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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0장 마게도냐 및 헬라 사역과 고린도에서 드로아로의 귀환 여정과 드로아 사역 및 드로아에서 밀레도까지의 여정과 밀레도에서의 바울의 고별 설교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넓게는 13:1-21:16까지 이어지는 바울을 중심으로 한 전 3차의 이방전도 여행 일련기사의 연속 부분이다. 그리고 좁게는 18:23-21:16까지 이어지는 제 3차 전도 여행(A.D. 53-57년) 기사의 연속 부분이다. 이 바울의 전 3회에 걸친 전도 여행 기사는 과거 철저한 유대주의자로서 열렬히 예수의 복음을 탄압하던 바울을 회심시키시고 바로 그를 이제는 정반대로 순교(殉敎)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것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게 하신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를 보여 준다. 또한 이제 사도 바울의 그야말로 생명을 던진 철저한 헌신으로 주 예수께서 숭천하시면서 명령(commision)과 동시에 약속(promise)으로 남기셨던 말씀 곧 성령이 강림한 후에는 성령의 주도로 주의 사도들이 땅 끝까지 이르러 주의 말씀을 증언함으로 복음이 세계 만민에게 전달되리라던 말씀(행 1'8)이 분명히 그리고 강력하게 성취되어 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이런 문맥하의 본장은 크게 3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3절은 에베소를 떠난 후 바울이 이전에 제 2차 전도 여행 때 방문하여 교회를 설립하였던 지역인 마게도냐와 켈라 지역의 기존 교회를 재방문하여 그 지역 교회의 터전을 새삼 공고히 하는 사역을 감당하였음을 보도한다. 4-12절은 이제 바울이 귀환 길에 을라서 고린도에서 일단 드로아까지 도달한 여정과 귀환 여정의 중간 기착지인 드로아에서 약 일주일간 머무는 사이에 발생한 가장 큰 사건이었던 청년 유두고(Eutychus)의 소생(蘇生) 이적이 소개된다. 마지막 13-38절은 드로아를 떠난 바울이 귀환 여정의 또다른 기착지인 밀레도에서 성령을 통하여 자신의 이번 여정이 마지막 선교 여행임을 깨닫고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밀레도로 불러서 일종의 고별 설교를 행하고 다시 길을 떠났음을 보도하고 있다.
전반부 1-3절의 기사는 아직 교회(敎會)의 기틀이 공고하지 못해서 넓은 지역에 뿌려진 교회의 씨앗들인 가정 또는 소그룹 형태의 지역 교회들을 사도와 여러 사역자들이 순회하며 목회해야 했던 초대 교회의 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다. 특히 본단락에 언급된 기 간 동안 바울은 고린도후서와 로마서까지 작성하였었다. 그리하여 본단락을 초대 교회의 생생한 역사 전체의 맥락에서 고찰할 때 본문의 짧은 사실 보도성 기사는 우리에게 유대주의자들의 핍박을 받아가며 세계 각처를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던 바울의 끝없는 전도자로서의 노고와 열정을 강력히 암시하고 있다 하겠다. 그리하여 이런 본문은 결국 우리에게 바울과 같은 믿음의 선진들의 피어린 노고로 복음을 물려받은 우리도 이제 주의 구속의 복음을 죄에 빠져 신음하는 영혼들에게 그 어떤 상황에 처해서라도 전해야 한다는 구속사적 의무를 일깨워 주고 있다.
중반부 4-12절의 귀환길에 오른 바울의 고린도에서 드로아까지의 여정 기록과 일주일간의 드로아 체류 기사는 우리에게 두 가지 의미의 구속사적 교훈을 전해준다. 첫째, 저자 누가가 바울이 귀환한 경로와 그 동역자들까지 정확히 묘사한 사실이 중명하듯이 바울의 행적 나아가 성경의 모든 기록은 다 역사적 실제 사실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본문에 보도된 유두고의 소생 이적도 전혀 가감없는 역사적 실제 사건이며 또한 이런 실제 사건들에 근거하여 주신 천국 구원의 약속도 역사적으로 실현될 것임을 이런 기사는 강력히 암시하고 있다. 한마디로 바울의 여정에 대한 사실 보도, 기사는 복음좌 진리가 단순한 도덕적 또는 신학적 허구가 아니라 창조에서 종말까지 이어지는 실제 역사에 근거한 것이라는 또 그래서 거기 기록된 모든 말씀도 분명히 실현될 것이라는 곧 진정한 존재론적 기반을 확고히 가진 참 진리임을 보여 줄다. 둘째로 이 기간 중에 일어난 가장 큰 사건인 유두고의 소생 이적은 구속사적으로는 죄에 휩싸인 인생이 주 안에서 주의 은혜로 아무 공로 없이 구원 얻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먼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강론(講論)을 듣다가 졸음에 빠진 나머지 난간에서 떨어져 죽은 유두고의 모습은 실로 구원에 관한한 전적 타락과 전적 무능력에 빠져 스스로는 도저히 구원 얻을 길이 없는 유약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 준다. 그러나 성령애 의지한 바울의 능력으로 소생하혀 자신은 물른 만인에게도 기쁨과 위로를 전해준 유두고의 모습은 주안에서 간언는 구원을 얻어 부활의 은해에 동참한 성도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후반부 13-38절은 드로아에서 밀래도까지의 여정과 밀레도에서 바울이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행한 고별설교를 기록하고 있다. 이는 이제 다음 장에서 볼 수 있듯이 이제 곧 그가 애루살렘에서 채포되어 로마로 압송될 것이라는 그 자세한 세부 내용까지는 모르지만 성령으로부터 이번의 그의 여정이 마지막 선교 여행이며 추후로는 복음을 위하여 연속적으로 환난을 당할 것을 예고받은 상황에서 주어진 것이었다. 이런 본문의 기사에서 우리는 그 여정과 고별 설교의 진행 과정은 차치(且置)하고 지금까지도 목숨을 내걸고 사역하였지만 이제는 본격적으로 환난을 예고받은 대사도 바울이 남긴 고별 설교 내용 자체의 구속사적 의의에 집중하기로 한다. 실로 이는 그 당시의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꽐만 아니라 오고 오는 세대의 모든 후진 성도들에게 남기는 일종의 신앙 유언일 수도 있는 바 그 구속사적 의의는 지대하다 하겠다.
무엇보다 먼저 바울은 그의 고별 설교에서 자신은 그동안 다른 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주의 구속의 복음을 전하는 것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았음을 강조하고 있다(21,24-25,27절). 이는 결국 오고 오는 시대의 성도도 결국 하나님의 나라와 주의 복음을 유일 절대의 신앙의 기준과 지표로 삼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구속사의 기준과 근거를 먼저 강력히 제시한 것이다. 실로 주의 구속의 복음만이 우리의 유일한 신앙의 근거이며 이로 인해 성도는 정체성(正體性)과 동일성을 갖는 것이다.
둘째, 바울은 이재 고별 설교를 남기면서 자신은 지금까지 실로 모든 세속의 유익과 안일(安逸)을 포기하고 헌신과 눈물과 정열로 일하였음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19,24,31,33-35절). 이는 자신의 공적을 내세우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는 사역자로서의 바른 자세의 실례와 모범을 보임으로써 먼저는 주의 종으로서의 바른 자세를 제시함으로써 모든 성도들에게도 주의 복음에 대한 확신안에서 바른 삶의 자세를 갖도록 격려 내지는 촉구하기 위해서었다(딤전 6:11-16). 즉 하나님의 구속사에 동참한 자의 바른 삶에 대한 교훈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이 시간 동일한 하나님의 구속의 은해를 얻어 천국을 사모하는 나는 바을 사도와 같은 삶의 모습을 갖고 있는가?
셋째, 사도 바울은 이제 자신의 지도와 도움없이 교회를 꾸려 나가야 될 장로들에게 먼저 자신을 삼가고 곧 절제하고 근신(謹愼)하면서 교회를 향한 핍박과 이단의 도전으로부터 교회를 보존시킬 것을 지시하고 있다(28-30절). 실로 하나님을 거스려 스스로 반역 하고 나중에 뭇 천사와 사람까지 타락시킨 사탄(Satan)이 공종 권세 잡은 현재의 이 세상(엡 2:2)에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얻으려는 자에게는 폅박과 유흑이 필연적으로 야기될 수밖에 얼다. 이에 오고 오는 세대의 성도들도 먼저 자신을 삼가고 나아가 교회의 수호자도 되어야 할 것이다.
끝으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확신 안에서 주와 주의 교회를 위하여 애쓰는 자에게 영원한 기업이 있을 것을 보증하고 있다(32절). 그렇다. 우리는 인간이 만든 이념(Ideology)이나 한 시대의 도덕(Morality)을 믿거나 아니면 거짓 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전우주를 창조하시고 지금도 섭리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따라서 삼위 일체 하나님을 믿는 성도의 신앙은 필히 천국에서 전인격의 존재른적 구원으로 열매맺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태초부터 종말까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모든 택한 자의 구원을 위하여 진행시키는 구속의 역사 곧 구속사를 깨닫고 믿는 사람들 곧 성도 모두에게 그리고 성도에게만 보장되는 구속사적 희망이다.
한편 바울이 이미 제 3차 전도 여행의 귀환 도중에 이제 곧 자신이 체포될 사실 또는 큰 환난을 당할 사실을 이처럼 미리 고별 설교까지 행할 정도로 분명히 알고서도 이를 피하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사실이 갖는 의의에 대해서는 다음 제 21장의 개관을 보라.
