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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장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 가룟 유다의 배반 예언과 새 계명 및 베드로의 예수 부인 예언
많은 은헤 받으시고 하나님 좀 자랑해주세요.
하나님 영광을 받으시는것 좋아하세요.
구속사적 개관
지금껏 1:19-12:50에서 저자 요한은 예수께서 본래 제 2위 성자 하나님으로서 절대 신성(神性)을 가지신 존재였으나 하나님이 태초부터 세우신 구속의 법에 따라 우리의 죄를 대속(代贖)하시고자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그리스도임을 입증함으로써 결국 예수의 그리스도 직과 예수 안에서의 우리 구원(salvation)의 절대성을 입증하는 증거들을 예수의 공생애의 여러 기사 중에서 발췌 제시하여 왔다. 이제 저자는 본장부터 시작되는 제 13-17장까지에 서는 구속 사역의 최종 성취를 위하여 십자가 수난(crucifxion)을 당하시기 직전, 12제자들에게 일종의 고별설교와 기도로서 행하신 일련의 강화(講話)와 대제사장으로서의 중보기도를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지금껏 3년간의 공생애를 가지신 것은 결정적으로 십자가 수난을 통하여 구속 사역을 최종 성취하시기 전에 자신의 구속 사역과 그것이 궁극적으로 가져올 천국 구원에 대한 계시를 주 내용으로 하는 신약 복음의 본질을 미리 밝히시고 선포하시기 위해서였다. 또한 당신이 십자가 수난 이후 부활 승천하신 후 세상 끝날 재림하여 오실 때까지 지상에서 복음의 중심지 역할을 할 교회를 건립하도록 미리 택하신 사도들을 교육하는 데에 필요한 시간을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제 같은 맥락에서 십자가 수난이 내일로 다가온 이때에 주님은 당신이 십자가 수난을 통해 구속 사역을 최종 성취하시고 부활 승천하신 이후로부터 다시 재림하실 때까지의 기간 동안에 성도들이 가질 천국 구원의 확신과 행동 규범을 전 신약 성도들을 대표하는 12제자들에게 교훈하셨던 것이다. 이처럼 일종의 고별설교인 노위 다락방 강화(제 13-16장)와 고별기도(제 17장)로 구성된 제 13-17장의 일련 기사의 시작 부분인 본장은 소위 최후의 만찬으로 알려진 고난주간 제 5일인 목요일 밤에 있었던 마가의 다락방의 만찬 장면에서 시작되는 바 각 문단별로 그 내용과 의의를 상술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1-20절은 가룟 유다의 배반으로 유대인들의 손에 잡히실 그날 밤에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사건과 이와 관련해 섬김의 교훈을 주신 사실을 기록한다. 구약시대 유월절(Passover)이 예표했던 구원의 참 실체이며,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이 예표했던 주의 십자가 수난을 통한 죄인의 구속과 구원을 기념하는 신약의 성찬식(聖餐式)을 제정하시기 직전(마 26:17-19)에 행하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이 사건은 매우 심오한 구속사적 진리를 보여 준다. 즉 원래 죄 값대로 마땅히 죽어야 할 인간을 대신하여 죄 값을 치르시고 인간은 살리시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피에 의해 죄 씻김을 받는 자만이 구속의 은혜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히 9:14; 요일 1:7; 계 7:14). 또한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이라 할지라도 죄된 옛 생활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성장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피를 날마다 생각하며 자기 죄를 자백함으로 죄를 씻음이 필요함을 보여주는 것이다(요일 1:9). 그리고 이것은 제 2위 성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누리시던 자기 영광을 버리시고 택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내려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종의 모습으로 섬김의 도를 행하신 것(빌 2:6-8)처럼 12제자들과 그리스도의 제자된 신약 전 성도들에게 서로 겸손히 섬길 것을 교훈하기 위한 것으로 이러한 사실은 12-20절에 기록된 세족식에 이은 예수의 교훈 속에서 잘 나타난다.
21-30절은 주께서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다시 한 번 가룟 유다의 배반을 예언하신 사실을 보도한다. 이는 결국 주께서 십자가 수난을 당하신 것은 주님이 약해서나 미래를 미리 예측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이처럼 미리 다 아셨으면서도 스스로 자진해서 당하신 것으로서 결국 우리의 구속(redemption)을 위한 자발적인 희생이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한편 이 사건은 비록 외형적으로는 주님의 제자였던 가룟 유다와 같이 주님과 밀착된 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 중에도 실제로는 사탄의 사주를 받아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자들이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성도는 항상 자신의 위치를 재점검하며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지 않았는지 늘 점검하여야 한다.
31-35절은 예수께서 가룟 유다를 제외한 전 신약 성도의 대표자들인 11제자에게 자신이 영광을 받을 날이 임박했음에 대한 예고와 부활 승천하신 이후로부터 다시 재림하실 때까지의 기간 동안에 성도들이 행할 신앙생활 규범의 본질인 사랑의 새 계명을 주신 사실을 보도하는 것으로 16:33까지 계속 이어지는 예수님의 고별 강화이다. 이는 위의 12-20절의 섬김의 교훈과 함께 구속사(redemptive history)의 은혜에 함께 동참할 성도 상호 간의 바른 관계를 유지함으로 모든 성도가 온전한 삶을 영위토록 하기 위해 주어진 사랑의 새 계명이다.
인간은 피조물로서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필연적으로 수직적 관계를 맺는다. 한편 나 이외의 이웃이나 다른 피조물들도 필연적으로 한분 하나님에 의하여 함께 창조되었다. 그리고 태초부터 하나님께서 모두가 서로 어울려 살도록 섭리하셨다는 점에서 인간은 나 이외의 이웃이나 다른 피조물들과도 수평적 관계를 갖는다. 또 하나님은 우리가 이런 피조물들을 대할 때 그것을 지으신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고 피조물에 대한 자세가 곧 이를 지은 창조자에 대한 자세이기도 하다는 것을 구약의 율법과 신약의 교훈을 통하여 직접적으로 규정하시기도 하셨다(히 6:10).
이처럼 우리는 필연적으로 이웃이나 다른 피조물들과 함께 살 수밖에 없으며 또 그들을 대할 때 그들을 우리와 함께 창조하신 여호와의 뜻을 기억하고 나아가 그들을 대하는 자세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대하는 자세일 수도 있음을 기억하고 그들과 바른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이다(롬 13:8; 살전 4:9). 즉 우리는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에서는 물론 이웃과 다른 피조물들과의 수평적 관계에서도 바른 관계를 가져야만 온전한 인간의 삶을 살 수 있음을 깨닫는다. 이것은 구속사의 시초부터 구속 사역 완성인 천국(Kingdom of Heaven)에까지 영원토록 존속하는 구속사(救贖史)의 한 원리이다.
끝으로 36-38절은 주께서 베드로가 지금 당장은 십자가 수난을 받으시기 위해 가시는 주의 고난의 길을 따라 가지 못할 것이나 장차는 가게 될 것이라 예언하신 사실과 지금이라도 주의 길을 따를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베드로에게 그가 자신을 세 번 부인하리라고 예언하신 사실을 기록한다.
이 구절은 짧지만 깊이 묵상할수록 더욱 깊은 구속사적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구절들이다. 먼저 이는 주님은 앞으로 닥칠 당신의 십자가 수난사건 뿐 아니라 그와 관련된 제반 사실을 세세히 다 알고 계셨음을 보여 준다. 그리하여 이는 결국 다시금 주님의 십자가 수난 사역은 주께서 힘이 없거나 무지해서가 아니라 전지전능한 능력이 있으시면서도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스스로 당하신 것임을 증거해 준다. 둘째, 주님이 베드로의 세 번 부인을 예언하신 것은 베드로나 제자들을 원망하거나 수치스럽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이제 모든 일을 다 이루시고 당신이 부활 승천하셨을 때 비로소 베드로를 위시한 모든 제자들이 이처럼 주님은 앞일을 다 아셨던 전지전능한 주이시다는 것, 자신들이 주님을 부인할 것을 아시면서도 끝까지 사랑해 주셨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닫고 장차 주님의 뒤를 따라 어떠한 고난에도 불구하고 담대히 복음을 전하게 하시기 위해서였다.
이는 본문 36절에서 주께서 후에 베드로가 주의 길을 따를 것이라 예언하신 것처럼 나약하던 베드로와 나머지 제자들이 주님의 부활과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는 주님의 메시야직(Messiahship)과 주님이 주신 복음의 확실성을 깨닫고 새 힘을 받아 주님의 사랑과 진리의 복음을 죽음을 각오하고 전했음을 신약 성경 전체를 통해 발견한다. 이는 인간은 연약하여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의 진리 안에 거하면 그분의 영원한 사랑과 은혜에 의지하여, 그 어떤 죄인도 권능과 승리의 생활을 살 수 있다는 구속사적 진리를 반영한다.
