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밭에서 05
w.알찬10
"얜 왜 또 여기에서 자? 일어나자 경수야."
얼빵맨의 손끝에 내 몸이 마구 흔들렸다.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겨우 정신을 차렸어도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내 몸을 꼭 끌어안고 있는 변백현 때문에.
"변백현 일어나!"
"조금만 더..."
찰싹! 얼빵맨은 야무지게 백현이의 엉덩이를 때렸다. 끼이잉 우는소리와 함께 내 품을 더 파고드는 변백현은 영락없는 강아지 같았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변백현은 지 침대도 아니면서 대체 왜 여기서 자?"
지금 변백현과 내가 서로 얼싸안고 잠든 이 침대는 내 남자 찬열이의 것이었고 찬열이는 오늘도 보이지 않았다. 눈곱 낀 눈을 비볐다.
"네가 할 말이냐? 네 방 놔두고 넌 왜 여기서 자?"
오 듣고 보니 꽤 논리적인 역질문인데? 과학 좀 공부하셨었나 보군. 하지만 저 말엔 어폐가 있었다. 나는 당연히 찬열이의 미래 아내로써 이 침대 누워 잘 자격이 있는 것이고, 변백현은 일개 룸메이트일 뿐이었다. 즉, 변백현과 나는 본질적으로 급이 다르다. 세기의 스캔들이라 아직은 아무도 모르지만, 이 침대의 주인은 내 남자란 말이야.
"씻고 준비해. 연습 가자."
"흐잉...지금 몇시에여?"
하나같이 다 잠에 취한 눈으로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아침부터 또 왜 이렇게 변기가 그리운 건지. 엉거주춤 일어선 나는 괜히 눈치를 보며 냉큼 화장실로 들어갔다. 졸졸졸. 이제 바지를 내리는 것쯤은 껌이다. 그러나 컨트롤이 문제였다. 미숙한 컨트롤로 강아지처럼 이곳저곳에 흔적을 남긴 나는 양치만 하고 바로 화장실을 나와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아 형, 그거 내 거!"
"아, 이거 네꺼야? 그럼 이거 입어야지."
"그것도 내 거잖아... 그쪽에 있는 거 다 내 거잖아여... 이 바보야! 기억 안 나는 거야?!"
"알았어. 기다려봐봐."
"이리 와봐. 옆에 선반에 있는 게 다 형 거잖아. 은근슬쩍 내 거 입으려고 그러지?"
정말이었다. 세훈이 옷장 옆으로 조금은 아담한 사이즈의 옷들이 가지런하게 정렬되어 있었다. 매의 눈으로 옷걸이에 걸린 옷들을 쭉 스캔했다. 뭐 이렇게 예쁜 옷들이 많은 건지. 회색 줄무늬 티셔츠와 갈색 카라티를 거울 앞에서 대보며 행복한 고민에 빠져 있을 때였다.
"야 화장실 마지막으로 쓴 거 누구야!"
문밖에서 들려오는 준면이의 불호령에 냉큼 문 앞까지 달려간 나는 얼굴만 빼꼼 들이밀었다. 아마 나일 텐데.
"나 아니야."
"나도 아님."
"나도."
"저도 아닌데여."
찬열이와 아이들은 하나같이 모두 강하게 부정했다. 뭐가 됐든 큰일이 난 게 분명하다.
"아 바른대로 고해. 누가 변기통 놔두고 오줌 다 뿌려놨어."
그 순간, 히끅 하고 딸꾹질이 나왔다. 헐 뭐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최근 이 년 동안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딸꾹질인데. 도경수 몸은 왜 이렇게 정직한 거야?
"나도 아니...히끅!!"
"도경수, 너지?"
"아니... 히끅!"
눈치 빠른 변백현의 추궁에 난 얼굴만 빼꼼 내민 채 딸꾹질을 했다. 기억을 잃었으면 오줌 싸는 법까지 잃었냐? 하는 구박과 비난이 쏟아질 줄 알았지만, 의외로 아이들은 말이 없었다.
"다음부터 흘리지 마."
"넹..."
