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구조를 보다
결정원리
인간은 모른다
인간은 그다지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자극하고 반응한다. 문제를 집단에 떠넘긴다. 때로는 집단을 끌어들이는 정치적 기동이 더 쉽게 문제를 해결하곤 한다. 21세기에 주술과 음모론과 사이비가 판 치는 이유다.
인간의 무의식은 문제를 집단에 알리고 위기의식을 공유하게 되어 있다. 혼자 생각하기보다는 흑백논리로 프레임 걸고 양자택일을 요구하며 압박하는 기술이 먹힌다. 집단을 흥분하게 만들고 타인을 개입시킨다.
사차원, 초능력, 음모론 따위 각종 개소리로 집단을 압박한다. 원리주의, 극단주의, 근본주의는 집단을 인질로 잡는 정치적 모략이다. 선택지를 없애고 집단을 궁지로 몰아 외통수에 가두면 옴짝달싹 못하게 된다.
치킨게임에 이기는 방법은 핸들을 용접해 버리는 것이다. 성찰타령, 진정성타령, 생태주의타령, 유기농타령은 인질범 행동이다. 내가 먼저 핸들을 용접했으니 항복하라며 최후통첩을 날리고 윽박지르는 기술이다.
대중은 심리적 압박술을 구사하는 마키아벨리즘에 열광한다. 집단과 결속된 느낌에 흥분한다. 진실에는 관심 없고 주술과 터부의 사설권력에 관심이 있다. 괴력난신으로 위세를 부리고 사람을 이겨먹으려 한다.
아기는 울음소리로 맹수를 끌어들인다. 인류는 생각하는 대신 집단을 쥐어짜는 아기의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 생각에 필요한 언어조차 없다. 사유의 기초가 부실하다. 밑바닥부터 새로 빌드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의 생각은 자연의 의사결정 원리를 따라야 한다. 물은 스스로 흐르고 비는 스스로 내린다. 자연은 스스로 낳는 자발성이 있다. 흐르는 강물에 쪽배를 띄우듯이 자연의 흐름에 태워 생각을 일으켜야 올바르다.
쿨해져야 한다
인간의 사유는 사람과의 대결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인간은 오로지 상대를 이겨먹으려고 한다. 완고되고 편벽된 사람이 일관된 주장으로 관객들 앞에서 유리한 지형을 차지한다. 인간의 사유가 갈수록 경직되는 이유다.
사실로 이기지 않고 심리적 지정학으로 조진다. 비난하고, 냉소하고, 야유하고 조롱하는 사람이 관객을 즐겁게 하여 이긴다. 올바른 주장을 하면 진지충으로 몰아붙인다. 맞불을 지르고 어깃장 놓는 자가 말싸움에 이긴다.
역사적으로 전쟁을 많이 한 나라가 선진국이 되었다. 말싸움을 많이 한 그리스가 사유를 발전시켰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를 죽였다. 통념과 고정관념과 편견을 앞세워 호통치고 윽박지르는 자가 논쟁에 이기고 떵떵거린다.
사유는 자연을 복제해야 한다. 우리는 사람에게 엉기지 말고 쿨해져야 한다. 이겨먹으려고 하지 말고 전율을 느끼고 통해야 한다. 밖에 홀리지 말고 안쪽을 들여다 봐야 한다. 감추어진 내부가 드러났을 때 인간은 전율한다.
우리가 자연을 오해한다. 자연의 근본은 유체다. 유체는 안에서 결정하고 강체는 밖에서 전달한다. 우리는 강체에 속는다. 강체는 심부름하는 매개에 불과하다.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은 힘이다. 힘은 언제나 안에서 나온다.
유체 중심 사고
사람이 쓰러졌다면 날아온 화살 때문인가, 아니면 그 화살을 날려보낸 활 때문인가, 혹은 그 활을 쏜 사람 때문인가? 우리는 원인을 찾으려고 하지만 원인의 원인이 있기 마련이다. 근인近因도 있고 원인遠因도 있다. 사람들은 여러 원인들 중에 하나를 찾으면 곧 생각하기를 멈춘다.
- 집합이 원소를 쏜다.
- 유체가 강체를 쏜다.
원소가 아니라 집합이 진짜다. 강체가 아니라 유체가 진짜다. 활이 집합이면 화살은 원소다. 집합이 원소를 쏜다. 유체가 강체를 쏜다. 화살은 활에 묶인다. 원소는 집합에 묶인다. 강체는 유체에 묶인다. 묶었다가 풀어주는 것은 유체다. 존재의 묶음이 단위다. 존재의 단위는 유체다.
- 존재는 묶음이 단위다.
- 유체가 단위를 만든다.
우리는 원소 중심의 사고에 빠져 있지만 원소는 힘이 없다. 집합 중심의 사고로 도약해야 한다. 강체는 힘이 없다. 유체 중심의 사고로 도약해야 한다. 망치는 힘이 없다. 망치를 휘두르는 사람 근육에 힘이 있다. 근육은 유체다. 우주의 모든 변화는 유체의 몰아주는 성질로 설명된다.
집합 - (조건) - 원소
유체 - (밸런스) - 강체
강체는 스스로 움직일 수 없으나 유체는 스스로 움직인다. 단 조건이 있다. 유체를 묶어주는 것이 있다. 내부 밸런스가 묶는다. 집합과 원소 사이에 조건이 있다.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집합이 깨진다. 밸런스가 일치하지 않으면 유체는 흩어진다. 밸런스가 유체를 묶는게 힘이다.
유체 - 풀리는 자발성이 있다.
강체 - 묶이는 의존성이 있다.
원소가 묶이면 집합이 되고 강체가 묶이면 유체가 된다. 강체가 묶이면 상호의존성이고 유체가 풀리면 자발성이다. 근원의 힘은 유체의 자발성에서 나온다. 묶인 것이 풀리는데 드는 비용을 내부에서 자체조달할 수 있는 형태로만 풀 수 있으므로 법칙이 있다. 그것이 이기는 힘이다.
