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章 絶世奇學과 천후
석동(石洞).
신비의 비경(秘境)속에 자리한 천연석동(天然石洞)이었다.
반원 약 십 장 정도의 넓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 것은
암흑의 무저갱 속에 이러한 천연석동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천후, 그는 석동의 정중앙에 가부좌를 튼 채 앉아 있었다.
벌써 육 개월이 지난 그의 모습은 실로 가관이었다.
의복은 이미 여러 군데가 헐어 너덜거리고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제법 수염도 텁수룩했다.
육 개월, 사실 긴 시간이다.
천후는 그동안 만년한열석에 기생하고 있는
만년석균(萬年石菌)과 비슷한 식물을 먹고 지냈다.
기이하게도,
일종의 버섯처럼 생긴 그 식물은 갈증은 물론 허기도 메꾸어 주었고,
때론 무공수련에 지친 그의 육신을 지극히 상쾌하게 만들어 주었다.
오직 무공수련에만 전념해온 탓일까?
약간 초췌해 보이는 천후의 얼굴은 섬뜩할 정도로 무표정했다.
가늘게 떠있는 그의 두 눈에선
야수의 그것과도 같은 안광(眼光)이 줄기줄기 뻗어 나온다.
꼭다문 입술은 파리해 보이긴 해도
무언가 이루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가득 배어있다.
석동(石洞)은 상당히 넓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장식되어 있지 않았다.
사방은 온통 그냥 기이한 암석으로 구성되어 있는 그대로의 천연석동이었다.
한데 천후의 무릎 앞,
그곳엔 열 몇 장의 석판과 낡은 천으로 된 긴 두루마리,
그리고 하나의 조그만 옥합이 보였다.
일견(一見)해도 몹시 오래된 듯한 물건들!
천후는 단정히 앉아 그것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지극히 잔잔해져 있는 그의 시선,
그는 지금 그날 아침 야접이 그에게 전해준 이야기들을 되뇌이고 있었다.
이곳 무저갱의 생존자는 오직 다섯 사람이었다.
그중 세 명은 노부보다도 먼저 빠뜨려진 인물들이다.
그들은 모두 각기 혼자서 외롭게 삶을 연명하다 죽어가면서 이것들을 남기고 갔다.
열 장의 석판!
그것은 가공할 지력(指力)으로 암석을 파서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이 석판은 지금부터 구백 년 전(九百年前)의 인물이었던
천세유아존(天世唯我尊)이 남긴 것이다.
천세유아존,
그의 유필(有筆)에 의하면
그는 나이 열 아홉에 천하제일고수(天下第一高手)의 명예를 차지한 마인이다.
그는 이곳에서 죽어가면서 그의 모든 절학을 남겨 놓았다.
이 석판에는 그의 무학(武學)이 총망라 되어 있다.
천세유아존의 유물.
열 장의 석판에는 천세유아존의 모든 마공(魔功)의 정수인
절대마공삼식(絶代魔功三式)이 수록되어 있었다.
혈세수라집마기(血世修羅集魔氣).
그것은 일종의 강기( 氣)였다.
마강기(魔 氣)!
특이한 것은 혈세수라집마기의 강기는
신공의 위력보다 검, 도 등 무기를 사용해
검기나 도기에다 혈세수라집마기를 실어 폭사시키는 방법이었다.
실로 가공할 마강기!
일반 신공이 느리고 공격부위가 한계가 지어지는 약점이 있다면,
혈세수라집마기는 무기에 실어 강기의 형태를 변형시킬 수 있으니
쾌속과 공격부위의 다양성에 있어서 가히 독보적인 것이다.
혈세수라집마기는 총 삼단계 삼식으로 되어 있었다.
제 일단계 흡(吸).
상대의 어떠한 강기나 내력(內力)이라도 일단 혈세수라집마기는 흡수해 버린다.
상대의 내력탈진,
심지어 십이성 끌어 올리면 상대의 모든 진기(眞氣)는 물론
심혼(心魂)까지도 빼앗아 버리고 만다.
제 이단계 회(廻).
상대의 내력을 빗겨가거나 오히려 뒤로 돌려 상대를 공격할 수 있다.
또 상대의 공격을 오히려 상대의 동료에게 방향을 바꾸어 돌려버릴 수 있다.
적의 차륜지계공(車輪之計功)을 당했을 때 상대하기 알맞은 가공할 위력!
제 삼단계 탄(彈).
혈세수라집마기에 부딪친 어떠한 것도 튕겨나
오히려 두 배나 증가된 위력으로 상대를 향해 날아간다.
일종의 반탄지기(反彈之氣)!
혈세수라집마기를 십이성 대성하지 않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조차 없는 경지,
하나 완성만 하면 천하를 굽어볼 수 있다.
천후는 내심 크게 감탄하고 있었다.
'과연 천하는 넓고 기인이사(奇人異士)는 많다.
천세유아존,
그는 이름답게 가공할 무공을 지닌 일대마인이었음에 틀림없다.'