엄청 빡쳐 보였던 준면이는 의외로 쉽게 수긍하고 제가 손수 샤워기 호스를 틀어 곳곳에 묻은 흔적들을 씻어냈다.
"대체 어떻게 쌌길래 저러지?"
웃음을 숨기지 않는 오세훈과 김종인은 내가 옷을 갈아입는 내내 따라붙어 날 놀렸다. 대충 아무거나 주워 입은 종인이와 달리 다른 친구들의 의상 선택은 신중함의 극치를 달렸다. 거울 앞에서 요리조리 몸을 훑던 나는, 챙이 노란 파란색 스냅백과 회색 줄무늬 셔츠, 그리고 초록색 반바지로 알록달록 귀요미 패션을 완성했다.
패완얼이라고, 얼굴이 되니 정말 꾸미는 맛이 나네.
"야, 나 어때?"
"헐 대박."
"귀엽지."
"졸귄데?"
양말을 낑낑대며 신던 세훈이 신기한 듯 나를 위아래로 바라보더니 공항패션 같다며 마구 칭찬을 쏟아냈다. 빙그르르 돌며 무릎을 굽혔다 폈다, 귀여움을 떨어대던 나는 곧 오세훈의 옆에 앉아 나열된 옷가지들을 훑었다.
"형 그 전하고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아. 개념을 잃은 대신 패션센스를 얻었네여."
"뭐래? 야, 내가 옷 골라줘?"
"에이, 솔직히 옷은 내가 더 잘 입는다."
"야 진심. 진심. 맡겨봐."
"구경이나 해볼까."
"기다려봐."
"좀 시크하고 꾸미지 않은 듯 자연스러운? 왜. 뭔 줄 알지."
응 뭔 줄 알겠다. 과학만큼이나 좋아하는 것이 남자 아이돌 패션 탐구였다. 패션에 대해 어느 정도 일가견이 있던 난 즉시 연갈색 셔츠 하나를 골라잡았다. 오오, 가을 느낌 물씬 난다. 짙은 청색 스키니진을 입히고 앞머리를 툭툭 털어 빗겼다.
"야 괜찮지."
"내 스타일은 아닌데...걍 내가 입을게여."
"..."
김종인 다음으로 준비를 마친 나는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다른 방도 사정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소파에 늘어져서 잠을 자는 종인이를 제하곤 다들 분주하게 옷을 챙겨 입고 있었다.
"근데 우리 연습하러 가는 거 아니야? 맨날 이렇게 꾸며 입고 가?"
"경수형 깨어나고 첫 외출이라 오늘 사진 좀 찍힐걸."
아, 그래서 그런가. 슬쩍 내다본 창밖으로 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무리 중 무표정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한 여자애와 시선이 맞닿았다.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재빨리 커튼을 쳤다. 어우, 뭐야? 무서우니까 찬열이 얼굴이나 보러 가야지.
"찬열아, 준비 아직도 다 안됐어?"
"야!"
있으라는 찬열이는 없고 변백현이 달려와 내 목을 졸랐다.
"아우 놔 봐... 갑자기 왜 이래?"
"이거 뭔데 귀엽냐."
내 모자를 벗겼다 씌었다 했다. 유치한 장난질에 무반응으로 대처하자 재미가 떨어졌는지 변백현은 혼자 노래를 부르며 입다 만 옷을 마저 챙겨 입었다.
꽃밭에서 05
자꾸만 흘낏대는 시선들에 괜히 으쓱으쓱 해진 어깨로 당당하게 앞서 걸었다. 그 와중에도 변백현은 대놓고 내 패션을 탐냈다.
"아 나도 저런 식으로 입어야겠다. 우리 대만 갈 때 협찬 없죠?"
"빨리 타기나 해."
엘리베이터 앞에서도 시끄러웠다. 김종인을 선두로 일곱 명이 쪼르르 올라탄 엘리베이터는 비좁았다. 난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찬열이에게 몸을 기댔다.
"아우 붙지 마."
"..."
그렇게 행복하게 도착한 주차장에서 영문 모를 일이 벌어졌다.
"안내면 진거 가위바위보!"
"가위바위보!"
으잉? 얼떨결에 낸 가위에 나 홀로 1등을 거머쥐었다. 대체 이게 무엇을 위한 가위바위보인데?
