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조 창작 강의(기만 일탈 외)
1. 기만, 일탈
2. 욕망, 절제
3. 구체적 언어, 감각적 언어
4. 형상화
5. 언어체와 발화체
6. 청각, 시각, 촉각의 예
7. 소절과 음절, 율독
1. 기만, 일탈
창작은 현실을 기만하는 행위이다. 독자는 창작물을 보며 ‘이런 가짜가 어디 있어’라고 말하지 않고 ‘이거 진짜 같다’라고 말한다. 진짜 같은 현실, 이것이 기만이다.
기만은 표절이 아니다. 세상에 오리지날 창작은 없다. 언어는 화폐와 같아서 다른 사람이 사용한 다음에서야 비로소 나에게 전달되며 그것은 또 그것을 실제 사용하는 사람에 의해 언어는 불가피하게 굴절된다. 바흐찐의 말이다.
창작이라는 것은 남의 작품을 모방하거나 취해서는 안된다. 훔쳐와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한다. 언어는 굴절되기 마련이다.
문학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옮겨올 수 없다. 현실처럼 만들기 위해서는 현실을 기만해야하고 그에 맞는 수사를 동원해야한다. 현실과 비현실 간의 외줄타기이다. 그래서 시인들은 코드의 파격적인 도입을 마다하지 않는다.(신웅순,무한한 사유 그 절제읽기),문경출판사,2006,15쪽)
‘나는 울었다’라고 말하는 것보다 ‘그녀의 속눈썹이 젖었다.’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문학적인 표현이다. 이것이 시이다.
단풍도 처음에는 연초록 잎새였다
너와 나 사랑으로 뒹굴고 엉클어질 무렵
목이 타 붉게 자지러져 숨이, 탁 끊긴다
- 김영재의 「단풍」전문
낙엽이 지는 것은 자연적인 현상이다. 시인은 목이 타 붉게 자지러져서 숨이 탁 끊긴다고 했다. 도를 넘는 기만 행위이다. 그러나 ‘맞아, 맞아’ 하며 독자들은 고개를 끄떡인다. 이 때 현실과 비현실의 간의 경계가 순식간에 무너진다.
연초록 잎새에서 단풍까지는 사랑의 단계이다. 단풍이 자지러져 툭 질 때 비로소 사랑의 완성을 이룬다는 상징성은 독자들을 놀라게 한다. 시 텍스트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누군가가 이 작품을 훔쳐 또 하나의 자기 것으로 만들어낼 지도 모른다.
대체 누가 내 가슴에다 그리움의 비수를 꽂는가
어느 누가 내 목에다 사랑의 못을 박는가
마침내 터져나오는 그 황홀한 비명, 석류
- 양승준의 「석류」전문
석류에 대한 사랑의 대비는 진부하다. 그래도 거기에는 또 다른 세계가 있다. 시인들은 이것을 놓치지 않는다. 그리움의 비수를 꽂고 사랑의 못을 박는 이는 누구이며 황홀한 비명을 지르는 이는 누구인가. 알 수 없다. 이렇게 텍스트에서는 예상을 알 수 없는 코드들이 충돌하고 있다. 코드 사이가 너무 멀거나 가까우면 충돌 지점을 알 수 없어 독자들은 읽기를 포기한다. 그래서 시인은 그 접점을 찾기 위해 철저하게 대상을 기만해야하고 감쪽같이 언어를 훔쳐내야 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내 것으로 만들어내야 한다.
시인은 원심력의 언어이다. 언어가 갖는 의미를 확충하고 액센트화 시켜 언어의 힘을 무력하게 만들려고 한다. 독자는 구심력의 언어이다. 언어를 축소시키고 일반화시켜 언어의 힘을 강하게 만들려고 한다. 여기에서 시인과 독자 간에 서로 충돌하고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숙명적으로 시 텍스트에서는 시인과 독자 간의 끝없는 투쟁이 이루어진다.
원심력의 코드 배치는 다의적이고 다층적이어서 독자들은 시 텍스트의 해석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 때문에 의미의 확장을 가져와 독자들은 경이적인 예술미를 체험하게 된다. 이것이 시이다.
시조는 12개의 한정된 도구로 미의 세계를 탐색해야한다. 그 때문에 위치에 맞는 그만의 언어 선택이 필요하다. 이런 속성 때문에 잘못하면 자칫 유치해질 수 있다. 고도한 사유로 현실을 감쪽같이 속여야한다. 현실과 비현실간의 외줄 때문에 불필요한 행동이나 말은 자연 삼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시조는 그만큼 품이 많이 들고 품이 든 만큼 격조가 있고 아정하다.
시는 기존 사물의 파괴와 무시에서부터 출발한다. 기존 사물의 기만과 일탈이 치열할수록 예술의 행위도 치열해진다. 이것이 예술의 시작이며 자유이다. 자유는 우리가 파악하고 있는 기존 사물을 우리가 파악하지 못하는 낯선 사물로 전이시키는 데에 있다.
예술의 시작, 자유
기존 사물 → 낯선 사물
수사는 크게 잡아 인간의 사물로의 전이, 사물의 인간으로의 전이 둘 중의 하나이다. 전이 시 동질성이냐 차별성이냐에 따라 일상의 말이냐 시이냐가 결정된다. 다시 말해 일반 질서의 수용이냐 저항이냐이다. 여기에서 일상적 사물의 해체가 질서의 파괴로 볼 수 있는가의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일상의 말은 사물과 인간의 객관화된 결과물이지만 시는 사물과 인간의 새로운 차원으로의 객관화 과정이다. 질서의 해체가 아니라 새로운 질서로의 정립이다. 새롭게 정립된 질서 이것이 시 텍스트이다.
기만은 일탈이다.
기존 사물의 의미는 누구나 보편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객관적인 의미의 이름이고 일탈은 이러한 소통 방식에서 벗어난 주관적인 의미의 이름이다. 여기서부터 예술의 행위가 시작된다. 행위는 주관적 의미가 보편적인 의미가 될 때까지 수정, 반복을 계속한다. 시가 일반적인 언어 소통 방식이라면 그것은 사회 활동이지 예술 활동이 아니다. 시가 기존 사물의 파괴와 무시일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백년을 살다 죽은 감나무 속을 보면
나이테 한복판에 먹물이 배어있다
어머니 타버린 속이 고스란히 들었다
-박구하의 「먹감나무」전문
긴 세월 속을 끊이며 사신 우리 어머니의 초상이 먹감나무에 있습니다. 먹감나무를 베어 눕히면 나이테 안쪽이 먹물처럼 까맣게 타들어간 게 보입니다. 까맣게 속을 태 우며 사신 어머니의 일평생이 고스란히 보입니다. 어머니가 가르침이 되듯이 먹감나 무는 죽어서도 단단하고 빛나는 가구가 됩니다.
첫번째 텍스트는 ‘먹감나무’이고 아래 텍스트는 해설이다. ‘먹감나무’는 예술의 소통 방식이고 해설은 일반적인 소통 방식이다. 이렇게 시의 언어와 일상의 언어가 다르다. 일상 언어는 존재해오던 기존 의미요 시의 언어는 기존 의미를 일탈한 낯선 의미이다.
먹감나무 나이테 안쪽은 생리적으로 그렇게 된 것인데 이를 어머니 일생의 타버린 가슴으로 치환했다. 먹감나무의 기존 의미를 넘어 새로운 낯선 의미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일탈이다.
봄날 양지쪽에 세 사람이 앉았습니다
장모님과 딸아이 그리고 아내입니다
꽃처럼 흙돌담처럼 장독처럼 앉았습니다
햇살에 움돋던 정도 렌즈 앞에 놓고 보면
여자의 가는 길이 이마를 타고 흘러
무수히 실릴 말들이 사무치게 숨습니다
딸아이는 꽃가지 꺾어 병에다 꽂지만
장모님은 외손녀와 아내 가슴에다 꽂습니다
필름이 다 못찍어도 마음에는 남습니다
-채천수의 「사진찍기」전문
사진을 찍는 사람은 남편이고 피사체는 장모님과 딸과 아내이다. 텍스트는 사실 같지만 실제 사실은 아니다. ‘꽃처럼 흙돌담처럼 장독처럼 앉았습니다’, ‘여자의 가는 길이 이마를 타고 흘러 무수히 실릴 말들이 사무치게 숨습니다’와 같이 수사가 사실처럼 만들었다. 어떻게 꽃처럼 흙돌담처럼 장독처럼 앉아있을 수 있을까. 무수히 실린 말들이 어떻게 사무치게 숨을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다. 그러나 독자들은 수사 때문에 사실이 아닌 것이 진짜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사물을 파괴, 무시하지 않고는 시인은 독자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
역으로 말하면 텍스트 읽기는 독자의 텍스트 읽기가 아니라 텍스트의 독자 읽기에 다름 아니다. 내가 시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텍스트가 독자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그 각도에 따라 독자들은 당황하기도 하고 놀라기도 한다. 시인의 자동적 각도 조절에 타고난 재능을 보여야하는 이유이다. 누구나 다 자기 일인 것처럼 적당하고도 수긍할 수 있는 각도이어야 한다. 그 공약수가 주관의 객관화이며 시이다.
