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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장 심판과 영생에 대한 확신 화목케 하는 자로서의 사도의 직무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넓게는 1:12-7:16까지 이어지는, 바울이 자신의 사도직 곧 사도권의 정통성과 그 기본적 본질 나아가 이러한 사도직에 임하는 자신의 성실한 자세 등과 관련된 몇몇 측면에 대하여 주로 소극적으로 변호하고 그에 근거하여 준 권면의 말씀을 보도하는 일련 기사의 연속 부분이다.
이런 문맥하의 본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전반부 1-10절은 문맥상으로는 1:12-7:16 사이의 일련 기사 중에서도 가장 직접적으로 사도로서의 바울 자신의 직분의 정통성과 이의 성실한 수행 자세에 대해 해명하고 있는 내용을 보도하는 2:14-5:10까지의 일련 기사의 종결 부분이다. 또한 이러한 본단락은 앞서 4:1-15에서 밝힌 바 바울이 사도로서 그토록 모든 고난을 감내하며 오직 주의 복음만을 전하는 이유를 밝히는 부분으로서 바을 자신이 제시한 세 가지 근거, 곧 최후 심판과 천국 영생 그리고 영원한 영광에 대한 확신을 보도하는 4:16-5:10 기사의 뒷부분에 해당된다. 보다 상술하자면 1-8절이 천국 영생에 대한 확신을, 9-10절이 최후 심판에 대한 확신을 보도하고 있다.
바울이 사도로서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면서 또 그로 인해 그토록 처절한 핍박과 고난을 감내했던 근거로 제시한 세 가지 사실들은 결국 마침내 태초부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중심으로 진행되어온 구속사가 종결되는 그날 성도가 누릴 천국 구원에 대한 종말론적 확신(終末論的 確信)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태초부터 종말까지 이어져서 마침내 성도의 영원한 천국 구원으로 끝날 구속사에 대한 확고한 인식이 있는 자만이, 바울처럼 담대하게 당장 눈에 보이나 곧 없어질 세상의 실체를 바로 깨닫고 세상의 그 어떤 핍박과 유혹에도 굴하지 않으면서 오직 벅찬 희망 속에서 천국을 향하여 묵묵히 전진하는 역동적 삶을 살 수 있음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다.
후반부 11-21절은 5:11-7:16까지 이어지는 사도직의 본질의 하나인 화목케 하는 자로서의 직무와 그에 임하는 바울의 자세 및 그에 근거한 권면 등을 보도한 일련 기사의 개시 부분이다.
이 일련 기사는 사도의 본질적 직무의 하나가 화목케 하는 것임을 밝히면서 이러한 자신의 질문에 따라 새삼 화목을 권면함으로써 먼저는 자신을 부당하게 비판하고 있는 고린도 교회의 일부 신자들에게 자신이 끝내 관용하며 권면하는 근본 이유를 밝힌다. 또한 이를 통하여 고린도 교우들도 서로 화해에 힘써야 할 것을 권면함은 물론 자신을 부당히 비방하며 화해를 깨뜨리는 일부 교우들의 부당성을 간접적으로 지적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일련 기사의 첫단락인 본문은 사도직의 본질의 하나가 죄인의 쬐를 대 속함으로써 죄인과 하나님을 다시금 범죄 이전의 순결했던 아담과 하나님의 관계처럼 화목케 하시기 위해 구속 사역을 행하신 그리스도의 복음을 중거함으로써 결국 하나님과 성도를 화목케 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 자체를 일단 제시하는 바울의 설명을 보도한다.
이러한 본문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개관할 때에 우리는 먼저 구속사의 필연성, 구속사의 근거와 결과 등 구속사(救贖史)의 실체와 총체적으로 직결된 다음의 구속사의 본질적 속성의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결과 성도가 사죄를 얻고 마침내 천국 영생에 이르는 구원의 전과정의 본질적 속성, 즉 인간 구원의 전제와 결과는 결국 하나님과 성도의 화목(Reconciliation)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결국 다음과 같은 구속사의 원리들을 총체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주와 역사의 창조자요 주권자로서 인간만을 특별히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그를 전우주의 대리 통치자로 임명하시고 모든 축복을 주시면서 단 하나의 조건으로서 당신에 대한 순복을 요구하셨다. 그리고 선악과를 기준으로 하나님을 향한 순종과 불순종의 자세를 가름하기로 하고 그에 따라 각각 축복과 영탈이 주어지기로 하는 언약 곧 선악과 언약을 세우셨다. 그러나 인간은 이를 범함으로써 결국 욜순종하는 범죄를 자행하였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이런 인간과 관계를 끊으시고 그를 저주하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Justice)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새로이 인간에게 더욱 정확히는 당신이 택한 일부의 성도에게 당신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금 축복과 영생을 얻을 기회를 주시기 원하셨다. 그리하여 인간이 지은 죄값을 인간 대신 다른 존재가 담당함으로써 인간의 죄에 대한 공의의 원칙이 충족되는 대신 인간 자체는 구원을 얻는 소위 구속의 언약과 법을 세우셨다. 그리하여 인간 대신 다른 존재가 대속 희생을 하며 모두 다 죄인이 된 인간 중 택함받은 일부가 각자 회개하면 하나님이 이를 근거로 사죄를 주심으로써 새로이 양자의 관계가 회복되어 결국 칭의, 성화, 천국 영생 등의 구원의 전과정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예수의 구속 사역이 다만 약속과 예표로 주어졌던 구약 시대를 거쳐 예수가 초림하셔서 구속 회생을 실제로 감당하시고 새로이 당신이 이미 성취한 구속 사역의 최종 실현으로서의 천국 구원에 대한 새약속을 주심으로써 이제 새로이 신약 시대가 개시되어 천국이 최종 도래되는 그 순간까지 구속의 역사가 계속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현재 죄와 질고에 쉽싸인 자연인(自然人)의 상태는 범죄로 인한 하나님과의 불화가 그 근본 원인이자 결과이며 또한 역으로 하나님과의 화목은 성도(聖徒)의 구원의 전과정의 전제인 동시에 그 결과로서 결국 인간 구원 전파정의 본질적 속성인 것이다.
