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장. 고대릉(高大陵) 일가인(一佳人)을 만나다.
주위는 완연히 어두워졌고, 어스름 달빛 속에 멀찍이 숨어서 싸움구경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간간이 보였다.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는 자들은 어느 듯 백여 명에 달하고 있었다.
다만 혈방에서도 더 이상 소란이 커지는 것을 원하지는 않는 듯, 적극적인 공격은 자제하고 있었다.
등평 역시 이제는 포위망을 뚫기보다는 차라리 버티는 쪽을 택하였다.
부상당한 고대릉을 데리고 저 두터운 포위망을 뚫고 탈출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지금의 대치상황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끌고 나가는 게 오히려 나을 것 같았다.
비록 아직까지는 개입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관부이지만, 그들로서도 끝까지 개입하지 않을 도리는 없을 것이었다.
또한 이 곳이 북경의 중심부인 이상, 이렇게 버티다 보면 또 어떤 미지의 변수가 생길 수도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기도 했다.
그리고 또 하나.
그가 당장의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조금 앞쪽, 소로의 오른쪽에 위치해 있는 하나의 주루였다.
'차라리 주루로 들어가 농성(籠城)한다면, 훨씬 더 용이하게 버틸 수 있을 것이다.'
등평의 손에 들린 비수가 다시금 날카로운 예기를 흩뿌려 내었고, 그의 앞을 막아서 있던 서너 겹의 인막(人幕)이 출렁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모전동(毛廛東)은 혈방의 총당(總堂) 당주이며, 방주와 부방주에 이어 혈방의 세 번째 서열이자 지낭(智囊)역할을 하기도 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지금 입가에다 느긋하니 흡족한 미소를 떠 올려 놓고 있었다.
'후훗! 놈들, 이제야 우리 안으로 들어갈 생각을 한 모양이로구나.'
앞쪽의 주루는 그가 사냥감들을 위해 급히 준비해 놓은 하나의 안배였다.
사냥감들이 그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천장에 설치해 놓은 대형 쇠그물이 놈들을 덮칠 것이고, 그것으로 이 사냥은 마무리될 것이었다.
사실 이 일은 예상외로 크게 번져 버린 감이 있었다.
처음에 서단북로(西單北路) 구역의 사두(蛇頭)인 금욱(金旭)이 정체 모를 자들에게 당했다는 보고를 올렸을 때만 해도, 그저 평소 술과 여자를 유독 밝히는 편인 금욱이 또 다시 작은 사단을 일으켰구나 했었다.
그러나 어쨌든 방의 사두 급이 당한 일이므로 간단한 응징을 할 양으로, 어제 밤부터 금화루 인근의 주요 거점에다 수배 령을 내려놓았었다.
그런데 오늘 오전에 의외의 일이 또 하나 생겼다.
세이로(洗二路) 구역에서 올라온 것인데, 그 구역에서 금 오십 냥을 놓쳤다는 보고였다.
자그마치 금이 오십 냥이니 그 자체만으로도 구미가 당기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는데, 우연이 겹치느라 그랬는지 양 쪽의 말을 종합해 본 결과, 두 사건에 연루된 자들이 동일인물 같다는 분석이 나왔다.
그 때부터 놈들에 대한 본격적인 추격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때까지만 해도 모전동은 자신이 직접 이 사건을 진두지휘하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하였다.
처음에는 외당(外堂)에다 일임하여 두고 다만 수시로 들어오는 보고만 듣고 있었다.
그런데 놈들의 하는 짓이 점점 심상치 않아 보였다.
놈들은 천라지망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조밀하게 좁혀 드는 방의 포위망을 비웃기라도 하듯 휘젓고 다녔다.
게다가 의도적인지는 모르겠으나, 추격을 당하는 중에도 오히려 북경의 중심부를향해 접근을 하는 모양새가 마치 일부러 여유를 부리는 듯했다.
그러던 중에 수하 하나가 놈들에게 제압을 당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놈들 중의 적어도 하나는 혈도를 익숙하게 짚을 정도의 만만치 않은 무공을 지닌 무림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모전동이 직접적으로 지휘권을 잡은 것은 그 때부터였다.
시간이 갈수록 놈들은 점점 더 새로운 면모를 보여 주고 있었다.
놈들을 몰아가는 과정에서 제법 많은 부상자가 생겼고, 급기야는 사망자까지 발생했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가벼운 응징이나 금(金)이 문제가 아니었다.
본때를 보여 줘야만 했다.
무림인이라고 해서 함부로 혈방을 얕보고 농락할 수 있다는 선례를 남겨서는 결코 안 될 일이었다.
하지만 앞뒤 안 가리고 놈들을 처치해버리기에는 이미 상황이 너무 크게 벌어져 버렸다.
관부에서도 이미 기찰이 나와 있는 형편이었다.
물론 관부와는 평소의 관계가 있으니, 당장에 일이 귀찮게 될 우려는 없었다.
그러나 더 이상 사상자가 늘어나거나 해서 소란이 커진다면, 관부로서도 계속 방관할 수는 없게 될 것이었다.
하여 서둘러 근처에 있는 주루에다 안배를 하였고, 지금 은연중에 놈들을 그 쪽으로 몰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이미 준비는 다 갖추어졌고, 만약의 돌발상황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주루 안에서라면 이모저모 살필 필요 없이 그냥 없애 버리면 그만이었다.
한순간 모전동의 입가에 떠올라 있던 웃음기가 갑자기 거두어졌다.
그리고 같은 순간 주루 쪽을 향해 조금씩 포위망을 밀어붙이고 있던 등평의 눈빛에 서도 작은 반짝임이 일었다.
주루의 맞은편 쪽으로 나 있는 길모퉁이로부터 이 상황과는 전혀 무관해 보이는 일단의 새로운 인물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변수였다.
아직까지는 그 변수가 상황에 영향을 줄지, 혹은 준다 하더라도 얼마나 줄 것인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다만 모전동은 그러한 미지의 변수 자체가 반갑지 않았고, 반대로 등평으로서는 막연하게나마 생기기를 바라고 있던 상황변화의 조짐이었다.
새로이 나타난 인물들은 정확하게는 청년 다섯에, 젊은 여인이 하나였다.
한 눈에 무림인들임을 알아볼 수 있는 행색들이었다.
하나같이 검이나 도를 소지하였고, 깔끔하고 세련된 무복차림을 하였다.
또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보기에도 확연히 드러나는 출중한 외모와 헌앙한 기도.
