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명문협 강의) 한국문학과 노벨문학상 김 송 배 (시인.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1. 노벨상에 대한 관심 우리 문인들은 매년 늦가을이 되면 북유럽 먼 땅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전해오는 노벨상 수상자 발표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노벨상은 다이너마이트의 발명자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에 따라 제정된 것으로 원래 평화상만을 설정했다가, 물리학상, 화학상, 생리의학상, 문학상으로 확대되어 5개 부문에서 수상자가 정해졌는데 후에 경제학상이 추가되어 지금은 6개 부문에서 시상을 하고 있다. 노벨은 자신에게 막대한 재산을 안겨 주었던 다이너마이트, 젤라틴 화약 등의 폭탄이 자신이 원래 의도했던 경제 개발, 도로 공사, 광산 작업 등 평화적인 목적에 쓰이지 않고 전쟁용 무기로 사용되는 것에 몹시 개탄했다. 어릴 때부터 문학적인 감수성이 예민하여 평생 동안 동서고금의 고전들을 즐겨 읽었던 노벨은 이런 사태에 우려를 금치 못하고 자신이 번 돈 모두를 기금으로 하여 인류의 평화와 복지 증진에 '가장 위대한 공헌'을 한 사람들을 선택해서 상금을 주도록 유언을 남겼다. 노벨상은 현대에 가장 큰 권위를 갖는 상으로 알려져 있어서 국력의 척도로 인정받기까지 한다. 노벨상은 그 권위를 뒷받침할 수 있는 막대한 상금으로 인해 더더욱 유명하다. 노벨이 죽을 때 남긴 기금을 관리해서 생긴 돈(당시 돈 9백만 달러)이 상금으로 지급되고 있는데, 기금 운용 상황에 따라 매년 액수에 차이가 나기는 하지만 그 액수는 어마어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벨 문학상을 보면 91년도 상금이 100만 달러를 넘고 있어서 그 권위와 상금 규모로 보아서 우리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노벨상 시상식은 매년 노벨의 기일인 12월 10일, 스웨덴 국왕이 자리한 가운데 스톡홀름에서 거행된다. 늦가을이 되면 노벨 문학상을 필두로 해서(매년 10월 셋째 목요일 발표) 각 부분 노벨상 수상자의 명단이 차례로 발표된다. 우리 나라도 노벨상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수상자가 발표될 때마다 언론에서는 수상자들의 경력과 업적을 대서특필하면서 한국에서도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기를 기대하고 있다. 특히 우리가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분야가 바로 노벨 문학상이다. 우리도 수상 작가를 충분히 갖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일본에서는 68년의 가와바다 야스나리에 이어 94년의 오에 겐자부로가 수상해서 두 번이나 영광을 안았다. 그러나 왜 우리는 아직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를 가지고 있지 못할까. 과연 우리도 노벨 문학상을 꿈꿀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들이 거듭 제기되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노벨상에 대한 관심이다. 2. 노벨문학상에 대한 반응 해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 발표시기가 되면 신문과 출판사 등에서 그 해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와 그의 작품에 대해서 요란한 보도자료를 통해 떠들어대며 여러 종류의 번역본이 등장하곤 했다. 한 계절 동안 노벨 문학상 수상 작품을 두고 신문과 출판계가 보이는 과민 반응은 문학을 위하여 기여하기는커녕 오히려 역기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사실 수상자가 터무니없이 잘못 선정되었다거나, 선정 과정에 무슨 문젯거리가 될 만한 사건이 있었다던가 하는 경우 말고는, 노벨 문학상 수상자를 결정했다는 사실 자체는 조금도 떠들썩한 보도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신문은 이런 사실을 알리고 거기에 약간의 해설을 곁들인 기사면 충분하다. 이러한 광적인 노벨상 열기의 밑바닥에는 우리 나라 사람들, 특히 지식인들의 자격지심이 깔려 있다. 노벨상 열기가 조성된 것은 애초에는 이루고 싶고, 소유하고 싶고, 정복하고 싶지만 능력이 미치지 못해, 도달할 수 없는 거리 저편에 있는 것에 대한 선망에서 비롯되었다 할 수 있다. 우리의 교육도 이런 현상에 큰 책임이 있다. 