외울 말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
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3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5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
8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9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11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섬김에 대한 예수의 교훈
12 〇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18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19 지금부터 일이 이루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이름은 일이 이룰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로라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21 〇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에 민망하여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22 제자들이 서로 보며 뉘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23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24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한대
25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오니이까
2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
27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28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이가 없고
29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 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의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3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사랑의 새계명
31 〇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32 만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33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베드로의 부인 예언
36 〇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37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3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본문 & 자료노트
신학용어 -13:13,14 주(Lord)
성경에서는 성부 하나님을 가리키는 호칭으로, 또는 본문에서처럼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호칭으로 자주 '주'(主)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에 '주'와 관련된 신구약 원어들과 이 용어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서는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주'와 관련된 원어들
'주'와 관련된 원어들은 모두 힘이나 권세가 있어 다른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자, 똑은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는 자를 가리킨다. 그리고 이 원어들은 하나님과 예수님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주인들을 가리킬 때도 사용되었다.
① 아돈( ), 아도나이( ): 이 단어들은 대개 윗사람을 부를 때 사용되는 호칭으로서 예의와 존경심을 내포하는 칭호이다(창 23:6; 24:9). 한편 여기서 '아돈'은 인간적인 주인, 혹은 왕을 부를 때 사용되는 호칭이며, 아돈의 복수형인 '아도나이'는 오직 하나님을 호칭할 때만 사용된다. 여기서 하나님의 칭호로 아돈의 복수형 '아도나이'가 사용된 것은 하나님이 여럿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온 땅의 주'(시 97:5)로서 다른 어떤 주인에도 비할 수 없는 유일한 주인임을 가리킨다. 이럴 때 사용되는 복수형을 히브리어 문법에서는 장엄 복수형이라 한다.
한편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특별한 호칭인 '야훼'를 함부로 사용할 때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한다고 생각하여 그것의 사용을 금했으며 공중 예배에서는 주로 '아도나이'를 사용했다.
② 바알: 주인 지배자, 주권자, 남편이라는 뜻을 가진다(민 21:28; 사 16:8). 그러나 이 칭호는 주로 이방인들이 자신들이 섬기는 우상을 가리키는 호칭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칭호로는 사용되지 않았다.
③ 퀴리오스: 70인역 헬라어 성경에서는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는 호칭 아도나이를 대부분 '퀴리오스'로 번역하였다. 때로 지도자, 주인이라는 뜻의 헬라어 '데스포테스'로 번역되는 경우도 있으나 그것은 매우 드물다(눅 2:29; 행 4:24; 계 6:10).
한편 신약에서는 '퀴리오스'가 성부 하나님을 가리키는 칭호로도 사용되긴 했으나(눅 2:9; 행 7:33; 약 1:7) 대부분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2.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복음서에서 그리스도를 가리켜 '주'라고 칭할 때 처음에는 단지 존경하는 '선생'이라는 의미로만 사용되었다(눅 5:5; 9:49; 요 4:15). 그러나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후에는 그가 참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구속주라는 의미로 이 칭호가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의심많던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라고 외쳤던 경우를 들 수 있다.
한편 바울 서신서나 다른 사도들의 서신서에서 '주'라는 칭호가 사용될 때 그것은 지상 사역 당시의 예수님을 가리킨다기보다 부활하신 주님 그리고 하늘에 오르셨다가 다시 재림하사 세상에 대해 심판을 행하실 주님. 천지 창조 사역도 행하셨으며 지금도 온 세상을 다스리는 주님(요 1:3; 롬 14:9; 빌 2:9-11; 골 1:16,17)을 가리킨다. 그리고 특별히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에 있어서, 교회가 신부라면 그리스도는 그의 신랑이시며, 또한 교회의 주인이심을 가리키는 호칭으로도 사용되었다(엡 5:23; 히 13:12).
물론 헬라어 '퀴리오스'는 본래 이방의 여러 신들을 가리키는 칭호였다. 그러나 이 칭호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하여 사용됨으로써, 그리스도는 이방의 모든 신들에 비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신이심을 이방 성도들에게 이해시키는 데 용이하였다(벧전 2:17; 3:15).
3. 의의
이상에서 살펴본바 '주'라는 호칭이 신약 시대에 와서는 성부 하나님보다는 주로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 대하여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의의를 보여 준다. 즉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으며, 십자가의 희생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신 피분이 바로 우리의 생사(生死)를 주관하시며 천지를 다스리시는 주님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무한한 기쁨과 힘과 자부심을 갖게 한다. 뿐만 아니라 그분이라면 우리가 지상에 사는 동안 우리의 삶을 충분히 성공적으로 이끄실 것이며, 장차에 주시겠다하신 천국의 영생 복락에 대한 확신과 소망을 우리가 가질지라도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되는 것이다.
보감-13:1-11 주님의 제자의 발을 씻기신 사건을 통한 영적 교훈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고 오신 바 된 분으로 당신께서 다시 하나님께 가실 때가 다가옴을 아시고 대야의 물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섬김의 자세를 보여 주셨다. 이것은 당시 제자들에게는 의아한 행동으로 보였으나 그들에게 심오한 영적인 뜻을 주시고자 하신 예수님의 의도적인 행위였다. 즉 죄인의 죄를 씻어서 구원을 주시고자 하는 사역의 목적을 집중적으로 축약 암시하신 행동이었다. 다음에 이의식이 주는 교훈을 살펴보자.
1. 종과 같이 낮아지심(빌 2:5-11)
2. 죄인에 대한 사랑을 보임(엡 5:1,2)
3. 죄인의 부정함을 씻으심(히 10:22)
4. 죄인을 용서하심(엡 4:32)
5. 결국 구원하심(요 19:30)
주요주제-13:1-38 예수의 성 고난 주간의 행적
눅 22장 연구 자료 참조
보감-13:1 예수를 닮아가는 성도의 사랑의 모습
눅 6장 자료 노트 참조
보감-13:3, 예수님의 손
1. 심판하시는 손(마 3:12)
2. 치료하시는 손(마 8:15)
3. 능력 베푸는 손(마 9:25)
4. 헌신하신 손(막 9:27)
5. 안수하시는 손(막 10:16)
6. 축복하시는 손(눅 24:50)
7. 일하시는 손(요 5:17)
8. 하나님 권세를 위임받은 손(요 13:3)
9. 못 박히신 손(요 20:27)
10. 구원하시는 손(계 3:20)
도표-13:3 성부로부터 성자에게 위임된 것
요 17장 자료 노트 참조
보감-13:14,15 성도가 예수의 이름으로 힘쓸 것들
막 9장 자료 노트 참조
원어 연구-13:8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문은 '우크 에케이스 메로스 메트 에무'이다. 여기서 '우크 에케이스'는 '갖다' 라는 뜻은 어코'에 부정어(우크)가 붙어 '네가 갖지 못한다'(you have no)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뒷부분의 '메트 에무'는 '함께'(with)를 의미하는 '메타'에 '나'(I)를 뜻하는 '에고'의 소유격이 결합됨으로써 '나와 함께'(with me)라는 뜻을 지닌다.
본 구절에 서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할 단어는 중간에 위치한 '메로스'이다. 이 단어는 원래 하나의 커다란 전체 덩어리 가운데 일부분(part, 행 23:6; 고전 12:27)을 뜻하는 말이다. 또한 한 지역의 일부라고 할 수 있는 '지방'(마 2:22; 막 8:10). 생선 따위의 '토막'(눅 24:42), 그리고 수입 또는 이익의 일부를 가리키는 '분깃'(눅 15:12; 요 19:23)을 의미하며, 한 단체의 구성원으로서 그 모임에 '참예하는 것'(계 20:6; 21:8)을 뜻하기도 한다.
따라서 본절의 경우 '메로스'는 예수의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예수와 함께 하나님 나라의 유업(분깃)을 나누기 위해 동참하는 행위 자체를 뜻할 수도 있고, 단순히 몫 또는 분깃만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본절의 전체적인 의미는 '네가 나와 함께 분깃을 나누는 파트너가 될 수 없다'(You can't be my partner; Living Bible) 또는 '네가 나와 함께 몫을 가지지 못한다'(You have no part with me; NIV, KJV)는 뜻이다.
여기서 우리는 매일 예수의 피로 죄를 씻음 받는 사람만이 예수와 더불어 천국의 유업을 나눌 수 있음을 배우게 된다.
주요 주제-13:18,19 예수에 대한 예언과 그 성취
본서 14권 사복음서 개론 특별 자료 '예수의 시리즈' 참조
주요 주제-13:31, 인자의 이해
눅 12장 자료 노트 참조.
신학용어-13:16,20,21 진실로 진실로
요 6장 자료 노트 참조
보감-13:33 그리스도 승천의 10대 목적
막 16장 자료 노트 참조
보감-13:31 그리스도가 성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신 방법
요 17장 자료 노트 참조.