한눈에 보기 드문 명문의 자제들이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연결되는 길모퉁이에서 이쪽 소로(小路)로 막 접어들었을 때 청년들이 소로 양쪽의 누각들을 두리번거렸던 것을 보면, 그들은 아마도 주루나 다루를 찾고 있는 중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뜻밖으로 주변일대에서 자못 살벌한 대치가 벌어져 있는 것을 보고서, 그들은 천천히 걸음을 늦추었다.
등평의 기세가 일변하였다.
갑자기 허둥지둥하는 모양새에다 다급해 하는 기색이 아주 완연해졌다.
등평이 비록 포위에 갇혀 있는 처지이기는 하나, 좀 전까지만 해도 궁색한 모습까지는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살기에 넘쳐 적의 포위망을 위협하며 밀어붙이는 강단과 당당함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등평의 바뀐 모습은 누가 봐도 험악한 무뢰배에게 쫓기는 순박하고 선량한 양민의 테가 팍팍 났다.
게다가 고대릉의 모습은 그에 또 얼마나 잘 어울리는가.
어깨로부터 멈추지 않고 흘러내리는 피 때문에 왼쪽 상반신 전체가 아주 흠뻑 젖어 있는데다, 충격과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이라니...
한순간.
"차아아앗!"
자못 처절하고도 힘에 겨운 기합성과 함께 등평이 고대릉의 어깨를 잡아끌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의 오른손에 잡힌 한 자루 비수가 마구잡이로 허공을 찌르고 베었다.
그러나 지금까지와는 달리 그저 막무가내로 휘두르는 몸짓에 불과한 것이었다.
혈방의 무리들은 이미 주루에 도달할 때까지는 천천히 포위망을 물리라는 명을 받고 있던 터였는데, 등평의 그 같이 갑작스럽고도 무모한 돌진을 대하게 되자 그만 주춤주춤 물러나기에 급급하게 되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등평이 더욱 거칠게 적들을 몰아붙였다.
고대릉은 이미 상당한 출혈을 한 때문인지 힘에 겨운 테가 역력했는데, 그래도 등평의 수고를 조금이라도 덜어 주려는 듯 힘을 다해 걸음을 재게 놀렸다.
서로 부축하고 기댄 두 사람의 분투하는 모습은 일견 애틋하면서도 보는 사람의 가슴을 뭉클해지게 만드는 바가 있었다.
모전동의 이마에 한 가닥 주름이 깊게 패였다.
상황이 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걸음을 멈추고 돌아가는 사태를 구경하고 있던 여섯 젊은이들이 천천히 걸음을 옮겨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상황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은 지금 개입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들 모두가 혈기방장 한 젊은 무인들이었다.
상황의 앞뒤를 꼼꼼히 재기보다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대로 포위 속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자들을 보고 속으로 울컥하고 치미는 것이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들은 포위망에서 칠장 여 떨어진 곳까지 다가와서는 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아마도 그들 중에 좀 더 신중한 자가 있어서, 더 이상 분쟁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만류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사실은 그들이 그 정도 거리까지 접근하여 지켜보고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이미 어느 정도 은근한 압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모전동의 잘 다듬어진 눈썹이 일순 꿈틀하였다.
더 이상 상황이 꼬이기 전에, 이쯤에서 서둘러 마무리를 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을 굳힌 것이었다.
물론 젊은 무인들과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고, 관부와도 분명 문제가 생길 것이었다.
그러나 일단 일이 끝나고 난 다음이라면, 그 정도 문제들쯤이야 또 방법을 강구하면 처리할 방도가 반드시 생기게 마련이었다.
"처치해 버려!"
모전동의 짤막한 명령에 따라 포위망 안쪽은 이내 격렬한 난전으로 돌입하였다.
등평이 고대릉의 주위를 연신 돌아가며 비수를 휘둘렀지만, 밀려드는 사방의 적들을 일일이 다 견제하고 상대하기에는 아무래도 역부족이었다.
도검(刀劍)의 공격은 우선적으로 막았지만, 당장에 치명적이지 않아 보이는 공격은 어쩔 수 없이 간간이 허용할 수 밖에 없었다.
퍽!
퍼억!
고대릉은 벌써 두어 차례나 어깨와 등에 타격을 받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고대릉은 머리 위로 곧바로 떨어지는 몽둥이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성한 오른손을 뻗어 거머잡았다.
그리고 한 손으로 용하게도 상대와 힘겨루기를 하더니 기어코 몽둥이를 뺐어 들었다.
한순간 고대릉에게서 거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이야아아!"
사력을 다해 울부짖듯 내뱉는 고함성이었다.
그의 손에 쥐어진 뭉둥이가 마구잡이로 허공을 누볐다.
갑작스러운 격렬한 움직임 덕에 고대릉의 왼쪽 어깨 상처부위가 다시 제대로 터졌는지, 피가 아예 뭉클거리며 솟구치고 있었다.
어쨌든 그 덕에 등평은 조금의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거리를 재어 보니 젊은 무인들과는 이제 오장 여의 거리만 남겨 놓고 있었다.
싸움판의 중심이 점점 자신들 쪽으로 접근해 들고 있는데도 그들은 전혀 피할 생각이 없어 보였고, 오히려 등평과 고대릉이 좀 더 힘을 내어 자신들이 있는 곳까지만 오라고 무언의 응원을 보내는 듯 하였다.
등평이 고대릉의 곁으로 바짝 다가서며 그의 귓전에다 소리쳤다.
"가주님! 조금만...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그 말을 알아들었는지, 고대릉의 오른손에 들린 방망이가 한결 힘차게 허공을 누볐다.
그리고 한순간 등평의 두 발이 거의 그 움직임을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쾌속하게 주변공간을 누비기 시작했다.
파바바박!
그것은 바로 무영가의 비전 중 거의 유일한 공방용(攻防用) 무공이라 할 수 있는 무영뇌각(無影雷脚)이었다.
등평의 무영뇌각은 철저하게 적들의 무릎아래만 집중적으로 노렸다.
그 때문에 포위망의 바깥쪽에서는 등평의 그같은 현란한 각법(脚法)을 볼 수가 없었다.
사내들 중 네댓 명이 일시에 휘청거리는 바람에, 포위망에 순간적으로 조그만 틈이 생겼다.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등평과 고대릉이 포위망을 뚫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젊은 무인들이 서 있는 곳에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여인을 가운데로 하여 청년들은 완만한 반원을 이루며 서 있었다.
등평과 고대릉이 멈추어 선 곳은 바로 그 반원이 이루고 있는 경계를 살짝 넘어 들어 간 안쪽이었다.