존재의 자발성
엔진과 바퀴가 있다. 의사결정은 엔진 내부에서 일어난다. 바퀴는 결정된 것을 전달한다. 인류는 바퀴를 살폈을 뿐 엔진을 뜯어보지 않았다. 바퀴가 꼬리라면 엔진은 머리다. 물고기는 꼬리를 흔들어 헤엄치지만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머리다. 존재의 엔진을 탐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유체는 결정하고 강체는 전달한다. 유체는 내부가 있고 강체는 내부가 없다. 인류는 강체의 외부를 관찰했을 뿐 유체의 내부를 들여다보지 않았다. 내부는 보이지 않으므로 보려고 하지 않았다. 존재의 반은 드러나 있고 반은 감추어져 있다. 드러난 것만 보는 반쪽 문명이 되어 있다.
의사결정은 닫힌계 내부에서 일어난다. 닫힌계 내부는 빈틈없이 채워져 있으므로 들어올 수는 없고 빠져나갈 수는 있다. 계가 닫혔으므로 플러스는 불가능하다. 의사결정은 밖으로 빠져나가는 마이너스다. 나가는 길이 하나 뿐이므로 질서가 있다. 법칙이 있으므로 내부를 살필 수 있다.
존재 내부에서 스스로 변화를 결정하는 것이 자발성이다. 존재의 엔진 내부에서 일어나는 자발적인 변화를 인류는 해명하지 않았다. 외부 전달자를 찾는 문명에서 내부 결정자를 찾는 문명으로 갈아타야 한다. 바퀴문명에서 엔진문명으로, 전달문명에서 결정문명으로 도약해야 한다.
존재의 안쪽으로 성큼 걸어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모르는 것은 유체의 성질과, 유체를 가두는 닫힌계와, 닫힌계 내부에서 스스로 낳는 자발성과, 자발성을 조절하는 이기는 힘과, 이기는 힘을 연출하는 밸런스다. 밸런스를 조직하고 격발하는 절차가 질, 입자, 힘, 운동, 량이다.
의사결정 원리
우주를 건축하는 벽돌이 되는 기본 원소는 입자가 아니다. 그것은 방향이다. 방향은 1이면서 2다. 화살과 같다. 몸통을 보면 하나인데 머리와 꼬리를 각각 바라보면 2다. 객체 자체의 논리로는 1인데 관측자가 개입하면 2다. 그것이 구조다.
우주의 궁극적 힘은 유체의 밸런스 복원력이다. 그것이 이기는 힘이다. 방향전환 힘이다. 우리는 자연계의 사대힘을 알고 있다. 중력, 강력, 약력, 전자기력에 새로 하나가 추가되어야 한다. 그것은 몰아주는 힘이다. 힘을 부여하는 힘이다.
힘은 한 지점에 모이는 성질이 있다. 하나가 전체를 대표하는 성질이다. 지렛대의 원리로 알 수 있다. 힘은 지렛대 받침점에 모인다. 힘은 변화의 시작점에 모인다. 그리고 변화를 격발한다. 전체를 관통한다. 입자는 그 밸런스의 중심점이다.
극한의 법칙으로 알 수 있다. 1회 이벤트가 사건에 미치는 영향은 갈수록 감소한다. 영향이 큰 지점이 코어다. 변화는 영향력이 큰 지점에서 격발되어 영향력이 작은 쪽으로 진행한다. 변화는 큰 것이 작은 것을 이겨서 계 밖으로 밀어낸다.
대칭은 코어를 둘이 공유하면서 상호의존성을 성립시킨다. 유체 내부의 상호의존성이 밸런스의 복원력을 격발하는 것이 의사결정이다. 유체의 간섭하는 성질이 모든 것의 근원이다. 방향전환을 일으키는 변화의 메커니즘이 모두 설명한다.
우주는 안정되려고 한다. 최소시간, 최소액션, 최소비용, 최단경로, 최고효율이 이겨서 모순을 제거하고 정렬한다. 모순이 있을 때 대칭을 이루고 축을 공유하며 간섭하는 둘 중에 하나가 이겨서 상대를 밀어내고 정렬하는 것이 의사결정이다.
무위자연
자연의 낳음
nature는 '낳아진 것'이다.
자연은 낳는다. 나타난다. 나온다.
자연은 스스로 낳고, 스스로 나타나고, 스스로 나온다.
비는 스스로 내리고, 나무는 스스로 자라고, 강물은 스스로 흐른다.
구조는 얽힘이다. 얽힌 것이 풀리며 내부에 품은 것을 낳는다.
낳는 것은 놓는 것이다. 인간의 손에서 놓여난 것이 자연이다.
놓여난 것은 노는 것이다. 노는 것은 움직이는 것이다. 자연의 호흡은 시작된다.
그것은 문득 나타나 자유롭게 놀면서 인간에게 말을 건다.
변화는 내부적인 원인에 의해 저절로 일어난다.
내부에 무엇이 있는가? 메커니즘의 관통이 있다.
자연은 커다란 자궁이다. 존재를 낳는다.
자연은 커다란 활이다. 사건을 쏜다.
사유의 단서
하나가 더 있다. 숨은 변수 A다. 그것은 원래 없던 것이다. 도둑은 현장에 발자국을 남긴다. 그것은 원래 없던 것이므로 수사의 단서가 된다. 이기는 힘은 자발성에 의해 갑자기 나타나므로 사유의 단서가 된다.
마술사는 비둘기를 숨기고, 고수는 실력을 숨기고, 미인은 매력을 숨기고, 괴한은 흉기를 숨긴다. 힘을 숨기는 주인공 클리셰처럼 하나를 숨기고 있다. 상대가 맞대응을 하므로 노출된 전력으로는 이길 수 없다.
어미닭이 병아리를 품듯이 자연은 내부에 품는다. 활은 화살을 품고, 총은 총알을 품고, 청춘은 사랑을 품고, 글자는 의미를 품는다. 그 품은 것을 낳는다. 나타난다. 논다. 낳음이 있고 움직임이 있어야 진짜다.
그것은 유체 내부의 압력이다. 존재는 궁극적으로 유체다. 강체는 유체의 교착이다. 유체는 간섭되므로 가만 있지 않고 계속 움직인다. 움직이면 방향이 생긴다. 자연의 근본은 방향이며 존재는 방향전환체다.
