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6일이 영원한 가객 (歌客) 김광석이 세상을 떠난 지 28주기라고 한다.
사실 그가 살아 있을 때, 나는 그를 잘 알지 못했다.
그가 학전 소극장 같은 곳에서 1,000회를 넘기는 라이브 소공연을 이어 가며 대중적인 인기를 쌓던
1994년 초.중반, 나는 일본 주재원으로 발령받아 해외 첫 부임지에서 고군분투하고 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는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라, 2시간 밖에 안 걸리는 가까운 일본에 살면서도,
한국 소식이나 뉴스를 접하는 건 이틀인가 뒤에 배달돼 오는 한국 신문을 보는 게 유일한 창구였다.
아니면 가끔 오는 출장자들의 입을 통해 듣는 게 고작이었다.
그런 김광석을 알게 되고 그의 노래에 빠져 든 건, 1999년 한국으로 귀국하고 난 다음이었다.
나왔다 하면 대 히트를 치는 국산영화 봇물 속에 우연히 본 [공동경비구역 JSA]라는 영화에서,
북한군 병사 역으로 나온 송강호가 남측 병사와 나누는 대화에
“야. 김광석인 왜 그렇게 빨리 갔다냐?“라는 대사가 나온다.
배경음악에는 김광석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1996년 1월6일, 서른둘의 나이로 유서 한 장 남기지 않고 스스로 세상을 떠난 김광석의 죽음은
30년이 다 돼 가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의문이다.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면서 가장 활발하게 음악 활동을
하던 시기였기에 더욱 미스터리다. 당시 그의 아내는 "남편이 가수생활 10년 만에 라이브콘서트
1,000회 기록을 세운 뒤 '더 이상 음악적인 발전을 이룰 수 없다'며 자괴감과 허탈감에 시달려왔다"고
말한 것에서 자살의 이유를 미심쩍게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포크계열 대중음악의 새 지평을 열었다고 까지 평가되는 천재(天才) 김광석의 32살 삶은 너무 짧았다.
그러나 그가 남긴 음악은 너무도 강렬했다. 나는 거의 30년 먼저 같은 방법으로 세상을 떠난,
또 다른 천재 전혜린을 떠 올린다. 스무 살 무렵 나는, 그때 젊은 친구들 모두가 그랬듯이, 전혜린의
고독과 우수에 깊이 심취해 있었다.
(전혜린은 1965년 만 31살의 나이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두 천재는 공교롭게도 1월에 태어나, 또 1월에 같은 방법으로, 거의 같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서른 즈음에.
이등병의 편지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사랑했지만.
흐린 하늘에 편지를 써.
일어나.
먼지가 되어.
거리에서.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
김광석의 어느 곡하나 심금을 울리지 않는 곡이 없지만, 내 가슴을 절절히 후벼 파며 나를
김광석 마니아로 몰고 간 노래는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이란 곡이다.
2000년대 초반 조승우. 손예진 주연의 [클래식]이란 영화의 OST로도 나온 노래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가사 전문
(이 가사는 류 근이라는 시인이 쓴 시다. 당시 무명시인이던 류 근에게
김광석이 곡을 붙이고 싶다고 연락해 와 탄생된 노래라고 한다.)
그대 보내고 멀리 가을 새와 작별하듯
그대 떠나보내고 돌아와
술잔 앞에 앉으면 눈물 나누나
그대 보내고 아주 지는 별빛 바라볼 때
눈물 흘러내리는 못다 한 말들
그 아픈 사랑 지울 수 있을까
어느 하루 비라도 추억처럼
흩날리는 거리에서
쓸쓸한 사람 되어 고개 숙이면 그대 목소리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어느 하루 바람 젖은 어깨
스치어 지나가고 내 지친 시간들이
창에 어리면 그대 미워져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이제 우리 다시는
사람으로 세상에 오지 말기
그립단 말들도 묻어버리기
못 다한 사랑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최근에도 수많은 후배 가수들이나 오디션 출연자들이 이 노래를 리메이크하고 도전했고
나름 성공하는 듯 보였지만 명불허전 원곡자를 따라 넘을 가수는 없다는 게 정설이다.
김광석의 노래에는 특유의 음색이 전하는 슬픔과 한(恨)이 있다.
그 슬픔과 한은 목 놓아 울고 싶은 그런 것이 아니라, 내면의 울림을 만나 한 단계 승화되어지는
슬픔이며 한이다. 김광석의 노래는 이렇듯 사랑을 더 열렬하게 하고, 이별을 더욱 애틋하게 하며
삶을 진지하게 만든다. 그의 노래는 정갈한 고독과 우수를 느끼게 하고,
시적인 울림으로 공명한다.
음유시인 김광석을 죽은 뒤에도 오랫동안 기억하고 그의 노래를 사랑하는 이유다.