우리는 초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교육과 학구열의 성과로서 다다를 수 있는 극치가 노벨상인 것처럼 은연중 학습되어 왔던 것이다. 노벨상을 탈 수 있는 생애야말로 가장 성공한 생애라는 식이다. 스페인의 사상가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훌륭한 정치가는 국민의 열망이 만들고 훌륭한 예술가는 독자의 소망이 이룩한다'고 했다. 이것은 결국 우리의 문화적 소양이 성숙했을 때에만 훌륭한 예술가와 훌륭한 작품이 나올 수 있다는 말이다. 조금 난해하고 거부감이 일더라도 그것을 인내하면서 작품을 이해해보려는 그런 사랑의 능력을 가진 독자가 많아져야 한 문화는 고도의 성장을 이룩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경우 노벨 문학상에 대한 막연한 환상에만 집착할 뿐 실제로 작품을 창작, 번역하고 홍보하는 일에 소홀했기 때문에, 그리고 더 나아가서 훌륭한 작품이 나올 수 있는 토대를 형성하는 일에 게을렀기 때문에, 수상 가능성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 냉정한 분석이라 할 것이다. 사실상 한국 작가도 몇 번인가 노벨 문학상 후보로 추천된 적이 있다. 통상적으로 추천 사실을 비밀에 붙이게 되어 있기 때문에 정확히 누가 언제 추천되었는지를 안다는 것은 몹시 힘들다. 이례적으로 최인훈씨가 1992년 후보로 추천된 사실이 밝혀졌을 때 많은 얘기가 떠돌았던 것도 이러한 사실 때문이다. 들리는 바의 의하면 김동리, 서정주, 김지하 등 기존에 추천되었던 작가 말고도 황순원, 이청준, 이문열, 박경리, 한용운, 윤동주, 김소월 등이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이 과연 노벨 문학상을 탈 수 있을 것인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그것은 이들이 훌륭한 작가가 아니라서가 아니라 이들의 훌륭함을 알리기까지는 아직도 넘어야 할 벽이 많기 때문이다. 3. 노벨문학상 도전과 반성 우리는 지금까지 노벨 문학상에 대한 지엽적인 일들을 알아보았다. 과거의 역사에서 노벨 문학상의 수상자를 선정하는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그 상이 정치적, 경제적 강자들의 역학 관계 속에서 놀아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노벨 문학상과 한국 문학을 연관지으려고 노력할 때마다 우리는 이런 점들을 잊지 말고 우리는 현실을 냉정한 시각으로 바라봐야 한다. 노벨 문학상은 한 작가에게 주어지는 상이라기보다는 한 나라의 국력에 주어지는 상이라고 할 수 있다. 국력은 문화적인 힘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일차적으로 정치적 경제적인 힘을 의미한다. 노벨 문학상은 대체로 수상자 모국의 정치적 경제적인 지위를 반영하는 것일 뿐 진정한 문학적 업적에 대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상 정치적 경제적인 힘을 반영하는 지표는 군사력이니 무역수지니 국민총생산(GNP)이니 하는 것들이 그것이다. 사실상 노벨상은 기다리면 언젠가는 탈 수 있다. 우리의 정치적 경제적인 힘이 성장하고 서구인들의 안배가 한국에 미치지 않을 수 없게 될 때가 되면 한국 작가들 중 누구에게라도 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노벨 문학상을 가치롭게 여겼던 것은 그것이 문학적인 업적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반영한다는 환상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하지만 노벨상이 문학성과는 관계가 없는 상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잣대로 우리의 문학이 이룬 업적을 얘기할 수는 없게 된다. 다시 말해 노벨 문학상을 두 차례나 수상한 일본과 한 번도 수상하지 못한 한국의 문학적 성취도는 노벨 문학상이라는 잣대로 비교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 대해 반론이 있을 수는 있다. 그 반론은 노벨상을 수상한 작가들의 작품이 위대한 문학적 성취를 이뤄냈다는 점을 근거로 삼는다. 노벨상 수상자를 몇 명이나 배출했느냐 하는 것이 한 나라의 문학적 성취도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반론은 우리가 노벨 문학상의 역사를 한 번 일별해보기만 해도 여지없이 무너질 운명에 있다. 노벨 문학상이 놓친 위대한 작가들을 우리는 얼마든지 열거할 수 있는 것이다. 노벨 문학상을 타야겠다는 욕심을 더 좋은 문학 작품을 낳아야겠다는 결심으로 전환시켜야 한다. 그리고 그 결심을 우리 문화의 토양 전반에 대한 반성으로 확대시켜야 한다. 