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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장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으로서의 자격과 성도의 영적 진보에 대한 촉구
구속사적 개관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논함으로써 그의 구주되심을 입증하는 본서 본론의 중반부인 4:14-10:18은 또다시 3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째 부분인 4:14-16은 그리스도는 택하신 성도를 은혜의 보좌로 이끄시는 환전한 대제사장이시므로 구원의 은혜를 얻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야 함을 밝히는 본론 중반부의 도입 부분이다. 그리고 둘째 부분인 5:1-7:28은 대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자격을 다루며, 셋계 부분인 8:1-10:18은 대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 논한다. 이러한 문맥하에 있는 본장은 본론 중반부의 도입부인 4:14-16에 나오는 그리스도는 큰 대제사장이시라는 선언적 전제에 이어 대제사장으로서의 자격을 구체적으로 밝히는 5:1-7:28의 일련 부분이다.
이러한 본장의 내용을 좀더 세분하여 살펴보면 대제사장의 자격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1-4절과 이에 이어 그리스도는 이 모든 자격을 완전히 구비하셨음을 논중하는 5-10절. 그리고 다소 주제를 바꾸어서 성도의 영적 성장의 필요성을 논하는 11-14절로 구성되어 있다. 즉 전반부 1-10절이 그리스도가 완전한 대제사장으로서의 자격을 가졌음을 밝히는 것임에 반해 후반부 11-14절은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이심을 믿는 성도가 지향해야 할 생활 태도를 보여 주는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한편 후반부의 이러 한 내용은 성도가 영적 성장을 위해 노력할 것을 권면하는 5:11-6:20의 일련 부분으로서 앞부분의 교리적인 주제와는 다소 거리감이 있는 듯하다. 따라서 이 부분은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의 자격과 직무를 다루는 본른 부분에 위치한 하나의 삽화(播話)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영적 성장을 위해 노력할 것을 권면한 이 부분이 본론의 주제와 완전히 떠나 있는 것은 아니다. 즉 이 부분은 지금까지 기술한 교리적 내용은, 특히 바로 앞서 나오는 그리스도와 멜기세덱의 제사장직의 관계에 대한 깊고 오모한 영적 교훈은 영적 성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이해키 어려운 것임을 간파한 본서의 저자가 독자의 영적 성장을 도모키 위해 이를 기록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교리적인 가르침이 실생활과 유리된 것이 아님은 물른 실생활에서 영적으로 성숙됨이 더 깊은 영적 진리를 이해하는 기틀이 됨을 보여 준다.
이러한 본장에서 구속사적 교훈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하나님과 인간의 중보자(仲保者)인 대제사장이 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대표(代表)가 될 수 있는 인간과 동일한 위치에 있는 인간이어야 하며(1-3절),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대제사장으로서의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여야 한다(4절)는 것이다. 과거 구약 선민(選民)인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나아갔던 모든 대제사장은 이러한 자격을 구비하였다. 그러나 역사상 등장했던 이러한 많은 대제사장은 인간적인 허물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들 역시 범죄한 아담의 후손으로서 원죄(原罪)에서 환전히 벗어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스스로도 자범죄(自犯罪)의 올무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은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에서 중보자의 역할을 하는 대제사장이기는 하였으나 완전한 중보자의 자격을 갖추었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인간 대제사장의 제한성이야말로 완전한 대제사장을 필연적으로 요청케 하였고 하나님의 원래적인 구훤 섭리에 의해 흠없고 완전한 인간임과 동시에 완전한 신이신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대제사장으로서 출현하시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출현, 즉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成肉身)은 구속사 가운데서 가장 획기적인 사건이다. 따라서 구속사의 기록인 모든 성경 역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가운데 구약은 오실 메시야, 즉 성 육신하실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적 성격을 지니며, 신약은 오신 메시야, 즉 성육신하셔서 이 지상에서 사역하시는 그리스도의 생애와 그의 가르치심 및 그리스도의 메시야 사역의 의미를 밝힘과 동시에 다시 오실 그리스도에 대해 기록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구약의 동물 회생 제사의 제물과 이 제사를 드리는 대제사장 역시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구약 성경 가운데서도 명시적으로 기록되어 있으나(5절) 영적으로 무지한 자들은 이에 대해 명확한 인식을 갖지 못함으로써 예수를 구주로 영접지 못하였던 것이며 본서 저자는 이를 지적하며 영적 각성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5-10절에서 완전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가 택한 죄인 구원의 확실한 근거가 되신다는 것은 완전한 신이신 그리스도가 인간의 몸을 입으심으로 완전한 대제사장이 되셨을 뽄 아니라 동시에 죄없으신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완전한 제물이 되셨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는 구약 시대의 인간 제사장과는 전혀 구별되는 역사상 유일무이한 대제사장과 제물로서의 신비한 면모를 가지신 분이신 것이다. 한편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 성격이 이스라엘의 다른 대제사장이 아론의 반차(班次)를 좇는 것과 달리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이란 사실이 갖는 깃은 의미에 대해서는 7장 구속사적 개관을 참조하라.