"음? 일단은 아싸?"
"야 변백현 지랄하지 마, 이리 와 너."
패배자들끼리의 가위바위보를 내빼고 은근슬쩍 차에 몸을 실으려는 변백현의 목덜미를 놓치지 않고 찬열이가 잡아끌었다. 내 남자가 열의에 불타올라 게임을 진두지휘하는 모습은 섹시했다. 결과는 나 일등, 세훈 이등, 준면이 삼등.
"일등 왜 안 타고 있어."
"나 먼저 타?"
준면이가 내 엉덩이를 차 안으로 쓱 밀어 넣었다. 아, 이게 차 자리 정하기 게임이었구나. 뒷자리는 좁으니까. 서로 앉고 싶어 하지 않아 하는 건가. 잠시 고민하던 나는 맨 뒷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사실은 속셈이 따로 있었다. 과학을 전공했던 만큼 난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사람이었다. 찬열이가 가위바위보에서 져서 뒷번호니까, 비좁은 노인기 뒷자리행 티켓은 이미 예약된 사실. 이 좁은 데서 찬열이와 또다시 딱 붙어앉아 간다면? 으헤헤헤.
"진짜 거기 타게?"
"응!"
종인이의 질문에 난 신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1초 후, 내 배려심 넘치는 행동을 가장한 사심은 오세훈의 목소리에 의해 무너졌다.
"그럼 여긴 내 자리지롱~"
"..."
으잉? 뭐지? 헤실 거리며 뒷자리로 냉큼 달려와 내 옆에 딱 붙어앉는 녀석을 아니꼽게 바라보았다. 뒤이어 준면이가 조수석을 차지하고, 종인이와 백현이는 우후 환호성을 내지르며 일인석을 차지하고 앉았다. 과학에는 변수가 존재한다. 과학의 결정체인 실생활에서 또한 변수는 존재했다. 그리고 난 그 변수에 대처할 수 있는 힘이 없었다.
"야 너 저리 가!"
내 옆에 딱 붙어앉은 오세훈을 반대편 구석으로 밀었다. 변수가 있었다고 한들 이변은 없었다. 찬열이가 내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 왜 맨날 꼴등인데?"
불평을 늘어놓는 모습조차 어쩜 이렇게 멋있을까. 제일 잠을 못 깨던 변백현은 이제 생기가 가득 차오르다 못해 넘쳤다. 몸을 아예 뒤쪽으로 틀어 가만히 있는 세훈이에게 손장난을 걸었다. 은근슬쩍 손장난에 가담한 찬열이에 차 안은 시끄러워졌다. 이런 소음 속에서도 종인이는 잘만 자고 있었다. 벤은 비단처럼 미끄러졌다. 한강을 건너자마자 우리는 sm 신사옥에 도착했다.
"오우. 멋진데."
번지르르한 빌딩에 감탄사가 절로 나오기도 잠시-
"뭐 이리 사람이 많아?"
"벌써 다 왔어?"
막 잠에서 깬 종인이가 뒷머리를 다듬었다. 차량의 진입이 힘들 만큼 많은 팬들이 몰려있음에 나는 침을 꼴깍 삼켜넘겼다.
"원래 이렇게 사람이 많아?"
"원래 안 이래..."
"거봐여. 오늘 사진 겁나 찍히지. 내가 옷 예쁘게 입으라고 했져."
원래 이 정도까진 아니라 했다. 경비 아저씨들의 통제 하에 우리는 무사히 주차를 마칠 수 있었다. 이어폰을 꺼내 낀 녀석들이 곧 차량 밖으로 빠져나갔다. 팬들이 소리를 지르든 말든 하나같이 다 시크한 표정으로 앞만 보고 전진했다. 나 또한 슬쩍슬쩍 눈치를 보며 찬열이의 뒤를 따랐다. 정신이 하나도 없네.
"경수야!"
"경수야 오늘 대박 귀여워!"
"깨어나줘서 고마워! 사랑해!"
