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6월 10일(오후2시~4시)/미술세계 회의실
사회│김명숙 본지 편집팀장 정리│장형미 기자 사진│김태연 기획팀장
· 국내의 비엔날레 소사_ 김명숙
· 해외 비엔날레, 문화권력의 다(多) 중심 패권주의와 글로컬리레이션_ 김성호
사회자: 국내, 국제비엔나레 행사의 확산과 미술 분야에 대한 대중적 기반이 상향세를 이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위해 치러야 할 홍역들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대표적인 증상은 ‘외적 풍요를 감당할 전문 인력의 부재’ ‘전시구성과 진행의 미숙함’ ‘행정 편의적 운영으로 인한 미술계의 내용 빈곤’입니다. 일부 장르의 경우 행사자체에 대한 존립에 회의가 제기 되고 있기도 한 시점에서 본 월간 미술세계는 국내 국제비엔날레가 한국미술에 끼친 영향과 국내비엔날레의 향후 방향을 짚어 보고자 본 좌담회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모두들 바쁘신 일정 가운데 참석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먼저 각각의 광주비엔날레, 부산비엔날레, 서울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 경기도세계도자비엔날레, 청주공예비엔날레,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의 취지와 특성 및 의의에 대해 간단히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장석원 1995년도에 광주비엔날레가 개최되었는데, 그때까지는 세계적 문화프로젝트가 국내에 없었습니다. 그 시점이 지방자치제를 하면서 지방에서 무언가 문화프로젝트로서 세계적인 것이 없을까 고심하던차에 광주가 예향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러한 배경으로 광주비엔날레가 개최되기에 이르렀습니다. 1회때 대규모 관람객(165만이상)이 몰려들어 광주를 전세계적으로 이슈화 하였습니다. 일찌기 한국의 문화적 흐름에서 그런 예는 없었습니다. 그 충격과 여파로 국내에서 부산비엔날레, 경기도세계도자비엔날레, 서울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 등이 나타나게 되고, 아시아권에서는 요코하마트리엔날레, 타이베이비엔날레, 상하이비엔날레 등이 출현하는데, 한편 문화적 측면의 거시적 시각에서 보면 그동안 아시아권 문화가 세계화 프로젝트를 갖추지 못했는데, 광주비엔날레가 도화선의 계기가 되지 않았느냐 하는 것이고, 이는 아시아권 문화가 현대적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아시아권은 식민지시대도 거쳤고 서구문화의 침탈과 지배를 받는 근대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러한 과정을 넘어서 경제, 정치, 군사적 측면에서 팽창하면서 문화적으로 아시아의 영광을 되찾자, 문화적 역량을 발휘하자는 단계로 진입하게 되었다는 것이죠. 오늘의 아시아는 단순히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현대라는 시점에서 과거와 미래가 만나 용광로에서처럼 융합되어 문화의 힘을 폭발시키는 계기로서 비엔날레는 단순히 국내외의 영향을 미치는 문제로서 뿐 만 아니라 세계적 문화코드로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윤진섭 서울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는 현재 쓰이는 명칭이고, 처음에는 ‘미디어_시티 서울’이라고 불렀죠. 그 때가 2000년 인데, 서울시가 아시아의 문화중심축으로서 어떤 아이템을 가지고 이를 특성화시키느냐 하는 문제에 고심하던 차였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미디어인데 상암동에 미디어 밸리를 조성하기로 결정하면서 일종의 문화전략 차원에서 ‘미디어_시티 서울’을 고안해 내게 되었던 거죠. 당시 고건 시장은 여기에 상당한 애정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아무튼 미술계의 입장에서 볼 때는 상당히 고무적인 사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미술계의 사정으로 볼 때, 뉴 미디어가 지닌 미래 지향적 가치라고 할 까, 문화의 선진적 프런티어라는 입장에서 보자면 이만한 고부가가치를 지닌 미술행사가 당시로선 매우 드물었습니다. 또한 미디어가 산업과 직접적인 연계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착안 자체는 매우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첫 회는 상당한 거액의 예산(일설에는 70억이니 100억이니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이 전시 행사에 소요되었다고 하는데, 성과 면에서는 찬반양론으로 명암이 엇갈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경위야 어떻든 간에 제1회 행사가 이 분야에 관한 국제전이 전무하던 시절에 하나의 초석을 놓았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야 될 줄 믿습니다.
2002년도에는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주관이 이관되면서 공식적인 ‘서울 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로 명칭이 변경 되면서 ‘미디어_시티 서울’이란 타이틀을 같이 병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제가 총감독을 맡았던 2004년 제3회 비엔날레의 주제는 ‘게임/놀이’였고, 타이틀은 ‘Digital Homo Ludens ’로 정해졌습니다. 1, 2회 양대 비엔날레를 거듭하면서 미디어 아트와 관련된 국제미술행사로 확고히 자리를 잡았다는 평을 받기에 이르렀죠. <Art in America> 지의 리차드 바인 편집장이 상당한 페이지를 할애하여 소개할 만큼 이번 행사가 국제적으로도 부각되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광주비엔날레와 부산비엔날레와 같은 현대미술 중심의 비엔날레들과 어떠한 차별성을 구현하느냐 하는 것인데, 서울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는 디지털 아트의 영역만을 전문적으로 파고들어 예술과 산업의 연계점을 찾고 있다는 점에 그 특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정걸 세계도자비엔날레는 2001년도에 세계 도자기엑스포와 함께 출발하여 3회를 거듭해오면서 국민적 관심의 행사로 성공을 거두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도자인구의 70%가 집중되어 있는 이천 광주 여주를 배경으로 도자벨트를 형성시키고, 경기도를 중심으로 한 한국의 도자예술과 도자산업을 발전시키는데 원동력을 제공한다는 뚜렷한 목적과 이념을 가지고 출발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행사의 의미를 잃지 않고 확실한 성과를 거둘 수 있는 가장 큰 바탕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세계도자사상 우리나라는 도자선진국으로서 명성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근대 이후 일본과 유럽으로 주도권이 넘어갔고, 이제 다시 그 명성의 되찾고 부활시켜, 세계적인 도자 강국으로 발전시키려는데 큰 목표가 있습니다.