본장 후반부 11-14절은 이와 같은 대제사장이시며 동시에 대속 제물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구속의 진리는 인간의 이성(理性)을 통해서 이해될 것이 아니라 성숙해진 영적 신앙의 눈을 통해서만 완전히 깨달아지고, 또한 이를 생활 가운데 실천할 때 더 넓고 깊은 영적 진리와 은혜를 체험할 수 있다는 귀중한 영적 교훈을 준다.
외울 말씀
8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 5:8,9)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의 자격
1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2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
3 이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기를 위하여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4 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5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저더러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고
6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8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영적 미성숙에 대한 책망
11 ○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12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13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14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본문 & 자료노트
주요주제-5:1,2 구약 제사의 종류와 그 상징적 의미
레 서론 특별자료 참조
보감-5:5-10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로 완전해진 것들
1. 구약 예언의 성취(마 5:17)
2. 세상에 대한 승리 (요 16:33)
3. 죄의 법에서의 자유(롬 8:1)
4.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롬 8:37)
5. 구약 율법의 성취(롬 10:4)
6. 죄인 구원에 필요한 의(히 5:9)
7. 속죄(히 7:27; 7:12-15)
도표-5:6-10 그리스도와 멜기세덱의 공통점
히 7장 자료노트 참조
보감-5:11-14 성숙한 성도가 약한 성도에게 취할 자세
1. 분별있는 자세(잠 15:23)
2. 긍휼히 여기는 자세(마 5:7)
3. 위하여 기도하는 자세(눅 22:32)
4. 권면하는 자세(행 11:23)
5. 겸손한 자세(롬 11:20)
6. 정죄하지 않는 자세(롬 14:1,2)
7. 업신여기지 않는 자세(롬 14:3)
8. 조심스러운 자세(롬 14:21)
9. 내 뜻만 고집하지 않는 자세(롬 15:1,2)
10. 덕을 세우려는 자세(롬 15:1,2)
11. 행함에 본이 되는 자세(고전 4:6)
12. 관용하는 자세(고후 10:1)
13. 사랑을 보이는 자세(갈 4:13-16)
14. 인내하는 자세(갈 5:22,23)
15. 온유한 자세(갈 6:1)
16. 경건한 자세( 갈 6:1)
17. 짐을 서로 나누는 자세(갈 6:2)
18. 믿음을 도우려는 자세(살전 3:10)
19. 지혜롭게 가르치려는 자세(딤전 3:2)
20. 연약함을 이해하려는 자세(히 5:11)
원어연구-5 : 14, 분변하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디아크리노'( )이다. 이는 전치사 '디아'( )와 동사인 '크리 노'( )의 합성어이다.
여기서 '크리노'의 기본 의미는 어떤 사물이나 대상을 추별하기 위해서 또는 판결, 평가하기 위해서 '분리하다' 또는 '절단하다'이다. 여기서 '재판하다'(judge, 요 18: 1), '결정하다'(deter- mine, 행 3 : 13), '건택하다'(5잃erst),
'평가하다'(ostinato, 름 14 : 5) 등의 다양한 뜻이 파생되어 나왔다. 그런데 여기에 분리를 나타내는 전치사 '디아'가 합성된 '디아크리노 는 '크리노'보다는 훨씬 좁은 의미에서 '구별하다', '절단하다', '떼어 놓다'는 의미를 갖는다. 여기서 '분변하다', '식별하다', '인식하다'는 뜻도 파생되었는데 이는 인간이 한 사물과 다른 사물을 따로 떼어 구별하여 대조 비교함으로써 어떤 사물의 성격을 을바로 인식(認談)하게 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본 본절의 의미는 성숙한 신앙을 가진 자들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잘 구별하여 깨닫는 능력을 가지게 됨을 나타내고 있다.
