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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6장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와 바리새인을 향한 책망 및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많은 은헤 받으시고 하나님 좀 자랑해주세요.
하나님 영광을 받으시는것 좋아하세요.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9:51-19:27까지 이어지는, 갈릴리사역 이후 그리고 고난 주간(Holy Passion Week) 이전의, A.D. 29년 여름에서 A.D. 30년 초까지의 대략 6개월 남짓 사이에 유대 지역을 중심으로 진행된 예수의 후기 사역을 보도한 일련 기사의 연속부분이다.
특히 12:1-19:27까지는 예수님의 행동보다는 죄로 오염되지 않은 완전한 그리고 유일한 인자(人子)로서 불완전한 우리 인간들에게 주시는 예수의 교혼에 관한 기사가 더 많은 특징을 보이고 있다. 또 그중에서도 특히 제 15,16 두 장은 천국 구원의 여러 비유(parable)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문맥하의 본장은 도래(到來)하는 천국 구원을 분명히 인식하고 이에 대비하여 현재 생활을 선용(善用)할 것을 강조하는 악한 청지기의 비유(1-13절)와 인본주의적 오류에 마져 실제로는 현실과 타협하여 살면서도 율법의 해석만 지키면 구원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한 바리새인에 대한 경고(14-18절)와 세상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세상에서 부요와 안락(安樂)을 누리는 자가 곧 하나님의 축복을 얻은 자가 아니며 오히려 그들이 신앙적, 사회적 책임을 완수하지 못했을 때 에 는 바로 그 이유로 인해서 더욱 엄중한 영벌을 받을 것을 경고하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19-31절) 순으로 그 내용이 전개된다.
전반부 1-13절의 악한 청지기의 비유는 다음 두 가지 구속사적 교훈을 주기 위한 예증(例證)으로서 제시된 것이었다. 첫째는 약삭 빠른 청지기(steward)가 세상에서의 일시적 해고(解雇)를 대비해서 그토록 신속하고도 과감히 대처하였듯이 성도는 다가오는 영원한 천국을 위하여 전력을 다하여 대비를 하여야 할 필연성을 강조한다. 두 번째는 세상에 속한 것들 곧 재물이나 지위, 각종 재능과 힘 등은 그것 자체가 영원한 목적이 될 수 없는 것이므로 이를 구원을 얻는 일에 활용(活用)할 것을 교훈한다. 이 비유를 대하면서 우리는 나 자신은 다가오는 종말을 위하여 얼마만큼 열심히 준비하고 있는지, 내가 가지고 있는 재물과 능력을 얼마나 잘 활용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하겠다.
중반부 14-18절은 지금 주님이 가르치시는 천국 구원의 진리를 거부하는 바리새인(Pharisees) 들에게 천국 구원과 관련된 그들의 근본적인 구속사 오류(救贖史的 誤謬)를 논박하시는 말씀이다.
주지하다시피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신․구약은 공히 택한 죄인의 구원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전․후를 보여주는 것이며 오직 구약은 신약으로 확장 계승되는 것으로만 그 존재 가치를 갖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거나 인정치 않았다. 이들이 이렇게 된 것은 구약시대 구속사의 주요 통로가 되었던 육적 선민이었던 자신들의 입장에서 구약 말씀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God's Word)으로 받아들여 겸허히 해석하지 않고 그 일부만을 인본주의적이고도 유대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곡해(曲解)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 지상에 유대 민족만을 아니면 유대 민족을 중심으로 하는 영원한 지상 제국이 세워지는 것이 하나님이 메시야(Messiah)를 보내신 뜻이라고 착각했다. 그리고 구약 일부 내용에 자신들의 인본주의적 전통을 가미한 소위 율법의 조항을 준수하면 현세나 내세에서 축복과 구원을 얻을 것으로 착각했다. 즉 죄로 물든 현재의 세상은 그 종말이 예정된 일시적인 것일 뿐이며 인간은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섬길 수 없음(마 6:24)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세상의 축복과 하나님의 구원을 영원히 동시에 추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율법의 규정을 문자대로 준수하는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인자(人子)로서 오사 구약의 언약과 예언들을 모두 성취하시고 이제 이를 확장하여 구속사역의 성취인 십자가 수난과 그 최종 실현인 영원한 천국 구원을 전파하시는 주의 교훈을 무시 내지는 거부하였다(막 12장 연구자료, '유대인의 예수 배척' 참조). 이에 주님은 그들의 이런 인본주의적 계시관 및 구원관, 그리고 예수님의 강림(降臨)으로 율법을 주로 강조하던 구약시대가 복음이 온전히 계시된 신약 시대로 확장되었음을 깨닫지 못하는 구속사 시대 착각의 오류에 빠져 있으며 실은 세상을 더 사랑하면서도 하나님과 세상을 동일하게 둘 다 섬길 수 있고 섬겨도 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그들의 허위와 모순을 지적하시는 동시에 종말의 확실성을 다시금 강조한 것이었다.
우리는 인본주의적 신앙의 오류, 구속사의 시대 착각의 오류가 비단 예수 시대의 문제가 아님을 잘 알고 있다. 비록 관점과 이해타산에 따라 각각 그 착각의 내용은 다소 달랐다 하더라도 역사상 끊임없이 나타난 각종 이단, 자유주의 신학자, 위선적 종교가들의 그 근본에는 언제나 그 옛날 예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같은 하나님의 절대성과 다가오는 종말을 무시 내지는 불신하는 인본주의와 구속사적 시대 착각의 오류가 잠재해 있었던 깃이다. 이런 오류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뜨거운 전인격적 체험 없이 머리와 입으로만 주를 믿는 자들, 이 땅에서의 일순간의 이익을 천국의 상급보다 중시하는 자들. 그리고 바로 나의 죄된 경향에서도 거듭 발견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구속의 진리 그 자체에 근거하여 바로 다음 순간이나 개인의 죽음과 역사의 종말일 수 있다는 역동적 종말관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바로 하나님 앞에서 행동하는 것이라는 신전의식 (神前意識)을 가지고 지금 이 순간도 도도히 흐르는 구속사에 동참해 야 할 것이다.
후반부 19-31절의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일차적으로는 다가오는 종말 및 심판에 대한 앞서의 유대 지도자들의 오류가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지를 경고하는 동시에 궁극적으로는 모든 성도들에게 내세(來世)와 천국의 소망을 확신하며 다시금 이를 맞는 자신의 바른 자세를 정립 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이 비유는 현대의 크리스챤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당시의 유대인들 특히 유대 지도자들에게는 매우 역설적인 비유로서 크나 큰 충격과 모독을 느꼈을 비유이다. 왜냐하면 앞 단락에서 말한대로 바리새인들은 교리적(敎理的)으로 또 실제적으로도 세상과 하나님은 둘 다 영원하여 율법의 준수를 통하여 동시에 섬길 수 있다고 믿었다. 또 그들 특유의 세속주의적이고 인본주의적 사고에 따라 부자(富者)는 하나님의 축복과 자신의 능력으로 된 것으로 그대로 내세의
축복까지 보장받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거지나 천민(賤民)에 대해서는 그 반대의 생각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본문에 나오는 부자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바리새인 자신들 아니면 그들이 이상형(理想型)으로 생각하고 있는 축복받은 자였다. 그런데 이런 자가 지옥의 영벌을 받는다고 주님이 비유에서 선포하신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거지요 천민으로 세속적 관점에서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요, 율법적 공적이 없는 나사로는 영원한 구원을 받을 것으로 가르치셨다.
이런 배경과 숨은 뜻을 가진 본문은 우리에게 단순하면서도 실로 중대한 다음의 구속사적 교훈을 전해준다. 먼저 구원(救援)은 겉으로 드러난 행위나 공적이 아니라 그의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자세에 있음을 보여 준다. 둘째 이 세상에서 부자나 지도자 각종 능력 있는 자는 그것 자체가 그의 인격과 구원의 보장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더욱 많은 사역의 기회와 의무를 부여받은 것일 뿐이므로 하나님과 이웃을 위하여 자신의 책임을 다하여야 함을 깨닫는다. 이를 해태(懈怠)하거나 아니면 세속적, 위선적 자만에 빠진다면 그는 지옥에 빠질 뿐만 아니라 바로 그런 자신의 자만과 의무의 태만에 대한 더욱 더 큰 책임을 져야할 것임을 깨닫는다. 셋째 가장 중요한 교훈은 우리가 부자건 가난하건, 귀하건 천하건 이 세상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 내세에서의 영원한 삶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내세에서의 영생과 영벌 그리고 상급은 이 땅의 세속적 기준이 아니라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기준에 의해서 주어질 것이라는 사실이다(시 34:18). 이들은 우리가 우리의 처한 상황 바로 그것을 최선으로 여기고 소망 가운데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구속사적 인생관에 대한 확신과 그에 근거한 소망을 공고히 해주고 있다.