천후는 깨달을 수 있었다.
무학(武學)의 깊이는 그 끝이 없다는 것을…
이윽고, 그는 두 번째 낡은 두루마리를 주시했다.
잡으면 금방 우수수 부서져 버릴 것 같은 두루마리였다.
지금부터 오백 년 전(五百年前) 사람이다.
그는 스스로 칠절미랑(七絶美郞)으로 자칭하고 있다.
그는 스스로 일곱 가지 조예에 달통했다고 써놓았다.
그것은 금(琴), 기(騎), 서(書), 화( ), 음(音), 검(劍), 기(碁)에 해당한다.
특히 그중에서도 음률(音律)에 대한 조예와
검법(劍法)에 대한 조예는 내가 봐도 신(神)의 경지였다.
칠절미랑(七絶美郞)!
그는 당시 천하제일미남(天下第一美男)이었다 한다.
풍류(風流)와 멋을 지닌 아름다운 미장부.
하나, 그의 일신조예는 가히 하늘조차 고개를 돌릴 정도로 가공했으니…
후일(後日),
천후는 칠절미랑의 무예를 천하에 알릴 뿐만 아니라,
그와도 깊은 연관을 지니게 되니…
칠절음보(七絶音譜).
칠절미랑이 남긴 모든 악기(樂器)의 연주법(演奏法)과
단 세 곡의 악보가 기록된 천고비급(天古秘級)이었다.
금적소(琴笛簫)는 물론 심지어 징과 꽹과리, 북[鼓]까지 다룰 수 있는
기예가 수록되어 있었다.
당시, 칠절미랑은 그 중에서도 적(笛)을 주로 애용했다고 한다.
은은한 월광(月光)이 스며들어 있는 듯한 길이 넉 자의 긴 적(笛),
칠절미랑은 그것을 월광적(月光笛)이라고 이름 붙였다.
천후는 길다란 월광적(月光笛)을 주워들고 유심히 관찰했다.
'옥(玉)으로 만들어져 있군.
그것도 천세(千世)에 보기 드문 만년한옥(萬年寒玉)으로 되어 있다.'
기이한 전율이라고 해야할까?
아니면 오백 년의 시차(時差)를 두고 맺어진 인연의 소용돌이라고 해야 옳을까?
천후는 그 순간 자신도 알 수 없는
기이한 마력(魔力)이 월광적을 통해 전해지는 것을 느꼈다.
'칠절미랑! 당신은 생각컨대 풍류를 알고 있었던 분 같은 생각이 드오이다.
후후후…나 또한 풍류를 배우고자 하는 몸,
어쩌면 당신의 영혼이 있다면 이 월광적을 통해 나를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천후의 타고난 장난기와 풍류가 다시 살아났는가?
지난 육 개월 동안 잊고 있던 흐릿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다시 번지고 있었다.
칠절음보(七絶音譜)에는 모두 세 곡의 악보가 수록되어 있다.
제 일곡(第一曲) 찬혼곡(讚魂曲).
인생의 참다운 가치와 멋을 노래한 지극히 듣기 좋은 악보였다.
봄날의 희망과 가을날의 우수가 잘 조화되고 있는 황홀한 음률.
하나, 조심해야 한다.
그 황홀하고 신비한 음률 속에 혼(魂)을 앗아가는 마음(魔音)이 들어 있으니…
아차하면 그대는 웃음과 황홀 속에 생(生)을 던져야 할 것이다.
제 이곡(第二曲) 진혼곡(鎭魂曲).
처절한 한(恨)을 지닌 영혼이여!
조용히 잠들라!
세속의 한(恨)은 사실 한갖 욕망의 작은 파편에 불과한 것!
진혼(鎭魂)의 곡(曲)을 듣고 영혼을 쉬게 하라.
영(靈)과 생(生)의 차이도 묻지 마오.
진혼곡이 끝나는 순간 그대 또한 한 많은 이 생(生)을 떠날지…
제 삼곡(第三曲) 파심곡(破心曲).
돌연, 천지를 휘집고 천군만마(千軍萬馬)가 질주한다.
장강(長江)의 거센 물줄기가 때마침 거센 폭풍과 더불어 천지를 덮는다.
뇌성벽력은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떨게 하고, 하늘에서 혈우(血雨)가 뿌려진다.
파심(破心)!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그 목숨을 내놓아라.
이 곡(曲)이 끝나기 전에 그대를 구천지옥(九天地獄)으로 보낼지니….
삼갑자(三甲子)의 공력이 있어야만 연주가 가능하다.
그렇지 않으면 연주자의 기혈(氣血)이 거꾸로 흘러 전신을 태워버리고 만다.
하나, 만일 삼갑자의 공력이 넘는 자가 파심곡을 끝까지 연주하게 되면,
그때가 바로 천지종말(天地終末)이 실현되는 날이다.
천후의 안색이 돌연 파래졌다.
'이… 이것은 음률이 아니다.
음악이란 궁극적으로 인간의 영혼을 구제하는 데 있다.