주요주제-5:7-10 예수의 성육신과 대속 수난을 통한 인간 구원의 필연성
먁 10장 자료 노트 참조
난제 해설-5:11 멜기세덱의 정체
히 7장 자료노트 참조
도표-5:12-14 신앙이 미숙한자와 성숙한자에 대한 성경의 주요 묘사
고전 3장 자료노트 참조
5:1-10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으로서의 자격
본문은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으로서의 사역을 논하는 본론 중반부인 4:14-10:18의 일련 부분이다. 그런데 본론 중반부의 도입부에 해당하는 앞단락 4:14-16에서 저자는 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큰 대제사장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모든 것을 주도 면밀하게 논중하는 치밀성을 가진 저자는 앞단락에서 자신이 일방적으로 선언한 내용, 곧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큰 대제사장이 되신다는 사실을 아무 설명없이 그냥 넘어가지 않고 대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사역이란 본격적인 내응에 들어가기에 앞서 본단락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떠한 이유에서 하나님의 큰대제사장인가에 대한 자격을 논증한다.
대제사장이 되려면 두 가지 필수적인 자격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 그 하나는 사람의 대표가 되기 위해서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며(1-3절),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임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4절). 그런데 그리스도는 성육신(成肉身)하심으로 첫 번째 요건을 갖추었고(7절), 또한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중보(仲保)하는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심으로(5,6절) 두 번째 요건을 갖추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는 아론 이후의 대제사장이 갖추는 요건 이상의 자격. 곧 멜기세덱과 같은 자격을 갖추어(10절) 아론 이후의 모든 대제사장들이 실패한 제사를 스스로를 제물로 바쳐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하심으로 단번에 완성하선서(히 7:27)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직무를 완수하시었다(8-10절). 결국 그리스도는 아론이 가진 자격 요건을 다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아론을 능가하는 탁월한 능력을 지닌 대제사장 중의 대제사장. 곧 큰 대제사장이신 것이다. 그리스도가 멜기세덱의 반차(班次)를 좇은 대제사장이심에 대하여는 제 7장 구속사적 개관을 참조하라.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리스도는 순종하심으로 대제사장으로서의 자기 직무를 완수하셨고 또한 인간 역시 순종하신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함을 통해 영원한 구원에 이르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순종은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를 힘입는 근거가 되며 더불어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취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며 핵심이다(삼상 15:22,23). 그러므로 우리는 주일에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고 많은 헌금을 드리고 많은 헌금을 드리는 등의 여러 가지 외형적 종교 생활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목숨을 버리시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신 것처럼(요 10:11; 요일 3:16) 우리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우리의 목숨과 재산과 시간과 모든 것을 바치는 일에 기꺼이 순종하며(마 22:37-40), 그것을 위해 날마다 자기를 켜서 훈련시키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사 6:4-9; 눅 9:23; 고전 15:31). 그 구체적인 실천을 위해 먼저 날마다 일정한 시간을 할애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자기를 경건하게 하며, 하나님의 뜻을 알도록 하는 일에 사용하고, 아주 적은 액수라도 자기 수입의 일정액을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 구제하는 등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쓰도록 해보자(마 19:21). 그리하면 더 큰 경건의 일을 할 수 있는 길을 하나님께서 밝히 보여 주실 것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우리에게 대한 순종의 요구는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모범을 보이신 바와 같이 자기 낮춤 및 자기 회생과 동의어이다.
5:1 대제사장마다. - '‥‥‥마다.'라는 말은 예외가 없음을 나타내는 표현이다(Brown), 저자는 본절에서 구약시대에 아론을 뒤이어 대제사장이 된 모든 사람은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사람 중에서 선택된 자였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이 말을 사용하였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 - 이 '사람'이라는 말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암시되어 있다. 하나는 대제사장은 반드시 인간 중에서 선택되어져야 했다는 자격 요건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제까지 의 대제사장은 그 자신도 불완전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는 인간이 아니고서는 인간의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의 죄를 속하는 속쬐 제사를 드리던 대제사장은 반드시 인간 중에서 선택되었으며(2절), 또한 이제까지의 대제사장들은 아담의 타락 이래 죄책을 전가받아 원죄를 입고 태어난 동일한 인간이었기 때문에 인간의 죄를 곡하는 온전한 대속 제사를 드릴 수 없었음을 뜻한다(3
절). 그러나 이와 달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없으시면서도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친히 인간이 되시고 자신의 몸으로 속죄 제물을 삼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으니 더 이상 인간의 죄를 속하기 위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되었다(히 9:11-28). 한편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라는 사실에 대하여서는 그랜드 종합교리 '인간론' 중 '죄의 전가' 부분에서 상세히 다루었으니 참조하라.