도표-13:21-30,36-38 예수께서 주신 예언들
본서 14권 사복음서 개론 특별 자료 '예수 시리즈' 참조
13:1-20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
앞장에서 우리는 예수의 수난 주간 중 토요일과 주일, 화요일의 행적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수요일의 행적은 사복음서 어디에서? 찾아볼 수 없는 바 이제 본장서부터 17장까지에서는 목요일의 행적이 소개된다. 그 가운데서도 본장과 14장은 마가의 다락방이라 추정되는 곳에서 베풀어진 최후의 성만찬(마 26:20-29)시에 일어난 사건들과 교훈들을 보여 준다.
이러한 본장의 첫머리인 본문은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친히 씻기시면서 겸손과 섬김의 도(교)에 관해 교훈하시는 장면이다. 비록 본서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눅 22:24-37에 의하면,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제자들은 누가 메시야 왕국에서 더 높은 지위를 차지할 것인지를 놓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제자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시고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마 23:11)는 교훈을 주시기 위해 몸소 실천하심으로써 제자들에게 모범을 보이신 것으로 보인다.
즉 유대의 풍습에 따르면 타인의 발을 씻어 주는 일은 그 집안의 가장 비천한 종에게 맡겨진 책무였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친히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아래 무릎을 꿇은 채 일일이 그들의 발을 씻어 주신 것(1-5절)은 오로지 출세욕과 교만심에 사로잡힌 제자들을 깨우치기 위해 겸손과 봉사의 모습을 친히 보이신 것이다(12-20절).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러한 모습은 이제 곧 십자가에서 흘리게 될 예수 자신의 피로 온 인류의 죄악을 깨끗히 씻겨주실 것을 상징하고 있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버리고 종의 형체를 가져 성육신하시되,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주님의 자기 비하(卑下)에 대한 가장 대표적 사례에 해당되는 것이다(빌 2:6-7).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죄 씻음의 은총을 거절하는 자는 결코 주님과 더불어 생명적 관계를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발 씻기를 거절한 베드로의 이의를 단호히 거절하신 것이다(6-11절).
그러므로 이러한 본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영적 교훈을 깨달을 수 있다.
①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을 지불하고 하나님의 소유가 된 자들이므로, 이제 더 이상 죄악으로 자신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고전 6:20; 7:23).
②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 삶을 영위해야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사랑과 섬김의 모본을 보이셨기 때문이다(15절; 요일 4:10,19).
③ 성도들의 사랑과 섬김은 듣기 좋은 구호에 그쳐서는 안 되며, 구체적으로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돌보고 적극적으로 헌신 ․ 봉사하는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약 1:22-27; 2:14-26; 요일 3:16-18).
13:1 유월절 전에. - 12:1에 나타나는 요한의 특징적 시간 표시 기법인 '유월절 엿새 전에'와 비교해 볼 때 본절의 표현은 유월절 하루 전, 즉 수난 주간의 목요일 저녁 때 쯤으로 보인다. 한편 본서에서 유월절이 거듭 언급되고 있는 것은 각 사건이 일어난 정확한 시점을 알려주기 위한 목적도 있겠지만,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이스라엘을 애굽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한 유월절 사건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으며 예수의 죽음이 이스라엘 장자의 죽음을 막은 어린 양의 대속적 죽음과 관련이 있음을 암시하기 위함이라고도 볼 수 있다(요 1:29).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 예수께서 늘 말씀하시던 '내 때'(요 2:4; 7:6,8; 8:20)는 바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성육신하신 목적이었던 구속 사역을 완성하시고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이다. 또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이란 지금까지의 공생애 중 예수의 선교 대상이었던 사람들이라기보다는 아버지께로 가시면서 이 땅에 남겨두고 가시므로 이 땅에서 복음 전파 사역에 주력해야 할 제자들을 가리킨다(요 17:6,7,11,15, Morris. Robertson). 한편 '끝까지'(에이스 텔로스)란 이중적 의미를 가진다. 첫째는 일반적 의미로 '완전히', 둘째는 '생명의 끝' 즉 '죽기까지'라는 뜻이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복음의 사역자를 완전하게 그리고 이러한 자발적인 죽음을 통하여 최상의 사랑을 하고 계심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요 15:13. Brown). 한편 본문에는 '사랑' 이란 단어가 두 번 나오는데 이는 성육신과 죽음을 포함하여 그리스도의 모든 행위가 사랑에 근거함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랑은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죽음에 임박하여 더욱 강조되고 있는데, 이는 이 단어가 1-12장에는 6번 나오나 13-17장에는 31번이나 나온다는 사실 에서도 확인된다.
13: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 이러한 유다의 배반은 이미 토요일 마리아가 예수께 향유를 붓던 자리에서도 노골화되었다(요 12:4-6 주석 참조). 한편 헬라어 본문은 문장 구조상 애매한 데가 있는데, 이는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를 문장의 끝에다 무리하게 위치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극적 효과(dramatic effect)를 창출하며 가룟 유다를 강조하기 위해 요한이 의도적으로 사용한 문장 기법일 수 있다(W. Bauer). 즉 요한은 예수와 제자들 간의 마지막 교제인 세족식(洗足式)을 언급하기에 앞서 배신자가 이미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는데, 그는 다름 아닌 '가룟 유다'였다는 것이다. 한편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라는 소상한 소개 또한 유다의 배신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이처럼 예수의 제자였던 가룟 유다가 예수를 배반한 것은 '마귀'의 사악함이 탐욕스런 유다의 마음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도라 할지라도 그 마음을 악하게 가질 때 마귀의 지배를 받을 수 있음을 알아 항상 정결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13:3 저녁 먹는 중. - 헬라어 본문에는 2절 초반부에 나오는 이 부사구가 과연 유월절 만찬인지 일반적 식사인지에 대해 논란이 많이 있다. 이 문제는 공관복음에 묘사된 최후의 만찬의 성격과 연관된다(마 26:17-20; 막 14:12-17; 눅 22:7-14 주석 참조). 따라서 이미 공관복음서의 해당 주석에서 밝혔듯이 이 식사는 일반 사람들이 행하는 유월절 만찬보다는 하루 앞서 행하여 진 것이나 전통적인 유월절 만찬의 정신을 계승한 것이며 여기에 또 다른 구속의 의미를 부여했던 것이다. 한편 요한은 이미 자신의 독자들이 공관복음에 익숙해 있으므로 만찬과 관계된 기록은 생략한 반면 ① 공관복음 기자들이 다루지 않는 기사요 ② 자신의 신학적 관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사건인 세족식과 관계된 일들을 기록한다. 이것을 특별히 언급한 데에는 눅 22:24에 기록된 최후 만찬 중에 생겨난 '제자들의 다툼'에 대한 독자들의 의혹을 해결해 줄 의도도 있었을 듯하다.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을 아시고. - 본문은 예수께서 신적 통찰력으로 자신이 어디로부터 와서 무슨 일을 하여야하며 또한 어디로 가야 될 것인지를 완전히 알고 계심을 명확히 하고 있다. 이처럼 예수에 대한 하나님의 완전한 위임과 그의 가야할 길에 대한 신적 지식은 예수의 말씀에 의해서 다시 한 번(요 17:28; 17:2) 반복되는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의 십자가를 거부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대로 수행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한편 '하나님께로'에 해당하는 '프로스 톤 데온'( )은 요 1:1에서 '하나님과 함께'라는 말로 쓰여서 그리스도의 영원한 선재성을 표현할 때도 사용되었다. 이처럼 특이한 전치사 '프로스'가 본문에서는 '하나님께로'를 나타내는데 쓰인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함께 있었던 그 자리로 다시 돌아감을 암시하는 본서 저자의 독특한 어휘 구사 능력이라 볼 수 있다.
13: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 '일어나'(에게이레타이)의 현재형은 역사적 현재(historical present)로서 기대어 눕는 식사 자리에서 일어나신 예수의 모습을 생생히 묘사함과 아울러 이제 그가 행할 일의 충격적이고 극적인 상황임을 암시해 주고 있다(E.Rienecke). 또한 '벗고'(티데신)는 '벗다'란 일차적 의미 외에도 '포기하다'란 의미도 있다. 즉 요한은 옷을 벗는데 사용된 일차적 용어인 '아포티데미' 대신 의도적으로 이 단어 즉, '티데미'를 사용해 예수께서 자발적으로 죽으실 것임이 암시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허리에 두르시고'에 해당하는 '디에조센'은 본서에서만 나오는 단어로(4,5절, 요 21:7)이 행위는 명백히 종(servant)으로서 적극적인 섬김의 행위를 가리켜 준다(눅 12:37; 17:8).
