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본 문 / 로마서 12장 15절
주 제 / 그리스도인은 공감함으로써 이웃의 고난에 참여해야 한다.
작성일 / 2024년 3월 10일. 사순절넷째주일. (№ 24-10)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롬 12:15)
Ⅰ 공감은 그리스도인의 필수덕목 (눅 7:31∼32)
오늘은 사순절넷째주일이다. 사순절넷째주일인 오늘은 ‘이웃의 고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태도’가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보려고 한다.
로마서 12장은 마치 ‘십계명’처럼 ‘그리스도인의 생활지침’을 제시한다. 또한 예수님의 ‘산상수훈’처럼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마음가짐’을 제시한다. 그래서 로마서 12장은 ‘바울의 계명록’, 혹은 ‘바울의 수훈록’이라 해도 무방하다.
오늘의 본문 로마서 12장 15절을 다시 본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마음가짐은 ‘공감’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름지기 ‘공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그런데 사실 이 가르침은 예수님에게 배운 가르침이다.
세례요한이 세례를 베풀 때에,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요한에게 나아와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율법교사들’은 전혀 그러지 않았다(눅 7:29∼30).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현상을 비유로 말씀하셨다. “…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무엇과 같은가?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을 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눅 7:31∼32).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를 ‘이 세대의 사람’이라 칭하셨다. ‘땅에 속한 사람’이란 뜻이다. ‘공감의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피리를 불면 결혼식놀이를 하자는 것이니 춤을 추어야 하고, 곡을 하면 장례식놀이를 하자는 것이니 울어야 하는데,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울지 않는 것은 ‘공감의 의지’가 없는 연유이다.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니. ‘대부분의 유대 백성들’, 심지어 ‘세리들’까지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다. 그런데 종교지도자들이 회개하지 않고 세례도 받지 않는다. 회개와 세례에 대한 ‘공감의 의지’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공감의지가 없는 사람을 가리켜 ‘이 세대의 사람’, 즉 ‘땅에 속한 사람’이라 칭하셨다. ‘공감의 의지’가 있는 사람이 ‘하늘에 속한 사람’이다.
‘세월호참사’가 벌어졌을 때, 참담한 마음뿐이었다. 그런데 몇일 후에는 많이 부끄러웠다. 어느 목사들의 공개발언 때문이었다. “가난한집 아이들이 설악산이나 갈 것이지 제주도를 간다고 설치다가 사고를 당했다” 이런 식으로 말했다. 만약 설악산을 가다가 자동차 사고가 났다면 뭐라 말했을까? ‘공감의 의지’도, ‘공감의 능력’도 없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의 비유에 따르면 ‘이 세대의 사람들’, ‘땅에 속한 사람들’이다. 바리새인들과 율법교사들이 공감의 의지가 없었던 것처럼, 이 세대의 목사들도 공감의 의지가 없다. 그래서 몹시 부끄러웠다. 이런 사람들의 설교를 들으며 신앙생활을 하니, 한국교회가 점점 빛을 잃어가는 중이다.
그리스도인은 이웃의 불행에 대하여 공감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기도할 수 있고, 위로 할 수 있고, 도울 수 있다. 그렇게 사는 모습이 ‘하늘에 속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다. “설악산이나 갈 것이지…”, “보상금 받으려고 강짜를 부린다.” 이런 모습은 ‘땅에 속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목사들이 그렇게 말하였다는 소식을 들으니 많이 부끄러웠다.
예수님의 고난을 마음에 새기는 사순절에는 이웃의 고난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으로 가꾸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공감은 그리스도인의 표식이기 때문이다.
Ⅱ 공감을 요구하는 비유들 (마 25:34∼45; 눅 10:30∼37)
예수님의 말씀 중에는 “고난당하는 사람들과 공감하라”는 요구가 참 많다. 예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우는 자들과 함께 울기를 원하신다는 뜻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 10:30∼37)가 가장 대표적인 말씀이다.
어떤 사람이 길에서 강도를 만났다. 모든 것을 빼앗겼고, 죽도록 맞은 상태로 길에 버려졌다. 아주 질이 안 좋은 강도를 만난 것이다. 마침 ‘제사장’이 그 길을 가다가 죽어가는 사람을 발견했다. 그런데 피해 갔다. 잠시 후, ‘레위인’도 그 죽어가는 사람을 발견했지만 역시 피해 갔다. 성직자들인데 왜 그리 매정했을까? 율법에 따르면 시체와 접촉한 사람은 일정기간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 하나님을 섬기는 성직에 충실하고자 죽어가는 사람을 피해 간 것이다.