현재 경기도 세계도자비엔날레는 3회째 개최하고 있는데, 이미 국제 도예계에서 가장 주요한 행사로서의 위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세계도자비엔날레처럼 규모가 크고 내용 있는 비엔날레가 없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도자분야는 우리나라가 국제경쟁력이 있다는 이야기죠. 국제 도예계에서 경기도 세계도자비엔날레는 종합적 내용을 아우르는 대규모의 유일한 비엔날레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으며, 국제도예계에 미치는 영향력도 상당히 높아지고 있습니다. 세계의 도자 작가들이 참여를 원하는 상황입니다. 내용적으로도 순수비엔날레로서의 국제전과 대중적 이벤트들을 결합시켜 독특한 형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비엔날레들이 매너리즘에 빠져있다는 비판에 비추어 도자라는 특성을 최대한 이용하여 차별화하고자 했기 때문에 앞으로도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병기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는 목적의식이 뚜렷한 비엔날레로서 1997년도에 전북 무주에서 열린 동계유니버샤드 대회의 부대 문화행사로 시작하여 지금은 명실상부한 비엔날레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전주만의 문화적 특징인 맛(음식)·멋(미술,서예)·소리(판소리)를 이 시대에 맞게 재생산하여 세계의 문화 시장에 내놓자는 것이 시작의 동기입니다. 맛, 멋, 소리 중에서 첫 번째로 멋의 서예가 세계화의 테이프를 끊은 것이지요. ‘세계서예’라는 이름으로 시작하자 한편에서는 비평의 목소리도 높았었습니다. 서예가 한국, 중국, 일본 등 한자 문화권에만 존재하는 예술인데 어떻게 ‘세계서예’라는 말을 쓸 수 있느냐는 비평이 일었고, 중국이 서예의 종주국임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인데, 한국의 서예를 어떻게 세계화할 수 있겠느냐는 회의론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가 ‘세계’라는 모자를 쓰고 나온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21세기 문화 예술의 시대에는 한자문화권 문화 예술의 정수인 서예를 한자 문화권에서만 향유할 것이 아니라 세계인이 함께 향유해야한다고 생각했고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생각아래 중국이나 일본에 앞서 한국의 서예를 세계의 문화시장에 내놓음으로써 서예를 세계화 하겠다는 뜻에서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라는 이름을 들고 나온 것입니다. 서예의 종주국은 분명히 중국입니다. 그러나 중국은 1949년에 공산주의 정부가 수립되면서 서예를 하지 않았습니다. 서예를 가장 부루주아적인 예술로 인식하여 거의 폐기하다시피 하였고, 문화혁명기간에는 서예를 심히 파괴하였습니다. 1978년 개혁 개방이후 중국 서예는 80년대 초부터서야 소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2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중국의 서예는 아직 과거의 상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비록 쇠퇴하기는 하였으나 전통서예의 맥을 고스란히 이어왔습니다. 중국의 서예는 한국의 서예에 비해 정통성과 고유성, 정체성 면에서 뒤떨어져 있는 면이 있습니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우리가 먼저 우리의 서예를 세계의 문화시장에 가지고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지절부터 ‘탈아입구(脫亞入歐:아시아를 벗어나서 유럽으로 나아가자)를 지향함으로써 서예마저도 서구 미술화해 버린 면이 많습니다. 전위서예와 묵상(墨象)이 바로 그런 것이지요. 서예의 고유성으로서의 구심력을 잃고 서예외 적인 원심력이 강하여, 일본의 서예는 이미 세계에 내놓을만한 서예로서의 아이덴티티를 많이 상실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변질로 인하여 한국 서예의 고유성이 더욱 돋보이고 있는 시점입니다. 이러한 시점에 맞춰 한국서예의 세계화를 내걸고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가 탄생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서예비엔날레에서는 한국 서예의 고유성을 지키려는 노력도 많이 하면서 동시에 서예를 현대에 맞게 변용하려는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간에 우리 서예비엔날레에서 개최한 <세계문자서예전〉,〈디자인 서예전〉,〈세계 미술가 서예전〉,〈서예술의 실용화전〉등이 그러한 노력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사회자: 한국미술의 세계화 논리가 수도 중심의 문화적 편중현상을 양상하는데, 이 같은 현상 속에서 지역의 비엔날레는 미술의 지역화와 세계화 양자를 모두 지향하는 상황입니다. 이 두 지향점 사이의 적절한 방안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병기 중심성과 지역성을 동시에 확보하는 방법은 철저한 연구와 참신한 기획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연구를 통해서 중심성 즉 한국을 대표하는 대표성과 함께 지역의 특성을 반영한 지역성을 동시에 확보하는 것입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는 말은 철저한 연구와 참신한 기획이 바탕에 깔릴 때에만 성립이 가능합니다. 연구를 통해 세계를 감동시킬 ‘그 무엇’으로서의 콘텐츠를 개발할 때에만 한국을 대표하는 비엔날레가 될 수 있고, 아울러 전북의 특색을 세계에 알리는 길도 열리는 것입니다. 물론 정책적인 배려나 우리 문화예술인들의 자성이 필요한 부분도 없지 않습니다. 지방에서 이미 자리를 잘 잡아가고 있는 행사를 서울이라는 지역적 이점을 이용하여 서울이 가로채서 그대로 복사하여 재현한다면 지방의 행사는 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전북에서 발원하여 전북에서 이미 기초를 닦은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를 모방한 복제성 행사는 서울은 물론 다른 지방 어디에서도 개최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은 국력의 낭비입니다. 진지하게 연구하다 보면 얼마든지 새로운 콘텐츠를 개발할 수 있을 텐데, 그런 노력을 포기한 채 앞서가는 문화행사의 발목을 잡으려 하는 일이 있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예술 행사에도 일정부분 행정 기관의 조정 기능과 함께 우리 문화예술인들의 자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윤진섭 ‘미디어_시티 서울’은 독특한 장르적 특성을 유지하고 있으므로 ‘서울 국제 미디어아트 비엔날레’는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고 봅니다. 다양한 디지털 분야에 대해 명확한 타켓을 지니고 있으므로 앞으로 유비쿼터스(ubiquitous) 생활권에서 미래지향적 비엔날레로서 예술, 과학, 생활의 적절한 조화와 제휴적인 문제를 제시하게 되리라 봅니다. 작년 2004년도의 제3회 주제인 ‘게임/놀이’에서 보듯이, 컴퓨터 게임에 명암이 공존한다면 암(?)에 해당하는 부분, 즉 컴퓨터 게임의 폐해에 대한 심각성과 중독성에 초점을 두어 그에 대한 치유의 기능을 시도하는 작가들이 있었던 것은 고무적인 현상이죠. 비판적 안목을 지닌 작가들이 여럿 있었는데, 가령 기존의 게임이 지닌 스토리(story)라든지, 프로그램을 해킹하여 전환시키는 작가들이 그들입니다.