외울 말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블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눅 16:10)
본문 & 자료노트
주요 주제-16:1-8 예수의 비유의 이해
마 13장 연구 자료 참조
도표-16:8 불신자에 대한 10대 묘사
요 8장 자료 노트 참조
풍습-16:1-13 청지기직
본문의 비유에는 주이의 장부를 변조하여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려는 불의한 청지기가 언급되어 있다. 이에 본문의 이해를 먼저 성경시대 당시 청지지기 직이 과연 어떠한 것이었는가를 이해할 필요성이 있다. 이제 청지기의 역할과 성경상에 언급된 청지기의 개념 등을 간략히 살펴보도록 하자.
1. 청지기의 역할
청지기(steward)란 문자적으로 '집을 지키는 자', '집을 관리하는 자'라는 뜻으로서, 일반적으로 부유한 집의 업무를 무를 맡아보는 사람을 가리킨다. 명예와 부귀를 지닌 가문이면 모두 집안에 청지기를 고용했는데, 이들은 보통 주인의 식탁 시중을 드는 것에서부터 식량, 의복, 금전 관리 하인들을 감독, 주인의 수입과 지출 관장 등을 그리고 더 나아가 신뢰를 받는 충직한 청지기는 주인 가족의 간 구성원에 대한 상속 분배까지도 맡아 관리했다. 이렇듯 청지기가 주인의 모든 재산을 관장했으므로. 약간은 융통성 있게 주인의 재산을 자기 편의대로 유용할 수 있었다. 그러니 자연 청지기를 고용하는 데 있어 부자 지주는 청지기의 정직과 충성스런 태도를 제일 우선으로 하였다.
한편 신약시대 당시의 청지기란 종이라기보다는 오늘날의 노사관계와 같이 일종의 자유인으로서 주인과 고용계약을 맺은 자들이었다.
2. 청지기에 대한 성경의 언급
성경에서 청지기란 말은 다양한 의미로서 사용되었다. 먼저 구약 이스라엘 족장시대에 살았던 아브라함의 청지기는 엘리에셀이었는데, 여기서의 청지기는 '소유주'란 의미로서 양자', '상속자'를 뜻했다(창 15:2). 또 형제에게 팔리웠던 요셉은 애굽의 시위 대장 보디발 집의 청지기, 곧 집안 전체의 재산을 관리한 '집사장'이 되었다(창 39:4). 이후 이스라엘 왕국 시대에도 청지기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는데 청지기의 직무를 분담하여 재산 관리자, 권속을 지키는 고위 공직자, 방백을 다스리는 사람등으로 일을 보게 했다(왕상 15:18; 대상 27:25; 사 22:15). 다윗의 청지기는 감독자(ruler)로서 표시되었다(대상 28:1).
이러한 청지기 직이 신약시대에 이르러서는 주인의 재정을 담당하여 정규적으로 재산을 점검하는 총책임자로 주로 고용, 계약에 의해 그 직책이 맡겨졌다.
3. 영적 교훈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는 청지기직에 관한 언급이 많다. 여기서 우리는 성도는 하나님의 청지 기로서의 삶을 살아야함을 깨닫게 된다. 곧 우리의 가진바된 재능과 시간과 물질과 모든 형편이 다 주를 위해 관리되어져야 함을 깨닫고, 아울러 세상 끝까지 이르러 당신의 복음 증거자로서의 맡은바 사명을 다해야 할 책임이 주어졌음을 알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위탁받은 모든 직무를 지혜롭고 근면하게 수행해 나가야 하겠다(고전 4:1).
보감 -16:1-8 불의한 청지기가 칭찬받은 이유
여기서 불의한 청지기는 한때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좇아 살다가 종말이 임박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을 깨닫고 자신의 죄된 행동을 바꾸어 선을 베푼 자들의 표본이다. 이에 불의한 청지기가 예수께 칭찬받은 이유를 살펴봄으로써 임박한 종말에 사는 우리의 삶의 교훈으로 삼자.
1. 자신의 위기와 종말을 명확하게 깨달음(2,3절)
2. 자신의 종말을 대비하여 즉각적으로 조치를 취함(4절)
3. 자신의 임박한 종말에 최선을 다해 선을 베풂(5-7절)
4. 현재 자신이 가진 소유로 천국을 얻기 위해 사용함(9절)
주요 주제-16:16 신약과 구약의 연속성과 점진성
본서 14권 신약총론 특별 자료 참조
원어 연구 -16:28, 증거하게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문은 '디아마르튀레타이'인데, 이은 '디아마르튀로마이'의 가정법 현재형이다. 먼저 '디아마로튀로마이'는 '확증하다'(행 2:40) 또는 '명하다'(딤전 5:21; 딤후 2:14) 라는 뜻으로 성경에서 번역된다. 원래 이 단어는 '~을 통하여'(through)를 뜻하는 전치사 '디아'
와 '증거하다'(마 23:31; 요일 1:2), '경계하다'(살전 2:11)를 뜻하는 '마르튀레오'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원어에 가장 가까운 의미는 '~을 통하여 증거하다'가 되어, 이는 결국 어떤 사물을 관통할 정도로 '철저하게 증거하다' 또는 '철저하게 경계하다'라는 뜻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을 원어의 문자적인 의미와 개역 성경상의 의미들을 합쳐서 보게 되면 본절의 '디아마이튀로마이'는 단순히 '증거하다'라는 뜻에서 한걸음 나아가 '철저히 경계하다' 또는 '엄격히 명하게'라는 의미를 지녔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공동 번역과 대부분의 영역본들(NIV, RSV, Lving Bible)도 이를 '경고하다'(warn)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는 '디아마르튀로마이'가 단순한 증거 행위보다는 더 강한 의미를 가짐을 보여 준다.
또한 본문의 단어는 가정법 현재형으로 쓰였는데 이는 문맥상으로 '~하도록 하기 위하여'로 해석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따라서 본절의 '디아마르튀레타이'는 '철저히 경계하게 하기 위하여', 또는 '엄히 경고하게 하기 위하여'라는 뜻이 된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지옥에 들어간 부자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다급하게 요청하고 있는 모습에서 부자가 당하는 고충이 얼마나 컸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또 이는 아직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게 피들도 끝까지 주를 부인하면 이 부사와 동일한 지옥 형벌을 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준엄한 경고가 된다.
주요 주제-16:23 히브리인의 음부 개념
욥 14장연구 자료 참조
신학용어-16:25 위로
대상 7장 자료 노트 참조
도표-16:9-13 재물에 대한 성경의 표현
렘 17장 자료 노트 참조
신학용어-16:18 간음
삿 20장 자료 노트 참조
보감 -16:19-31 '부자와 나사로 비유'의 이해
부 자 나 사 로
1. 현세:
1)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음 1) 누더기를 입고 비참한 거지 생활을 함
2) 날마다 호화로 이 잔치를 벌임 2) 부자의 대문에 누워 음식 부스러기를 주워 먹음
3) 좋은 것을 누리며 삶 3) 개가 헌데를 핥음
2. 내세:
1) 죽어 장사됨 1)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림
2) 음부에서 고통을 당함 2)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평안을 누림
3) 불꽃 가운데서 기갈의 고통을 당함
교훈:
1) 인간은 세상 재물의 청지기 일뿐, 소유주가 아님(마 19:21)
2) 현세에서의 부는 영원한 것이 아님(눅 12:16-20)
3) 죽음 이후에 세상에서의 행위에 대한 심판이 반드시 있음(히 9:27)
4) 인간의 현세와 내세의 운명은 오직 하나님만이 주장하심(롬 11:36)
5)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 여부에 따라 인간의 내세가 달라짐(사 55:3)
6) 죽은 후에는 회개의 기회가 없음으로 현세에서 회개해야 함(계 2:21-23)
보감-16:22 하나님이 성도의 죽음을 허용하시는 경우
요 11장 자료 노트 참조
16:1-13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
앞장(눅 15장)에서는 세 가지 비유를 통해서 잃은 자를 찾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소개했다. 본장에서도 예수님은 계속해서 두 가지 비유를 통한 가르침을 주시는데 불의한 청지기 비유(1-13절)와 부자와 나사로 비유(19-31절)가 그것이다. 이러한 비유들은 올바른 재물 사용에 대해 교훈하시기 위해 도입되었다.