이같이 성도와 하나님의 화목이 구속사를 통하여 성도가 얻는 구원의 전제인 동시에 결과로서 결국 구원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본문 앞에서 우리 성도 각자는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해서 일단 자연인과 달리 과거 우리의 죄로 인한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을 극복하고 생명과 축복의 근원인 하나님과 화목의 관계에 있는 고귀한 존재임을 새로이 성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제 더욱더 세상과의 관계를 끊고 일단 화목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더 깊게하여 결국 참 생명과 축복을 온전히 누려야 하겠다는 구속사적 지혜와 각오를 새로이 하게 된다.
또한 우리는 본문에서 이러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화목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의 직 분의 본질을 분명히 파악하고 이에 헌신한 사도 바울의 모습을 보면서 이제 그러한 사도들로부터 복음을 전해받은 동시에 복음 전도의 사명까지 물려받은 우리도 이웃과 세상을 하나님과 화목시키는 사역에 동참해야 한다는 구속사적 소명도 새로이 각성하게 된다.
외울 말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영생에 대한 소망
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2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3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6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최후 심판에 대한 확신
8 ○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9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화목의 직책으로서의 사도직
11 ○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하노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워졌고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워졌기를 바라노라
12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를 인하여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을 대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13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19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20 ○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본문 & 자료노트
도표-5:1-7 성도의 몸에 대한 12대 묘사
1. 의의 병기(롬 6:13)
2. 거룩한 산 제물(롬 12:1)
3. 하나님의 성전(고전 3:16)
4. 주를 위한 것(고전 6:13)
5. 그리스도의 지체(고전 6:15)
6. 성령의 전(고전 6:19)
7. 질그릇(고후 4:7)
8. 땅의 장막집(고후 5:1)
9.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곳(갈 2:20)
10. 성전 건물을 이루는 돌(엡 2:20-22)
11. 맑은 물로 씻겨진 것(히 10:22)
12. 장막(벧후 1:13)
도표-5:1 '땅의 장막'과 '하늘의 집' 비교
본문에서 바울은 육체 가운데 거하는 인간의 현세의 삶을 '땅의 장막'에 거함으로 부활체를 입고 영위하게 될 성도의 내세의 삶을 '하늘의 집'에 들어감으로 비유하여 인간의 현세의 삶과 내세의 삶의 공간적 시간적, 질적 차이를 보여 주고 있다. 즉 '땅과 하늘'은 양자 간의 공간적 차이를, '장막의 집'은 양자 간의 시간적, 질적 차이를 보여 주고 있다.
땅의 장막 하늘의 집
1. 공간: 땅 하늘
2. 시간: 1) 임시적임 영원함
2) 탄생으로 주어짐 주 재림시 주어짐
3) 죽음으로 가치가 없어짐 영원히 그 가치가 지속됨
3. 질: 1) 육적임 영적임
2) 고난 속에 거함 기쁨, 은총 속에 거함
3) 초라함 영광스러움
4) 모든 사람에게 주어짐 성도에게만 주어짐
주요 주제-5:5 성령과 다른 위와의 관계
그래드 종합 교리 신론 참조
주요 주제-5:14 대표와 연합의 원리
롬 5장 연구자료 참조
보감-5:14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12대 묘사
1. 죽음보다 강한 사랑(아 8:6)
2. 억누를 수 없는 사랑(아 8:7)
3. 재물로 살 수 없는 사랑(아 8:7)
4. 어버이 같은 사랑(요 14:18,21)
5. 가장 뛰어난 사랑(요 15:13)
6. 모든 것을 거저주신 사랑(롬 8:32)
7. 아무도 끊을 수 없는 사랑(롬 8:35)
8. 모든 일에 이기게 하는 사랑(롬 8:37)
9. 강권하시는 사랑(고후 5:14)
10. 목숨까지 버리신 사랑(갈 2:20)
11. 지식에 넘치는 사랑(엡 3:8)
12. 측량할 수 없는 사랑(엡 3:19)
신학용어-5:21, 칭의
창 18장 자료노트 참조
원어연구-5:18, 화목하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카탈랏소'( )로 전치사 '카타( )와 동사 '알랏소'( )의 합성어이다. '~아래로'를 뜻하는 '카타'가 '방향'을 나타내는 여격과 함께 쓰여 '~에 대하여'(against), ' ~맞은편에'(opposit), '~향하여'(toward, 행 8:27)라는 뜻이 된다. 그리고 '알랏소'는 이전에 잘못된 상태에 있던 것을 새롭게 '바꾸다'(change, 행 6:14), '고치다'. '변형하다'(transform, 고전 15:51). 또는 '물건을 상호 교환하다'는 뜻을 가진다.