외울 말씀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바울의 마게도냐 및 헬라 사역
1 소요가 그치매 바울이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
2 그 지경으로 다녀가며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헬라에 이르러
3 거기 석 달을 있다가 배 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할 그 때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므로 마게도냐로 다녀 돌아가기를 작정하니
고린도에서 드러아로의 귀환 여정
4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5 그들은 먼저 가서 드로아에서 우리를 기다리더라
6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
바울의 드로아 사역
7 ○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8 우리의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9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았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층누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 보니 죽었는지라
10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 하고
11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12 사람들이 살아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더라
드로아에서 밀레도까지의 귀환 여정
13 ○ 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 행선하니 이는 자기가 도보로 가고자 하여 이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
14 바울이 앗소에서 우리를 만나니 우리가 배에 올리고 미둘레네에 가서
15 거기서 떠나 이튿날 기오 앞에 오고 그 이튿날 사모에 들리고 또 그 다음 날 밀레도에 이르니라
16 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치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지나 행선하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
밀레도에서의 바울의 고별 설교
17 ○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18 오매 저희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바니
19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20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21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22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25 보라 내가 너희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지금은 너희가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26 그러므로 오늘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27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
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29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30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31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32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33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34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35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에베소 장로들의 전송
36 ○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저희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하니
37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38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을 인하여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본문 & 자료노트
인물연구-20:1, 바울
롬 1장 연구자료 참조
도표-20:8 히브리인의 절기
신 서른 특별자료 참조
역사 배경-20:1-6 사도행전과 서신서의 배경으로서의 초대 교회의 구속사적 상황
본권 서신서 개론 참조
도표-20:1-6 본문에 기록된 이방 교회의 대표자들(출신, 특징, 교회)
1. 소바더(베뢰아); 부로의 아들이며 바울의 친척인 소바더인지는 확실치 않음(20:4) (마게도냐 교회)
2. 아리스다고(데살로니가): 가이오와 같이 바울의 전도 여행에 동행함(19:29; 27:2) (마게도냐 교회)
3. 세군도(데살로니가): 바울을 따라 아시아에까지 동행함(20:4) (마게도냐 교회)
4. 가이오(더베): 바울과 함께 아시아에 간 사람들 중의 하나(20:4)(갈라디아 교회)
5. 디모데(루스드라): 외조모와 어머니의 신실한 신앙을 물려받음(16:1-3; 17:4)
(갈라디아 교회)
6. 두기고(아시아): 바울의 신임받언 조력자,, 로마 옥중에서도 함께함(엡 6:21,22)
(소아시아 교회)
7. 드로비모(에베소): 바울과 같이 예루살렘 성전에 갔다가 성전 모독죄의 누명씀(21:29) (소아시아 교회)
보감-20:22-35 본문에서 본 교회 지도자의 생활 수칙 10가지
1.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고 오늘 일에 충실할 것(22절)
2. 고난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 것(23절)
3. 맡겨진 사명 완수 위해 최선을 다할 것(24절)
4. 모든 사람 앞애 거리낌이 없을 것(26,27절)
5. 자기를 위하여 양떼를 위하여 항상 삼갈 것(28절)
6. 주의 교훈을 명심하여 양들에 대한 사단의 유혹에 대비할 것(29-32절)
7. 금은이나 물질을 탐하지 말 것(33절)
8. 할 수 있는 한 스스로 수고하여 필요한 것을 구할 것(34,35절)
9. 스스로 수고하여 얻은 것으로 항상 약한 자를 도울 것(35절)
10. 범사에 양들얘게 본을 보일 것(35절)
보감-20:17-35 바울 신앙의 특징
1. 늘 성령의 인도에 순종(행 16:6-8)
2. 겸손하게 주를 섬김(행 20:19)
3. 시험을 참으며 주를 섬김(행 20:19)
4. 유익한 것은 모두 전함(행 20:20)
5. 복음 전파 사명에 투철함(행 20:24)
6. 믿음을 끝까지 지킴(행 20:27)
7. 눈물로 성도를 훈계함(행 20:31)
8. 복음 위해 순교도 각오(행 21:13)
9. 항상 다른 성도를 위해 기도(롬 1:9)
10. 자신의 불완전을 인정(롬 7:21-25)
11. 남 위해 자신을 낮춤(고전 4:6-13)
12. 성도의 본이 됨(고전 7:1-7)
13. 사람보다 하나님을 기쁘게 함(갈 1:17)
14. 성도들을 목숨보다 더 사랑(살전 2:8)
15. 남에게 누를 끼치지 않음(살후 3:8)
보감-20:21 바울 설교의 6대 주요 주제
1.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죄사함과 의(13:38,39)
2.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17:3; 26:33)
3. 우상숭배자들에 대한 마지막 날의 심판(17:16-31)
4. 예수의 신성과 구주성(18:5,28)
5. 하나님의 나라(19:8; 28:23)
6.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20:21)
원어연구-20:27 꺼리지 않다
본문에서 '꺼리다'에 해당하는 '휘페스테일라멘'은 '휘포스텔로'의 중간태이다. '휘포스텔로'는 '휘포'와 '스텔로'의 합성어이다.
접두어 '휘포'는 '아래'를 뜻한다. 그리고 '스텔로'는 일차적으로 '놓다' 또는 '두다'라는 의미인데, 중간태로 쓰이면 '줄이다' 또는 '저지하다', '움츠리다'라는 의미가 된다. 그러므로 '휘포스텔로'는 능동태로 '․․․ 아래에 놓다'라는 의미이지만, 본문과 같이 중간태로 쓰일 때는 '자신을 움츠리다' 또는 '스스로 위축되다'는 뜻이 된다.
이 단어는 특히 겁많음으로 인해 자기들이 믿는 바를 공언하기를 두려워하는 자들에 대해 쓰인다. 이로 볼 때 '휘포스텔로'는 의도적으로 '싫어하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두려워서 스스로 숨기다', 혹은 '선포하기를 두려워하다'는 뜻으로 그 의미가 확장되어짐을 알 수 있다.
한편 본문에서는 이 단어가 부정어 '우'와 함께 쓰여, 바울이 어떤 환난과 위혐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담대하게 전하였음을 뜻한다. 그에게는 복음 중거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생명까지도 전혀 귀히 여기지 않는 각오가 있었으므로(24절), 어떤 경우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히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것이다. 우리들도 이와 같이 어떤 경우에든지 주저함 없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하는 증인이 되어야 하겠다.
지리배경-20:15-38 밀레도(Miletus)
본문에는 오순절 전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위해 소아시아 서안의 몇 개 성들을 방문한 뒤 지체하지 않고 밀레도에 도착한 바울 일행의 기사가 나온다. 여기서 바울은 바쁜 여정으로 방문 하지 못한 에베소 교회를 위해 대신 에베소 장로들을 초청하여 고별 설교를 행했다.
이러한 본문의 상황 이해를 위해 이제 바울이 방문할 당시의 밀레도의 지리적 배경 등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1. 위처와 지리적 배경
밀레도(Miletus)는 소아시아 서쪽 해안에 있는 아름다운 그리이스의 항구 도시로서. 메안데르(Maeander) 강 어귀의 남쪽 편에 위치했었다. 또한 라트미안 만(灣)의 남쪽 해안에서 돌출한 갑(岬)에 자리잡고 있어 밀레도는 천연 항구로서 그리이스 시대 이전 고대에서부터 지중해 연안을 항해하는 배들의 안전한 정박지로서 유명했으며 때문에 해상 무역이 활발했다.
그런데 메안데르 강에서 흘러나오는 퇴적물로 인하여 네 개의 항만을 갖춘 중요한 항구 도시 밀레도의 지형적 위치가 점차로 변하게 되었다. 그래서 후기 로마시대에는 정박에 큰 불편을 겪게 되었는데, 오늘날 이 도시의 유적은 해안으로부터 8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해 있다.
2. 역사적 배경
밀레도는 B.C. 6세기에 이미 헬라 예술과 철학의 중심지가 되었고. B.C. 7C에 이르러서는 가장 중요한 조선기지(操船基地)로 부상했다. 이 때에 밀레도 사람들은 흑해 와 애굽까지 나아가 무역 식민지들을 세웠다. 또한 밀레도는 주화(籍貨)를 주조한 최초의 도시였으며, 오늘날 유적으로 남아 있는 이 도시에서 가장 이름난 조상(彫像)과 아폴로 신전 및 많은 건축물들은 그 시대의 번영을 보여 준다.
그러다가 이오니아인들의 페르시아 반란에 이 도시가 함께 가담함으로써 B.C. 494년 페르시아인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러나 곧 재건되었고, 로마 시대 동안에는 계속해서 중요한 상업 중심지가 되었다.
3. 관련 성경 기사
본문에 기록된 바 바울이 밀레도를 방문할 당시의 이곳은 레스보스(Lesbos), 키오스(Chios) 및 사모스(Samos)에서 남쪽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정박지였다. 그리고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이곳으로 불러도 될 만큼 이곳은 에베소와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한편 그 이후에도 바울 일행은 또 한번 밀레도를 방문하였다(딤후 4:20).
