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 윤성숙 전도사
제목: 여호와 샬롬
말씀: 사사기 6장 17~24절
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것을 여호와 살롬이라 하였더라 그것이 오늘까지 아비에셀 사람에게 속한 오브라에 있더라(삿6:24)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착각 중 하나가 하나님께서 항상 자신과 함께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하신다는 그 증거로 하나님께 요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표징이며, 이것이 자신들의 믿음의 증거라고 여기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이것으로 하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그 살아계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으로 인정하며 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수를 믿었으니 죄에서 구원받아 천국 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표징을 자신들의 삶 가운데서 바라며 사는 것이다. 결혼문제, 직장 문제, 생활고의 문제, 모든 질병의 문제 등 이런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이들의 표징이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다면’, ‘그 살아계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면’이라는 조건이 붙는다. 자신들의 삶에 그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요구가 이루어지면 그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시는 전능한 하나님으로 인정하며 자신의 요구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자신을 버렸다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기독인들이라는 것이다.
이런 기독인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기드온이다. 6장에서 기드온이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하는 것을 보면 오늘날의 기독인들의 모습과 닮아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라는 것이다.
<사사기 6장 16-17절>
16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하시니라 17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만일 내가 주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 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기드온의 반응은 ‘표징을 보여주소서’이다. 기드온은 표징을 보지 못하면 도무지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의심 많은 사사이다. 오늘 본문뿐만 아니라 <삿 6:36-40>에서 또 하나님께 표징을 요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사기 6장 36-40절>
36 기드온이 하나님께 여쭈되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거든 37 보소서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 마당에 두리니 만일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주변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을 내가 알겠나이다 하였더니 38 그대로 된지라 이튿날 기드온이 일찍이 일어나서 양털을 가져다가 그 양털에서 이슬을 짜니 물이 그릇에 가득하더라 39 기드온이 또 하나님께 여쭈되 주여 내게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말하리이다 구하옵나니 내게 이번만 양털로 시험하게 하소서 원하건대 양털만 마르고 그 주변 땅에는 다 이슬이 있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40 그 밤에 하나님이 그대로 행하시니 곧 양털만 마르고 그 주변 땅에는 다 이슬이 있었더라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거든~’,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하시는 표징을 보여달라는 것이다. 내가 말한 표징을 보여주시면 주께서 말씀하신 것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할 줄 믿겠다는 것이다. 표징을 보여줘야 하나님의 일을 진행하겠다는 것이다.
기드온이 하나님께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자신과 반드시 함께하시겠다고 말하고 있는 자가 하나님이 맞는지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를 표징으로 확인하겠다는 것이다. 기드온이 ‘내게 이번만 양털로 시험하게 하소서’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하나님이 맞는가? 그렇다면 그것을 표징으로 내놓으라는 것이다. 자신이 요구한 표징으로 하나님임을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조건이 ‘표징을 보여주소서’이다. 표징을 보여주시는 하나님, 이적으로 자신을 심한 궁핍에서 구원하는 하나님만 믿고 있는 것이다.
<사사기 6장 13절>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오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나이까 또 우리 조상들이 일찍이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우리를 넘겨 주셨나이다 하니
자신들은 미디안 사람들로 말미암아 심한 궁핍을 겪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왜 우리가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가? 기드온은 하나님께 반문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면 어떻게 우리에게 이러한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신 그 모든 이적은 어디에 있냐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자기 조상들에게 이적을 행하신 것처럼 그 이적으로 우리를 궁핍에서 구원했을 텐데 그런 이적이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니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버려 궁핍함을 당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자기들의 궁핍에서 구원하지 않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기드온의 요구는 나를 큰 용사로 부르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거든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 그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그 증거를 내놓으라는 것이다.
많은 기독인들이 자신에게 고생이 닥쳐오면 하나님께 탄식하는 것이 이것이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면서 왜 나에게 이런 고생이 닥치고, 왜 이런 시련과 불행이 닥치냐고 따져 묻는 것이다. 성경에서 행하신 그 이적은 어디에 있는가? 그 이적이 나에게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니 하나님께서 나를 버렸다고 하나님께 원망을 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나타나는 표징의 유, 무로 하나님의 존재를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다. 이것이 기드온이 생각하는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며 오늘날 기독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이다. 이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라(삿6:16)’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표징을 요구하는 것이 기드온이며, 오늘날의 기독인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인간을 위하여 일하시는 분이 아니다. 인간을 위하여 표징을 보이시고 인간을 위하여 구원의 일을 행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구약의 여러 사건들을 보며 많은 오해를 하고 있는데 구약에 나타나는 표징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표징을 보여주신 그 의도는 무엇인가?
기드온이 하나님의 사자에게 예물을 드리겠다고 한다. 예물을 가지고 와서 하나님의 사자에게 드리겠다는 그 목적은 자신에게 나타나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표징을 보기 위해서이다. 이것으로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라’라고 말씀을 하신 이가 하나님이 맞는지 확인하겠다는 것이다.
기드온이 고기(염소새끼)와 무교병, 그리고 국을 양푼에 담아 하나님의 사자에게 가지고 온다. 그러자 하나님의 사자가 고기와 무교병을 바위 위에 놓고 국을 부으라고 한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 예물에 지팡이를 대니 불이 바위에서 나와 기드온이 가지고 온 예물을 삼켜버린다.