본문에 나타난 불의한 청지기는 세상의 아들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유익과 안녕을 추구하는 자였다. 낭비가 심했던 청지기는 주인으로부터 해고의 통보를 받고 그의 최대한의 수완으로 자신에 게 이익이 되도록 조치를 취한다. 즉 불의한 청지기는 주인의 채무자들의 문서를 고쳐 쓰게 하여 그 빚을 반감해 주었다(5-7절). 이는 채무자들에게 선심을 사서 자기의 살길을 잦기 위한 불의한 청지기의 의도이다(3,4절). 그런데 비유를 보면 주인은 불의한 청지기의 행위를 칭찬했다고 말씀하고 있다(8절). 그러나 예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주인의 재산을 남용한 불의한 청지기의 부도덕성, 악한 방법을 따르라는 것이 아니다. 이는 세상의 아들들'이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빈틈없이 준비하는 것처럼 빛의 아들들도 그들의 존재 근거인 영원한 거주지, 즉 하나님 나라를 최우선적 목표로 여기고 최선을 다해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교훈하신 것이다. 나아가 예수께서는 불의한 청지기가 재물을 이용하여 자신의 장래를 도모했듯이 빛의 자녀인 성도들 역시 세상 재물을 일신의 쾌락을 위해 사용해서는 안되며 장래의 영원한 삶을 위해 선용하도록 교훈하시고자(9-13절) 이 비유를 도입하신 것이다.
이 비유는 바리새인들에 대한 책망이 담긴 이전의 비유들과는 달리 제자들에 대한 교훈이라 할 수 있는데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점을 깨닫게 된다. 첫째, 앞날에 대해 준비하는 지혜로운 자세이다. 불의한 청지기가 악한 방법까지도 사용해서 자신의 세상적인 안전을 도모했던 것을 통해 빛의 자녀들도 안일하고 나태한 채로 현재의 신앙과 생활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체계적이고 계획성 있게 삶을 설계해 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둘째, 재물을 올바르게 선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불의한 청지기는 재물을 이용해서 자신의 안전을 꾀했고 친구들을 만들었다. 빛의 자녀들 역시 세상 재물을 통해 영육간의 유익과 선을 추구함으로써 장래를 대비해야 한다. 즉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재물을 헛되게 추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일에 올바로 사용함으로 주님 앞에서 칭찬받고 인정받는 의로운 청지기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마 6:19-34; 롬 6:16; 약 5:1-6).
16:1 제자들에게. - 전장(눅 15장)에서 말씀하신 세 가지 비유라 함께 계속되는 것으로 보아 본장의 말씀도 전장과 같은 장소에서 하신 말씀일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제자들'이란 단순히 '12명의 사도들'만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예수님을 추종하던 광범위한 일단의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좋다(눅 6:13).
어떤 부자. - 부자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들이 있는데, 학자에 따라 하나님(Plummer), 로마인(Schleier macher). 자기 땅에 관리인을 둔 대지주(Jeremias) 등으로 본다. 여기서는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마지막 견해를 채택하는 것이 좋다(Farrar, Bruce, Gilmour).
청지기.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코 노모스'는 '집'이라는 뜻의 '오이코스'와 '관리하다'라는 뜻의 '네모'의 합성어로 주인을 모시고 집을 관리하거나 종들을 지도하고 주관하는 일과 종들의 급여 지급, 구입, 출납 등의 일을 맡은 사람을 가리킨다. 이러한 청지기는 대부분이 종들 가운데서 선발되었으나, 여기서는 자유인 가운데 고용된 자로 보인다. 한편 본문에서 청지기가 누구를 가르키느냐 하는 것도 의견이 분분한데. 학자에 따라 교회 안의 성도들(Alford), 바리새인(Vitringa), 가룟 유다(Betholdt) 등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러나 이 역시 부자와 마찬가지로 문자적 으로 보는 것이 좋다.
허비한다.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스콜피존'( )은 '마구 뿌린다'는 의미로, 이는 청지기가 자기를 고용한 주인의 재산을 자신을 위해 마구 썼거나 아니면 미련하거나 부주의하여 헛되게 잃게 된 것을 의미한다.
들린지라. - 단순하게 귀로 듣게 된 것만을 의미하기보다는 '고소되었음'을 뜻한다. 즉 청지기의 하는 일들에 대하여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던 사람이 청지기를 주인에게 고소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아마도 주인은 소유지와 다른 곳에 살고 있음으로 해서 청지기의 비리를 몰랐다가 어떤 사람에 의해 그 비리 사실을 전해들은 것 같다.
16:2 이 말이 어찜이뇨.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티투토'는 의문사 '티'와 대명사 '투토'가 결합되어 '이게 어찌된 일인가? '란 뜻으로 쓰였는데, 여기서는 단순히 어떤 사실 여부를 파악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주인이 들은 청지기의 비리 내용이 사실임을 전제로 한 책망으로 '왜 그렇게 하였느냐?' 란 뜻이다.
보던 일을 셈하라. - '보던 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로고스'는 '말씀', '이성' 등의 뜻 외에 '계산'(account)이라는 뜻으로도 쓰이는데. 본절에서는 후자로 쓰였다. 여기서 주인이 요구한 '계산'은 모든 장부와 관리 문서 등을 '정리하라'는 뜻이다. 또한 '셈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디도미'는 단순한 계산만이 아닌 '증서를 양도하라'(render, KJV)는 의미이다. 따라서 본문은 '그 동안에 맡은 모든 업무나 장부 등의 결산을 보고하고 인계하라'는 것이고, 나아가 '청지기 직분을 내놓고 나가라'는 뜻이다.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곧 청지기로서의 생명이 끝남을 뜻한다. 청지기로 하여금 모든 장부나 일의 결산을 보고하게 한 후 이어서 청지기를 파면시키려는 계획을 보여준다.
16:3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 청지기가 주인의 처사에 대해 외적, 내적인 반항을 보이기보다는 마음 속으로 대책을 염려한 것은 그가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듯 불의한 자에게도 최소한의 양심이 있는 것은 인간이 의로우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이요(창 1:26), 창세로부터 부여받는 마음이기 때문이다(롬 1:19,20),
무엇을 할꼬. - 그는 옳은 방향에서 이점을 생각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이전에는 불의를 행하기만 하다가 자신의 직분을 빼앗김으로 이제 당장 생계의 급박함을 느끼게 되자 비로소 그의 할 일을 걱정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늦게라도 자기의 할 일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무 대책 없이 원망만 하고 있는 것 보다는 훨씬 다행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땅을 파자니. - 여기서 '파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카프토'는 통례상 정신적인 노동과 반대되는 '육체적인 노동'을 가리키는 말로, 여기서는 농사짓는 것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힘이 없고. - 땅을 파기 위하여 드는 육체적인 에너지의 부족 외에 그의 게으름과 의욕의 부족 등을 암시하여 주는 말이다. 그리고 사실 건강한 청지기라면 남들도 다하는 농사짓는 일을 하지 못할리 없다. 따라서 청지기의 이 말은 청지기의 전반적인 모습을 볼 때 그의 육체적인 무능 때문에 한 말이라기보다는 그의 의욕의 결핍과 불의한 노동관 때문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빌어먹자니. - '빌어먹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파이테오'는 '위에'라는 뜻의 '에피'와 '요청하다'라는 뜻의 '아이테오'의 합성어로 자신을 낮추고 요구하는 것, 즉 구걸하는 것을 뜻한다.
