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추천 0조회 023.12.23 11:31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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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ㆍ대림피정 [대림특강] 소화데레사의 삶과 사랑 7편 무지.보조.기조실 23.12.23 07:13 한 권 이어 듣기_소화 데레사의 삶과 사랑 7편 (36:47) 한 권 이어 듣기_소화 데레사의 삶과 사랑 7편 < 도처에 죽음이 덮침 >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지독하게 추웠던 1891년에서 92년 겨울, 죽음이 우리 수도원을 덮쳤다. 1891년 12월 5일 토요일에 87세의 마더 제노베파 수녀님이 격심한 고통을 겪은 후 임종했다. 수녀님은 리지외의 가르멜 수도원을 창설한 분으로 모든 수녀님들이 성인으로 여기는 분이었다. 마더 제노베파 수녀님은 1884년 이후로 육체적이고도 정신적인 큰 고통을 겪었는데, 놀랄 만한 인내심과 헌신적 희생으로 그것들을 견뎌냈다. 나는 거룩한 마더 제노베파 수녀님을 알게 된 것이 소중한 은총이라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하느님께서는 일상적이고도 숨은 행동을 통해 거룩한 삶을 살아간 한 수녀님과 3년을 함께 살기를 원하셨다. 그녀의 모범은 수도원에서 고유한 길을 걸어가는 데 자극제가 되었으며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착한 창설자 수녀님은 여러 번 나를 위로해 주었다. 한 번은 내가 토요일에 그녀의 병실을 방문했는데 이미 두 분 수녀님이 와 있었다. 나는 웃으면서 그녀를 들여다본 다음 곧 되돌아 나오려고 했다. 병자 곁에는 두 명 이상 있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분은 나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작은 딸이여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평화와 기쁨으로 하느님께 봉사하십시오. 나의 딸이여, 우리 하느님은 평화의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나는 그녀에게 감사한 다음 밖으로 나왔다. 내 눈은 눈물로 가득 찼다. 사랑하는 하느님께서는 수녀님이 내 영혼의 상태를 읽도록 하셨는가? 바로 그날 나는 극도로 우울했으며 거의 참담한 지경이었다. 하느님께서 나를 아직도 사랑하고 있는지 더 이상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때 마더 제노베파 수녀님은 평화의 하느님이라는 구원의 말씀을 하신 것이었다. 결코 실망시키지 않는 절대적 진리, 아빌라의 데레사 성인의 어떤 책에서 나는 여기에 꼭 맞는 말씀을 발견했다. 성인에 따르면, 감정의 동요에 따라 고통받는 것은 정상적이라는 것이다. 날씨에 따라 또는 건강 상태에 따라 좌우되기도 하며, 어떤 사건에 좌우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늘 높이 치솟는가 하면 곧 다시 죽을 듯이 처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에게 골몰하지 않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그 대신 간단한 진리를 간직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그분은 나의 평화이시다. 이 진리는 내 기분에 상관없이 시종일관 같은 진리다. 만일 온 세상과 나 자신이 뒤죽박죽되고 내 안에서, 그리고 나를 둘러싸고 일어난 일들을 내가 더 이상 이해할 수 없고, 모든 것이 내게 미친 듯이 보일지라도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씀을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이십니다.” 그렇다. 그분은 나를 변함없이 사랑하신다. 마더 제노베파 수녀님이 천국으로 떠나던 날, 수도 공동체의 모든 수녀님이 그녀의 침상 둘레에 모였다. 나는 임종을 지켜보는 것이 처음이었으므로 큰 충격을 받았다. 2시간 동안 침대 발치에 서서 그녀의 조그마한 움직임도 놓치지 않고 다 관찰할 수 있었다. 그녀의 임종 순간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 나를 가득 채웠다. 그것은 마치 마더 제노베파 수녀님이 그녀가 영원히 하느님 곁에서 누리게 될 행복의 몫을 내게 선물한 것 같았다. 