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계신 병원에 들러 상태를 확인한 후, 사무실에 들어왔다. 밀려 있는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컴퓨터 앞에 앉았으나, 집중이 되질 않는다. 술 생각이 나는 밤이다.
갑자기 내 인생에 끼어든 라희.
아니다. 어쩌면 유년시절부터 끼어들었는지도.
그녀로 인해 나조차 몰랐던 내 삶의 충격적인 면을 확인해서 비참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오늘 몰라보게 좋아진 엄마의 혈색처럼 뭔가 좋은 일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현 상태로 라면 라희는 앞으로도 더욱 깊이 내 삶에 개입하게 되겠지. 목적을 달성하기 전까지는 절대 내 곁을 떠날 친구가 아니니까. 그녀가 목숨처럼 집착하는 슈빌라이칸, 그에 대한 소명의식과 신념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관계설정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고민이다.
라희는 고등학교 졸업 후 어떤 인생을 살아왔을까? 난데없는 초능력은 또 뭐고?
어렸을 적에는 별 이상 징후가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만약 있었다면 시골마을의 특성상 모를 수가 없다.
뜬금없는 육체단련!
약속을 해버렸으니 이를 어쩐다? 지키긴 해야 할 텐데. 자가 치료기능이 정말 있는지 확인도 해볼 겸.
그렇지만 생각할수록 난감하게 다가온다. 대체 어디에 가서 두들겨 맞을지. 아무데나 무작정 찾아가서 ‘나 좀 때려줘요.’ 할 수도 없는 노릇인데.
세상천지에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그리고 자가 치료기능!
사실, 웃기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하다. 어느새 만화 속 캐릭터가 되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만약 자가 치료기능의 사실여부가 밝혀진 후에 나에게 그 기능이 있다는 점이 알려지기라도 하면, 전 세계 생물학계에서 난리가 날 것이다.
*
다음날, 저녁시간이 끝날 무렵.
사무실 아래층에 있는 ‘00킥복싱클럽’에 갔다. 이곳을 첫 번째로 선택한 이유는 가깝기도 하고, 관장과 엘리베이터에서 몇 번 인사한 기억이 있어서다.
안으로 들어가니 운동 하는 사람들 예닐곱 명이 눈에 띄었다.
-퍽퍽 퍽!
-휘이잉, 휘이잉!
땀을 뻘뻘 흘리며 천장에 매달린 노란색 샌드백을 치는 사람, 링 위에서 섀도복싱을 하는 사람, 요란한 소리를 내며 줄넘기를 하는 사람 등등 체육시설 특유의 역동감이 잘 느껴졌다.
남자라면 한번쯤 접해볼 만한 곳이다. 나도 스포츠를 종류 가리지 않고 좋아하는 편이다. 물론 보는 것만 그렇다. 하지만 이런 곳에 직접 와본 건 오늘이 처음이다.
잠시 서서 구경하고 있는데, 짧은 스포츠머리에 늠름한 체구를 지닌 관장이 나를 알아봤다. 50대로 접어드는 나이. 소문으로는 젊었을 때 복싱미들급 세계챔피언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어, 4층? 맨발의 영웅?”
“아, 네.”
“영상 봤어요, 봤습니다. 아이구, 좋은 일 하셨네.”
“제가 한 일이 아니에요.”
물어볼 때마다 습관적으로 튀어나오는 말을 나로서도 어찌할 수가 없다.
“허허허! 겸손할 필요 없어요. 근데 말이요. 몸이 그렇게 빠를 수 있나 내 눈을 의심했어요. 겉보기에는 공부만 주구장창 했을 것 같은데. 언제 운동 좀 했어요?”
관장이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의심에 찬 눈빛으로 물었다.
“잘 보셨어요. 저는 운동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관장이 고개를 한번 갸웃거렸다.
“음...그래요? 이상하네. 타고난 순발력이 있나? 그런 그렇고 여긴 어쩐 일이요? 운동하러 온 거 같지는 않고.”
“어, 그게...”
일단 부딪쳐보자는 마음으로 들어오긴 했으나, 막상 용건을 말하려고 하니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왜 그래요? 뭔 일 있어요?”
“그런 건 아니구요. 저...관장님과...스파링을 해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스파링? 나하고?”
