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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위치: 동아시아
인구: 125,487,973명 (2023년 추계)
수도: 도쿄
면적: 377,873㎢ 세계면적순위
공식명칭: 일본국 (Japan)
기후: 아한대다우기후, 온대다우기후
민족 구성: 일본인(98.5%), 한국인(0.5%), 중국인(0.4%), 기타(0.6%)
언어: 일본어
정부/의회형태: 입헌군주제 / 양원제
종교: 신도(49%), 불교(45%), 그리스도교(8%)
화폐: 엔 (¥) 환율계산기
대륙: 아시아
국가번호: 81
GDP: USD 5,167,051,000,000
인구밀도: 335명/km²
전압: 100V / 50Hz
도메인: .jp
일본과 한국과의 관계
▶ 외교
▶ 개화 이전
▶ 개화 이후
▶ 일제강점기
▶ 광복 이후
▶ 국교 정상화 이후
▶ 경제·통상·주요 협정
▶ 문화교류·교민 현황
요약
동아시아 대륙 동쪽에 있는 국가. 홋카이도·혼슈·시코쿠·규슈의 4개 섬과 수많은 작은 섬으로 구성된다. 수도는 도쿄이다. 단일 아시아계 민족이 압도적이고 주요 종교는 신도·불교·그리스도교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 하와이 및 필리핀의 미군기지를 공격했고, 유럽 식민지를 점령했으나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을 투하되었고 연합군에게 항복하였다. 전후 새로운 기술을 이용하여 폐허로 변한 산업기반을 재건하여 놀랄 만한 경제 회복이 이어졌다. 활발한 지진 활동대에 놓여 화산 폭발 및 지진을 겪는다.
자연환경
지질
일본 열도는 세계 최대의 육지인 유라시아 대륙과 최대 해양인 태평양과의 경계에 위치하는 호상(弧狀) 열도로, 환태평양 호상 열도의 주요부분을 구성하며 해구 및 활발한 지진·화산 활동 지역에 속해 있다. 기본적인 지질구조는 특히 고생대 말기에서 중생대에 걸친 몇 차례의 조산운동으로 윤곽이 드러났으며 신생대에 들어와 현재의 지질구조와 지형이 형성되었다.
일본 열도는 혼슈 중부를 가로지르는 이토이가와-시즈오카[絲魚川靜岡] 구조선에 의해 동북일본과 서남일본으로 나누어지며 서남일본은 중앙구조선 및 무스키 야스시로[臼杵八代] 구조선에 의해 내대와 외대로 구분된다. 동북일본은 기타카미[北上]·아부쿠마[阿武隈] 고지를 포함하는 태평양쪽과 동해쪽 및 폿사 마그나로 나누어진다.
지형
지형적으로는 태평양상의 호상 열도로서의 지리적 위치와, 지금까지 여러 차례 진행되었고 현재도 진행중인 지각운동의 지배를 받는 온난다습지역에 있는 조산대의 특징을 뚜렷이 드러내고 있다. 우선 구릉지를 포함하여 국토의 1/4을 차지하는 산지는 다우다습한 기후조건을 가진 조산대로서 기복이 심하며 급류성 하천에 의한 하방침식으로 V자형 계곡이 발달해 여러 곳에 일본 특유의 계곡미를 형성한다. 또한 대륙지형처럼 안정된 지역이나 건조한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차별침식지형도 화산지역을 빼면 거의 드물다. 많은 강수량과 반복되는 지각변동에 의해 산지는 더욱 세분화되었으며 이들 산지 사이에는 소규모의 분지나 퇴적물로 메워진 산간평지가 형성되어 있다.
하천은 일반적으로 길이가 짧고 경사가 급하며 유역 면적이 좁다. 본류(本流)의 길이가 300km가 넘는 것은 시나노 강[信濃川]과 데시오 강[天鹽川] 2개뿐이다. 일본의 하천은 조산운동 영향 외에도 태풍·장마전선에 의한 홍수, 산지 붕괴 등이 자주 일어나 산지의 상류부에서는 대량의 사력이 생산된다. 이들 사력은 하천에 의해 운반되어 수력발전이나 홍수조절용 댐을 급속히 매몰시켜 그 효과를 감소시키며, 하상(河床)에 퇴적시켜 천정천을 만들어 수해를 증가시킨다.