13:5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를 시작하여. - 근동지방에서는 먼지가 많고 주로 샌들 같은 신발을 신고 다녔기에 외출 후 돌아왔을 때는 발을 씻는 것이 상례였다(눅 7:44). 이 일은 통상 그 집의 가장 천한 종들이 하는 일이었다. 이것을 '선생'이요 '주'되신 예수께서(13,14절) 자청하여 행하시는 것은 누가 큰 자인가 다투었던 제자들에게(눅 22:24) 큰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또한 예수께서는 그러한 효과를 그들 제자들에게 더욱 확실케 하기 위해 이어서 '섬김'에 대한 교훈을 주신다(12-20절). 한편 당시 '제자들'의 구성원에 대해 예레미아스(Jeremias)는 예수를 따르던(막 15:40,41) 갈릴리의 여인들도 배제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나 요한에게 있어 '제자들'이란 표현은 예수께서 선택한 자들(18절; 요 6:70)로 '12제자'만을 가리키는 전문 용어이다(요 21:1 참조).
13: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 베드로가 첫 번째였다는 견해(Augustine)나 마지막이었다는 주장은(Origen) 증거 없는 추측인 점에서는 동일하다(Brown). 또한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라는 헬라어 원문에는 '쉬' 즉 '당신'이란 말과 '무' 즉 '나'란 말이 연이어 나타나며 대조되고 있어서 베드로의 깜짝 놀라는 태도가 잘 반영되어 있다. 베드로가 예수의 진정한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것은 틀림없지만 다른 사람들과 달리 이러한 감정을 직설적으로 표현하였던 것은 그가 예수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가졌다는 사실과 더불어 그의 열정적인 성격을 보여 준다.
13: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 - 이는 베드로에 대한 답변임이 분명하나 베드로 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제자들에게 적용된다. 한편 원문에는 전절에서 베드로가 대조시켜 강조한 '쉬'와 '무'가 적절하게 되받아져서 '에고'와 '쉬', 즉 '나'와 '네'란 표현으로 대조되고 있다(A.Robertson). 이 대조는 '이제'(아르티)와 '이후'(메타 타우타), 즉 세족식이 거행되어지는 현재의 시점과 보혜사 성령 강림으로 모든 것이 명확히 밝혀지는 미래의 시점을 가리키는 시간적 대조와 더불어 본 문장을 매우 강력한 반박의 성격을 가지게 한다. 또한 본절에는 '알다'란 말이 두 번 나오는데 전자(오이다스)는 일반적 지각을, 후자(그노세)는 본질적 지각을 가리키는 바, 본절은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구속 사역에 대한 보다 확실한 이해의 가능성을 예언하는 것이다. 예수의 이 말씀은 예루살렘 승리의 입성 후 요한이 붙인 해설의 표현과 거의 같은 의미이다(요 12:16 주석 참조).
13:8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 본문에서 '내'(무)가 강조적 위치에 배치되어 베드로의 과도한 제스처를 동반한 거부를 연상할 수 있게 한다. 또한 '못하시리이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메' 역시 강력한 맹세의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Jeremias).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 베드로의 완강한 거부에 대해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일의 근본적인 목적을 밝히신다(G.Beasley Murray). 즉 세족 사건은 예수와 제자들 간의 영적인 관계로 '죄 씻음'을 통해 그리스도와 맺어지는 성도들의 연합을 교훈하는 의미를 지닌다. 한편 '상관'에 해당하는 '메로스'는 '유산을 상속하거나 약속된 땅을 받는 것'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복음서에서 하나님의 왕국에 종말론적으로 참여하는 것에 적용되었다(마 24:51; 눅 15:12 ; 19:17; 22:29,30; 계 20:6). 이처럼 죄 씻음을 통해서 구원을 받은 자는 천국의 기업을 얻게 되는 것이다. '나와'(with me)에 해당하는 '메트 에무'도 예수께서는 자신과 연합한 성도들과 '함께' 천국의 기업을 누리게 될 것을 약속해 주시는 것이다(요 14:3; 17:24). 또한 '없느니라'(우크 에케이스)의 '에케이스'는 현재형이 사용된 것이 특징적인데, 이것은 그 일이 행해지는 시점 뿐 아니라 영원성을 포함한 미래적인 의미로 쓰였다(p.Jouon). 즉 죄 씻음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없게 되면 영원히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과는 상관없는 자가 되는 것이다.
13:9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 베드로는 자신의 발을 씻을 수 없다는 주장을 철회할 뿐 아니라 온몸을 씻어 줄 것을 요구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을 곡해하여 아마도 ① 예수의 물세례를 다시 받아야 한다고 오해 했거나(Goder) ② 많이 씻으면 씻을수록 더 큰 축복을 받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듯하다(Hendriksen). 예수의 강조점은 단순히 영적 정화의 상징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Bernard) 봉사와 섬김의 도(道)를 보여 주시려는 것이기도 했는데(13-17절) 베드로는 그 자체가 어떤 효력을 갖고 있는 듯이 생각했던 것이다.
13: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 '손이나 발 등 몸의 일부분을 씻는다'는 의미의 '니프토' 동사가 지금까지 사용되었으나, 이제는 '온몸을 씻는다'는 뜻의 '루오' 동사가 쓰이고 있다. 여기서 전자는 상징적으로 구원의 반열에 속한 자가 일상생활 가운데서 범한 죄악을 회개하는 것을 가리키고 후자는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중생(重生)함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문은 한번 중생을 경험한 자는 근본적인 변화를 이미 겪었으므로 또다시 거듭남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며 단순히 매일의 삶 속에서 범한 죄를 회개하는 것이 필요함을 보여 준다. 한편 예수의 이 말씀은 전적으로 유대적인 표현이다. 당시 잔치에 참석할 때는 이미 집에서 출발하기 이전에 목욕을 하는 것이 상례이기 때문에 잔치 집에 도착하여 신발을 벗을 때 발만 씻으면 되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일상관습을 비유로 설명하시면서 베드로의 말에 대한(9절) 대답과 아울러 제자들 중 한 사람 배신자의 존재에 대해서도 언급하신다. '깨끗하니라'에 해당하는 '카다로스'에 대해서는 요 15:3 주석을, '온몸이'에 해당하는 '홀로스'에 대해서 요 9:34 주석 참조하라.
13:11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 예수께서는 이미(요 6:64,70,71) 그 이전부터 가룟 유다의 배신에 대해 신적 지식으로 아셨다. 이처럼 본서는 일관되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예수의 신적 전지(全知)에 대해 강조함으로 당신의 하나님 되심을 암시하고 있다(요 2:24,25; 5:6,42; 6:15; 19:28; 21:15). 한편 '팔'에 해당하는 '파라디돈타'는 현재시제로 쓰임으로써 유다가 예수를 배신하는 과정에 있음을 잘 표현해 준다. 또한 예수께서 이러한 사실을 밝히신 것은 가룟 유다로 하여금 회개케 할 기회를 제공함과 동시에, 후에 예수께서 지적 능력이 부족하여서 제자로부터의 배반당함을 미리 알지 못했다는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함이다(19절).
13:12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 '다시 앉아'에 해당하는 '아네페센 팔린'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던 일이 식사 중에 있었음을 알려주는 표현으로 예수께서는 다시 식사하시던 식탁으로 가서 기대어 앉으셨음을(reclined) 보여 준다. 또한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라는 문장은 의문문으로도 해석이 가능하지만 명령문으로도 해석되어 예수께서 행한 일의 의미를 바로 알고 제자들로 이를 실천해야 함을 촉구한다고 볼 수 있다(Brown). 한편 '행한 것'이라는 표현 속에 예수께서 보이신 모범의 특성이 강조되는데, 그것은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실천이었다. 특기할 만한 것은 제자들의 발을 씻으면서 특히 베드로와 대화한 내용 속에는 영적 씻음과 구속적 의미가 강조되었지만(8절 주석 참조), 이제부터 말씀하시는 교훈 속에는 '진정한 섬김의 도'에 관해 집중적으로 설명하시면서 이에 앞서 이와 같은 행함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본 사건이 영적 씻음으로 인한 구원의 의미와 더불어 봉사의 삶을 나타내는 이중적인 의미(double meaning)로 쓰이며, 이것이 이렇게 독특한 기법으로 묘사된 것은 예수의 독특한 교수법의 특징인 동시에 이를 잘 묘사하는 요한의 문체적 특징으로 볼 수 있다.