예상한 대로 깜짝 놀라는 눈치다. 되게 어이없어 하는 웃음을 띠며.
“네.”
“아이고, 허허허!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요?”
한바탕 큰 목소리로 웃었다. 관장입장에서는 아마도 초등학생 정도 되는 아이가 도전장을 내미는 격이랄까. 그래서 정색하며 거절하기도 뭐 해서 농담으로 받아쳤겠지만.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이런 체육관을 운영하다 보면 아주 가끔 겁도 없이 스파링을 하자는 사람들이 있긴 합니다. 물론 대부분이 술 취한 놈들이거나 불량배들이지만. 말 나온 김에 한번 배워 볼래요? 내가 복싱 가르쳐드릴게.”
“아닙니다. 제가 원하는 건 스파링입니다.”
“거, 안된다니까.”
말투도 표정도 일순간 싹 바뀌었다.
“다칠까봐 걱정이 돼서 그러는 거면 괜찮습니다. 관장님! 절대 뒤탈 없습니다.”
“아니, 왜 스파링이 하고 싶어요? 운동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면서.”
“운동을 해보진 않았지만 제가 맷집은 센 편이거든요. 얼마나 센지 실험해 보고 싶습니다.”
이게 내가 준비한 멘트였다. 관장입장에서야 당돌하게 들렸을 터.
“맷집? 그러니까 맞고 싶다는 얘기잖아. 허허허허! 이거, 보기보다 재밌는 친구네.”
“제가 만약 다운돼서 못 일어나면 그때 1년 치 회비를 일시불로 내겠습니다. 정말입니다.”
“괜히 호기부렸다가 크게 다쳐요. 내가 은퇴한지는 좀 됐지만서도 웬만한 선수들은 지금도 거뜬하게 상대해 줄 수 있는데. 링 위에 올라가면 우리는 봐주는 게 없거든.”
“괜찮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못 믿으시겠다면 각서라도 써드릴까요?”
“각서는 무슨...됐고, 정 그렇게 하고 싶으면 저기 저 친구하고 먼저 해봐요.”
관장이 가리키는 이는 링 위에서 섀도복싱과 발차기를 연습하며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사람이었다. 180cm 정도 되는 키에 딴딴한 근육과 긴 팔다리. 킥복싱을 모르는 내가 봐도 출중한 실력을 갖춘 듯.
“애야! 이리 와봐라.”
애? 나이가 어린다는 뜻인데.
헤드기어를 착용하고 있어서 겉으로 보기에는 고등학생인지 성인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저 녀석이 올해 고등학교 3학년인데, 이번에 킥복싱전국대회에 출전합니다. 실력이 아주 좋아요. 우승후보죠. 어때요? 해볼래요?”
“뭐, 좋습니다.”
“정식 대련이 아니니까 발은 사용할 필요 없고...그리고 다쳐도 뒤탈 없다고 분명 말했어요. 딴 소리 없기요?”
“물론입니다. 대신 부탁이 있습니다.”
“뭐요?”
“제가 포기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스파링을 멈추지 말아주세요.”
“아놔! 진짜 끝까지 허세를...대체 뭘 믿고...아이, 난 몰라, 알았어요.”
여전히 관장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곤 고등학생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뭐라 했다.
어떤 얘기를 할지 뻔하다. 살살 하다가 적당히 끝내라는 뜻이겠지.
글러브와 헤드기어, 몸통보호대, 마우스피스 등 보호 장비를 가져왔다. 착용 후, 링 위에 올라갔다.
이전까지는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처음 겪어보는 이 기분. 비록 큰 의미 없는 스파링이라 해도, 네모난 링에서 전해오는 긴장감과 압박감은 실로 놀라웠다.
시작을 알리자, 고등학생이 빠른 스텝을 밟으며 얼음처럼 서있는 나를 향해 원투 스트레이트를 날렸다. 이어 몸통에 훅!
-퍽퍽, 퍼어억!
보통 이런 경우, 위빙을 해서 피하거나 스텝을 밟아 빠져나가야 한다. 그런데 나는...준비가 안 되어 있는 티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운동신경이 없으니 몸이 따라주질 않을 뿐만 아니라 시선도 따가 가질 못했다.
그렇다고 슬퍼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맞기 위해 하는 거니까.