음악 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의 목적은
삶의 정화와 인간의 미(美)를 충족시켜주는 심미(審美)적인 것이어야 한다.'
칠절음보를 쥐고 있는 천후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한데… 이것은 예술이 아니다. 살인수단이다.
그것도 단숨에 수천 명의 인명을 살해 할 수 있는
가공할 지옥가(地獄歌)가 분명하다.'
그렇다. 음률에다가 연주자의 무궁한 공력을 실어 보내면
그 음역 안에 있는 모든 것은 그 염황 아래 있게 된다.
한데, 하물며 그 음률이 인간의 목숨을 노리는 살인광곡(殺人狂曲)임에야….
전율, 심장을 거세게 후벼파는 짜릿하고 공포스런 그것은 분명히 전율이었다.
천후는 잠시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젖어들었다.
인간은 때론 자신과의 대화가 필요할 때가 있다.
하나 천후의 경우는 달랐다.
'인간은 어떠한 경우이던 자기방어의 본능을 지닌다.
하물며 그 사람이 검에다 생명을 걸고 있는 무인(武人)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칠절음보는 분명히 무섭도록 잔인한 곡(曲)이다.
하나, 예술또한 생명의 존귀함 이전의 것이 아니던가….'
천후의 떠진 눈에는 어느새 굳은 의지와 결의가 배어 있었다.
그런 다음, 그는 주저하지 않고
칠절미랑의 단 일초의 검학(劍學)이 실린 검보(劍譜)를 펼쳤다.
칠절검보(七絶劍譜)!
단 일초의 검보였다.
검법(劍法)은 원래 초식의 정교함과 화려함 때문에 가장 많이 쓰이는 무기다.
따라서 중원무림사에서도 많은 검법과 초식이 창안되기도 했다.
한데 이것은 달랐다.
보통의 검법은 보통 일정한 초식이 있게 마련인데 이건 없었다.
그것이 당연한 것은, 칠절검보의 검학은 단 일초에 모든 것이 좌우되기 때문이다.
아니, 엄밀히 말해서 그것은 초식도 아니다.
그저 검을 검집에서 뽑고 다시 집어넣는 자세의 연속일 뿐이었다.
한데 시간이 문제였다.
쾌검법(快劍法)!
그렇다. 그것은 빛살보다도 더 빠른 쾌검법이었다.
이름하여….
연비류(燕飛流)
제비[燕]가 흐르는 물[水] 위를 스치듯 경쾌하다하여 붙여진 이름!
오오… 연비류!
상대의 검이 채 검집을 빠져나오기 전에 상대는 이미 죽어있다.
그것도 상대의 목에 가느다란 핏방울 한 점만 남겨둔 채…….
가공(可恐)하다는 말로는 오히려 부족하다.
사검(死劍), 그렇다. 그건 그냥 사검(死劍), 곧 죽음의 검이다.
천후는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떻게 무인이, 특히 검사(劍士)가 상대의 행동을 놓쳐
상대가 언제 검을 뽑았는지도 모른단 말인가?
연비류! 검식상에는 분명히 가능하다고 했으나 내가 보기에는 불가능하다.'
하나, 그가 시험삼아 단 한 시진 동안 검식대로 연공을 하게 되면,
그 생각은 대번에 바뀌고 만다.
'도… 도대체 인간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
어떻게 인간이 이토록 빠른 쾌검을…
야접무와 쌍환비가 빠르다 하나, 연비류 만큼은 못하리오.
하나 연비류는 단점이 있다
. 그것은 상대가 자신보다 더 빠른 신법을 지닌 자라면
자신의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왜냐하면 연비류는 단 일초에 생사(生死)를 결(決)해야 되는데,
그 일초에서 실수하면 전신의 모든 곳은 상대에게 헛점으로 보이게 되기 때문이다.'
이만하면 천후의 재지와 오성은 하늘이 내렸다고 밖에 할 수 없지 않을까?
천후는 대번에 연비류의 장단점을 파헤친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약점을 알면 더 빨리 성장해 갈 수 있는 법!
연비류란 검식에 빠져든 천후의 두 눈이 그 어느때 보다도 더욱 뚜렷해졌다.
'연비류의 생명은 빠름[快]에 있다. 그러나 위험도 안고 있다
. 이걸 보완하는 방법은 보법(步法)과 신법(身法)이다.
그렇다. 보법과 신법만 완전하게 익히면…
한데 그런 것을… 내가 알고 있는 것도 같은데…?'
그때였다. 그의 뇌리는 섬전처럼 스쳐가는 한가지 기억이 있었다.
'그…그렇다. 취몽노인과 함께 바둑을 둔 적이 있다.
그때 취몽노인이 일부러 가르쳐준 그 형마법!
그렇다. 이제 생각하니 그것이 바로 보법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무영취선보(無影醉仙步)!
언젠가 월하루에서 만기와 취몽의 대화 속에 등장했던
개방제일기인 취선의 절세유학이 아니던가?