보감-20:19-35 사도 바울의 15대 성품
1. 담대함(행 9:29; 엡 6:20)
2. 역경 중에서도 즐거워 함(행 16:25)
3. 겸손함(행 20:19)
4. 결단력이 있음(행 20:22-24)
5. 사랑이 많음(행 20:31)
6. 탐심 없고 부지런함(행 20:33-35)
7. 환난 중에서도 꿋꿋함(롬 8:35-37)
8. 열정적임(롬 9:3; 고후 5:11-14)
9. 헌신적임(고전 4:9-13; 10:33)
10. 융통성 있음(고전 9:19-22)
11. 정직함(고후 1:12; 6:3)
12. 침착함(고후 12:8,9; 딤후 4:7,8)
13. 사려 깊음(빌 2:25; 몬 1:8-14)
14. 자존심이 강함(살전 2:9)
15. 온유함(딤후 4:16)
지도-20:1-38 전 3차에 걸친 바울의 전도 여행과 로마 여행
행 13장 연구자료 참조
주요주제-20:35 성경적 복의 개념
신 28장 자료노트 참조
20:1-3 마게도냐와 헬라 지방에서의 전도 사역
3년 간에 걸친 에베소사역에 관한 언급은 지난 장(행 19장)으로 끝이 나고 이제 본문에서는 바울이 드로아에서 마게도냐를 거쳐 헬라 지경으로 갔다가 다시 마게도냐를 돌아 드로아에 이르기까지의 10개월 간의 전도 여행을 압축하여 소개하고 있다. 이 기간 동안 바울은 실로 많은 일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가 이처럼 간략하게 압축하여 언급하는 것은 이 여행의 경로가 2차 전도 여행의 경로와 일치했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이 기간 동안의 바울의 여정을 다른 곳에 나타나는 행적을 참고로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에베소를 떠난 바울은 여행 도중에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하나는 고린도 교회로부터 들려오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예루살렘 교회에 보낼 구제 헌금을 모금하는 일이었다(롬 15:25-27; 고전 16:1-4; 고후 8:1-9).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기록하여 디도로 하여금 고린도를 방문케 하고 드로아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한다. 이렇게 하여 바울은 드로아에 도착했으나 디도를 만나지 못한 까닭에 드로아에 복음의 문이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부득불 마게도냐로 가게 된다. 그리고 그곳 빌릴보에서 고린도 교회의 소식을 가져온 디도를 만나(고후 7:5-17) 고린도후서를 기록, 디도로 하여금 재차 고린도를 방문케 하고(고후 8:6-17), 그는 마게도냐의 일루리곤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전한 후(롬 15:19)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게 된다(2절). 이때는 이미 고린도 교회의 문제가 깨끗하게 해결된 뒤였다. 이에 바울은 기쁜 마음으로 그곳에서 3개월을 체류하며 복음을 증거함은 물론 기독교 교리의 핵심을 담고 있는 로마서를 기록하기도 한다(롬 16:23). 그후 바울은 겐그레아에서 배를 타고 수리아로 귀환하려 했다. 그러나 바울은 그를 살해하려는 유대인들의 음모를 알고 다시 왔던 길을 돌이켜 마게도냐를 거쳐 드로아로 돌아오게 된다(3-6절). 물론 이때는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 모은 구제 헌금을 전달할 일곱 명의 각 교회 대표자들도 함께 동행했다. 이상의 사실에서 보듯 바울은 에베소클 떠날 때 실로 괴로운 심정을 억누를 수 없었으나 이후 매우 놀라운 성과를 거두고 기쁨과 평안을 얻음은 물론 많은 동역자들의 도움을 받았다. 그와 같이 하나님은 낙심한 성도를 결코 그냥 버려두시지 않으시며 언제나 새로운 능력과 위로를 주신다(요 14:18; 16:33; 고후 1:3,4). 이외에 우리는 바울의 사역의 모습에서 귀중한 사실 한 가지를 교훈받게 되는 바 그것은 양떼들을 끝까지 돌보며 바른 길로 인도하려는 그의 목회 정신이다. 즉 그는 어느 곳에 있든지 그가 세운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노심초사 그들의 신앙이 성숙되기를 위해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다. 그와 같이 목회자나 성도들은 자기에게 맡겨진 한 영혼 한 영혼이 하나님 앞에 충성된 일꾼으로 자라나기까지 그들의 신앙의 발전을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경주해야만 하는 것이다.
20:1 소요가 그치매. - 여기서 '소요'란 에베소에서 일어난 은장색 데메드리오 사건을 말한다(행 19:23-41), 즉 이 소동은 바울의 전도 사역으로 인해 자신의 수입이 줄어든 데메드리오가 불만을 품고 사람들을 선동하여 바울 일행을 대적하려 했던 것을 가리킨다. 이제 이 소동이 그치자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게 된다. 그러나 바울이 이처럼 에베소를 떠나게 된 것에 대하여 자신의 신변의 안전을 위해서 서둘러 도망간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바울은 복음 전파를 위해서라면 죽기를 각오했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다만 이 소동을 계기로 이미 마게도냐로 떠나고자 계획했던 바(행 19:21,22)를 이제 실행에 옮긴 것이다.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 여기서 '권하다'(파라칼레오)는 말은 본래 '곁에 불러 놓고 얘기하다'는 뜻으로 '권면하다', '위로하다', '격려하다'는 뜻이다. 즉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면서 남아 있는 제자들에게 믿음 위에 굳게 서 있기를 바라는 권면을 잊지 않고 있는 것이다.
작별하고. - 이에 해당하는 '아스파조마이'는 '문안하다', '평안을 빌다', '환영하다' 등의 뜻으로 쓰이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포옹하며 입맞춤을 하는 가운데 석별의 정을 나누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당시 관례적인 인사법으로서(고후 13:12; 살전 5:26; 벧전 5:17) 바울은 제자들에게 권면의 말을 마친 후 그들 모두와 일일이 다 이와 같은 인사를 나눈 것이다.
마게도냐로 가니라. - 고후 2:12,13에 의하면 바울은 마게도냐로 가기 전에 드로아를 경유해서 디도를 만나려고 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곳에서 디도를 만나지 못하였다. 그후 바울은 마게도냐에서 고린도로부터 돌아온 디도를 만나 자신의 에베소에서 쓴 편지(고린도전서)를 고린도 교회가 받아들이고 바른 길로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위로를 받게 되었다(고후 7:5-7). 이때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하며 복음의 진리에 관해 기록한 편지를 다시 고린도 교회에 보내게 되는데 이것이 고린도후서이다.
20:2 그 지경으로 다녀가며. - 바울이 에베소에서 고린도에 이른 경로는 아마도 2차 진도 여행시에 이미 경유한 노정이었을 것이다. 즉 바울은 이 마티우스 대로(the Egnatian Road)를 따라 빌립보(행 16:12), 데살로니가(행 17:1), 베뢰아(행 17:10)를 경유하여 고린도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리고 이 여행에는 A.D. 56년 여름부터 57년 하반기까지 약 1년 남짓한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한편 롬 15:19에서 바울은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학자들은 바울이 일루리곤(Illyricum)까지 진도 여행한 때를 바로 이 3차 전도 여행 기간 중으로 본다(Bruce, Longeneker, Toussaint), 일루리곤은 발칸반도 북서쪽에 위치한 지방으로 남쪽으로는 마게도냐 지방, 북쪽으로는 판노니아 지방, 그리고 동쪽으로는 모에시아 지방, 서쪽으로는 아드리아 해로 둘러싸여 있다.
헬라. - 아가야(Achaia) 지방(행 18:12 주석 참조)을 가리키는 헬라명이다. 혹자는 본문의 '헬라'를 마게도냐와 펠로폰네소스 사이에 있는 지방, 특히 앗디가 지방으로 보아 바울이 다시 그곳의 중심지인 아덴(행 17:15,16)을 방문하였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Bengel). 그렇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를 부정한다.
20:3 석 달을 있다가. - 바울이 머물렀던 곳은 아가야 지방의 수도라 할 수 있는 고린도였다. 바울은 이곳 가이오의 집에서 머물며 A.D. 56-57년에 걸친 3개월 동안의 겨울을 따뜻한 대접을 받으면서(롬 16:23) 복음을 전파했다(Bruce).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로마의 기독교인들에게 자신의 방문 계획을 알리며 또한 기독교 신앙의 기본 교리를 체계적으로 설명해 주는 서신을 썼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로마서이다.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므로. - 고린도에서 석 달을 보낸 바울은 이미 계획했던 대로(행 19:21) 이곳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겐그레아로 내려가 유월절을 예루살렘에서 보내기를 원하는 순례자들이 타고 가는 배를 타려고 했었던 것으로 보인다(Ramsay). 행 18:18 주석 참조. 그러나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었으니 이를 눈치챈 바울은 부득불 계획을 변경하여 육로를 통해 또다시 마게도냐(1절)로 향하고자 작정하였다. 일전에 유대인들은 갈리오 총독 때문에 바울 제거에 실패하였다(행 18:12-17). 그래서 저들은 이번에는 그같은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고자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배에 탔을 때를 이용하여 그를 암살하거나 배 밖으로 던져 버릴 계획을 세웠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바울이 이를 눈치채고 육로를 택함으로 이들의 계획은 다시 실패하게 되고만 것이다.
돌아가기를 작정하니. - 원래 바울의 계획은 유월절을 예루살렘에서 보내려는 것이었던 것 같다.