평야는 홍적대지를 포함하여 국토의 1/4에 불과하며, 인접 산지에서 반출되는 사력에 의해 형성된 소규모의 것이 대부분으로 하구에 삼각주가 발달되어 있는 것은 이시카리[石狩]·니가타[新潟]·간토[關東] 등의 커다란 평야뿐이다.
한편 충적평야에 집중된 공업도시에서 지하수를 대량 퍼내어 씀에 따라 지반이 내려앉아 평지가 평균해수면보다 낮은 제로미터 지대가 생겨나 재해 발생의 위험이 있다. 오늘날의 지각운동을 직접적으로 예민하게 감지할 수 있는 것은 해안이다. 해안선은 국토면적에 비해 매우 길어 총 2만 5,600km에 이른다. 해안의 종류도 복잡한 지질을 반영하여 융기 산호초에서 화산체까지 그 종류가 많고 다양하다.
세계적으로 최고 규모를 자랑하는 것은 화산지형, 특히 칼데라 지형으로, 가장 단순한 화산 마르(maar)에서 복합화산까지 거의 모든 유형의 화산이 있어 화산의 박물관이라 할 수 있다. 가장 보편적인 화산은 산릉이나 산정에 석영·안산암의 돔 모양의 기생화산이 있는 안산암질의 원추형 성층화산이며 일본의 상징적 화산인 후지 산[富士山]도 이 유형에 속한다. 규슈에는 아소[阿蘇]·기리시마[霧島]·아이라[姶良] 등 세계 최대급의 칼데라가 분포하며, 시라스라고 불리는 화새류(火碎流) 분출물로 이루어진 붕괴하기 쉬운 대지가 주위에 발달해 있다.
기후
일본은 면적이 좁은데다 남북으로 길고 지형이 복잡하며 또 길고 좁은 국토가 기후경계선에 의해 둘로 나누어지기 때문에 북부와 남부, 동해 쪽과 태평양 쪽, 고원과 분지 등에 따른 기후 차이가 현저하다.
고도에 따른 기후 차이를 예로 들면 도쿄에서 북서쪽으로 약 150km에 있는 가루이자와[輕井澤:해발 약 1,000m]는 고도가 높아 80km 북쪽의 삿포로[札幌]의 기후와 같다. 일본의 기온은 대륙의 서안(西岸)과 비교해 겨울에 춥고 여름에 더운 동안(東岸) 기후의 특징을 갖고 있는데 해안의 영향을 받아 대륙 내부보다 온화하다. 이는 대륙의 동안에서는, 겨울에는 대륙에서 발달하는 고기압에서 불어나오는 바람이 탁월하며 여름에는 해양상의 고기압에서 불어나오는 바람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이러한 동안 기후로서의 특징은 계절풍기후의 특징으로 간주되는데, 일반적으로 계절풍기후는 우계·건계의 구별이 뚜렷한 데 비해 일본의 경우는 그 구별이 그렇게 명료하지 않다. 이 점에서 일본의 기후는 온대계절풍기후라 할 수 있다.
한여름인 7~8월에 홋카이도를 제외한 일본은 오가사와라[小笠原] 기단에 덮혀 찌는 듯이 무덥다. 남쪽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고온다습한 기류인 남동계절풍이 일본 부근의 저기압, 전선, 태풍 활동과 연결되어 많은 양의 비를 몰고 옴으로써 일본은 세계 유수의 다우(多雨) 국가 중의 하나이다. 북반구 북위 30~40°대의 연평균강수량은 500~600㎜인데, 혼슈·시코쿠·규슈의 연평균강수량은 약 1,800㎜로 2~3배나 많으며 위도대의 평균강수량으로 보면 적도 지대의 강수량과 비슷하다. 특히 시코쿠·규슈의 연평균강수량은 2,000㎜를 넘고 지역에 따라서는 3,000~4,000㎜에 달한다.