그리고 그것으로서 장내의 상황은 또 다른 국면으로 넘어가는 것 같았다.
쫓고 쫓기던 그 모든 소란이 일시에 멈추었다.
긴장은 여전하였지만, 지금의 긴장은 이전의 긴장과는 이미 다른 성격의 긴장이었다.
그것은 묘한 분위기였다.
아무 것도 구체화되지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그래야만 한다는 생각에 모두가 침묵을 지키는 그런 상황.
등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굳이 입으로 도와 달라는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지금까지의 상황과 현재의 분위기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웅변(雄辯)이 되고도 남았을 터였다.
이 순간 등평 자신과 고대릉은 죄없는 양민들이었고, 혈방의 무리들은 흉악 무도한 악인들이었다.
악인들의 행패로부터 힘없고 선량한 양민들을 보호해야 하는 것은 협사(俠士)의 당연한 의무요, 더욱이 혈기방장한 청년협사라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한번 뛰어 들어보고 싶은 가히 피 끓는 장면이 아니겠는가.
등평은 지친 얼굴로 청년들을 향해 가만히 머리를 숙여 보였을 뿐이었다.
언제 어느 곳에서나 흐름을 읽지 못하는 자는 있기 마련이다.
모두가 일시적인 긴장의 정적 속에 빠져 있는 그 때.
바로 지척까지 쫓아와 있던 혈방의 사내 하나가 슬그머니 한 걸음을 옮겨 만만한 고대릉의 어깨를 틀어잡았다.
하필이면 상처 난 어깨를 잡힌 고대릉의 입에서 극통의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으윽!"
바로 그 때였다.
팟!
한 줄기 싸늘한 검광이 번뜩하고 허공을 가르고 사라졌다.
그리고.
고대릉의 어깨를 잡은 채로 사내의 몸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끄으으...!"
잠시 후 사내의 입에서 제대로 뱉어지지도 못하는 비명이 흘러나오더니, 그의 목이 서서히 몸체에서 분리되어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꿍!
뒤늦게 목 잃은 동체의 절단면에서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세차게 피가 솟구쳐 올랐다.
촤아악!
그 피는 고스란히 고대릉의 온몸으로 쏟아졌다.
고대릉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피의 세례를 감히 피할 생각도 못하고서 멍한 눈길을 한 곳으로 주고 있었다.
한 사람의 흑의 청년이었다.
고대릉은 그의 허리춤에서 언뜻 검광이 번뜩이는 것은 보았지만, 결코 검이 뽑히는 것은 보지 못하였다.
지금도 검은 여전히 그의 허리에 걸린 검집에 꽂혀 있었다.
아주 잠깐, 세상은 온통 정지되어 있는 것 같았다.
살인.
참수(斬首).
그리고 흑의청년의 경이로운 검술솜씨는 주변을 온통 뭐라 말할 수 없는 기이한 감흥 속으로 빠트려 버렸다.
숨 막히는 듯한 정적을 깨트린 것은 고대릉이었다.
머리와 얼굴에 온통 피를 뒤집어쓴 채 멍하니 흑의청년을 보고 있던 고대릉이 갑자기 헛구역질을 시작하였다.
"우욱! 웩!"
그것을 보고 흑의청년의 무표정하던 얼굴에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어이없음이었다.
흑의청년이 날카롭게 뻗은 콧등을 한번 찡긋하며 낮게 중얼거렸다.
"쯧! 기껏 구해줬더니, 고작 하는 짓이라곤...?"
차갑고도 맑은 목소리였다.
그 때 또 다른 목소리하나가 그 말을 받았다.
"후후! 위지 노제! 너무 그러지 말게나. 보기에 저 소형제는 글 읽는 서생 같은데, 오늘 처음으로 사람 목이 베이는 모습을 보았다면 비위가 상할 만도 하지 않겠나?"
청년들 중에서는 좀 더 나이가 들어 이십 대 중반은 넘어 보이고, 준수하면서도 호인 풍의 풍모가 돋보이는 백의무복의 청년이었다.
흑의청년은 마뜩하지 않은 표정이었으나, 굳이 백의청년의 말에 반박을 하지는 않았다.
"음! 그렇기도 하겠군요. 남궁 형의 말씀을 듣고 새삼 보니, 약골에다가 심지(心志)마저 나약하기 짝이 없는 친구 같군요."
그들 두 사람의 청년들은 긴장되어 있는 주위의 상황에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는 듯 태연한 모습으로 말을 주고받았다.
급하게 현장 가까이로 다가서던 모전동은 크게 놀랐다.
'남궁(南宮)에다가 위지(尉志)라...?'
둘 다 그리 흔한 성이 아니었다.
그리고 방금 흑의청년이 보인 그 환상적인 검술 솜씨를 연결시킨다면, 그들이 누구인지를 추정하는 일은 모전동의 해박한 강호 지식으로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저자는 바로 무황성(武皇城)의 위지가문.... 그리고 남궁세가...? 다른 자들 또한 둘에 조금도 못지않은 영기(英氣)를 뽐내고 있다. 아아! 저들은 바로 강호오공자(江湖五公子)들이다. 그렇다면 은연중에 저들의 중심이 되어 있는 저 여인은... 일가인(一佳人) 석여령(碩麗怜)?'
일순 모전동은 크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능수능란한 처세술로도 일시 지금의 상황에 어찌 대처해야할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였다.
등평도 금방 젊은 무인들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등평 또한 크게 당혹스럽기는 모전동과 마찬가지였다.
그로서도 이 젊은 무인들이 설마 강호오공자와 일가인일 것이라고는 미처 예상을 못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미 벌어진 일이었고, 지금 형편에서 그가 달리 취할 방도는 없었다.
등평은 잠시 청년들의 얼굴을 살폈다.
등평의 내심으로 금방 감탄이 생겨났다.
'강호제일의 후기지수(後起之秀)들이라더니 과연 하나같이 대단한 풍모와 기도들을 지녔구나. 가히 용봉지재(龍鳳之材)라 할 만하다.'
이어 자신도 모르게 고대릉을 돌아 본 등평의 내심으로 어쩔 수 없는 탄식이 뒤따랐다.
'아아! 군계일학(群鷄一鶴)이 아니라, 군학일계(群鶴一鷄)가 되어버리는 구나.'
위지 성의 흑의청년은 우뚝 버티고 서서 앞으로 겹겹이 늘어선 백여 명의 혈방 무리들을 향해 무심하고도 냉랭한 눈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눈빛만으로도 수적으로 절대 우위에 있는 혈방의 무리들은 지금 마치 뱀 앞에 선 개구리 떼라도 된 양 감히 움직일 엄두를 내는 자가 없었다.