어미는 완전하다. 완전하지 않으면 낳을 수 없다. 밸런스가 틀어지면 방향전환을 할 수 없다. 갖추어지지 않으면 메커니즘을 격발할 수 없다. 이기는 힘을 쏠 수 없다. 우리가 완전성에 대한 감각을 키워야 한다.
완전성의 눈
알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단서를 잡아야 한다. 완전성이 단서다. 완전성에 대한 감각을 키우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이 완전한가? 낳는 것이 완전하다. 완전한 것은 내부에서 낳는 자발성이 있다.
완전한 것은 유다. 유는 움직이고, 움직이면 연결되고, 연결되면 갖춰지고, 갖춰지면 완전하고, 완전하면 통하고, 통하면 낳고, 낳으면 하나가 더 있다. 자연에 기세가 있고, 시장에 이윤이 있고, 사회에 권력이 있다. 숨은 변수 플러스 A다.
병사는 총이 있고, 의사는 청진기가 있고, 목수는 연장이 있고, 작가는 펜이 있다. 꽃은 향기가 있고 생명은 호흡이 있다. 산 것은 죽은 것에 없는 무엇이 있다. 완전한 것은 통한다. 외부와 통하게 하는 소통의 고리가 있다. 하나가 더 있다.
유는 부드럽다. 부드러운 것은 약하고 약하면 흩어진다. 흩어지지 않게 붙잡는 것이 있다. 유는 강에 없는 자발성이 있다. 내부에 압력이 있고 압력을 조절하는 밸런스가 있다. 조절장치가 있다. 바깥에는 껍질 역할을 하는 닫힌계가 있다.
움직이는 것이 머무르는 것에 앞선다. 교환이 화폐에 앞서고, 추상이 구상에 앞서고, 발견이 발명에 앞서고, 자궁이 아기에 앞선다. 유체는 강체에 없는 질서가 있다. 세상을 유체의 질서로 보는 완전성의 세계관을 얻지 않으면 안 된다.
유체의 관점
유체가 강체를 낳는다. 유체가 강체를 이긴다. 유체의 활이 강체의 화살을 쏜다. 유체의 근육이 강체의 주먹을 휘두른다. 유체는 완전하고 강체는 불완전하다. 유체는 에너지로 연결되어 완전하고 강체는 에너지가 단절되어 불완전하다.
낳음은 마이너스다. 아기가 몸에서 빠져나가면 손해다. 완전한 것은 더할 수 없고 뺄 수만 있다. 세상을 낳음으로 보는 마이너스 세계관을 얻지 않으면 안 된다. 다만 수평의 마이너스가 아니라 수직의 마이너스다. 2층에서 1층으로 간다.
우리는 세상을 대칭으로 이해한다. 흑과 백, 선과 악, 진보와 보수 이분법이다. 세상을 흑백으로 보는 이항대립 프레임에 갇혀 교착되어 있다. 유체가 아니라 강체다. 산 것은 부드럽고 죽은 것은 뻣뻣하다. 이분법은 뻣뻣한 죽은 사고다.
주는 쪽과 받는 쪽이 있다. 유는 주고 강은 받는다. 나란해야 줄 수 있다. 전달의 형식은 평등이지만 전달내용은 불평등이다. 전달의 조건은 평등한 대칭이지만 전달의 진행은 불평등한 비대칭이다. 안에서는 평등하고 밖에서는 차별한다.
에너지는 언제나 주는 쪽에서 받는 쪽의 일방향으로 갈 뿐 그 역은 없다. 유는 강에 줄 수 있으나 강은 유에 줄 수 없다. 유는 부드러워서 줄 수 있고 강은 뻣뻣하므로 줄 수 없다. 평등하면 줄 수 있으나 주고받는 거래는 평등하지 않다.
마이너스 법
우주는 움직인다. 근원의 움직임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완전히 멈춘 것은 우주 안에 없다. 우리가 멈춤으로 아는 것은 움직임이 닫힌계에 갇혀 나란한 것이다. 나란한 것은 일치하는 것이다. 어떻게 일치를 도출할 것인가?
플러스는 무한대로 발산되고 마이너스는 0으로 수렴된다. 플러스는 간격을 벌려서 어긋나고 마이너스는 간격을 좁혀서 일치한다. 온도의 플러스는 무한대로 증가하고 마이너스는 절대 0도에 이르러 더 내려가지 않는다.
유체는 움직이고 강체는 멈춘다. 우주 안에 멈춘 것은 없으므로 강체는 유체의 움직임이 숨은 것이다. 물질은 에너지가 상호작용에 붙잡힌 것이다. 유체의 움직임이 밸런스에 잡히면 강체다. 내부에서 여전히 움직이고 있다.
우주는 유체다. 존재는 유체다. 우주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간격 0으로 겹쳐 있다. 붙은 것은 뗄 수 밖에 없다. 유체는 마이너스만 가능하고 플러스는 불가능하다. 존재의 자발적 의사결정은 마이너스다. 세상은 마이너스다.
에너지가 유체라면 물질은 강체다. 에너지가 물질을 격발한다. 에너지가 물질의 형태를 정한다. 세상을 에너지로 보고, 유체로 보고, 마이너스로 보고, 연결로 보고, 프로세스로 보는 완전성의 세계관을 얻지 않으면 안 된다.
프로세스
부름과 응답
신에게 제물을 바칠 때는 몸에 상처가 없는 완전한 짐승을 제단에 올려야 한다. 부정타면 신의 노여움을 사게 된다. 번제를 뜻하는 히브리어 올라ola는 올린다는 뜻이다. 결핍이 없는 온전한 제물을 제단에 올린다.
'훌륭'은 홀륜囫圇이 변한 말이다. 온전할 홀囫은 heal, holy과 같다. catholic의 어원이 된다. 파생어는 hail, health, soldier, solid, hale, whole이다. 대개 갖추어진 전체를 의미한다. 건강health한 것이 훌륭한 것이다.
서구사상은 완전성, 보편성, 절대성을 강조한다.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이 대표적이다. 헤브라이즘의 전지전능한 유일신 개념과 통한다. 그들은 기본을 강조한다. 원래 자유로웠던 그리스 정신과 다른 엄격함이 있다.