부끄럽구나. - 불의한 청지기는 강한 자존심의 소유자였다. 생계를 위해서 구걸하는 것은 도무지 정신적인 면에서 감당할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정신적인 교만에 차 있음이 분명하다. 주인의 것을 헛되게 허비하고 쫓겨나는 처지의 부끄러움보다 오히려 그로 말미암은 구걸에 따른 부끄러움을 더 크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는 감당해야 할 수치가 두려워 빌어먹는 일도 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16:4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 여기서 '알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그논'은 '안다'는 말인 '기노스코'의 부정 과거형으로, 이는 경험적으로 안 것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결정적인 것을 알았다는 의미이다. 이로 보아 청지기는 신속한 판단력과 빈틈없는 사고를 가졌고. 처세에 능한 사람이었음이 분명하다.
이렇게 하면. - 그는 벌써 심중에 모든 계획의 이행과 그에 따른 결과를 계산하고 있었다. 이렇듯 악인은 그 발이 행악하기에 빠르다고 했다(사 59:7).
직분을 빼앗긴 후에. - 청지기가 직분을 빼앗기게 된 원인은 주인의 재산을 잘 보존하고 관리해야 할 그의 직분을 망각하고 마치 자신의 것처럼 생각하며 헛되이 허비하였기 때문이다. 이 같은 모습은 오늘 우리의 재물관 속에서도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청지기가 그의 직분을 빼앗긴 사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의 소유를 관리하는 청지기로 삼으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재물을 마치 제 것인양 자신만을 위하여 허비하고,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나 이웃을 위해서는 인색한 모습을 보이는 자들에게 경고가 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치 아니하고 불의를 행하며 자기 뜻대로만 행하는 자에게서 그의 것을 빼앗아 충성스런 다른 사람에게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마땅히 하나님의 것을 잠깐 관리한다는 청지기 의식(stewardship)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재물을 사용하여야 할 것이다(잠 22:1; 미 4:13; 마 6:24; 딤전 6:17).
저희가 나를‥‥영접하리라. - 불의한 청지기는 직분를 잃게 될 상황을 정확히 판단하고 아직 자신에게 주인의 재산을 관리할 책임과 권한이 있을 때 그의 이후 생계 대책을 세웠는데, 그것은 주인집에 채무를 진 사람들에게 선심을 베풀므로 후에 도움을 받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를 돕도록 하게 하는 것이었다.
16:5 빚진 자. -본문에서 주인과 빚진 자들과의 관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여기서 빚진 자는 아마도 토지를 분할 받아 농사짓는 소작인들로 일정량의 소작료를 지불하지 않은 사람들이었거나, 또는 곡물을 받고 채무 증서를 써준 도매상인들이었을 것으로 보인다(Jeremias). 한편 청지기와 빚진 자들이 전에 서명한 증서를 위조(僞造)한 것으로 보아 그들은 주인이 개입되지 않은 채 계약을 맺었던 것 같다.
낱낱이 불러다가. - 청지기는 주인 재산의 전체적인 출납을 감당했기 때문에 주인의 돈을 빌려갔거나 채무를 이행하지 않은 사람들을 한 사람도 예외 없이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그들을 한 사람씩 자신에게 찾아오도록 하였다.
16:6 기름 백 말. - 채무자의 빚을 기록하고 있는 증서에는 돈의 액수가 아닌 물품의 양으로 적혀 있었는데, 이것은 아마 이자의 실제 액수를 숨기기 위한 의도였을 것이다(Liefeld). 그리고 여기서 '기름'은 팔레스틴의 토지가 많지 않은 산기슭에서 많이 자라는 '감람나무'(엘라이아)에서 얻은 것으로 주로 연료와 식용 또는 의료용으로 사용되었다. 한편 청지기에게 불려온 첫 번째 채무자는 이 감람유를 '백 말'이나 빚지고 있었는데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바투스'는 약 23L에 해당한다(Josephus). 그러므로 '백 말'이라 함은 2300L에 해당하는 양이다. 그런데 감람나무 한 그루에서 얻을 수 있는 평균 기름 양은 25L로, 200L는 약 92그루의 감람나무에서 나오는 양이며 돈으로 환산하면 천 데나리온 정도나 된다. 따라서 이 채무자는 엄청난 빚을 졌음을 알 수 있다.
네 증서를‥‥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 여기서 '증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그람마'는 '문서', '서식', '글' 등을 가리키는데 본절에서는 '채무 증서'를 말한다. 본문에서 청지기는 채무자의 친필에 의해 기록되어 보관되어 오던 채무 증서의 내용을 변조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탕감의 양은 50%로 채무자에게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한편 청지기가 급히 서두르고 있는 것은 일의 성격상 은밀히 시행되어져야 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16:7 밀 백 석. - '석'이란 단위는 헬라어 '코루스'로 약 360L 혹은 20두(斗)에 해당한다. 따라서 밀 백 석은 약 백 에이커(Acre)의 땅에서야 소출될 수 있는 많은 양으로 돈으로 환산하면 약 2,500 데나리온에 해당한다. 즉 그는 첫 번째 채무자보다 더 많은 빚을 진 것이다.
팔십이라 쓰라. - 첫 번째 채무자가 50%를 탕감 받았던 반면, 이 사람은 20%만을 탕감 받았다.
그러나 그 차이에 큰 의미는 없을 것이다. 아마도 청지기는 그저 즉흥적으로, 아니면 자신과의 유대 관계를 고려해서 그렇게 했거나 그것도 아니면 물품간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차등을 두었을 것이다.
16:8 지혜 있게‥‥칭찬하였으니. - 여기서 '지혜'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니모스'는 '영리함'이나 '현명함'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용의주도하게'란 의미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Vulgate, RSV), 즉 주인은 종이 용의주도하게 교묘한 방법으로 자신의 미래를 준비한 것에 대해서 칭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주인은 그의 사기성에 대해서가 아니라 장래를 대비하는 지혜에 대해서 칭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대의 아들들‥‥더 지혜로움이니라. - 불신자, 즉 이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므로 빛의 자녀가 된(요 8:12; 엡 5:8; 살전 5:5) 신자들보다 자신들의 일을 처리하는 면이나 미래를 대비하는 면에 있어서 더 지혜롭다는 말이다. 사실 마귀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그의 자녀가 된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하늘에 속한 신자들보다 세상을 살아가는 처세술에 밝기 마련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불신자들이 용의주도한 처세로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면 신자들은 그들보다 훨씬 더 지혜롭게 직분을 감당하고 미래를 대비함으로 하나님께 칭찬을 받아야 함을 교훈하기 위함이다.
16: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 본절에서부터 13절까지는 예수께서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응용하여 재물의 바른 사용에 대해 교훈하신 내용이다.
불의의 재물. - 여기서 '재물'(마모나)은 '불의한 방법으로 얻은 재물'이라기보다는 '하늘의 보화'에 반대되는 개념으로서의 '단순한 재물'을 뜻한다. 즉 불의한 청지기가 허비하거나 마음대로 준 '세상의 재물'을 의미한다(Alford, Zahn).
친구를 사귀라. - 이는 불신자들이 이 세상에서 장차 유익을 얻기 위하여 지혜롭게 투자하듯이 신자도 다른 세상에서 장차 유익을 얻기 위하여 재물을 이용하는 법을 배우라는 말이다. 한편 영역본은 본절을 '스스로 친구들이 되는 것'(make to yourselves friends, KJV)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여기서 '친구들'은 신자가 마땅히 구제해야 할 '가난한 이웃'을 말한다. 즉 재물을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것은 '하늘에 보물을 쌓는 행위' (마 6:20)로 장차 신자들이 청지기 사명을 마치고 이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에 갈 때에 그곳에서 살기에 부족함이 없는 밑천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 여기서 '그리하면'은 재물을 진실된 마음으로 불쌍하고 가난한 이웃을 위해 사용하여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면'이란 뜻이다. 그리고 '없어질 때에'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클레이포'는 일반적으로 '죽음', 즉 '하나님 앞으로 갈 때'를 의미한다.