한데…천후가 그걸 머리에 떠올리고 있다.
또 하나의 신화가 펼쳐지려는 순간인 것이다.
개방최고의 절학 중의 하나가
항주의 미친서생[狂書生] 천후에게서 말이다.
마지막 세 번째 물건은 옥합이었다.
전신이 칠흑 같은 옥합!
천후는 서서히 그것을 열었다.
그는 삼백 년 전(三百年前) 인물인데 중원인(中原人)이 아니다.
생각컨대, 서장(西藏)의 고수였던 것 같다.
그는 스스로를 파달뢰라 칭하였다.
너는 언젠가는 서장에 들러 파달뢰란 사람의 내막을 캐봐야 하리라.
왜냐하면 그는 아무것도 남겨놓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 옥합 속에는 삼백 년 전 중원무림의 정세와 인물 등이 자세히 기록된
기밀문서만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파달뢰!
서장이인(西藏二人)인 그는 어떤 목적으로 중원에 들어 왔는가?
옥합, 그 속에는 당시의 중원정세가 환히 드러나 있었다.
또한 수백 명의 무림고인들의 신상에 대한 자세한 기록도 있었다.
'서장인이 중원기밀을 캤던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천후가 당연히 갖는 의혹이었다.
'하나, 지금은 이걸 생각할 때가 아니다.
어젠가 내가 무림에 나가는 날
내 반드시 서장에 들러 파달뢰란 자의 내막을 캐보리라!'
천후는 옥합을 닫고 잠시 깊은 상념에 젖어들었다.
'지난 육 개월, 나는 오직 야접무를 익히는 데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얻은 이 기학(奇學)과 천면후의 기학 등을 합치면
가히 절세적인 무학을 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 야접, 그분은 내게 이년연공(二年練功)을 지시했다.
그러므로 일 년 반,
그 세월동안 나는 이 모든 기학들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천후는 마음을 정한 듯 모든 것을 잊고 서서히 연공에 들어갔다.
그의 몸에는 어느새 전보다 더 짙은 향기와 더 빛나는 오색서광이 형성되고 있었다.
"역시 기재입니다. 저토록 난해한 기학을 단 하루만에 모두 암기해 버리다니……."
"천세유아존의 혈세수라집마기와 칠절미랑의 칠절음보와 연비류는
가히 천하를 뒤집어 엎을 정도지…
한데 자네는 뭔가 기이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나는 실로 기이하다는 생각이 든다."
"……?"
"저놈이 아무리 하늘이 보낸 천황성이라 하더라도,
천하의 모든 복연(福緣)을 혼자서 차지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지요. 그것이 인간의 한계가 아닙니까?"
"한데 마치 그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저놈은 무려 네 명의 절세고수의 무학을 한몸에 전수 받았다.
그것도 아주 빠른 시일에…."
"오오…."
"더구나 이 모든 복연이 마치 저놈을 위해 안배된 듯하니…
결국 나를 포함한 네 사람은
저놈을 위해 세상에 존재하였지 않나 하고 생각이 들 정도다."
"새…생각해 보니 그렇습니다!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할지…."
"또 있다. 앞으로 일 년 반만 지나면 저놈은 이곳에서 나가야 한다."
"……?"
"무저갱은 도저히 살아서는 나갈 수 없는 곳이다.
하나 한가지 길은 있다.
이곳 바로 만년한열석의 아래 암반으로 통하는 한냉천(寒冷川)이지."
"하지만…
한냉천은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얼어죽어 버리는 죽음의 사수(死水)가 아닙니까?"
"그렇다. 하지만 보통사람이 아닌 천후 같은 놈은 그곳을 통해 갈 수가 있다."
"오…그럼, 저놈이 천상미인궁의 계집과 화합하여 이룬 무극지체(無極之體)의…."
"그렇다. 한냉천을 지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무극지체 뿐이다.
그것도 천일극양과 천월극음이 합쳐진 무극지체…."
"오오…."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그리고….
* * *
일 년 반(一年半)!
세월은 참으로 빠른 것이었다.
깊고 깊은 암흑의 무저갱 속에도 세월의 흐름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하나, 일 년 반이라는 세월이 지난 뒤 무저갱 속에는 아무도 없었다.
천후도, 야접도, 만통회주였던 기호랑도….
아니, 있다 하더라도 볼 수가 없었다.
세월이 흐른다는 것 뿐!
시간 속에 묻혀간 인간의 자목들은 그냥 그대로 스러져갔다.
천후가 어떻게 됐는지….
야접의 말처럼 한냉천을 건너 죽음의 사투 끝에 태양을 볼 수 있었는지…
아니면 끝내 암흑 속에서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어가야만 했는지….
그리고 운명의 기인 야접! 그는 또 어떻게 되었는가?
기호랑은…?
세월 뒤에 남은 것은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무저갱 안에 그 누구도 들어온 적이 없었다는 것처럼….
* * *
악양루(岳陽樓).
동정호반을 낀 아름다운 도읍 악양에서 가장 유명한 주루의 이름이다.
