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장 17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본다.
먼저 첫 부분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두 번째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마지막 부분은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이다.
먼저 첫 번째 부분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라고 사도 바울은 말한다.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넓게는 성경말씀 전체를 가리키고, 좁게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친히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채찍에 맞게 하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게 하시고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셨다. 이로 인해서 우리의 죄는 모두가 사라지고, 오직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영접하고 그 이름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가 무엇이겠는가. 이는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것은 첫째로 하나님의 능력이요, 둘째로는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말씀의 능력은 일반 교과서나 다른 교양서적과는 큰 차이가 있다. 일반 책들에 적혀 있는 내용들은 모두 사람의 생각으로 사람이 쓴 것에 불과한다. 그러나 성경은 비록 모두 사람의 손으로 쓰여지기는 했으나 이는 사람의 생각으로 쓰인 것이 아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17절
“16.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의 뜻은 직접적으로 글을 쓴 것은 사람이지만 이를 쓰도록 하신 분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라고 하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성경 말씀에는 일반 사람의 말에는 없는 힘이 있다. 능력이 있다.
히브리서 4장 12절~13절
“12.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하나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종이에 적힌 글자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어떤 단순한 지식에 머무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예리하고 강력한 힘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감추려고 한 우리의 본 모습을 들춰 내기도 하시고, 또한 우리 안에 있는 힘을 끌어내시기도 하는 능력이 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임하게 되면 우리가 변하게 된다. 우리 마음이 변하고 우리의 인생이 변하고 우리가 보지 못했던 하나님이 보이게 되고, 우리가 보지 못했던 우리의 앞길이 보이게 되는 것이다.
이 말씀의 능력이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되면 이제 성경을 읽어도 지루하지가 않다. 오히려 더욱 그 말씀을 사모하게 된다.
간혹 성경구절을 많이 외우려고 강권하는 경우를 보게 되기도 하는데, 성경은 단순히 암기를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한 구절 가지고도,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을 묵상하게 되면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고, 우리 삶에 있어서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지 모른다. 이것이 바로 말씀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기술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의’에는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뜻도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복음을 통해서 우리의 죄가 사해졌다면, 이제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감사하며 인생을 보내면 그것이 전부인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항 안에 있는 금붕어처럼 아무것도 안 하고 한평생을 보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그렇게 무참하게 죽이셨다는 말인가.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계획이 있으신 것이다. 그렇다면 무슨 계획인가.
이 땅의 모든 사람들 중에 하나님의 계획 없이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이 계획하셔서 태어났다는 점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 계획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바로 복음 전파라는 계획이다.
사도행전 1장 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주님께서는 내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모두가 다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 안수를 받고 난 다음에 전세계에 나가야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인가. 물론 그와 같은 사명을 받은 사람도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그 받은 은사가 다르다.
요한복음 13장 34절~35절
“34.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우리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전도를 하기 위해서 사람들 귀찮게 따라다닐 필요가 없다. 지금 이 시대처럼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고 질투 시기하고, 어떻게 해서든 지지 않고 이기려고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는 이러한 세상에서, 사람들이 갈급하고 있는 것은 바로 서로에 대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그와 같을 때 우리가 예수님 이름으로 우리 이웃을 사랑하고 우리 이웃을 위해서 베푸는 모습을 그 사람들이 보게 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예수님을 믿으라고, 우리 교회 나오라고 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 말씀의 능력, 복음의 능력을 아는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얼마든지 하나님의 계획에 참여할 수가 있다. 이는 권리가 아니라 의무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면서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복음 전파라는 하나님의 계획에 참여할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두 번째 부분을 본다. 로마서 1장 17절 중반부에 의하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고 되어 있다.
이는 다른 말로 하자면, 믿음에서 시작해서 믿음으로 끝까지 이루어진다는 뜻이라고 하겠다.
