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1
본절부터 시작하는 본서의 마지막 아홉 장은 연대기상 1-39장보다 훨씬 후대에 기술된 것이며(33:21) 그 내용 또한 전혀 판이한 성격을 가진다. 그래서 혹자는 이 부분을 지적해 본서가 여러 저자의 기록을 편집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본장 또한 본서의 뒤에 삽입된 별개의 문서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다음 두 가지 근거를 고려할 때 설득력이 없다. (1) 본서의 초두(1-3장)에서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을 방문하시는 하나님의 이상이 본서 후반부(40-48장)에서는 고토로 귀환하여 옛 성읍을 재건하는 이스라엘 백성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이상으로 나타난다. 이로 볼 때 두 부분(1-39장;40-48장)은 밀접한 연관이 있다. (2) 성전의 타락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떠난 여호와의 영광이(8:1-11:25) 재건된 성전으로 다시 돌아오는 광경의 대비적 묘사(43:5)가 두 부분의 일관성을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새 성전(40-43장), 새 예배(44-46장), 새 땅(47, 48장)으로 대별되는 마지막 아홉 장은 고토 귀환과 뒤이어 이어질 이스라엘 회복 사업(39:25-29)의 궁극적인 지향점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1-39장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나아가서는 본서의 절정인 동시에 결론이라고 볼 수 있다. 사로잡힌 지 이십 오 년이요 성이 함락된 후 십 사 년 정월 십 일 곧 그 날에 - 이는 B.C. 573년으로 에스겔 선지자가 소명을 받을 때(B.C. 593)로 부터 약 이십년이 경과한 시기이다(1:1, 2;33:21). 한편 본 구절은 원전상 '그 해의 시작'(베로쉬 하솨나)이란 구절이 두 문장 사이에 첨가되어 있는 바, 이 구절의 해석과 '새달'이란 문자적 의미의 '정월'(호데쉬)의 해석 여하에 따라 두 가지 견해로 대별된다. 먼저 첫 번째 견해는 '그 해의 시작'에 '정월'의 의미를 찾아, 이 '정월'을 이스라엘 종교력상의 첫 달인 '아빕 월'(민간력-7월)로 보는 것이다. 곧 이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유월절을 예비하던 날인(출 12:3, Havernick, Delitzsch, Schmieder) 동시에 요단 강을 건너 약속의 땅 가나안에 첫 발을 내디딘 의미있는 날이었다(수 4:19). 두 번째 견해는 본 구절의 연도를 B.C. 575년으로 보고, 그 해가 희년이라는 사실에 주안점을 두어 '그 해의 시작'을 '신년' 곧 49년이 지난 후 오십 년째 되는 '희년'으로, '정월'을 1월이 아닌 종교력상의 '첫 달'이란 의미에서 희년을 시작하는 첫달로서의 7월 10일인 '속죄일'(레 25:9)로 이해한다(Hitzig, Rdak
=====40:2
극히 높은 산 위에 내려 놓으시는데 - 여기서 '극히 높은 산'은 1장 이하에 언급된 에루살렘의 멸망과는 대조적으로 온전한 회복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들 거룩한 산 '시온'을 지시한다(17:22, 23;욜 2:32). 곧 시온산은 본래 기드론과 두로베온 골짜기 사이에 솟아있는 봉우리의 명칭이었으나, 후에 예루살렘 동남쪽에 위치한 '다윗 성'(왕상 8:1;대하 5:2)을 지칭했으며, 더 후대에는 예루살렘 전체를 가리키는 포괄적인 명칭으로 바뀌었다(사10:24). 따라서 이 '시온 산'은 곧 새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지칭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편 예루살렘을 이처럼 탁월하게 묘사한 것은 여기서의 새 성전이 궁극적으로 온전하게 회복될 하나님 나라를 가리킨다는 점에서, 그 나라의 영광스런 위상을 강조하기 위함이다(사 2:2;미 4:1;계 21:10, Michaelis, Delitzsch, Schroder). 성읍 형상 같은 것 - 혹자는 이것이 실제적인 성읍을 가리킨다고 말하나(Kliefoth, Havernick) 실제 성읍에 관한 기사는 45:6;48:15, 30에 가셔야 등장한다는 점에서, 이는 하나님의 도성, 곧 성읍까지를 포괄하는 새 성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히 12:22, Hengstenberg).
