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 錦山 보리암 –
잘 보면 하늘에도 고기가 있다하여
풍경이 흔들거리는 추녀 끝 바라보니
섬들이 떠다니면서 뭔가 낚고 있었다.
배달9204/개천5905/단기4340/서기2007/02/24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덧붙임)
봄빛이 따사로운 남해 보리암
(1)
07/2/23-24
몸담고 있는 회사에서
남해도 임원 연수.
(2)
처음 방문하는
남해도였는데 그만큼
미지의 세계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다.
(3)
보리암은
금산(錦山)이란 해안에 있는 산의
중턱에 있었는데
이 금산 일대는 한려해산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이곳이 바로
가락국 김수로왕 부인 허황옥이
인도의 아유타국에서 처음 당도한
곳이라 하며
(4)
금산(해발 681m)은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창하기에 앞서 전국의 유명산천을 순례하며
치제를 드리던 중
이곳에 이르러 잠깐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산신이 나타나
온 산을 비단으로 덮어 준다면
개국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하여
그렇게 하겠노라고 산신과 약속하였는데
마침내 쿠데타가 성공하자
비단을 덮을 궁리를 하던 중
측근의 건의로
원래의 보광산이란 이름대신 비단 금(錦)자를 써서
금산(錦山)으로 개명하여
부르게 함으로써 산신과의 약속을 지켰다고 한다.
(5)
금산을 내려와
남해대교를 향하여
꼬불꼬불한 해안길을 따라 가던 중
가천 가랭이 마을이란 곳을 찾았다.
계단식 전답과 어촌 마을의
특성이 잘 보존된 지역이었다.
막걸리 한잔과
주인 할머니의 정담을 들으며
가천 마을에서 올려다보는
암릉의 설희봉과 계단식 전답이 아름다웠다.
(6)
남해대교 해협은
임진전쟁에서
이순신 장군께서
최후의 해전인 노량대전을 치룬 곳으로
지금은 한강에서 끌어다놓은
모형거북선이 내부를 개조하여
박물관으로 꾸며 놓아
그 시절의 일들을 모형으로나마
느끼게 하고 있다.
(7)
인근에
장군의 시신을
아산 백암리 선영으로 옮기기 전
석달간이나 안치 했다는 곳에
충렬사란 사당이 위치하고 있었다.
장군의 가묘가
사당 뒷켠에 모셔져 있었는데
거기서 잠시 눈을 감고 장군을 생각하노라니
400여년의 시공을 넘어
그날의 함성이 들려오는 듯 하였다.
배달9204/개천5905/단기4340/서기2007/02/24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금산
남해대교를 지나 남해읍 우회도로까지 오면 삼거리에서 금산을 안내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20km쯤 달리다 상주해수욕장 조금 못 미쳐 좌회전해서 들어가면 남해의 소금강으로 불리는
금산에 다다른다. 요즘은 창선ㆍ삼천포대교가 개통되어 미조항과 상주해수욕장으로 오는 방법도
있으나 해안의 절경을 같이 즐기려면 남해대교방면으로 오는 길이 좋다.
비록 해발 681m의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기암괴석이 산 전체를 둘러싸고 있어
아름다운 해안과 맞물려 절경을 이루고 있다. 기암절벽과 해안의 절경이 어우러져 아름답기로 유명한
금산은 바다와 가장 잘 어울리는 명산이다. 금산의 원래 산 이름은 보광산이었다.
원효스님이 신라 문무왕 3년(663년)에 이 산에 보광사를 창건하면서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
금산이란 이름은 조선 건국 이전에 이성계가 조선의 개국을 앞두고
보광산에서 1백일간 기도를 올렸는데,조선이 자신의 뜻대로 개국되자 그 보답으로
산을 온통 비단으로 덮겠다고 한것에서 유래한다. 이름이야 어찌되었던 금산은 아름다운 산이다.
마치 고운 비단 치마를 입고 있는 것처럼 산이 수려하고 눈부시게 하는 비경이 곳곳에 숨어있다.