유독 도경수를 부르는 이름들이 많았다. 한 치의 동요도 없이 급하게 사옥 안으로 몸을 들이는 녀석들을 흉내 내기도 잠시 나는 활짝 웃으며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달팽이관을 녹일듯한 팬들의 돌고래 초음파 함성과 동시에 나는 앞서 걷던 찬열이와 뒤에서 따라오던 얼빵맨에게 잡혀 그대로 사옥 내로 골인되었다.
닫힌 문 뒤로 아쉬움 가득한 탄식들이 새 들렸을 때도 내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닫힌 유리문 너머로 사람들이 번져 보이고 도경수를 부르는 팬들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점차 줄어들었다. 탁 터진 계단을 다 올랐을 때 얼빵맨을 뒤따라오던 정체 모를 남자가 날 잡아 세웠다.
"도경수."
뭐지, 이 깡패같은 남자는? 가라앉은 그 남자의 목소리는 날 궁지에 몰린 생쥐로 만들었다.
"머리는 좀 어때."
"괜찮아여. 근데 혹시 누구...?"
남자는 엑소의 로드 매니저라고 했다. 형 조금도 기억 안 나냐는 물음에 '조금 기억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하며 어물쩍 넘겼다. 로드 매니저라는 남자는 곧 자판기 옆 의자에 날 앉히며 조곤조곤 상황별 대처요령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공식 석상이 아닌 곳에서는 팬들에게 반응해서는 안 돼. 특히 아까처럼 인파가 몰리는 경우 흥분한 팬들이 자칫 사고를 일으킬 수 있거든."
"명심할게여."
회사 지침이었구나. 나는 차분하게 고개를 주억였다. 하긴, 콘서트 스탠딩 자리만 해도 앞에서 엑소 애들이 뭐만 하면 팬들이 난리치는 바람에 지옥 속의 전쟁이었으니까.
"연습 잘하고. 무리하지 말고."
"안녕히 가세여..."
꾸중 아닌 꾸중을 들었다. 꾸벅 인사를 올리고 뒤를 돌았을 때 찬열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경수 니가 변백현이야? 멍 때리지 말고 이리 와."
"우웅!"
꿀같은 목소리에 난 방긋방긋 웃으며 찬열이에게 달라붙었다. 그때였다.
"오우, 우리 찬열이. 도배우!"
어랏? 저 남자는! 언젠가 병실에 있었을 때 다녀갔던 sm 실장이라는 사람이었다. 안녕하세요. 자동적으로 숙여지는 찬열이의 고개에 나도 기계처럼 따라 숙였다. 쾌차해서 이렇게 보니 다행이라는 말에 난 적당히 덕분에요.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그럴듯한 말로 답변했다. 연습실에 도착할 때까지 마주치는 사람들이 많아 그 인사만 다섯 번은 더 한 것 같다.
"아저씨 오 아저씨 달려 달려 아저씨 헤이"
길쭉한 소파에 우린 제각기의 자세로 늘어져 앉아 피곤함을 호소했다. 찬열이 혼자 잔뜩 들떠서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알지 못할 자작곡을 불렀다. 그 모습을 멀뚱히 쳐다보던 준면이가 반복되는 멜로디 패턴을 읽고 따라불렀다.
"아저씨 오 아저씨 달려달려 아저씨 헤이"
난 분명 초저녁에 잠들어 열두 시간도 더 잔 것 같은데 왜 이렇게 피곤하지. 준면이의 어깨에 몸을 뉘고 눈만 깜박였다. 아니, 피곤한 게 아니라 그냥 뭘 하기가 귀찮은 건가.
"아아 아아-"
변백현도 목 풀기에 가담했다. 제멋대로 음을 올리고 내리기를 반복하는 변백현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다가 구사즈 녀석들로 눈을 돌렸다. 닭 흉내를 내며 목을 뺐다 접었다 하는 오세훈을 보며 김종인이 킥킥거리며 웃고 있었다.
"연습하자. 레츠 프락티스~"
짝짝. 두 번의 찰진 박수 소리와 함께 등장하는 남자에 우리는 뻘짓을 멈추고 일제히 인사했다.
"옷도 안 체인쥐 안하고. 뭐 했어? 오우 마이 경수, 알 유 오케이?"