아침이 찾아오면 별들은 바쁘다
달빛에 뛰어오른 파도를 타다가
수평선 햇살에 놀라 섬 그늘에 숨는다
- 박석순의 「어디에 숨나」 전문
별들이 파도를 타다가 햇살에 놀라 섬 그늘에 숨는다고 했다. 종장에서 별이 어린이로 치환되는 순간 반전이 일어났다. 사물과 인간 간의 관계가 최적화에 이르는 지점이다. 그 곳이 시조에서는 종장이다.
어느 누구도 텍스트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일단 텍스트를 읽으면 그 시선에 독자들의 읽기는 저당 잡히고 만다. 일생동안 저당 잡힐 수 있는 시조 텍스트는 얼마나 될까.
각도 크기는 얼마쯤이 적당한가. 그것은 인간의 사물화, 사물의 인간화 과정의 새로운 질서 정립에 달려있다. 예리한 시인의 시선이 필요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
아, 저 섬광! 별이 분신 낙하하는-
만 길 어둠을 찢고 혼불 떨어진 거기
아직도 눈을 못 감는 푸른 넋들이 있어……
-허일의 「미완의 장」전문
하늘에서 지상으로 어둠을 찢고 혼불처럼 분신 낙하하는 별똥별. 낙하 시 부서져 떨어지는 거기, 그 곳에 아직도 눈을 못 감는 푸른 넋이 있다는 것이다. 섬광과 푸른 넋의 대비 각도가 종장에서 딱 맞아 떨어진다.
텍스트 각도의 자동 조절은 시인의 몫이자 독자의 몫이다. 시인은 사물과 인간 간의 전이를 객관적으로 제시해야하고 독자는 이를 정밀하게 읽어내야 한다.
인간의 사물화, 사물의 인간화는 기존 사물의 파괴와 무시로부터 출발한다. 이것이 예술의 시작과 자유이며 기만과 일탈이다. 기존 사물의 해체이며 기존 사물의 새로운 질서 정립이다.
2. 욕망, 절제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어머니의 태아 속 낙원을 상실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언제나 낙원을 꿈꾼다.
예술은 원초적으로 상실된 낙원을 되찾기 위한 끝없는 작업이다. 낙원 상실은 인간에게는 억압과 희생을 강요한다. 그 때문에 생긴 결핍은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고 다른 모습으로 되풀이되어 나타난다. 영원히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이다. 이것이 예술의 원천이 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희로애락 같은 감정들을 시로 나타내고 싶어한다. 그렇다고 ‘아, 괴롭다.’, ‘참, 기쁘다’ 등으로 표현할 수는 없다. 어떻게 변형시켜 나타내야 객관성을 획득할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 욕망 때문이다.
욕망은 기표이다. 기표는 완벽한 기의를 갖지 못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욕망하게 된다. 시를 써 놓고 보면 아무리 고쳐도 맘에 들지 않는다. 고치고 또 고친다. 어떤 이는 작품 하나로 몇 년을 고치는 이도 있다. 시인이 생각하고 있는 욕망과 일치 될 때까지 기표 작업은 계속된다. 기표는 욕망의 대상을 또 다른 기표로 몸을 바꾸면서 기의를 끝없이 지연시킨다.
생각마저 갈색뿐인 햇빛 차암 좋은 날
등 마알간 바람이 길을 가다 멈춘 곳
마가목 고, 가지 끝에 초롱 닮은 알집 하나!
-유재영의 「햇빛 좋은 날」전문
마알간 바람이 길을 가다 멈춘 곳, 마가목 가지 끝에 알집 하나가 있다. 무엇을 은유하고 무엇을 상징했을까. 기표는 원초적인 억압이며 상실된 낙원이며 욕망이며 결핍이다. 이것이 은유나 상징의 기표로 나타나 독자들에게 잠시나마 결핍을 충족시켜준다.
기표 = 억압 = 욕망 = 결핍
햇빛, 바람, 마가목, 알집 등의 기표들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다. 욕망 때문이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흔적들을 남겨놓는다. 흔적들은 억압되거나 억압되지 않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억압되지 않은 기억들은 의식의 영역으로 편입되지만 억압된 흔적들은 무의식으로 남게 된다. 이 무의식이 의식화되는 과정에서 변장을 하면서 원래의 모습과는 다른 여러 변용을 거치게 된다. 이것이 예술로 나타나게 된다.
그대를 보냅니다 등 떠밀어 보냅니다
명치 끝에 아려오는 절절한 그리움을
다 덮고 혀를 깨물며 그대를 보냅니다.
-서일옥의 「파도」전문
이별의 아픔이 억압된 채 남아 있다.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를 통해 이별의 아픔을 여러 기표로 형상화하고 있다. 기표는 무의식 속에 억압되어 남아 있는 화자의 또 다른 욕망이다. 무의식 속의 억압들은 텍스트에서 보상이나 합리화, 투사, 승화, 퇴행 등 여러 심리 기재로도 나타난다.
절제는 인간의 욕망을 채워줄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다.
시조는 절제이다. 3장이어야 하고 6구이어야 하고 12소절이어야 한다. 이 틀 안에 적절한 언어를 선택, 배치해야한다. 타장르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규칙이다. 이 규칙 속에는 무한한 사유와 절제가 있어야한다. 언어를 선택하는 데에 신중을 기할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사설 시조는 삼장 중 한 장이 무한정 길어지는 것을 말한다. 이도 3장을 벗어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사설시조는 시조의 이형태이지 시조의 원형은 아니다. 사설시조라 해서 그 어떤 욕망도 한 그릇에 다 채울 수는 없다. 절제가 필요하다.
시조는 그릇이 정해져 있어 어떤 내용을 담아야하는가가 관건이다.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말아야 담을 수가 있다. 이것이 여유이고 절제이고 시조의 맛이다.
한 열흘 하늘과 땅 텅 비워둔 내 산방에
누가 찾아와서 등을 달아두었는가
적막이 기름이 되어 산국화가 탑니다
- 정완영의 「산방시초 1」전문
묘미는 종장에 있다. 중장에서 ‘등’이라는 단어가 매개 역할을 하고 있다. 종장에서 적막이 기름이 된다고 했다. 기름이 될 수 있는 것은 중장의 ‘등’이라는 단어 때문이다. 그래서 종장에서 산국화가 타는 것이다. 산국화가 타기 위해서는 기름이 필요하다. 그 기름을 중장의 등에서 얻고 있다. 시는 하고 싶은 말을 하지말아야 한다. 절제와 여유로 대신해야한다. 이것이 등이다. 욕심을 버려야, 언어를 버려야 시조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와스스 천하에 가을이 오는구나
쨍그랑 도망치던 하늘은 깨어지고
그 모든 소리가 모여 침묵으로 맺혔다.
-유자효의 「포도」전문
포도를 침묵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명쾌하게 정리했다. 포도가 왜 침묵인가. 모든 천하의 소리가 모였기 때문이다. 이 하나의 단어로 모든 것을 해결했다.
얼마나 절제 있게 자연의 의미를 말하고 있는가. 이러한 절제된 행간에서 독자들은 무한한 사유를 누릴 수 있다. 시란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 단 몇 줄로 인생의 의미를 담아내야 한다. 절제만이 할 수 있는 시의 특권이다.
시조 = 절제, 여유
시조의 포석은 각 장마다 4개의 음보를 배치하는 일이다. 작가와 독자 간의 12개의 돌로 전술들을 숨겨두어야 한다. 각 소절마다 두는 돌들은 고작 3,4,5개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한 장에 겨우 15개 정도이다. 초반전 ․ 중반전을 거쳐 종반전까지 돌들을 합쳐보았자 고작 45개 정도이다. 이 돌로 대마를 끊기도, 이끌어가기도 해야한다. 승부를 내기 위해서는 절제라는 전술로 치밀한 수 계산을 해야한다.
주로 종장에서 의미를 뒤집어야하기 때문에 욕심을 부리면 낭패하기 일쑤다. 많은 말을 한다고 해서 독자들에게 울림을 주는 것은 아니다. 단 하나의 화살이 필요한 것이지 수많은 솜방망이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가슴에 예리하게 꽂혀 숨을 멎게 하는 것이지 가슴을 멍들게 하는 것은 아니다. 명궁은 타고 나면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피나는 수련의 결과로 태어나는 것이다.