한편 남양 방면에서 매년 발생하는 평균 26~27개의 태풍중에 2/3인 18개 정도는 일본으로 향하며, 그 1/2인 9개 정도가 일본 부근을 지나고 다시 그 1/2인 4~5개가 일본에 상륙한다. 태풍재해는 일본의 기상재해중 최대 비중을 차지하여 1940~80년 태풍재해는 전국의 수해로 인한 피해의 약 63%, 사망자수의 약 76%에 달한다. 태풍 외에도 온대성 저기압이나 전선에 의한 재해가 있는데, 특히 6~7월에 일어나는 장마(바이우[梅雨]) 전선에 의한 집중호우의 재해가 크다. 1917~80년에 100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장마전선에 의한 호우가 14회나 있었다.
반면 태풍이나 장마전선은 일본에 풍부한 수자원을 가져다주는 중요한 역할도 한다. 겨울에 혼슈는 척량산맥을 경계로 동해 쪽은 큰 눈이 내리는 반면 태평양 쪽은 맑은 날씨가 계속되는데, 이는 동해를 건너온 북서계절풍이 동해 쪽 지방에 대설을 내리게 한 다음 기후경계선인 척량산맥을 넘으면서 건조한 강바람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일본이 위치하는 아시아 대륙 동안(東岸) 일대는 바다·육지 분포 및 대지형의 영향으로 편서풍이 남으로 비스듬히 흐르는 지역에 해당하기 때문에 온대저기압·이동성고기압의 왕래가 심해 기상변화가 복잡하다. 또한 열대처럼 여름이 무더운 반면 겨울에는 대설이 내려 유럽에 비하면 계절 변화가 심하고 복잡하다. 이처럼 일본은 계절 변화가 심한 만큼 설해·냉해·태풍재해 등 기상재해가 빈번해 국민생활·국민경제에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다.
국민
민족
현재의 일본인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 북방도래설도 있고 남방도래설도 있으나 일정하지 않으며, 신체적 특징에서 보면 몇 개 종족의 복잡한 혼합으로 여겨진다. 기본적으로는 한반도를 거쳐 건너온 퉁구스계 종족에 동남아시아에서 온 종족이나 아이누계 종족 등이 오랫동안 섞이어 일본 민족을 형성한 것으로 여겨진다. 구석기 시대의 유물이 일본에서도 약간 발견되고 있지만 학문적으로는 구석기와 신석기의 관련을 명백하게 밝혀내지는 못하고 있다. 일본은 단일 민족이라는 신화가 오랫동안 유포되어 왔다.
일본 민족 외에 일본에 거주하는 민족으로 우선 한국인을 꼽을 수 있다. 한일기본조약(1965)에 수반하는 협정 규정에 의해 재일한국인(1945년 8월 15일 이전부터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 및 그 직계비속)에 대해서는 영대(永代) 거주권을 인정했다. 2014년 기준 재일한국인은 약 50만 명, 일본에 귀화한 사람이 약 12만 명이다. 다음으로는 중국인이 많으며 약 5만 명을 넘는다. 1980년대 이후 동남아시아 등에서 들어오는 비합법 노동자가 점점 많아져 이들에 대한 처우가 과제가 되고 있다.
언어
공용어는 일본어로 1억 이상의 인구가 사용하는 세계 굴지의 언어이다. 그러나 대외적인 교류가 적으며 국제적 세력도 크지 않다. 일본어의 계통은 언어학적으로 아직 확정되어 있지 않다. 음운구조·문법구조나 다소의 어휘적 유사점으로 인해 한국어, 나아가서 알타이 제어와 친족관계가 있는 것으로 오랫동안 여겨왔으나 증명된 것은 아니다. 남방어 또는 티베트·인도 제어와의 관계, 남방계 언어에 북방계 언어가 융합되었다고 하는 설이 있으나 아직 정설은 없다. 방언은 류큐[琉球] 방언과 본토 방언으로 나누어지며 본토 방언은 다시 동부·서부·규슈 3대 방언으로 나누어지지만 도쿄 방언을 중심으로 한 공통어가 표준어가 되고 있다.