=====40:3
놋같이 빛난 사람 하나가 - 1:7을 염두에 둔 표현으로, 천사를 가리킨다(Delitzsch). 비록 이 사람이 44:2, 5에서 '여호와'로 불리웠지만 본절에서 유추해 볼 때 여호와의 천사를 가리키는 것이 타당하다. 한편, '놋'은 성경의 용례상 '견고함', '확실성'(렘 15;20),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을 상징하는 바, 여기서는 천사의 초자연적 특성을 암시하고 있다(Hengstenberg). 삼줄과 척량하는 장대 - 이들을 모두 건축에 필요한 도구들로 먼저 '삼줄'은 긴 공간을 재는 도구로서 주로 땅의 길이를 잴 때 사용되었으며, '척량하는 장대'는 비교적 짧은 공간 곧 성벽 등의 높이를 잴 때 사용된 도구였다. 따라서 이러한 도구가 언급된 것은 앞으로 기술될 성전의 구조가 극히 세밀하게 제시될 것임을 암시한다. 한편 이들은 이스라엘의 심판 때 사용된 파괴적 기구들(9:1)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Hengstenberg). 문에 서서 있더니 - 여기서의 '문'은 에스겔이 남으로 성전을 바라보았다는(2절) 점에서 최초로 다다른 '북문'으로 생각된다. 곧 천사는 그곳에서 에스겔을 '동문'으로 안내했을 것이다(6절, Hitzig, Delitzsch).
=====40:4
눈으로 보고...생각할지어다 - '눈으로 보고'는 성전의 실재성을, '귀로 듣고'는 천사를 통한 세밀한 성전 구조의 해설을(5절 이하), '마음으로의 생각'은 모든 것을 보고 들은 사실에 근거해 성전의 전체적인 윤곽을 마음속에 그려 볼 수 있었음을 가리킨다(Schroder). 비록 새 성전이 역사적으로 세워지지는 않았으나, 이미 완성된 것으로 묘사하여 성취의 확실성을 강조한다.
=====40:5
이제 본격적으로 새 성전의 구조가 지시되는 바, 본절은 성전의 가장 기본적 요소인 바깥 성벽에 관한 기사이다. 집 바깥 사면으로 담이 있더라 - 여기서 '집'은 곧 새 성전을 가리킨다. 한편 '담'(호마)은 특별한 보호와 안위를 위한 '방어벽'을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성벽이 성전 바깥쪽을 에워쌌다는 것은 모든 부정한 이방적 요소의 침입을 차단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내포하는 바, 이 벽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철저하게 구분짓는 경계인 것이다(42:20;시 16:1-6). 그 장이...육 척이라 - 이는 히브리의 길이 측정 기준 단위인 '규빗'을 설명하는 것으로, 여기에 나타난 규빗은 당시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규빗(팔꿈치에서 손가락까지의 길이-45.6cm)보다 손바닥 넓이만큼 더 긴 왕실 규빗(53.2cm)이다(43:13). 곧 본 구절의 척량하는 장대는 그 길이가 여섯 왕실 규빗이었다. 한편 이전 솔로몬 성전은 일반 규빗에 의거해 지어졌다(신 3:11;대하 3:30. 그 담을...두께가 한 장대요 고도 한 장대며 - 그 장대의 길이가 여섯 왕실 규빗이라는 점에서 이 성벽의 두께와 높이는 모두 약 3.2m 정도였다. 한편 본 구절의 '담'은 상반절의 '호마'와는 달리 '건물'의 의미인 '하빈얀'으로 쓰여졌다(42:1 주석과 비교).
=====40:6
동향한 문에 이르러 층계에 올라 - 6-16절은 성전 바깥 뜰의 동쪽 문에 관한 설명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성전 동문 단면도를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40:7
문지기 방들이 있는데 - 이 방들(단면도 (3))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 당시부터 성전 주변과 문을 수비하기 위해 있었던 경비실(왕상 14:27, 28, guardrooms, LB)과 유사한 것으로 그 크기와 모양은 3평방 미터 정도의 정방형(장, 광이 한 장대) 방이었다(Havernick). 한편 이 문지기 방은 모든 속되고 가증하고 거짓된 것으로부터 성전을 거룩하게 지키는 영적 의미를 내포한다(계 21:27, Schroder). 매 방 사이 벽이 오 척이며 - 그 방의 장이 육 척(한 장대)인데 비해 방 사이의 벽이 오 척이라는 사실은 벽 자체가 오 척이라는 말이 아니라 각 방의 옆벽 사이에 있는 오 척의 공간을 가리키는 것이다. 또한 이 공간들은 방과 방 사이를 연결하는 앞벽으로 막혀 있었다(Kliefoth). 안 문통 - 이는 6절의 '문 안 통'과 동일한 곳으로(단면도 (5)), '입구 문통'(6절)에 이은 '현관 문통'을 가리킨다.
