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재 권벌의 생애와 시문학 정신
이원걸(문학박사 : 한국한문학)
1. 머리말 2. 충재의 생애 3. 충재집의 편찬과 체제 1) 편찬 과정 2) 체제와 내용 4. 충재의 시문학 정신 1) 충재시 개관 2) 유자 의식과 교유 양상 3) 산수 감흥과 미적 체감 4) 애민과 위국 정신 5) 기행과 감회의 서정 5. 맺음말 |
1. 머리말
충재는 조선 중기 정치사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그가 살았던 16세기 전반의 조선은 기득권을 선점해 온 훈구파와 맞선 사림파 간의 첨예한 대립으로 네 차례 사화가 발생되는 정치적 격변을 거쳤다. 충재는 전 생애를 걸쳐 네 차례의 사화를 모두 체험했다. 이러한 사화 진행 과정에서 상호의 이념과 갈등이 격화되었다. 특히, 중종 대의 사림파는 성리학 정신에 입각한 유교적 통치 질서가 확립된 이상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였다. 이들은 성리학 윤리 질서 체제 확립 및 성리학의 체계적 보급을 통해 향촌 질서를 새롭게 수립하려고 했다. 아울러 새로운 인재 등용을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과 군주의 도덕 정치 실현을 지향했다.
이러한 개혁 정치를 이루기 위해 기존의 관습과 부패 고리를 청산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새로운 성리 질서의 이상 실현을 위해 부단한 개혁을 주장한 분이 충재이다. 충재는 21세 때에 무오사화, 27세 때에는 갑자사화를 겪었다. 이어 42세 때에는 기묘사화를, 68세에는 을사사화를 겪었다. 특히, 그는 중종․인종․명종 대에 언관․낭관․시종의 청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시대정신에 충실한 개혁 의지를 펼쳐나갔다. 그는 영남 사림파 출신이면서 기호 출신의 개혁론자들과 친밀한 교유를 유지하면서 수구와 혁신 사이에서 이를 완충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이러한 역사 소용돌이 속에서 그는 현실의 모순을 과감히 지적하고 성리 질서에 근거한 이상 정치 실현을 주장하였다.
그에 대한 선행 연구는 당대와 연계한 현실 대응을 들 수 있다. 이어 퇴계학연구소에서 그에 대해 기획, 연구한 결과를 들 수 있다. 이로써 충재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과 정치 상황 및 사유 의식․현실 대응 방식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그가 남긴 시문학 유산에 대해 작시 배경은 다루었지만, 분석은 이루지지 않았다. 본고에서는 선행 연구를 토대로 충재의 생애를 보강하여 그의 실체를 정확히 정리한 다음, 그가 남긴 문집의 체제와 내용을 면밀히 살핀다. 이어 그의 시문학을 종합하여 분석함으로써 충재의 생애와 시문학 유산의 상관관계를 살피고자 한다.
2. 충재의 생애
충재는 19세 때 진사시에 합격했다. 30세에 문과 급제를 거쳐, 다양한 관직 생활을 하였다. 42세 때에 삼척부사를 역임하고, 14년간 고신이 추탈되었다가, 56세에 복직되어 71세에 별세하기까지 병조․예조판서, 의정부 좌참찬․우찬성 등의 고위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의 생애를 생장기․사환 초기․퇴거기․사환 후기․유배 임종기로 나누어 정리하고, 복작과 추증 과정 및 일화와 제가의 평을 종합하여 그의 실체를 파악한다.
1) 생장기
권벌權橃의 자는 중허仲虛, 호는 충재冲齋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고려 때 시중侍中을 지낸 행幸의 20대 손으로, 대대로 명성을 누려온 가문의 후손이다. 고조부는 후厚로, 감무監務를 지냈다. 증조부는 계경啓經으로, 횡성현감橫城縣監을 역임했다. 조부는 곤琨으로, 용양위龍驤衛 부호군副護軍을 지냈으며 병조참판兵曹參判으로 증직되었다. 부친은 사빈士彬으로, 성균 생원시에 합격했다. 일찍이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향리에서 처사로 지내다가 87세의 일기로 별세했으며,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증직되었다. 모친은 파평윤씨坡平尹氏로, 사재감司宰監 주부主簿를 지낸 당塘의 따님이다.
충재는 1478년(성종9) 11월 6일에 안동부安東府 도촌리道村里 집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일반 아이들과 달리 영특했으며 기품도 우뚝하였다. 문장의 뜻을 빠르게 통달하여 시 구절을 불러주면 곧바로 응답하여 재주가 뛰어나다는 소문이 났다. 조모인 정부인鄭夫人이 충재를 길렀다. 정부인은 현숙하였으며 집안을 다스리는 법도가 있었다. 부인은 내외 손자 10여 명 가운데 충재를 어루만지고 예뻐하기를, “후일에 우리 부부를 추증해 줄 아이는 필경 이 아이일 것이다.”라고 했다. 이처럼 충재는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귀여움을 많이 받았다.
10세인 1487년(성종18) 때에 계부季父 교수敎授 사수士秀는 아들이 없었는데 충재를 어여삐 여겨 봉화 괴리槐里로 데려왔다. 그 때, 기러기가 날아가기에 시구를 지으라고 명했다. 충재는 즉시, “사람들 북으로 가건만 기러긴 남국으로 날아가네.”라고 대구를 하자, 사수는 감탄하고 칭찬하며 장래를 기대하였다. 하루는 사수가 그에게 ‘용聳’ 자의 뜻을 묻고, 시구 한 구절을 지으라고 했더니, “산봉우리에 아침 해 돋자, 남은 눈이 사라지네.”라고 하자, 사수는 매우 기특히 여겼다. 사수는 기묘사화 이후에 벼슬을 멀리하였으며 아들이 없어 충재를 양자로 입적했다.
19세인 1496년(연산군19)에 진사시에 합격했다. 22세인 1499년(연산군5)에 화순최씨和順崔氏 직장直長 세연世演의 따님과 결혼했다. 부인은 찬성贊成 문혜공文惠公 선문善門의 증손曾孫이며 포은圃隱의 외오세손外五世孫이다.
27세인 1504년(연산군10)에 대책對策에 합격했지만 곧 삭방削榜되었다. 왜냐하면, 이에 앞서 연산군은 환시宦侍 김처선金處善의 직간을 노여워하여 그를 죽이면서 공식 문서에 ‘처處’ 자와 ‘선善’ 자를 사용하지 말도록 명했는데, 충재의 시권 가운데 ‘처’자가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방이 나붙고 나서 유사가 그것을 깨달았다. 이에 자세히 살피지 못한 죄를 청하자, 연산군은 삭방 조치하라고 명했다. 하지만 충재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이 무렵, 양공楊公이 연당蓮塘에서 별세하자,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1467-1555)․송재松齋 이우李堣(1469-1517)와 함께 찾아가 치상하고 호송했다.
2) 사환 초기
30세인 1507년(중종2) 봄에 별시문과別試文科에 합격했다. 4월에 승정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가 되었으며, 12월에 예문관 검열藝文官檢閱로 추천이 되었다. 이 당시에 「한원일기翰苑日記」를 남겼다.
31세인 1508년(중종3) 4월에 승사랑承仕郞이 되었으며, 6월에 이희회李希曾․김영金瑛․시교侍敎 윤인경尹仁鏡․정태鄭熊․검열檢閱 김관文瓘․김희수金希壽․소세양蘇世讓 등과 ‘무오사국戊午史局’을 계론啓論해 이극돈李克墩(1435-1503)을 추죄追罪하고 김종직金宗直(1431-1491)의 신원伸寃을 주청했다. 7월에 장령掌令 김철金綴․지사知事 신용개申用漑 등과 함께 다시 이극돈을 추죄할 것을 계청하였지만 윤허되지 못했다. 이에 극력하게 계론을 올렸다. 11월에 통사랑通仕郞이 되었고, 12월 14일에 관료館僚와 함께 이줄밀李茁密에 관한 계사啓事를 올렸다. 이줄밀은 간악하여 선비들을 원수로 여겨 무고하여 옥사를 조장했다. 이에 홍문관에서 그를 추국하기를 계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충재는 봉교奉敎 윤인경尹仁鏡 등과 그의 죄상을 물어 징치해 줄 것을 계청했다. 이어 26일에 승정원承政院 주서注書가 되었으며 「당후일기堂后日記」를 남겼다.
32세인 1509년(중종4) 1월에 서사체직사徐祉遞職事로 계론하였다. 당시 주상께서 대간의 언로를 저지했다. 이에 충재는 조강朝講에서 주상에게 바른 말을 막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며, 언행을 늘 조심해야 한다는 충언을 올렸다. 7월에 계공랑啓功郞이 되었다. 이 당시 그의 「경연주의經筵奏議」는 그 해 8월 11일까지 경연관으로 나가 왕에게 올린 말을 기록한 것이다. 여기에서 그는 ‘주상의 수덕修德’․ ‘외환의 방비’․ ‘인재 등용책’ 등 왕도정치를 구현하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9월에 사관들과 함께 찬수청撰修廳에서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의 수찬修撰에 참여하였으며, 「수찬청계축撰修廳契軸」을 남겼다. 12월에 무공랑務功郞에 제수되었다.
33세인 1510년(중종5) 4월에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지제교知製敎가 되었다. 10월에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선무랑宣務郞이 되었다. 11월에 교리校理 이자李耔와 상소하여 변방을 노리는 적을 대비해야 한다고 했다. 이에 주상께서 삼공이 이 사안에 대해 논의하라고 하명했다. 10월 12일에 조강을 하면서 연변沿邊 수령 택차擇差와 재상의 인재 추천 과정에서 사사로운 뜻이 반영된 실책을 들어, 이러한 폐단을 혁파해 줄 것을 계론했다. 11월 2일에 내수사內需司 장리長利와 기신재忌辰齋 등을 혁파해 주길 주청했다. 11월 11일 조강에서 중용을 진강進講하면서 성학聖學을 밝히며 염치를 갖는 것에 대해 논했다. 11월 12일에 예조좌랑禮曹佐郞․선무랑宣敎郞을 거쳐, 병조좌랑兵曹佐郞이 되었다.
34세인 1511년(중종6) 1월에 홍문관 부교리弘文館副校理에 이어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이 되었다. 1월 9일에 간악한 이들이 정치를 어지럽히고 종척宗戚이 백성들의 어전魚箭을 탈취한 것에 대해 차론箚論했다. 2월에 지평持平 이빈李薲과 고형산高荊山 등이 불법을 자행하고 상관尙官 친족이 주상의 은총을 남발한 일과 육한陸閑이 백성의 밭을 강탈한 것에 대해 계론했다. 3월에 병조좌랑兵曹佐郞이 되었다. 4월에 춘추관직春秋館職을 겸하고,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이 되었다. 5월에 홍문관 부교리弘文館副校理가 되었다. 5월 24일에 동료들과 함께 ‘7조소’를 올렸다. 충재가 이처럼 추진력 있게 상소를 올리고 시무책을 개진한 배경은 홍문관 기능 확대에 따른 언관권 강화로, 훈구에 대한 견제가 본격화되었기 때문이다. 즉, 훈구와 적극적으로 대결할 수 있는 지방 출신의 사림이 홍문관에 진입해 홍문관을 통한 사림 정치진출이 활발히 전개되었기에 가능했다. 6월에 동부 제학同副提學 이세인李世仁 등과 이극돈의 직첩을 환수하라고 촉구하는 계차啓箚를 올려 가납되었다. 11월에 재이災異로 인해 동관同官들과 주상의 ‘수성지도修省之道’를 상소하자, 주상은 「계심잠戒心箴」을 만들라고 하명하고 술과 고기를 하사했다.
35세인 1512년(중종7) 4월에 동부 제학同副提學 김세필金世弼을 징치하고 음사淫祀를 혁파해 줄 것을 연차聯箚하였다. 윤5월에 일본과의 강화講和를 반대하였다. 이에 앞서 삼포三浦에 왜구들이 난을 일으켜 주민들을 잔해한 일이 있었다. 8월 22일에 대마도 왜인들과 협상하지 말 것을 주청했다. 11월에 동료와 함께 소릉昭陵의 추복追復에 대해 연차聯箚했지만 윤허를 받지는 못했다.
36세인 1513년(중종8) 1월 7일 조강에서 나라의 안위는 재상의 선임 여부에 좌우됨을 강조하였다. 2월 8일 석강에서 인재의 능력에 따라 파격적으로 발탁해 달라고 주청했다. 이어 2월에 류자광柳子光을 훈적勳籍에 추록追錄하지 말 것을 계청하였다. 이어 3월 2일에 다시 소릉昭陵을 추복追服해 줄 것을 주청하여 윤허를 받았다. 3월 21일에 소릉昭陵 개봉시改封時 복색服色 문제를 헌의獻議했다. 4월에 봉훈랑奉訓郞이 되었다. 홍문관 부교리弘文館副校理를 거쳐, 5월에 시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이 되었다. 9월에 병조정랑兵曹正郞이 되었다. 9월 11일에 다시 정막개의 일을 들어, 당시 언관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해 책문해 줄 것을 주청하였다. 11월에 봉진랑奉眞郞을 거쳐 다시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이 되어 류자광을 훈적에 추록하지 말고, 정막개鄭莫介의 당상관堂上官 품계品階를 삭탈하도록 계론하여 윤허를 받았다.
37세인 1514년(중종9) 1월에 다시 동료들과 함께 류자광․정막개의 일을 들어 여섯 차례 상소하여 윤허를 받았는데, 시론時論도 충재의 상소가 합당하다고 공인했다. 2월에 이조정랑吏曹正郞이 되어 이조에 들어가니, 전장銓長 박공朴公이 흔쾌히 맞아주면서 충재를 두고 큰 인물이 될 것이라며 칭찬했다. 8월에 호조정랑戶曹正郞이 되었으며, 9월에 부모 봉양을 위해 외직을 희망하여 영천군수永川郡守가 되었다. 이에 충암冲菴 김정金淨(1486-1520)이 증별시를 지어 주며 아쉬워했다.
38세인 1515년(중종10) 1월에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1553)이 영천永川 군재郡齋로 찾아오자, 충재는 시를 지어 주었다. 4월에 일 때문에 예천군에 가서 음애陰厓 이자李耔(1480-1533)와 만나 이틀 동안 묵은 뒤에 헤어졌다. 당시 충재는 음애와 교분이 매우 돈독했다. 음애는 충재에게 학문을 독실하게 해 줄 것을 거듭 당부했다. 윤4월에 임고臨皐에 있는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1337-1392)의 묘소를 찾아가 제사를 올리고 제문을 지었다. 5월에 음애가 근사록近思錄을 보내자, 충재는 시로써 답례하였다. 7월에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를 하사 받았다.
40세인 1517년(중종12) 3월에 조봉대부朝奉大夫에 올랐다. 10월에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을 거쳐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이 되었다. 11월에 다시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
41세인 1518년(중종13) 1월 10일에 입시하여 시경詩經을 강론하면서 주상에게 여색을 멀리하고 정사에 전념해 성군이 되어 달라고 주청했다. 그 달 15일에 조산대부朝散大夫에 올라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이 되었다. 4월에 봉렬대부奉列大夫에 올랐으며, 5월에 아들 동보東輔(1518-1592)가 태어났다. 이어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승정원 우부승지承政院右副承旨가 되었다. 이는 중종中宗이 친정親政을 하면서 특별히 제수한 것이다. 이에 충재는 두 번이나 사양했지만 윤허를 받지 못했다. 당시에 정원일기政院日記를 썼다. 충재가 성균관에 있을 때에 누군가가 쏜 화살이 대성전大成殿 기둥에 날아와 박혔다. 주상은 성균관 관원을 모두 하옥시키라고 명했는데, 당시 충재 역시 거기에 있었기 때문에 우부승지직 제수를 사양했다.
6월 1일 주강晝講에서 주상에게 사사로운 감정을 배제하고 널리 은덕을 베풀어 백성에게 미치게 하라고 주청했다. 6월 28일에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올라 동부승지同副承旨 박영직朴英直과 함께 정국을 논하고 근사록을 강론했다. 당시 이장곤李長坤은 계문啓文을 올려 충재가 좌부승지직에 적합한 인물임을 강조했다. 7월에 우부승지에 올라,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내려가 어버이를 찾아뵈었다. 8월 1일에 농암 이현보가 내방하여 술자리를 마련하고 5일 동안 즐기며, 영호루映湖樓 아래에서 선유船遊를 즐겼다. 8월 10일에 선비先妣 윤씨尹氏 묘에 제사를 올리고, 선조와 외왕고外王考 묘소에 성묘하고 제사를 올렸다. 8월 14일에 의정공議政公을 위해 수연壽宴을 베풀었다. 충재의 백부伯父와 계부季父도 참석했으며, 농암과 근읍 수령들도 참석했다. 그 달 18일에 금산金山의 외구外舅를 찾아뵙고, 22일에는 제촌霽村과 함께 가은嘉恩 석굴과 희양산曦陽山을 둘러보고, 27일에 조정으로 돌아왔다.
9월에 좌승지가 되었다. 주상께서 사정전思政殿에 납시어 유생들과 강의를 마쳤다. 이에 충재는 나아가 아뢰기를, “오늘의 전강殿講에서는 인仁을 논하였습니다. 인은 끊어진 세계를 잇는 일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라고 하고, 이어 노산군魯山君과 연산군燕山君의 후사後嗣를 이어주길 주청하였다. 11월 1일에 주상의 부름을 받아 사재思齋 김정국金正國(1485-1541)․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1482-1519)와 함께 근사록을 강론했다. 이에 충재가 난해한 부분을 설명하면 주상은 싫어하지 않고 때로 담소도 하였다. 11월에 주상을 모시고 조광조․묵암墨巖 이계맹李繼孟(1458-1523)과 함께 경연經筵에 참석하여 ‘학교學校’․‘천인薦人’․‘독서당讀書堂’ 등에 대해 논했다. 이어 도승지都承旨 겸예문관 직제학兼藝文館直提學이 되었으며, 내의원제조內醫院提調가 되었다. 충재가 내의원 제조의 적임자로 우승지右承旨 송당松堂 박영朴英(1471-1540)을 천거하자, 박영 또한 이를 사양하였다. 이에 결국 둘 다 양보하게 되었다. 충재와 박영의 처신을 두고, 당시 의론議論은 모두 어질다고 평했다. 이어 충재忠齋 최숙생崔淑生(1457-1520)이 사은사謝恩使로 차출되었지만 병을 핑계로 몸을 뺀 일에 대해 계논하자, 주상이 가납하였다. 이 당시에 승정일기承政日記를 남겼다.
42세인 1519년(중종14) 1월에 주상으로부터 근사록을 하사받았다. 2월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예조참판禮曹參判이 되었다. 이어 황보공皇甫公의 묘에 입석立石을 하였다. 황보공은 그의 선비先妣 외왕부外王父이다. 충재는 그의 대가 끊긴 것을 애석히 여겨 비석을 세우고 묘표문을 찬했다. 2월 9일에 석강을 하면서, 최숙생의 탈고신사奪告身事를 논계하였다. 그 달 15일에 가선대부에 올라 예조참판이 되었다. 4월에 동지중추 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 4월 16일에 칠십 고령인 부친을 뵙기 위해 귀근을 청해 윤허를 받았다. 6월에 사화가 일어날 조짐을 보고 외직을 청해 삼척군수三陟府使가 되었다. 충재는 삼척 고을에 부임하여 사창社倉을 세우고 ‘조적糶糴’의 폐단을 시정하여 빈민들을 구제하였다. 8월에 영규률수瀛奎律髓를 하사받았다. 9월에 시를 지어 농암의 양로연을 축하했다. 11월에 사화가 일어나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12월에 정암 조광조의 부음을 받고, 통곡했다. 정암은 능주陵州에 안치되었다가 이 무렵에 사사되었다.
3) 퇴거기
43세인 1520년(중종15) 1월에 안동부安東府 내성현乃城縣 유곡酉谷에 복거卜居하였다. 음애陰厓에게 서찰을 보냈다. 음애는 기묘사화 후에 은둔해 살면서 술로 세월을 보냈다. 충재는 그가 과음한다는 소식을 듣고 서찰을 보내 경계시켰다.
44세인 1526년(중종16) 10월에 충암 김정의 부음을 받고 통곡했다. 충암은 제주에 안치되었다가, 이 때 사사되었다.
48세인 1525년(중종20) 7월에 아들 동미東美(1525-1558)가 태어났다.