나무는 서성이며 백년을 오고 가고
바위야 앉아서도 천년을 바라본다
짧고나, 목련의 밤은 한 장 젖은 손수건
-지성찬의 「목련꽃 밤은」전문
한 장의 젖은 손수건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나무는 백년을 서성이며 오가고 바위는 앉아서 천년을 바라보는데 목련의 밤은 짧아 한 장의 손수건에 불과하다. 짧은 인생을 그렇게 표현한 것인가. 영혼불멸할 것 같은 사랑의 이별을 그렇게 말 한 것인가. 궁금하다.
단칼에 잘라내야 한다. 시조는 바로 이런 것이어야 한다. 세상에 영원히 남는 시조 한 수 쓰고 싶지 않은 시인이 어디 있으랴. 시는 신이 내려주는 선물이지 사람이 만들어 내는 재주가 아니다. 차가운 머리로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뜨거운 가슴으로 시를 쓰는 것이다.
또 다시 늑대처럼 먼 길을 가야겠다
사람을 줄이고 말 수도 줄이고
이 가을 외로움이란 얼마나 큰 스승이냐
-이달균의「다시 가을에」전문
가을 외로움을 큰 스승으로 쾌도난마했다. 욕망의 절제, 이것이 시조이다. 욕망과 절제는 앞뒤 동전과 같다. 욕망의 이면에는 절제가 있고 절제 이면에는 욕망이 있다. 욕망이 없어서도 안되고 절제가 없어서도 안된다. 두 바퀴가 있어야 돌아갈 수 있다. 욕망은 원심력이요 절제는 구심력이다. 추가 균형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원심력과 구심력이 팽팽하게 맞서기 때문이다. 시조는 균형 유지이다.
3. 구체적 언어, 감각적 언어
이미지, 심상은 일반적으로 인간의 마음속에 그려지는 사물의 감각적 영상을 말한다. 영상, 표상이라고도 한다.
C.D. 루이스는 이미지를 ‘독자의 상상력에 호소하는 방법으로 시인의 상상력에 의해 그려진 언어의 그림’이라고 했다. 언어로 그림을 그려야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흐릿하거나 모호하면 독자들은 무슨 그림인지를 잘 알 수 없다. 선명한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언어가 필요하다.
랑이 엇터터니 둥그더냐 모나더냐
기더냐 쟈르더냐 밟고 남아 자힐러냐
그리 긴 줄은 모르 끗 간 를 몰라
사랑은 무엇인지 마음속에 떠오르지 않는다. 추상적인 언어이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했을 때 독자들은 그것이 불꽃 같이 타오르는 사랑인지, 물 같이 미지근한 사랑인지 알 수가 없다. 어떤 사랑인지 구체적으로 그려볼 수 없다.
‘나는 장미 한 송이를 그대 책상에 몰래 놓고 왔습니다.’라고 하면 장면이 그려진다. 장미 한 송이로 사랑을 이미지화시켰고 행동으로 그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사랑을 표현하는 데에 사랑이 둥근지, 긴지, 모난지, 잴 수 있는 지를 물었다. 그리고는 사랑이 하도 길어 끝 간 데를 모른다고 했다. 사랑이라는 추상적인 이미지를 비교적 구체적 이미지로 표현했다. 시에서는 이렇게 언어를 구체적인 이미지로 감각화시킬 필요가 있다.
이미지에도 등급이 있다. 바꾸어 말하면 비싼 값을 쳐주어야 할 이미지와 그렇지 못 한 싸구려 이미지가 있는 것이다. 싸구려 이미지는 내버려야 한다. 그렇게 내버려야 할 싸구려 이미지의 한 예로는「국화꽃이 피어 있다」와 같은 가상의 싯구를 들어볼 수 있다. 피어있는 국화꽃은 우리가 감각적으로 알아볼 수 있는 대상이니까 이 한 구절도 이미지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국화꽃이 어떻게 피어 있으냐는 전혀 알려 주지 않는다.
위 언급은 구체적인 언어로 이미지화시켰다고 해서 전부가 좋은 시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미지가 싸구려 이미지이냐 아니냐는 것도 등급이 있다는 것이다. 누구나 다 생각할 수 있고 누구나 다 느낄 수 있는 그런 것들이라면 구태어 시로 쓸 필요가 없다. 참신하고 예리한 이미지이어야 좋은 시가 될 수 있다.
국화야 너는 어이 삼월 동풍 다 지내고
낙목한천에 너 홀로 피었는다
아마도 오상고절은 너뿐인가 하노라
-이정보 시조
국화가 절개나 지조를 상징한다든가 하는 것은 과거에 많은 시인들이 써온 상투적인 이미지이다. 이런 이미지는 현대에 와서는 싸구려 이미지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같은 이미지를 자꾸 반복하여 사용해서는 안된다. 시인은 어느 누구도 사용하지 않은, 그것이 비유적 이미지이든 상징적 이미지이든 새로운 이미지이어야 한다. 이에는 인습에 얽매지 않은 새로운 개성의 날카로운 눈이 필요하다. 구체적인 언어를 동원한다 해도 인습적이고 상투적인 이미지를 써서는 안 된다. 언어는 구체적이고도 정확해야하며 새로우면서도 개성적이어야 한다. 그러한 언어로 표현했다 해도 이미지가 신선하지 않으면 그 시는 좋은 시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피면 지리라 지면 잊으리라
눈 감고 길어 올리는 그대 만장 그리움의 강
져서도 잊혀지지 않는 내 영혼의 자줏빛 상처
- 이우걸의 「모란」전문
위 시조는 모란을 ‘그대 만장 그리움의 강’, ‘내 영혼의 자줏빛 상처’라고 했다. 모란 하면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시인은 ‘그대의 만장 그리움의 강’이라 표현하였고 ‘져서도 잊혀지지 않는 내 영혼의 자줏빛 상처’라고 했다.
그림을 그려낼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하다. 언어는 그림으로 표현해야지 설명을 해서는 안 된다.
참고 자료를 제시한다.
봄날이면 다시 한 번 연지를 찍고 싶다
함덕시장 근처에 유물 같은 돌담집
4․ 3때 그 집에서는 쉬쉬하는 곡절 있다
그렇게 반세기를 보냈으면 그만이지
혼사한지 며칠 만에 누가 산으로 갔는지
별안간 붉은 꽃대를 저리 훤히 올렸나
-김향진의 「홍매」전문
감각은 ‘사물의 상태나 변화에서 무엇인가를 느껴 받아들이는 마음의 작용’이다. 눈, 코, 귀, 혀, 살갗 등 오관을 통해 바깥의 어떤 자극을 알아차리는 것을 말한다. 시는 언어를 매재로 한 하나의 이미지에 다름 아니다. 플레밍거는 이미지를 감각적 이미지, 비유적 이미지, 상징적 이미지로 나누었다. 감각적 이미지는 시각적 이미지, 청각적 이미지, 미각적 이미지, 후각적 이미지, 촉각적 이미지, 공감각적 이미지 등이 있다.
이미지 - 감각적 이미지 : 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 공감각
비유적 이미지
상징적 이미지
이미지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감각적인 언어를 동원해야하지만 동원 자체만으로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언어들이 어떤 형식으로든 짜여져야 이미지가 형성된다.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는 시인의 역량에 달려 있다. 많은 수련과 피나는 노력이 필요함을 두말할 나위가 없다. 언어들의 배치가 중요하다. 같은 언어라도 배치의 위치에 따라 감각적인 언어가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
풀잎 끝 파란 하늘이 갑자기 파르르 떨었다.
웬일인가 구름 한 점이 주위를 살피는데
풀잎 끝 개미 한 마리 슬그머니 내려온다
-박종대의 「풀잎 끝 파란 하늘이」전문
‘풀잎 끝 파란 하늘이’라든가 ‘구름 한 점이 주위를 살피는데’, ‘풀잎 끝 개미 한 마리 슬그머니 내려온다’ 와 같은 시각적인 이미지로 처리해 시를 구성했다. 행위 이미지로만 보여주고 있다. 풀잎이 떠는 것인데 풀잎 끝 파란 하늘이 떨고 있다고 했다. 풀잎이 떨고 있다고 하면 그만큼 의미는 반감된다. 낯설지 않은 것을 낯설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거미는 이슬비가 내리기를 기다렸다
이슬비를 물어다가 보석처럼 꿰맸다
아, 저기 거미줄에 줄줄이 걸려있는 은하수
-박석순의 「거미」전문
시각적 이미지로 처리되어 있다.