사시사철 호방한 풍류객과 시인묵객(詩人墨客)의 묵향(墨香)이 끊이지 않고 풍겨나는 곳,
동정호의 장관과 함께 어우러진 악양루의 삼층누각은 실로 선경(仙境) 바로 그것이었다.
낙조(落照), 세월을 무심(無心)하다 하는 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석양(夕陽)이다.
그림같이 잔잔한 동정호반은 어느덧 붉은 낙조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진다.
수면에 반쯤 잠긴 시들은 태양!
피처럼 붉게 타오르는 수면!
거기에다 한 조각 서러운 조각구름이라도 있으면 절로 마음이 스산해 지리라!
한데 그때다.
琉璃鐘(유리종).
琥珀濃(호박농).
小槽酒滴眞珠紅(소조주적진주홍).
烹龍 鳳玉指泣(팽룡포봉옥지읍).
羅 繡幕圍香風(나위수막위향풍).
吹龍笛(취용적).
擊 鼓(격타고).
皓齒歌(호치가).
細腰舞(세요무).
況是靑春日將暮(황시청춘일장모).
桃花亂落如紅雨(도화난락여홍우).
勸君終日酩酊醉(권군종일명정취).
酒不到劉 墳上土(주부도유영분상토).
아름다운 유리잔에,
부은 술은 호박색.
작은 술잔에 떨어지는 진주 같은 술은 빨갛게 빛나고,
용과 봉 같은 맛있는 고기 찌고,
구우니 옥 같은 기름 흘러 울며,
명주휘장 수놓은 방장 안에서 향긋한 바람 불어 일어난다.
용의 소리나는 피리 불고,
악어 가죽의 북을 치며,
하얀 이 드러내 노래하는 여인,
가늘고 날씬한 허리를 비틀어 춤추는 가인,
그뿐이랴!
이 봄날은 바야흐로 저물려 하고,
복숭아 꽃송이는 빨간 비가 내리듯 흩어지지 않는가.
그대여, 권하노니 온종일 마셔 꼭지가 돌만큼 취하여 보세.
술 아니면 못살던 유영조차 무덤엔 술이 따라와 주지 않았었나니….
낭랑한 듯한 음성,
그것은 누군가가 석양의 흥에 겨웠던지 읊조린 싯구[詩句]였다.
권주가(勸酒歌)라고 해야 할까?
하나, 지금 낭랑하게 싯구를 읊조리고 있는 자는 이미 취해 있었다.
"끄윽…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분이던 유영조차도
죽어서는 술을 가져가지 못했다니…끄윽!"
제대로 무슨 말인지 조차 알아들을 수 없도록 취해버린 사나이!
비틀비틀 휘청이는 걸음걸이가 매우 위태롭게 보이고
손에 든 술 호로가 유난히 커 보인다.
천후였다.
운명이 그를 무저갱으로 보내버린 그가 때아니게 이곳 악양루에 나타나다니….
"끄윽… 장진주(將進酒)의 모든 싯구는 나를 항상 술 가까이 가도록 하거든,
장진주를 없애버리거나, 술을 없애버리거나 둘 중에 하나를 해야지… 끄윽…."
그는 취해 있었다. 아주 많이 취해 있었다.
하나, 그의 위태롭기만 한 발걸음은 어느새 악양루의 난간을 향해 오르고 있었으니….
악양류 안, 그곳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술을 마시고 있었다.
한데 그 중에서도 유난히 눈에 돋보이는 세 사람이 있었으니…
일남이녀(一男二女),
그야말로 선남선녀(仙男仙女)와 같은 풍도와 미태(美態)를 지닌 세 사람!
꽃이 무색할 정도의 두 여인은 가히 천하절색이었다.
화려한 비단으로 붉게 몸을 장식한 요염하면서도 귀태가 자르르 흐르는 여인,
터뜨리면 금방이라도 주사빛 액체가 흘러 나올것만 같은
붉은 입술이 너무나 매혹적이었다.
거기에다 가끔씩 보이는 볼우물은 또 어떠한가?
하지만, 아름다운 눈가에 흐르는
약간은 도도해 보이는 기운이 있어 더욱 돋보이고 있으리라.
또 한 명의 여인, 눈처럼 새하얀 백의를 걸치고 있다.
그린 듯 아름다운 아미가 유난히 눈에 띄는 여인,
함초롬이 새벽의 이슬을 머금은 듯한 두 눈동자는
가만히 있어도 심금을 찌르르 울린다.
또한 그림같이 아름다운 자태는
그야말로 동정호의 수면만큼이나 잔잔하고 품위가 있다.
앞서의 여인이 만개한 장미라면 이 여인은 난초(蘭草)와도 같은 모습이다.
하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두 여인이야말로 화용월태(花容月態)니,
경국지색(傾國之色)이니 하는 형용어에 꼭 들어맞는
절색가인(絶色佳人)들이라는 것이었다.