얼마 후, ‘사마리아 사람’이 죽어가는 그 사람을 발견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유대인들로부터 존경받는 성직자라면,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들로부터 천대받는 ‘준 이방인’이다. 그런데 이 천대받는 사마리아 사람은 나귀에서 내려 죽어가는 사람을 응급처치를 한다. 그리고 자기가 타고 온 나귀에 태워 주막으로 데려가 치료받게 한다. 그리고 치료비용을 전부 자기가 부담한다. 성직자도 아니면서 어떻게 이런 행동이 가능했을까? “…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눅 10:33b) 불행한 처지를 ‘공감’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수님의 성품 중 가장 대표적인 성품이 ‘불쌍히 여기는 성품’, ‘공감하시는 성품’이다. ‘성직’으로써 예수를 따르는 것 아니다. ‘불쌍히 여기는 성품’, ‘공감하는 성품’으로 예수를 따르는 것이다.
‘양과 염소의 비유’(마 25:34∼45)도 ‘공감’을 요구하시는 비유이다.
임금이 왼편의 염소들에게 말한다. “…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마 25:41b). 왼편의 염소들을 ‘저주 받은 자들’이라 칭한다. 마귀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고 명한다. 왜 이렇게 가혹한 벌을 내렸을까?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마 25:42∼43). 배고픈 이웃, 목마른 이웃, 헐벗은 이웃, 병든 이웃, 이들의 형편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벌을 받는다고 말씀하신다. 이들에게도 변명거리는 있다. ‘고르반’(막 7;11, ‘하나님께 드림’) 즉 하나님을 먹이려고, 하나님을 마시게 하려고, 하나님을 입히려고 구별해 놓았으므로 그것으로 불쌍한 이웃을 도울 수 없었다고 변명할 것이다. 그런데 고난에 처한 이웃, 바로 하나님이셨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핑계로 ‘보이는 하나님’을 외면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이들을 가리켜 ‘저주받은 자들’, ‘영원한 불에 던져질 자들’이라고 말씀하신다. 누구라도 설령 성직자일지라도 ‘공감의 의지’가 없다면 천국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임금은 오른편의 양들에게 말한다. “…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마 25:34b) 예수님은 양들을 가리켜 ‘복 받을 자들’,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자들’이라 칭하신다. 왜 이리 귀한 복을 선언하실까?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5∼36) 고난에 빠진 이웃을 불쌍히 여겼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고, 그래서 밥 한 그릇 주었고, 옷 한 벌 나눠 입었다. 그런데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을 대접한 것이었다. ‘공감의 의지’가 하나님을 대접하게 했던 것이다.
Ⅲ 함께 하는 고난은 가볍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침공을 받아 혹독한 세월을 보내고 있다. 그렇지만 전쟁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함께 이겨내려고 애를 쓴다. 어떤 청년은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두고 모아 놓은 돈으로 빵을 만들어 군인들과 이웃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러자 여기저기 후원하는 사람들이 생겨나 더 많은 빵을 만들어 더 많은 군인들과 이웃들에게 빵을 나누어준다. 전쟁은 최악의 고난이다. 그렇지만 공감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서로 격려하면서 이겨내고 있다.
그런데 개인이 고난당하는 경우는 외딴 길에서 강도를 만난 경우와 같아서 매우 힘들다. 너무 힘들어서 자살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함께 하는 이웃’이 없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인한 고난은 ‘함께 하는 이웃’이 있어 견딜 수 있지만, 외딴 길에서 강도 만난 경우에는 ‘함께 하는 이웃’이 없어서 견디지 못하고 생을 포기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함께하는 이웃’이 되기를 바라신다. ‘불쌍히 여기는 사람’, ‘공감하는 사람’이 되길 바라신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도 그것이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 ‘공감의 의지’ 때문이다. 우리는 영원한 불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 창세전부터 예비 된 그리스도의 나라로 가고 싶다. 바로 그와 같은 우리의 마음을 공감하셨기 때문에 그러라고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우리도 예수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을 비방하거나 책망하지 말고, 위로하고 격려하여서 살려야 한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공감하는 마음’을 가져야한다.
사순절에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 ‘공감하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자. 그리고 ‘공감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나서보자!
<기도>
영광교회 성도들, 우는 자들과 함께 울게 하소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공감하는 마음을 십자가로 알고, 그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