남자가 내게 다가와 나를 꼭 안으며 내 엉덩이를 톡톡 토닥였다. 뭐지, 이 희멀겋게 생겨 싸구려틱한 영어를 남발하는 남자는?
"네. 덕분에여..."
대충 입고 나온 찬열이나 종인이와 달리 나를 포함한 나머지 멤버들은 패션쇼하느라 입고 온 옷을 뱀 허물벗듯 하나씩 벗어던졌다. 단체로 보는 적나라한 상체 노출에 히끅대던 나도 곧 편안한 차림으로 갈아입었다.
"스탑. 다시."
"휴우..."
답답해 미쳐버리겠다는 듯한 시선이 내게 닿았다. 그 누구 하나 날 질책하는 이는 없으나 벌써 스무 번 넘게 반복되는 내 실수로 모두가 지쳐있었다. 몸이 잘 움직이면 뭘 해, 내 머리로 습득이 잘 안되는걸. 자꾸 엉키는 스텝에 옆 백현이의 발을 벌써 다섯 번이나 밟았다.
"헛!"
"아 진짜."
동선을 헷갈린 내가 넘어지려고만 하면 날렵하게 피하는 세훈이와 달리 백현이는 의외로 꼼수를 부리지 못하고 함께 엉켜 넘어졌다. 박자 맞춰 흐르던 음악이 멈췄다.
"오우 마이갓. 그래. 그래. 충분히 그럴 수 있어. 경수는 아직 환자니까. 아직 회복 전이니까. 그래. 그런 거야. 이츠 오케이."
안무가 선생님의 말은 마치 스스로를 세뇌하고 설득하는 것 같았다. 10분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고개도 들지 못하고 눈치만 보고 앉아있는 내 무릎 위에 찬열이가 얼굴을 대고 누웠다.
"오센 나도 물 좀. 죽을 거 같아."
"미안...."
"영화 같은데 보면 기억 잃어도 감은 살아있지 않나?"
"맞아 보통은 몸이 기억하잖아."
"맞아여."
찬열이의 말에 종인이가 공감하고 세훈이가 맞장구를 쳤다. 진척 없이 제자리걸음인 안무 연습에 모두가 지쳤다. 나를 비난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괜찮다며 다독이는 사람 또한 없었다. 그러는 동안 트레이너들은 비상이 걸렸다. 춤은커녕 노래 가사도 제대로 외우지 못하는 것이 뽀록났을 땐 정말 안무가의 얼굴은 멘붕 그 자체였다. 트레이너는 제 얼굴을 감싸 쥐고 알지 못할 영어를 씨부렁거렸다. 이런 내 소식을 접한 비상대책 회의본부 실장은 즉각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당장 이주 후가 대만 콘서트인데 어떡해요?"
"양해 구해야지. 경수도 좀 쉴 시간이 필요하고."
"엑소 엠 애들 다음 주나 되어야 귀국하는데 경수 없이 동선 짜놓는다 해도 다 모여서 맞춰볼 시간은 이틀밖에 없어요. 이게 말이 돼요? 가뜩이나 요즘 엑소 말 많은데..."
"흐음..."
"병원에선 뭐래요. 경수군 언제쯤 기억이 되돌아오는 거래요?"
"강한 외상 충격으로 인한 일시적인 현상으로 추정되나, 두고 봐야 한다고..."
"맙소사, 오우 마이 갓!"
모두가 패닉에 빠져 있던 바로 그때였다.
"실장님. 전 그래도 아까 가능성을 보았어요."
"가능성?"
이번에 sm 아카데미 선생으로 새로 입사했다는 젊은 보컬 선생의 말에 임원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의 확고한 시선이 내게 고정되었을 때 중후한 무게감이 나를 억압해왔다. 침을 꼴딱 삼켜넘겼다.
"경수. 으르렁 노래 아는 부분 불러봐."
아아, 하고 목을 가다듬은 나는 슬쩍 눈치를 보고는 노래를 시작했다. 뭐, 일단은 하란 대로 해야지.