한편, 다른 두 비엔날레를 비교하면 광주비엔날레와 부산비엔날레의 현대미술제가 유사한 방향을 설정함으로써 이에 대한 일부의 비판론도 제기되고 있는 실정인데, 이는 예산의 효울적 집행이란 측면에서 볼 때, 차별화 전략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가령, 부산 비엔날레의 경우 바다미술제를 대규모로 특화한다면 세계적인 비엔날레 행사로 자리 잡을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사회자: 최근, 지방자치 단체들은 각종 비엔날레 유치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과연 한국의 비엔날레가 지방자치단체에게 어떤 메리트가 있기 때문일까요? 비엔날레가 지역행정에 얼마만큼의 기대치에 부합해 왔는지 의견을 듣고자 합니다.
장석원 한국의 비엔날레나 지역에서 행하는 대부분의 문화 프로젝트가 정치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 이유는 지역자치단체장을 선거로 뽑기 때문에 지역과 지역단체장의 이미지를 같이 묶어 정치적으로 이슈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대다수 문화행사는 정치 권력의 영향을 받는 불가분의 역학관계 하에 있습니다. 순수하게 고도의 문화전략적 역량을 발휘해야 하는 국제적 문화 프로젝트가 필요로 하는 시스템과 비유할 때 문제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와중에서도 광주, 부산 ,서울의 비엔날레급의 문화 프로젝트는 그동안 한국미술이 가지고 있는 고질적, 권위적 틀을 깨트렸습니다. 이를테면 학맥, 인맥의 중심의 권위주의와 보수성, 소수 전문가들에 의해 주도되고 그 범주에 머물던 전위개념의 현대미술운동과 엘리트주의를 깨뜨렸습니다. 비엔날레는 단순히 전문가들에 의한 전시 행사라기보다는 세계성을 모토로 대중성과 동시에 시대적 및 지역적 정체성이 이슈화되고 실험되면서 국제적으로 경쟁력을 가져야 하고 경쟁력이 있을 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인식을 각인시키는 장이 되었습니다.
한편 이에 대한 부작용으로 지목할 수 있는 것은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와 유사한 서울서예비엔날레가 개최된다든지, 부산비엔날레의 현대미술제가 광주비엔날레와 유형적으로 비슷한 형태로 중복되는 문제를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그 배경에는 각 지역의 이기적, 정치적 의지가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 전체적으로 문화 프로젝트에 대한 교통 정리 같은 것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그리고 그 문화적 프로젝트가 지역 단체장들의 정치적 이미지를 미화시키는 정도의 봉사로 전락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문화적 역량을 길러야 할 것입니다.
문화 프로젝트는 정치, 경제, 사회 등 전 분야에 관여되면서도 특별히 문화적 칼라를 선명히 드러내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선 시급한 것은 문화프로젝트가 정치적 지배로부터 훨씬 벗어나야 하며, 그 여부가 곧 프로젝트의 성패를 좌우할 것으로 봅니다.
서정걸 국내에서 개최되고 있는 비엔날레를 비롯하여 수많은 지역축제가 난립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지역의 문화를 잘 부각시켜 성공하는 행사도 있지만, 대부분은 예산낭비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는 행사들입니다. 이렇게 많은 축제와 비엔날레 행사가 열리는 것은 문화행사가 갖는 경제적 효과와, 지역의 이미지메이킹에 효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지자체들이 앞 다투어 축제행사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문성이 없는 비전문가들에 의해 양산되는 행사들은 성공할 수가 없습니다. 도자분야만 해도 김해 문경 강진 등 여러 곳에서 추진하고 있습니다. 어느 지역에서 성공했다고 해서 따라하는 식의 행사도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그 지역만의 고유한 문화자산을 문화행사로 발전시켜야 하며, 반드시 전문가가 참여하여 기획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국제행사로서의 비엔날레는 무엇보다 국제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방향설정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다른 비엔날레들과 비슷한 성격의 행사로는 국제사회의 이목을 끌기 힘들고, 세계작가들이 주목할만한 기획력과 차별화 전략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자: 지역 비엔날레가 지역내부로 지나치게 한정되는 현상으로 인해 여타 지역과의 관계에서 괴리도 발생합니다. 거의 같은 시기로 개최되어 관객을 이분하는 현상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지역 비엔날레가 지역 간 문화 연계를 형성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이 있겠는가?
윤진섭 한 해에 경쟁적으로 열리는 것은 좀 지양해야 한다고 봅니다. 한 해에 열려 다양한 메뉴를 한꺼번에 맛본다는 장점도 있겠습니다만, 큐레이터와 작가의 중복 출연 등 과열 현상도 일어날 수 있어 그렇게 바람직하게 보이지는 않는군요. 그래서 서로 엇갈리게 개최하는 방안은 어떨는지 생각하구요, 또 하나는 지역과 지역 간, 수도와 지역 간 동일한 형태의 비엔날레급의 대규모 미술제는 두 가지 측면을 지닙니다. 긍정적인 측면은 경쟁적인 관계에 섬으로써 상호간에 다양한 아이디어를 통해 성공적인 행사를 낳을 수 있겠고, 부정적인 측면으로는 행사가 난립함으로써 그 나물에 그 밥인 난마식의 소모적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결론적으로 유사와 중복이라는 본질적인 부분을 정리해야 하는 과제가 남습니다.