=====40:8,9
안 문의 현관을...한 장대며...팔척이요 - 히찌히(Hitzig)와 칠십인역(LXX)은 현관 (단면도 (6))에 대한 측정치가, 8, 9절에서 서로 다르게 기술된 점을 들어 현관의 측정 기사를 생략해 버린다. 또한 많은 학자들도 이 상이점에 대한 설득력있는 견해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단지 클리포스(Kliefoth)는 8절의 길이를 현관 자체의 길이로, 9절의 길이를 안문의 문기둥(문벽)까지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에서의 현관의 길이로 해석한다. 이는 하반절에서 그 문벽의 장이 이 척으로 기술된 사실에서 유추한 듯하다. 그 문벽은 이 척이라 - 여기서 '문벽'(에일로)은 '단단하다', '튼튼하다'란 '아일'의 복수형인 바, 여기서는 '기둥'(posts, KJV)의 의미보다는 문을 떠받치기 위해 벽에 박아놓은 '버팀대'(jambs, NIV, RSV)를 가리킨다.
=====40:10
문지기 방은...셋이 있으니 - '3'이란 숫자가 성경의 용례상 하나님의 숫자란 점에서(사 6:3;막 9:31;계 9:15) 문지기의 방(도면 (3))이 좌우로 각각 세 개씩 있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직접 성전의 수비자가 되신다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한편 본절의 '좌우편 벽'은 9절의 '문벽'과 같은 '버팀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40:11
처음으로 전 문통의 폭이 십 척으로 제시된다. 한편 '장이 십 삼 척'이란 말은 이미 그 문통의 장이 '한 장대'(육 척)로 언급되었다는 점에서(6절) 해석상의 난제로 취급된다. 단지 학자들은 이를 문통의 높이로 추측할 뿐이다(Schroder, Lyra, Kliefoth).
=====40:12
문지기 방 앞에 있는 '퇴'(게불)를 언급한다(도면 (4)), 이는 그 원어상 의미가 '경계'란 점에서 통로와 문지기 방과의 경계를 짓는 '울타리용 퇴'(barrier, RSV)를 가리키는 듯하다. 한편 그 장이 일 척이라는 것을 NIV는 11절에서와 마찬가지로 퇴의 높이로 번역하나, 그보다는 그 방에서 통로쪽으로 접한 길이, 곧 폭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40:13
이 방 지붕 가에서...반대되었으며 - 서로 마주 대한 문지기 방이 지붕과 지붕으로 연속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바, 그 남북간의 총폭이 이십 오 척이란 뜻이다. 곧 뒷벽(1.5척)+문지기 방(6척)+문통(10척)+문지기 방(6척)+뒷벽(1.5척)=25척이다(Delitzsch).
=====40:14
원전상의 핵석은 '그 기둥들은 60척이며 그 문 주위에 들이 있어 기둥에까지 이르렀으며'라고 볼 수 있다(KJV, NIV, LB). 여기서 '기둥들'(엘림)은 곧 현관의 기둥들이다. 하버닉(Havernick)은 이 기둥의 60척이란 높이가 무리하다는 많은 주석가들의 이견에 대해 고대 애굽의 오벧리스크 등의 예를 들어 반박하고 그 높이에 걸맞는 전문 현관의 장엄함을 제시한다(Delitzsch, Schroder). 또한 그 사면의 뜰은 현관 안에 별도의 뜰이 있다는 뜻(Hitzig)이 아니라 성전의 바깥 뜰을 가리키는 것으로, 곧 동문 건물이 성전의 바깥 뜰 안에 건축되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서론 에스겔 성전 도면 참조).
=====40:15
곧 바깥 문통 6척(6절)+문지기 방 28척(방 6+6+6, 방 사이의 공간 5+5;7절)+안 문통 6척(6절)+현관 8척(9절)+현관 문벽 2척(9절)=50척이다.
