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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스크랩 사빈서원 이야기
족보 추천 0 조회 234 11.01.05 01:5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명 칭 :  사빈서원(泗?書院)
소 재 지 :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임하리 226-1
(원소재지 : 임하면 사의리)
건 축 주 :  사림과 자손들
건축시기 :  1676년(숙종 2)
중건시기 :  1882년(고종19)
이건시기 :  1710년(숙종 36), 1987년
훼철시기 :  1717년(숙종 43), 1868년(고종 5)
소 유 자 :  김시우(관리자 : 김시우)
문 화 재 :  문화재 자료 제39호, 1985년 8월 5일 지정, 2동

건축 이야기
1676년(숙종 2) 경산에 사빈영당(泗濱影堂)을 세우고 청계 김진선생을 봉안하였다. 1685년(숙종 11)에 청계의 다섯 아들인 약봉·귀봉·운암·학봉·남악을 배향하고 봉안례(奉安禮)를 거행하였다.

묘호를 경덕사(景德祠)로 정하였다. 1710년(숙종 36)에 사수변(泗水邊)으로 이건(移建), 경덕사를 서원으로 높여 사빈서원(泗濱書院)으로 하였다. 1717년(숙종 43)에 어사 이명언의 보고에 의해 훼철의 명이 내렸다. 사빈서원 편액을 내리고 사빈영당으로 환원하였다. 1882년(고종 19)에 흥교당(興敎堂)인 강당(講堂)과 주사(廚舍)를 차례로 복원하고 사빈서당이라 하였다.

건축 배경
1666년(현종 7)에 표은(瓢隱) 김시온(金是?)과 야암(野庵) 김임(金恁)을 중심으로 한 사우들이 장육도(藏六島)에 묘우를 지어 청계유상(靑溪遺像)을 봉안하기로 하였다가 1675년(숙종 원년) 장육도의 지세가 궁벽하다 하여 청계의 산소가 있는 경산에 묘우의 창건을 결정하고 사빈영당을 10월에 착공하였다. 다음 해에 청계 김진을 사빈영당에 봉안하였다.

건축 특징
강당은 정면 6칸, 측면 2칸의 제법 규모가 큰 편에 속한다. 자연석 기단 위에 자연석 주초를 놓고 그 위에 원주와 각주를 혼용해서 세웠는데 중앙 대청은 정면 4칸으로 매우 넓게 하였다.

대청을 중심으로 해서 좌우에 통칸 온돌방이 드리워져 있어 일반적인 강당 평면 형식이다. 우물마루 상부는 5량가로 구성되어 있으며 박공지붕이다. 건물 정면에는‘경덕사’라는 편액이 있는데 이것은 묘우의 현판을 강당에 옮긴 것으로 보인다.

주사는 정면 5칸, 측면 5칸의 口자형 와가로서 전체는 남서향하여 배치하였다. 대문을 들어서면 안마당이 되는데 대문칸이 중앙에 배치되지 않고 좌측으로 1칸 물려 배치시키고 있다.

정면 좌측 협칸은 위치와 출입문으로 보아 마구였던 것으로 생각되며, 우측 협칸도 좌측과 동일하게 판벽으로 처리하였으나 우물마루를 깔아 현재 수납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어 그 방의 위치가 특이하다.

안마당 뒤쪽에 안채에 상당하는 공간이 있는데 정면에 대청을 두고, 대청 좌우에 안방과 윗방을 모두 2통칸으로 하여 대칭으로 배열하였다. 안방 머리쪽에는 도장방인 듯 싶은 방을 설치하여 출입은 대청에서만 가능케 하였다.

안방과 윗방은 마당쪽으로 1칸 늘여 마당에서 직접 출입도 가능하게 하였고, 우측 윗방 아래에는 부엌을 두었고, 우측도 좌측과 동일하게 배치시키고 있다. 안채 대청 상부는 5량가로 종량 위에는 판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았다.

강당은 많은 변형과 중수 등의 흔적이 있으나, 주사는 안동지방의 평면 양식인 口자 평면 형태를 잘 유지하고 있고 변형이나 개수의 흔적은 보이지 않아 원형 보존이 양호한 편이다.

건축 구성
강당(오량가구의 와가 박공집)과 주사(□자형 주택)로 이루어져 있다.

현판
흥교당(興敎堂)
존양재(存養齋)
진수재(進修齋)

사빈서원(泗濱書院)

 

 

관련인물

주향자
- 김진(金璡, 1500~1580)
의성 김씨 문중의 중흥조이다. 자는 형중(瑩仲), 호는 청계(靑溪)이다. 임하 천전에 정착한 망계(望溪) 김만근(金萬謹)의 손자이며, 병절교위(秉節校尉)를 지낸 김예범(金禮範)의 아들이다.