사회자: 국내 비엔날레의 지역기금 사용문제입니다. 지역기금 사용으로 정부나 지역행정의 영향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을 볼 때, 비엔날레 본래의 취지 의도에서 벗어나지 않을까 우려되는데, 재정 자립의 문제를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지요?
윤진섭 비엔날레나 조각공원과 같은 대규모 문화행사는 실질적으로 중앙 정부의 지원과 자체 조성 기금으로 행사가 치뤄집니다. 2004년도의 경우, 문화관광부에서 광주비엔날레에 40억, 부산비엔날레에 20억의 지원금이 내려갔는데, 이는 현재 문예진흥기금의 미술부문 전국 예산인 14억 정도에 비해볼 때 큰 액수가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올해의 아트뱅크 예산이 20억~30억 정도인 것에 비해볼 때도 단일 프로젝트로써 광주비엔날레가 40억을 보조받는 것은 과다한 책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점은 국내의 미술 인프라 구축이라는 효과 면에서 봐도 비균형적으로 국가 예산이 쓰여 지고 있는 점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광주든 부산이든 재정자립도가 완성될 때까지만 중앙정부가 지원을 하고 아울러 국제 전체의 미술 인프라 구축을 위해 지식 기반을 육성하는 장기적인 정책을 펴야하는데, 비평에 대한 지원은 장기적인 입장에서 볼 때 이의 한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김병기 앞서 여러분께서 지적하신 바와 같은 상황이기 때문에 지금 전국 각지에서는 ‘세계’ 혹은 ‘국제’라는 타이틀을 건 미술제가 우후죽순처럼 탄생하고 있습니다. 깊은 연구나 참신한 기획도 없고, ‘반드시 개최해야할 이유’도 분명하지 않은 행사들이 지역 기금이나 정부의 보조금을 타기 위해서 급조되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입니다. 게다가 이러한 행사들이 지역 사회의 정치적 상황과 연계되어 때로는 행사를 위한 행사로 기획되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이렇게 부실한 행사들이 ‘세계’, 혹은 ‘국제’라는 타이틀만 걸고 양산되다가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결과도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건실한 재정자립도를 지향하게 하는 것도 일정부분 필요한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예술행사를 산업으로 간주하여 ‘자립도’를 내세우는 것이 우습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아울러 말씀드릴 것은 최소한 문화행사에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비극적인 현상을 막기 위해서는 우리 문화 예술계에 공정한 평론이 활성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 문화예술계 스스로의 자정능력이 매우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장석원 정부보조금(40억)이 광주비엔날레로서는 과다 지원이 아니라고 봅니다. 돌이켜 보건데 1995년 광주비엔날레가 출현하면서 세계 미술계의 주목을 받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아시아에서 개최되는 첫 비엔날레가 어떻게 그리 막대한 예산을 투입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경이로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실질적 전시예산은 35억 내외로 해마다 긴축 재정예산으로 감소하였습니다. 다만, 부대행사규모와 체제유지비가 많이 소요되어 전체적으로는 80억~100억 정도가 듭니다. 앞으로 문화의 중요성과 문화생산의 가치, 세계적 프로젝트로서의 문화적 위상을 고려할 때에, 그(40억)정도의 지원은 많다고만 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진흥기금(14억)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다고 느끼는 것뿐입니다. 진흥기금의 재정을 크게 늘려가야 할 것입니다. 단순히 40억이 많다는 생각보다는 거시적 관점에서 문화적 역량을 키워나가는 방향에서 고려해볼 문제입니다.
서정걸 경기도 세계도자비엔날레는 재단이 설립되어 비엔날레뿐 아니라 도자분야의 여러 사업들을 병행하고 있어서 차후에는 재정자립이 가능할 수도 있지만, 비엔날레라고 하는 순수한 문화행사를 통해 재정적 자립을 이룩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상황입니다. 따라서 지방정부나 중앙정부의 지원 없이는 불가능한 현실입니다. 경기도의 경우에도 축제를 비롯한 다양한 문화행사들이 있는데, 특정 지역의 행사에 대규모의 예산을 지속적으로 지원하는 것도 어려운 현실입니다. 그러나 형평성 때문에 좋은 행사에 지원을 못하는 것도 맞지 않습니다. 앞으로 성공적인 행사, 의미가 있고, 목적이 뚜렷한 행사와 그렇지 못한 행사를 차별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행사 주최자의 입장에서도 지나치게 의존적인 태도를 지양해야 할 것입니다. 행사와 관련된 다양한 마케팅아이디어를 도출하여 자립하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김병기 자립은 할 수만 있다면 하는 게 좋겠지요. 현재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는 도서의 개발과 판매, 영상 교재의 개발과 판매, 서예예술을 이용한 실용상품의 개발과 판매 등을 통하여 총 소요 예산의 1/4 정도를 자립재정으로 충당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립을 위해 지나친 대중성을 지향하지는 않습니다. 대중성을 지향한 나머지 서예, 혹은 서예비엔날레 자체의 본질을 해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한 점입니다.
장석원 자립성이란 단순히 대중성(관객의 증대)의 지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전시의 성격 및 질적 고양이라는 측면과 동시에 고심해야 할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비엔날레는 대중성 확보와 세계적 문화구도의 속의 독특한 위상 사이에서 모순을 풀어 낼 수 있는 탁월한 기획력을 필요로 합니다.
사회자: 참여관객제 도입으로 부각된 대중성이 향후 비엔날레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보는지. 더불어 비엔날레의 전문성과의 관계는 어떻게 전망하는가?와 비엔날레는 현장 작품의 완성에 동참하는 일반관객에게, 현대 한국미술에 대한 이해를 어느 정도 돕고 있는지요?