=====40:16
닫힌 창(할로 노트 아투모트) - 좁은 창살로 짜여진 격자창을 가리킨다(narrow windows, KJV). 종료나무를 새겼더라 - 종려나무는 성경의 용례상 생명력과 풍요, 영광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성전 조각에 자주 사용된 소재이다(왕상 6:29-35).
=====40:17-19
성전 동문에 이어 성전의 바깥뜰이 설명된다. 이후의 설명은 서론 '에스겔 성전의 도면'을 참조하면서 이해하라(이하에서 언급되는 성전 도면 번호는 서론에서 언급된 도면의 번호를 의미한다). 본문에서 '박석깔린 땅'(리체파)은 원어상 '돌을 깔아 포장하다'란 뜻으로 흙이 묻지 않게 돌을 깐 포도(鋪道)를(대하 7:3) 가리킨다(성전 도면 (9)), 또한 그 위에 있는 30개의 방(성전 도면 (7))들은 동, 북, 남으로 각각 10개씩 산재(散在)해 있는 것으로 주로 제사장들이 거주하거나 화목제 잔치를 위해(삼상 9:22, Schroder)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한편 18절은 박석깔린 땅의 위치와 크기를 설명하는 바, 이는 동, 북, 남쪽의 문간 좌우에 성벽 안쪽을 따라 50규빗의 폭으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특히 서쪽으로는 성전 안뜰의 좌우편까지 이르렀다. 19절은 '아래 문간', 곧 바깥 문의 안문간부터 그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안 뜰의 바깥 문간까지 이르는 바깥 뜰의 규모이다(100척=약 532m).
=====40:20-23
내용상으로는 16절에 연결되는 구절로 바깥 동문에 이어 바깥 북문이 언급된다. 이는 동문의 측량과 동일하다(6-16절 참조). 게단의 수(일곱)를 밝히고 있다(22절). 한편 23절은 바깥 뜰의 규모를 19절보다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는 바, 그 바깥 뜰의 규모가 동, 북, 남쪽 모두 동일함을 밝힌다.
=====40:24-27
동문, 북문과 동일한 내용의 남문에 관한 언급이다. 특별히 여기서는 문지기 방이 생략되는 대신 각각의 창들과 종려나무 조각이 언급된다(16절).
=====40:28-31
이제 바깥 뜰로 나가는 세 개의 문에 이어 그 문들에 각각 마주 대하고 있는 안뜰로 세 개의 문이 37절까지 언급된다. 이들 문들은 바깥 문과 그 측량에 있어서 거의 동일한 바, 단지 그 문에 이르는 계단의 수가 바깥문보다 하나가 더 많은 여덟 개라는 점(22, 26절)과 바깥 문의 현관이 성소쪽 곧 서쪽을 향해 있는 것과는 달리 본문의 현관은 바깥 문쪽 곧 동쪽을 향해 있어 서로 대칭을 이루고 있다는 점(9, 15절)만이 다를 뿐이다(31절). 곧 계단을 제외한 모든 규격이 동일하나 단지 그 배열이 바깥 문과 정반대로 되어 있는 것이다(Delitzsch). 특별히 계단의 수가 하나 더 많다는 사실은 성소으 위상과 그 거룩함에 대한 특별한 신앙적 의미에 기인하는 듯하다. 한편 이러한 문의 언급은 본문에는 나타나 있지 않으나 성전과 안뜰을 둘러싼 벽이 있음을 암시한다. 먼저 본문은 남쪽의 문을 언급하고 있는 바, 이는 선지자가 바깥 남문에서(24-27절) 곧장 안 뜰의 남문에 이른 사실을 보여준다. 특별히 30절은 현관에 대한 별도의 측량치를 제시하는 바, 이는 해석상의 난제로 등장한다. 따라서 많은 학자들은 이 부분을 무시해 버렸으며(Michaelis, Bottcher, Ewald, Hitzig, Maurer) 칠십인역(LXX) 또한 이 구절을 생략해 버렸다.
=====40:32-34
동문에 관한 언급으로 모든 규격이 남문과 동일하다. 한편 성전 안 뜰까지 이르는 계단의 수가 모두 15(7+8)개인 바, 이는 시편 중에서 성전에 올라가는 시의 편 수와 일치한다(시 120-134편). 이처럼 시 한편과 계단 하나가 서로 상응한다는 사실은 성전에 나아가는 자가 하나님 앞에 가져야 할 감사와 찬송의 자세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40:35-37
동일한 방식으로 북문의 규격과 모습이 소개된다.