20:4-6 헬라 지방에서 드로아까지의 귀환 여정
지난 단락에서 바울의 3지 전도 여행 가운데 에베소에서 고린도까지의 전진 여정을 살펴보았다. 이어 부분에서부터는 바울의 예루살렘으로의 귀환 여정을 보여 주고 있는데 가운데 본문은 고린도에서 드로아까지의 귀한 여정을 보여주고 있다. 바울은 본래 고린도에서 배를 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했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를 해하려는 유대인들의 음모가 있자 모두 예배소에서 고린도에 올 때 왔던 길로 돌이켜 다시 마게도냐 지방을 거쳐 드로아로 가게 된다. 이때 디모데를 비롯한 몇 사람이 마음과 함께 동행하게 되는데 그들은 마케도니의 헬라 지방의 교회에서 거둔 구제 헌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할 자들이었다(4절 추석 참조). 바울은 이들을 드로아로 먼저 보내고 자신은 빌립보에서 유월절을 보낸 후 배로 항해하여 닷새 후에 드로아에 이르러 그곳에서 앞서 보낸 헌금 전달자들과 합류하고 일주일을 그곳에서 체류하게 된다(5,6절).
20:4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 이처럼 '아시아까지 함께 갔다'는 말이 예루살렘까지 동행한 것을 의미하는지 아닌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본절에 언급된 자들이 바울의 이번 3차 전도여행시 이방 각 교회들로부터 모은 헌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할 대표자들로서 예루살렘까지 바울과 동행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Bruce, Hervey, Longeneker, Toussaint). 행 19:21 주석 참조.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 - 아리스다고, 세군도와 더불어 마게도냐 교회를 대표한 자이다. 혹자는 롬 16:21에 나타난 바울의 친척 소시바더와 동일인으로 여기기도 하는데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아리스다고. - 의심의 여지없이 행 19:29의 인물과 동일인이다. 그는 후에 바울과 함께 로마까지 동행하였다(행 27:2).
세군도. - 아리스다고와 함께 데살로니가 출신이다. 그의 이름은 여기서만 나타나고 있다.
가이오. - 디모데와 더불어 갈라디아 교회를 대표한 자이다. 한편 그의 출신지인 더베는 루스드라의 인근이다. 그러므로 그는 디모데의 친구였을 가능성이 크다.
디모데. - 루스드라 출신으로 가이오와 함께 갈라디아 교회를 대표한 자이다. 바울은 그를 영적 아들이라고까지 할 정도로 신임하였다(고전 4:17). 디모데에 대해서는 딤후 1장 연구자료를 보다 참조하라.
두기고. - 다음에 나오는 드로비모와 더불어 소아시아 지방의 교회를 대표한 자이다. 바울의 신실한 조력자로서 그는 바울이 로마 옥중에 갇혀 있는 동안 에베소와 골로새 교회에 바울의 서신을 전달하였다(엡 6:21; 골 4:7).
드로비모. - 에베소 출신이다(행 21:29). 딤후 4:20 등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바울과 함께 계속적으로 선교 활동을 수행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여기에는 고린도 교회의 대표자가 나타나 있지 않은데, 이에 대해서는 고린도 교회에서 잘 알려진 인물이었던 디모데일 것이라는 견해가 있으나(고후 1:1; Lenski) 그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고후 8:6 이하에서 보여지듯이 고린도 교회의 헌금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디도와 다른 두 형제에게 맡겨져서 보내졌을 것으로 추측한다. 왜냐하면 본절에는 디도가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디도가 누가의 형제였다는 람세이(Ramsay)의 주장과 더불어 5절에 다시 나타나는 '우리'라는 호칭 안에 누가와 디도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누가는 고린도 교회의 헌금을 수령하기 위해 파견된 다른 두 형제 중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Bruce).
20:5 그들은 먼저 가서, - '그들이란' 전절에 언급된 일곱 사람을 가리킨다(Alford, Bruce). 이들은 모두 바울과 함께 육로로 베뢰아와 데살로니가를 경유하여 빌립보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여기서 이들은 바울을 남겨둔 채 빌립보를 떠나 네압볼리를 경유하여 드로아로 갔다. 이처럼 이들이 무엇 때문에 바울을 남겨둔 채드로아로 먼저 갔는지 그 이유가 뚜렷하지 않다. 다만 6절로 미루어 볼 때 바울은 빌립보에서 누가와 합류해서 유월절을 지키고자 한 것 같다. 그리하여 바울은 일행을 먼저 보낸 후 자신은 빌립보에 남았던 것 같다(Hervey).
우리를 기다리더라. - 행 16장에서 언급된 후 나타나지않던 '우리'라는 호칭이 본절에서 다시 나타나고 있다(행 16:10). 여기서 '우리가'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란 '바울 일행'을 가리키며 이에는 누가가 포함되어있다는 것은 틀림없다. 행 16:10 주석 참조.
20:6 무교절 후에. - 바울은 본래 예루살렘에서 유월절 절기를 지키려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뜻하지 않은 방해로 인해 그 계획이 무산되자 빌립보에서 이 절기를 지키게 된 것이다. 3절 주석 참조. 한편 '무교절'은 '유월절'을 함축하는 말이다. 무교절은 넓은 의미에서 유대 종교력 1월 14일부터 21일까지 지키는 절기이며, 유월절은 그중 14일 저녁 하루를 가리킨다. 이 유월절 때 잡는 희생 양은 인류를 위한 대속(代贖)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었다(출 12:1-14). 따라서 바울은 그같은 예수를 회상하는 가운데 거룩한 마음으로 무교절 한 주간을 보냈을 것이다. 유월절과 무교절에 대해서는 본서 신명기 서론 특별자료, '히브리인의 절기'를 보다 참조하라.
드로아에.…이레를 머무니라. - 바울 일행은 빌립보를 떠나 5일 만에 소아시아의 서부 지역에 위치한 중요한 항구인 드로아(Troas)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일찍이 바울이 마게도냐인의 환상을 본 곳이며(행 16:8,9), 또한 복음 전파의 문이 열렸지만 디도를 만나지 못함으로 인해 복음 증거를 중단한 곳이기도 하다(고후 2:12,13). 바울 일행은 이러한 드로아에서 이미 그곳에 먼저 도착해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던 이방 교회의 대표들(4절)과 합류하게 되었 한편 일전에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중 드로아에서 빌립보의 외항 네압볼리까지 항해하는 데에는 이틀이 소요되었다(행 16:11). 이에 반해 이번에는 빌립보에서 드로아까지 오는 데 5일이나 걸렸다는 것은 그가 탄 배가 역풍을 만나 항해가 순조롭지 못하였음을 추측할 수 있게 해준다(Hervey).
20:7-12 드로아에서의 유두고 소생 사건
지난 단락에서는 바울이 고린도 사격을 마치고 1곳에서 배를 타고 수리아로 곧바로 귀환하려 했으나 그를 해하려는 유대인들의 음모로 부득불 왔던 길로 돌아 다시 마게도냐 지방을 거쳐 드로아에까지 이르른 귀환 여정을 살펴보았다(46절). 이어 본분은 바울이 로마에서 머물 때 발생한 사건인 유두교의 죽음과 소개 사건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앞서 살펴보았거니와 바울은 로마에서 복음을 전한 바가 없다(고후 2:12,13). 그러나 복음은 아시아 전역에 급속히 확산되어 바울이 드로아에 도착했을 때는 그곳에도 신자들이 있었다. 이에 바울은 드로아에 머무는 일주일 동안 열심히 말씀을 강론했고, 떠나기 전날인 주일에는 신사들과 떡을 떼며 밤이 늦도록 강론했다(7절). 그런데 이날 밤에 뜻하지 아니한 사건이 발생했다. 즉 신자 중에 유두고라는 청년이 바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모인 많은 사람들로 인해 환기를 위해 열어 놓은 창문에 걸터 앉아 졸다가 추락사를 한 것이다(8,9절). 유두고의 졸음의 원인이 어디에 있든지 이는 분명 드로아에서 복음의 열기를 식히려는 사단의 집요한 간계의 결과로, 실로 유두고의 죽음은 드로아 교회에 큰 시련을 가져다 줄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바울이 성령의 능력으로 유두고를 다시 소생시킴으로 드로아 교회 성도들은 이 사건을 통해 오히려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큰 위로와 기쁨을 얻게 된다(10-12절). 즉 드로아 교회를 와해시키려는 사단의 간계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드로아 교회가 더욱 강성해질 수 있는 계기만 제공한 것이다. 특히 유두고의 소생을 경험한 드로아 교회 성도들은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부활과 영생의 소망을 가지게 됨으로 능히 인내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모든 악한 자들의 간계까지도 그의 선한 계획을 성취하는 방편으로 사용하신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바라보며 낙심하지 않고 승리하는 삶을 살자(잠 14:32; 히 6:18,19; 벧전 1:3).