일순 흑의청년이 차가운 목소리로 일갈했다.
"마저 목을 베어 버리기 전에 모두 꺼져라."
그 폭발할 듯 응축된 살기에 눌려 혈방의 무리들 중 앞 열에 섰던 십여 명의 사내들이 허겁지겁 뒤로 서너 걸음이나 물러섰다.
홀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목 없는 시신을 흘깃 쳐다보며 다분히 경멸스럽다는 듯 흑의청년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버러지 같은 놈들"
그 때 청년들 가운데 서 있던 여인에게서 한 가닥 청량하기 이를 데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위지공자께서는 손속이 지나치게 과하셨어요. 우리는 아직까지 이 일의 상황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형편인데, 그처럼 가벼이 인명을 해하여서는 안 되는 일이었어요."
비록 맑고 고운 음색이었지만, 못마땅함과 나무라는 의미가 다분히 담겨 있었다.
흑의청년이 표정을 조금 부드럽게 바꾸며, 그러나 여전히 딱딱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상황은 이제 자세히 알아보면 될 것이나, 그전에 저 자들이 우리에게 범한 무례만으로도 이미 죽을 만 한 것이었소."
여인이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으나, 더 이상 흑의청년을 나무라지는 않았다.
문득 그녀의 눈길이 등평과 고대릉에게로 향했다.
등평은 이 순간 지칠 대로 지쳐 몸조차 가누기 어려워 보이는 중년인의 모습이었고, 온몸이 피에 절은 고대릉은 놀라고 당황한 데다 잔뜩 긴장하여 더할 수 없이 위축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석여령의 눈빛이 미미하게 측은한 빛을 띠었다.
모전동은 더 이상 자신이 나서기를 미루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쨌든 최선의 방향으로 상황을 수습해야만 하는 것이 그가 할 일이었다.
"소생은 혈방의 총당 당주를 맡고 있는 모전동이라고 합니다."
포권하며 하는 모전동의 말에 대해 청년들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모전동이 조금은 굳어진 어조로 말을 이었다.
"공자들께서 어떤 신분들이라는 것은 이미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림에서 일어나는 은원에 대해서는 당사자들 이외에 그 누구라도 함부로 개입할 수는 없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흑의 청년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모전동을 쏘아보며, 차갑게 내뱉었다.
"그래서...? 당신은 지금 우리가 무림의 법도를 어겼다고 따지는 것인가?"
모전동이 내심 움찔하였으니, 애써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공자들께서는 저희 혈방의 일에 무단으로 개입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본방 수하의 목숨까지도 함부로 해하였습니다."
흑의청년이 피식 웃으며 짐짓 눈을 크게 떠 보였다.
"훗! 당신은 아무래도 상황을 잘못 파악하고 있는 것 같군. 분명히 말해두지만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일에 개입을 한 적이 없어. 우리는 다만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뿐인데, 당신의 수하들이 우리가 있는 곳을 무단으로 침범해 들어오는 무례를 범한 것이지. 본 공자는 다만 그 무례에 대한 대가를 받아 냈을 뿐이다."
모전당이 목소리에 은은한 노기를 담아냈다.
"이치에 닿지 않는 억지요."
"무어라?"
흑의청년의 우수가 허리의 검병(劍柄)을 잡아갔다.
막상 발검을 하지는 않았으나 다만 검병에 손을 갖다 댄 그 행위만으로도 사람을 질식시킬 듯한 살기가 물씬 풍겨 나왔다.
금방 가슴이 답답해져 왔으나, 모전동은 힘주어 어깨를 펴고 차가운 눈빛으로 흑의청년의 눈빛을 마주 대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등평과 고대릉을 가리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것이 무례였다면, 그 무례를 범한 것은 저자들이 먼저 일 텐데, 어찌하여 공자는 저자들에게서는 대가를 받아 내지 않았다는 말씀이오?"
흑의청년의 눈빛에서 서서히 진한 노기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본 공자의 마음이지, 당신이 따질 문제가 못 될 텐데?"
모전당이 잠시 말을 멈추고 두어 번 길게 숨을 들이켰다.
이어 어떤 결심이라도 한 듯 천천히, 그러나 결연한 목소리를 뱉어 냈다.
"억지가 심하시오. 본 방이 비록 하잘 것 없는 흑도의 소규모 방파에 불과하여 감히 천하를 떨어 울리는 강호오공자의 위명에 조금이라도 상대가 될 리 만무하겠지만... 그러나 여기는 북경이오. 여기에서라면 우리는 일시에 백 개의 손도 만들어 낼 수 있고, 천 개의 손도 만들어 낼 수 있소이다."
순간 흑의청년의 전신에서 폭발하듯 진한 살기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정작 그의 목소리는 나직하게 깔려 나왔다.
"지금 나를 협박하고 있는 것인가?"
감당하기 어려운 살기에 짓눌리면서도, 모전동은 오히려 조금씩 여유를 더해가고 있는 듯 보였다.
"우리들 같이 보잘 것 없는 무리들에게 감히 그런 간담이 있을 리 있겠소? 그러나 아무리 하잘 것 없는 우리들이라 해도 목숨을 걸고 지켜 내야만 하는 방규(幇規)라는 게 있는 법이오. 저자들은 이미 본 방에 돌이킬 수 없는 죄를 범한 자들이오. 저들을 우리에게 넘겨주시오. 하면 본 방에서는 공자들께 성의를 다하여 따로 감사를 올릴 것이오."
흑의청년이 금방이라도 출수를 하고 말 기세인데, 문득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여인이 차분한 눈빛으로 흑의청년을 제지하고 나서 모전동을 행해 말했다.
"귀하의 말씀은 잘 들었어요. 그리고 말씀 중에 충분히 납득이 되는 부분이 있기도 하고요. 그러나 시시비비를 가리기 이전에 품 안으로 날아 든 새를 곧 바로 쫓아 버리는 법은 없는 것이 아니던가요? 귀하들의 입장도 있겠지만, 우리의 체면도 조금쯤은 생각해주시기를 바래요."
모전동이 얼른 표정을 가다듬고 짐짓 신중하고도 공손한 기색으로 반문하였다.
"소저의 그 말씀은...?"
여인이 등평 쪽을 한번 쳐다본 뒤에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이미 날이 어두워졌으니, 우리는 북경에서 하룻밤을 묵어 갈 생각이에요. 귀측의 일이 당장의 시급을 다투는 일이 아니라면, 밝은 날 다시 처리해도 될 터. 오늘 이 자리는 이 정도에서 매듭을 짓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모전당은 잠시 염두를 굴리는 체 했다.