49세인 1526년(중종21) 봄에 집 서쪽에 소재小齋를 지어 ‘충재冲齋’로 편액하고, 서쪽 바위 위에 여섯 칸의 방을 만들고 연못을 빙 둘렀는데, 이것이 곧 ‘청암정靑巖亭’이다. 충재가 사는 동문洞門 밖에 맑은 물과 흰 바위는 그윽하고 아름다워 속세와 떨어진 경치여서 충재는 그 기이한 경관을 사랑했다. 돌을 쌓아 섬돌을 만들고 정자를 세워 그곳에서 노년을 보내려고 계획하였다. 아들 청암靑巖이 그 위에 정사를 지었는데, 이것이 곧 석천정사石泉精舍이다. 이어 백형伯兄인 야옹野翁 권의權檥(1475-1558)와 함께 백운암白雲巖을 유람하며 시를 남겼다.
52세인 1529년(중종24) 9월에 계제季弟 제촌霽村이 별세했다. 제촌은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1489-1546)․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1493-1563)과 현량賢良으로 추천되어 등제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사화를 만나 외직으로 돌다가 생을 마쳤다. 이에 충재는 남달리 애틋해하며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53세인 1530년(중종25)에 직첩이 환수되었다.
54세인 1531년(중종26) 3월에 부인상을 당했다. 8월에 봉화 와단리臥丹里 경좌庚坐에 장례 지냈다.
4) 사환 후기
56세인 1533년(중종28) 3월에 직첩을 환급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4월에 특명으로 서용敍用되어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이 되었다. 이에 음성陰城의 음애를 방문하였다. 음애는 시냇가까지 나와 충재를 배웅했는데 조용하게 담론하다가 헤어졌다. 6월에 김안로金安老(1481-1537)의 미움을 사서 밀양부사密陽府使로 나갔다. 밀양지密陽志를 참고하면, 충재는 7월에 부임하여 학문을 일으키고 주민을 사랑해 큰 치적을 남겼다고 한다. 이천利川에서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과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1478-1543)을 만났다. 당시, 충재는 한양에서 밀양으로 부임하던 중이었고, 퇴계도 반궁泮宮을 떠나 고향으로 내려오다가 마전포麻田浦에서 서로 만났다. 이에 함께 내려가다가 이천에서 모재를 만났던 것이다. 12월에 음애의 부음을 듣고 곡했다.
57세인 1534년(중종29)에 안동현安東縣 춘양春陽에 산장山莊을 마련하였다. 뒤에 맏아들 청암靑巖이 그곳에 거처를 마련했고, 이를 이어 손자 석천石泉이 선조의 유지遺志를 이어 한수정寒水亭을 세웠다.
58세인 1535년(중종30)에 한양부 좌윤漢城府左尹이 되었다. 9월 23일에 부친상을 당했으며, 겨울에 장례를 치렀다. 충재 모친 묘소가 봉화 유곡의 북쪽 정향丁向인데, 이에 이르러 부친을 그 뒤에 모셨다.
60세인 1537년(중종32) 11월에 상을 마치자, 충무위 상호군忠武衛上護軍으로 제수되었다. 이어 그 해 12월에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이 되었다.
61세인 1538년(중종33) 2월에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겸병마수군절도사兼兵馬水軍節度使가 되었다. 충재가 사은 인사를 드리자 주상께서, “영남은 큰 진영인데 근래에 해마다 흉년이 들어 유민들이 많다. 경은 마음을 다하여 편안히 모여 살게 하라.”라 하니, 충재는 “다스림의 근본은 조정에 있고 조정의 근본은 임금님의 한 마음에 있습니다. 요사이 사치가 풍습이 되어서 조정과 민간이 모두 그러합니다, 지금 만약에 검덕으로써 솔선하시면, 저절로 교화될 것이며 흉년도 해를 끼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모재 김안국과 사재가 시를 지어 주고 전별하며 격려했다. 7월에 동지충추 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으며, 8월에 형조참판刑曹參判이 되었다. 9월에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을 겸했고, 문원영화文苑英華를 하사받았다. 12월에 다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겸오위도총부 부총관兼五衛都摠府副摠管이 되었다.
62세인 1539년(중종34) 1월에 형조참판이 되었고, 2월 2일에 특별히 석강에 나아가 원옥冤獄을 당한 이들을 방면해 달라는 상소문을 올렸다. 2월 28일에 병조참판이 되었다. 6월에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라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다. 7월에 지중추 부사知中樞府事가 되어 개종계주청사改宗系奏請使로 명나라에 갔다. 이에 앞서 대명회전大明會典에 본국本國 종계宗系가 ‘고려 때 역신逆臣 이인임李仁任 후손後孫’이라고 잘못 기록되어, 조정에서 여러 차례 수정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이에 다시 충재를 보내 진정陳情하게 되었다. 윤 7월 17일에 전별연을 베풀었고, 27일에 출발했다. 당시 모재 김안국이 전별시를 지어 주었다. 28일에 파주坡州에 이르러, 황보공皇甫公 묘소에 참배했다. 10월 19일에 황성皇城에 도착했다. 11월 13일에 조선의 개정 요청을 받아 주겠다는 확답을 받았다. 충재는 친히 명나라 예부禮部에 나아가 간청을 한 것이 세 차례였으며, 통사通事를 보낸 것이 여섯 번이었다. 충재의 지극한 정성과 간절한 요청이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조천일기朝天日記를 남겼다.
63세인 1540년(중종35) 1월에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겸동지춘추관사兼同知春秋館事가 되었다. 2월 24일에 대명회전大明會典을 속찬續纂할 때 종계宗系를 고쳐준다는 칙명을 받고 환조還朝했다. 이에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랐고, 전토와 노비를 하사했는데 충재는 간절히 사양했다. 하지만 주상은 이를 윤허하지 않았다.
3월에 주상이 근사록 소책자를 하사하였다. 당시 주상이 경회루慶會樓에 납시어 신료들의 글재주와 무관들의 재주를 감상하고, 모두 흥겹게 취한 뒤에 모임을 마쳤다. 그 때, 어떤 관속官屬이 작은 근사록 한 권을 주워왔다. 이에 주상은 “그 책은 권모權某가 잃은 것이니, 돌려주라.”고 명하였다. 이러한 일화를 통해 충재가 근사록을 너무나 애독하여 늘 품에 지니고 다녔던 점을 확인할 수 있다. 4월에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겸지춘추관사兼知春秋館事이 되었다. 당음비사棠陰比事를 하사받았다. 5월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겸오위도총부 도총관兼五衛都摠府 都摠管이 되었다. 이어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겸지춘추관사兼知春秋館事이 되었다. 또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제수되었다. 6월에 세자우빈객世子右賓客을 겸했다. 7월에 주상께서 유일遺逸을 추천하라는 명에 따라 유학幼學 이희안李希顔과 생원生員 금축琴軸을 추천했다. 9월에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을 겸직했으며, 11월에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 겸세자좌빈객兼世子左賓客이 되었다. 이어 12월에 지중추 부사知中樞府事 겸오위도총부 도총관兼五衛都摠府都摠管과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이 되었다.
64세인 1541년(중종36) 2월에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 겸세자좌빈객兼世子左賓客이 되었다. 3월에 한해旱害 재이災異로 인해 주상께서 대신들에게 재이에서 벗어날 방도를 묻자, 충재는 주상부터 근신해야 하며 기묘사화 이후의 사안은 죄의 경중을 따져 처분하고, 왕실 측근들의 검소한 생활 정착 등이 시급하다고 진언했다. 5월에 예조판서가 되었고, 6월에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겸했다. 7월에 한양 동대문 바깥 상산商山 좌측 기슭 아래에 집을 지었다. 이에 농암 이현보와 참의參議 장대훈張大訓․첨지僉知 조적趙績 제공이 내방했다. 충재가 시를 농암에게 보내자, 농암도 하례시를 보냈다. 11월에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이 되었다.
65세인 1542년(중종37) 5월에 한해로 인해 주상에게 근신과 애민 정치 시행을 주청하는 논계를 올렸다. 8월에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 겸지의금부사兼知義禁府事․세자 우빈객世子右賓客․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이 되었다. 8월 13일, 중국에 궁비宮婢의 변變이 있자, 이를 교훈삼아 경계할 것을 아뢰었다.
66세인 1543년(중종38) 1월 1일 석강에 주상의 근신을 거듭 당부하며 진언하였다. 1월 26일에 군신․부자간 인륜의 도리를 다하면 국내의 어려움은 없을 것이라고 하며 주상의 경계를 촉구했다. 6월에 주자대전朱子大全을 하사받았다. 당시, 중국에서 주자대전이 본국에 전해져 주상의 명으로 간인하여 반포했다. 7월에 ‘기친상철조朞親喪撤朝’의 문제를 두고 주청했다. 8월에는 대학연의大學衍義를 하사받았다. 8월 24일에 생원진사시고관生員進士試考官으로 차출되었다. 8월 29일에 석강에 가뭄의 재이를 언급하면서, 30년 째 위리안치圍籬安置된 종실宗室을 해배解配해 줄 것을 논계하였다.
67세인 1544년(중종39) 봄에 주자대전을 고교考校했다. 이로써 주자대전이 중국에서부터 본국에 반포되었다. 주상께서 이를 인쇄하여 신료들에게 반포케 했다. 충재는 이에 주자대전을 접해, 교정을 하고 「소지小識」도 남겼다. 8월에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 겸지경연사兼知經筵事․세자 좌빈객世子左賓客․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이 되었다. 9월에 주상의 부름을 받아 빈청賓廳에 나아가 논계를 올렸다. 당시, 정순명鄭順朋이 경연에 나아가 대소윤大小尹에 대해 거론하여 주상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이에 충재는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의 실책을 강조하면서, 그들의 횡포를 들어 주상이 이에 현혹되지 말 것을 주청했다. 11월 15일에 중종이 승하했다. 11월 16일에 대제학大提學 성세창成世昌과 이조판서吏曹判書 신광한申光漢과 함께 중종실록을 찬술撰述했으며, 빈전도감殯殿都監의 일도 맡았다. 12월에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 겸지경연사兼知經筵事가 되었다.
68세인 1545년(인종1) 1월에 중종묘호中宗廟號와 관련하여 헌의獻議했다. ‘조祖’는 ‘공功’을, ‘종宗’은 ‘덕德’을 통칭하므로, ‘종宗’으로 칭하는 게 합당하다고 하여 가납되었다. 윤1월에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 겸지경연兼知經筵․의금부사義禁府事가 되어 전라수사全羅水使 양윤의梁允義의 일을 계론하여 가납되었다. 4월에 입시해서 경연하는 중에 상서尙書 「무일편無逸篇」을 논강講論하다가 기묘제현己卯諸賢의 억울함을 말하고, 신원을 주청했다. 5월에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오르고,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 겸지경연兼知經筵․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가 되었다. 당시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1553)이 좌찬성左贊成이 되어 권벌權橃과 류인숙柳仁淑이 선진先進의 신료臣僚임에도 불구하고 후진後進들의 좌목座目과 큰 차등差等이 없음을 지적하는 논계를 올렸다. 7월 6일에 명종이 즉위하자, 회재 이언적과 원상院相이 되어 기무機務를 참단參斷했다. 이때 명종은 어린 나이로 왕위를 이어받아 조정에 일이 많았기 때문에 삼공 외에 충재에게 특명을 내리어 원상으로 삼았다. 명이 내려지자 충재는 깜짝 놀라 말하기를, “바야흐로 지금 나라의 형세가 위태롭고 두려우며 인심도 안정되지 않아 기둥과 주춧돌 같은 사직의 신하가 아니고는 진압하여 지킬 수 없다. 나에게 이런 자리를 맡기신 것은 모기에게 산을 책임지게 하는 것과 같으니 어떻게 나라의 일을 맡겠는가?”라고 하였다. 「시무십조時務十條」를 아뢰었고, 대왕대비의 수렴청정을 의정議政했다. 이에 대해 충재가 먼저 제의를 했고, 뒤를 이어 회재가 수렴청정을 주장했다. 7월 7일에 윤원로尹元老를 멀리 유배 보낼 것을 합계合啓했다. 7월 20일에 외재궁外梓宮 내 유의遺衣를 추납追納하지 말기를 주청하는 논계를 올렸다. 7월 23일에 공의전恭懿殿에 문안을 올려 슬픔을 억제하고 반찬 드실 것을 주청하는 논계를 올렸다. 동관同官과 함께 「인종대왕행장仁宗大王行狀」을 교감校監하였다. 7월 25일에 영상領相 류관柳灌․좌찬성左贊成 이언적李彦迪․우찬성右贊成 신광한申光漢과 함께 어린 주상을 위해 성왕聖王이 되어 달라는 「십조十條」를 올렸다. 8월 11일 조강에서 공도公道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라고 주청했다. 8월 22일에 제재諸宰와 충순당忠順堂에 입대入對하여 윤원형尹元衡 일파의 만행을 논핵論劾했다. 8월 23일에 병조판서가 되었다. 8월 24일에 백인걸白仁桀을 구해 달라고 주청했다. 당시 윤원형에게 서찰을 보내 비리를 책망했다.
8월 26일에 대궐에 나아가 윤임尹任․권관柳灌․류인숙柳仁淑을 구하기 위해 논계했다. 8월 28일에 원상을 본직本職으로 교체해 달라고 논계했는데, 이 날에 원상을 교체하라는 하명이 있었다. 8월 29일에 위사공신衛社功臣에 녹훈錄勳되고 길원군吉原君에 봉해졌다가 곧 삭훈削勳되었다. 10월 9일에 파직되어 향리로 돌아왔다.
5) 유배 임종기
69세인 1546년(명종1) 고신告身을 빼앗겼다.
70세인 1547년(명종2) 9월에 양재역良才驛 벽서사건壁書事件으로 삭주朔州에 유배되었다. 당시 의금부 관리들이 들이닥치자, 충재는 편안히 그들을 맞아들이고 짐을 꾸려 낙토樂土로 가는 것처럼 태연했다. 이어 선영에 재배를 하고 조금도 낯빛을 흩트리지 않았다. 당시 아들 동보는 한양에 머물러있었다. 충재는 서찰을 보내 ‘예전에 범충선공范忠宣公이 70세로 만 리의 유배를 떠난 경우를 반추하며 염려 말라’고 당부했으며, ‘40년 동안 국은國恩을 입었지만 보답할 날이 없으니, 죽더라도 박하게 장례를 치르라’는 유언도 남겼다.
71세인 1548년(명종3) 3월 26일에 감기로 병석에 누워 지내면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임종하던 날 저녁에 측실의 아들에게 천자문을 가르쳤는데, 문장과 독음이 조금도 다르지 않아 식구들은 충재가 위중한 지경에 이른 것을 채 깨닫지 못했다. 그 날 밤에 별세하니, 향년 71세였다. 5월에 널에 실려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그 해 11월에 봉화현奉化縣 와단리臥丹里 계곡谿谷의 계방癸方 모부인 묘소 아래 최씨부인과 합장되었다.
충재는 화순최씨 첫째 부인에게서 2남 1녀를 얻었다. 2남으로, 맏이는 동보東輔인데 생원시에 합격하여 음직으로 사첨시 직장司瞻寺直長을 역임했다. 둘째 아들은 동미東美이며, 따님은 충의위忠義衛 홍인수洪仁壽에게 시집을 갔다. 최씨부인은 충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는데, 후일 충재의 뜻에 따라 후손들이 합장을 했다.
6) 복작과 추증
충재 사후, 1567년(명종22) 10월에 삼공三公이 충재의 복권을 주청하기에 이르렀고, 그해 10월 14일에 주상이 복작을 명함으로써 충재는 복작되었다. 그 해 12월에 경상도관찰사 박계현朴啓賢이 장계를 올려 ‘권벌權橃의 충의忠義와 풍절風節이 이와 같으니, 이언적李彦迪과 함께 충정衷情을 장려해야 한다’고 하자, 명종은 이를 가상히 여겨 대신들에게 ‘이인二人의 학행은 빛나 그렇게 일컬어지니, 장려하고 유지를 이어 선비들의 기풍을 진작시키고 유도儒道를 중히 여기게 하라’고 명했다.
1568년(선조1) 2월에 증대광보숭록대부贈大匡輔崇祿大夫․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겸영경연감兼領經筵監․춘추관사春秋館事로 추증追贈되었다.
1569(선조2) 6월에 퇴계 이황이 「행장」을 지었다.
1571(선조4) 9월에 ‘충정忠定’[사군진충왈충事君盡節曰忠 순행불상왈정純行不爽曰定 : 임금을 섬김에 절개를 다함을 ‘충’이라 이르고, 행실이 순수하여 어그러지지 않음을 ‘정’이라 이른다]의 시호를 받았다.
1588년(선조21) 사림들이 안동의 고택 서산 밖 사현리沙峴里에 서원을 세웠다. 이 서원은 ‘삼계서원三溪書院’으로 사액을 받았다.
1591년(선조24) 대명회전에 본국의 종계가 바로잡혀 속찬續纂되자, 나라를 빛낸 공으로,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고, 광국원종光國原從 1등 공신에 녹훈되어 불천위不遷位로 제사되었다.
1592년(선조25) 봄에 원우院宇가 완성되었지만, 임란으로 이루지 못했다.
1601년(선조35) 9월에 위판을 서원에 봉안하였다.
1623년(인조1) 신도비를 세웠으며, 1671년(현종12)에 후손 권목權霂ㆍ권유權濡 등이 문집을 간행했다.
1659년(효종10)에 사람들이 상소하여 삼계서원의 사액을 주청하여 윤허를 받았다.
1660년(현종1) 2월에 삼계서원의 사액이 내려져 제사를 올렸다.
1705(숙종31) 이동완李棟完ㆍ후손 권두경權斗經이 문집을 간행했다.
1746년(영조22) 9월에 근사록 소책자 및 신질新帙 심경心經이 하사되었다.
1752년(영조28) 후손 권목權霂 등이 문집을 간행했다(이광정李光庭의 서序).
1851년(철종2)에 본도 유생들이 충재를 문묘에 종사해 달라고 상소했다.
1853년(철종4)에 경기․충청․강원 유생들이 상소했다.
1871년(고종8)에 삼계서원이 훼철되었다.
1883년(고종20)에 본도 유생 김억수金億銖 등이 승무陞廡해 줄 것을 재상소했다.
1906년(광무10)에 삼계서원에 신도비를 세웠다.
1930년에 삼계서원에서 10권 6책의 문집을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7) 일화와 제가의 평
공은 모습이 반듯하고 도량이 우뚝하였다. 풍채가 훌륭하고 활달하였고 기국이 준엄하고 단정하였다. 천성이 검소하여 사치하거나 호사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현달한 지위에 이르고도 자신을 위해서는 쓸쓸하기가 마치 가난한 선비 같았다.
평소 성품이 검소한 것을 숭상하고 사치한 것을 경계하였다. 아들 동보가 능참봉이 되었을 때, 말을 타고 다니며 살이 쪘다. 이에 공은 노하여 주상의 명을 받은 선비이며 말단 관료로서 이렇게 하는 것은 사람들을 구제하는데 어려울 것이라고 하며 경계시켰다.
만년에 「자경편」과 근사록을 애독하여 늘 소매 사이에서 벗어나지 않게 했다. 중중께서 후원에 대신들을 초청해 잔치를 벌이고 헤어질 무렵, 신하가 근사록 소책자 한 권을 주워오자, 중중께서 ‘그 책 주인은 권벌이니 그에게 돌려주라’고 하셨다.
본디 독서를 좋아하여 비록 숙직을 하느라 공관에 있을 때에도 그치거나 잊은 적이 없었다. 혹 성현의 언행 중에서 절실하고 긴요한 곳을 보면, 반드시 아들과 조카를 불러 보여주고 반복해 일러 주었다. 매번 “배움은 모름지기 자기를 위한 것이니, 과거 공부는 말단의 일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말년에는 더욱 자경편과 근사록을 좋아하여 소매 사이에서 떠나지 않게 했다. 중종께서 일찍이 재상들을 불러 후원에서 꽃을 감상하면서 연회를 하였는데, 각자 모두 즐기라고 명해 공은 술에 취해 부축을 받고 나왔다. 어떤 낮은 환관이 근사록 소책자를 습득하였는데, 누구의 것인지 몰랐다. 주상께서 “권벌이 흘린 것이다.”라고 하며 돌려주라고 하명했다. 공의 외가는 정현왕후의 근친으로, 주상의 지우가 남달랐으나, 공은 더욱 스스로 삼가하며 피하였다. 대개 재상으로 대궐 안과 관련이 있는 자는 중국에 사신을 다녀오면 반드시 사사로이 바치는 것이 있었는데 공만은 그러지 않고, “감히 할 바가 아니라.”고 말하였다.