반면, 두 여인과 호탕하게 웃으며 담소하고 있는
미청년(美靑年)은 또 어떠한가?
영웅의 모습이 저러할까?
단단해 보이는 몸과 부리부리한 눈,
태산 같은 콧날의 기개와 한일자로 굳게 다문 당당한 입술,
마치 검날을 연상케 하는 짙은 검미와 단정히 빗은 머리,
거기에다 새하얀 비단으로 된 영웅건(英雄巾)이 있어
금상첨화(錦上添花)라고 할까?
어쨌든, 가히 하늘 밖의 선인들 같은 그들 세 사람은
주위의 선망어린 눈초리를 받으면서 담소하고 있었다.
한데, 천후가 들어선 것은 바로 그때였다.
비틀비틀
"끄윽…."
연신 휘청거리면서도 그 트림소리는 잊어버리지 않는다.
그리고 게슴츠레 뜬 두 눈으로 주루 안을 한 번 힐끗 쳐다본 후
비틀비틀 다시 걷는다.
창가의 자리를 찾는가?
그의 발걸음은 창가를 향하고 있었다.
한데… 한순간,
뾰족한 비명이 주루 안을 일시에 죽은 듯이 잔잔하게 만들었다.
"아얏…."
그것은 분명히 여인의 비명이었다.
자연히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해 졌을 때,
오오… 앙증 맞도록 귀여운 옥음(玉音)!
"이봐요! 눈은 도대체 왜 달고 있는 거예요?
흥! 본 낭자의 발은 그대가 밟으라고 있는 줄 알아요?"
하나, 그 순간만큼은 마치 된서리가 내린 듯 차가워 있으니….
여인! 바로 붉은 주사빛 입술이 너무나도 매혹적인 바로 그 여인이었다.
누군가 그녀의 발을 밟은 것 같다.
한데…이게 어찌된 일인가?
천후가 아닌가? 그녀의 발을 밟은 그 장본인이…
한데, 이런 경우가 있나…
"여보시오. 내 눈이 발에 달려 있었다면
왜 하필 지저분한 그대의 발을 밟겠소?
이게 다 눈이 발에 붙어있지 않은 까닭이오."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더니
천후가 오히려 그녀에게 버럭 고함을 지르는 것이 아닌가!
"뭐… 뭐예요?"
여인의 아름다운 아미가 상큼 위로 치켜지고,
급기야 새하얀 그녀의 옥수(玉水)가 천후를 향해 뻗어나가고야 만다.
목표는 묻지 않아도 두 뺨이리라.
한데, 부드럽고 중후한 음성이 들려오며
누군가 여인의 옥수를 거머쥐어 버렸다.
"미아야! 이게 무슨 짓이냐?"
"오라버니, 저… 저자는…"
여인의 두 눈에 금방 억울한 듯 눈물이 고이고…
"그렇다고 여인이 손을 함부로 놀리면 되겠느냐?"
미청년, 바로 그였다.
그가 어느새 일어나 여인의 손을 거머쥐어 버린 것이다.
"역시, 형씨는 인물답게 사리에 밝소!
당연한 일이오. 어찌 여인이 함부로 손을 놀릴 수 있단 말이오.
여인의 손은 그저 밥하고 음식 만들고 아가들 기저귀나 빨 때… 어이쿠!"
천후가 당당하고 품위있게 말하다 말고 돌연 푹 고꾸라졌다.
발! 한 줌도 되보이지 않는 여인의 앙증맞은 발이
그의 정강이를 정통으로 가격해 버린 것이다.
"흥! 본 낭자의 발은 놀고 있는 줄 아나 뭐…"
상큼하도록 귀여운 여인이다.
철부지 어린애의 투정하는 것 만큼이나 귀엽고 밉지 않은 여인의 응수!
급기야, 주루 안은 일시에 폭소로 인해 왁자지껄하게 변해 버리고 만다.
"와하하하핫…"
"으하하하핫…"
결국, 천후만 정강이를 얻어맞고 만 셈이다.
"아구구구… 나 죽는다! 이 여자가 나 잡는다!"
돼지 멱따는 소리로 고래고래 고함을 쳐대는 천후!
꽤나 아픈 모양이다.
한데, 운명은 여기서 또 한 번의 장난을 하는지…
미청년이 슬며시 천후를 부축하며 입을 연다.
"형장, 미안하오. 소생의 동생이 워낙 철이 없어서…대신 소생이 한 잔 올리리다."
그런 그의 태도는 일견해도 쉽게 명가의 자손임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었다.
한데…이럴 수가…
"술[酒]? 그거 좋지! 그래 정말 형씨가 나에게 술을 주겠다는 말이오?"
지금까지 다 죽어가던 천후가 술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벌떡 일어나고 있으니…
"……!"
미청년 뿐만 아니라 두 명의 절세가인들도
기가 막힌지 일시 할말을 잊고 만다.
하나, 천후는 그때 한술 더뜨고 있었으니…
"으와… 악양루를 더욱 유명하게 하고 있는 백화향로주(百花香露酒)다."