문화
일본문화의 특징은 조몬[繩文]·야요이[彌生]시대의 토기, 하니와에서 볼 수 있는 고대미(古代美)를 비롯하여, 아스카[飛鳥]·하쿠호[白鳳] 시대의 건축·조각 또는 〈만요슈 萬葉集〉에서 비롯된 와카[和歌], 하이쿠[俳句]와 같은 독특한 시가(詩歌)가 있다.
〈겐지모노가타리 源氏物諸〉에 이은 문학과 제아미[世阿彌]의 노[能], 정원과 같은 독특한 문화유산이 있다.
동질성과 다양성
250년에 걸친 쇄국은 문화통합을 강화하는 기반이 되었고, 정부가 메이지 초기 이후 의도적으로 추진한 정책, 국어표준화, 신도(神道) 국교화, 덴노의 신격화 등이 동질성 높은 문화를 갖게 했다.
그러나 그 문화전통에도 다양성을 산출하는 조건이 존재했다. 4개의 주요섬으로 이루어진 일본은 지역적인 다양성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남쪽에서 들어온 민족집단, 북방에서 들어온 민족집단, 중국대륙에서 도래한 민족집단이 중층적으로 혼혈이 이루어졌는데, 각 계통의 문화요소가 민족의 형성과 함께 중층적인 일본문화의 기반이 되고 있다.
또한 봉건제 전개와 바쿠한[幕藩] 체제의 정비에 의해 지방문화가 각지에서 발달했다.
사농공상의 신분계층적인 부분문화가 각지에서 발달하여 현대 일본문화의 기초가 되고 있다. 왕실을 중심으로 한 문화전통도 계층적 부분문화라 할 수 있다. 또한 일찍부터 해외로부터 문화요소의 유입·전파가 있었다. 4세기 이전에는 농업·철, 7세기까지는 한자·불교·유교·도교 및 도시계획·정치행정제도가 유입되었고, 16세기에는 그리스도교·총기·서양문물이 유입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미국화도 그 계보를 잇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외 문화요소의 적극적인 채용경향을 이유로 일본문화를 모방문화·잡종문화로 보는 설도 대두한다.
역사
15세기 ~ 16세기에는 15세기 후반에 등장한 센고쿠 다이묘 세력에 의한 지방 자치 체제의 형성이 급속도로 진전되었다가 16세기 후반에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의 주도 하에 통일 정권을 수립하기에 이루러 근세로 이행하였다. 또 이 시기에 홋카이도와 지시마(쿠릴), 가라후토(사할린)의 에조치를 점령함으로써 국가로서의 일본의 영토 범위 또한 넓어지게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의 뒤를 이은 근세의 에도 막부는 바쿠한(幕藩) 체제 밑에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을 고정하고, 기독교 금지를 구실로 쇄국(鎖國)을 행하고, 후에는 유교적 교화(敎化)도 이용하면서 전국 지배를 강화했다. 평화의 지속은 교통·상공업의 발전과 시정인(市井人)의 대두, 화폐 경제의 성립, 다수의 도시 출현을 촉진시켰고, 에도와 오사카를 중심으로 겐로쿠 문화(元祿文化), 화정기(化政期)의 문화를 번성케 했다.[21]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5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 대에 에도 막부는 겐로쿠 호황이라고 부르는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했다.[22]:225 그러나, 겐로쿠와 쇼토쿠 시대의 짧은 호황을 지나면서 견고했던 막부 체제는 점차 모순을 드러냈고[22]:244 19세기 중엽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과 교류 과정을 거치면서 에도 막부는 붕괴, 근대로 이행하게 된다.
전후 일본은 고도 경제 발전을 경험하며 경제 대국으로 발전하였다. 사진은 도쿄의 번화가인 시부야의 모습.
