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니아
위치: 유럽동남부 발칸반도 서북부
인구: 2,869,782명 (2023년 추계)
수도: 티라나
면적: 28,748.0㎢ 세계면적순위
공식명칭: 알바니아 공화국 (Republic of Albania)
기후: 지중해성기후
민족 구성: 알바니아인(95%), 그리스인(3%)
언어: 그리스어,알바니아어
정부/의회형태: 중앙집권공화제 / 다당제&단원제
종교: 이슬람교(70%), 알바니아정교(20%), 로마가톨릭
화폐: 알바니아 레크 (ALL)
대륙: 유럽
국가번호: 355
GDP: USD 15,289,000,000
인구밀도: 100명/㎢
전압: 220V/ 50Hz
도메인: .al
알바니아과 한국의 관계
▶ 외교
▶ 경제·통상·주요 협정
▶ 문화교류·교민 현황
요약
발칸 반도에 있는 국가. 수도는 티라나이고 화폐는 알바니아 레크이다. 국민은 대다수가 알바니아인이며 소수의 그리스인 등으로 구성되어있다. 1992년 정부는 사유화와 시장자유화에 중점을 둔 경제 개혁 조치를 취했다.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유럽에서 가장 낮은 편에 속한다. 의료혜택은 무료이며 15세까지의 의무교육을 포함한 모든 교육 모두 무상이다.
서쪽으로 아드리아 해를 끼고 있다. 수도는 티라너이다. 남북으로 약 340km 뻗어 있으며 동서 최대 너비가 153km이다. 북쪽으로는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동쪽으로는 마케도니아, 남동쪽으로는 그리스와 접해 있으며 아드리아 해의 들쭉날쭉한 해안이 서쪽 경계선을 이룬다.
자연환경
알바니아는 지형적으로 영토의 70%를 차지하는 산악 고지대(북쪽·동쪽·남쪽)와 이 나라의 거의 모든 농경지가 집중되어 있으며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서부 해안 저지대로 크게 구분된다. 고지대는 다시 해발 2,700m가 넘는 험준한 석회암 봉우리들로 이루어진 북알바니아알프스 산맥, 알바니아에서 가장 높은 코라프 산(2,751m)을 포함하며 동쪽 마케도니아와의 국경선을 따라 솟은 험준한 산맥이 몇 개 있는 중부 고지대, 그리고 북부 산맥보다 낮고 완만한 산맥들로 이루어진 남부 고지대 등 3개 지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해안을 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륙의 산악지대가 워낙 높고 많은 부분을 차지한 탓인지 알바니아의 평균고도는 무려 700m에 이른다. 이는 유럽의 평균고도와 비교하면 2배나 된다. 드린 강을 비롯한 알바니아의 강들은 서쪽으로 흘러 아드리아 해로 유입된다.
해안지대에서는 지중해성기후가 나타나 겨울에는 온화하며 비가 많이 오고, 여름에는 건조하고 덥다. 그러나 산악지대에 이르러서는 기후가 급격히 변하여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운 대륙성 기후를 보인다. 연평균강수량은 지역에 따라 편차가 큰데, 알바니아알프스 산맥의 강수량은 2,500㎜ 이상인 반면, 대부분의 동부 국경 지역에서는 800㎜ 이하의 강수량이 기록된다.
자연식생은 산악성인 지형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건조한 저지대에는 마키(지중해 지방의 관목)로 이루어진 식생이 우세하게 나타나며 해발 1,000m 지점까지는 참나무가 많다. 그 위로는 주로 너도밤나무와 밤나무로 이루어진 숲이 나타나다가 높은 지대에 이르면 침엽수들이 군생하고 있다.
국민
알바니아인은 중부 유럽에 살다가 철기시대 초기에 그리스 북부의 아르타 만 쪽으로 이주한 일리리아인의 후손이다. 정부의 출산장려정책에 힘입어 알바니아의 출산율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최고의 수치를 기록해왔다. 2023년 추계인구는 286만 명이며, 전체 인구의 59%가 도시에 거주하고 있다. 제1의 도시는 수도인 티라너이다. 인구 구성의 17%는 15세 이하의 유소년층이다. 평균기대수명은 남자 74세, 여자 79세이다.
언어
알바니아어는 알바니아의 공용어이다. 알바니아어는 게그와 토스크 방언의 영향을 받아 표준 언어와 문법을 구성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토스크 방언에 근본을 두고 있다. 슈쿰빈 강을 두고 각각 게그와 토스크 방언을 쓰는 지역이 나뉜다. 또한 현대 그리스어에선 찾아보기 힘든 그리스 방언을 알바니아 내의 그리스인 거주 지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알바니아 내 소수민족 집단이 사용하는 언어로는 아로마니아어, 세르비아어, 마케도니아어, 보스니아어, 불가리아어, 고라 방언, 롬어 등이 있다. 마케도니아어는 푸스테크 행정구역의 공용어이다.