따라서 '카탈랏소'는 '상대에 대하여 이전의 잘못된 태도를 새롭게 바꾸다' 또는 '동등한 값어치의 것으로 서로 교환하다'는 의미를 갖는다. 여기서 이 단어는 아담의 범죄로 인해 갖게된 원죄(原罪)와 스스로 행한 자범죄(自犯罪)로 인해 깨어질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죄값을 대신 치르심으로써 곧 예수의 구속 희생사역으로 말미암아 다시 관계가 회복되었음을 뜻한다(롬 5:10). 영역본인 Living Bible에서 '우리를 그 자신에게로 되돌려 판다'(braught us back to himself)로 번역한 것은 이 의미를 잘 살린 표현이라 하겠다. 아울러 바울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하나님과의 원수 관계에서 친구 관계로 화목하게 된 것은 그러한 화목관계를 자기 혼자만 누리도륵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를 알지 못하는 자에게 복음을 증거함으로 하나님과 화목케 되는 일을 이루어야 할 책임까지도 수행케 하기 위한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주요주제-5:15-21 십자가 수난을 통한 구속 성취의 이해
마 27장 자료노트 참조
보감-5:17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의 10대 능력
눅 15장 자료노트 참조
도표-5:17 주 안에서의 새로운 것 15가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먼저는 우리 자신이 새로워진다. 그뿐 아니라 훗날
우리는 이 영육 간에 왜곡되고 혼란스러운 세상이 아니라 새로워진 영원한 세상에 들어가는 축복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면 다음에서 주 안에서 새로워진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1. 새 노래(시 40:3; 96:1)
2. 새 힘(사 41:1)
3. 새 이름(사 62:2)
4. 새 일(렘 31:22)
5. 새 언약(렘 31:31; 히 8:13)
6. 새 영(겔 18:3; 36:26)
7. 새 마음(heart, 겔 36:26)
8. 새 계명(요 13:34)
9. 새 마음(mind, 롬 12:2)
10.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
11. 새 사람(엡 4:24)
12. 새 길(히 10:20)
13. 새 하늘과 새 땅(계 21:1)
14. 새 예루살렘(계 21:2)
15. 만물의 새로움(계 21:5)
주요주제-5:19 그리스도의 중보
그랜드 종합 교리 기독론 참조
5:1 본절에서 10절까지에서는 고후 4:18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설명으로, 성도들이 돌아보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보이는 것'은 '손으로 지은 땅에 있는 장막'으로, '보이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으로 묘사되고 있다.
땅에 있는‥‥장막 집. - 사람의 육체를 비유한 것으로(Lenski, Farrar), 육체의 나약성과 임시성 및 무가치성을 나타낸다(Chrysostom). 바울의 이러한 비유는 그의 장막 깁는 업(業)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되었을 것이다.
무너지면.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탈뤼데'( )는 '해체되어 내려가면'이란 뜻으로, 그 의미에 대해서는 죽음의 순간을 가리킨다는 견해(Meyer, Bemard)와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를 가리킨다는 견해(Ewald, Barclay)가 있다. 벧후 1:14에 비추어 볼 때 전자의 견해가 적합하다.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 - 혹자는 본절의 '영원한 집'을 요 14:2; 히 11:16 등을 근거로 하여 '천국'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Hodge, Harris, Taster).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영원한 집'은 '땅에 있는 장막 집'으로 대변되는 '육체'와 대조되는 개념이다. 따라서 본절의 '영원한 집'은 우리 영혼이 하늘에서 입고 살게 될 영광스러운 몸(고전 15:42-49)을 가리킨다(Farrar, Lenski).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 여기서 '있는 줄'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에코멘'( )으로 현재형이다. 따라서 계속적 소유를 나타낸다. 즉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은 현재에는 믿음으로, 사후에는 바라봄으로 가지며, 마지막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는 부활함으로써 완전히 가지게 되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아나니'(오이다멘)는 경험으로 아는 것(기노스코)과는 달리 직관적으로 계시에 의해 아는 것을 가리킨다. 사실 우리가 죽으면 영적인 몸을 입게 된다는 것은 우리의 체험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계시에 바탕을 둔 믿음으로 알게 되는 것이다.
5:2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 이것은 성도들이 현재의 삶 속에서 가져야 할 태도를 지칭하는 것으로서 바울 자신의 심정을 토로한 것이다. 여기서 '여기'는 '장막 집'(1절)을 뜻하는 것으로 고난과 죽음의 목전에서 살아가는 현재의 삶을 가리킨다(고후 1:8 ; 4:8-18). '탄식하다'(스테나조멘)는 본래 '불평하다', '무거운 짐에 시달리다'라는 의미로 극복하기 힘든 장애 앞에서 신음하는 것을 나타내나, 여기서는 절망과 포기 상태를 일컫는 말이 아니고 본절 후반의 '간절히 사모하노니 '와 함께 소원을 가진 신음을 뜻한다. 즉 여기서의 '탄식'은 나약한 육체를 벗어나 영원히 썩지 않을 영광스런 부활의 몸을 덧입기를 갈망하는 데서 나오는 염원의 소리인 것이다(롬 8:18-25). 그러나 이 말은 바울이 속히 죽기를 염원했다는 말이 아니다. 바울은 속히 죽기를 희구하지 않았다(4절). 바울은 다만 그의 생전에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심으로써 그의 육체가 변하여 영적인 몸으로 화하기를 탄식하며 고대했을 뿐이다(살전 4:16,17).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사모하노니. - 이 문장은 분명히 바울의 심정을 읽을 수 있게 하는데, 그것은 바울이 고전 15:51에서 설명했듯이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썩은 육체로가 아니라 살아서 그리스도를 만나 지금 그들의 육체에 그리스도의 '영적인 몸'을 덧입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덧입는'다는 말은 겉옷을 더 입는 것 같이 이미 입고 있는 못을 벗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몸 위에 다른 몸을 입는 것을 뜻한다. 즉 새로운 몸을 옛 몸 위에 입는 것을 가리킨다(Moule)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몸에 대한 인식을 볼 수 있는 바 이러한 바울의 말은 몸은 영혼의 감옥이라든지 육체는 단순히 썩어져 없어지는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이원론적 헬라 철학에 영향을 받아 어떠한 형태의 육체의 부활도 부인하려는 영지주의자들에 대한 반박의 의도가 있다 하겠다. 하여튼 본절은 바울이 갈망한 것이 단순히 육체적 존재로부터의 해방을 꿈꾼 것이 아니고 불완전한 지금의 몸이 영적인 몸으로 변화되는 것이었음을 잘 보여 준다.