윤진섭 베니스라든지 상파울로 비엔날레는 본질적으로 대중성을 지향한다기보다는 문화의 첨단적 인 프론티어로서 미술을 통해 인류의 미래적 비젼을 제시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다시말해, 강한 주제의식을 가지고 밀고 나가는 것이 비엔날레의 성공 요인이라고 여겨집니다. 단순한 관람동원의 숫자놀음이 아닌 일관된 주제의 제시는 단기적 승부보다는 지속적인 신뢰를 전제로 하며, 장기적 투자를 하는 것이 향후 독특한 비엔날레 모델을 창출할 수 있다는 점에서 바람직하다고 여겨집니다.
제5회 광주비엔날레가 참여관객제를 도입하고 이를 큰 이슈로 삼았는데, 미술사적 측면에서 볼 때, 이는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는 일입니다. 이미 금세기 초엽 다다를 비롯하여 미래파, 러시아 아방가르드와 같은 전위적 운동에서 특히 퍼포먼스를 중심으로 관객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한 모델이 있고, 연극을 비롯한 공연예술에서의 전위 운동은 관객이라는 요소를 일찌감치 눈여겨 봤습니다. 가령, 페터 한트케의 ‘관객모독’과 같은 경우가 그렇습니다. 또 요셉 보이스는 여러 사회 조각적인 퍼포먼스를 통해 능동적인 입장에서 관객참여를 통해 사회를 개조해 나가고자 하는 입장을 취하기도 했습니다. 광주비엔날레에서 시도했던 참여관객제(관객참여가 아닌 ‘참여관객제’라는 것이 어떻게 제도화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만)는 일종의 ‘프로그래밍화된 것’으로서 자발성을 확보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그 한계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장석원 관객을 단순히 숫자로서만 인식한다면 그것은 비엔날레 형성의 중심 축 가운데 하나인 관객에 대하여 몰이해를 드러낼 따름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전시 기획도 일방적으로 관객에게 제공하는 것일 뿐이라면 사회 속에서 별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기획자는 기획의도의 가장 중요한 이슈를 관객과의 공감대 속에서 완성해 나가야 합니다. 즉, 대중성과의 진정한 교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광주비엔날레는 1회 때 165만명이라는 경이로운 관객 수가 2, 3, 4회에 이르는 동안 점차 줄어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현대작품의 주류를 이루는 설치, 영상 작품들의 난해성, 되풀이 되는 외래 유형의 전시 성향에 대하여 점차 흥미를 잃어갔기 때문입니다. 5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관객의 관심을 회복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하게 대두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관객을 주인으로 조명하는, 지금까지 어느 비엔날레도 시도해 보지 못한 방법을 구상하게 된 것이지요. 물론 관객의 참여는 한계가 있습니다만, 전문가들의 도움으로 관객이 부분적으로 작가 선정에도 참여하고 또 작가와 만나 출품작에 대하여 의견을 교환함으로서 전시 형태에 변화를 주게 된 것은 상당한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로부터 관객의 관심이 증폭되어 관객 수가 증대되었습니다. 관객을 중요하게 고려한다는 문제는 언제나 간단한 것은 아니지만, 관객과 진정한 교감을 갖도록 한다는 것은 중요하고, 특히 서구권 비엔날레와 차별성을 구축하면서 비엔날레의 문화적 가치를 빛내는 데에 주력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문제는 관객의 문제와 더불어 고려해야 할 중요한 사항입니다.
윤진섭 미술사의 소양을 지니지 못한 평범한 관객이 맥락적인 이해를 전제로 하는 현대미술의 난해성을 극복하고, 과연 현대미술의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놓고 볼 때 그 결과는 만족할 만하지 못하다고 판단됩니다. 현대미술은 전문가가 받아들이기에도 힘에 부치는 것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가령 직업이 농부인 관객과 현대미술을 하는 작가가 서로 의견을 나누고 토론을 하여 공동작업을 한다고 합시다. 당연히 농부의 삶의 맥락과 작가의 삶의 맥락은 서로 엇갈릴 수 밖에 없는데, 나는 농부가 작가의 삶의 맥락에 뛰어들어 단시일 내에 작가가 수행해 온 미술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성공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것이 인위적으로 프로그램화된 것 일때, ‘사기’(어느 평론가가 리뷰에서 적절히 지적한 것처럼)의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장석원 관객을 주인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비엔날레 전시담론으로 중요하다는 의미에서 대중성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부분은 관객의 전시문화권에 접근을 용이하게 하게 해주는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대중성을 향해 우회한 점) 광주비엔날레의 참여관객제도는 배려와 관객의 밀접한 관계를 주지하며, 기획자가 관객을 부분적 도입으로 작가와 상호 소통할 수 있는 부분을 제공하는 점입니다.
서정걸 기본적으로 비엔날레는 동시대 미술의 이슈에 반응하면서 첨단적인 내용을 다루어야 합니다만, 대중성을 전혀 무시해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첨단과 전문성을 유지하면서도 다양한 참여 이벤트나 전시설명 프로그램들을 통해 대중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엔날레 뿐만 아니라 일반 미술관도 마찬가지로 “대중과의 소통”은 매우 중요한 문제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경기도 세계도자비엔날레의 경우에는 도자라고 하는 특성을 최대한 살려서 각종 참여프로그램을 기획하고, 교육관을 별도로 설치하여 비엔날레 내용을 오리엔테이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장작가마 워크샵이나 국제도자 워크샵 등 작가들을 초대하여 시연을 보여줌으로써 흥미를 유발시키고 있습니다. 어쨌든 ‘대중과의 소통’을 위한 다양한 장치들을 고안하고 실행하는 것이 전시의 내용못지 않게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장석원 비엔날레는 현대미술의 세계적인 이슈를 직접 대중들에게 노출시킨다는 데에 묘미가 있는 것입니다. 비엔날레 이전 미술 전시는 대부분 전문가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전문가들끼리 보고 평가하고 끝이 납니다. 비엔날레는 현대미술의 가장 중요하고 첨예한 이슈를 직접적으로 대중들에 드러 냅니다. 그로부터 파격적인 전시 구상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비엔날레에서 또 한가지 재미있는 점은 20대의 무명 작가가 세계적 유명 작가와 나란히 전시하는 기회가 제공되며 이로부터 매체를 통하여 새로운 스타가 탄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회자: 현재 개최되는 국내비엔날레의 참여 작가에 관련된 내국인, 외국인의 비율문제와 더불어 참여 작가는 국내에서 인지도가 있고 알려진 작가위주 엘리트 중심의 비엔날레라는 의견들이 많은데 그 부분에 어떻게 생각하시는 지요?