하나님께 속한 일. - 단적으로 설명하면 이 일은 속죄의 일이다. 죄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거스르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인간의 죄를 사해 줄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자신이시다. 그런데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당신과 사람들 사이에서 중보 사역을 담당하도록 세운 이가 제사장들이며 그 제사장들 가운데서도 그들을 대표하는 자가 곧 대제사장인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레 21장 자료노트, '대제사장과 제사장의 차이점 비교'를 참조하라. 이 대제사장의 주요 직무 중 하나는 이스라엘의 종교력으로 7월 10일의 대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가 자신과 이스라엘 온 백성들의 죄를 속하는 속죄 사역을 행한 것이다(레 16:23-28). 이 속죄일의 속죄 제사는 제사장들이 드릴 수 없고 오직 대제사장만이 드릴 수 있었는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속하기 위해 성취하신 대속 사역을 예표하는 것이었다(히 9:11-15).
사람을 위하여. - '위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페르'( )를 '~을 대신하여'가 아닌 '~을 위하여'로 번역한 것은 정확한 번역이다. 대제사장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사람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일하던 중보자였다.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 3절에 비추어 볼 때 이는 대제사장이 1년에 한번 속죄일에 자신을 포함한 온 백성의 죄를 속하는 제사를 드렸던 것을 가리킨다(레 16장; 23:27; 25:9). 한편 여기서 '속죄하는 제사'(뒤시아스 휘페르 하마르티온)는 죄를 속하기 위한 회생 제물을 가리킨다. 그런데 '예물'(도론)이 이 '희생 제물'과 동일한 의미로 쓰인 것인지 아니면 번제물푸 함께 드리는 소제물(素祭物)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이 번제물과 소제물에 관해서는 본서 2권 레 서론 특별자료, '구약 제사의 종류와 그 상징적 의미'를 참조하라.
5:2 무식하고 미혹한 자. - 본절에서 말하는 '무식'은 일반적인 지식의 결핍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미혹한 자'라는 것은 고의적으로 뻔뻔하게 범죄한 것이 아닌 앞의 무지로 말미암아 범죄하는 자를 지칭한다. 따라서 '무식한 자'와 '미혹한 자'는 거의 동의어이다(Brown). 아담의 타락 이래 부패한 죄의 성향을 지닌 인간은 그 죄성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멀어졌고, 하나님과 멀어짐으로 다시 범죄하는 죄의 악순환 상태에 빠져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간을 죄 가운데서 구원할 수 있는 자는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용납할 수 있는 것. '용납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트리오파데오'( )는 신 · 구약을 통틀어서 여기서만 보이는 낱말이다. 이 낱말은 '온화한'이란 의미의 '메트리오스'( )와 '느끼다'또는 '고통을 당하다'는 뜻을 가진 동사 '파데오'( )가 합성되어 만들어진 용어로 '동정심을 갖다', '부드럽게 대하다'라는 의미이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B.C.384-322)는 이 낱말을 스토아 학파가 말하는 무정념(無情念) 또는 감정의 결여라는 의미의 '아파데이아'( )에 대한 반대 개념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본절에서 이 말은 다른 사람들의 사정을 충분히 이해하여 사려깊게 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대제사장 역시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의 사정을 헤아릴 수 있다는 의미이다.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 - 본절에서 말하는 '연약'이란 단순히 '힘이 없는 상태'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의 죄성에서 스스로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 또는 도덕적으로 완전하지 못한 상태를 가리킨다(히 4:15). 즉 아론의 뒤를 이은 모든 대제사장 역시 아담의 범죄 이래 원죄를 입고 태어난 인간들이기 때문에 완전하지 못한 자들인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와 같은 처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사정을 헤아릴 수 있는 것이다.
5:3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 구약 시대 당시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번 이스라엘 종교력으로 7월 10일의 속죄일에 자신은 물론 온 백성들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속죄 제사를 드린 것을 가리킨다(레 16장). 이 속죄일 규례에 관한 보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신명기 서론 특별자료, '히브리인의 절기'를 참조하라.