저희가. - 이들이 누구냐 하는 것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혹자는 이들을 '천사들'이라고 주장하는데(Ewald, Meyer) 본절 전체의 흐름에 맞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을 '도움을 받은 가난한 이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이를 좀더 확대하여 해석하면 '저희'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가난한 자에게 한 것이 곧 그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며(마 25:31-46), 실제 우리들을 영원한 처소로 인도하실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영원한 처소. - 여기서 '처소'는 '장막'의 뜻을 가진 헬라어 '스케네'로, 보통 '일시적인 거처'를 의미하지만 본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임재해 계시는 영원한 하늘나라'를 의미한다. 이곳은 추상적인 개념으로서가 아닌 '현실적 장소의 개념'으로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영접하리라. - 영역본에서는 '받아들여질 것이다'(may receive, KJV), '환영받을 것이다'(will be welcomed, NIV) 등으로 번역되고 있는데. 도움을 받은 사람들에 의해 어떻게 영접 받을지에 대해선 알 길이 없다. 다만 본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원한 처소에 들이실 때에 진실된 마음으로 행해진 선행을 귀하게 여기신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 같다.
16:10 지극히 작은 것.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엘라키스토스'는 '작은 것'이란 의미의 '미크로스'의 최상급으로, 더 이상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가장 작은(least, KJV) 것'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곧 본문에서는 '참된 것'에 대조되는 '재물'로 지극히 가치가 없는 것을 뜻한다. 세상의 재물은 하나님 나라의 보화에 비하면 비교되지 않을 만큼 작은 것이다.
충성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토스'는 '신실한'(faithfal), '정직한'(honest) 등의 뜻인데 '믿다'의 뜻인 '페이도'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므로 본절에서 '작은 것에 충성된'이란 뜻은 재물을 정직하고 신실하게 관리하며(마 25:21; 눅 19:17), 참되게 사용하는 것을 가리킨다. 큰 것. - 세상의 재물과 대조되는 '천국의 보화', 세상 것과 대조되는 '영원한 하늘의 무궁한 것' 등의 의미로 쓰였다.
불의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디코스'는 '사악한, 부정한'(unrighteous)의 뜻으로 재물을 자신만을 위하여 부정하게 관리함과 동시에 '하나님 나라에 속해 있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16:11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 여기서 '불의한 재물'은 9절의 '불의의 재물'이란 뜻의 헬라어 '마모나 테스 아디키아스'와 같은 의미로 쓰여졌다. 그러므로 본절은 일시적 청지기에 불과한 인간이 '재물'을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신실하게 올바로 사용하지 않음을 뜻한다.
누가‥‥맡기겠느냐. - 문자적으로 '누가 위탁하겠느냐'란 의미로, 세상 재물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자에게는 하늘의 보화를 맡기지 않겠다는 강한 부정의 말이다.
참된 것.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알레디노스'는 '진리', '실패'란 의미의 '알레데이아'에서 파생한 말로, 여기서는 하나님 나라의 보화, 즉 하나님 나라에서 누릴 축복을 가리킨다.
10:12 남의 것‥‥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 전절의 '불의한 재물'과 '참된 것'을 소유 대상에 따라 재 반복한 것으로, 본절 역시 현세에서 세상 재물을 선용하지 못하면 내세에서 영원한 축복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을 의미한다.
16:13 본절은 지금까지 비유의 결론으로 재물은 섬김의 대상이 아니라 정당하게 소유하고 정당하게 사용해야 할 것으로, 섬김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뿐임을 교훈하고 있다.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 여기서 '하인'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케테스'는 당시 주인의 소유의 일부로 여겨졌던 '노예'를 가리키는데, 그에게는 오로지 충성과 맹종만이 요구되었다. 그런데 당시에는 한 노예를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소유하는 경우가 있었다(행 16:16,19). 하지만 그럴 경우에 노예는 자연히 자기의 마음이 가는 어느 한 편에 치중하여 섬기기 마련이었으며. 여러 주인을 동일한 열심으로 섬길 수 없었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지적하여 사람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음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마 6:24 주석 참조.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 '사랑'에 해당하는 헬라어에 '아가페'가 쓰인 것으로 보아 '사랑한다'는 의미는 '온 맘을 다하여 전심으로 섬기는 것'이라 할 수 있고, '미워한다'는 의미는 그와는 반대로 '마음이 그에게서 떠나 전적으로 싫어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 여기서 '중히 여긴다'는 말은 '전적으로 마음을 쏟는다'(devote)는 의미이고, '경히 여긴다'는 말은 '경멸한다, 얕본다'(despise)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는 한 쪽에 전적으로 치중하여 다른 한 쪽은 경멸하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 이는 지금까지의 말씀의 최종 결론 부분으로 하나님께서 잠깐 위임한 것을 주인으로 여기며 살지 말고 '참된 것', 즉 '하나님 나라에서 누릴 축복'에 마음을 두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라는 뜻이다. 섬김의 대상은 둘이 동시에 되지는 못한다. 따라서 자신이 의식하지 못할지라도 한 쪽이 '우위'에 서면 다른 한쪽은 경히 여기게 마련이다. 특별히 헬라어 원문은 본절에 '결코‥‥할 수 없다'는 의미의 '뒤나스데'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이 사실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16:14-18 바리새인의 불의에 대한 책망
앞 단락(1-13절)에서는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통해 재물을 선용하여 장래의 영원한 삶을 대비해야 한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에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의 위선된 생활과 율법주의를 책망하고 경계하신다. 그리고 이어서 현세의 재물에 집착하기보다는 미래의 삶을 대비할 것을 교훈하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주신다(19-31절). 따라서 본문은 본장에서 소개되는 두 개의 비유를 연결하는 고리 역할을 한다.
하여튼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을 책망하고 경계하신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비유를 듣고 그 핵심을 깨닫지 못했거나 또는 자신들의 가치관과 다르다는 이유로 조소하였다(14절). 그들은 돈을 좋아하고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풍요로움과 부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13절)는 말씀은 그들의 가치관을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사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특권을 이용하여 재물을 축적하는 자들이 많았고. 또 스스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탐욕과 위선적인 삶은 사람을 속일 수는 있겠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숨길 수 없는 것이었다(15절). 이에 예수께서는 율법을 문자적 해석이나 편협한 교리를 준수하는 데에 국한시키면서 자신들을 율법의 정통 신앙을 준수하는 거룩한 자들로 자처하는 바리새인들의 외식적이고 위선적인 모습을 지적하면서 메시야 시대의 도래로 율법이 역동적인 복음으로 대체된 것을 선포한다. 즉, 요한의 때까지는 구약 시대로서 바리새인들의 생각이 통했지만,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이후로는 그 복음을 통해서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16절). 그러나 예수께서는 결코 율법의 무가치성을 말씀하신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율법의 영원성을 말씀하신다(17절). 그리고 율법의 근본정신과 그 자신이 율법의 완성자로 오셨음을 강조하기 위해 신 24:1-4에 언급된 이혼 문제를 거론하셨다(18절). 이에 관해서는 본문 해당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우리는 이러한 본문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교훈을 받는다.
첫째, 사람의 기준과 하나님의 기준이 다르다는 것이다. 대체로 사람 중에 높임을 받았을 경우에는 여러 가지 재물, 지위, 쾌락. 존귀 등을 얻게 된다. 하지만 솔로몬의 고백처럼 이 모든 것은 헛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전 1장).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가치관이 진정으로 하나님께로 향한 것인가를 항상 자문해야 할 것이다.
둘째, 율법에 대한 옳은 인식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율법에 순종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이제 복음이 주어졌으므로 율법과는 완전한 결별을 선언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양 극단에서는 태도는 옳지 않다. 율법은 점진적인 계시의 단계 속에서 신약시대의 복음으로 대체되어 인간 구원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롬 10:4). 율법은 법 있게 쓸 때 선한 것(딤전 1:8)이므로 하나님 앞에서의 성도의 삶을 살아갈 때의 좋은 기준으로 여기고 선용해야 할 것이다.
16:14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비웃거늘. - 예수의 모든 비유를 다 듣고 난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비웃었다. 이는 그들이 돈을 좋아한 까닭이었다. 즉 바리새인들을 항시 재물에 대한 탐욕으로 그 마음이 가득차 있었고 재물을 얻는 것을 마치 자신들의 사회적 위치나 공력에 비례한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두 주인을 섬긴 것이었으며, 실제로 그들은 자신 있게 재물과 하나님을 동시에 잘 섬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는 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한 경지에 있어서가 아니라 재물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다. 어쨌든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기는 척 하면서도 돈을 더 사랑한 그들의 위선적인 태도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반성하기는커녕 도리어 비웃음으로 자신들의 의사를 표시했는데, 여기서 우리는 교만으로 그 눈이 어두워져 진리를 용납치 못하는 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게 된다.