윤진섭 작년에 제가 총감독을 맡았던 제3회 ‘서울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의 작가선정은 저와 3인의 외국 큐레이터가 맡았습니다. 작가선정은 애초의 하루 일정을 넘겨 3일까지 연장할 정도로 치열했는데, 제가 제시한 스텔락과 올랑 등 국제적인 작가들이 더 이상의 이슈를 제공하고 있지 못하다는 이유로 거부를 당했습니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현재 미디어 아트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이슈를 제기하고 있는 젊은 작가들로 구성되었는데, 펭 맹보, 랭랜즈 앤 벨 등 터너상의 최종 후보에 까지 오른 세계적인 작가들이 포함 되었습니다.
국내작가는 문경원, 김기라, 박준범, 이세정, 정동암, 장영혜중공업, 홍성담 등으로 적절한 비율을 차지했다고 보여집니다. 세계를 이끌어가는 선택된 소수들이 각 분야의 엘리트들이란 점을 상기할 때, 질적으로 고양된 세계적인 비엔날레로 가기 위해서는 이는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김병기 서예라는 분야는 본래가 문인 사대부들이 해 오던 대표적 엘리트 예술입니다. 또한 서예의 주된 매체는 한자이기 때문에 한자를 잘 모르는 이 시대에 가장 소통이 어려운 장르의 예술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관객과 시선을 맞추기 위해 서예에 본래 내재해 있는 엘리트성을 일부러 파괴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엘리트성이 서예의 중요한 한 특징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서예는 그만큼 정신적 차원이 높은 예술이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최근 서예의 대중화를 지향한다는 이유아래 서예를 지나치게 대중적인 예술로 변질시키려는 시도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변용의 원심력이 지나치게 강조된 나머지 서예 본질의 구심력이 약해져서 서예가 이미 서예 밖으로 날아가 버린 예들이 심심치 않게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대중의 시선과 흥미를 의식한 작품의 ‘대중화’보다는 작품은 본질을 지키면서 작가 자신이 몸을 낮추어 보다 친절한 자세로 대중에게 다가가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서예의 대가들이 자신의 몸을 낮추어 관객에게 접근하여 이해도를 높이는 것이 진정한 대중화인 것입니다.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는 그동안에 중국서예와 한국서예, 일본서예의 차이점을 관객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하여 나름대로 친절한 행사와 설명을 많이 해 왔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서에 분야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이나 일본 뿐 아니라, 구미 지역의 작가들을 의외로 많이 초청해 왔습니다. 한자문화권 문화와 세계문화와의 소통을 위해서였습니다.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본전시의 경우 초청된 해외작가와 국내 작가의 비율이 거의 반반씩이었습니다. 앞으로는 서양의 아티스트들에게 서예를 알리는 일을 더욱 강화해 나갈 생각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한국의 서예를 세계화하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서정걸 세계도자비엔날레의 경우에는 외국작가의 비율이 70%가량 됩니다. 국제전으로서 현대도자의 현황을 보여주자면 그 정도가 되어야 한다고 보고, 비엔날레를 통해 그동안 보지 못했던 세계적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도자 분야도 최근 매우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즉 도자예술을 주도하는 것이 이제는 도자를 이용한 조형작업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국내 도자예술의 발전을 위해서는 그런 세계적 작가들의 다양한 조형세계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획이 필요합니다. 특히 국제공모전을 통해 세계 각국의 새로운 작가들을 발굴함으로써, 소수 엘리트 위주의 전시문제는 자연히 해소가 됩니다만, 회가 거듭 될수록 그러한 문제는 발생할 소지가 있습니다. 상투적인 기획에서 벗어나서, 기획의 내용을 끊임없이 새롭게 발전시켜나가야 할 것입니다.
윤진섭 도자의 특징인 ‘쓰임(用)’의 측면에서 볼 때, 그런 현상이 오는 것은 작가가 이 ‘용’의 개념을 벗어나 표현 쪽으로 무게 중심을 옮겨가고 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기존의 도자 개념은 이미 흐트러지기에 이르렀는데, 그 정체성의 새로운 정립의 요구와 함께 관객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문화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죠.
서정걸 대중적 관심을 끌기 위해 세계적인 스타작가를 참여시키는 것이 기획자의 입장에서 선호되고 있습니다. 이번 세계도자비엔날레에도 영국의 대표적인 조각가인 안토니 곰리가 출품했는데, 그의 작품 설치과정을 이벤트화해서 홍보에 좋은 효과를 보기도 했습니다. 전시의 내용이 모호한 유명작가 위주의 전시는 지양되어야 하겠지만, 유명작가의 참여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회자: 한국의 비엔날레가 최근 부각되는 ‘아시아주의’ 성격을 어떠한 색깔로 한국적 정체성을 양산하고 있다고 보는지요?