공은 평소에 화기가 훈훈하였으니, 비록 부리는 사람이나 비천한 종이라도 두터운 은혜로 대우하였다. 규문 안에서는 엄하지 않았으나 두려워해서 감히 사이에서 이간질하는 자가 없었다. 여종이 소반을 들고 오다가 넘어져서 국이 공의 옷을 더럽힌 일이 있었으나 화를 내지 않았다. 시냇가 정자에 앉았다가도 말을 타고 앞을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몸을 숨기고 그를 피했다. 고을 사람 중 본부의 교관이 된 자가 있어 공을 뵈러 왔다가, 길에서 아전을 때렸다. 부사가 듣고는 직접 따지자 교관이 당황하면서 거짓으로 말하기를, “내가 그런 것이 아니라 권영공이 그랬습니다.”라고 하니, 부사가 말하기를, “아전 때리기를 멋대로 함은 권상도 그런가.”라 하면서 성난 말을 그만 두지 않았지만 공은 끝내 따지지 않았으니 그 큰 도량이 이와 같았다. 이해에 임하고 사변을 만나서는 의리가 얼굴에 나타나 곧바로 전면에서 직접 맡았으니, 용기 있게 결단하는 것은 맹분과 하육과 같았다.
두 번째 계사를 올렸을 때에, 밤이 새도록 계사를 초하고, 일찍 나와 조정에 달려가려고 하니 집안사람들과 아들, 사위들이 번갈아 끌어당기고 울면서 간하였으나 모두 뿌리치고 떠났다. 대궐에 이르러 신광한공과 만나 함께 갔는데, 공의 뜻을 물어 알고는 몹시 놀라 굳게 만류하였으나 공은 듣지 않았다. 원상 이언적공의 자리에 나아가, 주서 유경심을 불러 계사를 쓰게 하니, 이공이 초본을 보고 역시 놀라 말하기를, “형세가 이미 이에 이르렀으니, 말해도 한갓 예측하지 못할 일만 일으킬 뿐입니다.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라 하고는, 위태롭게 기록한 부분은 모두 지워버렸다. 공이 물러나 앉아 무릎을 안고 길게 한숨 쉬면서 말하기를, “이처럼 깎아 없애면, 하지 않는 것보다 나을 바 없구나!”라고 하였다.
죽음의 어려움이 있더라도 빼앗을 수 없는 절의
권공은 참으로 재상 중의 참 재상이다.
덕행이 순수하고 충성이 함께 지극하였다.
용모가 빼어나고 풍신이 수명하고 도량이 넓고 컸으며, 성품이 검소하여 사치하지 않았으며 지위가 올라가도 쓸쓸함이 가난한 선비와 같았다.
멀리서 바라보면 씩씩하고 점잖으며 가까이 대하면 자상하고 온화한 성품이었다. 일이 발생하기 이전에 사람을 구하려 하였고, 그 변고가 허공의 구름보다 더할 때에 자신의 아전을 잊고 위험을 무릅썼으니 그 의리는 참으로 가을 서리보다 더 위품이 있고 당당하다.
권벌은 사직을 지킨 신하입니다. 그가 계를 올리며 쓴 말은 밝기가 별이나 해와 같았습니다.
천품이 순수하고 아름다우며 부드러운 덕을 갖추었다. 풍신이 빼어나고 의도가 준엄하였다. 동료들은 거룩한 기국에 탄복하였고 후학들은 검약한 지조를 흠모하였다.
학문과 행실이 순수하고 독실하여 도와 의를 스스로 힘쓴 분이다.
평소에는 화기가 훈연하여 비록 천한 노복이라도 은덕으로 대했다. 그러나 국가의 대사나 사변에 관한 일에 임하게 되면 의로운 빛이 얼굴에 드러났고 앞장서서 일을 맡았으니 비록 맹분․하육 같은 용사라도 공의 결단력은 따르지 못할 것이다.
선배들의 을사사화의 일을 논평하기를, 그 당시 일이 일어날 기미를 알고 나라를 떠난 사람은 김하서金河西요, 바른 말로 과감하게 간한 사람은 백성재白省齋요, 대신의 기품을 보여 준 사람은 권찬성權贊成이다. 아, 위대한 분들이다.
이치에 밝고 의리가 곧아서 그 가르침이 백대에 걸친다. 권충정공은 후덕과 대절로 유림학사들이 존모하지 않는 이가 없고 또 계속해서 오래 될수록 잊혀 지지 않는다.
을사년에 보여준 절의는 제일인자였던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충순당에 나아가 보여준 기상과 절의는 청천백일과 같다.
충재의 학문은 춘추에 근본을 둔다. 춘추는 시비를 밝히고, 혐의를 결단하며, 유예를 결정한다.
3. 충재집의 편찬과 체제
충재집의 편찬 과정을 정리한다. 충재집은 네 차례에 걸쳐 간행되었다. 이를 차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편찬 과정
초간본初刊本은 1671년(현종12) 삼계서원에서 2권 1책의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사림에서 전송되는 내용과 집에서 보관한 일기에서 일부 시를 모아 본집本集을 만든 뒤에, 책머리에 「연보」를 싣고, 시편詩篇을 부록으로 엮은 뒤에 홍여하洪汝河의 「서문」을 받아 초간본을 완성했다.
초간본은 현재 전하지 않고 1681년(숙종7)에 미수眉叟 허목許穆(1595-1682)이 쓴 「독권충정공일고讀權忠定公逸稿」를 권수에 추각追刻하여 간행한 후쇄본後刷本은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당시에 4대 종손 권목과 4대손 권유가 주선하여 충재의 시를 1671년에 삼계서원에서 목판본으로 간행한 초간본에 실은 것으로 보인다. 이를 본 허목은 충재의 시를 두고, “단률시십육短律詩十六”이라고 했다. 미수가 1681년(숙종7)에 초간본을 보고, “공께서 돌아가신 지 지금부터 백 삼십 여 년이 되었다. 변화도 많은 인간 세상이어서 지은 글이 별로 전하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 후손들에게 남아있는 것은 단률시短律詩 16수, 간독簡牘 2장, 계사啓事 1편, 제문祭文 1편, 총묘문塚墓文 1편, 대책對策 1편뿐이다. 그 문장은 충후간엄忠厚簡嚴하여 한 글자 한 마디 말씀이라도 모두 사람을 흥기시키니, 참으로 군자의 말씀이다!”라며 극찬했다.
중간본重刊本은 1705년(숙종31)에 이동완李棟完과 후손 권두경權斗經이 초간시初刊時에 빠진 시문詩文을 추입追入하여 「습유拾遺」를 만들었다. 그리고 부록을 다듬고 차례를 바로잡아, 현손 권두인權斗寅의 지識를 붙여 4권 2책의 중간본을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이 저본底本은 현재 국립중앙도서관 ․ 고려대 만송문고 ․ 장서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특히 권두경權斗經이 지은 교유록交遊錄은 저자와 교유한 61명의 약전略傳으로, 중간본重刊本에만 실려 있다. 현전하는 충재의 시가 40여 수로 늘어난 것은 5세손 창설蒼雪 권두경權斗經(1654-1726)과 외손 이동완李棟完이 수집蒐集한 덕분이다.
삼간본三刊本은 1752년(영조28)에 6대손 권만權萬이 「유고遺稿」와 가장본家藏本 충재일기」를 11권으로 편차하여, 이광정李光庭과 함께 간행하려고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별세했다. 이에 후손 권목權霂이 권만이 편집한 충재일기를 대조하고 사우士友의 의론을 모으고 이광정의 서序를 받아 9권 5책의 목판으로 삼간본을 간행하였다. 이 저본은 현재 규장각․성균관대 도서관․연세대 도서관․장서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이는 한국문집총간 19책 충재집으로 영인되었다.
이 영인본의 저본은 서울대학교 규장각본으로, 반엽半葉은 십행十行 이십자二十字이고 반곽半郭의 크기는 18.6×14.3cm이다. 이 영인본 소재 시편詩篇 가운데 「추석음회秋夕會飮」부터 「기백씨寄伯氏」까지의 26수는 원집 출판 후 다시 모아 부록한 것이다. 편자는 ‘「추석회음」에서 이하습유以下拾遺’라고 밝혀 놓았다. 이 일은 권두경과 이동완이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사간본四刊本은 1930년에 봉화 삼계서원에서 왕조실록에서 발췌한 계사啓辭 24편과 소疏ㆍ차箚ㆍ주의奏議와 집에 보관된 자료에서 찾은 영귀시咏歸詩 1편, 혹인서或人書 1편, 변공묘지邊公墓誌를 본집本集에 보탰다. 그리고 왕조실록과 교유한 인물의 「연보」 등에서 찾은 새로운 자료를 종합하여 「연보」를 증보하여 10권 6책의 목판으로 간행했다.
사간본은 현재 고려대 도서관․국립중앙도서관․성균관대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이 책이 몇 차례 간행된 충재의 문집 가운데 가장 충실하고 분량 또한 10권 6책으로 가장 많다. 편찬자는 미상이며, 조선왕조실록 소재 충재에 관한 기사까지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1985년에 여강출판사에서 영인 출판된 바 있으며, 성균관대 송재소 교수가 해제를 썼다. 여기에 시 「영귀」 시 한 편이 더 실려 있다.
2) 체제와 내용
이어 삼간본을 중심으로, 문집의 체제와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권 머리에는 홍여하洪汝河의 「서序」, 허목許穆의 「독충정공일고讀權忠定公逸稿」, 권두인權斗寅의 「중본중간지中本重刊識」, 이광정李光庭의 「중편서重編序」와 「세계도世系圖」ㆍ「연보年譜」ㆍ「목록目錄」이 실려 있다.
권1에는 시 16수(淸河縣次朴先生孝修韻․甲戌十二月三十日暮至賀老道上口占․乙亥元月二十七日與士孝飮夜以酒病不能出見吟成二絶以贈之․聞靈妙災吟成一絶寄國卿․乙亥元月三十日夜吟一絶書贈李正字迪․乙亥二月十二日與鄭以叔李希初孫得之睦琛之對月飮酒口占二絶․次府伯李聾巖賢輔養老宴韻․新作家於東大門外聾巖李棐仲及諸公枉訪聊作一絶以謝之․嶺南樓次前人韻․題安東鄕校東齋記後․題圃隱鄭先生職牒後․次望僊庵壁上韻․朔州詠懷․贈李誠之諴․贈琴正叔)가 실렸다. 이어 습유拾遺에 26수의 시(秋夕會飮․詠甁梅․山寺次伯氏韻․次伯氏詠老僧掃花韻․次雲字․次伯氏․白雲庵(2)․山庵․白雲臺懷昔人․次用和韻․敬次十翫先生韻呈主人(2)․次德容韻․得奇字․霧雨․來自白雲書與主人․次贈伴鷗翁․慰伴鷗翁․次解言外之意․次贈伴鷗翁․留別伴鷗翁․寄伯氏․咏歸)가 실려 있다.
권1의 시는 초간본의 단률시短律詩 15제와 「추석회음」 이하 21제의 습유拾遺로 되어 있다. 단률시는 칠언시로서 대체로 편년순編年順이며 원운原韻이 부기된 것이 많다. 습유는 처음 두 수를 제외한 「산사차백씨운」 이하의 시는 모두 충재의 계제季弟 권장權檣 후손 집에서 나온 것으로서, 소시少時 작품으로 보인다. 이는 백형伯兄 권의權檥의 시에 차운한 것으로서 원운이 부기되어 있다. 이어 계사啓辭 5편(請奪鄭莫介堂上階啓․請爲魯山君燕山君立後啓․請勿嫌啓辭煩多益恢言路益務責己啓․請勿許日本使臣齎銀貿易啓․請救三臣啓)이 실려 있다.
그런데 계사 5편 가운데 초간본의 「을사논구삼신계乙巳論救三臣啓」를 제외하고 실록 및 감사監司 김연金緣의 승선일기承宣日記」에서 발췌한 것이다. 다음 서간문 6편(寄審言․與都事․與朴進士和之珩․移尹元衡․與誠之正叔․寄東輔) 가운데 조카 권심언權審言에게 보낸 「기심언寄審言」을 비롯하여 윤원형尹元衡을 꾸짖은 「이윤원형移尹元衡」, 삭주배소朔州配所에서 큰아들에게 보낸 「기동보寄東輔」 등이다. 이어 제문 1편(文忠公圃隱鄭先生), 묘갈․묘표 2편(淑人安東權氏․黃甫公), 대책 1편(善始善終策)이 실렸다.
권2에는 잡저 5편(春秋胡傳箚義․性理群書考疑․近思錄考疑․朱子大全考疑․題永陽日錄卷面)인데, 「주자대전고의朱子大全考疑」는 1543년 중종으로부터 「주자대전」 한 질을 하사받고 이를 손수 교정한 것으로, 권마다 단지短識가 있다. 「제영양일록권면題永陽日錄卷面」은 영천현감으로 있을 때 기록한 일록의 권면卷面에 스스로 감계한 글을 적은 것이다.
권3은 일기인데(在翰林苑時以後在堂后時), 정묘년(중종2) 12월부터 무진년(중종3) 정월부터 그 해 12월까지 13개월에 걸친 내용이 실려 있다. 이는 곧 한림일기翰院日記로, 예문관 검열 등 사관으로 있던 1507년(중종2) 12월 1일부터 1508년 12월 26일까지의 기록이다. 그런데 1508년 9월 21일부터 11월까지의 기사는 양친 병환으로 휴가 중이어서 빠져 있다. 권4도 일기인데(在堂后時), 기사년(중종4) 정월부터 그 해 9월까지 9개월 간 내용이 실려 있다.
권5도 일기인데(在堂后時), 기사년(중종4) 10월부터 12월까지 3개월 간 내용과 경오년(중종5) 정월부터 3월까지 3개월간의 내용이 실려 있다. 권4-5는 당후일기堂后日記로, 승정원 주서로 있을 때 기록한 것이다. 권4는 1509년(중종4) 1월부터 14일까지의 기록이며, 권5는 1509년 10월 1일부터 1510년(중종5) 3월 30일까지의 기록이다.
권6도 일기(承宣時)인데, 무인년 5월부터 11월까지 7개 월 간의 내용이 실려 있다. 이는 곧, 승선일기承宣日記로, 충재가 승지로 있던 1518년(중종13) 5월 15일부터 11월 6일까지의 기록이다. 이 중 7월 25일부터 8월 26일까지의 기사는 휴가를 얻어 고향에 다녀 온 기록이다. 권7은 조천록朝天錄과 유묵遺墨 4판板이 실려 있다. 조천록은 충재가 종계주청사宗系奏請使로 중국에 다녀 온 일록日錄이다. 1539년(중종34) 7월 17일 사연賜宴으로부터 12월 16일 연경燕京에서 고국으로 출발하는 날까지의 기록이다.
권8은 「부록」으로, 충재의 평생 행적을 정리한 「연보」(李滉撰)․「신도비명병서」(鄭經世撰)․「신도비명병서」(朴淳撰)가 실렸다. 권9도 「부록」으로, 충재를 선양하기 위한 「휘의諱議」(尹根壽撰)․「사액제문賜額祭文」(朴安悌撰)․「봉안제문奉安祭文」(金玏撰)․「상향축문常享祝文」(黃暹撰)․「제원축문祭院祝文」(鄭琢撰)․「묘제문祭墓文」(鄭逑撰)․「묘제문祭墓文」(權好文撰)․「삼계서원묘우상량문三溪書院廟宇上樑文」(李山/集撰)․「청액소請額疏」(金啓光撰) 및 정유일鄭惟一의 문봉필록文峯筆錄, 신흠申欽의 상촌집象村集 등에서 수록한 언행척록言行摭錄․「만장挽章」 3편(李延慶撰․李賢輔撰․李滉撰)이 실렸다. 이어 「추감제편追感諸篇」에 제문 형식의 글 8편(盧守愼․具鳳齡2․沈喜壽․李滉․朴啓賢․權擘․趙翊)이 있다. 이어 「추증投贈」에 2편(李耔․金安國)의 글이 실렸다. 말미에 을사사적乙巳禍蹟(洪汝河撰)이 실려 있다.
4. 충재의 시문학
1) 충재시 개관
위에서 보듯이, 충재의 시는 충재집의 편찬 과정에 대한 내력을 살펴야만 파악된다. 충재집 초간본을 간행할 때, 충재의 시를 4대 종손 권목과 4대손 권유가 주선하여 초간본에 실었다. 이를 본 허목은 충재의 시를 두고, ‘단률시십육수短律詩十六’이라고 했다. 이로써 당시 충재의 시 16수가 전해졌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하지만 연작시를 한 수로 봤기 때문에 정확하게 표현하면, 15제 17수이다. 중간본에서 이동완과 충재의 5세손 권두경이 초간본에 빠진 시문 25수를 추입追入해 「습유」를 만들었다. 이로써 충재의 시는 40수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시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추석회음」과 이 시는 충재 백씨의 후손 집에서 소장한 연류지론에서 얻은 것인데 책의 표면에 ‘충정공소작’이라 기록되어 있다’라고 한 기록 및 「산사차백씨운」에서 ‘백씨 현령공의 휘는 의, 자는 백구이다. 이 시 이하 36수는 충재의 아우 제촌 후손의 낡은 상자 속에서 발견된 것인데, 충재가 어렸을 때 지은 것이 아닌가 한다’는 주요한 근거가 된다. 삼간본은 후손 권목에 의해 권만이 편집한 충재일기를 대조하고 사우의 의론을 모으고 이광정의 서를 받아 9권 5책의 목판으로 간행되었다. 이는 한국문집총간 19책 충재집으로 영인되었다.
이 영인본 소재 시편 가운데 「추석회음」부터 「기백씨」까지의 25수는 원집 출판 후 다시 모아 부록한 것이다. 사간본은 삼계서원에서 왕조실록에서 발췌한 계사 24편과 소ㆍ차ㆍ주의와 집에 보관된 자료에서 찾은 시 「영귀」 1편, 서간문 「혹인서」 1편, 「변공묘지」를 본집에 보탰다. 그리고 왕조실록과 교유한 인물의 「연보」 등에서 찾은 새로운 자료를 종합하여 「연보」를 증보하여 10권 6책의 목판으로 간행했다.
이 책은 1985년에 여강출판사에서 영인 출판된 바 있는데, 여기에 충재의 시 「영귀」 시 한 편이 더 실려 있다. 단률시는 칠언시로서 대체로 편년순이며 원운이 부기된 것이 많다. 습유는 처음 두 수를 제외한 「산사차백씨운」 이하의 시는 모두 충재의 계제 권장의 후손 집에서 나온 것으로서, 소시 작품으로 보인다. 이는 백형 권의의 시에 차운한 것으로서 원운이 부기되어 있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고, 도표로 제시한다.
① 초간본에 실린 시는 충재의 시는 17수에 불과했다.
② 삼간본에 실린 충재의 시는 「습유」 25수와 초간본 17수를 포함해 42수이다. ③ 현전 충재의 시는 사간본의 「영귀시」 1수를 합해 총43수이다.
連番 | 初刊本 | 連番 | 三刊本(拾遺) | 四刊本 |
1 | 淸河縣次朴先生孝修韻 | 1 | 秋夕會飮 | 咏歸 |
2 | 甲戌十二月三十日暮至賀老道上口占 | 2 | 詠甁梅 | |
3 | 乙亥元月二十七日與士孝飮夜以酒病不能出見吟成二絶以贈之(一) | 3 | 山寺次伯氏韻 | |
4 | 乙亥元月二十七日與士孝飮夜以酒病不能出見吟成二絶以贈之(二) | |||
5 | 聞靈妙災吟成一絶寄國卿 | 4 | 次伯氏詠老僧掃花韻 | |
6 | 乙亥元月三十日夜吟一絶書贈李正字迪 | 5 | 次雲字 | |
7 | 乙亥二月十二日與鄭以叔李希初孫得之睦琛之對月飮酒口占二絶(一) | |||
8 | 乙亥二月十二日與鄭以叔李希初孫得之睦琛之對月飮酒口占二絶(二) | 6 | 次伯氏 | |
9 | 次府伯李聾巖賢輔養老宴韻 | 7 | 白雲庵(一) | |
8 | 白雲庵(二) | |||
10 | 新作家於東大門外聾巖李棐仲及諸公枉訪聊作一絶以謝之 | 9 | 山庵 | |
11 | 嶺南樓次前人韻 | 10 | 白雲臺懷昔人 | |
12 | 題安東鄕校東齋記後 | 11 | 次用和韻 | |
13 | 題圃隱鄭先生職牒後 | 12 | 敬次十翫先生韻呈主人(一) | |
13 | 敬次十翫先生韻呈主人(二) | |||
14 | 次望僊庵壁上韻 | 14 | 次德容韻(一) | |
15 | 次德容韻(二) | |||
16 | 次德容韻(三) | |||
15 | 朔州詠懷 | 17 | 得奇字 | |
16 | 贈李誠之諴 | 18 | 霧雨 | |
17 | 贈琴正叔元貞 | 19 | 來自白雲書與主人 | |
합계 | 15題 17首 | 20 | 次贈伴鷗翁 | |
21 | 慰伴鷗翁 | |||
22 | 次解言外之意 | |||
23 | 次贈伴鷗翁 | |||
24 | 留別伴鷗翁 | |||
25 | 寄伯氏 | |||
합계 | 21題 25首 | 1首 |
충재는 어려서부터 철저하게 유교 성리학을 체득했으며, 이를 몸소 실천하며 불의에 맞서 대응하는 강직한 신료의 형상을 실행한 인물이다. 유자 의식과 교유 인물과의 활동을 담은 시를 보기로 한다.