16:15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 - '사람 앞에서'는 '사람의 눈에는'(in the eyes of men)으로 볼 수 있는데, 이는 스스로 옳다 하는 것이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그저 눈에 보이는 사람의 눈만 속이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행동임을 보여 준다. 특별히 여기서 '스스로 옳다 하다'는 문자적으로 '정당화하려고 애쓴다'는 의미로 주를 믿고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의'(義)와는 대조된다(롬 1:17).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 하나님께서 '악한 마음들을 벌써 아신다'(knows your evil hearths)는 뜻이다. 즉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시지 않고 그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불의한 자가 아무리 자기를 스스로 정당화하려고 애를 쓴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자기 정당화는 하나님에 의해 가증히 여김을 받을 뿐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신 2장 자료노트, '전지'를 참조하라.
높임을 받는 그것은‥‥미움을 받는 것. -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율법의 수호자요 백성들의 지도자로 자처하며 사람들에게 그에 합당한 대접을 받기를 원했다(마 23:4-11). 나아가 그들은 스스로 의인으로 행세하며 뭇백성들을 정죄하기를 즐겨했다. 이들의 이러한 태도는 실로 영적 교만의 극치라 아니할 수 없다. 때문에 그들은 비록 사람의 눈은 속여 스스로 높아졌다고는 하나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특별히 여기서 '미움을 받는 것'(브델뤼그마)은 '가장 추악하여 차마 볼 수 없는 것'이란 뜻을 내포하고 있어 미움의 높은 강도(强度)를 나타내고 있는데, 마 24:15에서는 우상을 가리킬 때 사용한 단어이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영적 교만을 얼마나 가증되게 여기시는지 잘 보여 준다.
16: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을 가리키는 성경 기자들의 관용어이다. 따라서 율법과 선지자가 요한의 때까지라는 말은 구약 시대는 요한의 때까지로 끝났다는 말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바리새인들과 같은 율법주의적 행동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하는 것은 구약시대에나 통했던 일로서 신약시대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는 말씀에 순종하며 겸손히 행하는 자임을 교훈하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침입하느니라. - 이는 예수께서 복음을 전파하셨을 때 세리와 창기와 같은 죄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여 하나님 나라를 차지한 것을 가리킨다. 즉 세례인 요한 이전까지는 하나님 나라가 마치 스스로 의인인 것처럼 자처하고 또한 율법의 수호자라고 자처한 율법주의자들의 전유물인 것처럼 인식되었으나. 세례인 요한 이후로는 하나님 나라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순종함으로써 적극적으로 그곳에 들어가기를 갈망했던 자들의 것이 되고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예수의 말씀은 율법의 형식만을 고집하며 신앙적인 독선으로 치달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는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한 바리새인들에게 격고의 말씀으로 주신 것이었다.
16:17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의 없어짐이 쉬우리라. - 여기서 '획'(케라이안)은 히브리 문자의 돌출 부분을 가리킨다. 즉 이것은 다른 단어와 구별지어 주는 작지만 중요한 삐침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벨'과 '칼. '달렛'과 '레쉬'등과 같이 비슷한 모양의 글자를 결정적으로 구분해 주는 글자의 돌출 부분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돌출 부분은 문장 전체의 내용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부분인 것이다. 하여튼 본절은 율법의 영원성을 강조한 말로,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까닭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복음이 전파되어 복음의 시대가 임했지만 구약의 모든 예언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시기 위함이다(마 5:18; 갈 3: 24). 사실 율법과 복음은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 예수께서는 결코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며 완성하러 오신 것이다(마 5:17). 한편 본절에서 의미하는바 율법의 성취는 결코 문자적 성취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율법에 담긴 의미의 더욱 완전한 형태로의 성취를 가리킨다. 마 5:18주석 참조.
16:18 아내를 버리고‥‥간음함이요. - 전절에서 율법의 영원성을 강조한 예수께서는 이제 본절에서는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설명하시기 위해 이혼 문제를 거명하고 계시다. 당시 바리새인들 사이에서는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써 주라'는 신 24:1-4의 율법의 해석을 두고 여러 의견이 제시되었는데 힐렐(Hillel) 같은 사람은 남편이 이혼하고자 원한다면 언제든지 이혼 증서를 써 주기만 하면 이혼이 가능하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실제 모세가 이 말을 했던 근본 이유는 당시 여인들의 지위와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후대의 바리새인들이 이를 악용하여 자신들의 육체적 욕심을 채우는 도구로 사용한 것이다. 이에 예수께서는 아내를 버리고 다른데 장가가는 것은 간음 행위라고 말씀하심으로 율법의 근본정신을 교훈하신 것이다. 사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친히 두 남녀를 선택하여 짝지어 주신 제도로 어떠한 경우든 사람이 나눌 수 없는 것이다(마 19:4-6). 마태는 '음행한 연고'라는 단서를 붙여 이혼에 대해 본절보다는 덜 엄격한 인상을 풍기고 있으나 그 의미는 동일하다. 왜냐하면 음행은 이혼 사유가 되기 이전에 결혼 서약 자체를 파기하는 행위로 사형에 해당하는 죄이기 때문이다.
16:19-31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
이 비유는 본절에 있는 '불의한 청지기 비유'(1-13절)와 마찬가지로 누가만이 독특하게 기록한 것으로 외식적인 삶을 살면서 세상과 재물을 사랑한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지적하고 있다. 즉 예수님께서는 거듭된 교훈에도 불구하고 물질에 집착하는 삶을 돌이키려 하지 않는 완악한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교훈하고 계신다. 이들은 당시의 소외된 사회 계층에 대해 무관심하고 자신의 탐욕만을 채우려한 위선적인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본문에서는 부자와 나사로의 모습이 극명하게 대조되고 있는데 세상에서는 부자의 풍요와 나사로의 비참함을, 하나님 나라에서는 부자의 고통과 나사로의 평안을 대조시켜 세상에서의 삶과 하나님 나라의 삶이 어떠한가를 분명히 보여 준다.
따라서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이 세상 이후에 있을 하나님 나라를 기준으로 판단해 볼 때 재물에 집착한 세속적 삶보다는 멸시와 소외 속에 있으나 미래에 소망을 둔 삶이 더욱 값지다는 것이다. 사실 부자의 죄는 재물이 많고 풍요로운데 있지 않았다. 다만 이 부자는 자신의 풍요로운 삶에 집착하여 하나님이나 이웃, 그리고 영원한 미래의 소망마저 생각지 않고 오직 자기의 이기적인 삶을 위해서만 살았다는 데에 있다(19절). 반면에 거지 나사고는 병으로 인해 인생 최저의 비참한 삶을 살면서도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뜻을 지닌 그의 이름에서 보여 주듯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의 나라를 소망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눅 6:2())라는 말씀처럼 육신의 가난함과 심령의 가난함으로 인해 영적 풍요와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내세에 이루어 진 아브라함과 부자의 대화(23-31절)를 통하여 심판받은 영혼들의 고통을 강조하고 있다. 음부에서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는 부자의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과 죽음 이후에는 반드시 구원과 영벌의 심판이 있음을 보여 주어 현세의 물질적 삶에 만족하고 있는 자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우는 것이다(히 9:27). 그래서 이 비유는 하나님께서 종국에 내리시는 심판의 냉혹함과 필연성을 보여줌으로써 이 땅에서 미래를 준비하는 삶을 살 것을 교훈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누가는 본장에 나타난 비유들을 통해서 세상에서 누리는 풍요와 부유한 생활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므로 우리는 이것을 이기적으로만 사용해서는 안 되며 다른 사람을 위한 선한 일에 사용하여야 함을 강조한다. 즉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에게 구체적으로 도움의 손길을 주는 것이 하나님의 재물을 맡은 청지기로서 올바로 행하는 것이며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가진 것임을 가르쳐 준다. 이런 점에서 본문은 본서가 이방인을 위한 복음서 이자 소외되고 약한 자를 위한 복음서란 사실을 잘 드러내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시는 불우한 이웃과 가난한 자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말고 선한 사업에 힘쓰면서 미래의 소망을 바라보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눅 6:38; 갈 2:10; 히 13:16; 벧전 4:7).