=====40:38
안 뜰로 들어가는 새 문을 언급한 데 이어 희생 제사시 제물을 다루는 데 필요한 방과 장비들이 43절까지 기술된다. 본절은 현관의 문벽(베엘림), 곧 현관 문기둥 곁에 있는 작은 골방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바, 그 방은 '번제물의 내장과 다리를 씻는 곳'(레 1:9;대하 4:6, Delitzsch)이거나 '제단에 올려진 제물을 최종적으로 손질하는 곳'(Schroder)이다.
=====40:39-43
문의 현관에 위치한 희생 제사용 상(床)이 언급된다. 모두 12개인 이 상들의 위치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39-41절에 언급된 8개의 상은 희생 제물을 잡는 데 사용된 도살용 상이며, 42절에 언급된 보다 작은 4개의 상은 그 희생 제물을 잡을 때 쓰이는 도구들을 올려놓기 위한 것이다. 한편 이 희생 제사용 상들은 46:2에 비추어 볼 때는 동문 현관에 위치한 것으로, 40절;46:19 이하에서는 북문 현관에 위치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온 자들이 어느 문(일반 백성-북문, 남문;왕-동문, 46:1, 2)을 통해서도 편리하게 제물을 드릴 수 있도록 세 개의 문 현관 모두에 비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Delitzsch). 갈고리가 사면에 박혔으며 - 여기서 '갈고리'(쉐파타임)는 원어상 '두다', '걸다'란 뜻에서 파생된 말로 '마구간', '(이중의) 갈고리'를 각각 의미하는 바, 혹자는 이를 희생 제물들을 묶거나 가두기 위한 '마구간'이나 '말뚝'을 가리킨다고 본다(Gesenius). 그러나 본 구절에서는 그 가죽을 벗기기 위해 제물들을 걸어놓는 두갈래로 갈라진 갈고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Delitzsch, Schroder). 이는 '사면에 박혔으며'란 말에 의해서도 지지된다. 곧 그 갈고리들이 현관 사면 벽에 박혀 있다는 것이다.
=====40:44-46
본문은 44절의 '방 둘'(리쉐코트 솨림)이 원어상 '뇌하는 자의 방들'이란 뜻을 가지는 바, 원전상의 해석으로 볼 때 44절은 최소한 3개 이상의 망을 지칭하는 반면 같은 문맥의 45, 46절은 단 두 개의 방만을 지시한다는 점에서 난해한 점이 있다. 따라서 칠십인역(LXX)과 많은 학자들은 '노래하는 자들'이란 뜻의 '솨림'을 '둘'을 뜻하는 '쉐타임'에 대한 필사상의 오류로 이해하여 이를 '방 둘'이란 뜻으로 수정하고 있다(Delitzsch). 혹자는 새 성전의 예배에 있어서 노래하는 자의 위상이 특별하게 규정지워질 것이란 전제 하에 그들이 제사장들과 함께 언급된 것이라고 이해하여 원전상의 해석을 지지한다(Hengstenberg, Schroder). 그러나 45, 46절은 분명하게 이 두 개의 방이 제사장들만을 위한 것임을 밝힌다. 성전을 수직하는 제사장 - 본래적으로 성전과 성물들을 관리하는 책임은 레위의 게르손, 고핫, 므라리 자손들이었으나(민 3:25-38) 새 성전에서는 그 직책마저 사독 게열의 제사장들에게 위임될 것임을 보여 준다(44:10-16 주석 비교). 제단을 수직하는 제사장 - 문자 그대로 희생 제사시에 제단에서 수종드는 제사장들이다. 이 또한 본래는 아론의 후손에게 주어진 직책이었으나(출 27:20, 21;28:1-4;29:9, 44) 새 성전에서는 사독 계열의 제사장들에게만 위임되었다(44:15 주석 참조).
=====40:47
그 뜰 - 일명 '제단 뜰'로 불리워지는 곳으로 번제단을 중앙에 둔 정방형의 성전 '안 뜰'을 가리킨다(서론 '성전 도면' 참조).