자기를 위하여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 '마땅하니라'는 말은 그것이 반드시 행해져야 하는 의무임을 암시한다(Barmby). 거듭 말하거니와 모든 인간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부패한 성향을 지닌 자들로서 대제사장도 예외일 수 없었다. 때문에 대제사장은 속죄일에 자기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린 것처럼 자신을 위한 속죄제를 드려야 했다(레 16:6-17). 한편 이러한 사실은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이 드린 속죄제사가 결코 인간의 죄를 단번에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 못됨을 시사해 준다. 그러나 친히 인간이 되셨으면서도 죄가 없으시며 모든 인간의 연약함을 체휼하신 예수 그리스도(히 4:15)께서는 타인, 곧 인류를 위해 영원하고도 완전한 속죄 제사를 드리셨다. 이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대제사장 중의 대제사장이신 큰 대제사장이요(히 4:14) 모든 인간의 참 중보자이신 것이다(Hodges).
5:4 이 존귀는…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 '이 존귀'란 대제사장의 직분의 존귀함을 의미한다. 대제사장은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 사이에서 중보자 역할을 하는 자이기 때문에 그 직분이 존귀했다(1절). 더욱이 이러한 대제사장직은 인간이 스스로 자원하여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론을 대제사장으로 세운 이래 아론 자손만이 세습할 수 있었다(출 28:1,43; 29:1-9). 그런데 이처럼 대제사장이 하나님에 의해 세움받은 자라는 사실은 하나님의 택하신 모든 성도들을 위한 '큰 대제사장' (히 4:14)이신 예수 그리스도 역시 마찬가지였다(5,6절).
5:5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 '이와 같이'란 대제사장이 하나님에 의해 부르심을 받은자인 것 같이란 말이다(4절). 이제까지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의 자격 요건에 대해 언급한 저자는 이제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큰 대제사장이시며 온전한 대제사장이신가를 설명하려 한다. 즉 앞에서 저자는 이스라엘 백성의 대제사장이 되려면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 조건 중 하나는 사람이어야 하며(1절),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한다는 것이었다(4절). 본절은 이 가운데 두 번째 조건에 대한 언급이다. 즉 이스라엘의 대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소명(召命)에 의해 대제사장이 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도 스스로 인류의 중보자가 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인류의 중보자가 되셨다는 것이다(요 5:30,43; 8:54; 17:5; 빌 2:6,7). 따라서 인류의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대제사장으로서의 두 번째 조건에 부합한 자라는 것이다.
말씀하신 이가 저더러 이르시되. - 여기서 '말씀하신 이'는 그리스도를 인류의 중보자로 택하여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을 지칭하며, '저'는 하나님의 명을 받아 인류의 중보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다. - 시 2:7의 인용 구절이다. 이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세움받은 왕인 다윗의 왕권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노래한 것이나 궁극적으로는 영원하신 만왕의 왕이신 메시야에 대하여 예언한 것이다.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들과 달리 근본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강조하기 위해 이를 인용하여 그리스도께 적용하고 있다. 즉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들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 대제사장이된 점에 있어서는 동일하나 그 근본상 차이가 있음을 들어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처럼 본서 저자가 본서에서 계속해서 구약 율법의 규정에 따라 직분을 수행한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직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이 보다 우월함을 논증한 이유는 다음과 같은 까닭에서 이다. 즉 유대교도들이 부인하는 것과 달리 예수 그리스도께선 정녕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이시며,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에 대하여 믿는 기독교야말로 하나님의 구원 약속을 믿는 구약의 정통 신앙을 계승한 종교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이로써 당시 유대인 성도들 가운데 이런 저런 이유로 다시금 유대교에로 되돌아가려고 하던 자들의 어리석음을 경계하기 위해서이다.
5:6 네가 영원히…제사장이라. - 시 110:4의 인용 구절이다. 이는 메시야 예언시로서 단순한 제사장직만이 아니라 왕의 지위까지 겸하실 그리스도에 대하여 예언한 것이다. 저자는 그리스도께서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들보다 더 우월한 대제사장이심을 강조하기 위해 이를 인용하여 그리스도께 적용하였다.
멜기세덱의 반차. - '멜기세덱'(Melchizedek)이라는 이름의 뜻과 그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창 14:18의 주석에서 상세히 다루었으니 참조하라. 그는 '평강의 왕'이었으며 아브라함으로부터 십일조를 받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다(창 14:18-20). 이러한 멜기세덱은 만왕의 왕이시며 큰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자였다. 즉 그는 시작과 끝이 알려지지 않은 신비로운존재로서 하나님의 비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였다(히 7:3), 또한 멜기세덱이 모세 율법 이전 시대의 인물인 것처럼 그리스도 역시 율법이 제정되기 전부터 계셨다. 본서 저자는 이 멜기세덱이 예표하는 만왕의 왕이시요 대제사장이신 이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본절 이하에서 논증하고 있다. 이 멜기세덱에 관해서는 히 7장 자료노트, '멜기세덱의 정체'에서도 다시금 다루고 있으니 참조하라.