우리는 기도와 성가를 부르면서 천국으로 향하는 그녀를 동행했다. 우리 창설자의 사망 소식은 금방 리지외에 퍼졌다. 관 주위에 놓인 많은 화환과 꽃다발을 정리하는 소임이 내게 주어졌다. 그때 빈센트 수녀님이 나를 지켜보다가 책망조로 소리쳤다. “수녀님 참 잘하네요. 가난한 이들의 꽃다발은 뒤에 있는데, 친척들이 보낸 꽃다발은 관 앞에 놓는군요.” 의심의 여지 없이 빈센트 수녀님은 자기 오빠 루이가 보낸 꽃다발을 본 것이다. 그녀의 오빠는 문지기 수녀님을 위한 집을 지을 때 함께 일했다. 나는 조용히 그녀에게 이렇게 대꾸했다. “수녀님 감사합니다. 수녀님이 옳습니다. 노동자들이 만든 이끼 십자가를 앞으로 옮겨 놓겠습니다. 그 자리가 어울릴 것 같습니다.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마더 제노베파 수녀님의 장례식 직후 가르멜 수도원에 심한 유행성 감기가 퍼졌다. 이것은 프랑스 전역에서 맹위를 떨쳤으며,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다. 제일 먼저 공동체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수녀님이 1892년 1월 2일 나의 열아홉살 생일날에 돌아가셨다. 이틀 후에 수도원장을 대리하는 부원장 수녀님이 돌아가셨다. 알아눕지 않는 사람은 나를 제외하고는 두 명뿐이었다. 비통에 잠겨 있는 가르멜의 암담한 처지를 상상하기란 불가능했다. 겨우 일어설 수 있을 정도의 수녀님들이 중환자를 보살폈다. 천지의 죽음이 기세를 부렸다. 제의방 책임수녀님 역시 몹시 아파서 나는 혼자서 제의방 소임을 했다. 사랑하는 하느님께서는 내게 많은 힘을 주셨으며, 나는 엄청난 공포 앞에서 두려워 떨지 않았다. 의연하게 필요한 모든 일을 처리했다. 병자를 돌보면서 시신의 수위를 입히고 장례식 준비를 했다. 일주일 내내 계속된 수도원의 시련 가운데 예수님은 매일 영성체를 할 수 있는 위로를 주셨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나는 강했다. 아무 두려움 없이 환자와 죽음을 돌볼 수 있었다. 수도원의 영적 지도자인 드라트로에트 신부님은 당신의 생각을 바꾸었다. 그분은 내 입회를 반대했으며 내게 항상 냉정했다. 그는 어려운 시기에 내가 강한 여자임을 확인했다. 4명의 수녀님을 이룬 공동체는 서서히 회복되었다. 또 다른 시련 역시 곧 끝을 고할 참이었다. 1892년 5월 10일 이시도르 외삼촌은 캉의 요양소에서 아빠를 모셔왔다. 아빠는 그곳에 3년 하고도 3개월을 더 계셨다. 이틀 후인 5월 12일에 아빠는 우리를 방문했다. 우리는 4년간 서로 만나지 못했다. 아빠는 많이 변했으며 몸이 많이 말랐다. 그날 아빠는 비록 말은 못했지만 정신은 맑았다. 작별할 때 아빠는 눈물을 흘리면서 집게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더듬더듬 말했다. “천국에서...” 이것이 겸손한 아빠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아빠는 일단 외가에 머물다가 1892년 7월에 레오니와 셀리나와 함께 류라베에 집을 얻어 이사를 했다. 가정부가 가사와 아빠를 돌보는 언니들을 도와주었다. 아빠는 남의 도움 없이는 한 발짝도 옮기지 못했으며, 방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는 데도 부축을 받아야 했다. 한순간도 혼자 둘 수 없는 상태였다. 가르멜에 있는 우리는 아빠가 따뜻한 보살핌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에 대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셀리나는 아빠를 위해서 완전한 희생을 바쳤다. 그녀는 언젠가 가르멜에 입회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아직은 해야 할 일들이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전에도 그랬지만, 그때 셀리나는 여러 사람한테서 청혼을 받았다. 그녀는 과연 그녀의 성소를 따르게 될까? < 나의 우상 오를레앙의 요안나 > 1894년은 프랑스 국민 전체를 위한 대대적인 축제의 해였다. 오를레앙의 보팡롱 주교는 로렌 출신 소녀의 시성식을 위해 20년 이상 헌신적으로 일했다. 1869년 교황 비오 9세는 준비 작업에 착수하도록 했다. 1894년 1월 27일 교황 레오 13세는 잔다르크의 시복에 동의했다. 그때부터 그녀는 하느님의 종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5월 8일에는 프랑스 전역에서 범국민적 축제가 거행되었다. 리지외의 성 베드로 성당 주임 신부님은 그날을 위해 소녀들과 함께 성당을 장식하고자 했다. 