13:13,14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 당시 히브리 사회에서 제자들이 스승을 부르던 '선생', '주'라는 호칭에 대해서는 요 8:4,11주석과 요 9:38 주석을 참조하라. 그러나 여기서는 랍비 가운데 하나로서의 호칭이 아니라 절대적인 의미에서 예수는 제자들의 선생이요 주이심을 나타내기 위해 이 단어들 앞에 정관사(호)가 쓰여지고 있다. 한편 14절에서는 '주와 선생'이라는 호칭의 순서가 바꿔어 있는데, 이것은 예수께서 순종을 받으실 권리를 주장할 합당한 호칭이 '주'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Hendriksen) 같은 단어의 반복을 피하려는 요한의 문체적 특징으로 (Brown), 이것은 그저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한 단순한 변이(simple variation)이다. 또한 14절은 논쟁의 형식(type of argument)으로 되어 있는데, 랍비들에게서 자주 그 용례를 발견할 수 있는 소전제에서 대전제로의 전개 형식이다(C. Barrets). 즉 예수께서 선생과 주로서 발을 씻기신 일이 소전제요, 제자들도 서로 발을 씻겨야만 하는 것은 대전제로서 이는 반드시 실천되어야 하는 것임이 강조되어 있는 것이다. 한편 '옳으니라'에 해당한 '오페일레테'는 본래 '빚지다'(마 18:30)라는 뜻으로 인간적이고 윤리적인 의무(human and ethical obligation)를 표현한다(TDNT). 즉 그리스도를 본받아 성도들을 섬기는 봉사는 채무자가 채권자에게 빚을 갚는 것이 당연하듯 삶 가운데 구현되어야 할 의무인 것이다.
13: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 '본'에 해당하는 '휘포데이그마'는 '모범' 혹은 '실례'(實例)라는 뜻으로 요한의 저작에서는 유일하게 나타난다. 또한 신약에서 다른 저자들은 이 단어를 사용하지만(히 4:11; 8:5; 9:26; 약 5:10; 벧후 2:6 등) '그리스도가 보이신 본'이라는 의미로는 본절이 유일한 용례이다(Bernard). 세족식이 이 당시만 행해진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후대에도 성례전으로 시행된 적이 있음을 교회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어거스틴 시대에 이미 고난 주간 가운데 목요일에 행해진 세족식을 기념하는 세족 목요일(Maundy Thursday)에 이 의식이 행해졌고 지금까지도 로마 교황에 의해 실행되고 있다. 그리고 한 동안은 영국교회와 모라비안 교도들도 시행했고 일부 침례교를 비롯한 개신교의 일각에서 지금까지도 시행하고 있다(A. Robertson, Hendriksen). 하지만 여기서 예수의 강조점은 세족식의 반복적 성례 전화에 있지 않은 것이 자명하다(M. Luther, R. Lenski). 이 세족 사건의 두 가지 의미인 ① 죄 씻음의 상징과 ② 섬김의 실천적 행동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전자는 그리스도 아닌 그 어떤 사람(교황이라도)에 의해서도 실행될 수 없고 후자는 반드시 발을 씻기는 섬김만이 아니라 다양한 방법으로서의 섬김의 행동이어야 한다고 확대 해석해야 할 것이다. 즉 이 '본'의 실천은 그 의식을 반복하는 것이 아닌 신자들 서로 간의 모든 관계에 계속적으로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다(A. Robertson).
13: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 지금까지 세족 사건에 대한 일차적 의미를 교훈하신 예수께서는 '진실로 진실로'란 주의를 환기시키시는 말씀으로 시작하여 이에 대한 보다 확대된 이차적인 가르침을 주신다. 즉 예수께서는 자신을 '상전'(퀴리오스, 13,14절에는 본절의 '퀴리오스'를 주라 번역함)으로 설정하시고 제자들을 '종'으로 규정하신데 이어 예수께서는 자신은 '보낸 자'요 제자들은 '보냄을 받은 자'라는 새로운 관계를 제시하신다. 한편 '보냄을 받은 자'(아포스톨로스)라는 표현은 누가에 의하여 열두 제자들의 '선택식'에서 제자들에게 붙여진 칭호이지만(눅 6:13) 요한에게 있어서는 이 부분에만 나오는 유일한 표현이다. 즉 다른 복음서와(마 10:2-4; 막 3:16-19;눅 6:14-16)달리 열두 제자들의 이름도 종합적으로 밝히지 않는 본서에서 요한이 사용하는 '아포스톨로스'라는 표현은 특히 십자가를 앞둔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복음 전파 사명을 부여한 위임 명령(commission)과도 같은 것이다. 즉 본절에서 예수께서는 그 제자들의 위상을 확실히 규정해 주는데, 그것은 '섬기는 주'(상전) 앞에서 더욱 섬겨야만 할 '종'의 자리이다.
13: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 '이것'(타우타)이 복수형이긴 하지만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보는 것보다는 16절에 말씀하신 '보냄을 받은 자'가 행할 일들에 관한 말씀으로 보는 것이 좋다. 그래야 본절의 말씀은 18절 이하 유다에 관한 예언과 부합된다. 한편 제자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보냄을 받은 자'로서의 사명을 잘 인식할 뿐 아니라 이를 실천에 옮겨야 했다. 왜냐하면 바로 알지 못하고 하는 행동은 잘못되기 쉬우며 알지만 행동하지 않는 것은 죄이기 때문이다(약 2:26). 한편 여기서 '복'은 육신적인 복이나 현세에 누리는 복보다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마음의 평안과 내세에 누릴 영원한 복이란 의미가 더 강하다고 볼 수 있다.
13:18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 예수를 따르는 많은 자들 가운데서 12명을 선택하여 제자로 삼으셨던(눅 6:13) 예수께서는 그중 '보냄을 받은 자'의 사명을 다하지 못할 자 유다를 신적 전지성으로 이미 알고 계신다(요 6:70).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 압살롬의 반역 시 다윗이 자신의 신하들, 특히 자신의 가장 가까운 모사(謀士)였던 아히도벨이 배반하여 자신을 죽이려 한 것을 탄식하며 지은 시 41:9의 인용이다(삼하 15:12). 발꿈치를 들어서 발바닥을 보이는 행동은 근동지방에서 경멸의 표시이다(E.F. Bishop). 현재에도 아랍인들은 이러한 관습을 가지고 있다(A. Robertson). 또한 '내 떡을 먹는 자'란 식탁 교제(table fellowship)를 할 만큼 가까운 친구를 가리키며 이러한 친구에 대한 배반은 더욱더 심각한 모욕이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인용하신 것은 가장 가까운 제자들과 더불어 나누었던 최후의 만찬의 '식사' 자리여서(2,27절) 더욱더 실감이 난다. 혹자는 본문의 '발꿈치를 들었다'는 표현을 창 3:15의 '여자의 후손이 뱀 발꿈치를 상하게 될 것'이란 예언과 연결시키기도 하나 지나친 면이 있는 해석이다(Brown).
13:19 지금부터 일이 이루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이름은 일이 이룰 때에. 내가 그 인줄 너희로 믿게 하려함로다. -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 예언을 하신 목적이 언급되어 있다. 즉 예수께서는 유다의 배신과 예수의 체포로 인해 제자들의 믿음이 상실되는 것을 방지하시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예수의 이러한 예언이 선행됨으로 인하여 유다의 배신이 이루어지면 그때 오히려 예수의 메시야성이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Weiss). 물론 유다의 배신으로 시작되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 때에 제자들은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흩어지고 말 것이지만 예수의 죽음, 부활, 승천이라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그들의 믿음은 오히려 굳건해질 것이다. 한편 '믿게'에 해당한 원문은 사본에 따라 두 가지 독법이 나타난다. ① 부정과거 가정법: '피스튜세테' ② 현재 가정법: '피스튜에테', 후자는 '계속적인 믿음'(continued belief)의 상태를 가리키고 전자는 '완전한 믿음에 이를 것'(coming of full faith)을 지적한다. 두 가지 모두 가능하나 이후에 있을 일련의 사건을 통해 점차 완전해질 제자들의 믿음 성장의 과정을 고려한다면 전자가 더 합당하다고 볼 수 있다(Brown, Morris).
13: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 요 1:51 주석 참조.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 17-19절이 섬김의 도를 강론하는 가운데 삽입된 가룟 유다의 배반에 대한 예언 부분이라면 본절은 16절과 잘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즉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지만(16절) 예수께서 보낸 자(결국 제자들)를 영접하면 결국 보낸 예수를 영접하게 되는 것이고 예수를 영접하면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를 중심축으로 하여 하나님은 예수를 보내셨고 예수는 보냄 받았으면서 동시에 보내는 분이며 제자들은 보냄 받은 자들이라는 이중적 중첩 구조가 나타난다. 이처럼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사상은(요 10:30) 본서에서 강조하고 있는 바이며 신약의 공통적인 사상과도 일치한다. 한편 본문의 이 말씀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그들이 복음을 전파하는 그리스도의 전권 대사로서의 권위를 부여받은 자들임을 인식시킴으로써 그들을 격려하고자 주신 말씀이다. 이처럼 유다의 반역이란 충격적인 일을 앞두고도 예수께서 시기적절하게 제자들을 격려하심을 통해 그분의 자상함을 발견케 된다(마 10:40; 막 9:37; 눅 9:48).