5:3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 2절의 '덧입기를‥‥사모한다'는 것의 연속되는 내용으로서 그 이유를 제공한다. 이러한 본절은 유대 문화와 관련해서 해석되어 야 한다. 즉 유대인들은 나체를 드러내는 것을 매우 혐오했다. 그래서 그들은 음부에서는 벗은 몸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본절은 이러한 사상의 반영으로 바울은 육체를 떠난 영혼을 마치 옷을 벗은 몸과 같이 보고(Plummer, Vincent), 인간의 죽음과 그리스도의 재림까지의 중간 상태에서 몸을 입지 않은 영혼의 존재가 되기 보다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생전에 재림하심으로 그의 입고 있는 육체가 그대로 영적인 몸으로 변화를 받아 그의 영혼이 육체를 벗는 일이 없기를 소망한 것이다.
5:4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 2절의 '탄식하며‥‥사모한다'는 것에 대한 구체적 설명이다. 즉 바울은 현재의 육체의 고통으로부터 속히 벗어나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앞에서도 밝혔듯이 죽음으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재림이 속히 이루어짐으로 그의 몸이 변화를 받아 에녹(창 5:24)이나 엘리야(왕하 2:11)의 경우처럼 죽지 않고 영적인 몸으로 덧입기를 소원한 것이다(고전 15:44). 그러나 바울이 이처럼 죽지 않고 영적인 몸을 입기를 소원한 것은 그가 죽음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거나 부활에 대한 확신이 결여되었기 때문이 결코 아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이미 3절에서 밝혔거니와 바울은 아마도 이러한 소망을 피력함으로 영과 육의 분리를 주장하며 육체적 부활을 주장하는 고린도 교회 내의 거짓 교사들을 반박하고자 한 듯하다.
5:5 곧 이것을 우리에게‥‥이는 하나님이시니라. -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되는 것은 인간의 상식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결국 죽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자연인의 본연의 속성이다. 그러나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죽을 것도 새롭게 하실 수 있다. 즉 하나님은 인간의 썩어질 육체도 새롭게 변화시켜 영원하고 영적인 몸으로 바꾸실 수 있는 것이다. 특별히 여기서 '이루게 하시고'(카테르가사메노스)라는 말은 '이루어지게 준비하시다'는 뜻으로 현재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있을 그리스도인들의 몸의 변형을 예비하시고 계심을 의미한다. 한편 바울은 하나님에서 성도들에 대한 이러한 은총의 보증으로 성령을 주셨다고 말한다. 여기서 '보증'(알라본)은 상거래에서 약속 이행에 대한 보증으로 주는 '선금'을 의미한다. 그런데 성령이 영적인 몸의 보중이 되는 것은 성령이 생명의 원천이 되시고 성도들의 부활의 예시인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의 영이시기 때문이다. 롬 8:11 주석 참조.
5:6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 본절에서 8절까지는 '영원한 집'에 대한 보증으로 성령을 받은 결과에 대한 언급이다. 그 첫번째 결과는 '담대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담대하다'(달룬테스)는 고후 4:1,16의 '낙심하지 아니하다'의 긍정적 표현으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는 것을 뜻한다. 본절에서는 5절의 내용, 즉 죽을 몸이 생명에 심킨 바 되고 그것의 보증으로 성령이 내주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죽어서 주를 맞이하든지, 살아서 주를 맞이하든지 용기를 잃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 이곳에서는 지금까지의 장막 집의 비유를 사용하지 않고 현재 지니고 있는 신체적인 몸을 직접 언급한다. 이러한 본문은 인간이 지닌 육체의 한계를 언급한 것이다. 즉 바울은 자신이 영적으로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와 하나로 연합된 자인 것은 분명하나 현재의 썩어질 육체를 지니고 있는한 몸으로는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그가 죽어서 주를 맞든지 살아서 새롭게 변형된 몸으로 주를 맞든지 속히 그날이 오기를 소망한 것이다(8절).
5: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 성령을 영원한 집에 대한 보증으로 받은 두 번째 결과는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바울은 이 세상의 삶이란 결국 완전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것이 되지 못하는 까닭에 더 이상 이 세상의 삶에 소망을 두지 않고, 비록 지금은 보이지 않는 곳에 계시고 현실적으로 보여질 수 없는 그리스도, 그렇지만 부활하시고 앞으로 재림할 그리스도(고전 11:26)를 신뢰하며 소망하는 삶을 산 것이다. 사실 신앙인의 행동 규율은 보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데 있다(롬 4:16-21; 고후 4:18; 히 11:1,2).