"또 다른 늑대들이 볼세라. 볼세라! 너무나 완벽한 내 여자라 여자라! 품속엔 부드럽게 너를 안고오- 너만을 위해서 나는 완벽해지고우-"
노래를 끝냈어도 임원들은 별 반응이 없었다. 아니 뻘줌하게 왜들 저러는 거야. 슬쩍 눈치를 보다 노래를 이어 불렀다.
"결국엔 강한 자가 얻게 되는 미인 자리가 없으니까 그냥 돌아...."
"흐음. 노래는 기억하지만 춤은 기억하지 못한다?"
실장이란 사람이 내 노래를 똑 잘라먹었다. 그래, 상식적으로도 과학적으로도 납득하기 힘들 것이다.
"그런데 유독 랩 파트... 그러니까 찬열이 파트만 기억을 하더라고요."
"경수군이 평소 잠재되어있던 랩에 대한 열망이 무의식을 거쳐 터져 나온 것 같네요."
모두가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저 사람들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나는 다만 찬열이 파트만 빙빙 돌려 듣고 따라 부르다 보니 그 부분만 정확하게 외워졌을 뿐인데. 사실 노래를 들으면 찬열이 파트에만 귀를 기울이다 보니 다른 애들이 뭐라 씨불이는지는 관심 밖이었다. 그래서 정확한 가사는 외우지 못한다.
"경수군이 불렀던 파트는 기억이 안 나나요?"
"음..."
가만히 생각해보자. 내 차차애였던 김종인의 파트는 기억이 난다. 나 혹시 몰라 경고하는데. 지금 위험해. 내 차애인 준면이의 파트도 기억이 난다. 귀엽게 총총총 뛰며 넌 그냥 그대로 있어. 나만을 바라보면서. 그런데 도경수는? 화면이 바뀌는 2군에 있는 건 알고 있지만... 아. 기억났다.
"탐색 중이야, 너의 주위를 베베 어어 헝-"
"..."
"거친 고동소리-! 워오!"
자신 있게 내던진 내 노래와는 다르게 임원들의 표정은 급격하게 굳었다. 살포시 미소 지었던 내 입가 또한 천천히 내려앉았다. 분위기 왜 이러지.
"기억과 함께 창법도 잃었나..."
괜찮게 한 것 같은데. 전문가들의 귀에는 영 아니었던 걸까. 바이브레이션? 그것도 내 마음대로 조절되고 음역대도 넓고 가성도 된다. 근데 대체 왜? 잘만 불렀는데. 한참을 고뇌하던 임원들은 날 회의실 밖으로 쫓아낸 다음 저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토의 시간을 가졌다.
"뭐래여?"
새초롬한 얼굴로 다가온 세훈이가 내 어깨에 제 턱 대고 올리며 호기심을 드러냈다.
"... 모르겠어."
"형 힘내여. "
미안한 건 둘째치고 이 일은 어찌 타파해야 하나. 가뜩이나 심란해 죽겠는데 오세훈은 내 팔을 가지고 노는 척하며 지 이마에 묻은 땀을 은근슬쩍 내 소매에 묻히고 있었다.
"야 좀 떨어져. 뽀송뽀송한 내 몸에 땀 묻어."
"힝... 너무해."
날 제외한 멤버들을 소집하는 소리에 세훈이는 다시 쫄쫄 왔던 길을 되돌아 뛰어갔다. 몇 분을 더 기다리면 곧 회의실 문이 열리고 로드 매니저라는 남자가 날 향해 손짓했다.
"경수야, 백현이도 불러와."
"백현이여?"
"응. 5층 녹음실에 있을 거야."
아니 불안한데. 갑자기 변백현은 왜 부르는 거지. 대체 저 안에서 날 주제로 어떤 대화가 오갔던 거야. 총총 뛰는 걸음으로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띵동. 문이 열렸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소포 덩어리들과 함께 택배기사님이 난감한 표정을 짓고 계셨다.
"아 저는 다음에 탈게여!"
"고마워요."
생각보다 꽤 오래 잡고 있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 지쳐 계단을 찾아 올랐다.
마주치면 무조건 인사, 또 인사. 상층에서 내려오는 아리따운 아가씨의 모습에 대충 고갯짓으로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고 지나치려 할 때였다. 그 아가씨가 내 손목을 덥썩 잡아왔다. 그리고는 아련한 눈빛으로...