2) 유자 의식과 교유 양상
충재는 성리학 사유 의식을 기반으로 하여, 동류들과 교유하며 연대 의식을 강화하였다. 충재의 성리학 사유 반영 및 교유 양상을 볼 수 있는 작품을 살펴보기로 한다.
留念斯文有幾人 사문에 깊이 마음을 둔 이 몇인가
華堂今夕煥無塵 화려한 동재는 오늘밤도 티끌 없이 빛나네.
慇懃爲報靑衿子 간곡히 청운의 선비들에게 말하건대
澡雪毋忘此日新 눈처럼 씻은 오늘의 새 모습 잊지 마오.
안동 향교를 둘러 본 감회이다. 이 시는 충재가 다소 한가했던 시기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충재는 30세에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간 이후, 바쁜 일정을 보냈다. 그러다가 42세 때에 기묘사화가 일어나 파직되어 귀향했다. 이어 이듬해 1520년(중종15)에 내성현 유곡으로 이거했다. 즉, 그는 42세 무렵에 안동부의 도촌리에 거주했던 것이다. 이 무렵, 그는 시간을 내서 안동 향교를 방문했다. 당시 이곳을 방문한 충재는 매우 흥분되었다. 유학의 본 고장인 안동 선비들의 학구열에 절로 감동을 받았다. 당시 정국은 선비들이 연이어 피해를 입는 사화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시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동 선비의 기맥이 간단없이 흐르고 있음을 목도한 것이다. 안동 선비들은 성리학 풍토 정착을 위해 부단한 노력을 경주해 나가고 있다.
충재는 사림의 정신이 위축되는 시절에 안동 선비들의 연찬 활동을 지켜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이로 인해 그의 심장은 힘찬 박동을 멈추지 않았다. 단아한 선비들이 동재에 불을 밝히고 학문에 전념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는 여전히 새로운 세상을 지향하는 꿈틀거림을 느꼈다. 기묘사화로 인한 상실감과 좌절 의식에 젖어있었던 충재는 다시금 새로운 기대와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그래서 충재는 이러한 선비들의 모습에 감동되어 지금 이 모습 그대로 변함없이 이어주길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전했다. 일시적으로 실추된 자신의 형상에 비해, 선비들의 신선한 향학열에 감동되어 미래 지향적 메시지를 전했다. 충재의 성리학적 풍미가 드러난다. 이는 포은의 절의를 칭송한 작품에도 보인다. 시의 세주를 본다.
살피건대, 안찰사는 손순효이다. 일찍이 경상도관찰사가 되었을 때 포은 자손들을 위해 짧은 글을 지어 후대 사람들에게 남기게 하였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문충공 포은은 송나라 승상 문천상과 뜻이 같은 분이다. 목숨을 버리고 의를 취하였으니 인간 세상 수천 년 역사를 살펴볼 때, 몇이나 그렇게 할 수 있었던가? 우뚝한 산처럼 우러러 볼만하여 쳐다보며 우두커니 서 있다. 만대까지 끼칠 맑은 바람이여! 푸른 대가 그 곁에 있네. 후일, 수령으로 그 자손들을 침노하여 근심스럽게 하는 자를 나는 취하지 않겠다.” 남창 김현성 공이 그 아래에 쓰기를, “전에 포은 정문충공의 자손으로, 영남에 있던 사람들이 여러 대에 걸쳐 부진하여 거의 평민처럼 되어 버렸다. 손순효 공과 권벌 공이 앞뒤로 경상도관찰사로 왔는데 손공은 글을 짓고 권공은 시를 지어 모두 뒷날의 관찰사 군수에게 부탁하기를, 그 후손들에게 부세를 면제해 주라는 것이었으니 그 뜻이 근실하다고 할 만하다. 손공의 말씀 가운데 ‘푸른 대가 그 곁에 있다[綠竹在傍]’라는 말이 있었는데, 종실 석양정이 이를 위해 그윽한 대나무 한 그루를 그려 실증하였다. 월정 상공 윤근수는 선조 때의 명문장으로, 이 그림에 시문을 써 두었다. 상공의 아드님이 이를 출간하여 세상에 전하고자 한다. 손공과 권공 두 분께서 절의를 숭배하고 장려하는 뜻이 이에 의지해 민멸하지 않게 되었다. 아, 가상하다!
직첩의 유래를 설명하면서, 정 포은의 의리와 기상이 숭상할 만하다고 강조했다. 이렇듯 포은 정몽주의 의리를 인지하고 표상한 관찰사 안순효과 충재의 행적이 돋보인다. 절의의 표상인 포은의 정신 지향과 학문 정신을 추앙하면서, 그 후손들이 영세해진 것이 안쓰러워 부세 감면 혜택을 주려고 배려한 마음을 높이 샀다. 관찰사로 부임한 손순효와 충재가 글과 시를 지어 포은의 정신적 우월성을 강조하였고, 종실 석양정이 이를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고, 윤두수가 충재의 시를 써둔 것이다.
충재는 61세가 되던 1538년(중종33) 2월에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충재가 하직 인사를 드리자 주상은 “영남은 큰 진영인데 근래에 해마다 흉년이 들어 유민들이 많다. 경은 마음을 다하여 편안히 모여 살게 하라.”라 하니, 충재는 “다스림의 근본은 조정에 있고 조정의 근본은 임금님의 한 마음에 있습니다. 요사이 사치가 풍습이 되어 조정과 민간이 모두 그러합니다, 지금 만약에 검덕으로써 솔선하시면, 저절로 따라서 교화될 것이며 흉년도 해가 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충재는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면서, 주상의 당부를 가슴에 새기는 한편 주상에게 검소한 덕망으로 솔선수범해 주기를 주청하였다. 충재의 의리 지향 의식과 충직한 신료 형상이 부각되어 있다. 시를 보기로 한다.
清風峻節冠吾東 맑은 품격 드높은 절조 우리나라에서 으뜸
扶植綱常賴此公 삼강오상 세우는 것을 공에게 힘입었네.
歎賞慇懃孫按察 정성껏 칭송했던 안찰사께 감탄하니
精誠相照一紙中 그 정성이 종이 가운데 비친다오.
포은의 직첩 뒤에 쓴 시이다. 이 작품에 대한 내력은 시의 주석을 통해 보았다. 권두경 또는 권만이 충재집을 편찬하면서 세주를 추가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포은의 이학적 품격을 칭송하면서 맑은 품격과 고절한 절조는 해동에서 으뜸이라고 역설하였다. 그의 절의 정신이 조선의 성리학 전개사상 큰 영향을 끼쳤던 점을 언명하면서, 그러한 정신이 이 땅에 삼강오륜을 토착시킨 추동력으로 작용했다고 한다. 이와 함께 포은의 정신 지향이 퇴색되는 것을 감지하고 고무시키는 정책을 시행한 안순효의 행적을 칭송하였다. 충재 역시 안효순과 같은 생각을 지녔기에 그의 어진 행적을 이어 실천했던 바이다. 이러한 저변에 유자 의식이 깔려있다. 영묘사가 불에 탄 것을 보고 느낀 감회를 토로한 데에도 이런 의식이 드러난다.
八百年餘佛殿災 팔백년 넘은 불전이 불에 타
東京舊物返黃埃 경주 옛 유물이 누런 먼지 되었네.
人言吾道從玆盛 누군가 우리 도가 이제 성하리라 하더니
經閣如何亦共灰 존경각도 왜 함께 화재 당했는가.
이 시는 충재가 38세 되던 1515년(중종10) 정월 30일에 경주 영묘사에 불이나 그나마 남아있던 3층 전우殿宇가 타버렸다는 소식을 듣고, 시를 지어 모재 김안국(1478-1543)에게 보냈다. 주석에 의하면, ‘절은 정관 5년에 창건되었다. 작년 12월에 성균관 존경각도 불에 탔다. 그래서 언급한 것이다’라고 했다. 이어 ‘경주 영묘사가 불탔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람들은 구리를 훔친 자들이 불을 질렀을 거라고 의심하였다. 불교가 소멸하는 것은 우리 유학의 행운이다. 그러나 오래 된 전각이 그대로 있다 하여 무슨 방해가 되겠는가? 그대로 있는 것이 불교를 믿던 전대 임금들의 황폐함을 경계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감회가 없을 수 없어 절구 한수를 읊어 국경에게 보낸다’고 했다. 당시 모재는 승문원 판교직에 있었다. 모재는 충재와 동갑으로 일평생 절친한 친구였다.
이로부터 28년 뒤, 충재는 기묘사화의 여파로 15년 동안 벼슬길에서 떠나 지냈다. 56세 되던 1533년(중종28) 4월에 용양위 부호군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충재같이 강직한 신하와 함께 조정에 서기를 꺼려한 당시의 김안로의 방해로 6월에 외직인 밀양부사로 나가게 되었다. 밀양지를 보면, 충재는 7월에 부임하여 학문을 일으키고 주민을 사랑하여 큰 치적을 남겼다고 한다. 이 당시에 충재는 이천에서 퇴계와 모재를 만났다. 당시, 충재는 밀양으로 부임하던 중이었고, 퇴계도 반궁을 떠나 하향하다가 마전포에서 만났던 것이다. 이에 함께 가다가 이천에서 모재를 만났다. 이로써 충재․모재․퇴계의 역사적 만남이 이루어졌다. 이를 두고 퇴계는 후일 “비로소 정인군자의 말씀을 들었다[始聞正人君子之論]”라고 회고 한 바 있다.
영묘사는 경주부의 사찰 가운데 하나로, 당 태종 정관 6년에 신라 선덕 여왕이 창건했다. 전우가 삼층인데, 웅장하고 화려함이 보통 이상이었다. 충재는 영묘사 전각의 소실을 두고, ‘불교가 소멸하는 것은 우리 유학의 행운이다’라고 하였다. 충재는 영묘사를 유적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유학을 신봉하는 유자 입장에서 주목하였다. 영묘사가 불에 탄 것은 결국 고려조 제왕들의 타락한 추태를 경계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래서 영묘사의 소실은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한 반면, 성균관 존경각의 소실에 대해 우려하는 시각을 비쳤다. 충재는 불교의 쇠퇴와 함께 유학의 번성을 염원했는데 존경각도 화재를 당한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충재의 유학자적 입장을 보인 시이다. 이러한 유학적 안목에서 당대 인물과 교유한 측면을 검토하기로 한다. 그의 시에서 특정인에게 다수의 시를 남긴 것으로, 반구 옹에게 준 작품을 들 수 있다.
早上騷壇期闊步 일찍이 시단에 올라 활보하길 기대했고
文章光焰壓風人 문장의 빛은 시인들을 압도했다오.
撚髭一嘯臨長紙 긴 종이 펼치고 수염을 꼬며 한 번 읊으니
筆有驚雷句有神 우레처럼 빠른 붓 끝에 신이한 시구 남기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인 반구 옹의 신상은 정확히 파악되지 않는다. 그는 이른 나이에 탁월한 시인의 명성을 드날렸던 것 같다. 충재는 그의 시작 솜씨가 대단했던 점을 특기하였다. 시단에서 활보하길 기대했던 만큼 그에 대한 명망이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문장을 짓는 그의 모습을 세밀히 묘사하였다. 긴 종이를 펼치고 수염을 정돈하면서 시상을 결집한 뒤, 종이에 시를 쏟아내면 기막힌 작품이 탄생된다는 것이다. 붓놀림도 매우 빠르고 지은 시도 빼어난 점을 강조하였다. 충재가 그와 매우 친하게 지냈던 것 같다. 그의 시에 차운해서 지은 작품이다. 반구 옹의 시적 재능을 유감없이 표현한 데서 충재의 교유 양상을 짐작할 수 있다.
擬掃塵心住碧巒 속된 마음 쓸어버리려 청산에 살려 했더니
世緣催我返塵寰 속세 인연 나보고 돌아오라 재촉하네.
嫌君石室孤棲宿 석실에서 홀로 잠드는 것 싫어하는 그대에게
寫與淸詩靜裏看 맑은 시 써주나니 조용할 때 봐주오.
속된 마음을 모두 떨쳐 버리고 청산에서 한적하게 살기로 다짐하였다. 그러므로 이 시는 충재가 43세 되던 해인 1520년(중종15) 이후에 지은 것이다. 충재는 기묘사화 여파로 귀향해 내성현 유곡에 복거했다. 그러므로 이 시의 창작 시기를 유곡 복거 이후 13년 뒤 56세 때인 1533년(중종28)에 4월에 복직되려던 시점으로 추정할 수 있다. 속세의 잡념을 모두 불식시키고 유곡에서 은둔하기로 작정을 했건만 다시 조정의 특명을 받고 용양위 부호군에 임명되었다. 그러면서 이미 은둔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반구의 생을 흠모하면서 시를 지어준 것이다. 다음 시는 그와 동문수학하던 즐거움을 회상하면서 은둔의 미적 체험을 바라는 내심을 담고 있다.
憶昔秋風洛水頭 낙동강 가 가을바람 불던 옛날 생각하건대
聯床翦燭對詩眸 함께 공부할 때 촛불 심지 자르며 시를 지었네.
聲名場屋連三捷 과장에서 연거푸 세 번 합격해 명성이 드러났고
穎妙東南第一流 출중한 재주와 지혜는 동남에서 최고였다네.
山寺重逢靑眼舊 산의 절에서 옛날처럼 반기는 얼굴로 거듭 만나니
木桃屢費紫瓊酬 내 하찮은 물건을 귀한 물건으로 갚는다네.
何當共洗世緣了 그 언제 함께 세속 인연을 씻어내고
雲水忘機狎白鷗 자연에서 기심 잊은 갈매기와 친할까.
충재는 당시 벼슬살이에 골몰했던 것 같다. 동문수학하던 반구와의 추억을 되살리며 상념에 젖어들었다. 특히, 가을밤이 되면 밤을 지새워가면서 독서하고 시 짓던 일이 생각났다. 여기에서도 그의 특별한 재주와 지혜를 칭송한다. 그가 과장에서 연이어 세 번이나 합격했기에 영남에서 그와 겨룰 이가 없다고 단언했다. 산 속 절간에서 그와 만났는데 예전처럼 반가이 맞아주고 귀한 보답을 하는 마음씀씀이에 감동을 받았다. 그와 헤어지고 나니, 그가 자연에서 평온한 삶을 누리는 것이 부럽다. 그래서 기심을 잊고 자연 속으로 돌아가고 싶어진 것이다. 다가올 벼슬살이의 고달픔과 대비된 자연에 귀의함으로써 평화와 자유를 누리고 싶은 마음을 담았다. 충재는 관련 시 여러 편에서 그를 그리워하고 있다.
洛水初逢下上飛 낙동강에서 오르내리던 갈매기 처음 본 뒤
北南那得少差池 남과 북으로 어떻게 잠시라도 헤어지랴.
三江風月三生誓 삼강의 바람과 달처럼 삼생을 같이 할 것 맹서했고
萬里煙波萬斛思 만 리 뿌연 물결에 만곡의 생각을 지녔다네.
靑鳥不來誰寄信 파랑새 오지 않아 누구에게 소식 전할지
白鷗何處自忘機 백구는 어디서 함께 기심을 잊었을까.
雲深水闊尋無路 구름 깊고 물 넓어 찾을 길 없는데
一念歸時鬢欲絲 돌아갈 때 생각하니 머리털이 가늘어지네.
헤어지는 아쉬움을 상징적으로 그려냈다. 낙동강에서 함께 지냈던 일을 상기하면서, 남과 북으로 헤어지는 신세를 한탄하였다. 바람과 달처럼 변함이 없이 지내길 기약했지만 헤어져 지내는 현실 위기 때문에 수많은 생각이 교차한다. ‘좋은 소식 전해 줄 파랑새도 없다’고 한 표현은 그와 단절된 절박한 심리 상태를 상징한다. 그리고 기심을 잃은 백구는 반구를 상징한다. 그와 단절된 상처가 이렇게 깊다는 것을 반증한 것이다. 이보다 더 깊고 높은 장벽은 구름과 바다이다. 현실의 위기와 벼슬의 구속이 자신을 자유롭게 해주지 못한다는 표현이다. 돌아갈 날이 아득하기 때문에 이를 생각하면 조급함 때문에 괴롭다. 당시 충재에게 은거를 바라는 마음이 이처럼 강박감으로 다가왔다. 그와 함께 반구와의 재회를 통한 자연에로 귀의를 염원하는 심정을 담아내었다. 타향에서 고향의 벗을 만난 감격해 한다.
生同一世又同鄕 한 세상에 태어나 세대도 고향도 같은데
邂逅臨皐喜未量 영천에서 우연히 만나 기쁨이 한량없네.
況此高堂兼得月 게다가 이 고당에서 달빛까지 얻었나니
前臨平野水雲光 앞 평야의 물빛 구름 빛을 굽어본다네.
人事無涯生有涯 세상사 무한해도 인생은 유한하니
樓頭有月飮如何 누대 위 달이 떴으니 술 한 잔 하세나.
十年雲散今宵聚 십년 흩어 지내다가 오늘 밤 만나니
鬢髮看看我獨華 귀밑머리가 나 혼자 어느덧 하얗구나.
38세 때인 1515년(중종10)에 동향의 지우를 만난 감회를 표현했다. 2월 12일에 정이숙․이희초․손득지․목침지와 달을 보고 술을 마시며 지은 즉흥시이다. 당시 충재는 영천군수를 역임하고 있었다. 충재는 고향 친구들의 내방을 맞아 달빛 오른 누대에 올라 풍류를 즐긴다. 타향에서 고향의 벗님을 만나 반가워하는 심회를 담았다. 은은한 달빛과 함께 평야에 전개된 물빛이나 평온한 구름은 벗과 만난 충재의 평담한 심정을 대변해 주는 시어이다. 첫째의 시는 벗을 만난 정겨운 서정을 묘사한 것이며, 두 번째 시는 지난 세월을 돌아보며 인생을 반추하는 심회를 그려낸 것이다.
험난한 인생사를 살아가는 작자의 내심이 드러난다. 무한한 세상사에 비해 유한한 인생살이는 덧없게 느껴진다. 이 때문에 벗을 만난 감격에 이어 인생을 한탄하는 어조를 토로한다. 누대 위에 휘영청 뜬 달을 바라보니, 새삼 인생무상을 느낀다. 그래서 술잔을 당겨 서로의 심회를 토로한다. 십 년 동안 떨어져 지내다가 오늘 밤 이 좋은 때에 술을 마시며 울적한 마음을 심회를 달래보자는 것이다. 회고해 보건대, 벗들의 머리카락은 여전히 검지만 자신의 귀밑머리털은 어느새 하얗게 변했음을 느낀다. 머리카락이 흰 것을 강조한 것은 충재 자신의 삶의 역정이 그만큼 고단했고, 수많은 세파에 시달렸다는 것을 반증해 준다. 충재는 영천군수 시절에 회재와도 만남을 가졌다.
傷酒春來肺病身 봄이 와도 과음 탓에 폐병이 든 몸이니
此身今日愧忘親 오늘 나 자신이 어버이 저버린 일로 부끄럽소.
妙年不飮多公德 젊은 시절에 술 마시지 않음은 공의 미덕
我向公前是罪人 나는 그대 앞에서 죄인이라오.