상대가 강하게 날린 펀치가 아니었음은 나도 안다. 그럼에도 머리가 어지럽고 귀에서 윙 소리가 났다. 끈적한 액체가 느껴지는 게 코피도 터진 것 같고.
옆구리를 강타 당했을 때에는 순간 몸이 꺾이며 숨이 쉬어지질 않았다. 보호 장비라도 없었으면 나는 어찌 되었을까?
고등학생은 나를 몸풀기용 샌드백 치듯 유린했다. 스트레이트과 훅, 잽, 어퍼, 바디 등 복싱기술은 다 써가면서. 소나기 펀치도 맘껏 퍼부으면서.
그런 면에서 조금은 아쉬웠을지도 모른다. 발을 쓸 수 있었다면 하이킥과 로우킥, 미들킥까지 신나게 구사할 수 있었을 테니까.
단 한 대도 못 때려본 나!
허우적거리며 굼뜬 펀치라도 한방 날려줄 법도 했지만, 너무 많이 맞고 있었을까? 관장의 안타까운 외침이 들려온다.
“피해. 피하라니까. 뭐하고 있어? 피하라고.”
시간을 재보진 않았으나, 한 2분 가까이 몰매 맞듯 맞았을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선수도 일방적으로 맞으면서 버틸 순 없다. 하물며 나 같은 초짜가 쓰러지지 않고 2분을 버틴다? 말이 안 되는 소리다.
그럼 내가 어떻게 버텼을까?
버틸 만 하니까 버텼겠지만, 나는 그저 글러브로 얼굴을 가린 채 상체를 약간 웅크리는 동작으로 버텼을 뿐이다.
처음에는 그랬다. 죽을 것처럼 힘들더니 어느 순간이 되자, 맞는 강도에 비례해서 버티는 힘 또한 커졌다. 희한한 일이다. 고통을 느끼는 것마저 이전에 비해 확연히 둔감해졌으니까.
이쯤 되면 당황하는 쪽은 오히려 때리는 쪽이다.
-하아 하아, 이 씨×!
약이 올랐는지, 아니면 지쳤는지, 거친 호흡소리를 내뿜으며 욕설 비슷한 소리를 내질렀다. 펀치의 강도도 최고치에 달했다. 체중을 실어 전력을 다한 펀치가 내 안면과 복부, 옆구리를 연이어 강타했다.
몸에 닿으면서 나는 ‘퍽’소리가 귓가에 둔탁하게 들려올 때, 오히려 나는 가드를 내려 얼굴을 내주었다. ‘때려봐, 때려봐.’하는 마음으로. 내친 김에 헤드기어까지 벗어던질까를 생각했다.
“저런 미친.......”
관장의 우려하는 목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무방비 상태에서 정통으로 맞으면 어떻게 될지, 정말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서 그런 건데.
역설적이게도 이때쯤에서야 자가 치료기능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만큼 여유가 생겼다고 봐야할 듯.
어찌되었든 내 행위는 상대에 대한 자극이자 조롱이었다.
고등학생은 곧바로 폭발했다. 한마디의 욕설과 함께 가드를 내린 얼굴의 코 부위에 정통으로 펀치를 꽂아 넣었다.
-퍽!
정말로 이 펀치는 강력했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순간 코뼈가 주저앉고 으스러지는 고통이 찾아왔으니까. 아니, 코가 휩쓸려 얼굴에서 떨어져나갔을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들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이다. 신기하게도 그 고통조차 이내 사라졌다.
잠시 후,
“관장님! 저 못하겠습니다.”
뜻밖에도 고등학생이 포기를 선언했다. 스파링을 시작한지 한 4분쯤 지난 후였다.
왜 포기를 했을까? 내가 보기에는 체력이 고갈되어 그랬다기보다는 아마도 더 해봤자 무의미하다는 판단이 들어서 그랬을 것 같다.
어쨌거나 상대가 포기를 했으니 내가 이겼다.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 관장을 포함하여 어느새 열댓 명이 우리의 경기를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링 밖으로 나가자, 모두의 시선이 나를 따라왔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침묵은 덤이었다.
아마도 속마음들은 이랬겠지.
‘저 사람 뭐지? 괴물이야? 외계인이야?’
“관장님! 내일 다시 올게요. 내일은 관장님과 직접 스파링 할게요.”
관장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멍하니만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