5:8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 바울이 '영원한 집'에 대한 보중으로 성령을 받은 결과 나타난 세 번째 현상은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기를 소망한 것이다(빌 1:23). 이러한 본절은 살아서 주의 재림을 맞기를 소망한 4절의 내용과는 다른 것으로, 이로 보아 바울은 결코 죽지 않고 살아서 주의 재림을 맞이 해야겠다고 고집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즉 바울이 진정 원한 것은 살아서 든지 죽어서든지 속히 주와 함께 거하기를 바라는 것 뿐이었다. 진정한 신앙이란 이처럼 주의 뜻에 자기를 맡기는 것이다.
5:9 우리는‥‥되기를 힘쓰노라. -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강조한 말로, 바울 자신은 주님과 함께 거하기를 소망하기 때문에 주를 살아서 맞든지 죽어서 맞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곧 주께 인정받는 자 되기를 힘쓴다는 말이다(빌 1:20), 특별히 여기서 '힘쓰노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필로티무메다'( )는 '~을 우리의 목표로 삼다'라는 뜻으로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 바울의 생의 목표였음을 나타내 준다. 바로 이러한 삶의 태도가 바울로 하여금 기쁨으로 환난을 견뎌내게 했고 고린도 교인들을 위하여 봉사하는 삶을 살게 한 것이다.
5:10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 이는 바울이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게 된 이유이다. 즉 모든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주의 재림 때에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며 선악간에 행한 모든 일이 드러나 그 행한 대로 보응을 받게 될 것이므로 바울 자신은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는 삶을 산다는 것이다(롬 14:10; 갈 6:7; 엡 6:8). 한편 여기서 '그리스도의 심판대'는 최후의 심판 장소를 가리키는 말로, '하나님의 심판대'(마 25:31; 롬 14:10)와 동의어이다. 사실 하나님의 심판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 진다는 점에서(요 5:22) 최후의 심판 자리를 '그리스도의 심판대'로 표현한 것은 매우 적절한 표현이다. 하여튼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는 일차적으로는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죽음이 결정되고(마 13:36-43; 25:31-46; 살후 1:6-10), 이차적으로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상급이 결정된다(롬 14:12; 살전 1:3). 따라서 그리스도의 재림은 주의 말씀대로 산 성도들에게는 기쁨과 소망이 되는 것이며 불신자와 악인에게는 슬픔이 된다.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 얼핏 보기에 이신득의(以信得義) 교리와 모순되는 듯한 말이다. 왜냐하면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며(엡 2:8), 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얼음에도 불구하고(롬 8:1) 본절은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절은 결코 이신득의의 교리와 모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본절에서 '행함'은 칭의의 근거로서의 개념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판단하는 기준의 일반적 개념을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Alford, Barmby). 뿐만 아니라 여기서 말하는 행함은 단순히 외부로 표출되는 육체적 행위를 의미하지 않고 믿음의 원리가 반영된 인간의 총체적이고 전인격적인 행위를 말한다. 따라서 행위가 심판의 근거가 된다는 말은 제한적 의미에서 볼 때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사실 믿음은 구원의 조건이요 또 절대적이다. 믿음으로 사람은 멸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다. 이와 같이 믿는 자에게는 믿음으로 판단되지만 불신자에게는 행함 그 자체가 심판의 기준이 된다. 또한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에게도 행함은 그들의 상급을 결정하는 조건이 된다. 본절에서 바울은 이러한 면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롬 2: 6-10).
5:11-21 화목의 직책으로서의 사도직
지금까지 자신의 사도의 직분의 정통성과 이를 수행하는 사역 자세에 대해 해명한(고후 2:14-5:10) 바울은 이제 본문에서부터 7:16까지에서는 사도직의 본질의 하나인 화목케 하는 자로서의 직무와 그에 임하는 자세 및 그에 근거한 권면 등을 소개한다. 이러한 맥락하에 본문은 사도직의 본질적 직무 중의 하나가 화목케 하는 것임을 밝히는 부분이다.
바울은 먼저 사도로서의 그의 진실성을 호소하는 말로 본문을 시작하고 있다(11절). 이미 앞에서 밝힌 바 있거니와 바울은 스스로를 자천하지도, 다른 이의 추천서를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고 했다(고후 3:1). 그런데 11절의 말은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바울이 또다시 자천한다는 오해를 갖게할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12절 이하의 내용을 통해 자신의 사도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강권적인 사랑에 근거한 것임을 재차 강조하고(12-16절), 이를 기회로 그가 맡은 사도직의 역할을 설명함으로써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 자신의 사도 직분을 자랑스럽게 생각해 주기를 바란 것이다.
사실 바울은 회심하기 전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적, 인간적 기준에 따라 판단함으로써 그를 믿는 자들을 박해하는 데 앞장 섰었다. 그러한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한 뒤로는 환전히 변화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17절; 행 9:1-22). 물론 바울이 체험한 위대한 변화는 바울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구속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즉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과 화목하시고 이 위대한 진리를 만방에 선포하도록 사역자들을 세우셨을 뿐만 아니라 박해자 바울마저 변화시켜 화해의 사도로 세우신 것이다(18,19절). 그래서 바울은 자천하는 의미에서가 아닌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이 화해의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사람들에게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20,21절). 실로 바울은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이유에서 사도직을 수행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강권적인 사랑에 압도되어 사도직을 수행했으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미쳤다고 조롱을 당하는 수모를 겪고 (행 26:24-29). 온갖 박해를 당하면서도 복음 전파에 헌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고후 11:23-33).
