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명 : 나시모토 마사코 (梨本方子) 출생 / 사망 : 1901년 11월 4일 - 1989년 4월 30일) 가 족 : 영친왕 이은 황태손 이구 학 력 : 한국 외국어 대학교 박사 경 력 : 1989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1982년 광명시 명혜학교 이사장 1975년 수원시 자혜학교 이사장 나는 한국인이고 내가묻힐곳도 한국입니다 - 이방자
이방자여사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비로 의민태자 이은(李垠)의 비이다. 이방자라는 이름은 남편의 성을 따서(일본의 여자는 시집을 가면 남편의 성을 따르므로) 방자라는 이름은 마사코의 한국식 발음이다. 1901년 11월 4일, 메이지 천황의 조카이자 황족인 나시모토노미야(梨本宮) 모리마사(守正)와 그의 부인 이츠코(伊都子)의 장녀 마사코(方子)로서 도쿄에서 태어났다.
사촌인 구니노미야 나가코(후에, 나가코 황후가 됨) 및 화족 이치조 도키코 등과 함께 황태자 히로히토의 강력한 배우자 후보로 떠올랐으나 미미한 정치적 기반과 불임의 가능성을 이유로 1916년, 유학을 명목으로 일본에 볼모로 있던 대한제국 황태자 이은과 약혼하였다. 1920년, 일본 황실의 교육기관인 학습원(學習院) 여자고등과를 거쳐 같은 해 4월 28일, 도쿄 록폰기의 이왕저에서 이은과 결혼식을 올렸다. 비록 일본의 불순한 의도로 이루어진 정략 결혼이었으나 둘의 사이는 화목했고 불임이라는 진단과는 달리 1921년, 장남 진(晉)을 낳았다. 그러나 이듬해, 첫돌도 채 지나지 않은 진을 조선 방문 중에 잃는 슬픔을 겪었으며 또한 1923년, 관동대학살로 무고한 조선인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며 충격과 자책의 나날을 보냈다. 1931년, 둘째 구(玖)를 낳고 다시 단란한 생활을 하였으나 1945년, 일본의 패전 후 이왕가(李王家)가 폐지됨에 따라 신분이 강등되어 재산을 몰수당하고, 의민태자의 복권을 두려워 했던 이승만 대통령의 방해로 귀국마저 좌절되자 재일 한국인으로서 고된 삶을 살았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 새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초청으로 1963년, 가족과 함께 귀국하여 한국 국적을 회복하고 창덕궁(昌德宮) 낙선재에 기거하였다. 이후, 한국에서 지내며 평소 남편과 구상해 온 복지 사업을 시작해 1963년, 신체장애자재활협의회 부회장에 취임하기도 하였으며 1966년, 심신 장애자들의 재활을 위해 자행회(慈行會)를, 1967년, 농아 및 소아마비자들의 사회 적응을 위해 명휘원(明暉園)을 각각 설립하는 한편, 해외 모금 활동과 칠보(七寶)를 통해 복지 사업 자금을 모았다. 1970년, 남편을 잃고 1971년, 정신박약 어린이들의 교육을 목적으로 수원에 자혜학교(慈惠學校)를 설립하였다. 1973년, 숙원 사업이었던 영친왕기념사업회를 발족시켰으며 1982년에는 광명의 명혜학교(明惠學校) 이사장으로 재직하는 등 어려운 생활 여건 속에서도 복지 사업에 정열을 쏟아 한국 장애인들의 어머니로 추앙받았다. 일본에는, 한국인들의 존경을 받은 유일한 일본인으로 알려져 있다. 말년에는 직장암으로 수술을 받은 후 일본에 있는 아들 구(玖)와 함께 지내기도 하다가 1989년 4월 30일, 서울 창덕궁 낙선재에서 운명하였다. 장례는 1989년 5월 8일, 각계 인사 등 1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민장으로 치러졌으며 경기도 남양주 금곡동 홍유릉 영원(英園)에 의민태자와 합장되었다. 생전에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훈하였고 그 밖에도 서울특별시문화상, 적십자박애장 금장, 5.16 민족상, 소파상 등을 수상한 바 있으며 많은 저서를 남겼다. 국민훈장 무궁화장에 추서되었다.
