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하여 산다는 것
며칠 전 대형마트에서의 일이다. 어떤 중년 부부가 열 지어있는 쇼핑카트 앞에서 지갑과 호주머니를 뒤지면서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100원 짜리 동전이 없는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동전 필요하세요? 묻고 내 차에 가서 동전 하나를 꺼내다 주었다. 그들은 환하게 미소 지며 “언제 이 빚을 갚지요”라고 농담까지 하며 고마워하였다. 쇼핑 중 매장 안에서 다시 만나 “즐거운 쇼핑하세요.”라며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100원을 가지고 이렇게 상대를 기쁘게 할 수 있구나! 하는 것을 경험했다. 물론 나도 기쁜 마음으로 쇼핑을 할 수 있었다.
남을 위하여 산다는 것이 그렇게 어렵고 번거로운 일은 아니다. 위하여 산다는 것은 상대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다. 상대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다. 상대를 기쁘고 행복하게 하는 것이 것이다. 흔히 보시 하면 재물을 주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보시에는 이종시(二種施), 삼종시(三種施), 사종시(四種施), 팔종시(八種施)로 나누어진다. 이종시는 재시(財施), 법시(法施)를 말하고, 삼종시는 재시, 법시, 무외시(無外施)를 말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삼종시를 채택한다. 재시는 능력에 따라 재물을 보시하여 재물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것을 말하고, 법시는 진리를 구하는 사람에게 자기가 아는 만큼의 올바른 불법을 설명해주어 구원을 돕는 것이고, 무외시는 어떤 사람이 불안과 공포에 처했을 때 위안과 위로로 마음의 기쁨과 평화를 주는 것이다.
붓다는 제자 수보리에게 항아강의 모래 수만큼 몸으로 보시하는 것보다 법 한 구절을 전하는 공덕이 더 수승하다고 하였다. 재시, 법시, 무외시 가운데 어떤 보시가 더 가치 있는 보시인가? 하는 것은 논제가 될 수 없다. 상대를 기쁘고 행복하게 하는 보시가 더 중요하다. 보시의 가치 경중(輕重)은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다. 당장 배고픈 사람에게는 먹을 것을 보시하는 것이 더 기쁨이 될 것이고, 진리를 갈구하는 사람에게는 법 보시를 하는 것이 더 큰 기쁨이 될 것이며, 불안과 공포에 떠는 사람에게는 위로와 위안이 더 큰 보시가 될 것이다. 당장 100원이 없어 카트를 사용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100원이 큰 기쁨을 주는 것이다.
위하여 사는 것은 상대를 위한 것 보다 나 자신을 위하여 필요하다. 인간은 상대적 존재이기에 상대의 기쁨과 행복이 곧 나의 기쁨이 되는 것이다. 내가 기쁘고 행복하기 위해서는 상대를 기쁘고 행복하게 해야 하는 것이 진리다. 창조주가 피조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은 바로 피조세계를 통해 기쁨과 사랑을 느끼시기 위해서다. 창조주도 홀로 기쁘고 행복할 수 없기 때문에 기쁨과 사랑의 대상으로 피조세계를 창조하신 것이다. 그래서 모든 종교는 사랑, 자비, 인(仁) 등을 첫째 덕목으로 삼는다.
어느 종교가 더 구원에 가까운 종교인가 하는 문제는 어떤 종교가 더 위해서 사는 것을 실천하는 종교인가에서 가려진다. 하나님은 특정 종교를 세우신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더 위하여 사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 계신다. 그 곳이 하나님이 함께하는 진정한 교회요 법당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