20:7 안식 후 첫날. - 현재의 주일을 가리킨다. 성경에서 이날은 '매주일 첫날'(고전 16:2), 또는 '주의 날'(계 1:10)로도 불리운다. 그런데 본절은 초대 교회 성도들이 유대교도들과 달리 안식일이 아닌 주일에 예배드리려고 모였다는 확실한 증거이자 최초의 언급 구절이라는 의의를 지닌다(Longeneker). 그리스도의 부활 뿐 아니라(요 20:1-18) 성령 강림(행 2:1-4) 이 안식후 첫날에 일어났으므로 성도들이 이날을 거룩히 구별하고 기념하여 새롭게 하나님께 대한 예배일로 지킨 것은 자연스러운 변화이다. 따라서 이 날은 사도 시대 이래 그리스도인들의 규칙적인 예배일이 되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안식일이 아닌 주일 성수가 점차 공식화 되어진 데 대하여서는 안디옥의 감독 이그나티우스(Ignatius, A.D. 35?-107?)도 '안식일은 이제 성수되지 아니하고 대신 저들은 이제 주의 날에 자신들의 삶을 새롭게 한다.'고 증거하고 있다. 안식일과 주일의 관계에 대해서는 고전 16장 자료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떡을 떼려. - 바울 일행이 주일 날 모임을 갖게 된 목적은 '떡을 떼려'는 데 있었다. 이것은 곧 예수께서 제정하신 성만찬 의식을 거행하는 것을 가리킨다(눅 22:14-20). 그런데 본질에는 딱만 떼있다는 언급이 있을 뿐이지 떡을 뗀 횟수에 대하여신 별다른 언급이 없다. 이로 보아 당시 각 교회는 임의로 성찬식 횟수를 정했거나 예배일로 모일 때 마다 성찬식을 시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본절 이하에 따르면 이러한 주일 모임에 참석한 자들은 비단 바울 일행 뿐 아니라 또다른 성도들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드로아에서 복음을 증거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드로아에도 성도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복음이 그것을 먼저 영접한 사람들에 의해 세계 도처로 속속 확산되고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20:8 윗다락. - 9절에 의하면 드로아에서 성도들이 집회 장소로 사용한 이 집은 3층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여기서 '윗다락'이란 3층 방을 가리키는 것 같다. 한편 행 1:13이나 18:7에서도 볼 수 있듯이 개인 집을 신앙 공동체의 모임을 위해 제공한 것은 당시의 두드러진 미덕(美德)이었다. 즉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도들처럼 특별한 회집 장소인 회당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모이기를 힘썼고 이를 위해 개인적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회집 장소를 제공하는 등 아름다운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등불을 많이 켰는데. - 본절에는 왜 다락방에 등불을 많이 켜 두었는지에 대해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때문에 이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가 다양하다. ① 전체적인 분위기를 엄숙하고 화려하게 하기 위해서이다(Kuinoel). ② 사람들의 시선을 유도하여 예배 중에 잡담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Bengel). ③ 때가 이미 어두워져 있었기 때문에 필요한 만큼의 등불을 밝힌 것이다(Calvin). 이상은 모두가 그럴듯한 이유가 되지만 그중에서도 마지막 것이 가장 타당한 추측이다. 왜냐하면 이날 밤에 달이 떠 있었든지 없었든지 간에 어두워진 이상 어두움을 밝히기 위한 등불이 필요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Knowling). 더욱이 본절을 통하여 누가가 강조하고자 한 것은 이처럼 불이 밝게 켜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유두고(9절)란 젊은이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는 점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20:9 유두고. - 이름의 뜻은 '복되다', '다행하다'이다. 이러한 이름은 당시 헬라 사회의 하층민들 가운데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이름이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유두고는 비천한 지위에 있었던 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여튼 그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일은 실로 복되고 다행한 일이요, 그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큰 은혜를 끼쳤다는 것은 더욱 복되고 다행한 일이라 하겠다(12절).
창에 걸터 앉았다가. - 여기서 '창'은 다락방의 환기를 위해 벽에 뚫어 놓은 작은 창문을 가리킨다. 그런데 거기에까지 사람이 앗다는 것은 다락방에 모인 청중들이 많았음을 시사한다.
깊이 졸더니…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 이는 밀려오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에는 완전히 곯아 떨어진 상태를 나타내주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강론되는 시간에 왜 이러한 일이 생기게 되었으며, 누가는 무슨 목적으로 이 사건을 기록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에 대해 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먼저 유두고가 졸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그가 비천한 출신인 까닭에 하루종일 힘든 노동에 시달린 데다가 바울의 강론은 길어졌으며, 또한 장소는 좁고 방 안은 많은 등불로 인해 산소가 부족하여 그의 졸음을 가중시켰을 것으로 본다(Bruce, Alford). 그러나 누가가 이 사건을 기록한 이유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의견을 약간 달리하는데 어떤 사람은 이를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하여 들으라는 경고의 차원에서 기록했다고 하고(Matthew Henry),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증거하려 한 차원에서 기록했다고 한다(Calvin). 이상의 두 견해 가운데 후자의 견해가 지지를 받는다. 왜냐하면 하루 종일 일한 노동자가 피곤함을 무릎쓰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나아왔다는 것 자체가 믿음 있는 일일 뿐만 아니라 바울이 졸다 잠에 빠진 유두고를 책망했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즉 누가는 유두고의 졸음과 그로 인한 죽음 그리고 다시 살아난 일련의 과정(10-12절)을 기록함으로써 이 사건의 배후에서 모든 것을 조정하시고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실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이 더욱 확산되는 계기를 만드신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해 이 사건을 기록한 것이다.
일으켜 보니 죽었는지라. - 혹자는 유드고가 다시 살아난 사실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유두고가 실제로 죽은 것이 아니라 치명상을 입고 혼절(昏絶)했다가 다시 깨어난 것이라고 주장한다(Ramsay). 그러나 의사인 누가는 전문적인 관찰을 통하여 유두고가 분명히 죽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실제로 3층 다락에서 졸다가 길바닥으로 떨어진 자가 살아 있을 확률은 거의 없다.
20:10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 바울의 이러한 행위는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릴 때 자기품에 그 아들을 안고 그의 거처인 다락으로 올라가 침상에 눕혔던 것이나(왕상 17:21)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 위에 올라 엎드려 그의 입과 눈, 손, 몸에 자신의 입, 눈, 손, 몸을 대었던 것과(왕하 4:34,35) 유사하다. 그리고 베드로가 죽은 다비다를 다시 살릴 때의 행동(행9:40) 과도 비슷하다. 그러나 바울의 행동은 저들의 모습을 흉내냈다기 보다는 뜻하지 아니한 죽음을 당한 자에 대한 깊은 연민의 정을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이는 또한 저를 어떻게든 살리려고 애쓰는 진지한 자세가 아닐 수 없다.
떠들지 말라. - 갑작스런 사고로 인하여 이 자리에 모인 회중들은 우왕좌왕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침착하게 회중들을 진정시키고 있다. 이것은 예수께서 야이로의 딸의 죽음 앞에서 흐느끼고 통곡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라고 말씀하신 것과 동일한 행동이다(막 5:39).
생명이 저에게 있다. - 이 말은 유두고가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니라 단순히 기절한 상태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근거가 되고 있다. 9절 주석 참조. 그러나 의사인 누가는 그를 '죽은 것과 같이'가 아니라 '죽은 것'으로 분명히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타당성이 없다. 따라서 바울의 말은 그가 유두의 몸을 껴안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권능으로 역사하시사 그가 다시 소생하게 될 것을 확신하는 믿음의 고백이자 선포라 하겠다.
20:11 떡을 떼어 먹고 오래 동안…이야기하고. - 성찬식을 위한 떡은 이미 준비되었으나(7절) 바울의 강론이 길어졌기 때문에 아직 떡을 떼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여기서 '먹고'란 단순히 성찬용 떡을 먹었다는 것 뿐만 아니라 성찬에 이은 식사를 함께 먹었다는 의미로 보아야 할 것이다(Hervey). 또한 '이야기 하고'란 말 역시 바울이 계속해서 강론한 것이 아니라 성도들과 자유롭게 담소한 것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즉 그들은 불의의 사고(9절)로 인하여 무척 놀랐으나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체험하고서(10절) 이 일에 대해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서로 이야기를 나눈 것이다.
20:12 살아난 아이. - 여기서 '아이'(파이다)는 비단 나이 어린 '소년'(마 2:16; 17:18) 뿐 아니라 '종'(마 8:6; 눅 7:7)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따라서 유두고는 아마도 집회를 연 그 집의 아이이거나 종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이 아이는 하나님의 권능을 대변하는 산 증인이되었다. 즉 그를 볼 때마다 드로아의 신자들은 놀라운 이적이 일어난 감격적인 그 밤을 회상하였을 것이며 불신자들에게도 이 사실을 널리 증거하였을 것이다.
위로를…받았더라. - 드로아의 신자들은 죽었던 유두고가다시 살아남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보여주신 놀라운 권능과 함께 주님이 세상 끝 날까지 성도들과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생생하게 체험하였다(마 28:18-20). 이것은 당시 복음을 훼방하고 성도들을 대적하는 환난의 시대에 살던(3,29,30절) 그들에게 대단한 격려와 기쁨과 용기를 갖게 해 준 사건이었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힘으로 해결하기 힘든 어려움을 경험하고 있는 교회나 성도들에게 당신의 임재와 능력을 나타내신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의 신앙 간증으로 증명된다. 그러므로 어떠한 상황 하에서도 하나님의 권념하심과 돌보심을 굳게 믿는 가운데 낙심하지 말고 신앙의 인내를 하여야 할 것이다(히 10:36-39).
20:13-16 드로아에서 밀레도까지의 여정
드로아에서 유두고를 소생시킨 바울(7-12절)은 이튿날 드로아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하게 되는데 본문에는 바울이 밀레도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이 소개되고 있다.
바울은 드로아에서 그의 일행을 배를 태워 먼저 보내고 그는 해안 도로를 따라 도보로 여행하던 중 앗소에서 일행과 합류하여 승선하게 된다(13,14절). 드로아에서 앗소까지는 도보로 약 40km되는 거리로 바울은 아마도 이 거리를 혼자 여행하는 동안 자신의 사명을 재다짐하고 예루살렘에서 받게될 위험한 환난에 대비해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누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처럼 신앙인이 어떤 문제를 두고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깊은 교제를 나누는 것은 무엇보다도 귀하고 소중하다.