우리가 “믿음”이라고 할 때 이와 반드시 함께 가져야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고린도전서 13장 13절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다시 한 번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소망’이다. 이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 보면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항상 ‘사랑’만 강조가 되고 ‘소망’은 경시되는 경우가 있으나 이 ‘소망’이라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우선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라고 하는 말씀부터 간단히 살펴 보도록 한다.
우리가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을 믿고 천국 소망을 가지고 있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사랑을 알기 때문에 믿음과 소망을 가질 수가 있다.
우리에게 믿음과 소망이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미 그 소망이 이루어졌다면 믿음과 소망은 사라지고 현실이 된다. 다시 말해서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믿음과 소망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어떠한가. 우리가 그 동안 믿어왔던 믿음과 소망이 현실이 되었다 하더라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사랑은 계속되기 때문에 사랑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믿음과 소망은 우리에게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오늘날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조상들을 보면 비교가 되지 않는다.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배를 지으라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노아는 주저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는 지금까지 본적도 들은 적도 없는 큰 배를 몇 십 년에 걸쳐 만들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노아는 좀 부족한 사람이었는가. 아니다. 창세기 6장 9절 중반부에 의하면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은가. 이는 다시 말해서 누구보다도 상식이나 교양이 있고, 올바른 가치관의 소유자라는 뜻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인물이 크나큰 방주를 짓게 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믿음의 불이 소망이라고 하는 연료통에 붙었기 때문이다.
이제 노아에게는 분명한 소망이 있다. 기대가 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만 하면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구원을 얻는다는 분명한 소망을 갖기에 이르렀으며, 그 믿음과 소망은 마침내 그와 그의 가족을 구원하게 된 것이다.
본문 중 마지막 세 번째 부분을 살펴본다.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여기서 ‘의인’이라고 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한다. 이는 우리 삶에 있어서 그 원동력이 이 세상 재물이나 명예나 권력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 말씀, 하나님 복음에 소망을 두고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소망의 반대말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절망이다. 우리는 이 절망을 경계해야 한다. 그렇다면 절망은 무엇으로부터 오는가 하면, 이는 의심에서 온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무엇보다 앞서서 물리쳐야 할 것은 어떠한 악한 영이 아니라 내 안에 자리잡고 있는 의심이 아닐까 한다.
신앙에 있어서 의심이 우리 마음 안에 자리잡게 되면 불안이 몰려오게 되고, 불안이 쌓이면 이제 불만이 표출한다. 이렇게 되면 이제 겉잡을 수가 없다. 불만이 거듭되면 두려움 다가오게 되며, 그 끝은 절망이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했었다 하더라도, 누구나가 이렇게 될 위험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우리는 한 가지를 더 알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믿음과 소망’ 사이에 무엇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믿음과 소망 사이에 있는 것은 바로 ‘환난’이다.
로마서 5장 3절~4절
“3.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우리가 아무리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살려고 노력을 해도, 때로는 환난이 찾아오기도 한다. 하지만 환난이 찾아온다고 해서 소망을 버리겠는가. 천국을 버리겠는가. 절대로 그럴 수는 없다. 오히려 이와 같은 환난 중에서도 믿음만 있으면 여기서 인내를 배울 수가 있다. 그리고 인내는 연단을 통해서 우리를 더욱 강하게 해줄 것이며, 이를 통해서 우리는 훨씬 더 큰 소망을 갖게 된다.
마태복음 7장 13절~14절
“13.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믿음 없이 소망 없이도 들어갈 수 있는 문이라면 얼마나 넓은 문이겠는가. 하지만 그 문은 절대로 들어 가서는 안 되는, 죽음으로 들어가는 문,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이다.
우리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 성경은 이 방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잠언 4장 27절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우리는 믿음과 소망의 운전대를 굳게 잡아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의인의 삶인 것이다.
이사야 40장 31절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우리는 불꽃을 끌 수 없다. 연료통을 떨어뜨릴 수가 없다. 믿음이라는 이름의 불꽃으로, 소망이라는 이름의 연료를 불태우며, 마침내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가는 축복 된 삶을 살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