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 예수께서 성육신(成肉身)하셔서 인간으로 지내셨던 공생애 기간을 가리킨다(Brown).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대제사장이 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인 사람이어야 한다는 조건(1절)을 충족한 사실을 언급하는 구절이다.
자기를 죽음에서능히 구원하실 이. -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성부 하나님을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는 철저하게 성부 하나님께 순종하였다. 그는 성부께서 보내시는 대로 인류를 위한 희생양으로 이 땅에 오셨고, 대속 사역을 성취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으며, 그 후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죽음에서 부활하여 다시 승천하셨다. 근본 죄 없으신 그리스도께선 자신으로 인하여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을 필요가 없으셨으며 하고자 하신다면 하나님께서도 그를 능히 구원하실 수 있으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담 이래 타락한 인류의 죄값을 대신 갚는 대신 인간을 구원해 주시고자 그리스도를 대속제물로 삼으셨으며 그리스도는 죽기까지 그러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었다.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 이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그리스도께서 대속 죽음을 앞두고서 피와 땀을 흘리며 마지막 기도를 성부께 올린 겟세마네의 기도를 가리킨다(마 26:36-46; 막 14:32-42; 눅 22:40-46: 요 18:1). 물론 주님은 이전에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을 위하여 우신 적이 있다(눅 19:41; 요 11:35). 그러나 전인류의 무거운 죄를 짊어지고 대신 죽어야 할 순간을 눈앞에 두고 주님은 말할 수 없는 인간적 고통과 번민을 안고 성부께 울며 기도하고 간구하고 소원하였다. 그 기도는 할 수만 있으면 죽음을 면하게 해주실 것이나 오직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시라는 것이었다.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고자 한 것을 의미한다.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 이것은 할 수만 있으면 죽음을 면하게 해달라고 한 예수의 기도가 응답된 것을 뜻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또한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인 인간의 죄를 속하기 위한 대속 사역을 온전히 성취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지 사흘 만에 다시 사신 것도 의미한다(Hodges). 이것은 실로 하나님께서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간구한 그리스도의 기도를 들으신 결과가 아닐 수 없다.
5:8 그가…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 여기서 '배웠다'는 것은 알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되도록 훈련하였다' 또는 '습득하였다'는 의미가 아니라 몸소 '체험하였다'는 의미이다(Alford, Moffatt, Vincent). 즉 예수 그리스도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을 위하여는 전혀 고난 받으실 필요가 없었지만(빌 2:6), 성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법인 구속(救贖)의 법을 성취하시고자 구약의 거듭된 약속과 예언에 따라 자기의 신적 영광을 버리시고 성육신하시어 고난 중에도 항상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사셨다(눅 2:48; 요 8:29; 빌 2:7). 한편 인간은 대개 평안할 때에는 하나님을 찾지 않고 교만하며 불순종하기 일쑤이다. 그러다가 고난을 당하면 그제서야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무릎꿇곤 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본을 받아 평상시 평안하며 부유한 중에도 자신을 부인하며 오직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아름다운 삶은 없을 것이다.
5:9 온전하게 되었은즉. - 8절과 연결해서 볼 때 우리는 고난은 순종을, 순종을 온전함을 낳게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스도는 고난 중에 성부께 순종하여 인간 구원을 위한 대속 사역을 성취하셨으며, 그로써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인정받으셨다(Theodoret, Bleek, Westcott).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 -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셨듯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 그리스도의 뒤를 좇는 모든 성도들을 가리킨다(마 16:24).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 '영원한 구원'은 그리스도 재림시에 성도들에게 주어질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생을 의미한다. 한편 '근원'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이티오스'( )는 '원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는 모든 구원 얻는 자의 씨앗이요 원인이며 첫열매가 되신다. 따라서 성도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일에 믿음으로 참예함으로 그를 따라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다시 살아나 영원한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롬 6:4,5).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믿는 모든 성도들의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시다.
5:10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 - 6절 주석 참조.