거미줄을 은하수로 은유했다. 꿰맨 이슬들은 은하수의 별들이다. 사실은 이슬비가 거미줄에 물방울로 걸린 것인데 거미가 이슬비를 물어다가 보석처럼 꿰맸다고 했다. 그것을 은하수라고 했다. 이슬비를 금세 은하수로 둔갑시켰다. 일반적인 언어라 할지라도 어떻게 꿰매느냐에 따라 감각적인 언어가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
청각적 이미지와 시각적 이미지가 결합되어 있는 텍스트이다.
돌담장 틈 사이로 귓속말이 소곤댄다
외신을 감지하는 안테나 야윈 가지 끝
보란 듯 자목련 편지가 속달로 와 걸려있다.
-최혜숙의 「봄이 오는 길목」전문
무슨 귓속말인지는 알아들을 수 없다. 봄이 오느라 어수선 하다. 물론 이것은 청각적 이미지이다. 그러다가 이것이 중장, 종장에서 시각적 이미지로 바뀌었다. 이러한 말소리를 감지하는 안테나인 야윈 가지가 있다. 물론 자목련 나뭇가지를 두고 한 말이다. 이것은 시각적 이미지이다. 그런데 보란듯이 편지, 그것도 자목련 편지가 속달로 와 걸려있는 것이다. 귓속말이 외신을 감지하는 안테나를 통해서 속달 편지로 걸려온 것이다. 이미지가 정교하게 구성될 때 참신하고도 감각적인 언어가 되살아나는 법이다.
참고 자료를 제시한다.
아가위 열매 익자 가만 휘는 무게여
잎사귀 뒤에 숨은 고 열매 빛깔까지
벌레에 물린 가을이 가랑잎 처럼 울었다
보랏빛 여운 두고 과꽃으로 지는 하루
오늘은 한종일 햇살들이 놀러와서
마른 풀 남은 향기가 별빛처럼 따스했다
-유재영의 「햇살들이 놀러와서」전문
4. 형상화
일필휘지는 없다. 단숨에 글씨를 써서 완성한다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쓰고 또 써서 결국 하나가 얻어지는 것이 글씨이다. 일단의 시가 완성되면 그것은 초고일뿐이지 작품이라고는 볼 수 없다. 며칠 뒤에 보면 부끄럽다. 그래서 다시 고친다. 그리고 또 놔두고 또 다시 고치고 이런 작업을 계속한다. 어떤 것은 몇 시간, 어떤 것은 며칠, 또 어떤 것은 몇 달, 몇 년 후까지 퇴고하는 것도 있다. 수 없는 산고의 과정을 거쳐서 얻어지는 것이 겨우 몇 줄 안 되는 시이다.
시에 거의 달통한 서정주도 시 쓰기는 고통스런 과정임을 밝히고 있다. 서정주는 「국화 옆에서」를 쓸 때 오랫동안 구상해왔던 시의 지형인 40대 여인의 미의 영상은 처음에는 아래와 같이 비교적 쉽게 형상화 되었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그리고 나서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계속 시를 형상화시켜 나갔지만 마지막 연만은 좀처럼 써지지 않아서 굉장한 고통을 겪었던 것 같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그러나 마지막 연만은 좀처럼 표현이 되지 않아, 새벽까지 누웠다가 앉았다 하다가 그만 자버리 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이것은 며칠 동안 있다가 어느날 새벽 눈이 뜨여서 처음으로 마련되었습 니다. 밖에선 무서리가 오는 듯한 늦가을의 상당히 싸늘한 새벽이었는데, 내가 안 자고 혼자 깨어 있다가 호젓한 생각 끝에 밖에서 서리를 맞고 있을 그 놈을 생각하자 그것이 용하게 맺어졌습니다.
이는 이미 널리 알려진 일화이기 때문에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산고 없이 시가 창작될 수 없 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아직 유효한 일화가 아닌가 한다.
시를 쓴다는 것은 언어와 싸우는 일이다. 언어를 버리는 일이다. 퇴고에 퇴고를 거듭한다는 말이다. 왜 시창작은 언어와 끊임없이 싸우고 지칠 땐 언어를 가차없이 버려야하는가. 시조가 더욱 그래야하는 이유는 한정된 도구로 미의 세계를 탐색해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신중한 선택을 하지 않으면 유치해질 수 있는 것이 시조이다. 고도한 사유로 현실을 감쪽 같이 속여 또 다른 현실 같은 가짜를 만들어내야 한다. 현실과 비현실 간의 외줄타기이다. 그렇지 않으면 망신당하기 일쑤여서 조금의 불필요한 행동도 삼가해야한다. 그만큼 품이 많이 들고 품이 많이 든 만큼 아름다운 것이 또한 시조이다.
시는 원심력의 언어이다. 언어가 갖는 의미를 확충하고 그것을 액센트화 함으로써 언어의 힘을 무력하게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독자들의 언어는 대체적으로 구심력의 언어이다. 언어를 축소시키 고 일반화시킴으로써 언어의 힘을 강하게 만들려고 한다. 서로 충돌하고 갈등을 일으킬 수 밖에 없 다. 숙명적으로 시텍스트에서 시인과 독자간의 끝없는 투쟁이 이루어지고 있다.
시인과 독자 간의 언어 충돌은 숙명이다. 한 편의 시 앞에서 진검 승부를 벌일 수 밖에 없다. 언어의 선택과 결합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말해주는 한 실례이다. 수많은 퇴고를 거듭한 작품은 달라도 뭔가가 다르다. 화려한 시조가 있는가하면 은근한 시조가 있다. 금세 다가오는 시조가 있는가하면 읽을수록 툭배기 맛이 나는 시조가 있다.
오래 남는 시조는 산고의 고통과 숙성의 시간을 거쳐 생산된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그만큼 함부로 읽을 수 없는, 함부로 읽어서도 안 되는 시인의 혼이 깃들어 있는 작품이다. 여기에는 어떤 범접할 수 없는 고결함과 경건함이 있다.
꽃이라면 모름지기 시인 하나쯤은 잡아먹고
시침 뚝! 떼고 앉을 화냥끼는 있어야지
아무렴 요염에 가리워진 저 능청과 푸른 살의
-이달균의 「장미」전문
형상(形象)은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문학이나 그림 등으로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장미를 ‘요염에 가리워진 저 능청과 푸른 살의’로 형상화시켰다. ‘장미’에서 ‘살의’까지는 바로 형상화의 산고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형상은 어떤 대상을 표현하고자 할 때 어떤 개념을 사용하여 이를 추상화, 일반화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화하거나 개별화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상과 표현이라는 두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감각적 자극을 마음의 안으로 새기는 것을 내적 형상화, 즉 인상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인상을 언어 등의 매체를 통해 어떤 형식 속에서 밖 으로 드러내는 것을 외적 형상화, 즉 표현이라고 한다. 이 두 과정은 외적 인상을 주체의 내부에 결합시키는 일과 이렇게 결합된 인상을 외부로 표출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인상이 외적 자극에 대한 수동적 반응이라면 표현은 그것에 대 적극적 의미 부여이자 대응방식이다. 자극과 반응, 인상 과 표현은 이 때 서로 해소될 수 없는 긴장 관계를 지닌다. 인간은 형상화 속에서 자신의 경험을 그 나름으로 질서 짓는 가운데 보다 선명하게 이해하고 또 인식한다. 형상화는 표현을 통한 현실의 보다 강렬한 파악 방식이며…
형상화는 인상과 표현이라는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인상은 대상의 감각적 자극으로 마음 안에 들어오는 것을 말하고 표현은 이 인상을 어떤 매체를 통해 밖으로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이 때 인상과 표현은 서로 해소될 수 없는 긴장 관계를 갖는다는 것이다.
정강이 말간 곤충 은실 짜듯 울고 있는
등 굽은 언덕 아래 추녀 낮은 집 한 채
나뭇잎 지는 소리가 작은 창을 가리고
갈대꽃 하얀 바람 목이 쉬는 저문 강을
집 나간 소식들이 말없이 건너온다.
내 생애 깊은 적막도 모로 눕는 월정리
- 유재영의 「다시 월정리에서」전문
시인은 작시 과정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다시 ‘월정리’를 찾은 것은 정강이 말간 곤충들이 ‘은실짜듯’ 울어대는 가을이었다. 나는 ‘월 정리’의 모습을 더욱 구체화시키고 싶었다. 어느 쓸쓸한 가문처럼 등 굽은 언덕 아래로 추녀 낮은 집 한 채가 보였다. 그 집의 작은 창으로 나뭇잎 지는 소리가 많이 들렸다. 문득 갈대꽃이 하얀 저 문 강을 바라보며 나는 누군가가 금방이라도 불쑥 찾아올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적막과 기다림 은 한 가지의 의미인가. 그날 내가 느낀 것은 바로 이러한 삶의 본질같은 것이었다.