이 작품은 충재의 나이 38세인 1515년(중종10) 정월 30일 밤에 지은 작품이다. 회재 이언적(1491-1553)은 충재보다 13세 연하인데, 충재와 의기가 통하는 후진이었다. ‘대윤大尹’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은 윤원형 일파에게 마지막 장애물이 충재와 회재였다. 후일, 이들은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노년기에 먼 극북極北 지역으로 귀양을 가서 적소謫所에서 운명을 맞게 된다. 즉, 충재는 70세인 1547(명종2) 9월에 삭주朔州로, 57세인 회재는 강계江界로 각각 유배 길에 오른다. 비슷한 시각에 벽제역碧蹄驛에 이르렀으나 만나지 못하고 각자의 유배 길을 떠나 그 이후, 영영 만나지 못했다. 충재가 이 시를 지을 때 회재는 25세였다. 회재는 지난해 1514년(중종9)에 별시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교서관 정자직에 있었다.
충재는 좋은 시절인 봄이 찾아왔어도 과음한 탓에 폐에 병을 얻고 말았다. 문면에 그가 술을 많이 마시는 이유는 설명하지 않았지만, 정치적 풍파 속에서 감내해야 하는 현실의 중압감 때문이 아닌가 한다. 위의 시에서도 언급했지만 그는 시의 행간에 그러한 내면의 심지를 반영해 내었다. 이로 인해 어버이에게 죄인의 모습으로 설 수밖에 없다고 고백하였다. 반면에 음주하지 않고 건강하게 지내는 회재 앞에서 부끄럽다고 고백하였다. 회재와 만난 자리에서 충재는 자신의 고뇌와 번민을 시를 통해 우회적으로 표현해 내었다. 그러면서 회재와 같은 후진을 통해 자신의 기대와 염원이 이뤄지길 바란다는 내면을 비쳤다. 다음 시는 충재가 한양에서 지낼 때 교유 양상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萬松攢處有新家 일만 그루 소나무 모인 곳에 새집 지으니
刱見朱輪會亦嘉 벼슬아치 모임도 아름다운 것을 이제 알겠네.
況是凝川曾過客 일찍이 응천에 들렀던 나그네를
衰年相對意如何 노년에 마주하니 퍽이나 즐겁네.
충재가 64세였던 1541년(중종36)에 지은 시다. 그 해 2월에 그는 의정부 좌참찬 겸세자좌빈객이 되었다. 3월에 한해 재이로 인해 주상께서 대신들에게 재이에서 벗어날 방도를 묻자, 충재는 주상부터 근신해야 하며 기묘사화 이후, 죄의 경중을 따라 처분하고, 왕실 측근들의 검소한 생활 정착 유도 등이 시급하다고 진언했다. 5월에 예조판서가 되었고, 6월에 의금부사를 겸했다. 7월에 한양 동대문 바깥 상산商山 좌측 기슭 아래에 집을 지었다. 이에 농암 이현보와 참의 장대훈․첨지 조적 제공이 내방했다. 충재가 사례하는 시를 농암에게 보내자, 농암도 하례시를 보냈다. 농암연보 75세 조를 보면, ‘칠월에 충재가 새로 지은 집에 모여 술을 마셨다. 이때 충재는 예조판서였는데 영미정 뒤에 새 집을 지었으므로 충재가 가서 본 곳이다. 참의 장대훈․첨지 조적․위장 조천수 등과 우연히 모임을 가졌었는데, 주객 5인이 모두 밀양군수를 지낸 적이 있었다. 그래서 충재의 시에 이르기를, “앉은 분들이 앞뒤로 밀양군수를 지내셨으니, 다섯 분의 감회가 어떠하십니까?”라고 했는데 근거를 둔다.
후일, 후손 권만(1688-1749)이 그 유허를 지나다가 「보출흥인문행步出興仁門行」을 지어 선조 충재의 이야기를 후세에 전했다. 권만은 1752년(영조28)에 권빈權薲․이광정 등과 충재의 문집을 교정, 재편하여 1752년에 정고본定稿本을 만들 때 첨기添記한 것이다. 이 정고본을 삼계서원에서 목판으로 간행한 것이 현재 전해지는 삼간본이다. 소나무가 우거진 곳에 새집을 지으니 벼슬아치들의 회합이 이처럼 아름다울 줄 미처 몰랐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모임에 참석한 이들 가운데 참의 장대훈․첨지 조적․위장 조천수 등 5인 모두는 밀양군수를 역임한 이들이어서 더욱 돈독했던 것이다. 노년에 서로 만나는 기쁨을 표현했다. 특히, 농암 이현보와의 교유는 돈독했다.
人道吾鄕有二天 우리 고을에 어진 수령 있다고 말하는데
能推老老慰高年 어버이 섬기는 마음으로 노인들 대접한다네.
掇英香惹萊衣上 국화 향기가 색동옷에 스며들고
吹帽風經鶴髮邊 모자에 부는 바람 백발을 스친다네.
喜氣剩隨和氣合 즐거운 분위기에 화기가 넘치고
歡聲從與賀聲連 찬탄 소리와 축하 소리가 이어지네.
南中此事看曾未 영남에서 이런 모임 일찍 본 적 없는데
何幸吾親亦赴筵 다행히 아버님도 이 자리에 계신다네.
안동부사 농암 현보의 양로연 운에 차운한 시이다. 농암은 충재보다 11세 연장의 고향 선배이다. 당시 농암이 거주하던 분천은 선성 고을로서 충재가 살던 도촌과 가까운 곳이다. 이 시를 지은 해는 충재가 42세 되던 1519년(중종14)이다. 충재는 그해 6월에 조광조趙光祖(1482-1519), 김정金淨(1486-1520), 김식金湜(1482-1520) 등의 현실에 대한 인식이 지나치게 격절激切함을 조제調劑하려다가 여의치 않자, 외직을 원해 삼척부사가 되었다. 그 해 11월에 기묘사화가 발생하여 조광조․김정․김식 등은 축출되어 처형되었다.
당시 안동부사로 재직하던 농암이 중양절인 9월 9일에 경내 80세 이상의 노인들을 위해 양로연을 열었다. 농암은 당시 80세 이상이던 부모를 모시고 양로연에 참석하였다. 이에 도촌에 살고 있던 충재의 부친도 이 모임에 참석하였다. 충재는 농암의 원운을 받아 보고 이 시로 차운해 축하하였다. 당시에 충재는 삼척부사로 근무했다. 안동부사의 양로연에 참석하는 부친을 모시고 가기 위해 부사의 자리를 비울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남 지역에서 유례가 없던 농암의 효심이 담긴 잔치를 소식을 듣고 축시를 보냈다. 충재는 어진 수령 농암의 행적을 칭송하였다.
충재는 농암이 어버이를 섬기는 극진한 마음을 미루어 남의 어버이를 섬기는 정성에 감동을 받았다. 농암이 색동옷을 입고 어린 아이처럼 춤을 춰 어버이를 기쁘게 해드린 사례를 소개하였다. 찬탄과 축하의 소리가 울리고 모두들 즐겁고 행복한 순간도 담았다. 영남 고을에서 이런 모임을 들어보지 못했다고 하면서, 자신의 부친도 그 양로연에 참석을 했기에 감동이 담긴 마음을 시에 담아 보냈다.
이처럼 충재는 유교 성리학 관점에서 선비 정신 함양과 기상을 중시했고, 평생 이를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그러한 정신 지향이 관련 시에 녹아 있었다. 아울러 충재는 고향의 벗이며 선배였던 반구와 절친한 교유를 지속했고, 한양에서는 명사들과도 교유를 이어갔다. 특히, 회재와 농암과의 교유를 통해 정신적 교감을 이뤘다.
3) 산수 감흥과 미적 체감
충재의 시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작품은 산수 자연을 완상하면서 느끼는 감흥과 이를 미적으로 체감한 것을 형상한 것이다. 일련의 시는 평담한 시풍으로, 산수를 즐기며 자연에서 체득한 미적 감각을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시편은 충재가 기묘사화 이후, 고향 도촌리 귀향과 유곡 복거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충재는 사화의 정쟁에 시달린 심신을 달래며 산수자연의 미감 의식을 시로 형상화했다. 자연 친화적 심상은 매화를 가꾸며 벗님을 기다리는 정서와 통한다.
一朶甁梅用意栽 매화 한 가지 병에 담아 정성껏 가꾸어
待看佳客笑談開 좋은 손님 모시고 담소할 때 기다려 피겠고
陽和自與天同泰 봄기운 저절로 천기와 함께 완연해지면
喜氣春風相逐來 상서로운 기운과 봄바람 서로 따라오리라.
이 시는 후손들이 충재의 시문을 모으는 과정에서 발굴해 실은 작품이다. 이는 충재 백씨의 후손 집에서 소장한 연류지론에서 수습한 것인데, 책의 표면에 ‘충정공소작이라 적혀 있다’는데 근거를 둔다. 고즈넉한 시풍이 전체 시를 관류한다. 시인은 정성을 다해 매화 한 그루를 분재해 키웠다. 그런데 매화가 피기를 주저하며 귀한 손님이 내방하길 기다린다고 하였다. 이는 역발상적 표현으로, 귀한 손님이 오면 매화가 만개해 주길 기대하는 심리가 담겨있다. 천기에 따라 봄기운이 완연해지면 삼라만상에 상서로운 기운과 봄바람이 연이어 찾아오겠다는 희망의 소식을 전했다. 봄을 맞이한 시인의 마음을 정결하게 그렸다. 농촌 가을 정서 묘사에도 여유와 낭만 정조가 담긴다. 시인은 봄을 기다려 고운 벗님과 담소하며 즐기는 여유를 찾고자 하였다. 격동기를 살아가는 충재로서 한때 이러한 여유와 산수 흥취의 멋을 즐기는 데서 선비 학자의 기품이 드러난다. 추석을 맞느라 상기된 시적 자아 형상도 멋스럽다.
節近中秋上冢多 추석이 가까워 성묘가 많아지고
家家有酒月舒波 집집마다 술 익고 달빛도 한가로워
相將今夜留連飮 오늘밤 어울려 연거푸 마시니
何似陶公達曙歌 도연명이 새벽까지 노래한 것에 비교되랴.
중추절이 가까워오자, 집집마다 성묘하느라 분주하다. 술동이에 술이 익고 달빛도 풍요로워 낭만 정서가 무르익는다. 이웃 사람들과 정겹게 모여 술을 마시는 흥취는 도연명이 새벽까지 술을 마시던 것 이상이라고 한다. 자연 속에서 자족한 삶을 누리는 과정을 표현하며 신선한 미적 감동을 담았다. 세시풍속을 향유하는 서정성과 농촌 정서가 어울려 있다. 시인의 풍류는 등산을 통해 더욱 고조된다.
寺在千尋上 아득히 높은 곳에 절이 서있어
登臨膽欲𢥠 올라와 굽어보니 간담이 서늘하네.
丹霞棲翠壁 푸른 절벽에 붉은 노을 깃들고
蒼桂掩晴窓 푸른 계수나무는 밝은 창문 가렸네.
石老苔千古 오랜 바위에 천고의 이끼 끼었고
林空鶴一雙 텅 빈 숲에 한 쌍의 학만 있네.
逍遙多逸興 거닐면 편안한 흥취 많아지니
安得筆如杠 어이 해야 깃대만한 붓을 얻을까.
아득히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절을 찾았다. 밑을 굽어보니 간담이 서늘할 정도로 높다. 푸른 절벽에 노을이 붉게 물들었고, 밝은 창문에는 계수나무가 푸르게 가려진 모습을 포착하였다. 푸르고 붉은 색감의 배치로, 색감 배치 미학을 강화했다. 푸른 계수나무가 창문을 가리는 설정을 함으로써 시각적 심상도 고조시켰다. 이러한 시상은 유구한 세월의 변전과 학을 배치함으로써 정적인 미학의 강조로 이어진다. 묵은 바위에 서식하는 이끼는 오랜 세월 풍상을 겪었다. 바위와 이끼는 긴 세월 동안 함께 하며 유구한 역사를 상징하는 매개물이다. 텅 빈 숲에 한 쌍의 학이 머물고 있다. 시인은 시선이 닿는 곳마다 펼쳐진 자연 풍광에 절로 감탄해서 가슴은 흥취로 가득 채워진다. 상기된 시인은 깃대만한 붓을 구해 실경에서 느끼는 감흥을 시로 그려내고픈 욕심을 낸다. 흥겨움이 충일한 시인은 벗님의 귀가도 만류케 한다.
丹竈雖慙駕鶴翁 연단 가마가 가학옹에게 부끄럽지만
結廬猶在五雲中 오두막집이 여전히 오색구름 속에 있다오.
興來坐對橫山雨 흥에 따라 앉아 산 빗겨 오는 비를 바라보고
浴罷歸携滿袖風 목욕 마치고 소매 가득 바람을 담아 돌아오네.
早識坡仙間是樂 소동파가 이 즐거움 비난한 것 일찍 알았고
更憐邊老睡添慵 변소가 졸며 게을렀던 일 더욱 어여쁘네.
煩君莫起思歸念 그대는 부디 돌아갈 생각 하지 마시길
滿目風光日日同 눈 가득한 풍광이 날마다 이와 같다오.
은자의 형상을 담고 있다. 신선 술법을 익혀 불로장생하는 도인들에게는 부끄럽지만 자신도 은일한 삶을 영위하며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작은 오두막에 오색구름이 영롱하고 흥이 오를 즈음, 산을 가로지르며 내리는 비를 바라본다. 맑은 산속 개울물에서 목욕을 마치고 소매에 청량한 산바람을 가득 담아 귀가한다. 경련에 등장하는 소동파와 변씨 노인의 일화를 본다. 소동파는 후한 때 문인으로, 경학에 밝았다. 몸이 비대하여 낮잠을 즐기던 변소邊韶를 조롱하여, “심랑은 맑고 가늘어 옷도 이기지 못하건만, 변씨 영감은 뚱뚱해 띠를 열 겹이나 둘렀네.”라고 기롱했다. 충재는 이처럼 소탈하고 가식이 없는 소동파와 변씨 노인을 들어, 순진무구한 교유의 멋을 그려내었다. 충재는 방문한 벗에게 서둘러 돌아가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산의 풍광이 날마다 아름다운 자태를 선사하기 때문이다. 호방한 시적 풍류는 풍류 흥취의 진전으로 승화된다.
春陰乍低野 봄 구름 낮게 들판에 깔리더니
山雨初霏霏 산 속에 비가 부슬부슬 내리네.
携兒幷水曲 아이 데리고 물길 따라 걸어가니
微風吹簑衣 산들 바람 도롱이에 불어오네.
汀草芽方動 물가엔 예쁜 새싹이 돋고
渚柳絮欲飛 모래톱엔 버들개지 흩날리네.
時有持竿老 이따금 낚싯대 든 두 영감
汝余爭釣磯 아웅다웅 낚시터 다툰다네.
談笑待黃昏 농담을 주고받다 황혼이 되면
曳杖咏而歸 지팡이 끌고 노래하며 돌아오네.
시에 한 폭의 그림이 들어 있다. 봄 구름이 들판에 낮게 깔렸고 산에 부슬비 내리자, 시인은 아이를 데리고 물길 따라 걷는다. 도롱이에 미풍이 불어드는 촉감적인 이미지도 형상하였다. 냇물 가에는 새싹이 어여쁘게 돋고 모래톱엔 버들개지 날리는 시각적 심상도 배치했다. 시인은 봄 들판의 부슬비, 노인, 아이, 냇가, 새싹, 버들개지의 양태를 사실적으로 그려내었다. 이어 등장하는 두 노인네의 낚시터 다툼 삽화도 매우 정겹다. 잔잔한 물결에 파동을 일게 하듯, 시적 흐름의 변화를 주어 유동적 미학을 점증시켰다. 누 노인은 어린 아이들이 다투는 것 마냥 자리다툼을 한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시인도 동참하여 농담을 주고받다가 황혼 무렵에 귀가하는 멋을 스케치했다. 잔잔하면서도 정감이 담긴 표현을 통해 충재의 산수 자연에 대한 미적 체감 수준이 높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이어 고원한 경지를 누비는 고품격의 미학 정서를 보기로 한다. 백운대 구름을 보니 그리운 이를 대하는 것 같다.
寒溪瑤草沒溪濆 찬 시냇가 고운 풀이 냇물을 덮었는데
披草尋眞入綺雲 풀 헤치고 진인 찾아 어여쁜 구름으로 들어가네.
人去臺空雲不老 사람 떠나고 대는 비었지만 구름은 늙지 않았는데
英英恰似對夫君 가볍고 밝은 구름 보니 그대 대한 듯하네.
시각적 심상이 주류를 이룬다. 시냇물․풀․구름․대는 부재의 임을 대신하는 매개물로, 시인의 공허한 마음을 달래주는 대상이 된다. 차가운 촉감을 선사하는 시냇가에 고운 풀이 자라 시냇물을 덮고 있다. 풀을 헤치고 구름이 피어난 곳으로 임을 찾아 간다. 그리운 분은 이미 떠났고 누대는 비어 황량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 부재의 임을 대신해 줄 위안의 대상이 존재한다. 가볍고 산뜻한 백운이다. 백운을 바라보면서 만나지 못한 아쉬움을 위로받기로 하였다. 떠난 임, 황량한 누대와 대조된 백운을 대치함으로써 시인의 감정 전환이 이루어졌다. 이에 시인의 서글픈 정서가 이내 밝아지는 효과를 얻었다. 자연 경물의 신선한 미적 체험을 통해 내면의 정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로써 은자의 초일한 삶의 표백이 이루어진다. 은일한 삶의 멋을 추구하는 시인의 감성 미학은 연작시에 더욱 극명하다.
采藥行吟紫芝歌 약초 캐며 자지곡을 읊다가
穿雲偶入羽人家 구름 뚫고 우연히 도인의 집을 찾았네.
坐來山雨絲絲下 앉자마자 산속의 비가 줄줄 내려
濕盡瑤階滿樹花 옥 계단에 만개한 꽃을 적시네.
약초 캐는 은자의 평온한 삶을 노래하였다. 약초를 캐면서 노동요를 불러 흥겨움을 더했다. 구름 낀 산을 지나 도인이 사는 집을 찾았다. 도인과 만나자마자 비가 내린다. 안개와 비가 교차하면서 산속의 정경은 신비감에 휩싸인다. 옥돌 계단에는 만개한 꽃이 가득하다. 꽃비가 내리는 것이다. 선경을 방문한 시인과 도인의 만남은 이루어진 않았다. 하지만 무엇 하나 아쉬울 것이 없다. 기다리면 되고, 더 기다린다 해도 청아한 멋은 시들지 않는다. 설령 도인을 만나지 못한다 해도 찾아온 자체로 만족하며 선경에 든 표일한 서정을 만끽하면 그만이다. 다음 시도 자연에서 노니는 즐거움에 매료된 정신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雨脚初收白日斜 빗발이 막 걷히자 밝은 태양 기울고
黃公睍睆哢淸歌 꾀꼬리가 고운 소리로 맑은 노래 부르네.
輕風不捲氷綃起 가벼운 바람 안 불어도 흰 비단 펄럭이니
知我池邊有落花 아마 못가에 떨어지는 꽃이리라.
비가 그치고 찬란히 빛나던 태양이 서산으로 기운다. 꾀꼬리가 즐겁게 울어주어 마음을 들뜨게 하였다. 붉은 색감의 태양과 꾀꼬리 울음소리가 합치되어 시의 회화성을 제고시킨다. 흰 꽃이 떨어지는 광경을 흰 비단이 나부끼는 것에 비유하였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시절을 따라 지는 낙화의 모습이 애상적이다. 비단결처럼 곱고 흰 꽃이 무수히 떨어지는 꽃을 보면서 미적 감성이 발동되었다.
穿雲一路正還斜 구름 뚫은 외길이 곧다가 다시 기우니
來聽商顏晧首歌 상산 사호의 백발가를 듣고 싶네.
記歲不須煩世曆 세월 흘러감을 달력 구해 볼 필요 없나니
任看秋葉與春花 가을 잎과 봄꽃 보면 안다오.
구름을 뚫고 지나가는 길의 굴곡을 묘사하였다. 평화롭고 청적한 멋이 깃들어 있다. 상산 사호의 백발가가 들려오는 듯하다. 선적인 경지에 든 것처럼 탈속과 고절의 미학을 느낄 수 있다. 달력을 보면서 세월이 흘러가는 현상을 굳이 관찰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봄꽃이 피는 것과 가을에 지는 낙엽을 보노라면 자연히 세월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연 생태를 보면, 세월이 흘러가고 시절이 변하는 것을 절로 알 수 있다고 한 데서 자연 애호 정서를 느낀다. 아울러 산수 실경의 위엄을 표백하는 가운데 내적 희열감을 느낀다. 이런 감동은 밤까지 연속된다.