16:19 본절에서부터 마지막절까지는 소위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라 불리는 부분으로, 이는 부에 집착하는 현세적 삶보다는 미래에 소망을 두는 내세적 삶이 값지다는 사실을 교훈한다. 그리고 재물 욕으로 인해 참된 진리에 눈이 어두운 바리새인들을 경고하기 위해 도입되었다. 한 부자, 이 사람은 실제로 있었던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이가 많다. 그리고 그의 이름이 적혀지지 않은 것은 그의 이름이 생명록에 기록되지 못했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한다(Farrar). 전승에 의하면 그의 이름이 니네베(Nineve)이거나 피네에스(Phinees)라고 하나 근거가 희박하다. 하여튼 본절 이하의 내용이 비유이든 실화이든 간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내용이다.
자색 옷과 고운 베옷. - 여기서 '자색 옷'(폴퓌란)은 당시 왕과 귀족들이나 입을 수 있는 값비싼 고급 겉옷으로 '뼈고등'(murex)이란 열대산 물고기의 피로 옷감의 색깔을 냈었다고 한다(Robertson). 또한 '고운 베옷'(뷔쏜)은 애굽산의 세마포(출 26:1,36)로 만든 귀한 속옷이었는데, 금으로 환산하면 금의 무게와 같아도 값은 두 배나 비쌀 정도여서 보통 사람들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옷이었다.
연락하는데.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프라이노메노스'는 복음서에서 종종 쓰인 단어로(눅 12:19; 15:23) 사람이 갖고 싶은 것을 다 갖고서 자신이 주인이 되어 마음껏 즐기는 것을 말한다. 즉 부자는 최고의 사치와 호화를 자랑하며 매일 잔치를 벌이고 삶을 즐겼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부 자체가 죄는 아니다. 하지만 그는 이 세상의 재물에 대해 청지기적 사명을 갖지 못하고 하나님이 맡겨주신 재물을 오직 자기만을 위해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의 것을 유용하는 결과를 낳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웃에 대해서 자비를 베풀지 않음으로써 율법의 명령을 소홀히 하는 죄를 범 했다.
16:20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핥으며. - 부자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사람으로 '나사로'라는 사람이 소개되는데, 이 이름은 '도움의 하나님'이란 뜻을 가진 히브리어 '엘리에셀'( )에서 나온 것으로 아브라함의 신실한 종이었던 엘리에셀과 그 이름이 같은데(창 15:2) 그가 죽어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는 23절의 기록은 비유의 미묘함을 던져주고 있다. 또한 나사로라는 이름은 요 11장에 나오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비였던 나사로와도 그 이름이 일치하나 동일 인물은 아니다. 한편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서 유독 여기에만 이름이 언급되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나사로가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였음을 암시하기 위해서거나, 말씀의 전개상 필요해서 의도적으로 붙이셨기 때문일 것이다. 하여튼 나사로는 몸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불구자였고 피부병까지 앓는 환자였다. 그리고 본문에서 '헌데'(헤일코메노스)라 함은 성경에 두 번 나오는 의학 용어로(계 16:2) '상처가 나서 쓰린 곳'을 뜻한다. 때문에 그의 병이 문둥병이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으나 당시에 문둥병자들은 따로 격리되었으므로 그렇게 보기에는 무리가 많다. 어쨌든 그는 가장 불쌍하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었다.
대문에 누워. - 여기서 '대문'에 해당하는 헬라어 '퓔로나'는 요란한 장식으로 치장된 높이 솟은 대문을 말하는데. 이것만 보아도 부자의 호사스러움과 사치를 읽을 수 있다. 나사로는 바로 그 대문 곁에 누워 구걸 하였다.
16:21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 유대인들은 전염병을 염려해서 일단 상에서 떨어진 음식은 먹지 않았고, 오히려 먹다 남은 쓰레기류 등을 식탁 아래로 버렸다(Kraub). 본문에서 '떨어지는'의 의미는 '던지다, 팽개치다'의 뜻을 가진 '발로'의 과거완료 수동태 '에베블레토'로 '이미 떨어진'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나사로가 먹은 것은 식고 더럽혀진 음식임을 알 수 있다. 하여튼 부자가 나사로에게 적극적인 악을 행했다는 흔적은 없다. 다만 그의 죄과는 비참한 나사로에게 무관심했다는 것이다. 즉 부자는 하나님이 주신 재물을 선용하지 못하고 그의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는 데만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의 것을 잘못 사용한 죄를 범한 것이다.
심지어 개들이 와서 헌데를 핥더라. - '심지어'라는 말이 첨가된 것으로 보아 개들이 나사로의 상처를 핥은 것은 배고픔과 더불어 그의 비참을 더욱 가중시키는 행위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여기서 개들은 '집에서 사육하는 개'(퀴나리온)들이 아닌 '주인이 없이 거리를 헤매는 사나운 개'(퀴온)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나사로와 같이 들개에 시달리는 사람을 보통 하나님께 징벌을 받아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했다(왕상 21:17-26). 그러나 여기서 나사로가 당한 고통은 죄의 유입으로 악하게 된 세상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서 온 것이었다.
16:22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 치명적인 병으로 약해져 있던 나사로는 조용한 죽음을 맞이하고 고통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 아마도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을 것이고, 장례식도 없이 그의 시신은 공동묘지의 허술한 데에 버려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천사들에게 받들려 하늘로 올리워 갔다. 특별히 여기서 '받들려'(아페네크데나이)라는 말은 '데려가다'란 의미의 '아포페로'(막 15:1)의 부정과거 수동태로, 나사로가 죽은 즉시 천사들이 그의 영혼을 영접하여 데려갔음을 시사해 준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 유대인들의 개념에 있어서 '아브라함의 품'은 '낙원'으로 인식되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으로 묘사될 뿐만 아니라(약 2:23), 낙원의 중심인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하여튼 아브라함의 품은 구원받은 자들의 처소이다(마 8:11). 한편 본문에서 '품'은 '콜폰'이라는 복수로 쓰였는데 이는 천국의 넉넉함과 풍요와 안전함을 암시해 준다. 또한 나사로가 무궁한 기쁨과 안락에 들어갔음을 시사해 준다.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 시간적으로 나사로의 죽음 후의 일로 보인다. 그가 죽었을 때는 본절에 '장사되매'란 말이 나온 것으로 보아 나사로와 대조적으로 수많은 조문객과 함께 화려한 장례식이 행해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그에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의 그러한 화려한 장례식은 내세의 비참함만을 더욱 강하게 암시할 뿐이다.
16:23 음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데'는 히브리어 '쉐올'에 해당하는 말로 구약에서는 흔히 선악에 관계없이 죽은 자가 가서 부활 때까지 있는 중간지대를 뜻하였다(창 37:35 ; 욥 14:13). 이것이 신약에 와서는 선한 사람이 죽어서 가는 중간 지대인 낙원의 개념에 대립되는 개념으로 사용되어 죽은 자가 최후 심판이 있기까지 머물러 있는 곳이라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음부와 낙원에 대해서는 그랜드종합 교리, 종말론 부분을 보다 참조하라.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부자는 특별한 죄가 없이 음부에 간 반면, 나사로는 단순히 이 세상에서 고통당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낙원에 갔다는 점이다. 더구나 본 비유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따라서 본 비유는 기독교의 구원관과 다소 거리가 있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비유란 언제나 진리의 한 부분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된 것으로 그것 자체로 모든 진리를 종합적으로 나타낼 수는 없다. 그리고 종합적인 진리는 성경 전체를 통해 파악된다. 여기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도 재물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선용해야 함을 보여 주기 위해 도입된 것이지 구원의 방법을 보여 주는 것은 아니다.