그것이 노벨상의 역사를 고찰한 더 큰 의의가 되어야 한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강대국이 된다는 것과 문화적으로 힘있는 나라가 된다는 것은 밀접한 관계에 있지 않다. 한국이 정치적 경제적으로 아직까지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것이 우리가 문화적으로도 후진적인 위치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는 자조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문학 작품이란 국위를 선양하기 위해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훌륭한 문학 작품이 만들어지면 결과적으로 국위선양에 도움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한국 문학이 노벨 문학상에 도전한다는 과업은 한국 문학이 인류에 기여를 하는 훌륭한 문학 작품을 낳아야겠다는 과업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색하는 일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우리가 해 온 역사적 고찰의 진정한 의미는 여기서 찾을 수 있다. 한국 기자가 어떤 인터뷰에서 '한국 문학과 노벨상과의 거리를 단축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스웨덴 아카데미 회원인 안데르스 리베르그씨는 서구 여러 나라와 문화적 교류를 가질 것, 이를 위하여 정부가 적극 지원할 것, 그리고 작가들의 의욕과 정열이 뒷받침될 것 등 우리 문학이 해결해야 할 몇 가지 과제를 제시한 바 있다. 우리는 대체로 문학 작품을 작가의 의도로 환원시켜 해석하는 버릇이 있다. 하지만 작가의 의도란 작품을 몸뚱아리를 이루는 많은 요소들 중의 단지 하나에 불과하다. 작가가 사용하는 언어, 건강, 분위기, 전통, 독자들, 심지어는 작가가 사용하는 필기도구(볼펜, 만년필, 타자기, 워드프로세서 등)까지도 하나의 작품 탄생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래서 한 작가의 의도는 백년을 넘기 어렵지만 위대한 작품의 수명은 수천 년을 지속하는 것이다. 이처럼 문학이란 작가가 좌우할 수 없는 우연 속에서 탄생하기 때문에 문학적 작업, 예술적 작업이란 더더욱 지난한 것이다. 또한 번역을 소홀히 대해왔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 이미 괴테도 <유사성>이라는 시에서, 번역이 마치 꽃을 꺾는 일과 같다고 말함으로써 한 작품이 가지고 있는 원래의 생명력을 죽여버리는 일이라고 보면서도 동시에 훌륭한 번역은 그 꺾은 꽃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는 일이라고 번역 행위의 의미를 평가한 바 있다. 그러나 우리는 번역을 천시하는 인습을 가지고 있었으며 지금까지도 그것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다. 외국 작품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이나 우리 작품을 외국어로 번역하는 일 모두를 너무 홀대해왔던 것이다. 심지어는 노벨 문학상 수상 작품이 졸속 번역됨으로써 우리의 오역문화의 병폐를 기르는 온상이 되기까지 했던 것이다. 번역은 어디까지나 한국 문화의 토양을 살지게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4. 노벨문학상 수상 전망과 문제점 앞에서도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일본은 1968년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설국'으로 1994년 오에 겐자부로가 '만년원년의 풋볼'이라는 작품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고, 이들은 일약 일본의 영웅 및 일본을 이끌어 가는 지식인으로 대변되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왜 노벨 문학상을 받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한국은 그 동안 1969년 '순교자'라는 작품으로 후보에 오른 재미한인작가 김은국 씨와 시인 고 은 씨가 있다.그동안 많은 한국작가들이 후보에 올랐다고 하지만 실제로 후보에 오른 사람은 별로 되지 않고 무수히 국내 언론에서만 이번 노벨 문학상 후보에 누가 될 것인가라는 언론조사만 해댔다. 우선 우리는 번역가들의 번역을 과연 이름 있는 교수들이나 학자들이 실제로 번역을 했다고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해외 소설이나 작품들을 번역하는 경우 학생이나 조교들이 부분적으로 맡아서 번역을 하고 그것을 다시 편집부에서 편집하고 일부 번역가들의 이름을 유명 교수나 지명도가 높은 사람들을 내세워 판매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나라에 과연 제대로 된 번역가가 몇 명이나 되는가? 