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은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
ㅇ공식어 : 베트남어
ㅇ인구 : 98,858,950명(2023년 추계)
ㅇ인구밀도 : 291명/㎢
ㅇ종교 : 불교(70%), 로마가톨릭(10%)
ㅇ국화 : 연꽃
ㅇ면적 : 331,210.0㎢
ㅇ기후 : 열대몬순기후
ㅇ여행경보여행유의 : 전 지역
ㅇ아시아의 국가.
ㅇ수도 : 하노이
ㅇ화폐 단위 : 동
국민의 대부분이 베트남 족으로
80%가 불교를 믿는다.
중국, 라오스·캄보디아, 타이 만,
통킨 만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세계 최대의 인구과밀 국가 중
하나다.
북부는 아열대성 기후이고
남부는 열대 몬순 기후이다.
베트남이라는 나라를 이야기할
때마다, 긴 생머리에 야자수 잎을
엮어 만든 베트남 전통 모자인
‘논(non)’을 쓴 긴 생머리의 소녀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세계 4대 뮤지컬 중 하나인
‘미스 사이공’ 때문인지 아니면
월남전을 다룬 영화를 너무 많이
본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애절한
표정을 짓고 서 있는 베트남
소녀의 이미지는 사라지질
않는다.
오래된 역사는 기억 속에서
가물거리지만, 역사로 이어지는
사건마다 지닌 인상이나 고정
관념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식민지와 월남전이라는 비극을
겪은 베트남은 우리와 동병상련인
나라다.
하지만 일본의 오랜 지배와
6·25 전쟁을 경험한 우리보다 더
불운한 역사를 간직한 나라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베트남은 1859년부터 1954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막을
내릴 때까지 거의 100년에
달하는 긴 세월을 프랑스 식민
통치 아래 있었다.
프랑스와 붙은 제1차 전쟁은
한층 더 비참한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인 월남전으로 이어졌다.
처절하게 실패한 월남전은
십 몇 년 동안 아무 의미도
가치도 없이, 대량학살과
고엽제 증후군 환자 그리고
보트 피플(boat people)만을
만들어냈다.
정당성을 상실한 전쟁이었기에
미국 정부는 여론의 거센 비난을
받았고 세계 도처에서 반전운동이
일어나면서 온 세상이 정치·경제적
혼란에 빠졌다.
전쟁이 끝난 인도차이나 반도
또한 걷잡을 수 없는 상태였다.
공산주의와 민족주의를 지향한
북베트남이 승리를 거두자,
남베트남의 반공인사와 고위
간부, 중국계 화교 위주의 부유층
등 수없이 많은 사람이 공산당의
강제수용과 재산몰수 같은 핍박을
받게 되었다.
이들은 혼돈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남고자 탈출을 감행하게 되고,
망명도 도피도 아닌 단지 생존을
위한 탈출은 전쟁이 끝나고 통일
이 된 후인 1980년 중반까지
계속되었다.
라오스와 캄보디아마저 공산화가
되다보니, 바다와 근접해 있는
캄보디아 사람들까지도 보트
피플에 동참하게 되었다.
월남전으로 생겨난 보트 피플의
수는 대략 150만 명 정도로 추정
하는데, 중도에 질병이나 영양실조,
배의 전폭과 해적들의 납치 등으로
사망하거나 실종한 사람들을 빼면
3분의 2 정도만 탈출에 성공해 이민
생활을 하고 있다.
그 당시 보트 피플의 생존을 위한
애절한 도움 요청과 타국에서의
고달픈 삶은 지켜보는 모든 이의
심금을 울렸다.
베트남 음식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보트
피플이 있었기에 우리는 포(Pho)를
즐길 기회를 누리게 되었다.
포는 세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베트남 음식으로 고기 육수에
쌀국수를 넣어 먹는 누들 수프
(noodle soup)다.
1970년 이후 포는 그 지역에
정착한 베트남 보트 피플들이
미국과 캐나다에 소개했는데,
특히 해안에 위치한 대도시에서
인기를 끌었다.
1980년대부터는
오스트레일리아에 베트남
이민자들이 급증하면서
시드니나 멜버른, 캔버라
등지에 포를 판매하는 식당들이
생겨나고 인기도 점점 많아졌다.
포가 대중의 사랑을 받자
1980년대 중반부터 체계적인
시스템을 도입한 포 식당
프랜차이즈 브랜드들이 속속
등장해 세계 각국으로 진출했다.
글로벌 기업뿐만 아니라 나라
별로 새로운 브랜드 역시 계속
해서 쏟아져 나오고 있다.