남부 알바니아의 알바니아어, 그리스어, 양국 언어로 표시된 도로 표지판. 알바니아인들은 수 개 국어에 능통한 사람들로 여겨진다. 이민과 식민지배의 역사 탓에, 대부분의 알바니아인들은 2개 이상의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 최근 해외거주자의 귀환과 알바니아 내에 형성된 그리스인, 이탈리아인 공동체 등의 영향으로, 영어, 이탈리아어, 그리고 그리스어 등이 알바니아에서 널리 쓰이는 외국어로 자리잡고 있다. 그 중 그리스어는 알바니아에서 2번째로 자주 쓰이는 언어로, 알바니아 전체 가구의 2/3이 가정 내에 그리스어 능통자를 보유하고 있다. 국제프랑코포니기구는 알바니아에 320,000명 정도의 프랑스어 능통자가 있다고 추정하고 있다. 이 외에도 세르비아어, 루마니아어, 독일어, 터키어 그리고 아로마니어 등이 알바니아 내에서 쓰이고 있다. 코소보와 마케도니아 등지에 살고 있는 알바니아인들도 알바니아어, 세르비아어, 터키어, 슬라브 마케도니아어, 유고슬라비아 언어 등에 능통하다. 이탈리아에는 토스크 방언 (알바니아 남부에서 주로 쓰임)에 근본한 아르베레쉬라는 언어가 존재하며, 이탈리아 남부의 칼라브리아주, 몰리세주, 풀리아주, 바실리카타주, 캄파니아주, 아브루초주 그리고 시칠리아 등의 지역에서 널리 쓰이고 있다. 아르베레쉬 언어들은 서로에 대한 관련성이 높으나 서로 이해하기에는 용이하지 않은 점이 존재한다. 알바니아에서 현대어를 사용하는 2개의 주요집단은 북부의 게그인들과 남부의 토스크인들이다. 그밖에 상당수의 그리스인들이 주로 남동부에 살고 있다.
2011년 기준 인구 조사에 따르면, 2,765,610명, 알바니아 전체 인구의 98.767%의 사람들은 자신의 모어 (모어는 아동기 가정에서 제일 우선되어 쓰인 언어를 지칭한다)를 알바니아어로 밝혔다.
문화
알바니아는 그 유구한 역사를 간직하여, 문화적, 역사적 가치가 높은 건축물들이 나라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고대에서 현대까지, 알바니아의 주요 도시 곳곳은 주거지, 종교적 건축물, 상업용 건물 등을 포함한 성채로 둘러싸인채, 건축 기술의 발달에 따라 도심 지역에 대한 내부적인 재건축이 계속하여 이루어졌다.
알바니아에는 사란더의 남쪽에 위치한 고대 도시 부트린트, 베라트와 지로카스터르의 역사 유적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외에도 가시강과 라라이차강(셰베니크-야블라니체 국립공원의 일부), 로마 양식의 두러스 원형 경기장, 셀체스 세 포슈메 왕릉, 오흐리드 지역의 자연유산 및 문화유산, 그리고 고대 도시 아폴로니아 등이 잠정 목록에 등재되어 있다.
알바니아에는 일리리아의 고대 도시였던 빌리스, 아만티아, 포이니케 그리고 슈코더르 등이 위치하여 있으며, 도시 곳곳에서 일리리아 유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 비잔티움 제국의 식민지배를 받은 역사의 영향으로, 비잔틴 양식의 교회, 성채, 수도원들도 나라 곳곳에 남아있다. 또한 오백년에 달하는 오스만 제국의 식민지배의 영향으로, 오스만 제국의 기념 유적들도 찾아볼 수 있다. 19세기, 당시 알바니아 중세 마을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이탈리아 출신의 건축가들에 의해 재건축되어, 대부분의 유럽 도시들과 비슷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공산주의가 팽배했던 시기에는, 많은 사회주의 양식의 건물, 넓은 도로, 공장들이 새롭게 건축되었고, 마을 중심들은 재건축의 과정을 거치며 오래된 역사 유적들이 파괴되기도 하였다.
역사
알바니아인들은 고대 인도유럽계 민족인 일리리아인의 후손들로 적어도 BC 1000년부터 발칸 반도 서부 지역에서 계속 살아왔다. 알바니아 남부에 있던 부족들은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았는데, 두러스 시와 레저 시는 그리스 식민지에서 비롯된 곳들이다.