한편 앗소에서 합류한 바울 일행은 미레네기도 가모를 거쳐 밀레도에 이르게 된다(14,15절). 이곳 밀레도는 바울이 3년 동안 목회했던 에베소와는 매우 가까운 곳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아시아에서는 오래 지체치 않기 위해 에베소에는 들르지 않기로 했다. 그것은 마음이 어떻게든 오순절까지는 예루살렘에 당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16절). 즉바울은 일전에 고린도에서 바로 예루살렘으로 가서 유월절을 지키고자 했으나 유대인들의 음모로 비록 오던 길로 되돌아가는 길을 택했지만(3절 주석 참조) 적어도 오순절에는 예루살렘에 당도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바울이 오순절까지 예루살렘에 당도하고자한 이유는 ①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의 교회에서 모금한 헌금을 속히 전달하여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 교회가 하나됨을 보여 주고 ② 오순절에 모인 많은 무리에게 복음을 증거하기 위함일 것으로 짐작된다. 그래서 바울은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불러 권면함으로써 에베소 교회에 대한 그의 방문을 대신한다(17-38절).
20:13 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 - 바울의 일행 중 바울을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들이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먼저 앗소로 간 반면 바울은 도보로 앗소를 향했다. 드로아에서 앗소까지는 약 32km나 되는 거리로서 밤새 철야 강론한(9,11절) 피로한 몸을 이끌고 홀로 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도 굳이 이 길을 택한데 대하여 혹자들은 ① 노중에 인근의 교우들을 심방하기 위하여, ② 밤에 배타는 것이 괴롭기 때문에, ③ 홀로 여행하고 싶어서, ④ 유대인의 음모 때문 등으로 추정들을 하나 정확한 이유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추측하기로는 계속되는 지루한 항해를 하기 보단 육로를 통하여 걷는 중에 하나님과 내밀한 개인적 시간을 갖고 싶어했기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Longeneker).
20:14 우리를 만나니. - 앗소에서 일행을 만난 바울은 승선을 하였다. 그리고 이 배는 그날 미둘레네까지 항해하였다. 이 미둘레네(Mitylene)는 에게해에 있는 레스보스(Lesbos) 섬의 중요한 항구 도시로, 앗소 서남 50km 지점에 위치했다. 로마 시대에는 로마의 귀족들이 즐겨찾는 휴양지이기도 했으나 A.D. 181년경에 지진이 일어나 도시 전체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20:15 기오. - 미둘레네 남쪽 80km 지점에 위치한 섬으로서 오늘날의 '이즈미르'섬 부근이다. 전승에 의하면 이곳은 시인 호머(Homer)의 출생지라고도 한다.
사모. - 기오에서 다시 80km 정도 떨어진 곳으로서, 일찍부터 중요한 해군 기지였던 곳이다. 또한 이곳은 유명한 철학자였던 피타고라스(Pytagoras)와 이솝 우화(寓話)로 유명한 이솝(Aesop)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밀레도. - 에베소 남쪽 45km 지점에 있는 항구 도시로, 메안데르(Maeander)강 어귀에서 약간 남쪽에 위치해 있었다. 이곳은 최초의 철인(哲人)이라는 탈레스(Thales)의 고향으로 이름난 곳이다. 이 도시는 B.C. 6세기경부터 이미 헬라 철학과 예술의 융성지였다. 그러다가 B.C. 494년경에 페르시아인들에 의해 파괴되었으니 다시 재건되어 로마 시내에는 중요한 상업 도시로도 명성을 떨쳤다. 한편 베자 사본(D)은 바울 일행이 사모를 떠나 밀레도에 닿기 전 사모에 인접한 항구인 트로길리움(Trogyllium)에 체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 학자들은 바람이 오후 늦게 잦아졌기 때문에 계속 항해를 할 수 없어 일시 이곳 트로길리움에 정박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Ramsay).
20:16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 - 바울이 앗소에서 밀레도까지의 항해(13-15절)에서 에베소에 들르지 않은 이유이다. 이미 바울은 유대인들의 음모 때문에 가장 중요한 유대 절기인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도착할 계획을 포기한 적이 있었다. 3절 주석 참조. 그러나 이번에는 가능하다면 두 번째로 큰 절기인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그곳에서 절기를 지키고 싶어했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에 들르지 않고 에베소 만의 입구를 가로질러 기오에서 사모로 항해하는 직선 항로(15절)를 택한 것이다. 대신에 바울은 밀레도에 도착하자 마자 에베소 교회에 전갈을 보내 장로들을 그곳으로 불러서 그의 진심과 열정이 담긴 고별 설교와 권면의 말을 전했다(17-35절). 이것은 평상시에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을 향해 얼마나 깊은 애정을 쏟고 있었는가를 암시적으로 나타내준다. 한편 바울이 에베소에 들르지 않은 또 다른 이유들은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으로부터 모금한 헌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해주는 일이 시급했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소아시아, 마게도냐, 아가야의 선교를 매듭짓고 대망의 로마 전도에 나서기 위한 준비를 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행 19:21). 유대인들의 농경 축제 절기인 오순절에 대하여서는 본서 신 서론 특별자료, '히브리인의 절기'를 참조하라.
20:17-38 에베소 교회를 위한 바울의 고별 설교
바울은 오순절까지 예루살렘에 도착하려는 바쁜 일정 때문에 에베소에는 들르지 않기로 했었다(16절). 다만 바울은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초청하여 고별 설교를 함으로 권면하였는데 본문은 바로 그 고별 설교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바울은 본서에서 이방인과 비그리스도인을 대상으로 세 차례의 복음에 대한 선포를 하였고(행 13:16-41; 14:15-17; 17:22-31) 다섯 번의 변증적인 설교를 강론했지만(22-26장), 이번 설교는 에베소 교회를 대상으로한 독특한 것으로 에베소 교회에 대한 바울의 사랑과 관심이 부각되고 있다.
이 고별 설교의 내용은 권면과 더불어 변증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데 그 중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에베소에서 행한 사역의 회상이다(18-21절). 바울은 복음의 사명자로서 유대인의 박해 속에서도 모든 노력을 다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였다. 유대인들은 바울이 떠나 있는 동안에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바울에 대한 비난을 일삼았을 것이므로 바울은 자신의 사역이 사심 없이 오직 예수님을 증거했다는 사실을 확인해 준 것이다.
둘째,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하는 계획을 말한다(22-24절).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환난과 박해가 기다리지만 자신의 생명보다 하나님의 복음을 더 귀히 여겨 복음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가고자 하였다. 더욱이 성령님의 증거로 이미 어려움이 있을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복음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결심했다는 사실은 주의 사명을 맡은 자가 어떤 헌신과 희생의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를 교훈해 준다.
셋째, 바울 자신과 에베소 교회의 상태를 말해 준다(25-31절).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를 당할 것과 대베소 교회에는 이단이 출현하여 배교의 길로 미혹할 것을 경고하였다. 이런 바울의 간절한 경고와 당부가 있었기에 후에 에베소 교회는 사도를 사칭하는 자들과 니골라당의 이단 사상에 빠지지 않았다는 사도 요한의 칭찬을 들을 수 있었다(계 2:1-6).
넷째, 설교의 결론이다(32-35절). 바울은 여기서 교회에 대한 축복의 기원과 함께 약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라고 교회의 사명을 당부한다. 특히 바울은 자신의 신앙 생활을 본받아 약한 자를 돌보라고 권면하는데, 이것은 그의 목회와 전도 생활이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칭찬받을 만한 삶이었음을 확신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래서 우리는 본문의 설교를 통하여 바울 서신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바울의 인격과 참된 신앙인의 모습을 느낄수 있다. 즉 바울은 ① 겸손과 눈물과 인내의 사람이었다(19절). ② 복음 전파를 하는데 용기와 열정을 가진 사람이었다(20-24절). ③ 무흠하고 충성스런 사람이었다(26,27절). ④ 영적 통찰력과 분별력이 있는 사람이었다(28-30절). ⑤ 사심이 없고 사랑과 긍휼을 가진 사람이었다(31-35절). 이러한 바울의 모습은 오늘날의 목회자들에게는 물론 모든 성도들에게 어떠한 모습으로 삶을 살아야 할지 지표(指標)를 제공한다 할 것이다.
20:17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 바울은 배가 밀레도 항구에 머물러 있는 동안 그곳에서 약 45km 떨어진 에베소에 전갈을 보내었다. 전갈의 내용인즉 그 도시의 장로들이 와서 그를 만나주기를 부탁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울이 에베소로 직접 가지 않은 것은 전절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여정이 급한 것 외에도 일전에 일어났던 소요 사건의 재발을 우려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행 19:23-34).
장로들을 청하니. -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은 에베소 교회를 대표할 만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인이들에게 자신의 고별 설교와 권면을 한 것은 매우 적절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모든 에베소 교인들에게 그의 말을 전한 것과 같은 효과를 지녔기 때문이다. 초대 교회 내에서의 '장로'의 직분과 역할에 대하여서는 행 11:30 주석을 참조하라.
