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다음 자료를 읽고 <작성 방법>에 따라 서술하시오. [4점]
(가) 임진년 재조(再造)의 은혜는 만세토록 잊을 수 없는 것이다. 선왕께서는 40년 동안 재위하시면서 지성으로 섬기며 평생 서쪽을 등지고 앉지도 않았다. 광해는 배은망덕하여 천명을 두려워하지 않고, 속으로 다른 뜻을 품고 오랑캐에게 성의를 베풀었다. ㉠기미년에 오랑캐를 정벌할 때는 은밀히 수신(帥臣)에게 동태를 보고 행동하게 지시하여, 끝내 전군이 오랑캐에게 투항함으로써 추한 소문이 사해(四海)에 퍼지게 하였다. - 인조실록 -
(나) 천총(天聰) 원년 정월 병자일. 버일러[貝勒] 아민(阿敏) 등에게 대군(大軍)을 이끌고 가서 조선을 정벌하라고 명하였다. “조선은 오랫동안 우리에게 죄를 지어 마땅히 성토(聲討)해야 한다. 그러나 이번 결행이 오로지 조선만을 정벌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명(明)의 ( ㉡ )이/가 가까이서 저 해도(海島)를 믿고 미쳐 날뛰며, 우리를 등진 백성들을 받고 있으니 군대를 끌고 가서 정벌하라. 만약 조선도 취할 만하다면 함께 취하라.” - 청태종실록 -
(다) 조선국왕은 지금 금국(金國)과 맹서(盟誓)한다. 두 나라가 화호(和好)를 결정하였으니, 이후로는 서로 맹서를 준수하여 각자의 나라를 지키도록 하고, 잡다한 일로 다투거나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요구하지 않는다. 만약 조선이 금국을 적대시하여 화호를 위배하고 군사를 일으켜 침범한다면 하늘이 재앙을 내릴 것이고, 만약 금국이 불량한 마음을 품고 화호를 위배하고 군사를 일으켜 침범한다면 역시 하늘이 앙화(殃禍)를 내릴 것이니, 두 나라 군신은 각각 신의를 지켜 함께 태평을 누리도록 할 것이다. 천지산천의 신명은 이 ㉢맹약(盟約)을 살펴 들으소서. - 인조실록 - |
<작성 방법> ◦ 밑줄 친 ㉠에 해당하는 전투의 명칭을 쓸 것. ◦ 괄호 안의 ㉡에 해당하는 인명을 쓸 것. ◦ 밑줄 친 ㉢으로 변화한 양국 관계의 내용을 2가지 서술할 것. |
∙㉠사르후 전투
∙㉡모문룡
∙㉢맹약 : 정묘호란의 결과, 후금이 형, 조선이 동생인 형제관계, 개시무역 허용(조공과 국경에서의 무역 인정)
[신뿌샘 조선후기 p61]
명군의 서로와 북로의 군은 서두르다가 무순 동쪽 사르후에서 대패하였다. 이어서 4일에 남로군이 사르후 방면으로 북상하다가 후금군에게 대패하고 우익을 담당한 중로군은 총지휘부가 있는 심양으로 철수하였다. 그 결과 4일간의 전투에서 10만의 명군은 반 이상 궤멸하였다. 남로군에 편성된 조선군도 전투에서 태반을 잃고 후금군에 투항하였다. 당시 강홍립은 후금에 항복하면서 조선군 출병의 불가피성을 설명하면서 후금과의 관계를 악화시키지 않으려 하였다.