금산의 제1경인 쌍홍문을 비롯,무려 38경이 해발 681m의 조그마한 산에 자리하고 있다.
상주면에서 등산로를 이용하면 온갖 기암괴석들로 뒤덮인 금산의 참맛을 느낄 수 있다.
금산의 등산길은 사방으로 여러 개의 길이 있으나 그 정문은 쌍홍문(雙虹門)이다.
두 개의 큰 굴이 웅장한 바위에 뚫려있다.
이 문을 들어서면 바로 바위 전시장이다. 굴속은 여름에도 서늘한 바람이 분다.
금산38경
1. 망대 2. 문장암 3. 대장봉 4.형리암 5.탑대 6.천구암 7.이태조기단 8.가사굴 9.삼불암 10.천계암
11.천마암 12.만장대 13.음성굴 14.용굴 15.쌍홍문 16.사선대 17. 백명굴 18.천구봉 19.제석봉 20.좌선대
21.삼사기단 22.저두암 23.상사바위 24.향로봉 25.사자암 26.팔선대 27.촉대봉 28.구정암 29.감로수
30.농주암 31.화엄봉 32.일월봉 33.흔들바위 34.부소암 35.상주리 석각 36.세존도 37.노인성 38.일출경
보리암
683년 원효대사가 이곳에서 초당을 짓고 수도하면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뒤로 산 이름을 보광산, 초당 이름을 보광사라고 했다.
훗날 이성계가 이곳에서 백일 기도를 하고 조선 왕조를 열었다는데, 그 감사의 뜻으로
1660년 현종이 이 절을 왕실의 원당으로 삼고 산 이름을 금산, 절 이름을 보리암 으로 바꿨다.
금산의 정상에 자리잡고 있는 보리암은 금산의 온갖 기이한 암석과
푸르른 남해의 경치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절이다.
경내에는 원효대사가 좌선했다는 좌선대 바위가 눈길을 끌며,
부근의 쌍홍문이라는 바위굴은 금산 38경 중의 으뜸으로 알려져 있다.
강원도 낙산사 홍연암, 경기 강화도 보문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기도처의 하나로
신도들이 연일 줄지어 찾고 있다. 빼어난 경치와 남해의 금강, 동물 형상의 바위가 많아
바위동물원으로 불리는 금산. 쪽빛 바다와 초록빛 들녘의 조화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산으로
한려해상 국립공원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금산 정상에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는,
우리나라 3대 기도처 중 가장 유명한 보리암이 있다.
또한 금산은 바위마다 불교에 얽힌 전설들을 간직하고 있고 보리암은
대장봉·형리암·화엄봉·일월봉·삼불암 등 기암괴석에 둘러싸여 있다. 상주마을 금산 입구에서
보리암으로 오르는 코스는 울창한 숲과 남해바다가 조화를 이루는 최고의 산행코스.
하룻밤 묵으며 금산서 일출을 보면 천지신명의 조화를 느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일출이 절경이다.
자동차로는 앵강고개를 넘어 이동면 벅시골에서 복곡저수지를 지나 금산 8부능선까지 도로가 나있다.
보리암3층석탑
지정번호 : 유형문화재 제 74호, 지정일자 : 1974. 2. 16
소재지 : 남해군 상주면 상주리 산2065, 시대 : 고려시대
남해금산 상봉에 위치하고 있는 보리암 앞에 상주해수욕장을 바라보고 서 있는 탑.
이 석탑은 여러 가지 전설과 얘기를 남기고 있다.
김수로왕비 허태후가 인도에 갔다가 돌아올 때 풍파를 만나 건너오지를 못했다.
그런데, 허태후가 탄 배에 파사석(인도에만 있는 석재)을 싣고 오니 아무 사고 없이
무사히 건너오게 된 것이다. 이 돌을 가지고 원효대사가 보리암 앞에 세웠다고 한다.
재질은 화강암으로 상륜부 이상은 파손이 약간 되었으나 후에 복원되었다.