한편 이상의 본문의 내용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된다. 첫째,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의 주체자는 하나님이며 인간은 그 대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화목(Reconciliation)이란 쌍방의 원수 관계가 새로운 노력으로 정상 관계로 회복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범죄한 인간은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완전히 무지 무능하므로 성경적 의미의 화목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베풀어 주시는 일방적 은혜를 뜻하는 것이다(롬 5:8; 엡 2:8,13-18). 둘째, 예수께서는 죄인된 인간을 사랑하선서 인간을 위해 모든 영광을 버리시고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당하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화목케 하셨다(엡 2:16; 골 1:20). 이러한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하여 새 생명을 얻은 우리는 마땅히 사나 죽으나 주를 위해 헌신해야 한다(롬 14:7-9). 셋째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야 하는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화목제물이 되사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화목케 하신 것처럼 이웃과 형제를 위하여 희생적인 삶을 살아야 함은 물론 그리스도의 화해의 복음을 담대히 전함으로 세상에서 화해자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 새롭게 지음받은 자의 온전한 모습인 것이다(롬 1:16,17; 골 1:20-23).
5:11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하노니. - 이 내용은 10절의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과 연결된 것으로서 여기서 '주의 두려우심'이란 사람들이 절대자에 대해 갖는 막연한 두려움이나 공포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미래에 있을 최후의 심판대에서 심판하실 그리스도에 대해 경건한 사람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경외심을 가리킨다(고후 7:1; 엡 5:21). 사실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되는 날이 있음을 안다면 그날을 대비하여 그리스도께 경외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바울은 바로 이처럼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 있는 심정으로 사람을 권한 것이다. 한편 여기서 바울이 권한 것이 무엇인지가 확실치 않다. 학자에 따라 ① 복음 전파의 노력(Grotius, Schlatter), ② 그의 사도로서의 진실성 호소(Theodoret, Alford), ③ 고린도 교인들과의 화해 노력(Hammond, Luther)이라는 견해
가 제시되고 있다. 다음 절과 연계해 볼 때 ②의 견해가 가장 타당성이 있다. 바울은 참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경외심으로 인해 신실하고 정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실성은 고린도 교인들에 의해 부당하게 의심받아 왔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신의 진실성을 믿어주기를 호소하며 변명을 거듭해 왔던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워졌고. - '알리워졌고'(페파네로메다)는 앞절의 '드러나'와 같은 뜻을 가진다. 즉 바울은 그의 진실성을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에 부끄러울 것 없이 행동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워졌기를 바라노라. - 이는 '너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나의 변명이 그 목적을 달성하여 나의 진실성이 인정받기를 바란다'는 의미로,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께서 바을 자신의 진실성에 대해 잘 알고 계시듯이 고린도 교인들도 편견을 버리고 양심에 비추어 생각하면 그의 사역의 동기가 순수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5:12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 본 구절은 고후 3:1에 연결된다. 이러한 본절은 전절의 '하나님 앞에‥‥양심에도'라는 말을 두고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이 또 자친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는 오해의 여지를 제거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어지는 문장에서 볼 수 있듯이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신을 자천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자신의 사도의 직분을 자랑스럽게 생각해 주기를 바랬다.
오직‥‥대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 바울이 자기를 자천하는 듯한 글을 쓰게 된 실제 목적이다. 즉 바울은 자기를 자천하기 위해 글을 쓴 것이 아니라 다만 고린도 교인들에게 바울과 그의 복음을 대적하는 거짓 교사들에 대해 반박할 수 있는 자료를 주기 위해 자천하는 듯한 글을 쓰게 된 것이다. 아마도 고린도 교인들은 거짓 교사들이 공식 추천서와 외부적 자랑거리를 내세우며 바울과 그의 복음을 대적하였으나 전혀 반박할 만한 어떠한 내용도 가지지 못한 듯하다. 이에 바울은 그의 신실성을 증명할 수 있는 몇 가지 사실을 고린도 교인들에게 소개함으로써 고린도 교인들이 거짓 교사들을 대적하는 자료로 삼기를 바랬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혹시나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신을 자천하는 것으로 오해되지 않기를 바란 것이다.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 - 고린도 교회의 거짓 교사들을 가리킨다(Hodge). 이들은 유대주의자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바 아마도 그들은 할례, 외적인 종교적 특권, 교회 지도자 직분 혹은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과의 교분 등을 자랑했을 것으로 보인다(Plummer).