고백은 인상을 넘어 표현에 가깝다. 어떤 인상에 자신의 경험이나 감성을 결합, 월정리라는 대상을 위와 같은 시로 표현한 것이라고 시인은 설명하고 있다.
가을을 ‘정강이 말간 곤충들이 은실짜듯 울어대는 가을’이라고 표현했다. 보통 사람들은 그런 표현을 하지 못한다. ’참 맑고 깨끗한 가을‘이라든가, ’쓸쓸하고 외로운 가을‘ 이라든가 이런 식으로 표현한다. 일반적으로 느끼는 이런 것들은 시인에게는 하나의 인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인상에 시인은 ‘정강이 말간 곤충들이 은실 짜듯 울어대는 가을’이라고 형상화 시켜 표현했다. ’참 맑고 깨끗한 가을‘이라든가, ‘쓸쓸하고 외로운 가을’ 같은 인상과 ‘정강이 말간 곤충들이 은실 짜듯 울어대는 가을’ 표현 사이에는 어떤 긴장 관계가 형성된다.
사물을 구체화, 개별화시키고 있다. 이를 형상화라고 한다.
긴장 형상화 = 인상 → 표현
이렇게 시인은 적극적으로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그래야 오랫동안 독자와 시인과의 긴장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러한 긴장 때문에 의미의 확장을 가져오게 되고 그것이 독자들을 감동시키는 요인이 된다. 보통 사람하고 감각이 다를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사물을 대상으로 형상화한 예이다. 사물, 헌책이라는 일반적인 인상에다 자신만의 독특한 감각과 필체를 결합시켜 자신만의 독특한 헌책으로 표현했다.
널린 검은 별들이 흰 별 될 때꺼정
제 숨 고스란히 내 쉬고 들이쉰다
갈피가 쪽문들이어서 별빛만이 드나든다
-서벌의 「헌 책」전문
처음에 산 책은 활자가 선명하고 헌책은 활자가 선명하지 못하다. 검은 별, 흰별은 새 책의 진한 활자와 헌 책의 빛바랜 활자를 나타낸 것이다. 활자를 별로 형상화시켰다. 검은 별이 흰별이 될 때까지는 많은 세월이 필요하다.
헌책은 어느 침침한 구석에서 제 숨만 고스란히 내 쉬고 들이 쉴 수밖에 없다. 틈이라곤 갈피 밖에 없다. 이 쪽문으로 별빛이 드나드는 것이다. 갈피를 쪽문으로 형상화시켰다. 그래서 검은 별이 흰별이 될 때까지 먼 별빛만이 드나든다는 것이다. 그것이 빛 바랜 헌책이다. 활자를 별로, 갈피를 쪽문으로 구체화, 개별화시켰다.
발에 감긴 밤 하늘이 시려서 우는 저 기러기
30원이 없었던가 막차 놓친 외기러기
못 가눠 뽑은 외마디 둘 데 찾는 이 기러기
-서벌의 「서울․3」전문
자신을 외기러기로 형상화시켰다. 발에 감긴 밤하늘이 시려서 울고 있고 30원이 없어서 막차를 놓쳤다. 가누지 못해 외마디를 뽑으며 자신의 몸 둘 곳을 찾고 있다.
저 우는 기러기를 본 것은 하나의 수동적인 반응으로 인상에 해당된다. 여기에 ‘발에 감긴 시린 밤하늘’, ‘30원이 없어 놓친 막차’와 ‘못 가눠 뽑은 외마디’ 같이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해 자신이 처한 환경과 신세를 표현하고 있다. 기러기를 통해 자신을 구체화시키고 개별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시조는 4개의 단어를 3줄로 연결해 12개라는 단어로 특별한 의미를 조립해야한다. 형상화는 추상화의 구체화이며, 일반화의 개별화이다. 소홀히 언어를 다룰 수 없는 이유이다.
형상화 → 구체화, 개별화
5. 언어체와 발화체
시조는 정해진 틀 속에 알맞은 단어를 넣어야한다. 주제를 향해 퍼즐을 맞추어 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시조가 어렵다면 시도 어렵다. 의미를 응축해야하는 데에는 시나 시조나 다르지 않다. 최대의 효과를 얻기 위해 최소의 언어를 사용해야한다. 은유나 상징을 많이 쓰는 것도 그러한 속성 때문이다. 시조는 12개의 돌로 승부를 내야한다. 그 때문에 돌 하나 하나에 신중한 무게를 두지 않으면 안 된다.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숨기지 말고
그냥 네 하얀 생애 속에 뛰어 들어
따스한 겨울이 되고 싶다
천년 백설이 되고 싶다
-문정희의 「겨울 사랑」전문
만리 밖에 바람 보내고 서러운 건 보내고
내 뜨락빈 가지에 금지환을 끼우며
녹슨 문 열어 달라고 들어가고 싶다고
-김일연의 「새벽달」전문
문정희의「겨울 사랑」은 형식 없이 자유롭게 쓴 시이고 시조, 김일연의「새벽달」은 일정한 형식을 갖추어 쓴 시조이다. 느낌에는 별반 차이가 없다. 우리 고유의 운율로 쓴 것인지 아닌지의 차이 뿐이다. 자유시는 내재율로 시인 자신만의 운율이요, 시조는 외형율로 우리만의 고유 운율이다. 낭송해보면 맛이 확연히 달라진다. 시조의 음악성 때문이다.
문정희 시「겨울 사랑」을 연갈이 하거나 일부 음보를 빼거나 덧붙이면 바로 시조가 된다.
눈송이처럼/ ( )/ 너에게/ 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숨기지 말고/
그냥/
네 하얀 /
생애 속에 뛰어 들어/
천년 백설이/ 되고 싶다
( ) 에 한 단어만 넣으면 시조가 완성된다. 운율 습득을 위해 자유시를 자신만의 시조로 바꾸는 스스로의 창작 연습도 가능하다. 시와 시조는 넘나들 수 있는 것이지 문학적인 면에서는 구분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현대시도 시조와 비슷하거나 같은 것들이 더러 있다.
해와/ 하늘 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 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서정주의 「문둥이」전문
이 시를 시조라 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위 시는 완벽한 현대 시조이다.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버리 박사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 조지훈의 「승무」앞부분
종장의 첫소절이 ‘두 볼에’ 3음절, 둘째 소절 ‘ 흐르는 빛이’ 5음절로 이도 완벽한 시조이다. 시조는 우리의 호흡에 맞게 정제된 우리만의 일정한 운율이 있다. 선인들은 민요나 신라 향가, 고려 가요 등을 거쳐 오면서 여말에 3장 6구 12소절이라는 시조라는 우리 고유의 운율을 만들어 냈다.
초장 : 3ㆍ4 ∨4ㆍ4 ∣ ∣ : 장 표시
중장 : 3ㆍ4 ∨4ㆍ4 ∣ ∨ : 구표시
종장 : 3ㆍ5 ∨4ㆍ3 ∣ ㆍ : 소절(음보) 표시
아래는 시조 형식이나 음절수는 반드시 3ㆍ4, 4ㆍ4, 3ㆍ5, 4ㆍ3일 필요는 없다. 다만 종장의 첫소절은 3음절이고 둘째 소절은 5음절 이상이어야 한다. 이것은 불변이다. 나머지 소절들은 2음절에서 6,7음절도 가능하다. 소절의 음절수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얼마든지 음절에 신축성을 부여할 수 있다. 한글 특성 때문이다. 한글은 교착어(첨가어)로 어근에서의 어형 교체가 없고 어근에 접사가 붙어 단어의 기능을 나타내는 언어이다.
국어의 단어들은 2,3음절이 일반적이다. 여기에 기능에 따라 한 두 음절의 접사가 붙 어 한 소절(음보)을 이룬다. 그래서 시조는 한 소절에 3ㆍ4ㆍ3ㆍ4 같은 똑 같은 음절수 가 될 수 없다. 어근에 접사가 붙기 때문에 소절마다 신축성이 있을 수 밖에 없다. 그 래야 자연스럽다.
‘공부하다’가 ‘공부하겠다, 공부하고 있다, 공부하시려고 한다’ 에서의 ‘공부하’에 ‘-겠 다’,‘-고 있다’, ‘-시려고 한다’ 등의 다른 기능의 어미가 붙어 어형변화가 일어난다. 한 소절이 두 글자도 될 수 있고 다섯 글자, 일곱ㆍ여덟 글자도 될 수 있다. ‘3ㆍ4ㆍ3ㆍ4’ 의 고정된 음절수로는 이를 감당할 수 없다. 맞게는 쓸 수 있으나 그러면 기계적인 리 듬이 되어 부자연스럽다. 어근에 붙는 접사 때문에 시조는 오히려 시조다운 맛을 더해 주는 것이다. 시조의 3ㆍ4ㆍ3ㆍ4의 음수율에 맞출 수 없는 이유이다. 고시조도 이 음수 율에서 벗어난 것들이 대부분이다. 여기에 반드시 맞추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다. 이는 국어의 교착어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탓이다.