[동양사개론 p599]
누루하치는 1616년에 옛날 정복국가인 金을 계승한다고 하여 국호를 後金, 연호를 天命으로, 국도를 흥경으로 정하고 지금까지 공손한 자세를 취하던 대명관계(對明關係)를 적극적인 공세로 전환하였다. 그는 明나라가 자신의 祖와 父를 무참히 살해하고 여진인을 박해했다는 등의 7가지 조목(七大恨)을 내세우고 침략전쟁을 시작하여 많은 전쟁포로를 획득하였다. 1619년 명나라는 대군을 보내 혼하(渾河)와 소자하(蘇子河)의 합류부근 사루후에서 싸웠으나 거의 전멸하였다. 이때 조선에서는 명나라의 요청으로 광해군이 강홍립에게 1만 3천명의 군사를 주어 이 전투에 참가시켰다. …
사루후전투는 명나라 군사력의 취약성을 그대로 드러냈고 누르하치로서는 명나라 정복에 자신감을 갖게된 역사적 싸움이었다.
[신뿌샘 조선후기 p62]
… 1626년 누르하치가 사망한 뒤 홍타이지(청태종)가 즉위하면서 후금의 분위기는 주전론으로 급변하였다. … 인조 5년(1627) 3만의 군사를 보내 조선을 공략하게 하였다. 이것이 정묘호란으로 불리는 후금의 침략이다.
후금의 공격에 조선 정부도 평안도 방어선은 쉽게 무너져 안주성이 함락되었다. 당시 ( 이괄 )의 난으로 하삼도 군사의 지원이 따르지 않아 평안도에는 지방 병력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
조선의 강화 요청을 받아들이면서 군대를 철수하되 양국이 형제국임을 명시하였다. 조선은 후금과 명의 관계에서 엄정한 중립을 요구받았던 것이다.
[한통 p316∼317]
왜란 중 명의 세력에서 벗어난 여진족은 강대한 세력으로 성장하여 마침내 후 금을 건국하고(1616) 명을 압박하였다. 이때 조선에서는 선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광해군(1608-1623)이 내정과 외교에서 훌륭한 솜씨를 발휘하고 있었다.
그는 주자학적인 사림정치가 부국강병에는 무력하다고 보고 북인을 등용하여 정통 주자학자를 비판하는 가운데 성곽과 무기를 수리하고 군사훈련을 강화하는 한편, 전쟁으로 피폐된 산업을 재건하고 국가수입을 확대하기 위하여 양전사업과 호적정리를 실시하였다. 또한 외교에 있어서도 왕조 교체의 대륙 정세를 간파하여 신중한 중립 외교를 견지하였다. 그 한 예로 명이 후금을 치기 위해서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였을 때 광해군은 강홍립(姜弘立)에게 1만여의 군사를 주어 출병케 하였지만 형세를 관망하여 향배를 정하도록 밀령을 내림으로써 명의 요청을 들어주면서도 후금과의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후금과의 화평은 오래 계속되지 못하였다. 인조반정(仁祖反正, 1623)으로 광해군이 퇴위하고 북인 대신 서인이 집권하면서 친명 배금의 외교노선을 분명히 하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후금은 명장 모문룡(毛文龍)이 철산의 가도(椵島)에 주둔하고 요동 지역의 회복을 꾀하고 있는 데 대하여 위협을 느끼고 있었는데, 조선의 이러한 태도는 그들의 신경을 더욱 자극시키기에 충분하였다. 이때 마침 조선에서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 후금으로 하여금 조선을 침략할 수 있는 구실을 만들어 주었다. 인조반정이 끝나고 서인들 사이에서 논공행상을 둘러싼 분열이 일어났는데, 이 때 2등공신이 된 이괄이 이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켜 한 때 서울까지 점령하였다가 곧 관군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그의 잔당들이 후금으로 도망하여 인조 즉위의 부당성을 호소하였던 것이다. 당시 조선과 명의 연결을 경계하고 있던 후금은 이를 구실로 3만의 군사를 내어 조선을 공격하니 이것이 정묘호란이었다(1627, 인조 5). 후금군이 평산에 이르자 정부는 강화로 피난하고 화의를 청하니 이에 후금은 형제의 맹약을 맺고, 조공과 국경에서의 관무역을 조건으로 철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