1525년(중종 20) 26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태학에서 공부하였으나, 나중에 과거보는 공부를 버리고 임하에 자리 잡고 집을 지어 후생을 가르치게 되었다. 서당을 열어 수십 년 동안 자제와 향중의 어린 선비들을 거기 모아 과목과 조리를 세워 가르쳤다. 아들 5형제가 모두 대·소과에 올라 훌륭히 입신하기에 이른 것은 청계 선생의 엄격한 가르침에 힘입은 바였다. 또한 버려져 있는 황무지를 농경지로 개간하는 일을 선구적으로 실천하였다.

서른이 갓 넘은 나이에 강원도 강릉 김광평(金光坪)의 광활한 황무지를 농경지로 개간하였다. 만년에는 청기현(靑杞縣)으로 옮겨 힘써 농사짓고 누에를 쳐서 자급하였다. 그 때 교육을 위해 영양 최초의 서당인 영산서당(英山書堂)을 세웠다. 학문장려의 큰 뜻으로 장학 제도를 마련하여 그 상품으로 문장검(文章劍:6·25 때 분실), 옥적(玉笛), 문장답(文章畓)을 두어 자손 중 학문이 뛰어난 이에게 전수하도록 하였다. 현재 운천종가에서 보관 관리 중이다.

사후 12년 뒤인 1592년(선조 25) 넷째 아들 학봉 김성일이 경상우도관찰사가 되어 가선대부 이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에 증직되었고, 1605년(선조38)에 다시 학봉이 선무원종훈에 녹하여 자헌대부 이조판서겸지의금부사의 증직이 더하였다. 불천위(不遷位)로 모시고 있다.
- 김극일(金克一, 1522~1585)
청계의 장자이다. 자는 백순(伯純), 호는 약봉(藥峰)이다. 소수서원에서 공부하다가 퇴계 선생께 배웠는데, 문학이 일찍 성취되어 뛰어 나시니 선생이 그 그릇을 매우 중하게 여겼다. 1546년(명종 원년) 25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가 되었다. 모친 상을 마친 1552년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를 시작으로 다양한 내외직을 거쳐, 1581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올랐다.
- 김수일(金守一, 1528~1583)
청계의 둘째 아들이다. 자는 경순(敬純), 호는 귀봉(龜峯)이다. 퇴계 선생께 배웠는데 퇴계 선생이 칭찬하셨다고 한다. 1555년(명종 10) 28세 때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고 향시(鄕試)에 여러 번 장원하였다. 1568년 42세 때 청계선생이 터를 정해준 전암 명승지에 백운정(白雲亭)을 짓고 그 곳에 거처하였다. 43세 때에 과거를 보기 위해 동생들과 성균관에 유학중 동생 운암 김명일이 질환으로 위독하여 김명일을 데리고 고향으로 내려오던 중 김명일이 사망하자, 그 뒤로는 과거를 단념하고 백운정에서 지내며 자질과 후진을 가르침에 정성을 다 하였다. 1583년 천거에 의해 자여도찰방(自如道察訪)에 제수되어 상경 중 여사에서 별세하였다.
- 김명일(金明一, 1534~1570)
청계의 셋째 아들이다. 자는 언순(彦純), 호는 운암(雲巖)이다. 글 재주가 뛰어나 일찍이 청계 선생의 명으로 소수서원(紹修書院)에서 공부할 때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1517~1563)이 한번 보고 장래에 크게 이룰 그릇이라 여겼다고 한다. 이 때 퇴계 선생께서 도산에서 가르침을 베풀고 있었는데, 아우 문충공 김성일과 함께 경서를 가지고 문하에서 가르침을 청하였더니 손수 잠명(箴銘)을 써주었다고 한다. 1564년 31세에 아우 학봉과 남악과 함께 3형제가 일시에 진사회시에 동방급제하였다. 1569년(선조 2) 중형 귀봉, 아우 남악과 함께 향시(鄕試)에 합격, 이듬해 3형제가 같이 회시(會試)를 보러 상경했다가 병으로 과거를 포기하고, 귀봉 선생의 부축으로 하향하던 중 경기도 용인에서 별세하였다.
- 김성일(金誠一, 1538~1593)
청계의 넷째 아들이다.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峯)이다. 아우 남악과 퇴계 선생께 수업하였다. 1566년 퇴계 선생은 요순 이래 성현이 전한 심법을 차례로 적은 80자 병명(屛銘)을 써 주었다. 1563년 26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567년 4월에 증광향시에 합격하고, 6월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벼슬살이 동안 늘 강직하였고 직간에 과감하였다. 외직에 나아가서는 백성을 늘 잘 보살폈고, 학문의 진흥에 힘을 썼다. 1590년 4월 29일, 일본통신부사로 파견되어 국위를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고 사신으로 당당히 행동하여 풍신수길(豊臣秀吉)의 온갖 간계와 위협에도 끝까지 굴하지 않았다.