그는 어느새 권하기도 전에 미청년의 옆자리에 앉아
정신없이 술을 퍼마시고 있는 것이다.
미청년과 두 여인은 너무나 엉뚱한 천후의 행동거지에
그야말로 말문이 굳게 닫히고 말 노릇이었다.
특히, 난초처럼 청초한 백의여인의 두 눈엔
그때 섬전처럼 무엇인가 스쳐가고 있었으니…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천후가 아귀처럼 술과 음식을 실컷 먹고난 후에야 그들 네 사람은
비로소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아…아…이거 미안하오. 끄윽… 소생은 천후라 하오."
천후가 더욱 게슴츠레 눈을 뜨며 자신을 소개한 것이다.
한데 천후가 자신을 소개하자 세 사람은 돌연 흠칫했다.
'처…천후라면… 항주의 광서생이 아닌가?'
세 사람의 눈빛에 섬전처럼 스쳐가는 의혹, 하나 그것은 너무 순간적이었다.
대신, 미청년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미소와 함께 자신들을 소개했다.
"아…천형이었구려! 소생은 남궁청운(南宮靑雲)이라 하오. 그리고…"
그의 손끝이 천후의 정강이를 내질러버린 여인에게 향했다.
"소생의 누이동생인 남궁화미(南宮花美)."
다음은 난초처럼 청초한 여인에게…
"이분은 강남제일세가(江南第一世家)의 금지옥엽이신
황보운향(皇甫雲香) 소저이십니다."
순간, 천후의 두 눈이 일시에 화등잔 만하게 떠졌다.
"와…그럼…무림이대세가(武林二大世家)의 후인들이 아니오?"
천후 뿐만 아니었다.
"오오… 어쩐지…!"
"과연 이대세가의 후인이었어…"
"저기 미청년이 바로 무림오공자(武林五公子) 중의 한 명인
백검공자(白劍公子) 남궁청운이었구먼! 어쩐지…"
"이사람! 저 꽃 같은 가인(佳人)들은 어떻고
바로 무림오봉(武林五鳳) 중의 적봉(赤鳳)과 백봉(白鳳)이 아닌가?"
"그래, 과연…무림오공자와 무림오봉은 후기지수의 으뜸이라더니…!"
사방에서 쏟아지는 경탄과 찬사들!
또한 선망이 가득 담긴 눈과 눈들이 일시에 남궁청운 등에게 쏠린다.
무림이대세가(武林二大世家).
강남제일세가 황보세가(皇甫世家).
강북제일세가 남궁세가(南宮世家).
그 누가 있어 이들 세가(世家)를 경시하겠는가?
당금 정도무림의 지주라고 할 수 있다.
아니, 당금무림의 최고실력자라고 해도 과언은 결코 아니다.
천 년(千年)을 이어온 전통과 하늘을 놀라게 하는 가전지학(家傳之學)!
백도(白道)의 태산북두라 일컫는 소림사와 무당파에서도
감히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이대세가(二大世家)가 아니던가?
무림오공자(武林五公子).
무적공자(無敵公子) 황보웅(皇甫雄).
백검공자(百劍公子) 남궁청운(南宮靑雲).
화화공자(花花公子).
사향공자(死香公子).
옥소공자(玉簫公子).
최근 들어 나타난 혜성과 같은 절대기재(絶代奇才)들!
후기지수의 으뜸이요,
오히려 강호의 전대고수들 보다도 더 뛰어난 초일류 고수들이다.
무적공자 황보웅.
강남제일세가의 소가주이자 오공자 중의 으뜸이라 알려지는 인물.
가전무학과 아울러 전대 대기인(大奇人)의 전수가 있어,
무공에 있어서 그의 부친인
금도황(金刀皇) 황보천(皇甫天)보다도 더 뛰어나다 한다.
백검공자(百劍公子) 남궁청운.
강북제일세가의 소가주(小家主).
타고난 의협심과 뛰어난 자질로 인해
무림의 선배기인들로 부터 가장 많은 찬사를 받는 인물.
그도 또한 알려지지 않은 전대고인(前代高人)에게 무공을 전수받아,
그의 부친인 비룡제후(飛龍帝侯) 남궁수(南宮洙)보다도
더 가공할 무학을 지녔다 한다.
화화공자(花花公子).
신비에 가려진 기이한 인물.
알려지기를 천하제일미남자(天下第一美男子)라 한다.
항상 꽃과 같은 미인 수십 명을 한 대의 마차에 태우고 다닌다고 전해진다.
화화신선거(花花神仙車)라고 이름 붙여진 그 마차는
천하 모든 여인들의 선망의 대상이라니…
그녀들의 평생 소원이 바로 그 화화신선거에서 사는 것이라 한다.
사향공자(死香公子).
그도 또한 신비인이다.
그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은 턱까지 내려덮인 흑죽립(黑竹笠)과
칠흑 같은 흑의,
그리고 역시 검은 묵도(墨刀)라 한다.