셀리나는 그 그룹의 일원이었다. 외사촌 마리와 함께 그녀는 성당 외부를 장식하기 위해 6.5미터 길이의 깃발을 12개나 만들었다. 5월 8일 주교자 성당에는 거룩한 순교자를 기리는 미사에 5천 명이 넘는 신자들이 몰려들었다. 프랑스 국민은 409년이 지난 후에야 조국을 위한 잔다르크의 역사적 의미를 발견했다. 역사학자 쥬엘미술레는 1841년 그의 저서 프랑스의 역사에서 오를레앙 출신의 소녀를 추앙했다. 1429년 영국인들이 프랑스를 점령해 샤를 8세를 몰락시키려 했을 때 요안나는 왕의 군대를 이끌었으며, 5월 8일에 오를레앙을 적의 손에서 해방시켰다. 영국인들은 요안나를 체포하여 그들의 수중에 넣었으며, 그녀를 종교 재판에 넘겼다. 그들은 피에르 크숑 주교를 그들 편으로 끌어들였으며, 그는 요안나가 악마와 결속되어 있다고 간언했다. 아무도 소박한 양치기 소녀의 거룩한 소명과 파견을 알아보지 못했다. 이리하여 요안나는 열아홉이라는 어린 나이에 루앙의 장작더미 위에서 화형을 당했다. 그녀는 죽어가면서 나직이 예수님을 불렀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요안나를 친언니처럼 사랑했다. 그녀의 용감한 행동에 관해 열심히 책을 읽었으며, 그녀를 모방하고자 하는 커다란 열망을 느꼈다. 나 역시 이러한 명예를 위해서 태어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명예는 사람들 앞에서 드러나지 않는 것임을 하느님은 알게 하셨다. 그것은 오로지 거룩한 성인이 되는 데 의미가 있을 것이다. 나는 19살의 순교자와 결합되어 있음을 마음 깊이 느꼈으며, 그녀처럼 투쟁하고 싶었다. 가르멜 안에서도 요안나를 기리는 축제에 우리 방식대로 참여하고 싶었다. 수도원의 공동 휴식시간을 이용해서 나의 모범인 요안나에 관해 내가 직접 쓴 시와 노래를 수녀님들 앞에서 공연하는 것이 좋을 듯했다. 그 밖에도 두 개의 연극 대본을 썼는데, 하나는 성 잔다르크의 성소이고, 다른 하나는 소명의 성취였다. 그녀의 죽음과 천국에서의 현양은 영광스럽게 마무리를 장식했다. 가능한 한 역사적 배경에 접근하고자 나는 앙리 왈렌의 550쪽에 달하는 방대한 책을 연구했다. 널리 알려진 일반적 표현은 쓰지 않았으며, 가르멜 수녀인 나의 모델로서 요안나의 모습을 기초로 했다. 첫 작품에서 요안나를 허약하고 겁 많은 아이로 묘사했는데, 그녀는 마리아와 함께 예수께 대한 내적 사랑으로 고독과 침묵, 그리고 친교에 애착을 느꼈다. 꿈속에서 요안나는 그녀에게 칼을 주는 미카엘 대천사를 보았다. 매우 놀란 소녀는 오랜 저항 끝에 칼을 받아들였으며 출발하라는 명령에 복종했다. 내면의 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왕을 구출하고, 그와 함께 프랑스 왕국과 위협적 형세를 의논하기 위해서 신홍성으로 인도되었다. 요안나는 그녀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확실히 알았다. 1894년 1월 21일 아녜스 원장 수녀님의 영명축일에 나는 젊은 수녀 몇 명과 함께 이 연극을 공연했다. 내가 요안나 역을 했는데 그녀와 완전히 일치되는 것을 느꼈다. 1894년 여름에 나는 두 번째 대본을 썼다. 이때 요안나는 왕과 나라를 구하기 위해 생명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용감하고 강한 여인으로 묘사되었다. 그녀는 마치 전사처럼 용감하게 왕의 군대를 앞장서서 이끌었다. 모두가 그녀의 분명한 지시에 따랐다. 적에 대한 승리는 확실했다. 오를레앙은 탈환되었으며, 샤를 8세는 왕으로 축성되었고, 프랑스 왕국은 구출되었다. 그 후 커다란 압박과 신문, 고독과 몰이해 등이 뒤따랐으며, 결국 장작더미 위에서 화형을 당했다. 그것은 사랑으로 인한 죽음이었다. 연극은 요한나가 하늘나라에서 흰 장미 화관을 받으면서 끝났다. 나는 1895년 1월 21일 이 연극을 상연하고자 작은 연극 그룹을 몇 달간 준비시켰다. 우리는 의상과 기타 필요한 도구를 기꺼이 만들었다. 방패, 칼, 깃발, 장식, 가발, 장작더미 등. 연극을 공연하는 중요한 날이 왔을 때 나는 사랑하는 자매의 역할에만 몰입한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그녀와 동일시되었다. 그 역할은 내게 영혼과 육신, 모든 면에서 일치를 느끼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두 사람을 비교함으로써 잘 드러날 것이다. 요안나는 허약하고 겁 많은 소녀였다. 나 역시 약하고 겁이 많았다. 여기에 관해서는 자세히 말한 바 있다. 요안나는 하느님과 결합되어 살았으므로 내면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은총을 내게도 어린 시절에 주셨다. 요안나는 왕과 조국을 적의 손아귀에서 구출하라는 소명에 순종적으로 따랐다. 