동양사상은 변화를 강조하는 주역의 영향을 받아 상대적이고 유연하다. 노자의 이유극강 사상이 그러하다. 그리스 정신처럼 자유로웠는데 후대에 법가의 엄격한 지배로 망했다. 자유로움도 잃고 엄격함도 잃었다.
동양은 기하학을 배우지 못해서 학문의 엄정함을 현실에 써먹을 일도 없었다. 서양의 돌집은 조금만 틀어져도 와장창 무너지지만 동양의 나무 집은 대충 버틴다. 사상은 자유로워도 기본은 엄격하고 완전해야 한다.
생각하려면 단서가 필요하다. 사유의 단서는 완전성이다. 근원에 무엇이 있었는가? 완전성이 있었다. 거기서부터 이야기를 풀어가야 한다. 아기는 완전하다. 처음 완전했는데 외부에서 불순물이 끼어들어 타락했다.
태초에 부름이 있었다. 부름에는 응답이 있다. 부름과 응답이 일치하면 완전하다. 비로소 갖출 것이 갖추어졌다. 진짜 완전한 것은 어떤 고착된 딱딱한 형태가 아니라 부름과 응답이 호응하는 부드러운 프로세스다.
완전하면 기능function을 획득한다. 기능이 작동하면 액션action이 일어난다. 공간적 기능과 시간적 액션을 감춘 것이 완전하다. 완전한 것은 유체다. 아기를 품은 자궁이다. 그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능성이다.
매질 매개 촉매
구조는 다섯이라야 완전하다. 부름과 응답이 완전체를 이룬다. 명령과 실행의 프로세스가 작동하고 기능을 획득해야 한다. 메커니즘에 에너지가 투입되면 연속적인 액션이 일어난다. 그것이 존재의 모습이다.
다섯이 필요한 이유는 잘못되면 다시 시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부름과 응답을 일치시킨다. 잘못 불렀으면 다시 불러야 하고 잘못 응답했으면 다시 응답해야 한다. 부름과 응답의 일치를 검증하므로 다섯이다.
모래시계의 구멍을 통과하지 못한 모래는 그곳에 붙잡혀 있다. 화장실에 갔는데 변이 나오지 않으면? 계속 앉아있어야 한다. 그곳에 붙잡혀 있는 것이다. 부름과 응답 시스템에 붙잡혀 대기하는 장치가 있다.
중개인은 판매자와 수요자를 붙잡아 두어야 한다. 화학반응을 일으키려면 분자를 붙잡아놓고 잠시 대기시켜야 한다. 수소 원자를 잘 붙잡아 놓는 촉매가 백금이다. 매질과 매개와 촉매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도마는 생선을 붙잡아두는 매개다. 생선이 잘리지 않으면 한 번 더 시도해야 한다. 이때 원점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도마와 생선은 그대로 두고 타격만 다시 한다. 어디까지 되돌릴 것인가 하는 피드백 문제다.
1, 준비하고 2, 시작하고 3, 실행하고 4, 반복하고 5, 마감한다.
에너지를 투입하는 준비, 생선을 붙잡는 시작, 공간을 타격하는 실행, 시간을 투입하는 반복, 최종마감이 있다. 부름과 응답의 일치에 실패하여 기능을 달성하지 못하면 몇 번으로 돌아갈지를 정해야 조절된다.
결맞음의 단위
말을 물가로 끌고 갈 수는 있어도 물을 떠먹일 수는 없다. 말이 물 마시는 방법을 모른다면 난감하다. 그 능력은 원래 가지고 태어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이 한계다. 인간은 거기서 좌절한다. 아기가 젖도 먹을줄 모른다면 심각하다.
'인류가 절멸의 위기에 처하여 단 하나의 지식만을 후대에 전해줄 수 있다면 그 하나의 지식은 무엇이어야 하겠는가?' 그것은 원자론이라고 하는 리처드 파인만의 생각은 틀렸다. 물도 마시지 못하는 말을 물가로 끌고가도 별 수 없다.
태초에 단위가 있었다. 그것은 물이 아니라 물을 먹는 방법이다. 어떤 존재가 아니라 부름과 응답이 일치하는 의사결정의 완전성이다. 물이 원자라면 단위는 결맞음이다. 물과 입이 일치해야 마실 수 있다. 원자는 소립자의 결맞음이다.
우리가 아는 원자는 자기장이라는 중매쟁이가 총각과 처녀의 결맞음을 보고 붙잡아 앉힌 것이다. 화살이 활시위에 매겨진 것이며, 약실에 총알이 장전된 것이며, 도마에 생선이 붙잡힌 것이다. 반드시 매개하는 촉매와 매질이 있다.
발견이 발명에 앞선다. 인간은 돈을 발명하기 전에 교환을 먼저 알았다. 우주의 근본은 존재가 아니라 경로다. 둘의 연결이 먼저다. 길이 집보다 앞선다. 길을 가다가 쉬는 곳이 집이다. 동動이 정靜에 앞선다. 존재는 붙잡힌 정靜이다.
산 것이 죽은 것에 앞선다. 산 것은 죽을 수 있지만 죽은 것은 살아날 수 없다. 죽은 물질에 생명이 깃들어 문득 살아난 것이 아니라 38억년 전 최초의 생명이 한 번도 죽지 않고 복제를 거듭해온 것이다. 이후로 옷만 갈아입은 것이다.
원자가 아기라면 경로는 자궁이다.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부름과 응답의 일치라는 자궁이 먼저 있었다. 어떤 것의 존재에 앞서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그것이 먼저 있었다. 바람이 불기 전에 기압이 있었다. 유가 강에 앞서 호출한다.
기능과 액션
세상은 원자의 집합이 아니라 단위의 복제다. 태초에 부름과 응답이 단위를 이루었다. 명령과 실행이 기능을 만들었다. 에너지가 투입되자 액션이 탄생했다. 갖출 것이 갖추어지고 비로소 완전해졌다. 태초에 완전성이 있었다.