5:13 미쳤어도‥‥정신이 온전하여도. - 본절은 사도로서 바울의 모든 행위와 동기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즉 바울은 자신이 미쳤어도, 온전하여도 하나님과 고린도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사도적 활동이 집중되어 있음을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미쳤다'(엑세스테멘)는 말은 좋은 의미에서는 황홀경(ecstasy)을 말하고, 넓은 의미에서는 합당치 않은 흥분이나 무절제를 뜻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넓은 의미인 후자의 의미로 봄이 좋다. 아마도 고린도 교회의 거짓 교사들은 바울의 복음에 대한 열심, 그의 환상과 무아지경, 다른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는 것, 외적인 것에 대한 무관심, 그의 폭발적인 감정을 보고 후에 베스도가 바울에게 그랬고(행 26:24), 유대인들이 예수께 그러했던 것처럼 바울을 무절제하고 제 정신이 나간 사람이라고 비난한 듯하다(Farrar, Hodge). 바울은 바로 이 비난을 반어적으로 인정하면서 그것조차 하나님을 위한 행동의 결과였지 결코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정신이 온전하다'(소프로누멘)는 '미쳤다'는 말과 대조되는 말로 절제된 마음 상태를 가리킨다. 이러한 절제는 헬라인들의 4대 미덕, 즉 지혜, 용기, 절제, 중용 중의 하나로, 바울이 이처럼 자신의 자유를 절제하는 삶을 산 것은 고린도 교인들을 위하고 그의 복음이 그들에게 거리낌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 바울이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하나님과 그 교회를 위하여 산 이유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을 의미한다는 견해도 있으나(Hofmann), '우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보는 것이 좋다(Meyer, Alford, Bernard, Farrar). 한편 여기서 '그리스도의 사랑'이란 하나님의 본체이신 에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사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화목을 위한 제물이 되신 것을 의미한다. 또 '강권하시는도다'(쉬네케이)라는 말은 '억압한다', '강요한다'라는 의미이다. 실로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한 이후 그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사로잡혀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서 헌신적인 삶을 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는즉. - 그리스도의 사랑의 내용으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믿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대속의 죽음을 당하신 사실을 가리킨다(고전 15:3). 이러한 대속의 개념은 바울 신학의 근간을 이루며 또 기독교의 중심 내용이다(롬 5:12-19).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보이신 사랑의 결과에 속한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바울의 독특한 신학적 견해를 발견하게 된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으로 인해 모든 사람이 죽음을 경험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바울의 주장은 '연합과 대표의 원리'로 설명되는 바, 이에 대해서는 롬 5장 연구자료에서 상세히 다루었으니 그곳을 참조하라.
5:15 산 자들로‥‥살게 하려 함이니라. -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죽음을 당하신 목적이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그 안에서 다시 산 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위해 살지 않고 다시 사신 당신을 위해 살게 하시고자 대속의 죽음을 당하셨다는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의 일차 목적은 속죄로 인한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에 있다. 그러나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도록 유도한다는 면에서 두 가지는 궁극적으로 일치한다. 아무튼 여기서 '산 자'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부활에 동참한 자이다. 부활은 사실 미래의 일이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운 자이기 때문에 분명 '산 자'이다(요 5:24; 롬 6:11),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는 것은 죄와 자기를 위해 살아온 자아에 대하여 죽었음을 의미한다. 반면 그리스도 안에서 살았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인이 되심을 의미한다(갈 2:20). 따라서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롬 14:7-9).
5:16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 여기서 '이제부터'는 바울이 본서를 쓸 때부터가 아니라 그가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부터라는 의미이다(Alford). 그리고 '육체대로'라는 말은 '성령의 조명없이 단순한 인간적인 지식에 따라'(Alford)라는 의미로 이기적이며 세상적인 평가 기준을 의미한다. 결국 본절은 바울이 변화받은 이후부터는 사람을 대할 때에 그 사람의 외적인 조건에 의해서 판단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 여기서 '육체대로'(카타 사르카)라는 말은 바울이 흔히 사용하는 말로 문자적으로도(롬 4:1; 고전 1:26; 10:18), 윤리적으로도(롬 8:4; 고후 10:2) 쓰였다. 때문에 본절의 해석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즉 ① 바울이 회심하기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적이 있으며 그 예수를 사람으로만 알고 박해하였다는 견해(Olshanseu), ② 바울이 회심한 후 얼마동안은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교적 메시야로 이해하였다는 견해(Jowett, Holstein), ③ 바울이 회심하기 이전에는 예수를 단순히 세상적 또는 인간적 기준으로만 판단했다는 견해(Meyer, Farrar, Hodge, Bemard). 이 가운데 ③의 견해가 합당하다.
이제부터는‥‥알지 아니하노라. - 그리스도를 더 이상 외모로 평가하지 않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 주신 하나님의 아들로 안다는 것이다(갈 2:20).
5:17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 그리스도인의 존재의 변화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 주는 구절이다. 여기서 '그리스도 안에'는 공간적 의미가 아니라 믿음과 회개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상태를 의미한다. 이에 대해서는 엡 1장 자료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하여튼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함으로 얻어지는 결과이다. 그런데 여기서 '피조물'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티시스'( )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기도 했다(롬 1:20). 그렇다면 본절은 사람이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새로운 창조 행위가 일어나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는 새로운 존재가 된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의 재창조 행위와 관련이 깊은 구절이다. 이러한 재창조와 관련해서는 사 43장 자료노트에 다루었으니 그곳을 참조하라. 한편 본절의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 행위는 결코 물질적 변화나 창조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러한 창조 행위의 최종 완성은 마지막 때에 될 일이다(사 65:17; 계 21:4,5). 여기서는 다만 성도들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영적 변화를 가리킨다. 그리고 이렇게 변화된 자는 이전의 생활 방식이나 사고 방식이 아닌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에 합당한 생활 방식을 따라 삶을 살게 된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 이 말은 물질적인 모든 피조물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지나간 것은 다름 아닌 16절에서 말한 '육체대로 알은' 세계를 가리킨다. 즉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육체적인' 조건과 지식, 그리고 관계는 다 지나가 버렸고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은 새로운 세계에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전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주의가 될 것이며, 헬라인들에게는 세상 지혜나 우상 숭배가 될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에게는 이미 지나간 것이다. 그렇다고 '이전의 것'들이 그리스도인의 주변에서 소멸되어 사라진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 이 구절은 미래의 신천 신지(계 21:4)의 모습을 암시하는데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사람은 이 하나님의 완전한 새창조를 종말론적으로, 주관적으로 전유하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인은 지금 이 세상 한 가운데서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시작한 새로운 창조와 관계하여 살아가는 것이다(Barrett).