에도 막부의 붕괴 이후 메이지 유신을 맞이한 일본은 근대 국가의 건설을 빠르게 추진하였다. 이와 함께 인접국들과의 국경 확정을 행하여 가라후토 지역을 러시아 제국에 양도하는 대신 지시마 열도(쿠릴 열도) 전역을 일본령으로 하였고, 난세이 제도와 류큐국은 류큐 처분을 통해 실효적인 지배력을 확보하여 지금의 일본 영토 범위가 거의 확정되었다. 한편으로는 자유 민권 운동이 이루어져 1885년 내각 제도가 성립하고, 1889년에는 일본 제국 헌법을 제정하여 이듬해인 1890년 중의원 총선거를 실시해 제국의회를 설치함으로써 명목 상의 입헌 국가가 되었다.[23] 이와 함께 20세기 초반까지 제국주의적인 국제 정세 속에서,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을 통해 조선(대한제국), 타이완, 미나미카라후토(사할린섬 남부)를 강제 합병하고 상하이 등 중국의 주요 도시에 조차지를 설치하는 등 주변국 침략에 뛰어들었다. 메이지 시대 이후부터 일본에서는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통해 정당 정치와 보통 선거가 실현되기도 하였으나 1930년대 군부의 정치적 대두와 함께 무리한 주변국 침략을 감행하면서 주변국의 저항과 미국 등 기존 열강과의 충돌을 통해 일어난 태평양 전쟁에서 패배하게 되었다.
태평양 전쟁의 패배로 인해 주권을 상실한 일본은 연합군의 지배 하에서 청일 전쟁 이후에 조약으로 획득하였거나 강제 병합, 불법으로 획득한 대부분의 영토에 대한 권한을 주변국에 돌려주었다. 또, 국가 제도의 개혁이 이루어져 현재의 일본국 헌법 제정이 이루어졌으며 1952년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통해 주권을 회복하였으며 1972년까지 아마미 제도, 오키나와현의 영토권을 미국으로부터 반환받았다. 한편, 1970년대에 이룬 경제의 고도 성장은 1980년대에 이르러 ‘버블 경제’라고 부를 정도로 일본 경제를 크게 번성시켰다. 그러나 과도한 주가의 증가와 부동산 매입으로 인해 1990년부터 부동산과 주식 가격의 폭락이 진행되어 많은 기업과 은행이 도산하면서 10년 이상 0%의 성장률을 기록하는 불황 상태에 빠졌다.[24] 그로 인하여 지지를 상실한 자유민주당은 한 때 10개월 정도 정권을 상실하기도 하였다가[23] 진보 정당과의 연정을 거쳐 계속 55년 체제의 집권 골격을 유지해 왔다.[23] 그러나 2009년 8월 30일에 치러진 제45회 중의원 총선거에서 민주당이 자유민주당에 압승을 거둬 전후 최초로 완전한 정권 교체[25] 가 이루어져 2009년 9월 16일에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이 성립하였다.[26] 그러나 경제난과 2011년에 발생한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 등으로 신임을 잃은 민주당 정권은 2012년 중의원 의원 선거에서 자유민주당에게 다시 여당 자리를 빼앗겼고, 2012년 12월 26일부터 자유민주당의 아베 신조를 중심으로 한 내각이 출범했다. 현재는 기시다 후미오가 일본의 총리에 선출되어 자유민주당이 오랫동안 여당을 유지하고 있다.
종교
일본에서의 주요종교는 신도·불교·그리스도교가 있다.
신자수는 신도 9,100만 명, 불교 8,608만 명, 신·구 그리스도교 93만 명, 그리고 기타 종교 831만 명을 합쳐 모두 2억 1,355만 명(1988)으로 실제 일본 인구의 약 1.8배나 된다. 신도는 정령신앙과 조상숭배를 바탕으로 한 신앙계보 위에 발달했는데 이것은 해외에서 전파된 불교·도교의 영향하에 그 이전부터의 토착적인 고유신앙이 반응하여 형성된 것이다.
신도는 메이지의 신분분리정책으로 국가의 보호를 받고 체계화되어 전통적인 민속습관에서 떨어져나갔다. 오히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신도는 민속문화전통을 되찾았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인은 일반적으로 탄생·결혼 의식은 신도 의식으로 행하고 장례의식은 불교의식을 따른다.