형식에 어떤 단어를 넣어야 시조의 맛을 낼 수 있을까. 시조는 12개의 소절(음보,단어)이 필요하다. 어떤 부품을 끼워 넣어야 구동이 잘 될까. 몇 차례 이 단어 저 단어를 끼워보고 빼도 보며 호환성이 되는지 검사가 필요하다. 하나의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퍼즐을 맞추어가는 과정이 있어야한다. 언어의 끊임없는 조탁이 필요한 이유이다. 45자 내외의 음절을 갖춘 12개의 돌로 소우주를 완성해가야 한다. 그래야 빛나는 별자리가 생긴다.
명품을 만든다는 것은 누구나가 어렵겠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명품을 만들 필요는 없다.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사대부를 비롯하여 중인, 일반 서민들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다 시조 한 수 지으면서 시조창을 즐기면서 생활해왔다. 시조는 예나 지금이나 대중적인 노래이지 시조 시인이나 지식인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일상 생활에서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일들을 형식에 맞게 쓰면 된다.
소쉬르는 언어 활동을 언어체(langue)와 발화체(parole)로 용어를 규정했다. 언어체는 사회적 측면으로 같은 언어 공동체 안에 속한 모든 개인들의 머리 속에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공통적인 문법적 체계이며 발화체는 개인적 행위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개별적 차원의 언어이다.
언어체는 언어 사용의 집단적 규칙 체계로 하나의 사회 제도이며 계약체계이다. 이는 개인이 마음대로 고치거나 창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공동 사회 성원들 간에 맺어진 일종의 집단적 규약이다. 이러한 규약을 습득하지 않고는 언어를 구사할 수 없다. 학습과 경험, 사회화를 거쳐야만 비로소 기호를 선택하고 통합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언어체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이면서 그들 각자의 안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다. 그러나 발화체는 선택과 실행의 개별 변용 행위이며 개인적이고 순간적이며 개별적 이다.
학교 교칙이 언어체라면 교내에서의 학생들의 활동은 발화체이다. 축구 규칙이 언어체라면 축구 경기의 전술들은 발화체이다. 단군 신화가 언어체라면 현대의 많은 소설들은 거기에서 변이된 하나의 발화체들이다.
언어체와 발화체는 서로 상호 의존 관계에 있다. 발화체의 존재 없이 언어체가 이루어지지 않으며 언어체를 바탕으로 하지 않고는 발화체가 형성되지 않는다.
문화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미역국을 먹었다’라고 말하면 한국 사람들은 입시에서 떨어진 것으로 인식하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은 진짜 미역국을 먹은 것으로 생각한다. 코드들이 밑받침이 되지 않고는 메시지를 작성하거나 해독할 수 없다. 코드는 언어체이고 메시지는 발화체이다. 개개인의 시나 시조 역시 발화체이다.
언어체는 집합체이나 규칙이 제한되어 있다. 그것을 토대로 해서 개인은 이를 다양하게 배합, 무궁무진한 메시지를 작성할 수 있다.
‘미역 감다’라고 한다면 몸을 씻는 것을 말한다. ‘미역국 먹다’라고 하면 미역을 넣어 국을 끊여먹는 것을 말하나 통속적으로는 시험에 떨어진 것을 말한다. 같은 단어들이지만 동사가 달라지니 ‘미역’의 뜻도 달라진다. 상황에 따라 은유나, 상징도 얼마든지 의미가 달라진다.
사람들은 발화체에서 ‘미역’의 원 뜻만을 말하지 않는다. ‘미역국 먹었느냐’하면 생일날을 말하기도, 해산 후 먹는 미역국을 의미하기도 한다. ‘미역국 먹고 생선 가시 내라’하면 불가능한 일을 우겨대는 것을 빗대기도 한다.
메시지 작성에 따라 같은 단어라도 그 단어가 뜻하는 내용은 전혀 다르다. 언급한 ‘미역’의 뜻이 메시지 작성에 따라 ‘몸을 씻는 것’이라든지, ‘시험’, ‘생일’ 외에 은유나 상징 등 서로 다른 의미로도 얼마든지 쓸 수 있다.
메시지 작성을 할 때에 어떤 것이 메시지에 가장 맞는 단어이고 구이고 절인가를 검토해 보아야한다.
‘미역국을 먹었다’하면 시험에 떨어지는 것을 말하지만 ‘된장국을 먹었다’하면 식사를 뜻하다. 메시지 ‘먹었다’에 명사인 ‘미역국’을 선택하느냐, ‘된장국’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전혀 달라진다.
어느 단어가 들어가야 메시지 작성에 가장 효율적인가를 꼼꼼하게 따져봐야 한다.
살구꽃 피는 마을 피는 꽃이 저리 곱다
피는 꽃 그 아래로 지는 꽃도 어여쁘다
목숨도 오가는 날이 저리 꽃길이고저
- 김상훈의 「행화촌」
위 시조에서 ‘살구꽃’ 대신 ‘복사꽃’으로 바꾸면 어울리지 않는다. ‘피는 꽃.’ ‘지는꽃’ 위치를 바꾸면 이도 또한 어울리지 않는다. ‘목숨’ 대신 ‘생사’라는 단어로 바꾸면 또 어떤가. 뉘앙스가 다르고 격도 떨어진다.
같은 계열체에서 어떤 단어를 선택해야하고 이를 어떻게 통합시켜야가야 하는 것인가가 관건이다. 이는 메시지 작성에 필연적으로 선택, 배열시켜야하는 문제이다. 이때 관습이나 문화가 개입하게 되어 선택과 결합이 자유스럽게 작성되는 것은 아니다. 메시지에 따라 서로 다른 계열체의 단어들이 서로 응집, 확산되기도 하고 긴장, 완화되기도 한다. 같은 계열체에서의 선택은 자유롭지만 결합하는 과정에서는 선택과 결합의 폭은 그만큼 좁아진다. 미적 측면을 고려해야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시의 운명이 갈리게 된다. 한 계열체에서의 시어는 다른 계열체의 시어에 따라 선택되기 때문에 메시지 작성이 쉽지만은 않다. 계열체 내의 시어의 선택들은 다른 계열체와의 수수관계로 무수한 또 다른 시어의 선택들을 요구받게 된다. 이런 작업들이 머리 속에서 계속 반복이 된다. 고도의 정신 세계가 필요한 이유이다. 시어 선택은 다른 시어 선택과의 치열한 전투이다.
메시지 작성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 않는다. 작가의 많은 노력과 땀이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구두를 새로 지어 딸에게 신겨주고
저만치 가는 양을 물그러미 바라본다
한 생애 사무치던 일도 저리 쉽게 가것네
- 「어느날」전문
시조는 전결이 종장에 있다. 아무렇지도 않은 초ㆍ중장이라도 종장에 가서는 반전이 일어난다. 새구두를 신겨 주고 저만치 가는 딸아이의 뒷모습을 물그러미 바라본다. 초ㆍ중장은 이렇게 평범한 일상의 일들이다. 한 생애 사무치던 일도 쉽게 간다니 갑자기 종장에 가서 의미가 뒤집어 진다. 한 생애 사무친 일들이 저런 사소한 것들이었나 생각하면 인생은 찰나의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것도 아닌 듯 살아온 삶이 이리도 허무한 것이다.
종장의 ‘한 생애’ 대신 ‘한 순간’으로 ‘사무치던’을 ‘고맙던’으로 ‘저리’ 대신 ‘이리’로 ‘쉽게’를 ‘어렵게’로 ‘가것네’를 ‘못가것네’로 바꾸어보면 의미가 어떻게 될까. 다양한 맛이 사라지기도 하고 생겨나기도 할 것이다. 몇 단어만 바꾸어도 천국과 지옥이다.
6. 청각, 시각, 촉각의 예
언어에는 마력이라는 것이 있어 언어로 소리를 낼 수 있고, 볼 수 있고, 질감을 나타낼 수도 있다. 모든 감각을 자신만의 독특한 이미지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우리가 바람 소리를 두고 당신에겐 그 소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들리고 있는가란 질 문을 받았을 때 망설이지 않고 즉각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 것 인가? 시인이 되자면 그런 질문에 대해서도 대답할 수 있는 소릴 찾아내어 그것을 언어 로 표현해야 할 것이다. 그 때의 그 소리에 대한 언어 표현을 청각적 이미지라 한다. 이 미지인 만큼 그것은 실재하는 소리가 아니라 시인의 상상의 공간에 떠오른 소리요, 따라 서 개성적으로 창작된 소리인 것이다. 좋은 시를 쓰기 위해서는 소리의 영역에 있어서도 이 처럼 개성적인 상상의 소리, 즉 뛰어난 청각적 이미지를 만드는 능력이 요구된다.