20:18 첫날부터 지금까지. - 바울이 에베소에서 사역한 3년이란 전 기간(31절)을 가리킨다. 바울은 에베소 체류 기간 중 석달은 회당에서, 그리고 두 해 동안은 두란노 서원에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리고 마게도냐로 떠나기 전까지의 남은 기간 동안에도 그같은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행 19:8-10, 22).
너희도 아는바니. - 원문에는 이 말이 본절 서두에 나와 있어 매우 강조적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여기서 '알다'(에피스타마이)는 말은 단순히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즉 여러 번 상종한 결과 완전히 알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같이 바울은 자신의 삶을 회고하면서 그리고 그 삶에 대한 에베소 장로들의 경험적 지식과 판단에 호소하면서 권면의 말을 들려주기 시작한다. 한편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한 설교(행 13:16-41)가 유대인 회당의 청중들에게, 아덴에서 한 설교(행 17:22-31)가 이방인에게 한 대표적인 설교라면 이 밀레도에서 한 설교(18-35절)는 모든 기독교인들을 향한 설교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이 설교의 중심 내용은 ① 에베소에서의 바울 자신의 복음 사역 회고(18-21절), ②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하는 바울 자신의 현재 계획 토로 (22-24절), ③ 바울 자신과 에베소 교회의 장래에 대한 언급(25-35절)이다. 그래서 혹자는 이 밀레도에서 행한 설교를 가리켜서 권면의 성격과 어느 정도 바울 자신을 변증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이 설교는 바울 서신의 구성과 유사해서 바울 서신의 축소판 같은 느낌을 준다고 하는데 이것은 매우 의미 심장하다. 왜냐하면 본서 전체를 통틀어 그 어느 곳에서도 바울 서신에 대해 자세하게 증거해 주는 기록이 없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이런 특징들은 매우 중요하게 부각되기 때문이다(Longeneker).
20:19 모든 겸손. -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기 보다는 주의 종으로서 진리를 파수하기를 힘쓴 바울의 성품을 특징지어 주는 말이다. 바울의 위대성은 바로이 겸손한 마음과 자세에서 찾아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혹자는 이 단어가 비굴한 굽신거림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주장하는데(Lightfoot) 이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고서 온전히 주를 따르는 자의 자발적인 봉사와 섬김의 자세를 이해하지 못한 주장이다.
눈물. - 바울은 31절에서도 자신이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였음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도(고후 2:4), 배교자들을 책망하는 편지에서도(빌 3:18) 자신이 흘린 눈물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바울의 눈물은 참으로 생명의 말씀을 거부하는 자들에 대한 안타까움의 토로이자 자칭 하나님의 선민(選民)이라고 자랑하는 동족들이 정작 복음을 배척하는 데 대한 애타는 그의 심정(롬 9:3)을 대변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유대인의 간계. - 바울이 에베소에 머물러 있는 동안 유대인들의 간계로 인해 당한 시련은 회당에서 유대인들이 비방한 것(행 19:9)을 제외하고는 직접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데살로니가에서 괴악한 사람들을 동원해 소동을 일으킨 사건이나(행 17:5-9), 베뢰아까지 유대인들이 쫓아와 무리를 선동한 일(행 18:13), 그리고 고린도에서 갈리오가 아가야의 신임 총독이 되었을 때 바울을 고소한 일(행 19:12, 13) 등 다른 지방에서의 경우를 살펴보면 에베소에서도 바울이 유대인의 간계로 인하여 갖은 핍박을 받았으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20:20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전하여 가르치고, - 여기서 '공중 앞에서'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던 회당이나 두란노 서원을 뜻한다(행 19:8,9), 그리고 '각 집에서'란 바울이 심방을 한 교인의 집을 뜻한다. 이처럼 바울은 공중 집회(公衆)나 개인적인 사적 모임을 통하여 복음의 진리를 쉬지 않고 가르쳤다. 즉 그는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전도 사역에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그의 복음 증거나 권면하는 자세가 시종 여일 진실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고 오직 인간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하려고 했던 그의 신앙 자세 때문이었다고 하겠다(갈 1:10; 살전 2:4).
20:21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 - 바울이 전파한 메시지의 중심 내용으로 기독교의 근본 진리이기도 하다. 여기서 '회개'(메타노이아)란 자신의 죄악된 행동을 뉘우치고 죄 자체를 미워하는 '마음의 변화'를 의미한다. 다음으로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대속 사역의 효능과 그분이 온 인류의 구원자이심을 믿는 것을 가리킨다. 이는 곧 하나님과 화평케 하며(롬 5:1), 죄 사함(행 10:43)과 의롭다 함을 얻게하여(행 13:39) 구원에 이르게 하는 힘이 있다(요 11:25,26; 롬 10:9; 히 10:39). 그러므로 마치 순결하고 고귀한 어떤 물체를 담기 위해서는 먼저 그 그릇에 담겨있던 더러운 물건들에 대한 청소가 선행되어야 하듯이 회개는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의 준비 단계 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막 1:15). 즉 회개와 믿음은 불가분적 관계에 있으니 구원은 먼저 회개가 있고 이것에 우리 주 예수께 대한 믿음이 결부될 때에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20:22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 바울의 당면 목표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일이었다(16절). 그런데 본절은 이 일이 바울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단독적으로 계획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절대적인 간섭에 따른 계획이었음을 보여 준다. 왜냐하면 '심령에 매임을 받아'(데데메노스 토 프뉴마티)라는 말은 직역하면 '성령에 매임을 받아'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난 이후(행 9:1-19) 바울의 생은 성령에 사로잡혀 사는 것이었다. 한편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수난의 길임을 예시받았음을 알 수 있다(23절). 그렇지만 그는 성령에 사로잡힘으로 인해 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그렇다고 억지로 순종한 것은 아니다. 즉 바울은 성령에 이끌림을 받기는 하였지만 억지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성령의 뜻에 순종했던 것이다(24절).
20:23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기다린다 하시나. - 바울은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였다(22절). 그러나 그곳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것은 영광이 아닌 핍박과 환난임을 예감하였다. 그런데도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예루살렘으로 나아가고 있는 바울의 모습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못하고 나간 아브라함의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히 11:8). 한편 예루살렘에서 바울이 겪을 고초(행 21-26장)에 대하여선 두로(행 21:4)와 가이샤라(행 21:10-12)에서 처럼 예언하는 자를 통해 바울에게 전달되었거나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20:24 나의 달려갈 길. - 바울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힘써 완수하는 데 전력으로 경주한 것을 의미한다(빌 3:13,14).
주 예수께 받은 사명. - '나의 달려갈 길'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밝혀 주는 것이다. 즉 바울의 사명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모든 이에게 전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자신의 전도 사역이 자신의 계획이나 어떤 사람의 시킴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로부터받은 것이란 강한 사명 의식을 나타내 준다(롬 1:1; 갈 1:1; 엡 3:2; 골 1:25; 살전 2:4; 딤후 1:1).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 - 복음이란 사실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거저 주시는 구원의 은혜에 관한 메시지이다. 예수께선 이러한 인간 구원을 위하여 친히 대속적 죽음을 당하셨다. 그리고선 그의 제자들에게 이러한 영생의 진리를 온 세상에 널리 전하도록 명하셨다. 따라서 바울 역시 다른 말씀이나 도(道)가 아닌 오직 이같은 '은혜의 복음'만을 힘껏 전한 것이다(롬 1:14-17).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 사실 쉬지 않고 주를 위해 충성하는 바울 앞에 항상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영광이 아닌 환난과 핍박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상황 하에서도 자기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어느 때든지 복음 전도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바칠 마음 자세가 되어 있었다(고후 4:7; 빌 1:20-23). 즉 바울의 주된 관심사는 자신의 육체의 평안함이 아니라 복음의 확산과 진보였으며, '살든지 죽든지 그의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는 것'이었다(빌 1:20).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에게 비록 유익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위해서는 다 해로 여겼고 배설물로 간주하였다(빌 3:7,8). 그런데 이러한 자세는 오늘날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요구된다. 즉 성도들의 주된 관심사는 그리스도가 되어야 하며,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라면 그 일이 아무리 자신에게 유익한 것이라 할지라도 과감히 던져 버리는 결단이 필요한 것이다(막 10:28; 눅 5:27,28).
20:25 너희가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 바울이 본절과 같은 말을 한 것은 미구(未久)에 자신의 순교를 예지하고, 최후의 이별을 고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가 예루살렘에 당도하면 그곳에서 죽게된다는 뜻이 아니다. 즉 바울은 어디에서 그러한 일이있게 될는지는 확실히 모르고 있었다. 단지 한 가지확 실한 것은 그러한 일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20:26 오늘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 여기서 '오늘'(엔테 세메론 헤메라)은 너희와 함께 하는 '마지막 이날'이란 의미로(Robertson), 직역하면 '오늘이라고 하는 이날'이다. 다음으로 '증거하노니'(마르튀로마이)는 중인이 되다'란 뜻인데 본질에서는 '엄숙하게 선언하다'란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 말은 바울이 결정적인 선언을 할 때 주로 사용하던 용어이다(행 26:22; 갈 5:3; 엡 4:17; 살전 2:12).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 히브리적 표현으로 피는 생명을 가리킨다(마 27:24; 18:6). 그러므로 바울이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깨끗하다는 말은 결코 복음 전도에 태만한 적이 없었으며, 또 말씀을 잘못 전한 적이 없고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뜻을 다 전했다는 의미이다. 한편 이러한 바울의 말은 겔 33:1 이하의 말씀에 의거하고 있는 것으로, 보다 상세한 사항은 그곳 주석을 참조하라.