원자는 위치를 지킨다. 그 위치를 만드는 것이 먼저다. 부름과 응답이 호응하여 위치를 만들고 결맞음을 이룬다. 원자의 존재는 그 다음이다. 그러므로 원자는 사실 중간자다. 결정자 뒤에 온 전달자다. 총이 아니라 총알이다.
우주의 근본은 유체다. 유체는 밸런스가 있을 뿐 위치가 없다. 각운동량 보존에 의해 밸런스의 축이 움직인다. 움직이면 충돌하고 교착되어 나란해진다. 나란하면 움직임이 계 내부에 숨는다. 그 나란함을 원자라고 하는 것이다.
우주는 동動이다. 동은 변화다. 태초에 변화와 변화의 방향이 있었고 방향전환에 따른 결맞음이 있었다. 그것이 완전성을 이룬다. 완전성이 존재의 단위다. 결이 맞으면 기능을 획득하고 거기에 에너지가 투입되면 액션을 한다.
우리가 입자로 치는 것은 관측자의 편의에 따른 설정일 뿐 존재의 사실과 무관하다. 궁극적으로 우주에는 물리상수로 표현되는 결맞음의 단위가 있을 뿐이다. 방향과 방향전환, 나란함과 어긋남, 안정과 불안정이 있을 뿐이다.
복제의 절차
구조는 복제 절차다. 촉매를 투입해 붙잡아야 하므로 절차가 늘어나서 다섯이다. 우리는 세상을 집합이라고 생각한다. 집합과 원소 둘이면 이상하다. 둘을 매개하는 것이 추가되어 셋으로 늘기 때문이다. 그 매개를 매개하는 것이 또 있다. 곤란하다.
세상은 원소의 집합이 아니고 원본의 복제다. DNA 복제만 봐도 절차가 만만치 않다. 거푸집으로 주물을 찍어내도 단계가 번거롭다. 복제는 부름과 응답의 절차가 있고, 매개가 있고, 기능이 있고, 액션이 있으므로 그냥 안 되고 완전성이 필요하다.
다섯을 강조하는 데는 사람을 당황하게 하려는 뜻이 있다. 깜짝 놀라야 한다. 왜 다섯이냐고 반문해야 한다. 우주 안에 다섯 아닌게 없다. 존재는 다섯이다. 사건은 다섯이다. 의사결정은 다섯이다. 변화는 다섯이다. 일치는 다섯이다. 뭐든 다섯이다.
구조론은 분류이론으로 출발했다. 어떻게 분류할 것인가? 에너지 전달경로가 기준이다. 에너지를 주면 받는다. 전달은 움직임이다. 움직임은 다름이다. 다름은 둘이다. 주는 쪽과 받는 쪽의 다름에 매개자에 의한 둘의 겹침까지 다섯으로 완성된다.
1) 주는 쪽이 갖춘다. 2) 둘이 접점을 공유한다. 3) 움직여 넘겨준다. 4) 움직여 넘겨받는다. 5) 받는 쪽이 멈춘다
다섯이 아닌 방법으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가능성은 우주 안에 없다. 자궁을 통과하지 않고 태어난 존재는 없다. 활을 거치지 않고 날아오는 화살은 없다. 기뻐해야 한다. 광속불변이 물리학의 절대적 기준이 되듯이 새로운 기준이 발견된 것이다.
내부구조
닫힌계의 의미
존재의 프로세스는 다섯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한다. 인간의 관심이 바깥을 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막연히 변화가 밖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틀렸다. 에너지는 안에서 일한다. 배가 아파도 내부가 아프고 자동차가 고장나도 내부가 고장난다.
자동차의 고장에 영향을 미치는 환경은 바깥에 있지만 반드시 내부에 대응되는 요소가 있다. 배탈이 나게 하는 음식물은 밖에서 들어오지만 내부에 상응하는 장치가 있다. 그런데 보지 않는다. 내부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개복수술을 해서라도 봐야 한다.
비가 오든 바람이 불든 변화는 밖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틀렸다. 비가 오기 전에 구름이 이동했고 바람이 불기 전에 태양이 공기를 데웠다. 보다 큰 개념으로 보면 변화는 계 내부에서 격발된다. 이에 필요한 것이 변화의 자궁이라 할 닫힌계 개념이다.
변화는 곧 방향전환이며 ->가 <-로 바뀌는 것이다. 먼저 ->와 <-가 만나 -><-를 이루어야 한다. 변화의 자궁이 만들어졌다. 두 방향이 마주보면 이미 내부가 탄생해 있다. 관성의 법칙에 의해 작용의 앞을 막아서는 반작용이 없으면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닫힌계는 한 차원 위에 있다. 점을 닫아거는 것은 선이고, 선을 닫아거는 것은 면이고, 면을 닫아거는 것은 입체고, 삼차원 입체를 닫아거는 것은 사차원 유체다. 유체는 내부에 압박이 걸려 ->와 <-의 밸런스가 이루어진다. 변화는 반드시 붙잡는 것이 있다.
구성요소는 프로세스를 반영한다. 변화의 프로세스가 다섯이므로 존재의 구성요소도 다섯이다. 붓이 아직 종이를 만나지 않았다 해도 종이의 성질이 붓의 구성요소에 미리 반영되어 있다. 칼이 나무를 자르지 않았어도 무든 배추든 자를 테세를 갖추고 있다.
일의 진행단계
구조는 얽힘이다. 얽히고 풀리는 형태는 질, 입자, 힘, 운동, 량이다. 얽힌 것은 질이고 풀린 것은 량이다. 입자는 변화의 시작점, 힘은 공간의 진행방향, 운동은 시간의 진행순서다.
구조가 다섯인 이유는 에너지가 일로 변환되기 때문이다. 에너지의 사정과 일의 사정을 합치고 둘의 겹침까지 다섯이다. 활의 사정과 화살의 사정에 둘의 겹침을 합치면 다섯이다.
에너지의 원인1과 결과2 + 둘의 겹침 3 + 일의 원인4과 결과5
원인 측 변화와 결과 측 변화에 둘이 겹치는 방향전환까지 다섯이다. 구슬이 다섯이라면 왜 하필 다섯인지 이상하지만 일의 프로세스가 다섯이라면 일상에서 무수히 경험한다.