포가 타지에서 사랑받을 수
있는 비결은 저렴한 가격과 빠른
서비스, 근면 성실한 베트남
사람들의 생활 태도, 전통 조리법
으로 맛을 내 건강에 신경 쓴
덕분이다.
요즘에는 포의 맛이 미국화
되거나 평준화되어 그 특성을
잃어버린 프랜차이즈 체인점도
많지만, 아직도 곳곳에는 고향의
향수를 담아내는 개인 소유 포
식당들이 숨어 있다.
베트남 본토에서 포는 역사가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다.
요리 학계의 의견에 따르면 100년
정도로 본다. 포는 매우 서민적인
음식이었기 때문에 주로 시장 한
모퉁이나 길거리 노점에서 팔았다.
그러다가 1920년경에 하노이
에서 처음 포를 전문적으로 파는
식당이 문을 열었다.
포는 북부 지역에서 시작해
현재는 베트남 전체로 퍼졌는데,
거의 매일 쉽게 즐기는 친숙한
서민 음식으로 지역마다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포가 남부 지방까지 전파되어
국민 음식으로 자리 잡는 데는
30년 이상이 걸렸다.
가장 기본적이며 전통적인 포는
소뼈와 양지에 계피, 정향, 생강,
팔각, 고수 씨 등 여러 향신료를
넣고 장시간 우려낸 육수를
사용한다. 이 육수에 지역마다
각기 다른 재료들을 고명으로
얹거나 색다른 재료로 조금씩
변형해 오늘날 다양한 포를
만들었다.
요즘에는 소고기 육수 이외에
닭이나 해산물을 우린 국물로도
포를 만든다.
원조인 북부에서는 넓게 뽑은
쌀국수를 사용하고 쪽파를 넣어
기본 육수에 말아 먹지만,
남부에서는 폭이 다소 좁은
쌀국수를 선호하며 숙주, 라임,
허브 등을 첨가해서 먹는다.
호이신(hoisin)이라는 고구마
와 쌀, 고추 등을 넣고 만든 장은
원래 남부 지역에서 즐겼는데,
지금은 포를 먹을 때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소스가 되었다.
쌀국수가 들어간 고기 국물에
숙주, 채 썬 양파 또는 쪽파, 다진
고추를 적당히 넣고 잘 섞은
다음, 라임을 짜서 시큼한 맛을
더한 뒤 호이신 소스나 칠리
소스를 첨가해 매운맛을 조절해
먹는 것이 포를 즐기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다.
향이 강하고 독특한 고수에
거부감이 없다면 고수를 듬뿍
넣어 베트남의 향취에 흠뻑
취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역사가 그리 길지는 않지만
보트 피플이 전 세계로 전파한
포는 쌀을 이용해 만든 탕면이다.
베트남은 쌀의 나라답게 포
이외에도 쌀을 이용해 만든
음식이 무척 많다.
쌀 생산과 소비가 많은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는 대부분 쌀을
주식으로 삼지만 베트남만큼 쌀
요리가 다양하게 발달한 곳도
별로 없다.
1년에 2모작을 할 수 있는 고온
다습한 기후 덕에 비교적 쌀이
많은 데다 쌀을 매우 중시하는
중국의 영향도 받았다.
프랑스 식민지가 되기 전에
1,000년 동안 중국의 지배를
받았으니 인도 요리의 영향을
받은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와
다른 양상의 음식 문화를 보인다.
또 음식 문화가 도교에서 비롯된
음양오행을 바탕으로 하고
음양오행의 조화를 중시한다는
점을 봐도 중국의 영향이 뿌리
깊게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화교들이 많이 살고 있는 베트남
남부에서는 쌀로 만든 요리가
더욱 발달했다. 화교들은 대부분
중국 남부의 차오저우 출신이다.
차오저우(Chaozhou, Teochew,
조주)는 광둥성 동쪽 끝, 푸젠성과
접경을 이루는 곳에 위치한 해안
지역으로, 쌀 곡창지여서 쌀을
소재로 한 요리가 다양하다.
쌀을 이용해 피를 만드는 딤섬이나
차오저우 만두는 상당히 유명하다.
차오저우 사람들은
중국 디아스포라 시기에
동남아시아로 많이 이주했는데,
특히 싱가포르와 태국 그리고
베트남 남부에 정착해 살고 있다.
국수는 밀로 만든 것보다
쌀국수를 선호하는 편이며,
탕면 이외에 볶음면이나 비빔면
으로도 먹고, 볶음밥이나 덮밥,
죽 종류도 많다.