석탑은 1층부터 3층 옥개석(탑의 맨 위쪽에 있는 덮게 돌)까지 높이는 1.8m이고
1층 한쪽의 길이는 1.2m이다. 3층 탑신에는 우주(隅住)가 새겨져 있고,
상륜부(相輪部)에는 귀한 구슬 모양의 보주(寶珠)가 남아 있다.
보리암 삼층석탑 앞에 서면 남해 금산의 선경(仙境)과 해수관음상(海水觀音像)의 미소도 함께
감상할 수 있고, 뒤로는 상주해수욕장이 한 눈에 들어오는 다도해의 절경이 펼쳐진다.
불가사의한 일도 있다. 탑에 나침반을 놓으면 '자기 난리'가 일어나는 것이다.
즉 나침반을 놓는 곳에 따라 북쪽을 가리켜야 하는 나침반이 놓는 방향에 따라
동서남북이 모두 나타나기 때문이다. 정확히 어떤 원리로 이 같은 현상이 나타나는지는 모른다.
일부 풍수학자들은 탑 아래로 우주의 지기 기운이 흐르기 때문에 방향을 못 잡는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또는 탑 안에 사리가 있기 때문에, 혹은 온천수가 흐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다.
망운산
786m, 남해 최고높이를 자랑하는 망운산,
그러나 남해안 제1의 명산인 금산에 가려 진가가 꼭꼭 숨겨진 곳이다.
그리고 망운산을 오르는 사람은 이곳이 알려지길 두려워한다.
깨끗한 풍모, 드넓은 기상, 아는 자만 오르리라. 금산이 남해를 찾는 손님들의 산이라면,
망운산은 남해인들이 가장 아끼는 늠름한 기상이다. 고현면 대곡마을에 있는 화방사에서
조용한 산사의 정적을 뒤로 하며 산길을 올라 정상에 오른다.
정상에서 보는 주변 바다 위에 점점이 떠있는 자그마한 섬들과 강진만, 연죽저수지,
청정해역의 서상 앞바다, 멀리 지리산, 여천공단, 여수, 삼천포가 한눈에 들어온다.
정상에는 기우제를 지냈던 흔적인 듯, 평평하게 북쪽을 향하도록 되어 있고,
옆에는 제관이 앉을 수 있도록 돌로 된 의자가 놓여있다.
남해에 비가 오지 않을 경우 제일 먼저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그래도 비가 오지 않을 경우 상주리 앞바다 세존도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정상 반대편에 있는 연대봉에는 봉수대의 흔적이 남아 있다.
5월에는 철쭉군락지의 꽃들이 만개해 가족단위나 친목회등의 모임에서 많이 찾아오며,
정상까지는 1시간 30분정도 소요된다. 남해읍에서 관광안내판을 따라 남해대교 방향으로
3분 정도 가면 고현면 이어마을이 나타난다. 그곳에서 좌회전하여 5분 정도 가면
화방사 입구 이정표가 있어 찾기 쉽다. 화방사 그늘에 차를 세워두고, 망운산 등산로로 들어선다.
길이 험난하지 않으므로 가벼운 마음으로 등반을 할 수 있다.
설흘산
남면 홍현마을에 있는 설흘산(488m)은 망산(406m)과 인접해 있다.
설흘산에서 내려다 보면 깊숙하게 들어온 앵강만이 한눈에 들어오고
서포 김만중의 유배지인 노도가 아늑하게 내려다 보인다.
인접하고 있는 전남 해안지역 뿐만아니라 한려수도의 아기자기한 작은 섬들도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설흘산 정상 부근에는 봉수대의 흔적이 남아 있다.
원래 봉수대는 주위를 넓게 관측할 수 있는 곳에 정한다.
설흘산 역시 한려수도와 앵강만 그리고 망망한 남쪽 대해를 관측할 수 있는 곳이다.
남면 구미지역과 응봉산으로 오르는 등산로는 망망대해와 기암괴석 그리고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다랭이마을의 풍경을 같이 즐길수 있는 산행코스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호구산
산에 미친 사람들이라면 분명 남해에서 금산부터 탐낼 것이 틀림없다.
그 다음으로 남해 최고봉인 망운산에 눈을 돌린 후, 돌아가는 시간에 쫓겨 황급히 섬을 떠난다.