준비하고, 착수하고, 실행하고, 진행하고, 마감한다. 뭐든 시작하고 끝내는 데는 다섯 절차가 필요하다. 작업을 하려면 그것을 붙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붙잡고 일치시키고 놓는다.
모든 작업은 무언가를 일치시킨다. 그 전에 붙잡고 그 후에 놓는다. 거기에 에너지의 입력과 출력을 더하면 다섯이 된다. 넣고 주고 뺀다. 주는 쪽과 받는 쪽이 있으므로 다섯이다.
일은 무언가를 주고받는 것이다. 줄 사람, 받을 사람, 둘이 만날 장소와 시간과 물건이 정해져야 한다. 결혼을 하려면 중매쟁이가 필요하다. 인터넷에서 만나도 게시판이 필요하다.
매개가 있어야 한다. 붙잡는 것이 매개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아 세워야 줄 수 있다. 돈을 주든, 웃음을 주든, 매력을 주든, 능력을 주든 뭐라도 주고 받는게 있어야 일이 진행된다.
다섯은 평등한 숫자가 아니라 차별적인 단위다. 콜라를 마신 다음 병뚜껑을 열 수는 없다. 오줌 먼저 누고 나중에 바지 지퍼를 내릴 수는 없다. 샤워를 마침 다음 옷을 벗을 수 없다.
구성요소는 프로세스를 복제한다. 다섯이라는 숫자에 낚인다면 공간에 주목한 경우다. 일에는 수순이 있으며 그것은 시간이다. 우주의 보편적 질서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밸런스의 구조
구조의 다섯은 밸런스의 구성요소다. 우주 안의 모든 것이 밸런스다. 밸런스는 나란함이다. 나란하지 않으면 무너진다. 밸런스는 하나의 축에 얽힌 둘의 대칭에서 이게 변하면 저게 변하는 것이다. 작용 반작용의 법칙이 닫힌계 내부에서 작동한다. 자연의 자발적 변화는 밸런스의 복원력이 원인이다.
밸런스는 천칭이다. 한쪽 접시가 움직이면 반대쪽 접시도 움직인다. 둘이 일치하면 멈춘다. 나무는 줄기와 뿌리가 밸런스를 이룬다. 겉으로는 줄기가 세고 뿌리가 약해 보이지만 흙이 뿌리를 잡아주므로 밸런스가 맞다. 줄기는 가지의 밸런스로, 가지는 나뭇잎의 밸런스로 계속 밸런스를 연결해 간다.
하나의 균형이 하나의 존재가 되고 하나의 사건이 된다. 외력의 작용에 반작용하여 자신을 보존하는 것이 존재다. 풍선의 이쪽을 누르면 저쪽이 나온다. 밸런스는 스스로 복원하여 존재를 유지한다. 우리는 외부의 객체를 타격하여 작용 반작용 법칙을 관찰하지만 밸런스는 내부에서 작용 반작용한다.
이쪽과 저쪽은 대칭이지만 이쪽에서 저쪽으로 전달은 비대칭이다. 우주는 대칭에 의해 나란하지만 그것을 나란하게 하는 힘의 전달은 나란하지 않다. 우주는 전방위로 대칭이지만 대칭을 만드는 에너지 이동은 비대칭이다. 어른과 아이는 대칭이지만 돈의 이동은 언제나 어른에서 아이로 이동한다.
바퀴는 대칭인데 핸들은 비대칭이다. 바퀴는 핸들을 흔들 수 없다. 비대칭을 작동시켜 대칭을 완성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미션이다. 세상의 불평등을 작동시켜 평등에 도달하는 것이 문명이다. 그렇지 않다면 왜 사는가? 부자와 빈자, 강자와 약자 간에 비대칭을 작동시켜 대칭을 회복해야 한다.
인간 중심 사고
공을 벽에 던지면 되돌아온다. 던지는 것은 척력이고 되돌아오는 것은 인력이다. 척력은 진짜고 인력은 가짜다. 인력은 내가 잡아당긴 것이 아니고 벽에 맞아서 튕긴 것이다. 중력은 있고 부력은 없는 것과 같다. 인력은 척력의 결맞음에 의한 얽힘이다.
내가 직접 넣은 골과 상대편 수비수가 넣은 자살골은 다르다. 인류가 이런 것을 엄격히 따지지 않으므로 혼선이 일어났다. 무한 동력 아저씨 삽질은 벽에 맞고 튄 것과 자발성의 힘을 헷갈리는 것이다. 활은 힘이 있고 화살은 힘이 없다. 동력이 기준이다.
1) 어떤 둘의 만남 2) 꺾는 주체 특정 3) 공간 방향 결정 4) 시간 변화 진행 5) 어떤 둘의 이별
원인과 결과는 우리가 알고 있고 그 사이에 숨은 방향전환 구조는 3이다. 합쳐서 5다. 5가 아니면 입자의 위치를 찾을 수 없다. 기준을 세우지 않으면 결맞음이 깨진다. 볼트에 너트를 맞출지 아니면 반대로 너트를 붙잡고 볼트를 돌릴지 헷갈리는 것이다.
임금이 왕비를 구한다면 왕비의 얼굴이 잘생겼는지만 논하지 임금 자신의 얼굴이 잘생겼는지는 논하지 않는다. 인간의 자기 중심적 사고다. 우리는 지구에서 중력의 도움을 받으므로 그러한 기준의 문제에 무관심하다. 우주공간을 유영하면 허우적댄다.
우리는 그냥 입자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무게중심, 질량중심, 밸런스의 코어로 입자가 있다. 반드시 붙잡는 것이 있다. 차원을 논할 때는 백지 위에 점 두 개 찍어놓고 시작하지만 우주공간에서 점 두 개의 위치를 특정할 수 없다. 좌표를 먼저 그려야 한다.
유체의 매개자
구조는 내부구조다. 내부가 있으면 외부도 있다. 질과 량은 껍질이다. 입자와 운동은 껍질 안쪽이다. 힘은 핵이다. 밖>안>핵>안>밖이 된다. 입구와 출구에 껍질이 하나씩 있고 껍질의 안과 밖에 핵을 더하면 다섯이다.