13:21-30 가룟 유다의 배신 예고
앞 단락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사건이 갖는 두 가지 의미를 살펴보았다(1-20절). 그런데 이제 그에 이은 본문은 12제자들 가운데 가룟 유다가 자신을 배반할 것임을 알리는 예수님의 예고를 소개하고 있다. 즉 이미 앞 단락에서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이 자신을 배신하게 될 것이라고 암시하신 바 있는(10,11,18절) 예수님께서는 드디어 자신이 수난당할 때가 되었음을 인지하시고 가룟 유다를 지목하면서 그의 배신을 알리셨다(21-29절). 그러자 자신의 은밀한 계획이 탄로 난 줄을 알게된 가룟 유다는 서둘러 최후의 만찬 석상을 떠나 밖으로 나갔는데, 이는 사태가 수포로 돌아가기 전에 산헤드린 공회와 연락하여 예수를 체포하려는 생각에서였다(30절). 이러한 본문은 예수의 십자가 수난의 때가 다가왔음과 그 같은 수난이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임을 시사해 준다. 그리고 가룟 유다의 예수 배반 예고는 '나의 신뢰하는 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시 41:9) 라고 구약 성경에 정확하게 예언되어 있는 바로서 공관복음도 이를 모두 언급하고 있다(마 26:20-25; 막 14:17-21; 눅 22:21-23). 그러나 본문은 공관복음서에서 보다 더욱더 가룟 유다의 배신에 대한 예언을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다. 특히 요한은 유다의 마음 속에 사단이 들어갔다는 독특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는 근본 배경을 밝힌 것이다.
한편 이처럼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의 배신을 미리 예고하신 이유는 실제로 그러한 일이 발생할 때 제자들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을 뿐만 아니라(19절), 또한 가룟 유다로 하여금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사단의 지배 아래에 놓인 가룟 유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회개의 기회를 거부하고, 오히려 자신의 음모가 수포로 돌아갈까봐 염려하는 태도로 신속히 산헤드린 공회를 찾아간 것이다.
바로 이러한 본문에서 우리는 실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3년 동안이나 예수님과 함께했던 제자가 오히려 스승을 팔려고 하는 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즉 예수와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가룟 유다가 결국에는 예수를 배신하므로 구약 예언을 성취시키는 장본인이 되고만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의문점을 던져준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를 진정 제자로 택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수난을 위한 도구로만 데리고 있었던 것인가? 비록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기는 했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였기에 필요 악의 존재로 구원은 받지 않았겠는가? 하는 궁금점이다.
그러나 이런 궁금점은 성경에 나타난 가룟 유다의 인물됨을 살펴봄으로 올바르게 해결할 수 있다. 즉, 예수님께서는 ①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가룟 유다의 발을 씻겨주셨고(5절), ② 죄를 깨달을 수 있도록 가룟 유다가 행케 될 일을 분명히 알려주셨다(21,26,27절). ③ 그리고 더욱이 3년 동안 그와 동고동락하시는 인내를 보이셨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회개는커녕 그 마음에 사단이 들어감으로 죄의 종 노릇을 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가룟유다의 자살 행위(마 27:5)는 그가 죽으면서까지 하나님이 생명의 주인되심에 반역한 행위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가룟 유다는 예수께서 저를 제자로 불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같은 은총을 저버린 채 하나님의 구원을 도리어 웃음거리로 여겼다고 하겠다. 사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도 3번이나 주님을 부인하고 도망했지만 그는 죽음으로 삶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예수님을 위하여 순교함으로 제자의 최후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 주었다. 따라서 비록 인간은 누구나 죄를 짓지만 죄에 굴복하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죄와 싸워 이기는 자만이 하나님의 참 백성임을 깨달을 수 있다.
13:2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에 민망하여 증거하여 가라사대. - 요 11:33 주석 참조.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 만찬석상에서 배신자가 있을 것임을 두 차례에 걸쳐 예언하셨을 뿐 아니라(10,18절) 예수께서는 이미 일 년 전쯤에(A. Robertson)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요 6:70)고 말씀하셨다. 그때에는 사실상 그 말씀이 그렇게 심각하게 들리지는 않았을 것이나 지금의 만찬 자리에서는 예수의 죽음이 거의 기정사실화되어 있는 상황이었기에 제자들 모두는 심히 불안한 마음을 가졌을 것이다. 베드로조차 '사단'이라는 책망을 들었던 것을(마 16:23) 고려하면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는 말씀은 그리 심각한 의미라고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팔리라'(파라도세이)는 말씀은 배신의 행동까지를 보여주는 훨씬 구체적인 성격을 지닌 말이기에 제자들은 그 한 사람이 자신일까 봐 전전긍긍한다(22절). 이처럼 당신 제자들은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조차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심히 미약한 가운데 있었다.
13:22 제자들이 서로 보며 뉘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 병행 구절인 마 26:22; 막 14:19; 눅 22:22 주석을 참조하라. 이를 보면 당시 제자들은 심히 불안한 마음으로 예수께 대하여 '내니이까'라고 물은 것으로 나와 있다. 한편 '의심하더라'에 해당하는 '아포루메노니'는 본래 '길을 잃다'는 뜻으로 너무나 충격적인 상황에서 냉철한 판단력을 잃고 어리둥절한 상황을(at a loss)잘 표현해 준다.
13:23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 많은 학자들이 이러한 표현은 본서 저자 요한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겸손하게 스스로를 자칭하는 것으로 본다. 이러한 본서의 특징적 표현에 대해서는 요 19:26; 20:2; 21:7 주석을 참조하라.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 식사하던 중 어떻게 예수의 품에 안기는 행동이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당시의 식탁 구조나 식사 자세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프랫(F. Prat)은 예수 당시의 식탁 모양은 한 쪽면이 트인 직사각형(말의 편자와 같은 U자형)으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형태라면 예수의 제자 12명이 양쪽 측면에 5명씩 앉고 상석인 중심부에는 예수와 두 제자가 앉았다고 볼 수 있다. 식사를 할 때는 왼 팔을 식탁에 대고 다리를 뒤로 빼고 오른손을 이용하여 음식을 먹는 자세를 취하였으므로 만약 요한이 예수의 오른편 상석에 앉았다면 쉽게 예수에게 기댈 수 있게 된다(Brown).
13:24 시몬 베드로가 머리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한대. - 예수의 오른편에는 요한이(23절), 왼편에는 유다가 앉았다고 가정할 때(26절, A. Edersheim) 베드로는 요한이 쉽게 볼 수 있는 몇 자리 떨어졌거나 맞은편에 앉아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한편 알렉산드리아 사본(A) 등에는 베드로가 요한에게 머리 짓만 하였을 뿐 말을 했다는 기록이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 바티칸 사본(B) 등에는 개역 성경 본문과 같이 머릿짓과 더불어 말을 병행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요한과 베드로 간에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져 있었으며 고개짓 만으로는 부족하여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Brown). 즉 제자들 모두는 그때까지 예수를 팔 자가 누구인지에 대하여 알지 못했고(28절) 성질이 급한 베드로는 그가 누구인지 궁금하여 예수와 가까이에 있는 요한에게 이에 대하여 여쭈어 보라고 요청한 것이다(A. Robertson).