소리를 언어로 표현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보리 피리 소리를 ‘삘릴리 삘릴리’로, 뻐꾹새 소리를 ‘뻐꾹 뻐꾹’ 과 같이 소리를 직접 모방하는 방식이 있고,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같이’, ‘분수 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같은 비유적인 방식들이 있다.
후렴이다 너의 노래는 열정 끝에 부르고 싶은
마지막 박수 갈채가 낙엽으로 쏟아지는 숲
무대를 떠나기 전 잠시 뜨거운 흐느낌이다
-김영수의 「만추」전문
‘마지막 박수 갈채가 낙엽으로 쏟아지는 숲’에서 ‘우수수 지는 낙엽’을 마지막 ‘박수 갈채로 쏟아진다’고 했다. 낙엽은 누구든 ’우수수‘ 떨어진다고 표현한다. 이것은 소리를 모방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시인은 자신만의 언어로 우수수 지는 낙엽을 마지막 갈채로 쏟아진다고 표현했다. 이것은 소리를 비유하는 방식이다. 이런 비유가 독자들의 가슴을 울리게 만든다. 같은 소리를 갖고도 사람마다 다르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개성적이고 독창적인 언어로 표현해야하는 것이 시를 쓰는 이유이다.
시각적 이미지 중에는 현실의 공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추상적 관념에 모양과 색깔을 부여하여 그것을 구체화시킨 것도 있다. 그리고 같은 감각이라도 모양이나 색깔을 가질 리 없는 감각적 지각을 눈으로 볼 수 있게 바꾸어 놓은 것도 있다. 말하자면 보이지 않 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요술사와 같은 일을 해내는 것이다. ‘시인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 는 사람’ 이란 말이 있다. 모양이나 색깔을 갖지 않은 대상에 모양과 색깔을 부여한 어떤 종류의 시각적 이미지는 그 말을 피부로 실감할 수 있게 해준다.
구체적인 어떤 사물을 시각화하기도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추상적인 관념을 시각화하기도 한다. 시각적 이미지로 바꾸는 것이다.
사물이나 관념은 단어 자체로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이것을 시각적 이미지로 변환시켜야 비로소 그것들이 어떤 것인가를 볼 수 있다. ‘꽃’ 이란 단어를 ‘아침에 피는 꽃’이나 ‘아침 마당가에 피는 꽃’ 으로 표현하면 보이지 않던 꽃이 좀 더 선명하게 보인다. ‘아침’이라는 시간과 ‘마당’이라는 공간을 제시해줌으로써 꽃의 의미가 독자들에게 친근감 있게 전달되는 것이다.
덫에 채인 짐승 한 마리
목이 조이어 막 숨이 꺼져 갈 무렵
어딘가 한 송이 꽃이 벼랑 끝에 피고 있다
-이정환의 「묵시록」셋째수
위「묵시록」은 현실 공간에 존재하지 않는 추상적 관념이다. 이를 ‘어딘가 한 송이 꽃이 벼랑 끝에 피고 있다’고 시각화하여 표현하고 있다. 추상적 관념인 ‘묵시록’을 구체적 사물인 ‘한송이 꽃’으로 바꾸었다. 이렇게 시각화시킴으로서 비로소 묵시록은 또 하나의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다.
시각, 청각을 이미지로 표현한다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이것은 개성적이고도 독특한 이미지이어야 한다. 그래야 누구에게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먼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김광균의 「설야」일부
시「설야」의 ‘먼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는 세 개의 이미지가 결합되어 있다. ‘밤에 내리는 눈’을 설야라고 한다. 밤에 내리는 눈은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시인은 소리 없이 내리는 눈을 먼 데서 여인의 옷 벗는 소리라고 했다.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들리는 소리로 표현한 것이다. 물론 시인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소리이다. 시인은 ‘소리가 들리지 않는 밤의 눈’을 객관적 상관물인 ‘먼 데서 여인의 옷 벗는 소리’인 청각적 이미지로 창조해냈다.
여인은 외투가 아닌 비칠 듯 말 듯 실크를 걸쳤을 것이다. 하얀 살결, 아름다운 얼굴, 날씬한 몸매를 갖고 있을 것이다. 고전적 기품보다는 서양식의 에로틱한 우아한 여인이었을 것이다. 그런 여인이 한 밤중에 옷을 가까이서 벗는 것이 아니라 먼 데서 옷을 벗는 것이다. 그 누구도 먼 데서 옷 벗는 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 소리 없이 내리는, 들을 수 없는 설야를 이렇게 소리 없는 소리로 표현한 것이다. 이것이 시이다.
청각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위 구절은 질감의 이미지까지 만들어내고 있다. 옷이 무슨 옷인지 말은 하지 않아도 두꺼운 옷이 아님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살결이 비칠 듯 말 듯 이 여인은 부드러운 실크를 걸쳤을 것이다.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렇게 언어는 질감에까지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내고 있다. 다만 질감의 이미지를 행간 깊숙이 숨겨놓았을 뿐이다. 언어의 마력은 이런 것이다.
또한 ‘먼 데서’ 라는 말에서 시각적 이미지까지 얻어내고 있다. 몇 글자를 갖고 청각, 촉각, 시각까지 공감각적 이미지를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들을 수 없는 것을 들을 수 있게 만들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게 만들고, 만질 수 없는 것을 만질 수 있게 만들어주고 있다.
내 어느날 그대 향한 바람이고 싶어라
울 넘어 물 넘어 뫼라도 불러 넘어
그 가슴 들이받고는 뼈부러질 그런 바람
-문무학의 「바람」전문
‘그 가슴 /들이 받고는/ 뼈부러질 그런 바람’, 이 구절을 자세히 읽어보면 이도 3가지 이미지가 복합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바람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시인은 가슴을 들이 받을 때 바람에도 뼈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들이 받음으로써 뼈의 실체가 드러난다. 들이받음으로써 보이지 않는 뼈가 드러나고, 뼈 부러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아픔까지 느낄 수 있다. 시각 이미지는 드러내놓고 청각, 촉각 이미지는 깊숙이 숨겨두었다. 이미지가 반드시 겉으로 드러내어 이미지화시키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시각, 청각, 촉각 이미지를 생략하고서라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면 이것이 오히려 창작의 고도한 전략, 전술일 수 있다.
7. 소절과 음절, 율독
시조는 3장 6구 12소절이다. 각 장 4소절이다. 소절에는 음절수가 각각 다른 결음절과 과음절이 있다. 장음과 정음, 휴지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이는 율독과 함께 시조 창작에 매우 중요한 요소들이다.
어저 내일이여 그릴 줄 몰랐던가
있으라 하더면 가랴마는 제 구태어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황진이 시조
위 시조 중 초장만 표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
○―○∧∨ ○○○○ ∨ ○○○∧∨ ○○○○∥
1 2 3 4
A B
― : 장음
∧ : 정음
1=2, 3=4, A=B, 등시성
∨: 중간휴지
∥ : 장(행)말휴지
장음은 음의 길어짐을 말한다. 한 소절에서 4음절을 기준으로 할 때 두 음절을 똑같이 장음으로 낼 수 없다. 부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언어학상으로는 단음인데 사안에 따라서는 장음으로 발음해야할 경우가 있다.
정음은 단음절로 정지되는 음을 말한다. 대신 이 음절 끝에는 대상 휴지인 정음으로 보상 되어야한다. 중간 휴지나 장(행)말 휴지 앞에서는 정음으로 실현된다. 위 시조 초장의 첫소절 ‘어저’ 2음절이 결음절이다. 앞에 음절 ‘어―’는 장음으로 실현되고 뒤의 음절 ‘져∧’는 정음으로 실현된다. 장음과 정음의 실현은 한 소절에 같은 양으로 보상해 주어야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앞 음절은 같은 시간, 뒤 음절은 정음, 즉 대상 휴지로 결음절을 보충해주고 있다.
결음절=장음(―), 정음(∧)으로 실현
중간 휴지∨는 한 장에서 소절과 소절, 구와 구 사이의 머뭇거림이다. 즉 약한 휴지이다. 이는 행말 휴지∥와는 다르다. 이 중간 휴지는 소절과 소절, 구와 구 사이에 일어나기 때문에 의미상으로 약간의 머뭇거림이 생기게 된다. 우리 시가의 생리적 현상 때문이다. 장말 휴지는 일단락의 의미가 끝나는 행 끝에 생기는 휴지이다.