장남 이진(李晉, 1921년 8월 18일 - 1922년 5월 11일). 조선을 방문했다가 귀국을 하루 앞두고 의문의 독살을 당했다. (정확한 사유는 밝혖지 않고 있다)
차남 이구(李玖, 1931년 12월 29일 - 2005년 7월 16일). 부인은 미국 태생의 줄리아 멀록. 부친의 죽음 이후 황실의 수장을 맡아 한국에 거주하다가 아내와 별거했으며, 사업에 실패하자 일본으로 돌아가 이혼하였다. 일본에서 지내던 중 2005년 7월 16일, 자신이 태어난 자리이기도 한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에서 사망하였다.
일본신문에 실린 방자여사
실제 영친왕과의 결혼이 실린 사진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낙선재 입궁할때
돌아가시기 얼마전모습인듯.
일본의 황녀로 태어나 신식교육과 황실교육을 받고 자라던 어린 마사코가 조선의 황태자비가 되어 파란만장을 살다 돌아가시기 까지는 많은 우여곡절과 시련이 많이 하였던것 같다. 방자여사는 어린시절 부터 작은 생물 하나도 하찮게 여기시지 않는 따뜻한 성품을 지녔다고 전해진다. 일본에서도 조선에서도 환영 받지 못했던 분이었고 비록 일본분이시긴 하지만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비라는 본분을 잊지 않으시고 돌아가시는 날까지 한국의 사회복지활동에 힘쓰시다 눈을 감으셨다고 한다.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조선 황실에서 좋지 않은 시선과 배척을 당하시기도 하셨지만 당당히 황태자비로써의 삶을 꿋꿋히 살아가신 방자 여사는 87년 파란 만장한 삶을 뒤로 한채 남편 이구 황태자님의 곁으로 떠나셨고 지금은 홍류능에 잠들어 계신다. 순탁하지 않았던 일생이었지만 남편의 뜻에 따라 조선인으로 남고 싶었던 이 일본여인... 그녀는 진정 한국인이고 싶었을까? 고향이 그립지는 않았을까? 일본드라마중 무지개를 이은 왕비를 보게 되었는데 그 드라마를 보고 이방자 여사에 대해 더욱 많이 알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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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요위 글 설명부분에 두군데 잘못적힌 글자가 있어요 ,,하난 둘째아들 구를 진으로 두번짼 남편 이은을 이구로 잘못적었네여,
아네
죽을 때 까지 **나는 한국인이다**라 말씀 하셨다는일본의 침략적 찬탈로 인한 한 인간의 삶이 전장의 희생양이 된건 물론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님 뿐 만은 아니지만요
어디 이분들 뿐이겠습니까.....얼마나 많은사람들이.....
잘 읽었습니다.
잘 봤습니다비극적 역사의 희생양이지요
그렇지요...정략적인 결혼의 비극이죠......
역사의 긴한 자료사진 이군여/.....두나라의 현실속에서도 의연이 여인의 삶과 더불어 자신의 존귀성을 잘 지켜낸 인생이 아닐까..착찹한 심경으로 머물 다 가노이다.....
좀,그렇죠........휴우
방자여사는 일본에서봣을땐 대단한것이었네요.,,,우리나라에서 봤을땐 그럭게 유쾌한 일도 아니네요..ㅠㅠ
그렇지요
가슴이 뭉쿨해지는군요 역사적으로 정략적으로 희생된 삶이라도 황실의 도를 잊지않았군요 귀한 자료 감사
청자빛님 감사합니다
와인님 이렇게 귀한 자료를 어디서 수집 하셨나요
위사진중 두장 정도는 딴곳에서 본듯하나 다른것은 모두 처음보는 사진이여요 .
정말 대단하셔요 ...
어찌하다 보니 운이좋아서 구했어요
일본여인들의 심리적 특성은 복종심이 아주강하죠.쉽게 우리네 꼬멩이시절 어머니들이 아버지를 표현하실때 우리집 쥔양반 이라고 표현하는것이 일제강점기시절 유래된말인즉.....남편이 잠들어있는 이불속에 들어갈때 행여 찬바람이 들어갈까 조심할정도입니다. 중국과달리 우리나라와 일본은 공교롭게도 무슨영향인지는 몰라도 여자비하가 심했었죠....아마도 이방자여사 역시 그 문화권에서 보고자란게 전부이기때문에 크게 다르지않다고 봐집니다. 남편이 조선의 마지막황태자였고 정략이었든 운명적이었든 나름 자신의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한국인으로 남기를 원했을거란 생각이 드네요....역사는 필연적으로 비극을 만들지요 !
일리가 있는 말씀 입니다...
우리나라도 이젠 여권신장이 많이 되었죠....
존경받을 만한 분입니다 다만 조선왕조가 문제가 있었을 뿐 ..
맞는말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