장석원 과거적 시각에서 보면 도자비엔날레는 도자의 정통성을 무너뜨렸다는 식의 생각을 갖기 쉽습니다. 그러나 본질과 정통성 그리고 정체성이라는 개념도 변화하는 것입니다. 비엔날레는 과거의 인습적 정통성을 어떻게 깨뜨리느냐 하는 데에 주안점을 두고 새로운 정통성, 세계적 이슈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김병기 21세기에 아시아주의의 부각은 필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예술’이라는 개념 자체가 아시아적 개념으로 바뀔 때가 도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 봅니다. 소위 근대화 이후 우리의 문화와 예술은 일방적으로 서구의 그것을 수용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서구의 것이라면 모든 것을 다 선진적인 것으로 보고서 서구 ‘따라잡기’에 여념이 없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21세기는 다릅니다. ‘따라잡기’의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당당하게 우리 것 ‘내세우기’를 해야 할 때입니다. 국제적으로 부상하고 있는 아시아주의 조류를 잘 이용하고 이미 불고 있는 이른바 ‘한류’도 잘 이용하여 우리의 문화 예술이 한국적 정체성을 가지고 세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따라서, 국내에서 행해지고 있는 모든 비엔날레는 뚜렷한 목표 의식을 가지고 한국적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중국의 상하이 비엔날레가 일찌감치 중국적 정체성을 확보한 점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장석원 인습을 깨뜨리는 기본적인 이유는 이땅의 사람들에게 서구의 관념적이고 반어법적인 식의 이슈가 아닌 아시아의 현대적 문화권 속에서 공명되고 세계적인 것이 될 수 있는 현대미술의 이슈를 제시하는 것이 비엔날레의 기획 의도가 된다고 봅니다.
사회자: ‘외적 풍요를 감당할 전문 인력의 부재’와 그에 따른 ‘전시구성과 진행의 미숙함’ 그리고 ‘행정 편의적 운영에 의한 미술제의 내용 빈곤’으로 일부 장르의 경우행사 자체에 대한 존립에 대한 회의론을 제기하기도 하는데?
장석원 전시의 성공과 실패는 기획자의 기획력과 작가의 능력 사이의 함수관계에 있습니다. 상호 의견교환과 조율이 필요합니다. 기획자의 전시에 대한 전반적 의도는 선정된 작가의 작품에 대한 구체적 형태를 의식하고 작가에게 구체적인 조건을 요구하기도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작가에 의한 임의의 변주를 허용하기도 한다. 기획자는 자신의 뚜렷한 기획 의도와 함께 조율 과정에서 벌어지는 임의의 자유롭고 신선한 충격과 재미를 수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양자간의 조율 그리고 실제적으로 나타나는 전시 공간 속에서의 창의성에 기획의 성공 여부가 극명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윤진섭 대규모 국제행사를 기획할 때 그것이 관주도의 행사일 경우 기획자와 관료 사이의 갈등은 흔히 보이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시스템 상의 문제가 늘 깔려 있습니다만, 관의 성과 위주의 사고와 기획자의 질적 마인드의 차이 등이 융합되지 못한 데서 오는 경우가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많은 오류가 발생하게 됩니다. 가령, 국내에서 실제 일어난 경우입니다만, 도널드 저드의 상자 작품이 국내에서 전시될려고 했을 때, 세관의 직원이 이 작품을 공산품으로 오해해서 통관을 시키지 않은 사례가 그것입니다. 그래서 전시회가 연기된 경우가 있다고 들은 적이 있는데, 이 세관원의 상식으로 볼 때는 저드의 작품이 예술품이라는 것을 자신의 상식으로는 전혀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죠. 이것이 바로 소통의 단절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경우입니다.
장석원 광주비엔날레는 전시인력 채용에 대략 60%는 기존의 인력을 유지하고, 40%는 새로운 인력으로 보강하고 있습니다. 긍정적인 면은 새로운 기획자가 활동하면서 국내외 작가와 큐레이터가 교류하게 된다는 것이고, 이로부터 국제적인 연관 시스템이 형성된다는 것이지요. 전시 인력 시스템은 부분적으로 고정되고 부분적으로 교체되는 시스템이 바람직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비엔날레를 권력 기구로 보는 사람들은 고정 시스템을 구축하여 이를 권력기구화 하려는 양상을 빚기도 합니다. 비엔날레에서 볼 수 있는 헤게모니 싸움은 대개의 경우 내부의 고정적 인력 시스템에서 비롯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으니까요.
사회자: 새로운 전문 인력의 발굴과 성장에 기회가 될 수 있는 비엔날레 담당 큐레이터 선정과정에서 문제는 없는지?
장석원 광주비엔날레는 그 동안 큐레이터를 길러내어 국내의 부산비엔날레, 서울미디어국제비엔날레, 경기도 도자비엔날레 등에 전시 인력을 제공하는 역할을 해왔습니다. 이 말은 각지에서 활동하는 기획자들이 광주비엔날레의 경험을 통하여 노하우를 터득하였다는 것을 뜻합니다. 앞으로 더욱 빠른 속도로 새로운 기획자 및 전시 인력들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김병기 현재 우리나라의 기획자들은 일반적으로 ‘아이디어 제공자’로 이해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기획자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일반인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농후합니다. 물론 기획자 혹은 큐레이터들이 하는 일은 매우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이 학문적 근거가 없이 머리로만 이루어진다면 그것이 아무리 참신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아이디어 제공’의 수준을 넘지는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기획자는 자신이 기획한 것에 대해 무엇 때문에 기획했는지를 학문적 근거를 가지고 설명할 수 있어야합니다. 문화예술 산업은 궁극적으로 인재양성 사업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인재 양성을 게을리하고 있는 면이 없지 않습니다. 미래를 위하여 끊임없이 인재를 양성하고 또 능력이 있는 인재를 발굴해야 합니다.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의 경우, 전시와 함께 반드시 학술대회를 진행하여 매 회의 비엔날레를 학문적으로 적립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적립은 앞으로 한국의 서예를 세계화하는 데에 있어서 큰 자본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2001년도에는 한국의 <한글>서예와 일본의 <가나>서예, 중국의<간체문자>서예를 조명하는 학술대회를 가졌고, 2003년에는 서예를 이용한 심리치료에 대한 학술대회를 가졌으며, 금년 2005년에는 서예와 종이와의 관계에 대한 학술대회를 가질 계획입니다. 이러한 연구와 학술대회를 통하여 미래를 준비할 인재를 양성하고 있음은 물론입니다.
장석원 대다수 아이디어 수준이라는 관점의 오류적인 부분입니다. 현재 활동하는 기획자들은 구체적 전략과 세계를 향해 미세하고 첨예한 계획력을 가지고 진행하고 있습니다.