나는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악마의 수중에 있는 많은 영혼을 구하려 가르멜로 부르신 하느님의 소리에 따랐다. 요안나는 소명을 위해서 몸과 생명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나는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천 번이라도 내 생명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다. 요안나는 싸움터에서 싸웠다. 나는 사랑의 전장에서 싸우길 원한다. 그렇다. 나는 하느님을 마치 어린아이가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며, 또한 용감한 전사처럼 싸우길 원한다. 요안나는 승리를 얻은 후 적의 수중에 빠졌으며 감옥에 갇혔다. 나는 사랑하는 예수님의 포로이며 자진해서 가르멜의 담과 창살 안에 갇히길 원했다. 요안나는 많은 심문을 참고 견뎌내야만 했다. 나는 나의 숨겨진 내적 삶을 알고 싶어 하는 시샘 많은 동료 수녀들한테서 수많은 질문으로 괴롭힘을 받는다. 요안나는 장작더미 위에서 화형을 당했다. 나는 자비하신 하느님의 사랑의 번제물이 되길 원한다. 연극은 공동체 수녀님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으며, 칭찬과 함께 많은 박수갈채를 받았다. 우리는 물론 기뻐했지만, 내가 느낀 행복은 쉽게 사라져버리는 감격 이상이었다. 동료 수녀님들은 내가 요안나와 동일시되었으며, 내 삶의 한 부분을 연출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 완벽한 행운 > 셀리나 역시 가르멜에 입회하길 바란다는, 아직은 성취되지 않은 커다란 소망에 대해 누구와도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나는 그것을 하느님 손에 맡겼으며, 언니의 미래를 하느님께 의탁했다. 그리고 언니가 세상 끝까지 갈 양이면 자매들처럼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셀리나는 모든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외가 사람들은 사교계 생활을 활발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은밀한 희망으로 셀리나를 자주 화려한 파티에 초대했으며, 셀리나가 위대한 사랑을 발견하길 바랐다. 몇몇 남자들은 그 자리에서 청혼하려 할 정도였다. 어느 저녁 파티에 언니가 초대되었을 때 설명하기 곤란한 일이 생겼다. 언니의 파트너가 춤을 청했는데 그는 춤을 출 수가 없었으며, 셀리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호를 가로질러 언니를 다시 제자리로 데려다 주는 것 외에 어쩔 수가 없었다. 젊은이는 당황하여 도망치듯 떠났으며, 그날 밤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 사건은 내게 하나의 신호였으며, 하느님께서는 당신 손을 셀리나 위에 얹고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원하셨다. "너는 나에게 속한다." 그녀의 성소를 둘러싸고 내적 투쟁을 하던 시절에 나는 셀리나와 지속적으로 편지 교환을 했다. 그녀는 긴급한 충고와 격려, 그리고 경험이 필요했다. 그것은 곧 그녀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 그녀의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녀의 편지는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에 관한 추구와 질문들로 가득 차 있었다. 셀리나는 사실 지쳐 있었다. 우리 친척들은 셀리나를 적극 결혼시키고자 했을 것이다. 그리고 피숑 신부님 역시 계획이 있었는데, 셀리나의 성격으로 보아 캐나다의 선교지에서 능동적이고도 활동적 지도자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셀리나는 휴가를 보내고 있는 리스의 별장에서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녀의 내적 삶은 어둠과 상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셀리나의 자리가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러나 동시에 가르멜의 지도 신부님이 마르땡 가족 중 네 번째 자매가 입회하는 것에 대해 반대할 것을 알고 있었다. 심각한 변화가 셀리나에게 더 큰 부담을 주었다. 레오니는 수도생활을 새로 시도하고자 다시 한 번 가족들과 작별을 고했다. 