"걱정 많이 했어..."
어 뭐지. 얘는... 눈을 떼굴떼굴 굴리며 지금 상황을 분석하던 나는 결국 어색하게 말문을 열었다.
"아... 고마워?"
"내 카톡은 왜 안 봐주는 거야?"
"아 그건 말이지..."
"연락 기다릴게."
그 말을 끝으로 여자는 뒷모습을 보이며 급하게 내려갔다. 에구에구, 저러다 넘어질라. 천천히 좀 가지. 근데 저 머리통, 생각해보니까 굉장히 많이 익숙한데. 황토색에 가까운 밝은 투톤 컬러의 저 헤어스타일은 이번에 새로 나온 sm 신인 걸 그룹 레드벨벳을 따라 한 건가?.... 가 아니라 여긴 sm 사옥이잖아!
"으흠...?"
인기가요를 보며 대충 넘겼던 것 같다. 찬열이 외에는 관심 없는 나인지라, 그나마 얼굴 식별이 가능한 건 소녀시대나 슈퍼주니어뿐이었다.
"카톡? 연락을 기다려?"
레드벨벳 노란 머리라. 도경수를 바라보는 눈빛 하며, 연락을 기다리겠다는 말하며. 분위기상 연애 중은 아닌 것 같고. 썸인가.
"으억!!"
순간, 마음이 불안해졌다. 엑소 쩌리인 디오에게도 저렇게 지분대는 계집애가 있는데 원탑에 최고 남신 찬열이는 대체 얼마나 많을까. 으으, 상상만 해도 싫어.
"싫어. 싫어. 싫어."
변백현 한 번 찾으러 왔다가 미아 되겠네. 긴 복도 앞에서 난 이방 저방을 기웃거렸다. 그렇게 여섯 번째 방에 도착했을 때, 드디어 유리창 너머로 녀석이 보였다. 변백현이 있던 곳은 5층 녹음실이 아닌 3층 연습실이었다. 무거운 문을 살짝궁 열었다. 달달한 멜로디에 백현이의 목소리가 묻혀 나왔다. 아니, 변백현의 달달한 목소리에 멜로디가 묻혀 나온 건가. 녀석이 내 인기척을 느낌과 동시에 부드러운 선율이 끊겼다.
"어우, 야. 깜짝아. 왜?"
"너 노래 잘 부른다."
그러니까 엑소 보컬이지. 녀석은 뭘 새삼스럽게 그러냐며 악보를 다시 훑었다.
"너 데리고 오래."
"왜. 누가?"
"몰라 일단 데려 오래. 나 너 찾느라고 혼났어 아주."
"전화를 했어야지, 바보야."
"녹음실에 있는 줄 알았지."
"어우, 바보."
개구지게 웃던 백현이가 쩝쩝대며 배고프다고 칭얼거렸다.
"근데 다른 애들은 어딨어? 예를 들면 찬열이라던가..."
"내가 알아?"
뭐야 얘네... 정말 모르겠다는 듯한 눈빛에 난 또 금방 수긍했다. 활짝 열린 회의실을 쭈빗쭈빗 눈치를 보며 들어서는 나와 달리 백현이는 넉살 좋게 형형, 누나누나 하며 인사했다.
"실장님. 저 부르셨다면서요."
연습은 잘 되고. 밥은 먹었고. 등의 짧은 안부 인사를 끝으로 실장은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위기를 기회로 바꿔야겠어."
"?"
"기자한테 메일 보냈어. 언론에 알려질 사실은 이래. 일단 이런저런 문제도 많고 하니 경수 기억상실증 걸린 건 밝히지 않을 거야. 경수는 앞으로 이 주 간은 외상 후 스트레스로 앓는 중. 뭐, 거짓말은 아니니까."
"네?"
"대외적으로는 끙끙 아픈 애가 되는 거지. 지금 트레이닝 받아도 멀쩡하다며?"
"..."
"경수는 콘서트 전까지 엑소 단체 스케줄 빠지자. 그동안 빡세게 안무도 익히도 노래도 다시 배우자. 콘서트 무대에는 서야 되니까 대만 콘서트에만 집중해."