이 때문에 남해의 잘록한 허리춤에 자리한 호구산(627m)은 그냥 스쳐 지나치기 쉬운 곳이다.
하지만 남해를 아는 사람들은 누구나 한번쯤 호구산의 거친 산세에 눈길을 빼앗기게 된다.
지형도에는 산이름이 표기되어 있지 않지만, 송등산, 괴음산 등 산군을 엮어
호구산으로 대표되는 '호구산군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남해군의 군립공원으로 지정된 것은 그만큼 자연경관이 뛰어나고 보존가치가 있는 곳이라는 말이다.
호구산은 호랑이 형상을 닮았다는 유래가 있고,
옛날 호랑이가 지리산에서 건너와 이 산에 살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정상에 오르면
멀리 광양, 여수, 하동, 통영이 모두 보이며 잔잔히 펼쳐진 바다가 포근함을 느끼게 한다.
남해대교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현수교! 잿빛옷을 벗고 붉은 옷으로 갈아입었다.
제주도, 거제도, 진도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큰 섬.
남해의 관문은 동양 최대의 현수교라 불렸던 남해대교이다.
하동과 남해를 잇는 남해대교는 길이 660m, 높이 80m의 아름다운 현수교로
1973년 개통된지 3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로 일컬어지고 있다.
남해대교가 가로지른 노량해협의 거센 물살은 남해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산 증인이요,
역사의 마당이다.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이 시작된 곳으로,
또 고려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무수한 유배객들이 자신의 적소로 건너오기 위해
나룻배를 탔던 한맺힌 곳이었다. 남해대교가 놓여지기 전, 남해사람들은 나룻배를 타거나
도선으로 노량의 물살을 가로질러 다녀야 했지만 30년전부터는 승용차로 1~2분이면
거뜬히 물을 건너온다. 남해를 육지와 연결한 남해대교를 건너면 벚꽃터널이 반겨준다.
봄이면 하늘이 보이지 않는 벚꽃의 터널이 장관이다. 남해대교는 태어날 때부터
짙붉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부식을 이유로 잿빛옷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2003년 산뜻한 선홍색빛으로 새단장을 하여
창선·삼천포대교와 함께 섬으로 가는 남해군 최고 관광자원으로 다시 태어났다.
충렬사
충렬사는 노량해전의 치열했던 전투가 떠오르고,
노량 앞바다의 푸른 물결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노량마을 해안 언덕배기 울창한 숲 속에 자리잡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거룩한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이 충무공은 관음포 노량해전에서 순국하고 아산으로 운구를 옮기기 전에 3개월간 이곳에 안치했다.
충무공의 순국을 슬프게 느끼던 남해사람 김여빈과 고승후가
이 충무공이 순국한지 35년이 지난 1633년에 초가집 한 칸을 사당으로 건립하고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게 되자 남해현령 이정건이 사당 앞에 충민공비를 세웠다.
이순신장군이 순국한지 45년 후인 1643년에 이순신 장군에게 충무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658년. 어사 민정중이 통제사 정익에게 사당을 신축하도록 해서 모습을 갖추었다.
현재 사당 앞에 있는 "유명조선국삼도통제사 증시충무이공 묘비"는
1660년에 숭록대부 의정부 우찬성 송시열이 글을 짓고 정헌대부 의정부 좌참찬 송준길이 쓴 것이다.
현종 때에는 임금이 직접 쓴 충렬사 현판이 하사되었다. 이렇게 조정에서는
이곳 남해 충렬사를 역사적으로 중요한 곳으로 인정하였고 세월은 흘러 순국 195년이 지난 후인
1793년에 이곳에 충무공비를 세우고 충민공비를 땅속에 묻었다.
충무공은 이 해에 의정부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남해 충렬사는 그 뒤에도 계속
성역화사업이 추진되었으나 고종8년인 1871년에 향사, 서원 철폐령에 따라 사당은 허물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1922년에 윤기섭과 고준홍이 자기집 재산으로
사우3칸을 새로 지어 제사를 지내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