(입구의 밖과 안) + 의사결정 + (출구의 안과 밖)
질과 량은 입과 항문처럼 디폴트로 따라붙는다. 실제로 음식을 소화시키는 것은 위장의 소화액이다. 소화액은 유체다. 유체를 담아둘 그릇이 필요하다. 강체는 지구 중력이 대신 붙잡아준다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한다.
펜으로 글씨를 쓰면 촉이 외부에 노출된다. 외부에 노출되면 조절하기 어렵다. 촉을 시스템 내부로 들여와서 안정적으로 조절하는 것이 구조다. 촉이 내부에 들어와 자리를 잡아야 하는데 붙잡아주는 장치가 필요하다.
수소차 한 대에 백금 70그램이 들어간다. 가벼워서 도망가는 수소를 백금이 붙잡고 있다. 수소를 붙잡아주는 플랫폼이 연료전지 스택이다. 우주 안의 모든 변화는 유체 단계를 거친다. 유체를 가둬놓는 플랫폼이 있다.
소화액이 음식을 분해하려면 위장의 소화공간과 소장을 통과하며 흡수되는 시간이 필요하다. 공간과 시간의 경로가 있어야 한다. 위장이 먼저 공간을 확보하고 소장이 나중 시간을 조절한다. 위장이 소장에 앞선다.
구조가 왜 다섯이냐고 묻는다면 중력이 많은 부분을 해결해주는 강체의 관점으로 본 것이다. 세상을 유체로 보는 관점을 얻어야 한다. 유체는 밸런스의 그릇에 담고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에 가두어 붙잡아야 요리된다.
구조의 눈
개도규량형
도량형은 낱개, 자, 컴퍼스, 됫박, 저울이 있다. 왜 다섯일까? 문제는 이걸 세어본 사람이 없는 거다. 도량형度量衡은 셋인데 규規가 빠졌다. 규는 컴퍼스다. 왜 컴퍼스는 뺐지? 귀찮아서 뺀 것이다. 문장이 길어지면 피곤하니까.
낱개도 빠졌다. 도량형에 낱개가 없는 것은 구구단에 일단이 없는 것과 같다. 일단은 왜 뺐지? 그래도 되니까 그랬다. 과학적이지 않다. 그게 진지하지 않은 주먹구구다. 엄밀히 따지면 '개도규량형個度規量衡'이라고 해야 한다.
필요없다고 빼면 과학이 정체된다. 원리를 알고 근본을 알아야지 실용만 추구하면 왜소해진다. 안해도 되는 것을 생략하면 할 것이 없다. 유클리드의 원론과 대수학의 집합론은 당장 써먹지 못하는 것을 열심히 따져본 것이다.
이 문명은 통째로 부실하다. 사실이지 잘못된게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궤도가 틀어져 있다. 구조가 왜 다섯이냐고 묻기 전에 이런 것을 인간들이 왜 얼버무리고 넘어가는가를 먼저 질문해야 한다. 잠이 오는가? 밥이 넘어가는가?
1회의 의사결정에 몇 단계의 절차가 필요하지? 구조의 종류는 몇이지? 하나의 지점에 최대 몇 개의 변수가 맞물릴 수 있지? 아무도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지식의 기초 빌드업을 팽개치고 동네축구 하듯이 건성으로 한다.
구조는 완전하다. 거기에 힘이 있다. 다섯을 넘으면? 하나를 제거하면 된다. 어딘가에 중복과 혼잡이 있다. 다섯에 못 미치면? 등잔 밑이 어둡다. 시야를 가리는 함정이 있다. 문제의 범위를 좁혀 답에 근접하므로 자신감이 있다.
차원의 결속
1차원, 2차원, 3차원으로 충분한데 왜 0차원과 사차원을 추가하여 사람을 헷갈리게 하는가? 숫자 0과 같다. 0은 없어도 되는데 또 없으면 안 된다. 0이 없어도 수천 년간 밥 먹었는데 말이다.
운동장에 정렬할 때는 기준이 필요하다. 선생님이 기준을 지정해준다. 훈련된 베테랑은 알아서 대오를 갖춘다. 기준은 없어도 되는데 또 있어야 한다. 신입이 들어오면 피곤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차원을 높이는 쪽으로만 생각을 한다. 1차원으로 출발하여 2차원 3차원으로 숫자를 하나씩 더한다. 왜 더하지? 빼기로 하면 4차원은 있을 수 밖에 없다. 4차원이 차원의 기준점이다.
0차원 없으면 4차원도 없다. 둘 다 들어가거나 둘 다 빠진다. 고정된 사물은 3차원으로 충분하다. 변화를 설명하려면 4차원과 0차원이 필요하다. 3차원 착각은 고정된 세계관에 잡힌 것이다.
접시에 담긴 물과 병에 담긴 물은 다르다. 병을 기울이면 물은 저절로 나온다. 꺼내지 않아도 된다. 접시물은? 엎어진 물을 주워담을 수 없다. 같은 물인데 다르다. 물은 호응하거나 반항한다.
결속된 것과 흩어진 것은 다르다. 내용물은 같은데 구조가 다르다. 유체의 자발성 때문이다. 물은 저절로 흐르고 바람은 저절로 분다. 수압과 기압이 걸려 저절로 움직이는 것은 절차가 있다.
유체는 용기와 압력에 의해 결속되어 있다. 어느 정도로 결속되어 있는지에 따라 차원이 결정된다. 점에서, 선으로, 면으로, 입체로, 압력으로 갈수록 자원이 더 많이 주변과 결속되고 연동된다.
구조의 구조
구조는 다섯이지만 핵심적인 의사결정은 하나고 나머지는 습관적으로 따라붙는 필수요소다. 파일명에 따라붙는 확장자명과 같다. 질은 입자를 붙잡고, 입자는 힘을 격발하고, 힘이 실질적인 의사결정을 한다. 운동은 전달하고 량은 끝낸다.
요리사가 칼로 음식재료를 자른다고 치자. 재료를 도마에 올리고 내리는 것은 기본이고 핵심은 칼질이다. 방앗간 정미기가 복잡해도 도정이 일어나는 부분은 작다. 접점에 코어가 있다. 볼펜과 종이가 만나는 접점이다. 나머지는 받쳐준다.