蘿扉半掩柳絲斜 넝쿨 사립문 반쯤 닫혔고 버들 늘어졌는데
竟日高吟白石歌 종일토록 백석가 목청 높여 부르네.
坐○東嶺銀蟾吐 동쪽 산마루에서 은빛 달 오르면
看取秋風第一花 가을바람 불 때 가장 먼저 핀 꽃 보리라.
산촌에서 안온한 삶을 누리는 은자의 일상을 표현했다. 넝쿨이 엉킨 사립문이 반쯤 열린 상태이다. 문이 열렸다는 것은 은자의 삶의 방식이 폐쇄적이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심경에 자연의 미적 정감이 자연스럽게 유입되었던 것이다. 버들가지가 휘영청 늘어져 흥겹고 멋의 정감을 더한다. 이에 은자의 풍류 서정은 한 층 제고되어 신선이 되면 흰 돌을 삶아 먹는다는 데서 유래된 「백석가」를 부른다. 그러한 풍류 흥취는 밤으로 연장된다. 동산에 달이 오르고 고운 달이 떠오르면, 가을밤 흥에 겨워 가장 먼저 핀 꽃을 보겠다며 흥분한다. 중후한 품격을 누리는 산중 생활에서도 은거자락의 미학이 전개된다.
徹骨天眞壯 씩씩한 골격은 태고의 장관
黃○掩夕陽 누런… 석양을 가렸네.
無言常凜凜 항상 말없이 늠름하니
有態更蒼蒼 자태가 하늘처럼 푸르네.
祕鶴煙雲密 신비한 학 이내와 운무 사이 숨었고
囚陰洞壑涼 음기 담은 골짜기 서늘하여라.
雄尊專厚重 웅장하고 높으며 중후함 홀로 차지하고
萬古閱奔忙 만고 내내 분망한 세상을 바라보네.
산속 절에서 높이 솟은 산의 위용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이는 충재가 맏형 권의에게 차운한 시이다. 이 시는 충재의 아우 제촌 후손의 낡은 상자 속에서 발견된 것이다. 씩씩한 산 자태는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장관이다. 석양 무렵 산세의 모습은 더욱 아름답다. 군자처럼 과묵하게 서 있는 산 자태는 외형상 늠름할 뿐만 아니라 푸른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청량감을 느끼게 한다. 학은 이내와 운무 사이에 모습을 감췄고 음기를 품은 골짜기는 서늘하다. 웅장한 그 위용으로 만세토록 분주한 세상을 향해 응시한다고 하면서 분망한 세상을 살아가는 인생에게 묵언의 감화와 교훈을 준다. 선계를 탐방하며 지은 작품에서 표일한 삶의 방식이 선명히 드러난다.
何年勞五丁 그 언제 다섯 장사를 힘쓰게 하여
鑿嶺架風櫺 산마루 뚫어 바람 들이는 암자 세웠을까.
霄近窓多月 하늘 가까워 창문에 달빛 많고
雲深晝欲暝 구름 깊어 낮에도 어둑하여라.
白龍飛窟宅 백룡이 동굴에서 날아오르니
靑峽殷雷霆 푸른 골짜기에 우레 울리네.
暫借禪房宿 잠시 선방 빌려 묵으니
依然躡鳳翎 예전처럼 새 깃털 밟는 것 같네.
선계를 탐방한 감회를 담았다. 그 어느 때에 하늘이 다섯 역사를 시켜 암자를 세웠느냐고 반문하면서 시를 이끌어간다. 이는 하늘이 중국 촉나라에 다섯 명의 역사力士를 탄생케 하였다. 이들은 힘이 세어 산도 옮길 수 있다. 진나라 왕이 강녀姜女를 보내자, 촉나라 왕은 다섯 명의 역사를 보내어 그녀를 맞이하게 했다. 다섯 역사는 큰 뱀이 산의 동굴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처치하려고 따라 가다가 산이 무너져 모두 돌이 되었다는 유래가 있다. 그만큼 암자가 높고 험준한 곳에 위치해 있고, 조망이 우수하며 경관이 특별하다는 것이다. 높은 만큼 하늘이 가까워 달빛도 많이 받게 되고 구름이 깊어 대낮에도 어둑어둑하다. 백룡이 동굴에서 비상하고 푸른 골짜기에는 우레가 운다. 선방을 빌려 묵으니, 새 깃털처럼 몸이 가볍다. 탈속과 초일의 경지에 든 시적 상상력을 발휘했다. 산 속에서 학문에 정진하며 자연미를 체감한 의식을 담기도 한다.
濡滯窮山裏 궁벽 진 산 속에 머물며
欣心討典墳 기쁜 마음으로 옛글을 궁구하네.
不嫌僧白眼 스님 홀대하는 것 아랑곳하지 않고
應爲步靑雲 응당 청운의 길에 오르리라.
嶺靄因風斷 산마루 운무 바람결 따라 끊기고
溪流觸石分 시냇물 바위에 부딪혀 흐르네.
和君無秀句 그대에게 화답할 좋은 시구 없어
厚意致空勤 후의 따라 부지런히 힘쓰리라.
산 속 절간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글을 읽는 선비의 형상을 담았다. 절에서 공부하는 선비를 대접하는 스님의 핀잔과 무관하게 급제하여 입신양명하겠다는 희망을 비쳤다. 바람결을 따라 산마루의 운무가 끊겼다. 잔잔하던 시상이 바람에 의해 흩어지는 과정을 재치 있게 그려내었다. 상대방에게 화답한 좋은 시구가 떠오르지 않아, 후의에 보답하기 위해 부지런히 학문을 연마하겠다는 다짐을 보인다. 시인은 자연이 주는 무한한 희열과 감동에 압도되었다. 자연 귀의로 인해 제공받는 희열로 감격한다.
癖寂憐山默 남달리 적막을 좋아해 산의 침묵 즐기고
逃煩厭鳥喧 번잡함 피해 와 새 울음도 싫증나네.
身專雲水樂 홀로 자연의 즐거움 독차지하니
耳絶市朝言 시장과 조정의 말이 귀에 들오질 않네.
丘壑風猶定 언덕과 골짜기 바람이 잦아드나
江湖浪自飜 강 호수엔 물결이 절로 뒤집히네.
琴松燈皓月 바람소리 내는 소나무에 밝은 달 올랐으니
誰復我讎恩 누구에게 다시 이 은혜를 갚아야 할지.
시인은 유별나게 적막함을 즐겨 산의 침묵도 사랑했다. 그래서 속세의 번잡한 것을 피해 산에 은둔하기로 작정했다. 그런데 새가 울음조차 혐오감을 느낄 정도다. 자연 속에서 참된 즐거움을 누렸으니 귓전에 시장이나 조정의 소음이 들려오지 않는다고 했다. 언덕과 골짜기엔 바람이 잔잔해 지고 강과 호수에는 큰 물결이 일어난다. 정적인 시적 긴장이 급변해 유동적 시상으로 반전되었다가 말미에서 개인 서정 표출로 마무리된다. 소나무에 바람이 불어 윙윙 소리가 나고, 달이 올라 청아한 밤의 향연이 이어진다. 이러한 은덕을 누리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을 드러낸다. 이는 곧 주상의 은혜임을 강조하며, 자연의 즐거움 속에 성군을 잊지 못하는 심회를 드러낸다.
洞邃雲常逗 골짜기 깊어 구름이 항상 머물고
溪舂水日喧 시냇물 부딪쳐 물소리 날마다 시끄럽네.
棲霞應有意 연하에 살아 무슨 사연 있으리라 하지만
侶鶴可無言 학과 짝해 사는데 무슨 말 필요하랴.
竹塢蒼龍舞 대나무 숲에 푸른 용이 춤추고
苔池玉尺飜 이끼 낀 연못에 물고기 뛰노네.
須知山野樂 이 산야에서 누리는 즐거움
都是聖主恩 모두 성군의 은혜라오.
골짜기가 깊어 늘 구름이 머문다. 정적감은 이내 동적인 시상으로 전환된다. 시냇물이 격동하는 소리가 매일 시끄럽게 귓전을 울린다. 자연에 파묻혀 사는 게 분명한 이유가 있다고 단언한다. 학과 벗을 삼아 사는 풍류한적의 낙을 새삼 설명할 필요가 없다. 대숲에선 용이 춤추고 이끼 낀 연못에 물고기가 뛰어노는 삼라만상의 이법이 구현되는 현상을 그렸다. 이처럼 산야에서 즐거움을 누리는 것은 오로지 성스러운 주상의 은혜라고 한다. 다음 시에는 흥겨움에 상기된 시인의 내적 기쁨이 반영되어 있다.
讀罷臨高詠晩涼 독서 후 높은 곳에 올라 서늘한 저녁에 읊나니
奔趨萬象屬奚囊 달리는 것 같은 만상이 시로 써지네.
山含雨意升雲氣 산이 비 기운 머금자 구름 기운 상승되고
樹帶風情舞日光 바람에 나무 흔들리자 햇빛도 춤추네.
獨鳥畏人藏鬱密 외로운 새 사람 무서워 무성한 숲에 숨었고
幽僧佐望指微茫 스님은 조망을 돕느라 아득한 곳 가리키네.
斜陽一放孫登嘯 석양에 손등의 휘파람을 한 번 부니
聲裂陰厓百丈蒼 그 소리 백 길의 푸른 절벽 찢는 듯하네.
은자는 독서를 마치고 높은 산에 올라가 서늘한 저녁 공기를 마시며 시를 읊는다. 눈 아래 펼쳐지는 만상이 힘차게 내달리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이를 시로 옮기느라 분주하다. 경물과 서경의 사실적 묘사를 통해 보이는 대상을 핍진하게 그려내었다. 산 속 날씨는 변덕이 심해 이내 비 기운을 몰고 온다. 그와 함께 비를 몰아 올 구름 기운도 급상승하였다. 바람이 나무에 불자 나무가 흔들리며 햇빛도 요동치는 정경을 묘사했다. 급변하는 날씨의 추이를 섬세하게 그려내었다. 이러한 광경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제대로 그려낸 것이다. 홀로 머물던 새는 사람을 두려워하여 숲에 숨었고 이와 대조적으로 스님은 길손에게 더 좋은 경관을 선사하려고 아득한 곳을 가리킨다. 정적인 미감과 유동적 미학이 복합되어 있다. 이에 은자는 기분이 상승되어 손등孫登의 휘파람을 불었다. 이 고사를 살펴보면,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완적阮籍이 소문산蘇門山에서 은자인 손등을 만나 선술仙術을 물었지만, 손등은 일체 대답을 않고 휘파람만 길게 불며 가버렸다. 그 소리가 마치 바위 골짜기에 메아리치는 난봉鸞鳳 소리와 같았다는 데서 유래한다. 이런 점에서 그가 은자로 자청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점을 읽어낼 수 있다. 그는 손등처럼 은자의 자족한 삶을 누리며 호탕하게 지낸다. 이로써 은둔의 미학은 더욱 내밀화된다.
三山寧擅勝 삼신산만 좋은 경치 빼어나랴
一壑可專奇 이 골짜기가 기이함 독차지할 만하네.
霧鎖羅王刹 신라왕이 세운 사찰 안개가 에워쌌고
苔封學士碑 학사가 쓴 비석에 이끼 덮였네.
家溪緣智樂 시냇가에 집 지어 지혜로운 자 즐거움 따르고
臥月謝塵羈 달 아래 누워 세상 구속 사양하네.
十載風埃客 풍진 세상에서 십 년을 지낸 나그네
終當結晩期 마침내 집 지어 생을 마치길 기약했네.
은자가 머무는 산은 삼신산에 뒤지 않은 산수 절경을 지녔다고 자부한다. 자욱한 안개는 신라 때 세웠다는 사찰을 에워싸 신비로운 광경을 자아내게 한다. 오랜 세월을 경과한 이끼는 학사가 쓴 비석을 뒤덮고 있다. 오랜 세월의 경과에 따른 역사와 전설의 무게가 더해진 정경을 묘사하고 있다. 시냇가에 집을 지어 지혜로운 자가 강물을 좋아한다는 진리를 이루고, 달 빛 아래 누워서 세상의 굴레와 속박을 사절하는 한적의 경지를 즐긴다. 십 년 세월 동안 풍진 세상에서 고초를 겪은 나그네는 이 때, 오두막을 지어 생을 마칠 때까지 자연 속에서 지내길 다짐했다. 이로써 산속 생활의 즐거움이 청정한 경지로 몰입된다.
抖擻塵紛棲碧山 속세의 어지러움 털고 푸른 산에 깃드니
囂喧曾不到雲關 시끄러움이 운무 낀 관문에 이르지 못하네.
松聲遠和溪聲急 솔바람 소린 멀리 급한 냇물 소리와 조화되고
山氣能添夜氣寒 산 기운이 밤공기 더욱 차게 하네.
往事豈須煩掛口 지난 일 번거로이 입에 담으랴만
新詩聊可一開顏 새로 시 지어 한 번 웃어볼 뿐.
從玆莫起人間念 이제 세상 상념 일으키지 않으리니
香火淸閒有懶殘 향불 피워 청정한 곳에 늙은이 머무네.
속세의 분주함을 멀리하여 푸른 산을 찾아 와 살다보니, 산문의 운무가 세상 소리를 차단해 준다. 세상과 단절된 초일한 삶의 미적 감각을 누리는 호사를 강조하였다. 소나무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는 세차게 흐르는 시냇물과 어울려 청각적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이와 함께 청아한 산의 기운이 밤이 깊어감에 따라 밤기운을 더욱 차갑게 만들어 준다. 청각과 촉각 심상이 배합된 표현을 통해 작품의 긴밀도를 강화시켰다. 이에 개인적 상념을 집약해서 표현한다. 지난 세월 돌이켜 보면 웃음을 지을 뿐이다. 시를 짓고 소일하면서 잔잔한 삶의 기쁨을 누리니, 미소 지으며 자연에서 흥과 멋을 즐긴다. 하지만 이것마저도 절제하기를 다짐한다. 이후, 세상 잡념을 일으키지 않으리라는 다짐을 하면서 향불을 피워 정신을 가다듬는다. 세상사를 전혀 상기하지 않고 자연에만 도취되어 살겠다고 다짐한다. 세상과의 결별과 산수 자연에의 귀의 정신이 확고히 깃든 작품이다.
충재에게 있어 산수 자연 귀의에 따른 즐거움 향유는 사화의 세파 속에서 시달린 심신을 달래며 선비의 원기를 회복하고 치유하는 공간이며 성리학적 수양을 견고하게 하는 주요 기제로 작용했다. 사화의 소용돌이 중심에서 활약하며 선비 정신을 구현해 나갔던 충재에게 있어 현실은 긴장의 연속인 전투장과 같았다. 그러나 그는 강직한 신료로서 자신의 안일보다는 나라와 백성의 안정적인 삶의 향유를 위해 신념에 찬 결행을 하였다. 끊임없는 계론의 주청과 상소 및 직간을 통해 조선에 선비 정신이 실현되기를 간구했다. 그가 현실에 적극 대처하여 투철하고 치열하게 대응해 나갔던 만큼 자연에서 한적한 삶을 영위하는 것 역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산수자연에서의 한적한 삶은 현실 도피 기제가 아니라, 치유와 회복의 시기이며 강인한 선비 정신을 강화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제 충재의 그러한 애민과 위국 정신이 어떠한 방식으로 표출되는 지 살펴볼 차례이다.
4) 애민과 위국 정신
충재의 애민과 위국충정은 생애를 통해 충분하게 입증되었다. 그는 조정의 주요 관직을 역임하면서 주상의 어진 정치 구현을 통해 백성에게 그 혜택이 전달되게 해달라고 끊임없이 촉구하였다. 그러한 열성과 충정이 시에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보기로 한다. 이런 정신은 영천군수 시절의 작품에 집약되어 있다.
人事如毛生有涯 세상일 털처럼 많고 인생은 끝이 있으니
馳驅無興較來加 말 달려 승부를 겨루는 흥도 없소.
停鞭處處杯盤在 말 세운 곳마다 술과 안주 마련되었지만
却向罇前強笑譁 술동이 앞에서 억지로 웃고 떠들 뿐이라오.
이 시는 충재가 37세인 1514년(중종9)에 지은 것이다. 충재는 그해 8월에 호조정랑직에 있다가 부모를 봉양하려고 외직을 자청해 9월에 영천군수에 임명되었다. 이 시의 창작 배경을 보면, ‘갑술년(1514) 2월 23일 저녁에 하로촌에 이르러, 즉흥시를 지었다’고 한 데 근거를 둔다. 충재가 금산 경내를 순시하다가 지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는 중종 9년(1514년)으로, 정국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던 때이다. 충재는 세상사가 복잡다기하여 내심이 미편했다. 여전히 안정되지 못한 정국의 불안함과 자신이 기대하는 정치 실현이 아득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말을 달려 승부를 겨루는 흥겨움도 찾을 수 없다. 유흥과 풍류를 즐길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르는 곳마다 고을 원을 대접하는 술과 안주가 마련되어 있지만 그는 여유롭게 마시며 즐기지 못한다. 마지못해 이들과 응대하며 최소한의 예의만 갖출 뿐이다. 그를 이처럼 불편하게 한 요인은 무엇인가? 이러한 의식 저변에 정국의 안정과 백성의 안온한 삶 보장을 소망하는 위민 정신이 자리하고 있다. 영천 군수 시절 자신을 찾아 온 이에게 지어준 시에도 이런 정신 지향이 담겨있다.
草澤微臣荷聖情 초야 미천한 신하가 임금의 온정 받았으니
年非強仕任非輕 나이 사십 안 되어도 임무가 가볍지 않네.
此身未報君恩重 임금의 중한 은혜 갚지 못했는데
却怕從今酒病生 도리어 이제 술병이 날까 염려되네.
百年交契有深情 평생 사귄 깊은 정이 있어
來訪臨皐意豈輕 영천 찾아온 일 쉬운 일 아닐세.
臥擁黃紬愁病肺 명주 이불 끼고 누워 병든 폐 근심하느라
未成良話愧還生 정다운 대화 못해 부끄럽다오.
이 두 수는 충재 38세 때인 1515년(중종10) 음력 1월 27일에 지은 시다. 사효士孝라는 인물은 충재와 매우 친했던 것 같다. 그가 영천 군수 충재를 찾아와 너무 기뻤지만 과음을 한 탓에 술병이 나서 밤에 그를 만나러 나가지 못한 미안함을 두 수의 시로 써서 준 것이다. 충재는 미천한 신하로 주상의 은혜를 입어 지방 수령의 임무를 받아 성은에 보답을 하지 못할까 염려하고 있다. 술을 마신 탓에 병으로 주어진 직무에 충실하지 못할까 근심스럽다는 것이다. 혹 술병이 쉽게 낫지 않아 내일의 업무 수행에 지장이 있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봉공의 정신이 나타나 있다. 이어지는 시에는 영천을 찾아 온 벗에게 접대를 하지 못해 안타까운 마음을 담았다. 자신은 폐병을 앓느라 벗을 만나 대화도 제대로 나누지 못해 내내 미안하였다. 공직자로 근신하며 자중하길 다짐하며 주상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한다는 마음을 담았다. 그래서 대궐의 주상을 향해 마음을 기울이게 된다.
連宵鎖霧雨 밤새 안개비에 갇혔더니
冷氣已先秋 차가운 기운이 가을에 앞서 다가왔네.
戀闕仍危坐 대궐 그리워 단정히 앉았고
傷時更倚樓 시절 상심해 다시 누각에 기대네.
江山雙草屨 강산엔 짚신 한 켤레뿐
天地一漁舟 천지엔 고깃배 한 척일세.
暫共知心語 잠시 내 마음 알아주는 대화 나누니
猶堪慰遠愁 아득한 시름을 위로할 만하다네.
밤새 안개비가 내려 산천을 흐릿하게 하였다. 이 탓에 찬 기운이 내려 가을이 성큼 앞으로 다가 온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중요한 것은 3-4구이다. 주상이 계신 대궐을 사모하고 주상의 선정 시혜와 현실 정국의 안정을 기원하며 누각에 오른다. 어수선한 정국은 그를 불편하게 하였다. 정치적 안정과 백성의 안온한 생활 보장을 바라는 신하의 염원이 담겨있다. 이내 평정을 찾아 한적한 자연 강산의 멋을 표현하였다. 그 와중에 마음을 나눠줄 벗이 있어 시름을 털어 놓고 위로를 받는다. 충재의 내면에 잠재한 것은 국내 정세의 안정과 안정적인 백성들의 삶에 대한 희구이다.