고기와 무교병 위에 국을 부었는데 불이 바위에서 나와 불살랐다는 표징은 기드온이 기대한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의 놀라운 증거이다. 자신과 함께하신다는 그 하나님께서 여호와 하나님이 맞다는 표징이다. 그러나 이 표징은 기드온을 위한 표징이 아니다. 그것은 <삿 6:24>에서 말하고 있는 ‘여호와 샬롬’을 말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많은 기독인들이 이 본문의 내용을 보면서 집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이신 표징이다. 그래서 자신들도 기드온처럼 예물을 가지고 나아와 하나님께 표징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자기 소원들이 표징으로 나타나면 이것이 이들에게는 ‘여호와 샬롬’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왜 표징을 보여주신 것인가? 그 표징을 보여주신 목적이 무엇인가?
그것은 ‘나는 여호와다!’라는 선포에 있다. 즉,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알라!’라는 것이다. 이것이 구약에서 표징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목적이다. 그렇다면 기드온에게 보여주신 표징 또한 이 목적에 부합되는 것이다. 기드온에게 보여주신 표징 또한 ‘나는 여호와다’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이것을 제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 출애굽기이다. 출애굽기는 계속해서 ‘나는 여호와다’라는 선포와 더불어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알라’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출 6: 29>
나는 여호와라~
<출 7: 5>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출 7: 17>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출 8: 22>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네가 알게 될 것이라
<출 10: 2>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출 12: 12>
~나는 여호와라
<출 14: 4>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하시매
<출 14: 18>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출 16: 12>
~내가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출 20: 2>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출 29: 46>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이러한 사실을 <삿 6:10>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여호와’라고 선포하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어떤 하나님이시기에 자신을 ‘나는 여호와다’라고 선포하고 있는가?
<출애굽기 3장 13-14절>
13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있는 자’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스스로 있는 자’란 어떤 하나님을 말하는 것인가?
<출 3: 15>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
‘스스로 있는 자’란,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이다.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이것이 나의 영원한 이름이고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라고 말씀하신다. 참고로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라는 말은 ‘스스로 있는 자’에서 ‘스스로 있는’이라는 말에서 유래한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여호와다’라고 선포하신 그 이름은 스스로 있는 자,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며, 이 말은 곧 아브라함과 언약하신 하나님, 이삭과 언약하신 하나님, 야곱과 언약하신 하나님을 말한다.
그 언약은 무엇인가? 씨, 자손에 대한 약속의 말씀이다. 곧 장차 오실 예수에 대한 말씀이다(갈3:16). 그렇다면 여호와 하나님은 예수에 대한 약속을 성취하기 위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기드온과 함께 하신다 것을 보여주신 그 표징의 목적은 ‘나는 여호와다’라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함이며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기 위한 그 목적의 정점에 예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기드온과 함께하신다는 증거로 주신 표징은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큰 용사로 부르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데 사용하시기 위한 설득용이 아니다. 그것은 ‘나는 여호와다’라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표징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것이 ‘여호와 샬롬’이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표징의 목적이 ‘여호와 샬롬’에 있다는 것이다.
<사사기 6장 24절>
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것을 여호와 살롬이라 하였더라 그것이 오늘까지 아비에셀 사람에게 속한 오브라에 있더라
하나님께서 기드온이 표징을 보여달라는 요구를 수락한 그 목적은 기드온을 통하여 ‘여호와 샬롬’이라는 고백이 나오게 하기 위함이다. 이 고백은 ‘나는 여호와’라는 선포에 대한 아멘이 되는 것이다. 나는 여호와인데 어떤 여호와? ‘여호와 샬롬’이라는 것이다.
‘여호와 샬롬’의 의미가 무엇인가?
‘여호와는 평강이다(각주 1)’라는 의미이다. ‘나는 여호와다’라는 그 선포에 대하여 ‘여호와 샬롬’으로 고백하게 하신 것이다. ‘나는 여호와다’라고 나타나신 그 여호와는 ‘평강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가 오심으로 그 평강의 하나님의 실체가 드러난다. 그 평강의 하나님께서 이 땅에 직접 오신 것이다. 그가 바로 평강의 왕으로 오신 예수이다. 그렇다면 ‘여호와 샬롬’은 장차 우리의 화평으로 오실 평강의 왕 예수를 향한 고백이 되는 것이다.
<이사야 9장 6-7절>
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이사야는 한 아기 곧 한 아들이 평강의 왕으로 올 것을 예언한다. 그리고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리라’고 말한다. 여호와께서는 오직 평강의 왕, 평강의 하나님으로 장차 오실 예수를 위해서만 일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을 위하여 표징을 행하신 것이다. 구약의 모든 역사는 모두 이 예수를 향해 있는 것이다.
<에베소서 2장 14절>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엡 2:14>은 예수를 우리의 화평이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 여호와 샬롬이 되시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여호와 샬롬으로 오셔서 자기에게 있는 화평을 자기 백성에게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리고 이 예수의 화평을 받고 예수께서 여호와 샬롬이 되심을 믿는 자들이 산상수훈에서 말하고 있는 화평케 하는 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