외사촌 마리 게링은 리지외의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하기 위해 구체적 준비에 들어갔다. 아빠는 다시 리스의 별장으로 가게 되었다. 도시보다는 자연의 고요함과 아름다움이 아빠에게 더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셀리나는 고통 가운데 이렇게 썼다. "이 세상에 더 이상 아무도 없다. 공허만이 나를 둘러싸고 있다. 나는 마치 가족의 부스러기처럼 여겨진다. 오, 인생이 이렇게 슬프다니, 이렇게 슬프다니..." 이렇듯 참담한 상황에 놓여 있는 셀리나에게 나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사랑하는 언니, 나는 언니의 영혼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언니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 어린아이 홀로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 위에 떠 있다면 목적지가 가까이 있는지 멀리 있는지 아이가 어떻게 알 수 있겠어? 출발한 해안이 보일 때만 아이는 자신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겠지. 그러나 육지가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 아이는 기뻐해야 해. 곧 목적지에 도착할 것이니까 말이야. 해안에서 멀리 떨어질수록 바다는 아이에게 더욱더 헤아릴 수 없는 존재가 되지. 아이는 자기 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더 이상 알 수 없어. 또한 어떻게 어느 방향으로 핸들을 조정해야 할지도 몰라. 그러므로 아이는 단지 한 가지만 할 수 있을 뿐이야. 바람에 의지하는 것, 앞으로 가는지 또는 뒤로 가는지 알지 못할지라도. 사랑하는 언니, 언니는 바다 위에서 표류하는 어린 아이야. 언니가 타고 있는 작은 배는 있는 힘을 다해 목적지를 향하고 있지. 언니는 절대 혼자가 아니야. 예수님은 언젠가 겟네사렛 호수에서 어부의 배를 탄 것처럼 주무시고 계신 거야. 그분은 주무시고 계셔. 그리고 언니는 그를 보지 못할 뿐이야. 어둠이 배를 뒤덮고 있기 때문이지. 사도들은 예수께서 편히 쉬도록 베개를 주었지만, 예수님은 작은 배 안에서 그보다 훨씬 더 부드러운 사랑하는 신부 셀리나를 발견하실 거야, 언니의 마음. 오 예수님은 얼마나 행복하실까? 사랑하는 언니, 확신을 가져. 언니는 어쩌면 목적지에 이미 가까이 와 있는지도 몰라. 그 작은 배를 앞으로 움직이는 바람은 번개보다 더 빠를지도 모르지." ㅡ성면의 아기 예수 대레사 수녀로부터ㅡ 아빠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다. 그는 종종 의식 불명이 되었다. 가정부 아우구스타도 점점 더 알코올에 빠지게 되었는데, 이것은 셀리나에게 또 다른 걱정거리였다. 외가에서는 아빠를 다시 리지외로 모셔왔으며, 당신들 집에 모셨다. 1894년 5월 27일 일요일에 아빠는 왼팔이 마비되는 심한 뇌졸중을 당했으며, 곧 병자성사를 받았다. 6월 5일에는 심장에 위험 신호가 왔다. 그럼에도 7월 4일 아빠를 다시 리스로 모셨는데 좋은 기후가 아빠의 고통을 덜어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에서였다. 그러나 사랑하는 하느님께서는 1894년 7월 29일 모든 고통에서 아빠를 풀어주셨다. 셀리나는 아빠의 임종을 지켜보았으며 이렇게 알려주었다. “아빠의 눈길은 생기가 있었고, 감사와 다정함으로 가득 차 있었어. 어느 순간 나는 5년 전과 같은 사랑하는 아빠의 모습을 발견했어." 장례식은 8월 2일 리지외에서 있었다. 하느님께서는 아빠의 처절한 순교를 이렇게 완성시켰다. 그 다음 주간에 나는 잊지 못할 아빠의 인생과 죽음에 대해 많이 묵상했다. 8월 말에 가서야 셀리나에게 편지를 썼다. "5년이나 걸린 아빠의 죽음, 그리고 이제 다시 아빠를 생시처럼 느낀다는 게 얼마나 기쁜지. 아빠는 전처럼 우리를 기쁘게 해주려고 마음을 쓰고 계셔." 그리고 레오니에게 이렇게 썼다. "아빠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진정한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6년 동안 아빠를 보지 못했지만, 이제 다시 아빠를 발견해. 나는 아빠가 나를 에워싼 듯이 바라보며 보호해 주는 듯한 느낌을 받아." 아빠의 죽음은 셀리나를 내적 갈등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었다. 셀리나는 2년 동안이나 이러한 갈등 속에서 살아온 것이다. 