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무엇인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쓸때없는 잡음들이 일어나 사실을 알이고저
이글을 씁니다 내용은 임의로 조작한것이 아니고 기록에 있는 말입니다
1. 서기1453년(계유년)에 걔유정란으로 충장공 낙안에 유패되셨다가 다음해인
갑술년에 사사되시고 광노자는 남주은거 하였다
2. 서기 1719년(기혜.숙종 46년)-----------------계유정란 266년후
충장공을 비롯한 3상의 복관청원이 시작되었다
3. 서기 1746년 (영조 42년 12월)----------------계유정란 293년후
영의정 홍봉안 좌의정 김종서 우의정 정분 등 3상이 같이 복관 되었다
4. 서기 1758년(영조 34년)---------------------복관 12년후
충장공(忠莊公) 이라는 시호(諡號)가 하사 되었다
5. 서기 1759년 (영조 35년)---------------------복관 13년후
연기 정씨가 충장공의 양자손 이라고 예조에 정소하고 다음해에 진양정씨가 직계후손 이라고
상소하였으나 영남감사인 조엄의 자세한 조사로 주상의 윤허를 받아 양측을 공히 견척(見斥)하였다
6. 서기 1765년 (영조 41년)---------------------복관 19년후
장흥에서 마씨(馬氏)와 산송이 발생하여 장흥부사 황인영에 의하여 정관로 지석이 출토되었다
7. 서기 1766년 (영조 42년)---------------------복관 22 년후
연기 정가가 동지석이 위조라고 16개의 의단점을 만들어 예조에 정소하니 예조에서 지석을
자세하게 감정하고 2년후인 영조 44년에 지석은 위조가 아니고 정광로가 정분의 아들이
명백하다고 예조제사(판결)을 내렸다
8. 이에 따라 동년 영조 44년12월 23일에 충장공의 적장손인 정규환을 금부도사에 녹용(임명)하였다
9. 서기 1786년(정조 10년)----------------------복관 40년후
장흥의 충열사를 사액하고 정분 정광로 부자를 충열사에 함께 제향하라 명하고 조정에서 메년
제관을 보내 치제하였다
10. 서기 1788(정조 12년)-----------------------복관 12년후
연기 정홍달등이 충장공의 계보에 대한 의의를 다시 정소하자 예조에서는 충장공의 아들은
정광로가 명백하니 더 이상 거론하지 말라 명하고 정홍달등을 형조에서 학죄하라 명하였다
11. 서기 1804년 (순조 5년)----------------------복관 58년후
충장공의 충신정려가 하명되었다
12. 서기 1808년 (순조 9년)----------------------복관 62년)
충장공의 부조지전(不조之典)이 하사되자 연기 정가가 후손이라고 거짓정소하고 모수하여
가므로 장흥에서 예조에 정소하여 장흥직손가에서 모심이 마땅하다는 제사를 받았다
13. 서기 1812년(순조 12년)----------------------복관 66년후
진양의 선대인 정용택등이 사당을 새우고 충장공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올임으로 장흥에서
예조에 정소하여 이사당을 철패하게 하고 신주는 매안하라 명하였으며 주동자는 학죄하였다
14. 서기 1816년 (순조 16년) --------------------복관 70년후
정광로에게 존사지효(存祀之孝)를 이정하여 효자정려가 하명되었고 충장공과 독공의 충신
정려와 광노자의 효자정려를 기념하고저 3세 충효문이 새워젔다
15. 서기 1820년(순조 20년)----------------------복관 74년
장흥 선대인이 충장공 묘전에 묘전비를 세우려하자 진양 정석손등이 이를 방해하므로
예조에 정소하여 관의 보호하에 입비를 마첬다
이 무렵 장흥에서 분묘를 관리하였고 시제도 모시고 있었다
16. 서기 1824년(순조 24년)-----------------------복관 78년후
진양 정상동등이 하동정씨 묘소에서 지석이 출토되였다고 말하며 지문에 의하면 자기들이
후손이라고 소위 격쟁원정(擊錚願情)을 하여 예조에서 사실을 자세히 조사하였으나 지석을
위조한것이 나타나고 정상동등은 형조에 학죄되었다
17. 서기 1828년(순조 28년)------------------------복관 82년
청천군 휘을보의 묘에서 다시 지석이 나왓다고 예조에 정소하였으나 역시 지석이 위조되었음이
나타나고 주동자는 학죄 되었다
장흥 문적에는 청천군의 분묘는 실전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위조지석이 나온 현재의 송곡 청천군
분묘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
18. 서기 1935년 --------------------------------일본치하 소화 10년
진양 정가는 전기 1820년에 장흥에서 새운 충장공 묘전비를 불법 도괴하여 묘전에 묻어 버리고
1946년(해방다음해)에 가짜 충장공 묘전비를 새웠다
1820년 장흥에서 새운 묘전비는 이번 재판과정에서 증거물로 신청되어 발굴되었고 현금 장흥
문중에서 보관하고있다
19. 최근 분묘소유권 확인 소송은 별지 1.2.3.심 판결문 및 양문중 합의서 와 같으며
1946년 진주측이 새운 가짜비는 전부 철거 매장되었고 진주의 선산(진주시 상대동 산 3-2)은
충장공파 대종회 명의로 등기 이전하였으며 양문중은 충장공파 대종회를 구성하여 화합 운영하고있다
첫댓글 소중한 자료 잘읽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주장하시는 자료의 출처를 밝혀주시면
참조하도록 하겠습니다.
한마듸로 소설을 쓰고 있는검니다 정광노(狂奴)에서 요즘은 光露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