만두나 부침개 같은 팬케이크를
요리할 때도 쌀가루로 만들며,
‘라이스페이퍼(rice paper)’로
잘 알려진 반 짱(Banh Trang
Cuon)이나 우리나라 쌀 과자
같은 라이스 크래커를 만들 때도
사용한다.
우리나라와 일본, 중국 북동부에서
즐기는 작고 통통하며 점성이 많은
자포니카(Japonica)종 쌀과 달리
베트남은 길고 얇으며 무게가 가벼운
인디카(Indica)종인 안남미가 주를
이루지만, 찹쌀로도 요리를 해서
먹는다.
코코넛 우유에 찹쌀을 넣어 밥을
지어 먹거나 돼지고기와 녹두를
넣고 바나나잎에 싸서 쪄 먹기도
한다.
우리의 떡처럼 찹쌀로 만든
디저트도 많다. 하지만 베트남
사람들은 거의 매일 우리나라와
매우 흡사한 밥과 국, 야채나
고기로 만든 여러 가지 반찬으로
식사를 한다.
고추, 마늘 등을 넣은 피시 소스
또는 간장은 김치처럼 빠지지
않고 식탁에 오른다.
베트남 음식이 기본적으로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발전했지만
100년 가까이 통치한 프랑스의
영향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베트남의 조리 기술은 서양에서
가장 뛰어난 요리 세계를 자랑
하는 프랑스의 식민지배 아래에서
발달할 수 있었으며 음식 문화를
여유롭게 즐기는 자세를 갖추게
되었다.
프랑스는 베트남뿐만 아니라
인도차이나 반도의 캄보디아와
라오스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기
에 세 나라 어디를 가든 바게트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바게트는 그냥 먹기도 하지만,
대체로 바게트 안에 파테(paté)
나 햄, 계란, 절인 야채 등을 넣어
즐기는 편이며, 간장이나 고수 등
베트남 고유의 재료를 첨가하기도
한다.
결결이 얇게 벗겨지는
페이스트리는 물론 닭이나
돼지고기로 속을 채운 파이와
달콤한 커스터드 타르트인
플란(Flan) 역시 프랑스 식민의
산물이다.
인도차이나 반도에서는 아침
식사나 간단한 점심으로 바게트
샌드위치와 커피를 즐기는 사람
들의 모습을 일상적으로 볼 수
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수프이자
프렌치 소스의 기본이 되는
콩소메(Consommé)가 포의
육수를 만드는 기술을 이끌어
냈다는 설도 있는데,
그만큼 프랑스 음식 문화가
베트남에 암암리에 영향을
크게 주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동서양의 음식 문화를 대표하는
중국과 프랑스 두 쌍두마차가
베트남의 음식 문화를 이끌었다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이렇게 중국과 프랑스의 오랜
식민 통치와 잊을 수 없는 잔혹한
월남전을 겪은 베트남 사람들이
모질게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그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고 힘을 불어넣어주는 포 한
그릇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매일 접하는 밥은 지겨운 일상
이지만, 가끔 즐기는 포는 기쁨의
맛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베트남 사람들의 포 사랑은
남다르다.
이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북미 지역으로 간신히 건너가
정착한 보트 피플조차도 향수를
달래며 포를 만들어 먹었고,
이로써 포가 베트남을 대표하는
전통 음식에서 세계적인 요리로
거듭날 수 있게 되었다.
타국에서 살아야 하는 이민자
들에게 큰 위안이 되는 것 중
하나는 바로 고향 음식이다.
하물며 고달픈 생활을 하면서
어렵사리 정착해야만 했던 보트
피플은 일반 이민자들보다 훨씬
더 애끓는 서러움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대다수 이민자는 힘든 타향
살이를 견디면서 삶에 원동력
이 되는 추억의 음식을 간직
한다. 그 원동력이 때로는 새로운
음식을 다른 세상에 전하기도
한다.
이렇게 다른 세계에 소개된
음식들 중 포는 상당히 성공한
편이다.
과욕으로 비참하게 끝난 전쟁
에서 미국은 국제적 오명과 더불어
베트남 포의 침략을 받은 셈이다.
고대 그리스의
극작가 메난드로스는
“역경은 희망으로 극복된다”
라고 말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희망의 끈을
연결해주는 추억의 음식이
있다면 어려움은 반드시 이겨
낼 수 있을 것이다.
베트남의 역사와 음식문화를
우리가 여행중 식사를 했던
메뉴의 기억들을 더듬어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