=====40:48,49
본격적인 성전 성소의 측량이 41장까지 전개된다. 본문은 그 측량의 초두로서 성전 안 뜰에서 성소로 들어가는 입구에 설치된 현관(성소 도면 (6))을 설명한다(왕상 6:3 비교). 먼저 48절에서 '벽'(알)은 원어상 문을 지탱하기 위한 '곁 기둥'(jambs, NIV)을 가리키며, '두께'(로하브)는 '폭'의 의미인 바, 본문은 그 문의 곁 기둘의 폭이 좌우편 가각 오 척이고 그곳에 연속된 문의 폭이 좌우 각각 삼 척이란 의미로 전체 문의 광이 곁 기둥까지 포함하여 총 16척이란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다. 한편 이제까지의 장(동서간), 광(남북간)의 개념과는 달리 49절의 장은 남북간의 길이를, 광은 동서간의 길이를 가리킨다(Schroder). 한편 혹자는 49절의 장의 길이인 11을 12에 대한 필사상의 오류로 생각한다(LXX, NIV, RSV). 올라가는 층계가 있고 - 많은 학자들이 10개의 게단으로 생각한다(Delitzsch). 문 벽 곁에는 기둥이 있는데...저편에 있더라 - 문자적으로는 기둥 곁에 또 다른 두개의 기둥이 있다는 의미로, 여기서의 '문 벽'(jambs, NIV)은 48절의 '좌우 벽'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문의 두 기둥을 솔로몬 성전의 야긴, 보아스(왕상 7:15-22)와 같은 원주형의 기둥(columns)으로 생각할 수 있다(Delitzsch, Hengstenberg).
33-39장까지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으로 귀환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했을 때
경험하게 될 새로운 삶의 모습을 묘사하였다. 이어서 전개되는 본장부터 마지막 장(48
장)까지의 내용은 이스라엘의 새로운 질서가 어떻게 수립될 것인가에 대하여 집중적으
로 논하고 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 중에 거하심의 상징으로 새 성전이 건축될 것이
고(40-43장), 새로운 예배 의식이 확립되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될 것이며(44-46장), 언약 백성들을 위하여 땅의 새로운 분배(47,48장)가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사실 본장의 내용만을 본다면 전장(39장)과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전장의 마지막 단락(39:21-29)이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
에 본장에 와서 회복된 성전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에스겔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성전 회복과 직결시키면서 하나님 중심의 삶
이 진정한 이스라엘의 축복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본장은 (1) 에스겔이 이상을
받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는 전반부(1-4절), (2) 바깥 뜰에 대한 환상의 내용을 기록하
고 있는 중반부(5-27절), (3) 안 뜰에 대한 이상의 내용을 기술하고 있는 후반부
(28-49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본장에 나오는 '성전'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존재
한다. (1) 솔로몬의 성전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솔로몬 성전의 상세도와 구체
적인 치수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결점이 있다. (2) 스룹바벧의 포로 이후의 성전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에스겔의 성전은 하나님의 영광이 돌아오는 것인데 반하여
스룹바벧의 성전은 그렇지 않고, 상세한 부분에서도 많은 차이가 난다. (3) 관념적인
성전, 즉 돌아오는 포로들의 정신 속에 세워지는 성전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언급은 본장의 내용 속에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받아들이기 어렵다.
(4) 천년 왕국 때 세워질 성전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는 세대주의적 해석으로 문자
적인 해석에 치중하였고 신약과의 관계성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약점이 있다.
그러므로 가장 타당한 해석은 개혁주의 권내에서 전통적으로 받아들여져 왔던 상징
적인 해석법으로서 신약 시대의 교회로 보는 입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그리스도께서
구약의 제사장을 통한 제사 제도를 단번에 완성하셨다고 가르치고 있고(히 8:8-10),
계시록은 미래의 천국에는 성전도, 제사도 없고 오직 어린 양 그리스도만 계신다고 묘
사하고 있다(계 21:22 이하). 그러므로 교회가 영적인 이스라엘임을 고려할 때 이것은
신빙성이 높다. 결국 구약의 교훈들은 신약에서 영적으로 혹은 상징적으로 성취되어
졌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본장부터 나타나는 몇 구절들은 신약의 요한계시록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
를 도표로 만들어 비교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
| 에스겔 | 계시록 | 내 용 |
+--------+--------+----------------------------------------------------------+
| 40:2 | 21:10 | 하나님과 성령의 인도에 의해서 이상을 보게 됨 |
+--------+--------+----------------------------------------------------------+
| 40:3 | 11:1 | 척량하는 장대를 받게 됨 |
+--------+--------+----------------------------------------------------------+
| 43:16 | 21:16 | 제단의 규격을 유사하게 묘사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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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7:1,12| 22:1,2 | 생명수가 흐르고 그 주변에서 많은 실과가 열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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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8:31 | 21:12 | 이스라엘 지파의 이름이 거론되어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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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통일성이 있음을 염두에 둔다면 본장부터 시작되는 일련의 내용들은 단순히
당시의 역사적 형편만을 고려한 묘사가 아니라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의
완성을 바라보면서 기록한 예언적인 언급임이 분명해진다.