13:25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오니이까. - '그대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후토스'는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된다. ① 예수의 품에 의지한 '그대로'(justas he was) ② 베드로의 머리짓 신호에 따라서' ③ 별 어려움 없이 순조로이(without more ado, Brown). 이 모든 해석이 가능하나 아마도 ①항이 가장 적합한 의미인 듯하다. 요한은 그가 예수의 품에 의지한 자세 그대로 작은 목소리로 예수께 물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배신자가 공개될 경우 큰 혼란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13:2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어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 - 예수의 분명한 말씀과 이어지는 행동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예수를 팔 자가 유다라는 사실을 몰랐다는 진술이(28,29절) 다소 이상하다. 이것은 아마도 예수께서 떡 조각을 건네신 행동이 호의적인 행동이었고(Bernard) 예수께서 하신 '내가 한 조각을…그니라'는 말씀이 요한에게만 들리도록 작은 목소리로 하셨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따라서 요한은 적어도 유다가 배신자임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찍는 국물은 초와 소금을 섞은 물이거나 무화과, 건포도 등의 과즙이 들어간 것이기도 했다(Hendriksen). 이것을 공동이 사용할 수 있는 넓은 접시에 담아 찍어 먹도록 했다. 한편 식사의 주빈이 음식 조각을 찍어 먹여 주는 것은 근동의 관습으로, '유다가 그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이렇게 우회적으로 말씀하신 것은 유다에게 다시 한 번 회개할 기회를 주는 추가적 경고와 배려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유다는 이미 그 마음이 강퍅해져 있었으며 예수를 배반할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13:27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 '사단'(사타나스)이라는 단어가 본서에서 유일하게 등장한다. 이로써 가룟 유다의 배반의 배후에 사단의 간악스러운 활동이 있었음이 명백하게 입증된다. 한편 '들어간지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셀덴'( )은 공관복음서 기자들에 의해 악한 영의 인간 내 침입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어 왔다(막 5:12; 눅 8:30; 11:26). 본절에서도 이 단어가 이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으므로 본절은 2절과 유사한 의미를 지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2절이 일반적인 묘사라면 본절은 유다가 예수에 의해 주어진 마지막 회개의 기회마저 포기한 상태이므로 요한의 관점에서 확정적인 배신자요, 완전히 사단에게 사로잡힌 자로 보였던 것이다. 한편 눅 22:3에는 유월절 만찬 전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갔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러나 이 양자의 표현은 유월절 만찬 이전부터 가룟 유다의 마음을 미혹하던 사단이 가룟 유다가 배신을 완전히 결심한 그 순간 그 마음을 완전히 점령하였다고 해석함으로써 조화를 이룰 수 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 회개의 기회를 스스로 거부함을 아신 예수께서는 오히려 가룟 유다에게 할 일을 더 속히 행하라고 명령하신다. 여기서 '속히'에 해당하는 '타키온'은 '타케오스'의 비교급으로(요 20:4에도 나옴) '더 빨리'라는 의미로 쓰였다. 이 표현 속에는 눅 12:50에 나타나는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는 말씀과도 같은 인류의 죄를 대속키 위해 십자가를 지시려는 예수의 필연적 열망이 나타난다(Bernard, Robertson). 아마도 유다는 예수를 공회에 넘겨줄 시기를 명절(유월절이 끝난 시기로 잡고 있었을 수도 있으나(Bernard) 예수의 '때'는 유월절 안에 유월절의 어린 양으로서 십자가에 달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이신 것이다(요 18:28 주석 참조). 출 12장 자료노트, '유월절 어린 양과 그리스도'를 보다 참조하라.
13:28,29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을 자 중에 아는 자가 없고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 궤를 맡았으로 명절에 우리의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 예수께서 떡 한 조각 찍어 주는 행위로 가룟 유다가 배신자임을 암시했고, 더불어 예수께서 유다에게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처럼 예수의 바로 옆에 있었던 요한까지도 유다가 예수를 팔 자라고 단정하기가 힘들었던 것은 예수의 대답이 구체성을 띠지 않고 막연했기 때문이다.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는 말씀은 예수 일행의 재정 출납을 맡고 있는 유다에게 절기 준비나 이웃 구제의 일을 시키시는 것으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한편 '명절에 우리의 쓸 물건을 사라'는 구절은 요한의 최후 만찬이 유월절 식사(Passover meal)가 아닌 증거로 볼 수 있다(Loisy). 왜냐하면 유월절 만찬이 이미 시작되었다면 다시 유월절을 준비하는 물건 구입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며 유월절 만찬이 진행되는 중요한 시점에 물건을 사라고 보내는 것도 자연스럽다고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가난한 자들... 주라'는 구절로 보아 예수께서도 친히 이웃에 대한 구제를 실천하셨고(요 12:8의 말씀과 비교해 보라) 특히 명절을 맞아 그 일을 의례적으로 행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복음서에는 기록되지 않지만 바울에 의해 인용되는 예수의 말씀인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말씀이 상기된다(행 20:35). 또한 본절에 나타나는 바와 같은 예수의 말씀에 대한 제자들의 몰이해로 사단에 의해 조정 당하는 가룟 유다의 정체에 대한 판단이 서지 않았던 것이 영적인 전쟁에서 그들이 패배할 수밖에 없는 요인이 되었으며 그들의 이 같은 영적인 유약함은 예수 체포 시 잘 나타난다(막 14:50).
13:3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 유다가 만찬 석상을 떠난 시간에 대한 묘사는 본서에만 나온다. 아마 예수께서는 배신자 유다가 나간 후에 베드로가 자기를 버릴 것을 예고하시고(31-38절) 이어 떡을 떼고 포도주를 마시는 성찬 의식을 제정하셨을 것이다(마 26:26-29; 막 14:22-25; 눅 22:17-20). 그리고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가룟 유다는 그 길로 대제사장무리들에게 가서 예수를 체포할 방법에 대해 논의했을 것이다. 이처럼 다른 제자들은 미약하나마 빛되신 예수와 함께 거함으로써 예수의 피 흘리심과 살이 찢기심을 기념하는 성찬식에 동참하는 영광을 누린 반면 가룟 유다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려는 사단의 세력의 하수인으로 어두움 가운데 머물렀던 것이다. 본절에서는 이러한 유다의 상황을 암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밤이란 시간을 밝히고 있다.
13:31-38 예수께서 주신 새 계명
본문에서부터 요 14:31까지에서는 일명 '다락방 강화'라고 일컬어지는 예수님의 고별 설교가 소개된다. 물론 이것은 공관복음서에 기록된 '감람산 강화'(마 24:1-25; 막 13:1-37; 눅 21:5-36)와 마찬가지로, 일반 회중들을 향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본문은 앞 단락(21-30절)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기 위해 최후의 만찬 자리를 떠난 상황에서 예수께서 나머지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시고(31-33절) 또 그들이 지켜야 할 사랑의 새 계명을 가르치시는 장면이다(34-35절). 그리고 이 부분까지는 공관복음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본서의 독특한 내용이나 부가적으로 기록된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예고는(36-38절) 공관복음서에서도 공히 발견된다(마 26: 31-35; 막 14:27-31; 눅 22:31-34). 또한 이에 대한 베드로의 강력한 부인에도 불구하고 이는 몇 시간 후에 사실이 됨으로써 이는 그리스도의 신적 전지성과 더불어 인간이 자신의 힘만으로는 신앙을 유지할 수 없는 얼마나 약한 존재인가를 교훈해 준다.
한편 여기서 말하는 새 계명이란 구약의 율법에 나타난 이웃 사랑의 계명과 전혀 별개의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근거로 한다는 점에서 완전히 질적으로 새로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요일 4:9-11). 다시 말해서 구약의 율법에 나타난 옛 계명이 이웃 사랑의 기준을 인간의 자기 사랑('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에 두고 있는데 비하여,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은 그 같은 이웃 사랑의 기준을 넘어 주님 자신의 희생적 사랑('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에 기초하고 있다.
따라서 본문에서 가르쳐 준 예수님의 사랑은 오늘날 우리 성도들이 지녀야 할 참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깨우쳐 준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이기적이고 조건적인 사랑의 실천자가 되지 말고 예수님께서 모본을 보이신 주 안에서의 무조건적인 사랑의 실천자가 될 것을 권면해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지 입술로만 사랑을 외치는 입술의 실천자가 아니라 인간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죽음의 자리에까지 내어 주신 주님의 희생적 사랑에 감격하여 이웃을 온전히 사랑하는 참사랑의 실천자들이 다 되어야 할 것이다(요일 4:7-21).
13:31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 가룟 유다가 나감으로 다락방에는 예수와 11제자만 남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이처럼 배신자가 없어진 순수한 제자들 앞에서 더 깊은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신다.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 예수가 얻을 영광은 하나님의 위대성이 인간에게 가시적 현시(visible manifestation)로 나타난다는 것이 그 특징이다. 이 영광은 앞으로 있을 그의 죽음과 부활, 승천 등의 일련의 행위들을 통해 나타나는데(요 10:17,18). 이것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는 것이므로(요 4:34; 6:38) 예수의 능력은 곧 하나님의 능력이기도 하다. 이런 측면에서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라는 말씀이 이해되어야 한다. 즉 하나님은 예수의 기꺼이 순종하심을 통해 영광을 받으셨으며(요 17:4 주석 참조) 동시에 예수 안에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것이다. '영광을 얻었고'와 '영광을 얻으셨도다'라는 동사들에 공히 해당하는 '에독사스데'( )가 수동태라는 사실이 그것을 입증해 준다(G.B.Caird). 아버지에 의해 아들이 영광을 받는다는 사상에 대해 요 8:54; 12:28; 17:1을. 아들에 의해 아버지가 영광 받는 것은 요 14:13; 17:1을 참조하라(W. Bauer).
13:32 만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며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리니 곧 주시리라. - 전자는 성자로 인하여 성부가 영광을 받게 됨을, 후자는 성부에 의하여 성자가 영광을 받게 됨을 표현한다. 여기서 전자는 그리스도께서 자발적으로 십자가를 지심으로 성취되었고 후자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며 승천케 하사 자기의 우편에 앉게 하심으로 온전히 이루어졌다(빌 2:6-11). 곧, 예수의 수난과 죽음, 부활, 승천 등 영광의 현시로 나타날 일들이 이제 매우 임박해 있음을 알려 주시는 말씀으로 다음절의 '잠시'라는 표현과도 조화를 이룬다.