일본과 한국과의 관계
외교
개화 이전: 역사의 시작부터 한국은 일본에 대해 문화전수자적 위치에 있었다. 백제와 고구려는 한자·불교문화 및 여러 제조기술을 일본에 전수하여 일본의 고대문화 형성에 주요역할을 했다. 그러나 해상교통이 발달하고 일본의 국력 신장과 어지러운 국내정세로 조선해협을 통해 왜구가 출현함으로써 고려와 조선은 큰 피해를 입어왔다. 특히 임진왜란(1592~93)과 정유재란(1596~98)으로 조선은 막대한 인명피해와 국력손실을 보았다. 그러나 일본은 전쟁으로 인한 문화적·경제적 수혜가 컸는데, 즉 우리의 서적과 활자를 약탈하여 활자인쇄술과 주자학을 보급했으며, 특히 도공(陶工)을 많이 데려가 화려한 도자기 문화를 열기도 했다. 임진왜란 뒤에는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가 정권을 잡고 우리나라와 수호하기를 청하여 1607년(선조 40)부터 국교가 재개되어 19세기초에 이르기까지 12회의 통신사가 내왕했다.
개화 이후: 1854년 미일화친조약의 체결과 함께 오랜 쇄국을 마치고 한국에 앞서 문호를 개방한 일본은 급속하게 근대화의 길로 접어 들었다. 1868년 메이지 유신의 단행과 함께 일본은 조선에 개국을 강요했으며, 강압으로 1876년(고종 13) 강화도조약이라는 불평등 조약을 맺고 치외법권·관세면제 등의 특혜와 이권을 일방적으로 따냄으로써 한국 침략의 발판을 다지기 시작했다. 개화 후 조선은 일본의 값싼 공산품으로 인해 수공업이 몰락하여 자급자족 경제가 붕괴되었고, 무리한 일본식 개혁으로 인해 개혁을 반대하는 보수파의 출현을 초래했다. 일본은 청일전쟁·러일전쟁의 승리의 여세를 몰아 한국으로 하여금 한일의정서·한일협약을 맺게 하고 1905년에는 을사늑약을 맺어 통감부를 설치했으며 1910년 한일합병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일제강점기: 한일합병 후 설치된 총독부를 위시하여 식민지 통치를 실시한 일본은 무단정치를 통해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박탈했으며 한국을 일본상품의 시장 및 식량·원료 공급지로 개편하기 위해 경제적 침탈을 했다. 이와 같은 식민지 통치에 대해 한국 내에서 3·1운동, 6·10만세운동, 광주학생운동 등의 항일운동이 일어났으며 해외에서는 상하이[上海]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어 독립운동의 중추 역할을 했다. 이에 일본은 문화정치를 표방하는 한편 황국신민화 정책을 강화하여 한국어 사용금지, 창씨개명 강화 등의 억압정책을 실시했다. 또한 대륙침략과 태평양전쟁을 위해 한국을 병참기지화하면서 온갖 인적·물적 자원을 수탈했는데, 한국인 청·장년은 징용·징병으로, 부녀자는 소위 '정신대'라는 이름의 위안부로 끌고 갔다.
광복 이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한 이후 일본의 한국지배는 종식되었으나 한일 양국관계는 파란을 내포한 긴장관계에 있었다. 1952년 4월 28일 미군정이 끝나고 일본은 주권을 회복했으나 한국정부의 '해양주권선언'으로 설정된 평화선(이승만 라인)과, 그로 인한 독도영유권문제, 일본어선 나포문제 등으로 양국관계는 마찰이 지속되었다. 독도는 평화선 설정으로 1954년 이후 한국이 점유해 오고 있다. 한일국교정상화 단계에서 독도문제는 직접적인 해결을 보지 못했고, 일본에 있어서는 여전히 미해결 영토문제로 남아 있다.
1960년 이승만정권이 붕괴되고 장면정권이 등장하면서 서적수입, 어학강습소 설치, 인적 교류 등이 증가했으며 한일관계는 크게 호전되었다. 1961년 5·16군사정변 이후에는 경제적 발전을 위한 일본의 협력이 불가피하여 한일회담을 적극 추진했다. 1962년 11월 '김종필·오히라[大平] 메모' 작성 등 양국의 노력이 경주되어 1965년 한일협정이 체결되었다(→ 색인:한일기본조약). 이리하여 1951년 시작된 한일국교정상화 교섭은 일단락되었다.