시조는 각 장이 4소절로 반복되며 소절들은 같은 시간의 양을 갖고 있다. 음절수에 관계없이 같은 시간으로 처리해야한다. 이를 등시성이라고 한다.
등시성 =소절의 같은 양의 시간
결음절인 경우는 장음이나 정음으로 보충해주어야 한다. 장음과 정음은 무질서하게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원칙이 있다. 결음절인 경우에는 장음․정음 중 어느 하나가 실현된다. 3음절의 경우는 뒤의 것이 정음으로 실현된다. 위 시조의 초장 셋째 소절의 3음절인 ‘그릴 줄’에서 끝 음절 ‘줄∧’이 정음으로 실현된다. 그렇게 되면 3음절이 4음절의 양을 갖게 되어 같은 시간의 소절로 처리된다. 또한 2개 이상의 장음이나 정음은 한 소절 내에서는 실현되지 않는다. 1음보 ‘어저’의 ‘어’나 ‘저’가 ‘어―저―’, ‘어∧저∧’로는 실현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말의 생리적 현상 때문이다.
시조 종장의 둘째 소절은 과음절이다.
○○○∧∨ ○○○○○∨ ○○○○∨ ○○○∧∥
보내고 그리는정은 나도몰라 하노라
시조의 각 소절의 4음절을 표준으로 해 5음절인 과음절은 4음절의 시간의 양에 맞춰 율독하면 된다. 5음절을 등시성에 의해 4음절 발음 길이만큼 발음해주면 된다. 또 하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종장의 이 부분은 특별한 경우로 생각해 율독해주는 방법이다. 의미의 반전이 일어나는 곳이기 때문이다.
시조는 초․중장이 같은 소절로 반복된다. 종장은 첫소절은 3음절이고 둘째 소절은 5음절 이상으로 초․중장과는 다르다. 초․중장이 내내 같은 양의 소절로 진행되다가 종장의 둘째 소절에서 갑자기 길어지다 셋째, 넷째 소절에서 다시 원래의 소절로 되돌아간다.
정완영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이가 든 사람이면 누구나가 다 알겠거니와 옛날 밤을 새워가면서 잣던 할머니의 물레질,한 번 뽑고(초장), 두 번 뽑고(중장),세 번째는 어깨너머로 휘끈 실을 뽑아 넘겨 두루룩 꼬투마리에 힘껏 감아주던(종장) 것, 이것이 바로 다름 아닌 초․중․종장의 3 장으로 된 우리 시조의 내재율이다. 이만하면 초장․중장이 모두 3,4,3,4인데 왜 하필 이면 종장만이 3,5,4,3인가. 그 연유를 알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이런 시조적인 3장 의 내재율은 비단 물레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생활 백만에 걸쳐 편재해 있는 것이다.
설 다음날부터 대보름까지의 마을을 누비던 걸립(乞粒)놀이의 자진마치에도 숨어있 고, 오뉴월 보리타작마당 도리깨질에도 숨어있고, 우리 어머니 우리 누님들의 다듬이 장단에도 숨어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모든 습속, 모든 행동거지에도, 희비 애락에도 단조로움이 아니라 가다가는 어김없이 감아넘기는 승무의 소매자락 같은 굴 곡이 숨어있다는 사실이다.
정완영은 시조 종장의 반전을 우리 민족의 습속에서 찾고 있다. 종장의 둘째 소절은 초․중장과는 달리 별도의 양으로 처리해도 좋을 듯 싶다. 의미상으로도 초장은 시상을 일으키는 장이요, 중장은 시상을 전개시키는 장이며, 종장은 초․중장의 의미를 반전시켜 마무리하는 장이다. 이 종장에서 초․중장과 같은 단조로운 소절의 길이로는 그 반전의 의미를 감당하기가 쉽지 않다. 종장의 첫소절이 반드시 3음절이어야하는 이유도 이와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종장의 둘째 소절이 과음절이기 때문에 종장의 첫째 소절이 결음절이어야 물리적으로 두 소절 합의 총량이 맞게 된다.
활화산 단풍 숲에 남모르게 덫을 놓아
너와 나 생살 찢겨 붉디붉게 물든다해도
마지막 눈매 그윽한 한쌍 사슴이고 싶어
-윤현자의 「사랑」전문
초장 3․4․4․4
중장 2․1․4․9
종장 3․5․2․6
위 시조는 소절마다 음절의 폭이 매우 심하다. 초장에서의 첫소절 ‘활화산’은 ‘활화산∧’으로 율독된다. 결음절이 ‘산’의 정음으로 실현된다. 둘째 소절 ‘단풍 숲에’, 셋째 소절 ‘남모르게’, 넷째 소절 ‘덫을 놓아’ 에서는 장음과 정음은 실현되지 않는다. 기준 4 음절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장이 문제이다. 중장은 1음절에서 9음절까지 걸쳐있다.
중장의 첫소절 ‘너와’는 ‘너와―∧’, 장음과 정음으로 실현된다. 장음과 정음이 연속적으로 실현될 때는 장음이 앞선다.
둘째 소절 ‘나’는 ‘나―∧∨∨’, 장음, 정음, 휴지, 휴지로 나타나게 된다. 음절이 하나이고 두 개 이상의 장음이나 정음이 한 소절 내에서 실현될 수 없기 때문에 긴 휴지로 나타나게 된다. 문제는 중장의 넷째 소절 9음절의 과음절이다. 4음절을 기준으로 할 때 5음절이나 남게 된다. 종장의 둘째 소절도 아니고, 별도 취급 사항도 아니므로 등시성의 원리에 의해 4음절 기준의 소절과 같은 시간으로 율독해야한다. 그러자니 빨리 발음할 수밖에 없다.
시조는 한 소절에서 3, 4 음절만으로 고정되어야할 필요는 없다. 음절에 관계없이 같은 시간의 덩어리로 인식하면 된다. 한 소절에서 결음절, 과음절이라 해도 같은 시간에 율독하면 되는 것이다. 지나친 과음절이 자연스러운 율독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된다.
중장의 ‘너와 나’를 한 소절로 처리해도 되겠지만 ‘너와 나’를 두 소절로 분리해도 별 문제는 없을 것 같다. 이럴 경우 너와 나를 서로 다른 개체로서의 의미가 부여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붉디 붉게 물든다 해도’를 두 소절로 처리해도 좋을 것을 굳이 하나의 소절로 처리했다. 독자들에게 최적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시인 의 전략적인 배치라고도 볼 수 있다. 지나친 과음절은 율독이 자연스럽지 못하기 때문에 주의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종장의 셋째 소절 ‘한쌍’은 중장의 첫소절처럼 ‘한쌍―∧’ , 장음, 정음으로 실현된다. 넷째 소절의 ‘사슴이고 싶어’ 의 6음절은 4음절의 시간의 양만큼 율독하면 된다.
위 시조는 음절수에 있어서 파격이 심하기는 하지만 이는 자신의 메시지를 최적하게 전달하기 위한 조치로 이해할 수도 있다.
1자와 9자는 분명 같은 양의 음절수는 아니다. 그런데도 1자와 9자는 적어도 위 시조에서는 같은 양의 소절로 처리되고 있다. 현대시조에서 시조의 내용에 보다 더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보니 이런 결ㆍ과음절들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시조의 전통적인 율독이 필요한 이유이다.
시조를 창작하다보면 한 소절에 음절수를 어느 정도 허용해야하는가가 문제될 수 있다. 음절수가 줄거나 늘어난다 해도 등시성에 따라 자연스럽게 율독되는지 우선 검토해 보아야한다. 한 소절 내에 음절수의 허용치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3․ 4음절 정도가 적당하나 이를 천편일률적으로의 적용은 율독의 경직성으로 인해 의미나 가락의 여유와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어 위험하다.
1음보에 물론 1글자도 좋고 7․8․9 글자도 좋다. 그러나 호흡이나 의미나 문맥 관계, 율독의 시간성 등을 고려해서 부자연스럽지 않아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3장의 각 장 4소절을 염두에 두고 소절에 나름대로의 신축성 있는 음절 배치를 해야한다.
시조의 형식은 음절수의 고정을 요구하지 않는다. 일정한 형식 속에서 음절수의 자유로움을 요구한다. 소절마다 음절수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음절수를 자유롭게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시조는 3장 6구 12소절이어야한다. 음절에 다소의 변화가 있다하더라고 이를 끌고 갈 수 있는 자연스러운 율독이 있어야 의미와 함께 시조의 음악성을 살릴 수 있다. 율독은 시조창작에 있어서 의미 못지않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내용 못지 않게 율독이라는 음악성이 형식 속에 녹아 있어야한다는 얘기이다.
시조=내용+율독(음악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