북부의 일리리아인들은 지역 군주들에 의해 여러번 통일되었다. 그중 대표적인 군주는 북쪽의 달마치야에서 남쪽의 비요서 강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슈코더르를 수도로 삼았던 아르곤 왕(BC 3세기 후반)이다. 아르곤 왕이 죽은 뒤 왕비 테우타가 정벌사업을 벌였는데, 이것이 로마인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여 BC 168년에 일리리아 전체가 로마에 점령당했다. 그후 알바니아는 로마 속주인 일리리쿰의 일부가 되었다.
로마의 통치하에 일리리쿰은 번영을 누렸다. 395년부터는 행정적으로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에 합병되었다. 3~5세기에 서(西)고트족과 훈족의 침략을 받고 6~7세기에 슬라브족의 침략을 받았지만 알바니아인들은 자신들의 언어와 관습을 지켜낸 발칸 반도의 몇 안되는 민족 중 하나였다. 14세기에 들어와 투르크의 침략이 시작되었다. 투르크인들은 후에 민족의 영웅이 된 계르기 카스트리오티를 교육시켜 이슬람교도로 개종시키고 스칸더르베그라는 이름으로 불렀으나, 그는 오히려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물리쳤다.
1443년에 그리스도교를 다시 받아들인 그는 알바니아에 대한 투르크족의 지배에 성공적으로 대항했으나, 그가 죽은 이후 투르크의 지배가 강화되어 알바니아의 경제는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오스만 지배에 대한 지역적 항거가 이어졌으며 1912년의 봉기로 알바니아는 독립을 쟁취했다. 그러나 독립에 대한 국제 사회의 승인은 1921년에서야 이루어졌다. 1939년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끄는 이탈리아군이 침략해왔으며 1943~44년의 내란으로 알바니아는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다. 1944~85년에 엠베르 호자가 이끈 알바니아의 유일한 정당인 노동당은 경제 수단을 국유화시켰다(→ 호자).
알바니아는 '자립'의 정책을 채택하기 전에는 유고슬로비아·소련·중국 등과 돌아가며 경제·군사 동맹을 맺었고 유럽의 다른 국가들로부터는 자국을 수십 년 동안 폐쇄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폐쇄성으로 경제가 어렵게 되자 호자의 후계자 라미즈 알리아는 1990년 개방정책을 채택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고조된 국민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경제 통제를 완화하고 반체제 정치이념을 합법화시켰다.
1992년 3월 다당제 선거가 치러졌으며 비공산계인 민주당(PDS)과 다른 자유주의 정당들이 승리를 거두었다. 공산주의자들은 당의 이름을 알바니아노동당에서 사회당(PSS)으로 바꾸고 인민의회 의석의 1/4을 차지했다. 1995~96년의 정치 상황은 불안했지만 경제는 조금씩 나아졌다. 하지만 1997년 피라미드식 투자사업이 붕괴되면서 이와 연계된 대다수의 국민이 하룻밤 사이에 빈털터리가 되었고 경제는 피폐해졌다. 전국은 혼란에 빠졌으며 의회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PDS 내각은 사임했으며, 1997년 6월 선거에서 PSS가 주도하는 동맹세력이 압도적 승리를 거두었다.
종교
공산 정권이 1967~90년에 모든 종교 활동을 억압·금지했으나 많은 국민들이 여전히 이슬람교를 믿고 있으며 나머지는 그리스 정교회나 로마 가톨릭교 신자들이다. 2011년 기준 알바니아 통계국이 실시한 인구조사에 따르면, 알바니아 전체 인구의 58.79%가 이슬람교 신자로, 알바니아에서 제일 큰 규모의 종교집단이다. 하지만 옛부터 오랫동안 기독교가 있던 국가로 인구 17.06%는 기독교 신자이며 무려 인구 24.29%가 무교이다. 이슬람교 신자인 경우 매우 종교적이고 규칙적인 삶을 살며 기독교와 무교의 경우 행동에 제약이 없고 다른 외국 일반인과 같이 자유로운 사상을 가진다. 알바니아 동방 정교회와 벡타시교는 2011년 인구조사 결과를 신뢰하지 않으며, 동방 정교회 측은 알바니아 전체 인구의 24%가 동방 정교회 신자이며, 통계 수치인 6.75%보다 더 큰 규모라 주장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 당시 알바니아 전체 인구의 70%가 이슬람 신자였고, 20%는 동방 정교회 신자, 그리고 10%가 로마 가톨릭 신자였다. 2010년에 시행된 설문조사에 따르면, 알바니아 인구의 39% 정도만이 종교를 일생의 중요한 부분이라 인식하며, 알바니아는 세계에서 가장 신앙심이 약한 국가들 중 하나이다. 2012년 한 연구에 따르면 당시 65%의 알바니아 무슬림들은 어느 특정 교파에도 소속되지 않아있었다. 2008년 알바니아 종교 단체들을 대상으로 시행된 통계 조사에 따르면, 당시 알바니아에는 1119개의 교회와 638개의 모스크가 존재하였다. 가톨릭에서는 694개의 교회, 동방 정교회는 425개의 교회, 이슬람교는 568개의 모스크, 벡타시교는 70개의 테케를 신고하였다.