그녀는 이제 캐나다에서 활발한 삶을 펴거나 리지외의 가르멜에서 관상 생활을 하기 위해서 결정을 내려야 한다. 셀리나가 우리에게 그녀의 내적 갈등을 털어놓았을 때 나는 얼마나 울었던지 머리가 아플 정도였다. 나는 피숑 신부님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분명하게 말했다. "언니의 성소는 한 치의 의심도 없습니다. 언니의 자리는 가르멜에 있습니다." 그리고 셀리나에게 이렇게 썼다. "나는 언니를 생각하며 많이 괴로워했어. 언니의 성소를 위해서 아무 장애물이 없기를 원해. 우리의 사랑이 화덕의 금처럼 아직도 정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셀리나는 가르멜의 수녀가 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곧 새로운 투쟁이 따라왔다. 셀리나는 1894년 8월 8일에 드라트로에트 신부님에게 편지를 썼는데, 가르멜 수도원의 외부 수녀로라도 받아주길 청했다. 그는 셀리나에게 수도원의 규칙상 한 가정의 자녀가 4명씩이나 같은 수도원에 입회할 수 없다고 했다. 곤자가의 마리아 원장 수녀님은 당신의 명성에 기대 온 힘을 다 기울여 셀리나를 도왔다. 그러나 또 다른 저항이 있었는데, 한 수녀가 마르땡 일족의 세력 강화를 단호하게 반대했던 것이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예술가는 어쨌든 수도원에 쓸모가 없습니다." 친척들도 모두 셀리나의 입회를 반대했으며, 이시도르 외삼촌 역시 찬성하길 주저했다. 갑자기 모든 것은 잘 정리되었다. 피숑 신부님은 항복과 함께 이런 편지를 보냈다. "셀리나의 가르멜 성소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 나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는다. 하느님의 뜻이 분명하게 보인다. 그리고 드라트로에트 신부님과 위고냉 주교님 역시 동의했다. 셀리나는 1894년 9월 14일 성 십자가 현양축일에 입회할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 하느님은 동료 수녀님의 저항도 부수었다. 그 수녀님은 내가 있는 자리에서 아녜스 원장 수녀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마르땡의 네 번째 자녀가 입회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이렇듯 행운은 완벽했으며 무엇에도 비할 수 없이 컸던 내 소원이 이루어졌다. 이제 나는 바보스러울 만큼 예수님을 사랑하리라는 단 하나의 소망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 나를 이끄는 것은 오로지 사랑 하나뿐이다. 9월 14일, 6년간의 이별 끝에 셀리나와 감격적으로 다시 만났다. 그녀는 스물다섯이 되었다. 아빠를 보살피며 집안 살림을 하고 결혼 신청을 두 번씩이나 거절한 후여서 그런지 아주 독립적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자유에 대한 열망과 이제까지 살아온 자주적 삶의 방식이 수도원의 엄격한 일과를 받아들이는 것을 어렵게 했다. 셀리나는 재능 있는 젊은 처녀로서 유명한 화가 쿠룩의 제자였으며, 또한 그 당시 새로운 기술의 하나였던 사진을 즐겨 찍었다. 원장 수녀님은 거창한 사진기와 현상을 위한 모든 기구를 입회 때 가지고 오는 것을 허락했다. 축제 때, 서원식 때, 그리고 공동 휴식시간 때 그녀에게 사진 찍는 것이 허락되었다. 연극 잔다르크를 두 번째 공연할 때 셀리나는 이미 수도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있었다. 잘 현상된 사진은 수도원의 연대기를 풍부하게 만들어 주었다. 나는 셀리나가 수도생활에서 단계적으로 성장해 가도록 도와주었다. 수도원 회랑을 지나가면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주위를 둘러봐서는 안 되고, 뛰지 않고 걸어가야 하며, 대꾸하지 않고 불친절한 주의를 들어야 하며, 자기를 방어하지 않고 부당한 비난을 감수하고 인내해야 하며, 항상 침묵을 지켜야 하고, 늘 순종해야 하는 것 등이 그녀에게는 무척 어려웠다. 가끔 그녀는 용기를 잃고 한숨을 지었다. "나는 결코 이 모든 것을 해내지 못할 거야." 나는 그녀가 포기하지 않도록 거듭 용기를 주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일의 결과를 보지 않고 우리의 선한 의도를 보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유일한 목표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