평론가를 포함한 문인들에게 문학과 가장 잘 어울리는 가수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이구동성으로 김광석을 꼽았다고 한다. 그의 짧은 생애가 불꽃같은 삶을 살다간
어느 천재 요절시인과 닮았고, 맑고 서정적인 목소리가 시적이며, 아픔과 허무가 밴
노랫말과 가락이 모두 문학적이란 것이다.
‘서른 즈음에’는 음악평론가들이 뽑은 1990년대 이후 가장 아름다운 노랫말 1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김광석이 지금 살아 있다면 올해가 환갑이 되는 해다.
28년이 흐른 지금까지 그의 노래는 끊임없이 리메이크 되고 다양한 공연을 통해
새롭게 조명됨으로써 살아있는 웬만한 가수보다 활동 폭이 넓고
우리들 삶 속에 살아서 함께 호흡하고 있다.
그가 태어나고 떠난 달이 모두 1월 이어서일까.
매년 이맘때면 그를 추모하며 곳곳에서 ‘김광석 다시 부르기 열풍’ 이 일어난다.
그의 고향인 대구 대봉동 방천시장 옆에 조성된 ‘김광석 길’은 대구의
대표적인 관광명소로 자리 잡아, 주말과 휴일이면 2천 명에 달하는
탐방객들로 종일 붐빈다고 한다.
나는 삶이 울적하고 힘들다고 느낄 때, [서른 즈음에]를 들으며 위안을 찾는다.
지나 간 추억의 애틋한 한 장면을 회상하고 싶을 때,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을 듣는다.
조금은 무기력하고 나약해진 나를 느낄 때면, ‘일어 나.일어 나.
다시 한 번 해보는 거야’라고 힘을 북돋아 주는 [일어 나]를 들으며
새로운 각오를 다지곤 한다.
이제 나도 벌써 60대 중반의 나이가 되고 보니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도
새삼 가슴에 와 닿을 것 같다. 요즘이야 60대를 노부부라고 얘기하진 않는다.
30년도 더 지난 싯점에서 얘기한 것이니 요즘으로치면 80대 노부부라고 해야
맞지 않을까 싶다.
이역만리 머나 먼 땅에서, 영원한 가객 김광석을 추억하며 하모니카의
청아한 음률로 시작되는 그의 노래를 듣는 이 밤이 너무 좋다.
순전히 내 개인 취향일지는 모르지만, 지금까지 김광석을 몰랐던 누구라도
유투브에서 한 곡만 찾아 들어 보면, 그의 노래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는다.
P.S. 몇 년 전 썼던 글 조금 수정하여 올립니다.
문득 생각해 보니 1월이 다 지나가고 있네요.
김광석이 떠난 간 1월을 그냥 보내면 안 될 거 같아 추억을 소환해 봅니다.
첫댓글 저도 90년 초 이민 후에는 아는 노래나 가수가 거의 없이 일만 하고 살다가
역이민 후에야 김광석 이라는 가수의 노래를 많이 듣게 됐습니다.
참 좋은 노래가 많더군요. 각종 경연 프로그램에서도 많이들 부르구요.
노래마다 그 가사들이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일으키는것 같습니다.
좋아요
시의 한 글귀, 노래의 한 음절 속에 녹아 있는것을 알아차리는건 무척 귀한것이라 여깁니다
하루 하루 해지고 나면
김광석 노래를 들었었던 때가 생각나구요
컴퓨터책상엔 레드와인잔이 늘 올려져 있었지요,
또 하루 멀어져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김광석 노래를 모르고 살다 아는 분 집에서 우연히 듣게 되어 알게 됐습니다. 그의 주무대 학전이 마지막 공연 후에(지하철 1호선)폐관을 한다는 소식이 있었는데 사연이 전해지자 학전 출신 가수와 배우들이 힘을 합해 유지하려고 한답니다. 김민기씨 건강도 좋지 않고 경영난으로 힘든 상태지만 2월부터 무보수 릴레이 공연을 계획하며 학전 어게인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저도 미국서 알게된 가수인데요. 심금을 울리는 노래실력... 단명해 넘 아쉽죠.
배호, 김정호, 김광석 등 단명해서 팬들의 마음이 많이 아팠어요!
간만에 송삿갓님 덕분에 노래 잘 들었습니다!
웬지 모를 애잔함을 지닌 목소리가 심금을 흘립니다. 대부분 노래들이 가슴을 후벼파죠. 너무 많이 들으면, 가슴이 너덜 너덜 해지니 조심해야 합니다.
듣거나 부르기만 할 땐 그저 그런가보다 잘 모르겠더니
이리 문자화시키니 가사가 절절히 가슴저리네요
의문의 죽음에 얽힌 한 르포 프로그램도 있었는데..
사실 원곡자를 넘는 곡은 별로 없더라구요
그러게요
학전이 주무대였다는 것을 뉴스로 들었어요
잘 해결되어 좋은 예술작품들을 다시 만날수 있는 공간으로 이어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