그러나 그로서는 손해 볼 것이 없는 제안이었다.
그리고 벌써부터 그의 염두 속에서는 이미 전혀 다른 차원의 생각하나가 구체화 되고 있는 중이기도 했다.
"좋습니다. 소생은 그저 소저의 가르침대로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누가 따라 오라고 말을 한 것도 아니었지만, 등평은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고대릉을 이끌고 일행을 따라붙었다.
힐끗 뒤를 돌아보며 위지 성의 흑의청년이 나직하니 빈정거렸다.
"흥! 뻔뻔스러운 자들이로군."
비록 나직하였으나 알아듣기에는 결코 작은 목소리가 아니었으나, 등평은 들은 척을 하지 않고 묵묵히 따라 걷기만 했다.
그런데 앞쪽에서 걷고 있던 여인이 걸음을 늦추면서 등평과 고대릉이 가가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가 걸음의 보조를 맞추었다.
그러자 문득 고대릉이 등평의 부축을 마다하고 여인으로부터 조금 거리를 떨어졌다.
극한 상황을 벗어난 이후로 고대릉은 내내 입을 열지 않고 있었고, 마치 잔뜩 풀이 죽은 양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등평이 잠시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냈으나, 다행으로 어깨의 상처부위에서는 출혈이 멈춘 듯 더 이상의 피가 흘러내리지는 않았다. 비록 그의 전신이 온통 피철갑이긴 했지만.
그 때 여인이 등평에게 물었다.
"어쩌다가 그런 봉변을 당하게 되었습니까?"
"아, 예! 허허! 그러고 보니 경황 중이라 미처 감사의 인사도 제대로 드리지 못했습니다. 늦게나마 목숨을 보전하게 해 주신 크나큰 도움에 허리 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정말로 허리를 넙죽 숙여 보이는 등평의 모습이 그리 가볍지 않으면서도 익살스러운 데가 있어서, 여인은 겸양의 말을 하는 대신에 가볍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훗!"
등평이 사람 좋은 미소를 한껏 떠 올리며 말을 이었다.
"저희 공자님은 장성 밖에서 북경까지 외조부님을 뵈러 왔는데, 마침 사정이 있어 뵙지를 못하고 돌아가려던 참이었지요. 그런데 좀 전의 그자들이 저희에게 적지 않은 노자 돈이 있는 줄을 어떻게 알고 노리는 바람에 그 같은 곤경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차분하기만 하던 여인의 표정이 아주잠깐 아련하게 변하였다.
사실은 그녀 또한 장성 밖의 외조부께 인사를 드리러 갔다가 뜻하지 않게 임종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러니 등평 등과는 참으로 묘하게 사정이 일치가 되는, 기이하다면 기이하달 수 있는 인연이 아닌가.
"이제 날이 밝으면 그 자들이 다시 노릴 텐데, 생각하고 있는 어떤 방도라도 있는지요?"
문득 이어지는 그녀의 물음에 등평의 안색이 당장에 죽을상으로 변했다.
"생면부지의 낯선 타향에 달랑 몸뚱이 둘 만 떨어져 있는 형편에 저희들에게 달리 무슨 방도가 있을 게 있겠습니까? 염치불구하고 청하건대, 부디 저희들을 도와주십시오."
여인이 잠시 생각하다가 나직한 탄식과 함께 말했다.
"음! 하는 수 없군요. 하긴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일 것이니.... 우리 일행은 섬서(陝西)를 향해서 가는 중인데, 원하신다면 북경을 벗어날 동안 동행을 해도 좋습니다."
등평이 생각해보고 말고 할 것도 없이 허리부터 넙죽 숙였다.
"고맙습니다, 소저! 그렇지 않아도 북경 성내에 온통 저 흉악한 자들의 힘이 미치고 있다 하여 걱정이 태산과 같았는데, 소저의 그 은혜로운 말씀을 듣고 나니 이제야 저희들의 목숨이 온전히 살았는가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소저."
위지 성의 흑의청년이 수다스러운 등평의 입을 차갑게 쏘아보고 있다가 여인을 향해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석 소저! 지금까지 우리는 가능한 번거로운 일을 피하여 여정을 꾸려 왔는데, 이제 성까지 얼마 남겨 놓지도 않은 이 시점에서 굳이 귀찮은 일을 자초할 필요는 없지 않겠소?"
여인, 석 소저가 살풋 아미를 찡그리며 대답했다.
"이미 우리는 번거로움을 자초하였는지도 모르죠."
그 때 백의청년, 남궁 성의 청년이 덤덤한 어투로 끼어 들었다.
"내 생각도 위지노제와 크게 다르지 않소. 비록 상대가 아무리 하찮은 흑도의 무리라고는 해도, 명분상 우리가 더 이상 이 일에 개입하는 것에는 아무래도 약간의 무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오."
여인이 미미하게 미소를 떠올리며 백의청년을 바라보았다.
"이 일의 자세한 사정이 어떻게 된 것이던 간에, 어떤 번거로움이나 명분상의 불리함이 있다 하더라도, 저는 이 분들을 돕고 싶어요. 이 분들이 결코 악인이 아님을 믿을 수 있기 때문이에요."
백의청년이 가만히 여인의 눈길을 마주 받고 있다가 문득 소리 내어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내 석 소저의 혜지가 하늘에 닿아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지만, 그러나 이제 막 만났을 뿐인 저들이 선인인지 악인인지를 어떻게 알 수가 있었던 것이요?"
백의청년의 목소리는 자못 호탕하여 결코 여인의 말에 대해 반박을 한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여인이 자연스러운 교태를 담아 쌩긋이 웃었다.
"호호호! 이 분들의 눈빛이죠. 여기 이 분과 저 소공자의 눈빛은 너무나 선해요. 제가 비록 사람의 관상을 볼 줄 아는 것은 아니지만, 저런 눈빛의 사람이 악인일리는 없지요."
순간 등평은 내심 움찔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그런 표시를 조금이라도 낼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일순 본능적으로 그는 이전보다 한결 선한 빛을 뿌려 내고 있었다. 오히려 고대릉의 눈빛보다도 더욱 선한 눈빛을.
그 때 수려한 용모에 서글서글한 인상의 청년이 낭랑하게 웃으며 말을 끼어 들었다.
"하하하! 소저의 말대로 합시다. 그렇지 않아도 영 무료하던 참인데, 어쩌면 꽤나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는 것 아니겠소?"