5:11-14 영적 미성숙함에 대한 책망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으로서의 사역을 논하는 본서 본론의 중반부인 4:14-10:18 가운데서 저자는 서론에 해당하는 4:14-16에서 그리스도의 큰 대제사장되심을 단적으로 선언하고, 그 다음 단락인 5:1-10에서는 그리스도가 어떠한 자격을 가졌기에 큰 대제사장이 되실 수 있는가를 논증하였다. 그리고 이제 본격적으로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으로서의 직분과 사역을 논하기에 앞서, 2:1-4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5:11-6:20에서는 앞단락의 내용을 빌미로 영적으로 미숙한 독자들에게 배교(敎)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경고하고 있다. 이처럼 하나의 삽화처럼 삽입되어 있는 5:11-6:20은 본서 본론 중반부의 주제에 충실한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으로서의 자격을 논하는 5:1-10과 구약에서 그리스도 제사장직의 모형인 멜기세덱의 대제사장으로서의 사역과 대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사역을 논하는 7:1-10:18 사이에 삽입되어 있다.
이 경고의 내용은 본서에서 모두 다섯 번 등장하는 경고 중 세 번째에 해당하는 것으로 본문에서부터 6:20에 이르기까지 계속된다. 2:1-4 문단강해 참조. 그리고 이 세 번째 경고는 그 내용이 다시 ① 미성숙함에 대한 책망(5:11-14), ② 성숙된 신앙에로의 권면(6:1-3), ③ 배교의 무서운 결과와 그에 대한 경고(6:4-8), ④ 인내로 소망을 굳게 잡으라는 격려(6:9-20) 라는 네 부분으로 나누인다.
이러한 맥락하에 본문은 그 네 부분 중 첫 번째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여기서 저자는 독자들에게 멜기세덱에 관하여 자세히 설명해 주고 싶으나 독자들이 오랜 신앙 생활을 했음에도 영적으로 장성하지 못하고 어린 아이의 신앙 단계에 머물러 있어(12절) 설명하기에 곤란을 겪고 있다는 애로사항을 토로함으로써(11절) 독자들의 신앙적 미성숙함을 간접적으로 책망한다(13,14절).
한편 저자는 신앙의 미성숙 상태를 어린아이의 비유로 설명한다. 즉 아이는 부모의 양육(養育)으로 장성하여 성인(成人)이 되면 부모의 도움 없이 성인이 먹는 음식을 먹고 어려운 일들을 해결하는 능력을 습득하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중생한 영혼도 처음에는 미숙한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으나 장성한 신앙인의 가르침과 인도함을 통해 성숙하게 되어 스스로 충만한 영적 생활을 하고 마침내에는 남을 인도하고 가르치는 위치에까지 이르러야 하는 법이다(엡 4:14).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기형적 성장이라 불리우게 되며, 그로써 그는 영적 부모되신 하나님께 근심을 끼치게되는 동시에(엡 4:30), 그가 몸담고 있는 교회 공동체에 누를 끼치게 된다.
그러므로 성도가 된 자는 자기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부모되시는 하나님과 형제된 다른 성도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라도 영적인 진보를 가지도록 자기를 성장시키는 일에 노력해야 한다. 그 노력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일은 매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묵상하는 일이다(수 1:8; 시 119:15). 말씀은 영의 양식이므로(요 4:34; 6:27) 말씀을 먹지 않고는 영적 영양 공급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읽은 말씀에 따라 매일 선하고 의로운 일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일이다(딛 2:5; 약 3:17,18). 말씀에 따라 하는 선행은 육신의 성장을 운동이 촉진시키는 것과 같아서 우리 영의 균형을 잡아주고 강건하게 하며 장성하도록 해준다.
5:11 멜기세덱에 관하여는…할 말이 많으나. - 본서 저자는 멜기세덱의 제사장직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의 유사성에 대해 아주 심도 깊은 논의를 하고 자원했으며 그것을 위해 많은 준비를 한 듯하다. 그러나 저자는 한편으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심도 깊은 논의를 독자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곡해할까 염려하였다. 그래서 저자는 멜기세덱에 관한 논의의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이 같은 주제의 중대성과 심오성을 독자들에게 인식시키고자 하였을 것이다.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 '둔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노드로스'( )는 부정접두어 '네'( )와 '멀다'는 의미의 동사 '호데오'( )가 합성된 낱말이다. 이 낱말은 히 6:12에서 '게으름'으로 번역되었는데 본절에서는 신경이 둔하고 무감각한 것을 뜻한다.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Platon, B.C. 427?-347?)도 그의 저서에서 어리석고 깨달음이 느린 자기 제자를 이 단어로 호칭하였다고 한다(Robertson).