이상과 같은 본장은 에스겔이 하나님의 권능으로 예루살렘에 인도되어 환상 가운데
본 새 성전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바벧론 포로 생활에서 벗어
나 귀국하여 새 성전을 짓고, 하나님과 연합된 삶을 살게 되리라는 희망을 품었다. 이
것은 신약 시대에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교회, 즉 참된 성전
에 의해 성취된다(고전 3:16).
1. 환상의 배경과 성전 바깥 뜰(40:1-27)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복에 대한 내용으로 끝을 맺고 있는 전 단락(39:21-29)에 이
어서 본 단락은 성전 회복에 대한 내용으로 일관하고 있다. 전 단락에서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전 세계사적 관점에서 조명하였다면, 본 단락에서는 이스라엘의 본질적 회복,
즉 하나님과의 근본적인 관계를 형성시켜주는 성전의 회복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특
히 전 단락과 본 단락의 논리적 관계 속에서 발견되는 중요한 사실은 신약 교회의 탄
생에 대한 사실을 미리 암시해 주고 있다는 점이다. 전 단락의 마지막 구절(39:29)은
하나님의 신, 즉 성령이 임했음을 밝히고, 본 단락에 와서는 신약 교회의 모형적 성격
을 지닌 성전의 회복을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을 고려할 때 본 단락부터 시작되
는 일련의 내용들은 신약 시대의 교회를 미리 내다보는 구속사적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본 단락은 (1) 저자가 이상을 받는 상황을 기술하고 있는 전반부
(1-4절), (2) 성전 바깥 뜰에 대한 모습을 기술하고 있는 후반부(5-27절) 등으로 구성
되어 있다.
한편, 본 단락에서는 이상을 보게 된 역사적 시점을 짤막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이상을 경험하게 된 시점은 에스겔이 소명을 받은 후 25년이 지난 50세가 되던 해이
다. 또한 이스라엘 전공동체적인 차원에서 보았을 때는 예루살렘 성이 함락된 지 14년
이 지난 시기이다(1절). 결국 에스겔은 바벧론 포로 생활의 초기에 미래에 있을 하나
님의 영광의 도래를 예언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더없이 기쁜 소식을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절망 중에 있는 이스라엘에게 소망을 제시함으로써 하나님의
약속이 폐기되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또한, 본 단락의 내용들은 신약 시대의 교회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성전의 각 모
습들은 영적인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성전의 묘사에 담긴 상징적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 성경 구절| 구체적인 내용 | 영적인 의미 |
+----------+----------------------------+------------------------------------+
| 5절 | 성전 바깥의 담 | 하나님이 성전의 성결을 파수함 |
+----------+----------------------------+------------------------------------+
| 6절 | 층계에 오름 | 신앙 수준의 향상을 의미함 |
+----------+----------------------------+------------------------------------+
| 7절 | 문지기 방의 길이에 대한 언 | 하나님의 전, 즉 교회에 속한 지체들 |
| | 급들 | 은 각종 은사가 있음 |
+----------+----------------------------+------------------------------------+
| 10절 | 문지기 방 죄우편의 방 셋 | 문지기 방의 차별이 없다는 것은 하 |
| | 이 똑같이 있음 | 나님의 일을 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차|
| | | 벌이 없음을 가르쳐 줌 |
+----------+----------------------------+------------------------------------+
| 16절 | 종려나무를 새김 | 종려나무는 승리의 상징(계 7:9)으로 |
| | | 서 하나님의 교회의 최종적인 승리가 |
| | | 있을 것을 의미함 |
+----------+----------------------------+------------------------------------+
| 17,18절 | 뜰 삼면에 박석 깔린 땅 | 이것은 빛나는 돌로 만든 석판을 말 |
| | | 하는데, 성결을 상징함 |
+----------+----------------------------+------------------------------------+
| 24-27절 | 남향한 문간의 척량 | 처음에 척량한 동문과 같음에도 불구 |
| | | 하고 다시 이 남향한 문간들을 다시 |
| | | 척량하게 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말씀 |
| | | 을 귀로만 듣지 말고 실제로 체험해야|
| | | 할 것을 가르침 |
+----------+----------------------------+------------------------------------+
2. 안 뜰의 척량(40:28-49)
성전 바깥 뜰에 대한 이상의 내용을 묘사하고 있는 전 단락(1-27절)에 이어서 본
단락은 성전 안 뜰에 대한 이상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하나님은 에스겔을 인도하실
때, 초자연적인 방법을 사용하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성전을 걸어다니면서 인도하셨다.