웃는 모습이 정말로 눈이 부실 정도로 그 청년은 수려한 옥안(玉顔)을 지니고 있었다.
남궁 성의 백의 청년이 주위를 한 번 돌아보고 나서 다시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좋아! 화(華) 노제가 이미 찬성을 하였고, 음... 독고(獨孤)형은 물어보나마나 석 소저의 의견에 무조건 따를 것이고, 공손(公孫) 노제는 아마도... 중립이겠지? 하하하! 할 수 없군. 위지 노제! 나하고 자네도 못이기는 척하고 다수의 의견에 묻혀 가는 것이 마음 편하겠어."
남궁 성의 백의청년은 말 몇 마디로 단숨에 일행의 중지를 하나로 모아버리는 수완을 발휘했다.
그러나 그의 그런 수완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그에 대해 특별히 반감을 가지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등평은 단단히 돈 자랑을 하기로 마음을 먹은 모양이었다.
그들은 객잔에 도착하여 별채에다 서너 개의 방을 구하려 하였는데, 등평이 나서서는 아예 별채를 통째로 세를 내겠다고 하였던 것이다.
객잔 측에서는 이미 두어 개의 방에 손님이 들어 있어 그럴 수 없다고 하였지만, 등평은 아예 값을 두 배로 쳐 주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원래 청년들 일행 중에서는 독고 성을 가진 청년이 공통의 비용을 관리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등평이 본 이래 지금까지 한 마디의 말이나 표정의 변화도 없었던 지나치게 과묵한 청년이었는데, 지금은 등평의 나서는 모양새가 영 못마땅하였던지 미미하게 이마를 찌푸렸다.
원체 거구이기도 했지만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강렬하기 그지없는 인상을 풍겨내는 그가 미미하게 라도 인상을 찌푸리자 그 기세가 사뭇 남달랐다.
그러나 객잔의 장방과 흥정을 벌이는 도중에 등평이 아예 봇짐을 활짝 펼쳐 보이는 순간, 그 속에 들어있던 오십 여 개의 누런 금원보(金元寶)를 보고는, 다른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과묵한 그 청년조차도 그만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말았다.
그제야 그들은 등평과 고대릉이 왜 혈방의 무리들에게 쫓기게 되었는지 그 이유에 대해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거액을 몸에 지니고 있다는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저렇게 아무 때나 불쑥불쑥 재화(財貨)자랑을 한다면... 과연 위험을 몸에 달고 다닌다는 것이 차라리 당연하지 않겠는가.
어쨌든 석 소저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보임으로써, 모두는 등평이 하는 대로 지켜만 보았다.
별채를 전세 낸 덕분에 모두는 각자가 하나의 방을 차지하는, 객지에서는 좀처럼 누려볼 수 없는 특별한 호사를 누리게 되었다.
등평은 목간(沐間)에다 따뜻한 물을 준비하여 고대릉을 씻게 하고, 그 사이 여벌의 옷을 준비하여 목욕 후 갈아입게 하였다.
석 소저와 오공자들은 객잔에 딸린 주루로 나가 저녁식사를 하겠다 하였으나, 고대릉이 그들과 함께 하기를 굳이 마다하였으므로 등평은 따로 간단한 음식과 술을 방으로 주문하였다.
고대릉은 내내 묵묵히 식사만 하였지만, 등평은 그들이 새롭게 처하게 된 지금의 상황과 관련하여 이런저런 얘기를 시작하였다.
고대릉은 시종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이었지만, 그러나 등평이 무황성과 강호오공자의 내력에 대한 설명을 할 때만큼은 귀를 기울이는 모습이었다.
"무황성은 두 말이 필요 없는 당금 무림천하의 하늘입니다. 무황성의 정점에는 이시대의 절대자인 무황(武皇) 석광(碩侊)이 있지요. 이십 년 전, 정파세력을 규합하고 그 선두에 서서 당시 육십 여 년 간이나 무림을 독패하고 있던 천마궁을 궤멸시킨 인물이 바로 그입니다. 천마궁을 궤멸시킨 후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등 정파에서는 무황성을 건립하여 석광에게 바쳤지만, 석광은 오히려 그들 정파세력의 독주와 독선을 경계하는 노선을 견지하였습니다. 당시 정파 내에서는 오랫동안 마도 세력에 눌려 온 것에 대한 보상심리가 강하게 표출되었지만, 석광은 영구적인 무림평화를 위한 정사균형책(正邪均衡策)을 강력히 표방한 것이지요. 그 덕분에 천마궁의 직계를 제외한 천하 대부분의 사마외도 세력들이 정파의 보복으로부터 보호받으며 무림천하의 일원으로서 포용될 수 있었고, 또 그런 덕분으로 오늘날 무림은 유사 이래 최대의 융성기를 맞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무황 석광이야말로 가히 무림역사상 최초로 정과 마를 초월한 절대의 존재라고 할 수 있지요. 그를 두고 많은 무림인들은 서슴없이 천 년 전의 천마(天魔)에 비견되는 고금제일인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고대릉이 자신의 얘기에 관심의 빛을 보이는 것을 보고, 등평이 빙그레 웃으며 강호오공자에 대한 얘기로 말을 이어 갔다.
"무황의 세수도 어느 듯 아흔 다섯에 이르렀습니다. 그의 무공은 이미 신의 경지에이르렀다고 하나, 그러나 그도 인간인 이상 육체가 노쇠하여 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는 법이지요. 이미 오 년 여 전부터 무황은 더 이상 강호와 무황성의 일에 관여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연히 무황의 후계에 대한 논의가 표면으로 부상하였지요. 그런데 무황의 직계혈육이라고는 증손녀인 석여령 소저뿐입니다. 오늘 가주님께서 만난 일가인, 바로 그녀입니다."
등평이 흘깃 고대릉의 눈치를 살폈으나, 고대릉의 눈길은 여전히 식탁 위에만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부상한 인물들이 바로 강호오공자들입니다. 지금 그녀와 함께 있는 다섯 명의 청년들입니다. 그들이야말로 당금 강호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유수한 명문들의 후기지수들이지요. 그러나 그들이 강호오공자의 이름을 얻게 된 연유는, 바로 삼년 전에 그들이 동시에 무황의 후계자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곧 무림천하를 물려받을 후보들로서 공식 인정을 받게 된 것이지요. 그럼으로써 그들 강호오공 자들은 일약 차기 무림천하를 이끌어 나갈 주역들로 급부상이 되었고, 그들끼리는 강호의 패권을 두고 다퉈야 할 가장 강력한 경쟁자의 사이가 된 것입니다."