죽음의 향기를 풍기며 사향(死香)을 쫓아다닌다는 죽음의 인물.
신세도 내력도 무공수준도 알려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그를 상대한 모든 사람은
그의 묵도 아래 생을 마쳐야 했기 때문이다.
옥소공자(玉簫公子).
그도 또한 절대신비 속에 가려져 있다.
아마도 무림오공자 중에서도 가장 신비 속에 존재하리라.
옥소(玉簫).
매월 보름달이 환하게 뜨는 날
강호 어디에선가 여지없이 처량한 옥소의 음률이 들린다.
그리고 그 밤이 새고 나면 천하에는 또 다른 피의 소문이 퍼진다.
호남(湖南)의 최고세력인 제천보(制天堡)가 누군가에 의해 멸망을 당했다.
지금도 보름날만 되면 강호는 숨을 죽인다.
무림오봉(武林五鳳).
백봉(白鳳) 황보운향(皇甫雲香).
적봉(赤鳳) 남궁화미(南宮花美).
흑봉(黑鳳).
요봉(妖鳳).
비봉(秘鳳).
당금무림의 꽃[花]으로 불리우는 아름다운 다섯 가인들.
하나, 백봉과 적봉만이 널리 알려졌을 뿐
나머지 삼봉(三鳳)은 신비 속에 가려져 있다.
흑봉(黑鳳).
일신에 항상 칠흑 같은 흑의(黑衣)를 입고 다닌다고 한다.
하나 누구인지는 모른다.
다만, 그녀의 일신 무공은
가히 무림오공자 중의 무적공자와 버금간다고 하니…
요봉(妖鳳).
이름 그대로 천하제일의 우물(尤物)이라 한다.
그 누구도 그녀의 눈짓 한 번에
모든 것을 바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아름답다는
절대미인(絶代美人)!
너무나 아름답다하여 차라리 요봉(妖鳳)으로 불리운다.
일설에 의하면 그녀가 바로 일회이부삼전사곡 중의
색혼전(色魂殿)의 전주(殿主)라고 하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비봉(秘鳳).
언제부터인가?
최근 들어 강호상에 한가지 소문이 나돌고 있으니…
그것은 바로 한 명의 절대기녀(絶代奇女)에 대한 소문이었다.
비봉도(秘鳳島)의 비봉(秘鳳)이 나래를 펴는 날, 삼천(三天)은 나타나리라!
너무나도 엄청난 소문.
하나, 아무도 그 소문의 진위(眞僞)는 모른다.
단지 한가지,
소문 속의 비봉은 바로 한 명의 절대기녀를 가리킨다는 것 뿐!
"으적…으적!"
천후는 연신 무엇인가 먹고 있었다.
남궁청운과 두 명의 가인은 그런 천후를 미소와 함께 지켜보고 있었다.
한데 한순간,
돌연 천후는 먹다 남긴 구운오리의 다리를 남궁화미에게 쭉 뻗었다.
"화미소저! 이거 드시오.
이것은 내가 조금 전 소저의 발을 밟은 것에 대한 사과의 선물이오."
오오…구운오리의 뒷다리!
그것도 지저분하게 뜯다 남긴 뒷다리가 사과의 표시라니…
"이…이런…무례한 자가…!"
남궁화미의 고운 아미가 다시 상큼 떠진다.
그리고 그때만은 남궁청운과 황보운향의 두 눈에도
불쾌한 빛이 빠르게 스쳐갔다.
사실, 무례한 짓이 분명했다.
아무리 술에 취했다 해도 그건 분명히 커다란 결례였다.
"소저, 불쾌하게 생각마시오.
본시 내 가진 것 없어 마음에 드는 소저에게 드릴 것은 없소.
하나 대신 이것으로나마 내 마음의 정표(情表)로 생각하고 받아 주시오."
뜻밖에도 천후의 취한 얼굴이 정색하고 있지 않은가?
더구나 정표(情表)라니!
도대체 천후는 지금 무슨 생각과 무슨 의도로 그러는가?
"이…이런 자가…이자가?"
남궁화미, 그녀는 너무나도 어이가 없는 천후의 망언에
분해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었다.
돌연, 지켜보던 남궁청운의 두 눈에 번뜩이는 기광이 빠르게 스쳐갔다.
"으하하하핫! 화미야, 받아라! 천형은 네가 마음에 드나 보다."
뜻밖에도 그가 그렇게 말하지 않는가?
"오…오빠…! 오빠까지…?"
급기야, 너무나도 분하고 억울했던지 남궁화미는 기어이 눈물을 떨어뜨리고 만다.
드디어, 운명의 수레는 또다시 또 하나의 장(章)을 펼치고 있었으니…
"으하하하하핫…!"
'후후후… 다섯 번째 부인은 이제 됐고…!'
남궁청운의 호탕한 웃음소리와
천후의 웃는 둥 마는 둥한 흐릿한 미소가 한동안 계속되었다.
운명!
그렇다. 그것은 운명이었으며 또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