고통 중에. - 여기서 '고통'에 해당하는 헬라어 '바사노이스'는 사람을 고문하는 '고문대'라는 뜻이다. 특별히 본절에서는 이 말이 복수형으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그만큼 부자의 고통이 중대함을 나타내 준다.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 유대인들은 음부와 낙원이 매우 가까이 있어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상대 지역에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와 같은지 여부는 알 수 없다. 다만 본절은 낙원과 대비되는 음부의 고통을 더욱 심각한 것으로 나타내고 있다.
10:24 불러 가로되. - 여기서 '불러'(포네마스)라는 말은 단순한 부름이 아닌 절규하듯이 탄성을 내며 소리 지르는 것을 뜻한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 이는 부자가 유대인임을 보여 줌과 동시에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무척 자부하였고 자랑한 자였음을 보여 준다. 사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이유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눅 3:8). 본문의 부자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혈통적인 특권을 내세우며 자비를 구하고 있는 것이다.
긍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엘레에오'는 말이나 행동으로, 특별히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불쌍히 여김'이나 '동정'을 의미한다. 즉 부자는 하나님의 자비와 같은 넓고 깊은 자비를 아브라함에게 요구하고 있다.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 세상에서 나사로가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음식 부스러기를 사모했던 상황과 극한 대조를 이룬다. 즉 한 방울의 물이라도 얻기를 구하는 부자의 모습은 현세와 내세의 대조적인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특별히 본절의 '찍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밥토'는 '물로 살짝 적시는 것'을 뜻하는데, 이는 부자가 최소한의 자비를 구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 부자가 극한 갈증을 절규하는 모습이다. 이러한 혀의 고통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과 사람을 거스려 했던 완악한 말들을 기억나게 하며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했던 모든 것들을 생각나게 했을 것이다.
16:25 얘. - 헬라어 '테크논'으로 '아들아'(Son, KJV)라는 부름이다. 부자가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대해 아브라함은 '아들아'라는 부드러운 응답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 내용에 있어서는 단호하고 냉정한 거절이 뒤따른다. 즉 아브라함은 부자의 혈통이 그의 자손인 것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그의 소행(素行)으로 말미암은 결과에 대해서는 어찌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저는 거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 본문을 단순히 세상에서 가난하고 고통당한 사람은 천국에서 위로와 영광을 누리고, 부자로 행복했던 사람은 지옥에서 고민과 고통을 당하리라는 것으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 본문의 부자는 이웃을 돌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신만을 위하여 재물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비참한 처지에 이른 것이고, 반대로 나사로는 자신의 위치를 지켰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비유는 자신의 종교적, 사회적 위치를 내 세우면서도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이웃을 돌보지 않던 바리새인들에게 회개를 일으키려는 의도도 담고 있으므로 부자와 나사로의 상황, 특별히 부자의 변화된 처지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16:26 큰 구렁이 끼어 있어. - 이는 '큰 구렁이 견고하게 고정되어 있다'(Chasm a great has been firmly fix, NKJV)는 뜻이다. 여기서 '구렁'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스마'는 '크게 벌어진 틈'이나 '협곡'등을 가리킨다. 그리고 '끼어 있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스테릭타이'는 영원부터 불변하게 고정된 것을 뜻한다. 따라서 본절은 음부와 낙원 사이에는 누구도 건널 수 없는 '견고한 간격이 이미 고정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건너올 수도 없게. - 이는 낙원과 음부 사이의 구렁의 크기와 견고함을 암시하는 말씀으로 부자의 상황이 전혀 호전될 수 없는 상황임을 보여 준다.
16:27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 유대인들은 죽은 사람을 불러낼 수 있고 또 죽은 사람의 영이 산 사람에게 의사를 전달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이는 비성경적인 발상이다(눅 23:43; 고후 5:1). 삼상 28장에 나타난 엔돌의 신접한 여인의 혼도 사탄의 기만일 따름이지 현세의 사람이 죽은 자의 혼과 연락할 수는 없다. 삼상 28:13 주석 참조. 하여튼 본절의 부자는 자신의 처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고, 나사로에 대해서도 그의 변화된 환경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는 여전히 상전처럼, 그것도 들어줄 수도 없는 사항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16:28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오지 않게 하소서. - 부자는 이제 자신의 처한 상황을 호전시키려는 것에 대해서는 체념하고 자신의 형제들에 대해서 걱정하며 도울 방도를 찾고 있다. 본문의 '증거하게'에 해당하는 헬라어로 '디아마르튀로마이'( )는 '자세하게 권고하다', '경고하다' 등을 의미하는 말로, 이는 자신의 형제들에게 내세의 현실에 대해서 자세히 경고해 줄 것을 요청하는 말이다.
16:29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 이 말씀은 지옥에 처해 있는 부자가 만약 모세와 선지자의 말씀을 명심하였더라면 그런 처지가 되지 않았을 것을 암시해 주는 동시에 이것은 그의 형제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것이라는 말이다. 사실 모세와 선지자의 글은 부자의 삶과는 정반대로 하나님을 의뢰하고, 궁핍한 이웃을 도우라고 명령하고 있다(출 22:22; 사 14:32; 단 4:27; 암 2:6,7). 따라서 부자는 이를 실천했어야 했다. 한편 '듣는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쿠오'( )는 귀로 들을 뿐 아니라 '깨닫고 행하는 삶'까지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본문은 나사로가 갈 수 없을 뿐 아니라 가지 않아도 이미 부자의 형제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에 의해서 수 많은 경고가 주어 졌으므로 그것들을 순종하는 길이 있을 따름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말씀이다.
16:30 그렇지 아니 하니이다. - 여기서 '아니 하니이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키'는 '아니다'란 뜻의 '우크'의 강세형으로 '정말 결코 아니다'란 의미이다. 그가 이와 같이 강력하게 반대 의사를 표하고 있는 것은 '죽은 자가 살아나 말하는' 이적을 통하지 않는 한 형제들도 자신처럼 지옥에 올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율법과 선지자', 즉 성경 말씀을 무시하고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 이적을 본다고 믿고 따를리 만무하다. 왜냐하면 성경 말씀 자체가 이적의 차원을 넘어서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이고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살아있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만일 죽은 자에게서‥‥회개하리이다. - 부자는 초자연적인 역사만이 저들을 회개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실제로 예수께서 죽은 지 3일된 나사로를 살리셨을 때(요 11장)에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았고 오히려 예수를 죽이려 하였으며(요 11:47-50),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더욱 법석을 떨지 않았던가? (요 12:10) 또한 예언되고 약속된 그대로 예수께서 3일 만에 부활하셔서 보이셨지만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하지 않았던가? 어리석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세우시고 정하신 방법보다는 뭔가 색다른 방법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진리는 평범하게 생각되는 말씀 속에 있고, 이적이 이룰 수 없는 일까지도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결국 부자가 자신 있게 간청한 내용은 들어줄 수도 없는 요구일 뿐 아니라 인간적이며, 세상적인 발상에서 비롯된 그릇된 제안이었다.
16:31 모세와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 여기서 '듣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쿠우신'은 복수로 되어 있어 본절의 말씀이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 여기서 '죽은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네크로스'는 '시체'를 의미한다. 따라서 '죽은 자 가운데서'라 함은 '죽은 시체로 있다가'란 의미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살아나다'란 말은 '일으켜 세우다'는 뜻을 가진 '아니스테미'가 가정법 과거인 '아나스테'로 쓰여 '다시 살아나는'(should rise again. NKJV)의 뜻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그럴 리 없겠지만 죽은 시체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 자신의 죽음을 본 자들에게 나타난다 할지라도'의 의미이다. 이러한 일은 하나님의 능력 외에는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으로 예수께서는 죽은 자를 세 번 살리심으로 그의 신적 능력을 보이신 바 있다(막 5 :35-43; 눅 7:11-17; 요 11:38-44).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 여기서 '권함을 받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이스데손타이'는 '화해하다', '동의하다'의 뜻을 가진 '페이도의 미래 수동태형으로 '설득당할 것'(will they be persuaded)이란 뜻이 있는바, 본절은 결국 '결코 죽은 사람이 살아온 일로 인해서 마음을 돌이키지 않을 것이다'란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저버리고 자신들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은 마음이 완악해 질대로 완악해져 있기 때문에 설령 죽었던 사람이 나타나는 이적을 본다 하더라도 결코 그 마음을 돌이키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로 볼 때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이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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