등평이 잠시 말을 멈추고 살짝 이마를 찌푸렸다.
"으음! 그런데 석 소저와 그들이 왜 한꺼번에 강호로 나왔는지에 대해서는, 저로서 도 도무지 짐작이 되는 바가 없군요."
그 때 고대릉이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며, 또 그 후계라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 정해지는 것인가요?"
고대릉으로서는 처음으로 자신의 궁금한 점을 물은 것이었다.
등평이 빙그레 웃었다.
어제 오늘의 격변하는 상황과 충격을 겪으면서 고대릉은 지금 마치 세상의 온갖 고뇌를 한 몸에 짊어진 듯 무겁고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는 역시 호기심 많은 열여덟 살의 소년인 것이다.
"그들 각자의 면면에 대해서는 제가 차츰차츰 말씀을 드릴 테고, 후훗! 무황의 진정한 후계자 자리는 아마도 일가인 석여령의 마음을 차지하는 사람이 물려받게 되겠지요."
고대릉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는 금세 그가 요 이틀간 새로이 친하게 된 무겁고도 우울한 침묵 속으로 되돌아갔다.
겨울밤은 쉽게도 깊어 가서 시간은 벌써 해시(亥時)를 넘겨 자시(子時)로 접어들고 있었다.
고대릉은 문득 가슴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답답해 옴을 느끼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찬바람이라도 쐬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쾅하고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잠이 든 줄 알았던 등평이 기척을 느꼈는지 따라 일어나서, 상처에 찬바람은 좋지 않다고 만류하였으나 고대릉은 듣지 않았다.
등평은 한숨을 쉬면서도 굳이 만류하지 않았다.
어제 오늘의 일을 겪으면서 그는 고대릉에게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는 믿음을 좀 더 키워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 믿음이 무엇에 근거한 것인지는 등평 스스로도 아직까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지만, 다만 그것이 단순히 그 스스로의 바램에 의한 착각이 아닌 것만은 분명한 것 같았다.
고대릉의 어깨부위 상처만 해도 그랬다.
당시의 사정이 급박했던 터라 간단한 지혈만 한 채로 제대로 응급처치나 외상약도 바르지 못했었는데, 객잔에 든 후 상처부위를 자세히 살피려고 고대릉의 옷을 벗기는 순간 등평은 그만 놀라고 말았다.
상처가 어느 듯 자생적으로 아물어 가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대릉은 자신의 그 같은 체질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던 듯 담담한 기색이었다.
고대릉은 방문을 나서 마루에 섰다.
차가운 밤바람이 옷깃사이로 엄습해 들었으나 춥다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온몸이 후련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막 마루를 내려서려던 고대릉의 몸이 그 자리에서 멈칫하고 굳어 버렸다.
아담한 정원의 연못 저편으로, 냉염(冷艶)한 달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사뿐히 거닐고 있는 미녀(美女)때문이었다.
일가인 석여령이었다.
고대릉은 석여령(昭麗怜)의 신비스러운 자태에서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아! 그 느낌을 도대체 뭐라고 표현을 해야 하는 것일까?
정결한 순수.
요요한 열정.
화사한 기품.
해맑은 고귀.
마치 환상처럼 달빛 속을 거니는 그 기이하면서도 신비로운 자태에 고대릉은 일순 무언가 저릿하게 가슴을 관통하고 지나가는 듯한 아련한 느낌을 받았다.
지금의 고대릉은 조금도 알지 못했지만, 아아! 그것은 어쩌면 소년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거쳐 가야 할, 고대릉에게는 뒤늦게 찾아 온 열병의 시작인지도 몰랐다.
고대릉이 문득 환상에서 깨어났을 때, 언제 다가왔는지 석여령은 바로 마루 앞에 서 있었다.
마루 위의 고대릉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고운 아미가 살짝 찡그려져 있었다.
아무래도 멍한 듯 자신에게 유심한 눈길을 주고 있는 고대릉의 모습이 자못 부담스러웠던 것이리라.
고대릉의 가슴이 이유도 없는 쿵쾅거림으로 터져나가기 직전, 그녀가 먼저 말을 건네었다.
"소공자(小公子)! 상처는 괜찮은가요?"
순간 고대릉은 숨이 턱 막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차가우면서도 맑은 목소리.
그리고 이토록 가까이에서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보기는 처음이었다.
아름다웠다.
수려한 아미.
오똑한 콧날.
앵두빛 입술.
우윳빛 살결.
칠흑처럼 검은 머리 결.
그러나 그녀를 특징 짓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차라리 냉철하다고 해야 할 이지를 담은 눈빛과, 오연하기까지 한 기품이었다.
온화한 듯 하면서도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은은한 위엄이었다.
아아! 그녀의 이목구비 하나하나와 그 모든 것이 합쳐져 빚어내는 그녀의 존재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떨림과 벅참으로 고대릉의 가슴속에다 마구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문득 어깨를 흠칫하며 고대릉은 겨우 정신을 수습하였다.
그의 얼굴은 어둠 속에서도 확연히 표시가 날 정도로 붉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서 나오는 말은 사뭇 무뚝뚝하였다.
"저는 소씨(小氏)가 아닙니다. 고대릉입니다."
석여령이 잠시 의아해 하였으나, 그러나 그녀는 곧 빙그레 미소를 띠어 올렸다.
그녀로서는 쑥스러움을 모면하기 위한 그저 의례적인 미소였을 테지만, 고대릉은 또 다시 떨려 오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애를 써야만 했다.
다시금 붉어지는 고대릉의 얼굴을 보며 석여령은 내심으로 웃고 말았다.
'후훗! 꽤나 귀여운 구석이 있는 소년이구나.'
피투성이의 모습으로 있을 때는 잘 몰랐었는데, 이제 보니 의외로 순박한 얼굴이었다.
비록 평범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그렇다고 천박한 기운은 없었다.
오히려 비범하였다면 그녀는 경계하였거나 혹은 식상하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금 고대릉의 지극히 평범하고도 때묻지 않는 순박한 모습은 오히려 그녀에게 친숙하고도 편하게 그를 대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만들어 주었다.
"아! 그랬군요. 훗! 원래 고공자였군요."
석여령은 웃으며 장난스럽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밝은 미소를 지어주고는 자신의 방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석여령의 모습이 사라지고 난 다음에도 고대릉은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녀에게 왜 그렇게 불퉁하게 대하였는지는 고대릉 자신도 잘 알지 못했다.