국교 정상화 이후: 국교가 정상화된 이후 경제협력을 축으로 비교적 한일관계가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한국으로서는 대일경제의존과 만성적인 수입초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967년 이후 한일정기각료회의를 발족했으나 별다른 성과가 없었으며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 1974년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으로 인한 육영수여사 사망사건 등과 1982, 1986년의 교과서 왜곡사건으로 한일관계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1981년 한국이 제기한 대일차관 교섭은 1983년 양국정상회담에서 40억 달러 규모로 타결되었고, 1984년 9월 히로히토[裕仁] 왕의 유감표명이 있어 관계개선의 기미가 보였으나 재일한국인에 대한 지문날인 강요, 차별대우 등이 문제가 되어 한일 간의 갈등은 해결되지 않고 있다.
1990년 5월 양국정상회담에서 기술협력문제, 무역불균형 시정, 재일한국인 처우문제, 원폭피해자 보상문제 등을 논의했으며 현 아키히토 왕의 과거 일본의 식민지 통치에 대한 유감 표명이 있었다. 1994년 7월에는 무라야마 총리가 서울을 방문해 일제의 한반도 통치에 대해 사과를 표명했고, 이 방문을 계기로 일본 사회당은 남한을 주권국가로 인정하게 되었다. 일본은 1990년대에 들어서 남북한 등거리 외교를 지향하여 북한과의 국교정상화를 위한 교섭을 전개해 왔으나, 북한의 핵정책에 막혀 정체 국면에 있다.
2015년 12월 28일 정부는 한일 외교장관 회담을 통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대한 최종합의가 이루어졌다고 발표했다. 합의사항의 주요 내용은 일본 아베총리의 서면 사과와 함께 일본은 피해자를 위해 10억 엔을 지원하고, 한국 정부는 그 기금으로 재단을 설립하여 위안부 피해자를 지원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일부 위안부 피해자들과 시민단체는, 정부가 협상과정 중에 당사자들과의 어떠한 사전협의 없이 도출한 일방적 결과임을 밝히면서 합의안 수용을 거부했다. 이 합의안은 시민사회와 피해당사자들의 저항에 부딪히면서 사회적 논란을 불렀다. 2018년 9월 뉴욕에서 개최된 한일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화해치유재단이 정상적인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며 재단 해체 요구도 높다고 말했고, 아베 총리는 위안부 합의를 준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본은 북한과 1991년 1월부터 수교회담을 진행하고 있으나 양국 간의 견해차이로 별다른 결과를 얻지 못하고 있다.
경제· 통상· 주요 협정
일본은 한국의 주요 무역상대국이다. 1994년만 하더라도 한국의 대일본 수입액은 253억 8998만 달러, 수출액은 135억 2285만 달러였는데 2021년 대일본 수출액은 300억 6,181만 달러, 수입액은 546억 4,217만 달러 규모로 성장했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는 한국 기업의 진출 및 상담을 돕기 위해 나고야, 도쿄, 오사카, 후쿠오카에 무역관을 설치했고, 일본은 일본무역진흥기구 서울사무소를 설치했다. 양국이 체결한 협정으로는 1965년에 체결한 한일기본조약, 어업에 관한 협정, 재일교포의 법적 지위 및 대우에 관한 협정,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 및 한일대륙붕협정(1974)이 있다.
문화교류· 교민 현황
양국 간 민간 차원의 문화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정부 차원으로는 1979년 도쿄, 1999년 오사카에 한국문화원이 개원해 일본 현지에서 한국문화를 알리고 양국 예술인의 인적교류를 활성화 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반면 한국에는 1971에 일본공보문화원문화원이 개원되어 있어 일본의 문화·예술 홍보 및 교류에 이바지하고 있다. 2021년 기준 일본에는 818,865명의 재외동포가 있으며, 한국에는 2021년 12월 기준 24,479명의 일본 등록외국인이 거주하고 있다. 일본에 한글학교 142개가 설립되어 있어 교민의 한글교육에 기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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