1592년 8월에 경상좌도관찰사를 배명하고, 9월 4일에는 우도관찰사를 배명하였다. 명을 받은 이래 전장에서 과로하여 1593년 4월에 진주공관에서 졸하였다. 1605년에 선무원종공일등(宣武原從功一等)에 녹하고 가의대부 이조참판을 추증하였다. 1676년 3월에 자헌대부 이조판서겸지경연판 의금부 춘추관성균관사 오위도총관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에 가증(加贈)되었다. 1679년(숙종 5)에 문충(文忠)의 시호가 내려졌다.
- 김복일(金復一, 1541~1591)
청계의 다섯째 아들이다. 자는 계순(季純), 호는 남악(南嶽)이다. 형 학봉과 백운동에서 독서하고 퇴계 선생 문하(門下)에서 학문의 요지를 깨치고 스스로 깊이 노력하여 공부하였다. 1564년 24세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1570년(선조 3) 문과에 급제하였다. 성균관 박사, 전적을 거쳐 형조정랑을 역임하였고, 그 뒤 울산군수, 창원부사 등의 외직을 역임하였는데, 치적이 영남 여러 고을의 으뜸으로 칭송되었다. 예천 봉산서원(鳳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안동 > 임하임동권 > 임하리
- 반변천 곁에 자리 잡은 마을
임하리는 임하현 관아가 있었다 하여 현내·현내동이라 하였으며, 또 반변천(半邊川) 곁에 있으므로 임하라 하였다. 1914년 추월리 일부를 합하였으며, 1931년 임하면에 속하게 되었다.
임하 1리와 2리로 분리되어 있다. 임하 1리가 현내, 임하 2리가 나중에 편입된 강달·추월(秋月)이다.

현내는 약 500년 전 단양우씨(丹陽禹氏)가 입향하여 마을을 형성했다고 하며 단양우씨, 의성김씨(義城金氏), 안동김씨(安東金氏) 등이 거주하고 있다.

임하리에는 많은 문화재가 있는데, 특히 임하 1리에 오류헌(五柳軒), 양동댁(良洞宅), 이우당종택(二愚堂宗宅), 임하동삼층석탑(臨河洞東三層石塔), 호계서원(虎溪書院), 사빈서원(泗濱書院), 임하동십이지삼층석탑(臨河洞十二支三層石塔) 등 지정문화재와 송석재사(松石齋舍), 원림사지석불좌상(院林寺址石佛坐像), 와룡정사(臥龍精舍), 길헌(吉軒), 학산정(鶴山亭) 등의 비지정문화재가 있다. 이 문화재들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도 있고 두 댐의 건설로 이건한 것도 있다.

임하 1리의 중앙에 있는 중촌(中村·中里)에는 폐교된 임하 동부초등학교가 있으며 학교 남쪽에 임하동십이지석탑, 임하동중앙삼층석탑, 임하동동삼층석탑 등이 있다. 그리고 중마 서쪽 끝에 있는 이우당은 안동권씨(安東權氏) 부정공파(副正公派) 임하지파(臨河支派) 이우당 권환(權?)의 종택으로 1640년에 건립되었다. 원래 임동면 지례에 있었으나 이건하였다.

한절골은 임하 1리의 남쪽에 있는 마을로서 옛날에는 큰절이 있었으나 지금은 절이 없다. 마을 초입에는 지례에서 이건한 오류헌이 있다. 오류헌은 지촌(芝村) 김방걸(金邦杰)의 셋째 아들 목와(木窩) 김원중(金遠重)이 분가할 때인 1678년에 건립한 것이다.
오류헌의 북쪽에 원림사지와 오층석탑, 임하동 연화좌대 석불좌상(蓮花座臺石佛坐像) 등이 산재되어 있어 절터였음을 보여준다.

뒷모테는 길마의 뒤쪽에 있는 마을로 지례에서 이건한 지례리 양동댁이 있다.

푸래실은 경산 산기슭으로 풀이 많아서인데, 이곳에 사빈서원과 송석재(松石齋), 경산강당, 경산재사가 있다. 경출산·경산은 푸래실 위쪽 산으로 청계(靑溪) 김진(金璡)의 묘소가 있다.

잣밭은 임하댐 관리사무소가 있는 마을인데, 1573년에 세워진 호계서원(虎溪書院)이 있다. 호계서원은 원래 월곡면(月谷面) 도곡동(道谷洞)에 있었으나, 안동댐 수몰로 이곳으로 옮겨졌다.

임하 1리의 서쪽에 있는 마답은 옛날 현청(縣廳)이 있었던 곳으로 지례에서 이건한 국탄댁이 있고, 오뭇재[五美山]에는 선유정(仙遊亭)과 학산정이 있다. 백운정은 귀봉(龜峯) 김수일(金守一)이 창건하였고, 현판은 미수(眉?) 허목(許穆)이 썼다.

강달은 임하 2리 마을로 임하 1리에서 메대고개를 넘어 2km 정도 가면 있다. 마을 동쪽 산기슭에 갈계(葛溪) 김도(金燾)가 지은 갈계정(葛溪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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