알바니아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독교 국가 중 하나이다. 예수 12제자 생존 당시 이미 두러스에 70여 가구의 기독교 신자 가족들이 있었다. 두러스 관할 교구는 사도 바울이 일리리아와 에피로스 지역에 설교를 다닐 당시 생겨났다. 알바니아인들은 11세기 말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 기록물에서 처음 등장한다. 등장 당시 이들 대부분은 기독교 신자였다. 알바니아 지역에 이슬람교가 전파된 것은 9세기부터이다. 오스만 제국의 식민지배를 받기 시작하면서 이슬람교는 알바니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종교집단으로 자리잡았고 기독교는 소수집단으로 쇠퇴하였다. 오스만 제국에서 독립 (1912)한 이후, 알바니아 공화국, 왕정, 그리고 이후의 공산정부는 종교를 관료 체계와 문화 생활에서 분리하려 하였다. 알바니아는 공화국 혹은 왕국이였을 당시 모두 국교를 따로 지정하지 않았다. 20세기 당시, 알바니아의 모든 성직자들은 왕정에 의해 그 세력이 많이 약화되었고, 1950년대와 1960년대 사이 당시 종교탄압의 성격이 강한 국가정책들에 의해 완벽히 제거되었다.
팬 놀리는 알바니아 동방 정교회의 창립자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알바니아를 다스리기 시작했던 공산정부는 종교 기관을 기소하고 억압하였으며 알바니아를 세계 최초 무신론 국가로 선포할 당시에는 종교를 완전히 금지하였다. 종교의 자유는 1992년 당시 정부가 교체되며 회복되었다. 알바니아는 공산정부의 몰락 이후 1992년에 이슬람 협력 기구에 참여하였으나, 국회가 알바니아의 회원국 신청을 비준한 바 없다며 논란이 불거지자 2014년 회의에 불참하기도 하였다. 알바니아 무슬림들 (주로 세속적인 성격을 띄며 수니파 교파에 소속)은 나라 전체에 고르게 분포되어 있는 반면, 동방 정교회 신자들과 벡타시교 신자들은 알바니아의 남부, 로마 가톨릭 신자들은 북부 지역에 주로 분포되어 있다.
교황 클레멘스 11세는 알바니아 귀족 가문 출신으로 1700년부터 1721년까지 교황직을 맡았다. 알바니아의 첫 개신교도로 기록된 사이드 톱타니는 유럽 등지를 여행하다 1853년 티라나로 돌아와 개신교를 설파하였다. 그는 1864년 오스만 제국 관리들에 의해 체포되고 감금되었다. 알바니아의 주류 복음주의 교회 신도들의 배경에는 조합교회, 감리교, 그리고 19세기 영국 해외 성서 선교회의 영향이 크다. 복음주의 연합, VUSh로 알려져 있는 이 단체는 1892년 설립되었다. 오늘날 VUSh는 다양한 개신교 종파에서 온 160여명의 회원 신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VUSh는 티라나에서 열리는 집회를 주도하며 2010년 당시 양족(兩族)간의 혈수(血讎)를 반대하는 시위를 연 바 있다. 교회 내의 성서들은 알바니아 성서공회가 제공한다. 사상 첫 알바니아어 성서는 1990년 표준 번역판으로 인쇄된 것이다. 이외에도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123]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 그리고 여호와의 증인 교회도 알바니아에 추종자들을 보유하고 있다.
알바니아는 홀로코스트 당시 유대인 인구가 증가한 유일한 유럽 국가이다.[126] 공산 정부의 붕괴 이후 거의 대부분이 이스라엘로 이주하며, 현재는 200여명의 유대인만이 알바니아 국적을 두고 알바니아에 거주하고 있다.
알바니아와 한국의 관계
외교
1948년 11월 2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수교하였고, 1988년에는 당시 유럽 공산주의 국가로서는 유일하게 서울 올림픽에 불참했다. 그러나, 1991년 8월에 대한민국과 수교하였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92년 10월에 알바니아 주재 대사관을 폐쇄하였다.
1995년 5월에 대한민국과 과학기술협력협정을 체결하고, 1998년 11월에는 알바니아 외무장관이 대한민국을 방문하였으며, 2001년 2월에는 국회의장이 대한민국을 비공식 방문했다. 주 그리스 대한민국 대사관이 알바니아 대사관을 겸임하고 있다.
경제·통상·주요 협정
현재: 경제·통상·주요 협정/ 없음
문화교류·교민 현황
현재: 문화교류·교민 현황/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