특히 성전의 모습을 설명하면서 구체적인 치수에 초점을 맞추어 묘사하고 있는 것은
이 성전이 하나님의 세밀한 계획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임을 알려준다. 이러한 본 단락
은 (1) 안 뜰의 남문을 척량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부분(28-31절), (2) 동문을 척
량하고 있는 부분(32-37절), (3) 번제물을 씻는 방과 상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는 부분
(38-43절), (4) 제사장들의 방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는 부분(44-49절) 등으로 구성되
어 있다.
이렇게 구성되어 있는 본 단락의 중심적인 내용을 일목 요연하게 정리해보면 다음
과 같다.
+----------+------------------------------+----------------------------------+
| 성경 구절| 구체적인 내용 | 상징적인 의미 |
+----------+------------------------------+----------------------------------+
| 28-32절 |안 뜰과 바깥 뜰의 문간 척수가 |천국문은 모두 한 가지 원리로 되어 |
| |같음 |있음을 보여 주며, 문은 예수 그리스|
| | |도를 비유함(요 10:7) |
+----------+------------------------------+----------------------------------+
| 32-34절 |안 뜰 동편 문간도 안 뜰 남문 |천국의 공평성을 상징함 |
| |간과 같음 | |
+----------+------------------------------+----------------------------------+
| 35-37절 |안뜰의 북문 역시 다른 문간들 |천국의 완전한 통일성을 상징함 |
| |과 같음 | |
+----------+------------------------------+----------------------------------+
| 38-43절 |번제물을 씻는 방과 상 |이 방이 북문에 있는 것은 희생 제물|
| | |을 북쪽에서 잡기 때문임(레 1:11). |
| | |특히 제물에 대한 언급이 여섯 번씩 |
| | |이나 기록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
| | |제의적 죽음의 상징성을 강조하기 위|
| | |함임. |
+----------+------------------------------+----------------------------------+
| 44-47절 |북문 곁에 있는 방과 남문 곁 |제사장들이 쓰는 방이 제단과 가깝다|
| |에 있는 방 |는 사실은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 그 |
| | |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
| |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줌. |
+----------+------------------------------+----------------------------------+
이상과 같은 본장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1) 성도는 죄악된
신분에서 의인의 신분으로 옮겨진 것이 얼마나 축복스러운 일인가를 알고 날마다 하나
님을 의식하면서 살아야 한다(롬 11:36).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은 마음놓고 하나님께
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그러므로 이 특권을 감사하며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어야 한다(히 11:20,22). (2) 교회의 영원성, 성결성, 통일성을 깨닫고 더
욱 충성스럽게 교회를 섬겨야 한다. 교회는 세상적인 눈으로 보면 연약하지만 하나님
의 전으로서 영원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엡 1:23) 업신여기지
말고 존중하며 진실하게 섬겨야 할 것이다.
* 구약 성전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교제는 아담의 타락 이후로 불가능하게 되었다(창 3:8-13).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직접 만날 수 있는 특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 때
문에 인간은 간접적인 경로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구약의
성막이요 성전이었다. 그런데 이 성막이나 성전에서 중점적으로 이루어지는 의식은 희
생 제사였다(레 1:2). 구약 성도들은 희생 제물을 드림으로써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신약 시대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사장이요 제물이 되어서 휘장을 제거하셨으므로 성도들은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공생애 기간 동안 두 번(마 21:12,13;요 2:13-22)에 걸쳐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자신이 친히 성전이 될 것을 가르치셨다. 특히 요 2:13-22에서는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의 사건(요 2:19)을 언급함으로써 이 문제를 분명히 하였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과 진정한 교제를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천명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던 바울은 자신의 서신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약의 성전은 더 이상 장소적인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어떠한 건물이나 조직도 구약의 성전과 같은 기능을 담당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 때나, 어디서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참된 교제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