다만 순간적으로 그녀에게 어리게 보이고 싶지 않다는 강렬한 욕심이 솟구쳤다고나 할까?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에 섞인 약간의 호기심과 막연한 애처로움의 빛깔이 몹시도 싫었다.
그것은 그녀가 자신에 대해 가진 경멸과, 스쳐 지나가는 값싼 동정이라고 느껴졌다.
고대릉은 정원으로 내려섰다.
달빛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사방은 칙칙한 어둠 속에 묻혀 있었다.
고대릉은 그 중에서도 가장 어두워 보이는 커다란 한 그루 나무 아래로 가, 의자 대용으로 놓여진 바위 위로 걸터앉았다.
군데군데 별이 빛나고 있었지만, 밤하늘은 끝 간 데 없이 어두움을 펼쳐 놓고 있었다.
좀처럼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석여령의 자태를 애써 지워 내던 중에, 한순간 고대릉은 꽤나 오래 동안 잊고 있었던 하나의 그리운 감정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은근하고, 애처롭고, 자애롭고, 지긋한 관심이 가득 담긴 눈빛.
바로 어머니 홍리화의 눈빛이었다.
'아! 어머니!'
그리고 불현듯 떠오르는 얼굴들.
언제나 묵묵하였지만, 한결같이 따뜻한 눈길로 지켜봐 주시던 아버지 고행선.
한없이 엄격하였지만, 또한 한없이 자애로웠던 할아버지 고진당.
일순 고대릉은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온몸을 세차게 떨고 말았다.
'아아!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찰나적으로 숱한 감정들이 태풍처럼 회오리치며, 그의 머리와 가슴을 온통 헤집었다.
그러한 감정의 변화는 실제의 시간으로는 비록 찰나에 불과하였지만, 그러나 고대릉의 정신과 감정 속에서는 마치 길고도 긴 격동의 동굴 속을 겨우겨우 기어서 통과하는 것처럼 오래고도 힘겨운 여정을 이루었다.
치욕과 견딜 수 없는 부끄러움이 전신을 꿰뚫듯 치 달렸다.
'아아! 내 자신이 너무도 부끄럽구나.'
고대릉은 스스로에게 견딜 수 없도록 화가 치밀었다.
어제와 오늘 이틀 동안의 그는, 원래의 자신이 아닌 전혀 다른 사람이었던 것 같았다.
자신의 주관대로 행한 것은 하나도 없었고, 어떤 생각을 해 볼 여지도 없이 그저 정신없이 상황에 끌려 다니기만 했었다.
돌이켜 생각할수록 더욱 어이없고 치욕스럽기만 했다.
용렬함.
비겁함.
소심함.
치졸함.
그리고 강호오공자와 일가인을 만나면서 새롭게 생겨난 열등감.
강호오공자들의 그 늠름한 기상과 당당한 자부심.
그들을 처음 보았을 때 고대릉이 느낀 감정은 어쩔 수 없는 열등감이었다.
그들은 더할 수 없이 당당하였고, 고대릉 자신은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들은 마치 고대릉 자신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그들은 얼마든지 당당하고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만큼의 위치에 있었고, 또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힘!
그것은 고대릉이 지금껏 추구하고 숭배해왔던 정신적 힘이 아닌 실질적인 힘이었다.
위지 성의 흑의청년은 고대릉이 두려워 뒷걸음질을 쳤던 상대를 단 일검(一劍)에, 눈에 보이지도 않는 신비로운 일검으로 목을 베어 버렸다.
사람의 목을 벤다는 것.
그 엄청난 일을 저질러 놓고도 그는 당당하기만 했다.
고대릉 자신에게는 그토록 야멸차고 악착같았던 적들은, 정작 자신들의 동료의 목을 베어 버린 흑의청년에게는 오히려 두려움을 표하고 조심스러워했다.
'그것이 힘이라는 것인가? 세상이 진실로 인정해주는 힘이란 바로 그런 것인가?'
고대릉은 자신이 이태 껏 옳고 그름의 잣대로 삼아 왔던 가치관의 일부가 혼란스러워짐을 느꼈다.
무엇보다도 견딜 수 없는 것은, 행위 그 자체의 옳고 그름을 떠나, 흑의청년이 시종 그토록 당당하기만 하였던 것에 비해 고대릉 자신은 그토록 소심하고 초라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 대해서였다.
스스로 생각해도, 원래의 고대릉 자신은 결코 그렇게 하찮기만 한 존재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형편없이 무시당하거나, 혹은 고작 동정이나 받아야 하는 그런 형편없는 존재는 더더욱 아니었다.
어머니 홍리화는 언제나 눈부신 듯 그를 바라봐 주었다.
묵묵히 그를 바라보는 아버지 고행선의 눈빛에는 언제나 뿌듯함이 차 있었다.
할아버지 고진당은...
그 분은 당신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 깊은 눈 속에는 항상 손자에 대한 기대와 대견함이 은은하게 녹아 있었다.
마침내 고대릉은 자신도 모르게 길게 탄식하고 말았다.
"아아! 지금 나의 이런 못난 모습을 보았다면, 그분들은 얼마나 실망을 하실까?"
고대릉이 숙이고 있던 얼굴을 들었다.
그의 입술이 한일자로 굳게 다물어졌다.
비록 급박한 상황에서 자신을 잃어 일시 자괴감에 빠졌고. 또한 그와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온 것만 같은 강호오공자의 당당함에 대해 열등감을 느끼긴 하였으나, 그러나 원래의 고대릉은 언제까지나 그런 좌절에만 빠져 있을 만큼 유약하기만 성격은 결코 아니었다.
만약 그가 원래 그런 성격이었다면 꼼꼼하고도 깐깐한 성격의 고진당에게 처음부터 조금의 기대나 신뢰도 줄 수 없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고대릉은 결코 장백산을 내려와 지금의 이 자리에 서 있지도 못하였을 것이다.
고대릉은 지금 어제오늘 자기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며 진솔한 자기반성을 하고 있었다.
강호오공자와 대등하게 견줄 수 있다는 자신까지는 감히 가지지 못하였지만, 그러나 고대릉은 마침내 그들 강호오공자를 자기 자신을 비추어 볼 수 있는 거울이자, 하나의 신선한 자극으로 삼고자 하는 마음을 다듬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점이야말로 고진당이 자신의 손자에게 기대를 걸게 만든, 고대릉만의 특별한 장점이라고 해야 할 것이었다.
'그들은 그들이고 나는 나다. 남들과 비교하여 존재하는 내가 아닌, 원래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이면 족한 것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