사회자: 큐레이팅에 관련 문제입니다. 행사가 끝나더라도 일부 작품을 남김으로서 문화유산을 조성해오고 있지만, 비엔날레 참여 작가들의 작품경향을 보면 주제와 행사취지에 상관없이 작가의 주도적인 방식으로 드러나는 작품들이 많습니다. 이에 큐레이팅의 부적절한 면을 볼 수 있는데?
윤진섭 큐레이팅은 기획자와 작가 간의 상호 소통을 전제로 합니다. 기획자는 주제를 잡고 이를 형상화하기 위하여 컨셉에 해당하는 작가를 선정하지요. 이때 큐레이터는 전시의 전체적인 윤곽을 머릿 속에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합니다. 전시의 실패는 곧 상호 소통이 부재하였거나 원활하지 못했음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또 큐레이터가 요구한 작품을 작가가 어기고 엉뚱한 작품을 제시하였을 경우도 전시의 실패를 가져오는 요인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조율을 늘 필요한 것이며, 유능한 큐레이터라면 돌발사고도 예견할 능력을 갖춰야겠지요.
서정걸 그것은 기획의 문제라기 보다는 작가에게 기획 의도를 얼마나 밀도있게 설명하고 주제에 맞는 작품을 이끌어 내는가에 관한 문제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작가선정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즉 주제와 거리가 먼 성향의 작가를 선정해서 발생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거나, 작가가 본질에서 벗어난 문제의식에 집착해서 발생하는 경우인 것 같습니다.
사회자: 국내 비엔날레와 미술계에 영향을 끼친 해외의 주요 비엔날레는?
윤진섭 베니스비엔날레와 상파울로비엔날레, 카셀 도큐멘타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서정걸 경기도세계도자비엔날레의 경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도자분야에서는 국제전이 매우 드믄 편입니다. 도자를 다루는 미술관이나 갤러리도 극소수에 불과해서, 도자예술의 발전을 위한 인프라가 매우 취약한 편입니다. 그런 면에서 경기도세계도자비엔날레는 3개의 도자전문미술관을 운영하면서 2년마다 대규모의 국제전을 개최하기 때문에 국내 도예계에 미치는 영향이 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몇 년간 한국의 현대도자가 눈에 띄게 발전되었다는 평가가 외국전문가들로부터 나오고 있는 것은 세계도자비엔날레와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특히 도자분야에는 이론가나 전시전문가가 거의 없을 정도로 취약한 상황에서 전시분야의 전문직 요원들을 양성하고 있다는 점도 도예계에 기여한 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은 광주비엔날레나 부산비엔날레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사회자: 세계주요의 비엔날레와의 국내 비엔날레의 차별성과 특성은?
윤진섭 베니스비엔날레는 구미 중심의 사고와 문화적 전통에 기반을 두고 있고, 상파울로비엔날레는 당연히 남미 중심의 문화적 해석을 중시합니다. 국내 비엔날레는 초기에는 해외작가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다고 보여지는데, 최근에 올 수록 한국적 상황과 아시아적 정체성에 눈을 돌리고 있습니다. 이는 매우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자: 국내에서 비엔날레의 성공적 개최가 알려지자 각 지역에서 여러 비엔날레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났지만 명맥을 유지하는 비엔날레는 많지 않습니다. 창설 후 비엔날레와 현재 존속하고 있는 비엔날레와는 어떠한 차별점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윤진섭 광주나 부산처럼 역사가 깊은 비엔날레들은 서서히 자리잡아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매머드(mammoth) 예산을 퍼붇는 대규모 국제비엔날레들이 말 그대로 예산 대비의 성과를 내고 있느냐 하는 점에 대한 회의인데, 이는 여러 관점에서 분석해봐야 할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요즈음 제1회 ‘포천 아시아 미술제’의 조직위원장 겸 예술총감독으로 일하고 있는데, 인구 15만 정도의 이 소도시가 많지 않은 예산으로 창출할 국제전의 새로운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서정걸 차별점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실패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설하는 비엔날레는 경쟁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다른 비엔날레와 차별화가 안 되기 때문에 주목을 받지 못하게 되고, 실패의 요인이 됩니다. 또 지역문화와 관계가 없는 비엔날레는 지속적으로 발전하기가 어렵습니다. 지역주민들의 참여와 성원이 없다면 재정적 도움을 받기 어렵게 되고, 악순환으로 이어지게 되며, 일정한 궤도에 오르기가 힘듭니다. 경기도세계도자비엔날레가 성공한 비엔날레로 평가받고, 계속 발전해갈 수 있는 것은 지역 고유의 문화를 특화한 문화행사로서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국제경쟁력은 물론, 대중과 친숙한 소재인 도자의 특성을 잘 활용하여 많은 관람객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역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대중들로부터 외면당한다면 예산확보가 어려울 것이고, 결국 행사를 지속하기가 어렵겠죠.
사회자: 마지막으로 국내비엔날레와 관련하여 하시고 싶은 말씀?
윤진섭 단순히 비엔날레를 개최하였다는 사실에 만족하던 시절은 지났다고 생각합니다. 세계에 산재한 수백개의 비엔날레들이 각축을 벌이는 현 상황에서 분명한 성격을 드러내는 비엔날레를 보여주고자 한다면, 단체장 이하 관계자 여러분들이 보다 진지하고 성의있게 매사에 임해야 할 것입니다. 최근에 한 비엔날레에서 기획자가 아닌 학자 분을 총감독 최종 후보에 올린 사례가 있는데, 이는 매우 적절치 못한 처사라고 여겨집니다. 권위는 스스로 지키고자 노력할 때 찾아오는 것이 아닐까요?
서정걸 내용있고 국제경쟁력이 있는 비엔날레들은 계속 지원하여 발전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대중들의 관심을 받고 국제미술계의 주목을 받는 대표적인 비엔날레가 있다는 것은 국내 미술의 발전뿐만 아니라 문화강국으로 발전해 나가는데 큰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