잉크만 가지고 글을 쓸 수는 없고 종이도 필요하다. 종이를 붙잡는 테이블과 잉크를 붙잡는 펜대도 있어야 한다. 구조 속의 구조는 잉크를 전달하는 촉이다. 그것은 하나다. 나머지 넷은 그 접촉점을 복제하고 확대하고 붙잡아주는 틀이다.
화장실에 들어가고 나오는 것은 기본이다. 무슨 일은 그 안에서 일어난다. 기본이라고 해서 제외해 버리면 내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낼 수 없다. 수학의 차원 개념은 입구와 출구는 빼고 그 사이 3차원만 논하므로 이상해졌다.
1. 구조의 구조는 힘이다.
2. 힘을 전달하면 바닥나므로 계속 공급하는 것이 입자다.
3. 힘을 전달받으면 노즐이 막히므로 뒤로 빼주는 것이 운동이다.
4. 입자를 움직이는 동력의 제공은 질이다.
5. 운동을 끝내는 단절은 량이다.
다섯 중에 한 사람이 일하고 두 사람이 보조한다. 나머지 둘은 보조를 보조한다. 한 사람이 칼질을 한다. 한 명은 넣어주고 한 명은 빼준다. 각각 보조가 있다. 넣어주면 갖고 오고 빼주면 갖고 간다. 하나의 일은 반드시 다섯으로 늘어난다.
구조의 고민
사람들은 구조를 보지 않는다. 건축구조를 논하면서도 거기서 패턴을 찾지 않는다. 건물은 대지와 주춧돌과 기둥과 인방과 벽돌로 이루어진다. 건물의 구조는 몇일까? 심심풀이로 세어볼만 한데 세어 본 사람이 없다. 건물을 강체로 보기 때문이다. 건물을 붙잡아주는 것은 중력이고 중력은 유체다.
고정관념과 선입견을 버려야 한다. 건물이 유체로 보여야 한다. 소용돌이 구조와, 회오리 구조와, 건물의 구조가 같은 것이 보여야 한다. 나무의 구조와, 인체의 구조와, 우주의 구조도 같다. 만약 다르게 보인다면 아직 멀었다. 관점 갈아타기 훈련이 필요하다. 세상은 결국은 밸런스다. 밸런스가 같다.
돌집은 중력으로 지탱한다. 나무집은 요철을 맞추고 벽돌집은 모르타르로 붙인다. 중력식 건축, 짜맞춤식 건축, 접착식 건축이다. 그것이 질이다. 질은 결합방식이다. 이런 것에 흥미를 가지고 들여다봄직 하다. 그것을 규명하려는 사람이 없다. 생각이 비슷한 사람을 만나지 못한 점에 아쉬움이 있다.
구조는 패턴을 본다. 패턴 개념이 없다. 패턴을 뜻하는 우리말이 없다. 구조 반대는 복잡 곧 중복과 혼잡이다. 이에 해당하는 우리말도 없다. '복잡하다'는 동사고 명사가 없다. 복과 잡을 제거하면 남는 것이 구조다. 이에 해당하는 영어도 없다. 언어가 없다. 구조라는 표현도 사실 적확한 말은 아니다.
목수들은 노상 구조를 고민하면서도 구조 숫자를 세지 않는다. 대지는 힘을 연결한다. 주춧돌은 힘을 모은다. 기둥은 힘을 분산한다. 인방은 힘을 전달한다. 벽돌은 힘을 멈춘다. 질은 만들고, 입자는 모으고, 힘은 나누고, 운동은 전달하고, 량은 멈춘다. 힘이 꺾이는 방향전환 방식의 수는 다섯이다.
모루는 망치보다 강해야 한다. 칼이 도마를 잘라 두동강 내버리면 곤란하다. 뒤에서 받치는 사람은 앞에서 일하는 사람보다 강해야 한다. 관리자는 실무자보다 강해야 한다. 점장이 점원보다 높아야 한다. 손목은 손가락보다 굵어야 한다. 차원은 단계적으로 마이너스를 행하여 힘을 조절하는 것이다.
인간의 착각
상자가 있다. 상자에 1을 넣으면 2가 나오고 2를 넣으면 4가 나온다. 상자 속에 곱하기 2가 숨어 있다. 그것이 구조다. 상자, 들어가는 숫자 1, 곱하기, 감추어진 숫자 2, 나오는 숫자 2로 다섯 포지션이다.
구조는 내부구조다. 외부는 우리가 아는 원인과 결과다. 구조가 왜 다섯인지 알려면 구조가 상자 내부를 살펴본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외부에 드러난 원인과 결과 말고 그 사이에 숨겨진 것을 본다.
내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자발적 의사결정이 일어난다. 구조가 다섯인 이유는 인간의 개입을 배제하고 객체 내부에서 일어나는 자발적인 결정을 다루기 때문이다. 내부에서 에너지가 일로 변한다.
우리가 원인과 결과로 보는 이유는 인간의 개입지점이 두 곳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두 번 개입한다. 활을 쏘고 과녁을 확인한다. 활이 스스로 하는 것은? 활은 내부에 대칭의 밸런스를 만들고 그것을 깬다.
밸런스balance는 두ba + 접시lance다. 천칭에 접시가 두 개다. 활은 대칭을 세워 두 접시의 균형을 도출하고 다시 균형을 깨서 의사결정한다. 인간의 역할 두 가지와 활의 역할 세 가지를 합쳐 다섯이다.
원인과 결과 둘로 이해하는 것은 인간 위주 사고방식이다. 상자에 1을 넣으면 2가 나온다. 활에 화살을 매기면 곧 발사된다. 상자 속을 보고 활 자체의 기능을 따지는 객체 위주의 사고로 갈아타야 한다.
과일이 안에서 썩으면 구조를 분석해야 하지만 벌레가 외부를 파먹으면 그냥 벌레를 잡으면 된다. 구조는 내부에서 작동한다. 내부는 공간이 비좁아 서로 간섭되므로 일정한 법칙을 따라간다. 명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