雲棲昨夜僊遊子 구름 낀 어제 밤에 선계 찾던 이가
今者來斯世路人 이제 여기 와 속세 사람이 되었네.
巖鶴怨君空蕙帳 바위의 학은 장막 비운 그대 원망하고
溪猿嘲我又紅塵 시냇가 원숭인 또 홍진에 있다고 조롱하네.
山程綠密逢驚獸 산 길 푸른 잎 무성한 데서 놀란 짐승 만나고
石臼流淸數躍鱗 바위 패인 맑은 물에 뛰노는 물고기 세어보리라.
報了盍歸頭未白 임금 은혜 갚고 머리 세기 전에 돌아가리니
月蘿堪保百年身 달빛 아래 넝쿨 속에서 백년 인생 지킬 것일세.
어제 밤에 신선의 경계를 찾던 이가 이제는 속세 사람이 되고 말았다는 탄식을 발한다. 자연 속에서 일시적으로 지내다가 다시 속세로 나아간 것을 은유한 표현이다. 이 때문에 바위에서 함께 노닐던 학이 원망을 하고 원숭이도 작가가 다시 홍진으로 돌아갔다며 조롱을 한다. 이 시는 충재가 42세 되던 해인 1519년(중종14)에 기묘사화를 당해 파직된 후, 14년 뒤인 56세인 1555년(중종28)에 다시 기용되는 역사에 근거한다. 충재는 다시 벼슬길에 나서면서 당시의 심회를 표현했다. 5-8구는 다시 은거할 경우를 대비해 상상력을 발휘한 것이다. 숲이 무성한 산길에서 놀란 짐승도 만날 것이고, 깊은 계곡 웅덩이에 노니는 고기도 세어보겠다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래서 주상의 은혜에 보답하고 더 늙기 전에 다시 은거하겠다는 내심을 털어놓았다. 이와 함께 주상의 부름에 응해 주어진 직무를 충실히 수행해 성은에 보답하겠다는 신료의 각오와 다짐을 새겨 두었다. 이는 실제 외직으로 근무하면서 고을 원의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颶風連歲飜東溟 해마다 태풍이 동해를 뒤집으니
邇來天道何冥冥 근래 천도가 이처럼 어두워졌다네.
聖主憂勤今一紀 성주께서 근심하고 애쓰신 지 십이 년
如何相應非同聲 어이하여 서로 감응하는 목소리가 다른가.
偃禾拔木是誰使 벼 쓰러뜨리고 나무 뽑는 일 누가 시켰나
借劍欲斬掀鬣鯨 칼 빌려 지느러미 치켜세운 고래를 베고 싶네.
충재는 37세인 1514년(중종9) 9월부터 영천군수로 부임했다. 이 시는 충재가 40세 되던 1517년(중종12) 7월에서 8월 사이에 지은 것이다. ‘청하현에 갑술년(1514년)부터 병자년(1516년)까지 큰 바람의 재해가 있어 백성이 매우 굶주렸다. 금년 7월 그믐에 또 큰 바람과 비가 몰아쳤다. 박충재의 시를 읽다가 느껴지는 바가 있어 이에 차운한다’는데 근거한다. 그러므로 이 시는 충재가 40세 때인 정축년(1517)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갑술년은 충재가 37세이던 1514년이며, 병자년은 충재가 40세이던 1516년이다. 갑술(1514년), 을해(1515년), 병자년(1516년)에 걸쳐 연이어 3년 동안 태풍의 피해가 있었고, 금년 7월에도 또 태풍의 피해가 있었다고 했다. 청하현은 영덕과 흥해 사이에 있었는데, 충재는 이곳이 매년 태풍의 막심한 피해를 보는 점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했다. 태풍이 이렇게 심한 것은 천도가 제대로 운행되지 못한 것이라고 경각시켰다.
이어 조정의 의견이 일치되지 못해 늘 불안한 정국이 이어진다며 한탄했다. 즉, 중종이 조광조 등의 의견을 가납하여 지치至治를 목표로 위정爲政한 지 오래인데, 왜 같은 목소리로 서로 응하지 않아 자연 재해가 겹치느냐며 안타까워했다. 폭풍의 피해가 막심한 현장을 보도했다. 태풍이 쓸고 간 자리에는 벼가 쓰러지고 나무가 뿌리 채 뽑힌 참상이 전개된다. 이 때문에 백성들은 살 길이 막막해 진 것이다. 이로부터 2년 뒤에 기묘사화가 발발하여 충재를 비롯한 동류들이 피해를 입게 된다. 충재는 이러한 자연 재액을 일으키는 괴물이 바다 속의 고래라고 하면서 칼을 빌려 고래를 죽여 버리고 말겠다며 분개한다. 이는 성군을 보필하며 백성들을 평안하게 살도록 돕지 못하는 악한 신료들에 대한 응징 의식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런 의식을 통해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충직한 관료의 형상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내면에 잠재된 고충과 갈등은 기행과 감회의 시를 통해 살필 수 있다.
5) 기행과 감회의 서정
충재의 시 가운데 기행과 감회를 담은 시가 다수 있다. 그는 조선 중기 사화의 소용돌이에서 신념대로 올곧고 강직한 신료로 살았기에 그의 삶의 궤적은 남다른 감회 와 회고 정서가 응축되어 있다.
樹杪掛危逕 나무 가지 끝에 위태론 길이 걸려 있고
石間縣磬室 바위 사이 초라한 집 한 채 달려있네.
奇巖排劍鋩 기이한 바위가 칼끝처럼 죽 서 있고
怒瀑飛霜雪 성난 폭포는 서리와 눈을 흩날리네.
猿啼翠竹雲 원숭이는 푸른 대나무 구름 낀 데서 울고
鶴叫丹厓月 학은 달빛 내린 붉은 언덕에서 우네.
半夜客無眠 한 밤중 나그네 잠 이루지 못해
憑櫺覓短律 난간에 기대어 시를 짓는다네.
나그네 서정이 함축되어 있다. 절벽 길을 따라 좁은 길이 펼쳐져 있고 암석 사이로 작은 오두막이 매달린 듯 서있다. 시각적 이미지 제시와 함께 고원한 경지의 시적 흐름을 전개된다. 절벽 길의 곡선 미감과 암석 사이에 위치한 오두막의 고적한 모습은 탈속과 선적 세계로 빠져들게 한다. 이어 기묘한 형상의 바위가 칼끝처럼 매섭게 서있고 사납게 쏟아 내리는 폭포의 장관을 실감 있게 담아내었다. 산 길․오두막집․바위․폭포․서리․눈은 시청각 감각의 조화를 통해 표현 미학을 강화시킨다. 원숭이와 학을 등장시켜 자연 경물 묘사에 이은 생동성을 살렸다. 색감 묘사도 퍽 아름답다. 푸른 대나무와 흰 구름, 하얀 달빛과 붉은 꽃이 핀 언덕 등 모두가 전체 시상을 밝고 화려하게 치장해 주는 미적 상승 장치이다. 이렇듯 온 천지가 평온하고 화사한 터에 시인은 난간에 의지해 낮과 밤까지 펼쳐진 자연 경물과 서정을 시에 담는다. 산수를 기행하는 나그네의 풍류 서정과 자연 풍광에 동화된 미적 체감이 담겨 있다. 영남루에서 느끼는 풍류 서정도 일품이다.
高架雄樓嶺外天 영남 하늘 아래 웅장한 누각 높이 세워
名區形勝一望前 이름난 곳의 뛰어난 경치 눈앞에 펼쳐졌네.
抽身長路馳驅裏 먼 길 말 달려가다 몸을 빼내어
送眼歸鴻滅沒邊 날던 기러기 사라진 곳에 눈길을 보내네.
不盡長江平似練 끝없는 긴 강이 비단 같이 평평하고
無垠野氣淡如煙 가없는 들녘의 운무는 연기처럼 묽구나.
憑虛爲報春風道 허공에 기대어 봄바람에게 말하건대
肯遣飛花入舞筵 흩날리는 꽃잎을 술자리로 날려 보내렴.
영남루에서 앞 시대 사람이 쓴 시에 차운한 작품이다. 충재는 기묘사화로 파직 당하고 귀향한 이후 14년 뒤인 1533년(중종28) 4월에 복직이 되어 용양위 부호군에 임명되었다. 당시 충재는 56세였다. 그 해 6월에 밀양부사로 나갔다가, 58세인 1535년(중종30) 9월에 부친상을 당해 귀향했다. 이 시는 그가 밀양부사로 2년 5개월 동안 재직할 때 지은 것으로 보인다. 영남루는 조선시대 밀양도호부 객사에 속했던 곳으로 손님을 맞거나 휴식을 취하던 곳이다. 1365년(공민왕14)에 밀양군수 김주金湊가 통일신라 때 있었던 ‘영남사’라는 절터에 지은 누대로, 절의 이름을 빌어 ‘영남루’라고 불렀다. 그 뒤 여러 차례 중수하고 전란으로 불탄 것을 다시 수축했다. 현재의 건물은 1844년(헌종 10)에 밀양부사 이인재가 새로 지은 것이다. 영남루는 밀양강 절벽의 미적 경관과 조선후기 뛰어난 건축미가 조화되어 멋진 풍광을 이루고 있다.
시인은 영남루의 위용에 압도되었다. 영남 3개 누대 가운데 하나인 영남루는 밀양강을 면전에 두고 주변의 빼어난 경관과 어울려 미적인 품격을 드러내 보인다. 충재는 밀양부사로 바쁜 일정을 보내는 가운데 이곳을 지나가다가 누에 올랐다. 먼 하늘가 기러기가 사라진 곳까지 주시를 하면서 깊은 상념에 빠져들었다. 타향에서 고을 원님으로 근무하면서 내면에 잠재된 향수 서정이 발동했다. 이와 함께 관인으로 느끼는 책무와 사화 정국의 불안 심리도 팽배해 있었다. 그러한 내면 심리 탓에 충재는 누대에 올라 먼 곳을 조망하면서 한동안 감회에 젖었다.
전반부는 누대 위용과 경관의 미학 찬미에 이어 서정 심리 묘사에 주력했고, 이를 이어 서경 묘파가 이뤄진다. 비단결처럼 펼쳐진 낙동강은 유유한 흐름을 연출한다. 그러한 물 흐름을 주시하던 시인의 내면도 점차 평정을 찾는다. 낙동강 조용한 물결에 의지해 복잡다기하던 심리 상태가 평정을 찾아 자연과 동화된다. 들판에 피어오르는 운무도 연기처럼 맑고 곱게 피어오른다. 이러한 경물 심상의 안배는 결국 시인의 내면에 점진적 희열이 상승되고 있음을 반증해 주는 장치이다. 이 무렵, 시인은 봄바람과 속삭인다. 바람에게 꽃잎을 실어와 술자리에 뿌려달라고 했다. 이 시는 시인의 내면 심리 추이를 반영한 것으로, 경물과 심리 정서를 섬세하고 정감 있게 그려낸 작품이다. 기행을 통한 감회 서정은 정치적 실각에 따른 상실감과 분세 의식으로 표출된다.
昨夜天台入夢中 간밤 꿈에 천태산이 보이더니
今朝見此政相同 오늘 아침 이곳을 보자 그것과 꼭 닮았네.
淸涼矗矗撑天立 청량산 높이 솟아 하늘을 지탱해 섰고
潢洛溶溶望海通 낙동강 넘실대며 바다로 흘러드네.
元亮終須歸栗里 도연명은 끝내 율리로 돌아와야 했고
芳卿端合臥芙蓉 왕형도 결국 부용성에 누워야 했네.
世間萬事從頭數 세상만사 처음부터 헤아려 보건대
窮理誰憐投閣雄 누가 궁리하다 누에서 투신한 양웅을 슬퍼하랴.
이 시는 충재가 42세인 1519년(중종14) 11월에 발생한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삼척부사 직에서 파직을 당하고 안동 도촌으로 돌아온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듬해에 유곡에 복거했다. 유곡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청량산이 있으며, 암자 가운데 하나인 망선암이 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충재가 43세인 1520년(중종15)이나 44세인 1521년(중종16) 경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망선암에 갔다가 벽에 붙어있는 누군가의 시에 차운한 작품이다. 지난 밤 꿈을 통해 천태산을 보게 되었다고 했다. 청량산을 찾기 전 날 밤에 천태산을 먼저 보게 된 것이다. 꿈에 미리 본 천태산이 곧 청량산으로 대치되었다. 황지에서 발원해 온 낙동강은 태백산 험한 준령을 거센 숨을 몰아가며 돌고 돌아 급기야 봉화를 지나 청량산 앞에 이른다.
이에 이르러 낙동강은 거칠게 달려온 숨결을 고르며 때로 잔잔한 흐름으로, 때로 소沼와 담潭을 형성하기도 하며, 천연적인 계곡을 따라 굽이굽이 물 돌이를 하면서 이른바, ‘도산구곡’을 형성한다. 시인은 우뚝 솟은 청량산의 위용에 감동을 받는다. 게다가 그 산 아래 비취색으로 흐르는 낙동강 물굽이를 주목하면서 무한한 감개에 젖는다. 경물 묘사를 통해 산수 자연의 미적 체험을 즐긴다. 영남 선비들에게 청량산은 유별한 정서를 갖게 한다. 퇴계의 성리 철학을 완성한 정신 수도장으로, 후학들이 그러한 퇴계의 학문 전통을 이어나가길 다짐하는 수준 높은 격조를 품은 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낙동강 역시 퇴계 성리 학문을 후대에 지속적으로 전승하며 퇴계의 정신 지향을 추구해 나가겠다는 정신적 다짐의 일환이기에 특별한 인식으로 접수된 것이다.
이어 시인의 당시 심정을 대변해 주는 도연명을 등장시킨다. 도잠陶潛(365-427)의 자는 연명淵明․원량元亮이다. 문 앞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심어 놓고 스스로 ‘오류五柳 선생‘이라 칭하기도 하였다. 29세 때에 벼슬길에 올라 주州의 좨주祭酒가 되었지만, 얼마 안 가서 사임하였다. 그 후 군벌항쟁의 세파에 밀리면서 생활을 위하여 하는 수 없이 진군참군鎭軍參軍 ·건위참군建衛參軍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항상 전원생활에 대한 사모의 정을 달래지 못한 그는 41세 때에 누이의 죽음을 구실삼아 팽택현彭澤縣의 현령縣令을 사임한 후 재차 관계官界에 나가지 않았다. 이때 지은 것이 「귀거래사歸去來辭」이다. 「사전史傳」에는 상관의 순시 때에 출영出迎을 거절하고, “나는 오두미五斗米를 위하여 향리의 소인에게 허리를 굽힐 수 없다”라고 개탄하였다. 도연명이 벼슬살이를 마다하고 향리로 은거한 전형처럼 충재 역시 삼척부사 직을 버리고 귀향해 유곡에 복거지를 삼았던 것이다. 당시 충재의 심정은 그렇게 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묘사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낙척한 신세로 현실을 감내해야만 하는 아픔이 내재되어 있다. 그러한 내면 심리 회복을 위해 복거를 결심하여 내성천이 맑게 흐르는 유곡에 은거지를 삼은 것이다.
이 때문에 왕형이 부용성에 은거한 것을 떠올리며 위안을 삼는다. 왕형王逈은 자가 자고子高로, 녹문산에 은거한 은자이다. 그는 선인仙人 주요영朱瑤英과 부용성芙蓉城에서 노닐었으며, 맹호연시집孟浩然詩集에 자주 등장한다. 모순 현실에 대한 보상 심리로 은자의 형상을 반추하며 자위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말미에서 양웅을 거론한 점이다. 양웅揚雄(BC53-AD18)은 전한前漢 말기의 학자이다. 그의 자는 자운子雲이며, 촉蜀의 성도成都 사람으로, 신新을 세운 왕망王莽의 대부大夫가 되어 망대부莽大夫로도 불린다. 왕망이 신나라를 세우니, 양웅이 글을 올려 진秦 나라의 과실을 폭로하고 신나라의 미덕을 칭찬했다. 양웅이 은거하며 태현경을 저술할 때 ‘적막寂寞으로 덕을 지킨다’고 자칭하다가, 후에 역적인 왕망 밑에서 벼슬하며 유흠劉歆의 죄에 연루되어 체포당하게 되자 높은 천록각天祿閣에서 몸을 던져 죽어, 후인들은 ‘적막은 투각投閣일세’라고 했다. 세인들은 소신껏 위국충정을 바친 양웅이 쓸쓸하게 죽어간 것을 슬퍼하지 않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난세를 살다간 양웅의 생애를 반추하며 애절한 심정을 전했다.
이처럼 충재가 양웅의 고사를 인용하면서, 그의 생과 죽음에 대해 의미를 부여한 것은 사화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시기의 미편한 자신의 심정을 우회적으로 이렇게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사화기를 살아가는 충재의 인생 격변기에 느끼는 좌절과 분세 의식이 어우러져 이렇게 표출된 것이다. 이러한 의식은 삭주 귀양 시기에 지은 시에서도 보인다.
與子相知己酉冬 기유년 겨울부터 그대와 서로 알아
俱年七十約相從 함께 칠십까지 서로 사귀자 약속했었지.
如今投畀荒虛地 이제 황폐한 땅에 쫓겨나고 말았으니
地老天荒意不窮 긴 세월 지나도 그리움 끝나지 않으리.
이 시는 충재가 삭주로 유배된 1547년(명종2)에서 1548년(명종3)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위에서 언급된 기유년은 1489년(성종20)으로, 충재가 11세 무렵이다. 충재는 농수聾叟 금원정琴元貞(1472-1557)보다 6세 연하이다. 그러므로 충재가 11살, 농수가 17세 때부터 둘 사이의 교분이 시작된 것이다. 이 때문에 둘 사이는 죽마고우 관계가 성립된다. 전구와 결구를 통해, 이 시는 삭주 유배기에 지어졌다는 것으로 확인된다. 당시, 충재는 절망적인 상태에 처해졌다. 악독한 이기李芑의 전횡에 의해 위기를 벗어날 희망이 전혀 없었다. 「연보」에 의하면, 이기가 충재와 회재를 죽여야 한다고 거듭 억지를 부렸으나 문정왕후가 아예 들어 주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가 2월이었다. 충재는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3월에 별세하였다.
충재와 농수는 절친한 관계로서, 평생 지기지우로 지낼 것을 약조하였다. 유년 시절부터 서로 마음을 터놓고 평생을 동고동락하리라는 다짐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와의 약속을 온전히 지켜내지 못했다. 황량한 유배지로 전락한 신세가 되고 보니, 벗과의 약조를 지키지 못한 사실이 상기되었다. 오래 서로의 우정을 나누며 늙어 죽을 때까지 교분을 지속하기로 했던 희망이 사라지고 말았다. 궁벽한 땅에서 지내면서, 지기 금원정을 떠올리며, 미안한 마음을 담아내었다. 하지만 유구한 세월이 흘러도 그와의 우정은 변함이 없이 지속되길 희망한다고 하며 그리움이 피어남을 억제할 수 없었다. 충재는 극난한 현실에서 느끼는 비애감과 좌절 의식을 느끼며, 처량한 애상감을 토로했다.
충재가 애절하게 그리워하던 금원정의 자는 정숙正叔, 호는 농수聾叟이며, 본관은 봉화奉化이다. 연산군 때 진사를 지내고 1515년(중종10)에 장사랑과 영해 훈도를 역임하였다. 기묘사화 이후 관직을 버리고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썼다. 생원 급제자 모임인 사마회司馬會를 주도했고, 글씨가 뛰어나 자필 현판이 전한다. 정미년(1547년) 가을에 어떤 무뢰한이 양재역의 벽에 비방하는 말을 써놓았는데, 이를 고변하자 을사년(1545년)에 관련자들을 가중 처벌하였다. 충재가 귀양길에 오르자, 금원정은 못내 슬퍼하면 전송했다. 충재는 구례현求禮縣으로 부처付處되었다가 이윽고 태천泰川으로 옮겨 귀양 보냈다. 압송하는 관리가 이르자, 충재는 태연히 귀양길에 나서서 송별하러 온 향리 친척들에게 말하기를, “이는 하늘의 은혜이다”고 하였다. 진사 금원정이 그의 손을 붙잡고 엉엉 울자, 충재는 웃으면서 말하기를, “처음에 그대를 장부로 알았는데 지금 이런단 말인가? 사생과 화복은 모두 천명이다.”고 하였다. 이렇게 충재와 금원정 사이의 교분은 돈독했다. 이로써 그와의 이생에서의 인연은 종결되었다. 이후, 충재는 그를 만나 보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 유배지에서 벗을 그리워하던 애절한 심정은 동기간 혈육을 그리워하는 심리 정서 표현으로 연장된다.