20:27 하나님의 뜻. -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경륜을 가리킨다. 24절 주석 참조.
20:28 너희는. - 17절에 언급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가리킨다. 바울은 이제까지 에베소 교인을 위하여 행한 자신의 수고를 말한 다음 장로들에게도 같은 수고를 당부하고 있다.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을 향하여 구체적인 행동지침을 제시하고 있다. 즉 자신을 위하는 것과 교회를 위하는 것은 목회자에게 있어 언제나 일치해야 한다는 말이다. 사실 자신을 항상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지 못하는 자가 교인들을 올바른 영의 양식으로 먹일 수 있을리 만무하다.
삼가라. - 여기서 '삼가라'(프로세코)라는 말은 '주의를 기울이라', '전심전력하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말이 명령법으로 표현되어 있음은 계속해서 영적으로 각성하여 있어야 함을 강조해 준다.
성령이 저들 가운데…삼고. - 장로들이 자신은 물론 교인들을 돌봄에 있어 항상 영적으로 각성해있어야 할 이유이다. 즉 장로는 사사로이 세움받은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돌보도록 위임받은 감독자들이기 때문에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감독자. - '감독자'(에피스코포스)는 '조사자', '감시자', '수호자'란 의미를 지니고 있는 말이다. 아직 교회 제도나 직분이 체계적으로 갖추어져 있지 않던 초대 교회 시대 당시에는 '장로'나 '목자' 또는 '감독'이란 말이 교호적(交互的)으로 사용되었다. 이들의 사명은 교회를 감독하고 하나님의 양 무리인 교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닫게 하며 가르치는 일이었다(살전 5:14; 딤전 5:17; 벧전 5:2). 그런데이 '감독자'란 말은 훗날 감독 교회(Episcopal Church)가 탄생하게 된 근거가 되었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 -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대속물로 주시고 사신 교회라는 뜻이다(마 20:28). 여기에서 '교회'(엑클레시아)란 외형적인 건물이나 조직을 가리키지 않고 '회중', 즉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은 백성들'을 의미한다(고전 12:28). 이와 관련해선 그랜드 종합 교리 교회론 중 '유형 교회와 무형 교회'를 참조하라.
치게 하셨느니라. - '치다'는 말은 '돌보다'(tending)라는 뜻이다. 이는 곧 복자의 직무가 무엇인지를 나타내 주는 것으로서(요 21:15-17) 목자란 다름 아닌 그리스도께서 위탁하신 양떼를 돌보는 자인 것이다(히 13:20; 벧전 5:2,3).
20:29 흉악한 이리. -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장차 일어날 일을 예견하며 이러한 일을 경계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여기서 '흉악한 이리'란 거짓된 교의(敎義)를 가지고 기독교를 부정하면서 믿는 자들을 넘어지게 하는 영지주의자(Gnostics)나, 유대주의자 또는 그밖의 거짓 선지자들을 의미한다(Lumby, Bruce). 이러한 거짓 교훈은 일찍이 예수께서도 경계하신 것으로(마 7:15) 이단들의 극성으로 인해 순수한 신앙을 보존하는데 어려움을 겪게될 시대적 상황을 예견시켜 준다.
20:30 또한 너희 중에서도. - '흉악한 이리'(29절)가 외부에서 오는 적이라면 본절은 교회 내에서도 자기를 좋게 하려고 복음을 곡해하고 성도를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내부적인 적이 있을 수 있음을 시사해 준다. 사실 에베소 교회에는 바울의 예견과 같이 니골라당이라는 이단이 생겨 분열을 획책하였다(딤후 1:15; 2:17; 계 2:1-7).
어그러진 말. - '어그러진'(디에스트람메나)은 '구부러뜨리다', '왜곡하다'는 뜻이다. 즉 이는 교묘한 논리로써 복음의 진리를 왜곡시키는 거짓 가르침을 의미한다.
20:31 너희가 일깨어. - '일깨어'(그레고레이테)는 '깨어 있으라'(공동번역)는 말이다. 이는 곧 밖에서의 이리(29절)와 안에서의 거짓 교사(30절)를 생각하면서 항상 영적으로 각성해 있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의미이다(Bengel). 한편 이 낱말의 헬라어를 그대로 딴 것이 '그레고리'(Gregory)로서 이는 고대 교부들이나 법왕들 가운데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름이었다.
20:32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 여기에서 '부탁하노니'(파라티데마이)는 '위탁하다', '넘겨주다', '소개하다'라는 뜻이다. 즉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과 작별하면서 에베소 교인들을 하나님과 살아 운동력이 있어 심령과 골수를 쪼개는 하나님의 말씀(히 4:12)에 맡기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이와 같이 최종적으로 에베소 교인들의 안전을 에베소 교회 장로들이 아닌 하나님과 구원의 방편을 제시해 주는 하나님의 말씀에 부탁하고 있는 이유는 흉악한 이리와 배교의 무리들로부터 교회를 지키는 데 있어선 바울의 모범이나 지도자들의 성실함도 근본적인 방어책이 되지 못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안전의 원천인 권능의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부탁한 것이다.
기업. -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상속물 곧 구원의 은총과 천국에서의 상급을 가리킨다(고전 3:12-15).
20:33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 바울은 갑자기 화제를 바꾸어 이야기하고 있다. 즉 통용 화폐가 발달되지 않던 시대에 은금이나 의복은 중요한 재산 중 하나였다(왕하 5:22). 그런데 바울은 누구로부터도 이러한 것들을 갈취하지 않았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자기 자랑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교회 지도자들은 마땅히 그러한 탐욕을 경계해야 할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다. 이것은 사무엘이 사사로서의 그의직무를 끝마치려 할 때에 온 이스라엘인을 증인으로 불러 세워 같은 말을 한 장면을 상기시켜 준다(삼상 12:1-5). 즉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을 증인으로 불러세워 자기는 그들과 지내는 동안 줄곧 그의 소유가 아닌 것은 아무것도 탐내지 아니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의 노력으로 자기와 동료들의 쓸 것을 벌었다는 사실을 증거한 것이다(행 18:3).
20:34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 바울이 교인들의 헌금에 의해 생계를 유지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노동을 하여 자급 전도를 한 사실은 성경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행 18:3; 고전 4:12; 살전 2:9). 더욱이 그는 자신의 필요 뿐만 아니라 동료들의 필요를 채워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복음 전도자들이 다 바울과 같이 자급 전도를 하여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바울의 경우, 당시 적대자들로부터 탐욕을 위해 일 한다는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 자급 자족하며 전도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전문화 사회에서는 양자를 다 감당하기란 상당히 힘든 일이다. 더욱이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자가 생계 유지를 위한 사례비를 받는 것은 성경적으로도 마땅한 것이다(고전 9:7-10). 한편 본절의 '당하여'(휘페레테산)는 아랫사람의 위치에 서서 남을 섬기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공동번역은 이를 '일해서 장만하다'로 번역하고 있다.
20:35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 바울의 이 말씀은 매우 적절한 인용이다. 그는 종종 성도들을 권면함에 있어 예수의 말씀에 의거하였고(살전 4:112) 예수께서 친히 보여 주신 모본과 관련시켰다(빌 2:5-11). 한편 본절의 이 말씀은 복음서에서 동일 구절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이와 비슷한 사상을 담은 구절은 복음서에 자주 나타난다(눅 6:38; 11:9; 요 13:34). 아마도 바울이 구전되어 오는 예수의 말씀을 자유롭게 인용했거나 당시에 이러한 주의 말씀을 수록한 자료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20:36 무릎을 꿇고…함께 기도하니. -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기도를 할 때 취하는 일반적인 자세는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드는 것이었다. 눅 18:11 주석 참조. 따라서 이처럼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는 것은 더욱 간절한 간구의 자세가 아닐 수 없다(마 26:39). 즉 이것은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권면을 마친 후 이별해야 하는 시점에서 저들을 위해 간절히 하나님께 간구한 사실을 나타내 준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성도들을 염려하는 바울의 깊은 심성을 보게 된다.
20:37 다 크개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 목을 안고 입을 맞추는 행동은 비단 유대인 뿐 아니라 소아시아나 유럽인들의 전형적인 인사법이다(창 31:28,55). 1절 주석 참조. 그러나 본절은 관례적인 인사 장면을 보여 주기 보다는 이별의 아쉬움을 견디지 못해하는 모습을 강조해 주고 있다. 특히 여기서 '입을 맞추다'(카테필룬)란 격정에 찬 감정으로 격렬하게 여러 번 입맞춤하는 것을 의미한다(눅 15:20).
20:38 더욱 근심하고. - 이들이 근심하게 된 것은 '너희가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고 한 바울의 말(25절) 때문이다. 즉 그들은 바울이 장차 순교당하게 될 일에 대하여 진심으로 슬퍼하며 또한 염려하였던 것이다.
전송하니라. - 고별 설교 직후에 바울은 사람들의 전송을 받으면서 밀레도(17절)를 떠나 얘루살렘으로 향하게 된다. 그런데 장로들이 항구까지 따라 나와 바울을 전송했다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바울을 존경하고 진심으로 섬겼느냐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한편 본장에서 만남과 작별의 내용과 광경이 매우 상세하고 또 생생하게 기록된 것은 본서의 저자 누가가 바울과 함께 동행하였다는 사실을 더욱 강하게 뒷받침 해주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5절 주석을 보다 참조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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