5: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 여기서 '모든 것'은 우주 만물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의 결과들(16,17절)을 지칭한다(Alford, Bernard). 또한 '하나님께로'는 '하나럼께로부터'라는 말로 '모든 것'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나타낸다. 즉 새창조는 인간의 어떤 행위나 계획 속에서 되어지는 어떠한 형태의 일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활동으로부터만 나오는 결과임을 본 구절은 타나내고 있다(엡 2:8-10).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직책을 주셨으니. -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 행위의 성격을 나타내 주고 있는 내용이다. 즉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는 말을 사용함으로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 행위가 구속 행위임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성격은 곧이어 나오는 '화목'이란 말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 준다. '화목'(reconciliation)이란 원수되었던 상태 가정 상적인 상태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다소 그 관계의 끈을 누그러뜨리거나 느슨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적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제거해 버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본절에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으로 말미암아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본래 가지고 계셨던 사랑으로 바뀌게 되고, 인간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것을 의미한다(롬 5:10). 이와 관련해서는 롬 5장 자료노트, '화목'을 보다 참조하라. 하여튼 바울은 본절에서 이러한 화해의 주도권이 하나님에 있음을 분명히 한다. 이를 정리해 보면 첫째, 화목의 주체자는 하나님이며 인간은 그 대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일반적 의미에서는 화목이란 쌍방의 원수 관계가 새로운 노력으로 정상 관계로 회복하는 것을 뜻하나 범죄한 인간은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완전히 무지 무능하므로 성경적 의미의 화목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일방적 은혜를 뜻하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께서 인간과 화목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삼으셨다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화목을 이루셨음을 뜻한다. 셋째, 하나님의 이 화목의 작업은 계속 중인데 이를 사람에게 맡기셨다는 것이다. 본절에서의 그 사람은 일차적으로는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이며 궁극적으로는 모든 믿는 자를이다(Lenski).
5:19 이는 하나닐께서‥‥부탁하셨느니라. - 앞절의 내용이 다시 언급되고 있다. 앞절에서는 다분히 주관적 의미(우리를)를 짙게 풍기고 있지만, 여기서는 객관적 의미(세상을)를 담고 내용을 전개시킨다고 볼 수 있다(Lenski). 이러한 본절은 화목의 작업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이미 완료된 상태가 아니고 온 세상에 확대되어야 하며, 하나님께서 직책을 수여한 자들을 통하여 활동하시며 진행 중에 계심을 시사한다.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녀하시고. - 본절은 인간의 죄가 하나님과 인간을 적대 관계로 만든 원인이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바로 이 죄 문제를 스스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인간에게만 맡겨 두시지 않고 친히 관여하사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 제물로 삼으심으로 말미암아 인간과의 화목의 길을 트신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막 10장 자료노트, '예수의 성육신과 대속 수난을 통한 인간 구원의 필연성'을 보다 참조하라.
화목하게 하는 말씀. - 다른 서신에서는 '생명의 말씀'(빌 2:16). '진리의 말씀'(엡 1: 13)으로 언급되어 있는 것으로서 그 내용은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죽음에 관한 것이다.
5:20 이러므로 우리가‥‥사신이 되어. - 여기서 '사신'(프레스뷰오멘)은 본절과 엡 6 20 에만 나오는 단어로 본래 황제의 대사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실로 하나님의 화해의 직책을 맡은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복음을 전하도록 보낸 전권 대사였던 것이다. 여기에 바울의 사도직의 출처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있음이 다시 한번 강조되고 있다.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 바울이 전파한 복음의 내용을 한 마디로 압축한 것이다. 한편 여기서 '화목하라'(카탈라게테)는 제 2단순 과거 수동태 명령어로 '화목되어 라'는 의미다. 즉 하나님께서 제시한 화복의 제안을 받아들이라는 의미로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지 말라는 말이다.
5:21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 -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로 그리스도의 무죄성과 나아가서는 그리스도께는 죄의식 조차 없었음을 보여 준다(히 4:15; 7:26; 벧전 2:22; 요일 3:5).
우리를 대신하러 죄를 삼으신 것. - 본절에 대해서는 그 해석이 다양하게 제시되고
있다. ① 죄 있는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가리킨다는 것, ② 죄에 대한 희생 제물이 되신 것을 가리킨다는 것, ③ 죄인이 되셨다는 것. ④ 죄인은 아니나 실제적으로는 죄인으로 취급되어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 등이다. 그리스도께서 죄인이 되셨다는 ③의 견해를 제외한 나머지 세 견해는 모두 적합하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역시 가장 합당한 견해는 ④의 견해이다. 즉 무죄한 그리스도께서는 만백성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사 죄의 저주를 받으신 것이다(갈 3:10). 바로 이러한 속죄 사역으로 우리의 죄를 제거하시고 또한 우리를 의롭게 하신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목적으로 '칭의'의 교리가 명확하게 나타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의롭다 함을 얻도록 하기 위하여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리스도로 하여금 만백성의 죄를 짊어지게 하시고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게 하신 것이다. 실로 주는 우리를 위해 죄가 되시고 우리는 주님 때문에 하나님의 의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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