千里關河失路人 천 리 관산과 하수에서 길 잃은 나그네
新年沙塞更傷春 새해 변방 사막에서 봄 맞아 더욱 상심되네.
相看雪嶺相思意 눈 쌓인 산마루 쳐다보며 서로 그리워하는데
憶弟懷兄淚滿巾 아우 생각 형님 그리움에 눈물이 수건을 적시네.
이 시는 충재가 70세 되던 해인 1547년(명종2) 9월에 양재역 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압록강을 마주 보는 평안도 삭주로 귀양을 갔고 이듬해인 1548년(명종3) 3월 26일에 우사寓舍에서 별세했는데, 그가 삭주에 적거謫居하던 때 지은 작품이다. 충재가 삭주에 유배 생활을 하면서 형인 권의權檥와 아우 권례權欚․권장權檣을 그리워하는 심정을 담았다. 이 작품은 충재가 70세 고령에 삭주로 유배되었던 시절에 지은 것이다. 삭주는 평안북도 서부에 자리 잡은 군郡의 이름이다. 원래는 고구려 옛 땅으로, 고구려 멸망 후 발해 속했다가 거란ㆍ여진국의 땅이 되었다. 1018년(현종9)에 삭주로 고쳐 방어사를 두었다가, 1895년(고종32)에 군으로 편재되었다. 시어에 등장하는 ‘관산’과 ‘하수’는 충재가 유배 길을 지나오면서 넘었던 준령과 건넜던 강하를 뜻한다. 그는 사화의 물결 속에 함경도로 유배되는 기구한 노년을 맞았다. ‘길을 잃은 나그네’라는 표현은 곧, 불안한 정국에서 장래를 예측할 수는 암담한 장벽에 부닥친 상태를 은유한다.
시인은 망망대해에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표류하는 작은 배와 같은 신세처럼 상실감에 사로 잡혔다. 암흑의 바다에서 수파에 따라 표류하는 위기에 사로잡혔다. 충재는 70세 되던 해 가을에 유배되어 그 해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았다. 그러므로 이 시가 지어진 정확한 때는 1548년(명종3) 초봄으로 추정된다. 나그네는 새해 봄을 맞은 감회를 느낄 사이도 없이 현실 위기와 낙척한 신세 한탄으로 더욱 큰 설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정치 실각에 따른 위기와 상실감에 압도되어 매일의 삶을 지탱하기가 쉽지 만은 않았을 터이다. 이 때문에 시절이 변해도 나그네 심정은 여전히 한겨울 냉혹한 추위에 에워싸여 있음을 떨쳐버릴 수 없다.
눈이 저만치 쌓인 산마루를 바라보노라면, 고향과 가족들이 그립다. 매일 고향 산천이 그리워 남쪽 하늘만 주시하며 그리움을 억누르며 지내왔다. 그리운 형제들의 얼굴이 떠올라 주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충재는 형님 권의와 아우 권례․권장을 그리워하며 가슴 깊숙이 내재된 그리움을 참지 못해 눈물을 쏟고 만다. 충재집의 「충재세계도」를 통해, 충재가 4형제 가운데 둘째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시의 「세주」를 통해, 적어도 손윗누이가 한 분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충재 집안 내력을 보면, 판서공判書公 인靷은 시조 행幸의 15세손이며 수홍守洪의 5세손이다. 세진世珍의 자子로, 호는 송파松坡이다. 1374년(공민왕23)에 문과 급제를 거쳐 예의판서禮儀判書에 이르렀다. 조선 태조 때 한성좌윤漢城左尹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아니하고 안동시 서후면 교리 속칭 소야촌所夜村에 은둔하여 청절淸節을 지키며 호를 ‘송파’라 했다. 이는 송도松都를 잊지 못한다는 의미이며, 마을 이름 ‘소야’도 ‘송파’로 고쳤다.
봉화 유곡 권씨는 입향조인 충재의 5대조 예의판서 인을 파조派祖로 한 판서공파判書公派이다. 그 후손들은 안동 노동․송야․명동․순흥․석남․청송․신한․안동 도촌․예천․저곡․봉화․가구․유곡 등지에 살고 있다. 판서공의 증손 개玠와 곤琨은 세조의 왕위 찬탈에 분개하여 고향에서 두문불출하였다. 개玠는 하위지河緯地의 조카 원源을 사위로 맞아 송파에서 함께 살았으며, 곤琨은 “동풍에 촉나라 혼이 시고, 석양에 노릉은 차갑네[東風蜀魂酸 西日魯陵寒]”라는 시를 읊었는데, 이 분이 충재의 조부이다. 곤의 아들 의정공議政公 사빈士彬은 외가인 서원정씨西原鄭氏가 사는 현재 안동시 북후면 도촌리인 도지촌刀只村으로 옮겼으며 충재도 여기에서 출생하였다.
닭실은 충재의 외조부 윤당尹塘이 살던 곳이다. 윤당은 세조가 지봉芝峯의 가솔을 절멸시키려 하자 유곡에 숨어 살았으며 2남1녀를 두었다. 아들은 현감을 지낸 여필汝弼이며, 딸은 생원 권사빈과 혼인하여 4남1녀를 두었는데 맏이는 현감을 지낸 야옹野翁 의檥이다. 그 후손들은 안동 도촌․예천․저곡 등지에 살며, 둘째가 충재 발橃이다. 그 다음이 따님인데, 이함李諴에게 출가했다. 셋째는 찰방을 지낸 예欚이며, 막내는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를 지낸 제촌霽村 장檣이다. 권의權檥(1475-1558)의 자는 백구伯懼, 호는 야옹이다. 1507년(중종2) 진사가 된 이래 과거를 단념하고 예천 저곡에 살면서 정암 조광조의 향약이 군에 실시될 때 약정約正에 추대되었다. 1540년(중종35)에 장수찰방長水察訪을 거쳐 의흥현감義興縣監을 지냈다. 권예權欚(1481-?)의 자는 숙범叔泛으로, 찰방을 역임했다. 권장權檣(1489-1529)의 자는 제부濟夫, 호는 우암寓庵이다. 1519년(중종14)에 문과에 급제한 뒤,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이자李耔․김안국金安國 등과 함께 피척被斥되어 진보현감으로 좌천되었다. 1529년(중종24)에 호조정랑을 거쳐 금산金山군수로 임명되었으나 부임 도중 병사했다. 충재는 이러한 형과 아우를 사모하며 그 옛날 함께 지냈던 단란한 때를 회상하며, 고향을 떠나 유배기를 보내는 나그네의 슬픔과 고독한 정서를 시에 담아내었다. 유배객으로 느끼는 쓰라린 내적 아픔과 객수를 달랠 수 없어 육친의 혈육의 정을 그리워해 보지만, 그것도 여의치 못해 격한 고통을 억제하며 슬픔의 눈물을 떨구었다. 이에 충재는 고독한 유배지의 아픔과 그리움을 극복할 대안을 모색한다.
忍淚西來已月餘 눈물 머금고 서쪽으로 온 지 이미 한 달여
憶君懷抱竟何如 그대 생각하는 내 마음 끝내 어떠한지.
莫將黃犬爲生業 사냥놀이를 생업처럼 여기지 말지니
男子桑蓬不在於 남아의 큰 뜻은 거기에 있지 않소.
삭주로 귀양 온 지 한 달 남짓하다고 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충재가 70세 되던 1547년(명종2) 10월경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눈물을 머금고 떠나온 길이라는 표현에서 70 노령으로 먼 북방까지 오는 여정이 만만치 않았을 터이다. 게다가 정치적 위기와 좌절 의식이 팽배해 있어 그 중압감은 견딜 수 없을 만큼 혹독했을 것이다. 고난과 고통의 무게가 클수록 고향에 두고 온 가족에 대한 사무친 정은 더욱 증가되는 법이다. 이에 매제인 이함에게 충고를 한다. 이함의 본관은 공주公州이며 부친은 이종손李從孫이다. 영주榮州에 거주하였으며 1513년(중종8)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가 사냥을 즐겼던 모양이다. 충재는 그에게 ‘사냥을 생업처럼 여기지 말라’고 충고를 곁들였다. 이와 함께 남아로서 큰 포부를 지닌 그대가 잡기에 몰두하는 일은 온당하지 않다고 강조한 것이다.
이면에 담긴 충재의 내면 정서를 읽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당시 그의 심경을 유추해 볼 때, 그가 평담한 심정으로 그에게 학문을 권면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 훨씬 더 강한 의미를 부여하며 이러한 표현을 한 것이다. 그가 처한 현실은 참으로 암담하고 숨조차 쉬기 힘들만큼 극난하다. 이러한 위기 탈출구 대안을 모색했다. 새로운 대안은 그 누군가 이러한 모순 현실 위기를 헤쳐 주길 기대하는 것뿐이다. 자신이 처한 궁벽한 신세에서 이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해법을 제시할 인물을 모색하면서 매제에게 당부하는 시를 남겨준 것이다. 부디 대과에 급제하고 진출하여 훌륭한 인물로 대성해 주길 기대하면서 이러한 내면의 심경을 표현한 것이다.
상대방의 진출을 통한 현실 위기에 대한 치유와 보상을 추구한 심리 정서가 드러난다. 사실 이 즈음 충재는 좌절된 형상에서 굴절된 내면 심리가 이렇게 우회되어 표현된 것이다. 상대방의 대성과 진출을 기대하면서 얽매인 현실의 위기감을 일시적으로나마 해소해 보려는 심사가 담긴 것이다. 그런 내면은 차마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곪아 응어리지는 것이다. 충재는 매제의 건승을 염원하고 미래를 지향하면서 뼈를 깎는 내면의 아픔을 치열하게 이겨내며 고통을 승화시켰다. 현실 위기와 상실감을 초극하려는 내면 심리를 담았다. 이러한 심회는 형을 통해서도 이뤄지길 기대한다.
勳業無成鬢欲絲 훈업 이루지 못한 채 귀밑머리만 희어져
晴窓端坐暗傷時 창가에 단정히 앉아 혼자 시세를 슬퍼하네.
何當化作扶搖翼 그 언제 붕새의 날개로 변하여
浩浩長天學奮飛 넓고 긴 하늘을 떨쳐 나는 것을 익힐까.
형 권의에게 지어준 작품이다. 그는 진사시 합격 이후, 과거를 단념하고 예천 저곡에 살면서 조광조의 ‘향약’이 실시될 때 약정으로 활약하였다. 훌륭한 업적을 이루지 못하고 세월만 보내는 신세라는 탄식을 발했다. 그가 추구하는 선비의 나라 건설은 아직 요원한 상태이다. 이를 방해하는 세력에 의해 그러한 꿈이 좌절되고 조선은 사화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안개 정국으로 치닫는 현실 앞에 그는 무력한 선비로 자아 상실의 위기에 처해졌다. 세세를 개탄해 하며 분개한 마음을 감출 길 없다. 고독한 선비의 형상으로 난제 앞에 장애를 당한 안타까움을 토로하였다. 이 시에서도 위의 시와 동일한 역발상이 전개된다. 현실 위기 극복을 위해 이른바, ‘붕정만리’ 고사를 떠올리며 험난한 시세를 이겨내기 위한 역설 논리를 편다.
북극해의 다른 말인 북명北冥에는 크기가 몇 천 리나 되는 곤鯤이라 불리는 물고기가 있다. 이 물고기가 탈바꿈하여 붕鵬이라는 새가 되는데, 그 크기가 엄청나게 커서 등의 길이가 몇 천 리가 되는지도 짐작할 수가 없으며, 한번 힘을 가다듬어 하늘로 날아오르면 그 날개는 마치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 같다. 붕새가 남해로 옮겨갈 때는 날개를 삼 천 리나 되는 수면을 치고, 이렇게 불어 일으킨 바람을 타고 날아올라가 여섯 달이나 걸려서 남해에 이르러 쉬게 된다고 한다. 이는 장자莊子의 「소요유逍遙遊」에 나오는 말로, 장자는 전설의 새 가운데 가장 큰 ‘붕’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어둡고 끝이 보이지 않는 북쪽 바다에 ‘곤’이라는 큰 물고기가 있었는데 얼마나 큰지 몇 천리나 되는지 모를 정도이다. 이 물고기가 변해서 붕이 되었다. 날개 길이도 몇 천리인지 모른다. 한번 날면 하늘을 뒤덮은 구름과 같았고, 날개 짓을 3천 리를 하고 9만 리를 올라가서는 여섯 달을 날고 나서야 비로소 한 번 쉬었다.”고 한다.
충재는 형에게 그러한 포부를 실현해 주길 기대하면서 이 시를 종결한다. 이와 함께 충재는 모순된 현실의 제 장애가 제거되고 ‘붕정만리’의 원대한 꿈이 이뤄지길 소망한 것이다. 이는 현실의 위기와 장애 요인이 그만큼 지대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은유한 것이다. 현실 위기 극복 및 해소를 위해 이러한 장치를 통해 투사함으로써 내적 위안을 받으며 미래 지향적인 기대치를 제고시킨 것이다. 이러한 인식 저변에 흐르는 충재의 현실 인식론을 파악해 내야 한다. 이는 충재의 독백 이상의 의미 제시로 봐야 한다. 충재는 선비의 이상이 실현되는 조선을 꿈꾸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 강직한 신료의 삶을 충실하게 영위했다. 그러한 일련의 의지가 굴절되자, 그는 이렇게 우회적 수법을 동원하여 새로운 세상을 염원했다. 그는 사화 정국의 위기를 몸소 체험했으며, 내적 번민과 회한을 시를 통해 표출했다.
5. 맺음말
충재는 조선 중기 정치사에서 매우 주요한 인물이다. 그에 대해 현실 대응 및 시대적 배경․정치 상황․사유 의식․현실 대응 방식을 다루었다. 충재의 시 분석이 이루어지지 않은 점을 감안하여 생애를 보강해 그의 실체를 정확히 정리했다. 충재집의 체제와 내용․시문학 성과를 종합해 충재의 생애와 시문학의 상관관계를 규명했다.
생애를 생장기․사환 초기․퇴거기․사환 후기․유배 임종기로 정리해 그가 어려서부터 유자 의식을 체득해 강직한 선비의 전형을 확보했다는 점을 확인했다. 그는 충직하고 강직한 의리 정신으로 주상에게 직언과 충언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로써 주상이 성정을 바르게 하여 올바른 정치를 실현하도록 부단히 촉구했던 점을 파악하였다. 이런 그의 정신 지향은 복작과 추증 과정 및 일화나 제가의 평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충재집은 네 차례에 걸쳐 간행되었다. 초간본은 1671년에 삼계서원에서 2권 1책의 판으로 간행하였다. 초간본은 현재 전하지 않고 1681년에 미수 허목이 쓴 「독권충정공일고」를 권수에 추각하여 간행한 후쇄본이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중간본은 1705년에 이동완과 후손 권두경이 초간 때 빠진 시문을 추입하여 「습유」를 만들었다. 부록을 다듬고 차례를 바로잡아, 4권 2책의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삼간본은 후손 권목이 선조 권만이 편집한 충재일기를 대조하고, 이광정의 서를 받아 9권 5책의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이는 한국문집총간 19책 충재집으로 영인되었다. 사간본은 1930년에 봉화 삼계서원에서 왕조실록에서 발췌한 계사 24편과 상소문 등과 집에 보관된 자료에서 찾은 영귀시 1편 등을 본집에 보탰다. 그리고 왕조실록과 교유한 인물의 「연보」 등에서 찾은 새 자료를 더해 「연보」를 증보하여 10권 6책의 목판으로 간행했다.
삼간본을 중심으로, 문집의 체제와 내용을 보았다. 권 머리에 「서」․「세계도」ㆍ「연보」ㆍ「목록」 등이 실려 있다. 권1에는 시 16수, 습유에 26수의 시가 실려 있다. 권1의 시는 초간본의 단률시 15제와 「추석회음」 이하 21제의 습유로 되어 있다. 이어 서간문과 제문․묘갈․묘표․대책이 실렸다. 권2에는 잡저와 「주자대전고의」․「제영양일록권면」이 실렸다. 권3의 한림일기는 예문관 검열 등 사관으로 있던 1507년 12월 1일부터 1508년 12월 26일까지의 기록이다. 권4-5의 당후일기는 충재가 승정원 주서로 있을 때 기록한 것인데, 권4는 1509년(중종4) 1월부터 14일까지의 기록이며, 권5는 1509년 10월 1일부터 1510년(중종5) 3월 30일까지의 기록이다. 권6은 충재가 승지로 있던 1518년(중종13) 5월 15일부터 11월 6일까지의 기록인 승선일기이다. 권7에 조천록과 유묵 4판이 실려 있다. 권8은 「부록」으로, 충재의 평생 행적을 정리한 「연보」․「신도비명병서」․「신도비명병서」가 실렸다. 권9는 「부록」으로, 충재를 추모하는 「제문」․「축문」․「묘제문」․언행척록․「만장」 등이 실렸다. 말미에 을사사적이 실려 있다.
충재의 시를 보면, 충재집 초간본을 간행할 때, 4대 종손 권목과 4대손 권유가 주선하여 충재의 시 15제 17수를 초간본에 실었다. 이어 이동완과 충재의 5세손 권두경이 초간본에 빠진 시문 25수를 추입해 충재의 시가 42수 실렸다. 사간본에서 「영귀」 시 한 편이 더 실렸다. 이로 볼 때, 초간본에 실린 시는 충재의 시는 17수에 불과했다. 이어 삼간본에서 「습유」 25수를 더해, 총 42수가 전해지게 되었다. 사간본의 1수를 더해 현전 충재의 시는 총43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를 종합하여 정리하여 충재가 유자 의식을 소유하고 당대 선비들과 교유한 양상을 보았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그는 동류의식을 강화했고 유교적 소양을 발판으로, 성리학 명분에 입각해 강직한 선비의 전형성을 확보했다. 충재는 선비 정신이 구현되는 조선을 꿈꾸었다. 그 때문에 충재는 정치 일선에서 거침없이 의리 정신을 발현하였다.
이어 충재가 다소 한가했던 시절에 창작했던 산수 감흥과 미적 체감 의식을 표현한 시를 보았다. 평담한 시풍에 산수 자연에서 미적인 흥취를 누리며 이를 문학 정감으로 사실감 있게 그려내었다. 그에게 산수 자연 귀의는 기실 지친 심신을 회복하며 거친 세파에 시달린 내적 수양과 충전의 기회였다.
이러한 충재의 내면세계는 애민과 위국 정신의 시로 유감없이 드러났다. 충재의 생애에서 보듯이, 그는 시종일관 자신의 안일보다는 주상의 올바른 성정 구비․안정된 정국의 운영․부정과 부조리 척결․유교 이상 정치의 실현 등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의 위대한 정신은 바로 이러한 시편을 통해 충분히 입증되고 있다.
한편 충재의 내면 심리는 여전히 갈등하고 번민하고 있었다. 그러한 정서를 담은 것이 기행과 감회의 서정 자아 토로이다. 충재는 산수 기행을 통해 나그네로 때로 한적한 기행을 누리거나 표일한 고고의 경지를 모색하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그가 선적인 경지를 추구한 것은 물론 아니다. 그의 내면세계가 그만큼 고결하고 단아하다는 점을 말해 주고 있다. 그래서 충재는 그가 이루지 못한 현실의 장애가 극복되고 진정한 선비 정신이 구현되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염원하고 고뇌했다. 이런 흔적을 시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충재는 조선 중기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성리학 신념에 입각한 정치 관료로서, 강직한 신료와 청검한 선비 정신을 구현하려고 노력했던 걸출한 인물로 인정된다. 그러한 선비 정신은 진정한 위민정치와 민본 정치 실현을 목표로 하였기에 그의 평생 업적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충재의 정신 지향은 현재에도 살아있는 선비 정신으로 발휘되기에 이를 제고하고 고양시킬 후속 연구와 선양 사업이 추진되어야 한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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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東野乘
冲齋年譜
巖泉世稿
中宗實錄
仁宗實錄
明宗實錄
蘇東坡詩集
國朝人物考
冲齋集(權橃)
退溪集(李滉)
桑村集(申欽)
冲庵集(金淨)
陰厓集(李耔)
江左集(權萬)
乙巳錄(李浚慶)
晦齋集(李彦迪)
靜庵集(趙光祖)
慕齋集(金安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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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이원걸. [충재 권벌의 생애와 시문학 정신]. [봉화문화] 제22호. 봉화문화원. 2014.
사진 출처 : http://cafe.daum.net/andongseo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