"끄응...저 꼭 해야 돼여?"
"루한이도 빠졌는데 너까지 아프다고 콘서트 빠지면 주식 또 확 떨어져. 환불표도 감당 안 되고. 조금만 무리하자, 경수야."
마케팅 부장이란 여자가 내 손을 꼭 잡아왔다.
"백현이는 그 사건으로 이미지 좀 회복해야지?"
"예? 무슨 사건?"
"경수 아픈 척 좀 하고 백현이랑 사진같이 몇 장 찍어서 인스타에 올리자."
"그 사건이라면 혹시 탱큥벵링망치......으읍!!!!! 야!!!!"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변백현이 내 뒤통수를 빡 때리며 날 구타했다.
"너 그거 언급하지 말랬지! 뒤질래?"
"아응아파!!"
"아 잠깐만."
당황한 얼굴로 내 입을 손바닥으로 마구 때리던 변백현의 손이 멈췄다.
"너 기억상실증 아니야? 그걸 기억해?"
"... 부분적인 기억만 난다니까..."
"앉아봐, 둘 다."
그럼으로써 '어디까지 기억하고 어디까지 못하냐'에 대한 질문 공세가 쏟아졌다.
"경수야, 네가 기억하는 이슈들을 다 나열해봐."
"그것 빼곤 지금 딱히 기억나는 게..."
"뭐 또 기억나는 건 없어?"
"찬열이가 정글 갔다 온 거...?"
"실장님, 팀장님. 주목해 주세요. 제가 볼 땐 저것 또한 심리적인 원인 같습니다. 정글에 가고 싶다. 여자친구를 사귀고 싶다. 하는 경수의 무의식적 바람이 남아 경수의 의식을 지배하고 그 과정에서..."
오가는 잡소리를 들으며 난 내가 할 일들을 요약했다. 그러니까 앞으로 콘서트 전까지 난 강도 높은 훈련을 받을 거라 했다. 안무를 중점으로 고도의 집중 훈련에 들어간다. 그러는 동안 백현이에게 1:1로 간호받는 모습을 찍어 SNS에 올린다. 벗을 생각하는 백현이의 마음은 팬들에게 따듯하게 다가갈 것이고, 그동안에도 아니꼬웠던 시선들 또한 수그러질 것이다... 응? 이게 말이야, 방구야?
"이게 바로 전화위복의 지혜지요."
대체 어디가 전화위복의 지혜라는 건지?
SKY BLUE, DO_직목님 표지감사합니당
ㅋㅋㅋㅋㅋㅋㅋㅋㅋ진실을알고나면ㅋㅋㅋㄱ노골적인 찬여리팬ㅋㅋㅋ
찬열이꺼 밖에 몰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ㅌㅌㅋㅌㅋㄴㅋㅋㅋㅋㅋㅋ
진짜 경수는 어떻게 지내고있니ㅠㅠㅠ?
진짜경수를찾아요ㅠㅠㅠㅠㅠ헝헝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근데 경수 어떡해ㅠㅠ
아 진짜 웃기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근데 진짜 경수는..?ㅠㅠㅠ
진짜 갱수 어디써여ㅜㅜㅜ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4.12.17 19:44
진짜 경순,ㄴ..?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4.12.23 01:02
경수야 니가필요해!!! 빤니와ㅠㅠㅠㅠㅠㅠㅠ
소엘잌ㅋㅋㅋㅋ
진짜 경수가 필요해ㅐ
제발...소엘이 본체야 일어나서 도와주렴...
하염없이 기다릴 수밖에,,
오구ㅜㅠㅠ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걱정되는데 웃기다
땡큥배리 마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뒷감당 어떻게 해.....ㅋㅋㅋㅋㅋㅋ
내가 감히 예상컨데 전에 숙소(?)앞에서 경수를 소름돋게 처다보고있던 여자애가 진짜경수영혼인듯..
경수야 얼릉와ㅜㅜ
경수야ㅠㅜ
ㅌ탱큥베리망치...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겁나 웃곀ㅋㅋㅋㅋㅋㅋㅋ근데 경수는.....오고 나면 기겁을 할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