5:12 때가 오래므로…선생이 될 터인데. - '때가 오래 되었다'는 말은 본서의 수신자들이 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한 지 오랜 시일이 경과했음을 의미한다. 아이가 태어나면 정상적인 경우 세월이 흐름에 따라 성장하여 성인이 되듯이 신자도 중생하여 정상적인 영적 성장 과정을 거쳤다면 마땅히 세월이 흐른 뒤에는 계속해서 복음의 진리에 관해 가르침을 받는 자가 아닌 지금까지 듣고 깨달아 확신한 복음의 진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서의 독자들은 그렇지를 못했으니 저자는 이에 대하여 염려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 - '말씀'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로고스'( )로서 '계시된 말씀' 또는 '기록된 말씀'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말씀'은 처음에 모세 오경이나 구약 성경 전체를 가리켰으나 이후에는 신약 복음서를 합친 책 그리고 더 나아가 신 · 구약 성경이 완성된 이후에는 신 · 구약 성경 전체를 가리키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란 기독교 신앙의 근간이 되는 매우 기본적이고도 기초적인 진리를 의미한다. 그런데 본서의 독자들은 그리스도를 믿은 지 오래되었음에도 그들의 영적 게으름 때문에 성장하지 못하여 남을 가르치기는 커녕 자신들이 아직 더 이 같은 기독교의 기본 진리에 관해 배워야 하는 한심한 상태에 머무르고 있었다.
젖…단단한 식물. - '젖'과 '단단한 식물'은 인간의 소화 능력을 가늠케 하는 좋은 대조물이다. 단단한 식물은 튼튼한 치아와 건강한 위를 전제하기 때문에 온전한 성인이 먹는 음식을 의미하며, 젖은 어린 아이나 먹는 음식이다(고전 3:2).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는 젖과 같이 영적으로 미숙한 자들의 것이며, 말씀의 심오한 진리는 영적으로 성숙한 자들의 것이다. 그런데 본서의 독자들은 젖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도 다 소화시키지 못하였으니 그들의 영적 미성숙 정도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 이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즉 본서의 독자들은 영적 성장을 위해 노력하지 아니한 결과 자신들을 그처럼 낮은 수준의 신자들로 전락시키고 만 것이다(Vincent).
5:13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 '의의 말씀'이란 12절의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 '젖'과는 대조되는 '단단한 식물'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것은 좁게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에 관한 지식을 의미하지만(Moffatt, Bleek, Strathmann) 넓게는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에 관한 전반적인 지식을 의미한다(Chrysostom, Theophylact, Beza, Reihm, Alford). 한편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심오한 교훈을 지키지 못했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 '경험'이라는 말은 단지 지적인 깨달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인 면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리스도의 심오한 교훈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그것을 실천할 능력을 얻지 못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말씀의 초보 단계에도 이르지 못하고 있는 자는 그리스도의 심오한 교훈을 실천하지 못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5:14 장성한 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텔레이오스'( )는 본래 '성인'(成人)을 의미하는 단어로 지덕체(知德體)에 있어서 완전히 성숙된 사람을 지칭한다(고전 2:6; 3:1; 13:11; 엡 4:4; 빌 3:15). 그러나 여기서 이 말은 영적으로 성숙하여 구원에 관한 기본 진리들을 깨달아 확신하고 있으며 확신한 바 대로 따라가는 그리스도인을 가리키고 있다. 한편 우리가 사람의 성숙 정도를 논할 때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이 완성이 상대적인 완성을 뜻하는 것이지 절대적인 완성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성인은 어린아이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완전한 존재이지 절대적으로 완전한 존재가 아니다. 온 우주에서 절대적으로 완전한 존재자는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없다(마 5:48).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 - '지각'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이스데테리온'( )은 본래 감각 기관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영적 분별력을 의미한다(Robertson). 그리고 '연단받다'는 말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연구하며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나누는 중에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시는 영적 분별력을 키워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고전 2:10-15). 다음으로 본절에서 말하는 '선악'이란 단순히 도덕적 · 윤리적 의미에서의 선악이 아니라 영적인 의미에서의 선악, 곧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위배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옳고 그름을 논할 수 있는 차원의 것을 의미한다. 단단한 식물을 먹는 것과 같은 성도는 이를 능히 분별할 수 있으나 젖을 먹는 어린아이와 같은 성도는 이를 분별할 수 있는 영적 분별력을 아직 지니지 못한 자인 것이다. 우리가 성령의 장중에 사로잡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를 힘써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엡 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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