들다가 1967년 10월, 의붓어머니인 사쿠가 82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다음 달인 11월, 마치 뒤를 다르듯 60세를 일기로 숨을 거둔다. 다쿠미가 죽은 지 36년만이고, 야나기가 죽은 지 6년만이고 노리타카가 죽은지 3년만이다. 그리고 의아한 점은 유일한 혈통인 소노에는 야나기가 죽자 그가 쓴 방대한 글을 정리하는 한편 수차례에 걸쳐 그에 대한 추모의 글을 쓰지만 정작 자신의 부친인 다쿠미에 대해서는 단 한 줄의 글도 남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절절한 사무침을 글로 표현할 수 없었는지 모르지만. 다쿠미의 생애에 있어 형 노리타카도 무시 못 할 존재지만 야나기만큼은 특별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야나기는 자신보다 8살이 연배인 다쿠미에게서 형과 같은 애정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야나기의 빈번한 조선행은 아마도 다쿠미를 만나기 위한 구실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다쿠미가 위급하다는 전보를 받고는 야나기는 단 한번만이라도 더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급히 조선으로 건너오지만 경성으로 향하는 기차에서 운명했다는 비보를 접한다. 그의 슬픔은 끝이 없어 다쿠미가 죽은지 3년이 되는 1934년, 「공예」지 3월호에서 야나기는 피를 쏟는 듯 다시금 슬픔을 토로한다.
그가 죽은지 벌써 3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가족 중 몇몇이 죽었고, 많은 지우와도 헤어졌지만 아사카와의 죽음만큼 나의 마음을 견딜 수 없게 하지는 않았다. 그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답답하다. 그는 둘도 없는 소중한 사람이었다. 특히 나에게는 덕(德) 그 자체의 존재로 남아있다. 무엇보다도 인간으로서 그는 훌륭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만큼 자연스럽게 덕을 겸비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 그의 존재는 언제나 그의 주변을 따뜻하게 또 맑게 해주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그를 사랑했다. 그의 마음에는 불가사의한 힘이 있었다. 그는 언제나 한결같았다.
다쿠미가 없는 30년을 야나기는 그를 잊지 못하고 가슴에 품고 살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의 서재에 다쿠미의 사진을 걸어두고 두고두고 쳐다보지 않았을 것이며, 미망인과 딸을 곁에 두고 자신의 가족인양 돌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쿠미는 짧은 생을 살았지만 야나기를 만날 수 있어서 행복했고, 야나기는 일찍이 다쿠미를 잃었지만 진정으로 그리워할 수 있는 상대를 가졌다는 것만으로 행복했을 것이다. 한 사람은 성인과 같은 고매한 감성을 가졌고, 또 한 사람은 그것을 꿰뚫어보는 훌륭한 이지력을 가졌다. 아름다운 인연이 아닐 수 없다. 난 새삼스레 내 삶의 주위를 둘러보며 나에게도 그런 아름다운 인연이 있었으면 하고 욕심을 부려본다. 두 사람으로 인하여 며칠간 난 참으로 행복할 수 있었다.
2008년 6월, 정 찬만쓰다
「人間の価値」 at 2006 12/25 17:34
安倍能成という先達を僕はそれほど評価していない。その理由は、学問上、安倍には批判的精神が欠けていると思われ、安倍はまた、官位にも学歴にも権勢にも執着したことが垣間見られるからである。しかし、淺川巧についての上の評価は正鵠を射ていると思う。日本の統治下にあった朝鮮で、朝鮮人は日本人を憎んでも、淺川を敬愛した。いっかいの林業技師として淺川は、難題とされたチョウセンカラマツの養苗を成功させるなど、本職で苦心したのみならず、兄・伯教と協力して、朝鮮人が気づかなかった朝鮮の美を見出した。淺川兄弟がもしいなかったら、朝鮮の美は埋もれたままで、発見が遅れたであろう。
..................... 일본 나라현의 어느 교등학교 교사(정년퇴직)의 글에서 [출처] 아사카와 다쿠미를 생각한다|작성자 동산선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