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서판중(徐判重)의 사대손(四大孫) 서대성(徐大成)이라는 사람은 고기를 다른 사람보다 항상 많이 잡게되므로써 점점 부자(富者)가 되어 치부(致富)를 하여 많은 배(船)를 갖게 됨에 주민 거의가 서씨배의 선원(船員)노릇을 하게 되자 서씨(徐氏)는 그 위세가 당당하고 오만하게 되었지만 더욱더 그는 치부(致富)하여 수십척의 배(船)을 갖게 되었고 뿐 만 아니라 근해(近海)에 드나드는 외지(外地; 진도, 완도) 선(船)까지도 서씨를 통(通)하지 않고서는 어업을 못하게 되므로 그의 위세와 오만함은 이루 말 할 수 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진도군 고금면 염포리에 논(沓)을 수십만평 매입하여 그 논에서 나는 쌀로 선원들의 식량을 조달하였고 주민들에게는 춘궁기에 쌀을 꾸어주었다가 수확기에는 비싼 이자를 붙여 받아들였다한다. 마침내 장남(長男) 혼처의 위세를 이용(利用)하여 외지(外地)에서 정하여 결혼을 치르게 되었는데 결혼식 당일 신부 및 그 일행은 심한 파도와 먼 뱃길에 시달려 횡간도(橫干島)에 도착하였으나 워낙 경사가 급하여 올라올 수 없게 되자 서씨(徐氏)는 창고에 있는 쌀가마를 꺼내어 그 경사진 비탈(동산)을 평평하게 만들어 그 일행을 맞아들여 혼례(婚禮)를 치렀다. 그 후 서씨 배는 조금만 바람에도 파손되고 고기잡이도 잘 되지 않아 가세가 기울여져 서씨가 직접 배를 타고 고기를 잡지 않으면 안되게 되자 서씨는 배를 타고 멀리 고기잡이를 갔는데 갑자기 폭풍우를 만나 배는 파선되고 표류하고 있는 중 그곳을 지나는 일본(日本) 화물선(貨物船)에 의해 일본으로 피신갔다가 다시 고향(故鄕)으로 그 배를 타고 횡간도(橫干島)에 돌아오게 되자 그 구해준 값으로 쌀 100가마를 치르게 되었으므로 가세는 완전히 기울어졌다. 그래서 서씨(徐氏)는 "호구지책"으로 다시 배를 짓지 않으면 안되게 되자 속칭 "샛깽이 동산"에서 5척의 배를 다짓고 진수 전날밤 갑작스런 폭풍우로 새로 지은 배가 모두 떠 내려가고 파손당하는 것을 본 서씨(徐氏)는 그것을 막으려다 자신도 배와 함께 떠내려가 죽었다고 한다. 그후 사람들은 그를 비유하여 결혼시 쌀가마로 경사를 메운 등산을 "쌀가맹이 동산"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샛깽이동산을 "서(徐)샛깽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쌀가마를 창고밖으로 내놓으면 망한다고 하여 오늘날까지 잠자는 방(房)에 곡식을 넣어두는 풍습(風習)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