13:33 소자들아(테크니아). - '어린아이'를 가리키는 '테크나'의 축소형(diminutive)로 '테크나'는 '아이'(child), '테크니아'는 '어린아이'(a little child)를 가리킨다. 한편 여기서는 '테크니아'가 육적인 어린아이가 아닌 영적인 미성숙자, 즉 제자를 가리키는 호칭으로 사용됐다. 복음서 중에서 이러한 용례는 본서에만 나타나며 이 표현을 기억하고 있는 요한은 후에 자신의 영적 자녀들에게 동일하게 이 칭호를 사용하고 있다(요일 2:12,28; 3:7,18; 4:4; 5:21).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 본절과 동일한 예언을 하였던 요 7:34; 8:21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아직 잠시'에 해당하는 '에티 미크론'은 불트만(Bultmann)에 의하면 통상적인 헬라어의 정확한 시간관념을 나타낸 표현이라기보다는 히브리적 뉘앙스의 표현이다. 왜냐하면 요 7:33에서 이 표현이 사용되었을 때는 예수의 죽음이 적어도 6개월은 남아 있었으므로, 이 표현을 쓰는 것은 헬라적 시간관념으로는 이해하기 곤란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흔히 사용하는 예언적 원근통시법 즉, 구체적인 시간의 명시 없이 가까운 미래에 일어날 일과 먼 미래에 일어날 일을 동시에 예언하여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조망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하나님의 계시는 정한 때가 있고 그 때는 하나님의 주권에 있으므로 인간의 관점에서는 더딜 수도 있고(합 2:3) 매우 빠를 수도 있다(사 10:25). 그러나 여기서는 예언되어지는 분위기가 문맥으로 보아 상당히 급박한 상황 전개가 예측된다.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 - 이는 가깝게는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제자들이 이에 동참하지 않을 것을, 그리고 좀 더 멀게는 예수께서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않을 것이나 제자들은 여전히 지상에 남아 스스로에게 부여된 사명을 수행하여야 함을 말한다.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 개역 성경과 마찬가지로 헬라어 본문에서도 '새 계명'이란 표현이 문두에 위치해 강조절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말씀부터 시작해서 예수의 긴 강화(요 14-16장)가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새 계명에 관한 말씀이 14-16장 강화의 근본 사상이며 계속 반복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확인되고 있다(요 14:15,21; 15:10,12). 또한 요한은 이러한 가르침에 깊은 감명을 받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후에 쓰여진 그의 서신에서 예수가 주신 이 사랑의 계명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확인된다(요일 2:7-11). 한편 이 새 계명은 과거로부터 '들은 바 말씀'(요일 2:7)인 옛 계명보다 더 고차원적인 계명이다. 즉 구약은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레 19:18)고 규정하고 있지만 새계명은 그 사랑의 정 도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카도스) 서로 사랑하라고 한다. 또한 사랑의 범위에 있어서도 구약은 '이웃', 즉 동일한 여호와 신앙을 가진 동족 이스라엘을 말하고 있지만 새 계명은 그 범위를 모든 인류에게로 확대시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새'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네아'가 아닌 '카이넨'인 것 역시 새 계명의 특성을 설명해 준다. 전자는 시간적으로 최근의 것을 의미하지만 후자는 시간이 흘렀다고 못쓰게 되지 않는 형식(form)이나 질(quailty) 면에서 새로워진 것을 의미한다(R.C. Trench). 이처럼 새 계명은 단순히 새롭게 주어졌다거나 옛 계명의 변조가 아니라 옛 계명을 완성하는 측면을 지닌다.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 본절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전파할 책무를 지닌 제자가 일차적으로 하여야 할 일이 스승이신 그리스도께서 본을 보이셨던 사랑을 실천하는 일임을 밝히신다. 한편 '너희가 사랑하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안 아가펜 에케테'를 직역하면 '만약 너희가 사랑을 가지면'이다. 여기서 '가지면'에 해당하는 '에케테'의 현재시제는 34절의 '사랑하라'(아가파테)의 현재형과 더불어 '계속적인 사랑'을 강조한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한 번해보고 마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이어야 한다. 한편 제자로서의 표지(trade-mark)가 사랑임이 강조되는 것으로 보아 요한이 그리스도인의 사랑으로 기독교의 우월성을 증거한 초대 교회 시대의 변증가들(apologists)의 활동에 자극받아 본서를 기록했다는 주장을 하는 학자도 있다(Loisy). 그러나 오히려 초대 교회 변증가들이 기독교의 본질을 이야기한 사도 요한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실제로 2세기 후반에서 3세기 초에 활약했던 터툴리안(Tertullian)은 그의 저서 '변증'에서 사랑이 제자가 되는 증거라고 주장한다. 기록된 자료 들은 나타나지 않지만 요한의 시대에도 로마 정부나 기독교에 우호적이지 또한 사람들에 대한 기독교의 변증이 필요했고 실제로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요한은 이에 대해 과거 예수의 가르침에서 제자됨의 증거가 사랑임을 회상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A.D. 1세기 중반에 바울에 의해서도 '사랑'이 중요한 기독교의 요소로 강조된 것을 보면(고전 13:13) 요한의 시대에도 기독교 공동체의 대외적인 특징은 사랑으로 나타났을 것으로 보인다. '제자'에 대해서는 요 15:7주석 참조.
13:36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 예수께서 십자가를 통해 아버지께로 가신다는 구속사적 진리에 대해서 혼동하는 것은 바리새인들이나(요 7:35; 18:22) 베드로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이처럼 베드로는 아직까지 영적으로 우둔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승 예수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음을 이 구절은 보여 주고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 예수께서 어디론가 떠나신다는 언급에 대해서 33절과 요 7:34,36; 8:21,22 주석을 참조하라.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과 본절의 말씀에 차이가 있다면 본절은 베드로(혹은 제자들)를 대상으로 하여 주어진 말씀으로 그가 지금은 예수를 따를 수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그가 지금은 따를 수 없는 이유는 ① 베드로는 아직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갈 시기가 되지 않았고(요 21:18,19 참조) ② 아직 그에게는 형제의 신앙을 굳게 하고(눅 22:32) 복음을 증거해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Hendrikson), 하지만 본절은 나중에 베드로 역시 예수를 따라갈 수 있을 것임이 암시되어 있다. 만약 베드로가 로마 황제의 기독교 박해의 희생물로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었다는 그의 죽음에 관한 전설이 신빙성 있는 것이라면 그도 역시 십자가의 길을 간다는 사실이(물론 구속적 의미는 전혀 없지만) 본절에 구체적으로 예언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요 21:18,19).
13:37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 사용한 '지금'(뉜)이란 용어(36절) 보다 베드로가 더 강조적인 의미를 지닌 '지금'(아르티)이란 용어를 쓰는 것은 베드로의 헛된 자만심과 더불어 그의 급한 성격을 보여 준다(Robertson). 공관복음은 베드로의 이 교만한 자랑에 대해 다양한 정보를 준다. ① 예수의 예언 이전과 이후에 '두 차례'나 그러한 장담을 하고 있다(마 26:33-35; 막 14:29-31). ② 이중 부정(우 메)을 사용하여 자기 결심의 절대성을 강조한다(Hendriksen). 또한 '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라는 표현 역시 아마도 베드로가 예수의 목자의 비유에서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1,15)는 말씀을 흉내 내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는 이러한 충성이 스승에 대한 참 제자의 도리라고 생각했던 것이 분명하다(Robertson, Bemard). 하지만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보다(마 26:35) 더 예수에게 충성할 것이라고 다짐을 하지만 신앙이 뒷받침되지 못하고 인간적 만용에 의해 행해진 이러한 맹세는 결실을 맺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그는 오히려 다른 제자들보다 더 주님을 부인하고 배반하는 잘못을 범하고 말았다(38절). '베드로'에 대해서는 벧전 2장 연구 자료를 참조하라.
13:3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라고 예수께서 베드로가 사용한 단어들을 그대로 사용해 반문하신 것을 전적으로 요한적인 문체(Johannine style)의 특징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요 16:16,17; 16:30,31, Bernard), 본절에서 예수의 반문은 독특한 의미를 지닌다. 즉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사용한 표현을 즉시 되받음으로써 베드로의 과장된 충성이 인간적인 만용에서 비롯된 것임을 지적하고 아울러 그의 연약한 인간성을 포기하도록 종용하는 것이기도 하다(Brown). 따라서 만약 이때 베드로가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도우심을 구했다면 예수를 부인하는 비참함 가운데 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편 예언의 확실성을 보증하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에 대해서는 요 1:51 주석을 참조하며,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말씀은 눅 22:34과 거의 유사한 바 그 부분의 주석을 참조하라. 이 예언은 본서에서 그대로 성취되고 있다(요 18:17,25-27). '베드로의 부인 사건'에 대해서는 눅 22장 자료 노트를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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