그 사람들이 그런 지명도를 높이기 위해서 얼마나 애쓰는가는 번역가들의 고료나 실정을 보면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한국 문학을 제대로 번역할 수 있는 역량과 컨덴츠가 쌓이고 그것이 외국에 퍼질 수 있는가? 외국의 출판사들이 아무리 좋은 한국문학을 외국에서 출판하고 싶어도 제대로 된 번역가를 만날 수 없고, 그 작품이 제대로 번역이 되지 않는 현실은 우리나라가 노벨 문학상을 받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둘째, 한국 문학과 문화를 지탱해주는 외국 학자들은 자비로 한국을 연구한다는 사실이다. 왜, 우리나라의 작품을 연구하고 보급하는 학자들이 없는가 생각을 해봤는가? 물론 지금도 한국어와 한국 문학 작품에 관심있어서 번역을 하고 연구하는 외국 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자비와 소수의 자금으로 연구를 하고 출판을 할 수 밖에 없다. 일본 문학 작품이 뛰어난 평가를 받는 것은 외국에서 일본에 대한 관심과 연구를 활발히해서 그 작품을 번역하는 부분에 있어서 많은 성과의 결과물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영어권의 학자들 중에서 한국어를 연구하고 관심 있어 하고 출판을 원하는 작가와 학자, 교수진들을 전폭적으로 지원을 하고 그들에게 힘을 실어 줘야한다. 이것은 결국 다양하고 작품성이 뛰어난 한국 작품들이 외국에서 판매되고 보여지는 것이다. 프랑스를 비롯해서 서구, 특히 현대에 와서는 영어권의 나라들이 강세를 보이고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는 스웨덴의 한림원과 연관된 작품들이 수상을 하는 경우가 꽤 된다. 정부에서 방송작품을 지원하는 기금이 있듯이, 한국어 번역을 위한 기금을 널리 활용해서 이런 작품들은 재외 공관에 비치하고 그 지역 도서관에 무료로 기부를 해야 한다. 이런 일련의 노력들 없이 그저 우리나라에서 올해 노벨상 후보에 누가 오를 것인가? 라고 자체 설문 조사하는 것은 결국 출판사에서 자신들의 책을 홍보하는 수단 밖에는 되지 않는다. 올바른 번역가들이 양성되고, 그 책들이 외국에 보급되고, 그것을 통해 한국 문학을 연구하고 관심 있는 외국인들이 많이 생길 때 비로소 우리나라에도 노벨 문학상 작가가 나올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누구일까. 매년 노벨상 시즌이 다가오면 노벨문학상 후보로 대한민국의 문단의 원로인 고은 시인이 거론된다. 올해도 노벨문학상 후보로 시인이 유력하다는 이야기가 돌면서, 고은 시인이 후보군에 이름을 올렸다. 해외 도박사이트에서 시리아의 아도니스 시인과 우리나라의 고은 시인이 올라와 있다는 외신의 보도가 있었으며, 고은 시인은 6번째로 수상 가능성이 높은 인물로 언급되었다고 알려져서 매년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던 고은 시인은 작년에는 그 부담감을 이기지 못해,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된 이후 언론사 인터뷰를 거절할 정도였다. 이렇게 우리나라가 고은 시인을 노벨문학상이라는 부담감에 밀어넣는 이유는 고은 시인의 시적 가치성에 대한 높은 평가도 있겠지만, 일본에서 두번의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것과도 무관하지는 않다. 100년이 넘는 노벨문학상 역사 속에서 아시아에서 수상을 한 것은 단 세 번뿐이다. 인도의 시성(詩聖) 타고르가 아시아 최초로 노벨상을 수상한 이후, 일본이 두 차례의 노벨문학상을 가져갔다. 우리나라 국민들이 노벨문학상에 큰 관심을 보이는 이유 또한, 문화 분야에서만큼은 일본보다 못하지 않다는 자부심에 상처가 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일본에 비해 번역문학에 소홀히 해왔다는 지적은 피할 수 없다. 일본 최초의 노벨문학상인 야스나리가 “이 상의 절반은 번역가인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의 몫이다”라고 말했듯이, 변방에 머물러 있는 문학이 세계중심무대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번역가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러나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번역가들이 많지 않고 국가적으로 극림번역원이 있기는 하지만 그 사업이 미진하다는 문인들의 비판이 높다. 번역 문제가 해결되면 노벨문학상 수상이 그렇게 요원해보이지는 않는다. 세계 문학의 변방에 머물러 있던 우리나라도 올해 신경숙 작가의 ‘엄마를 부탁해’를 통해 보듯, 문체와 감수성을 제대로 살린 번역이 이루어진다면 세계인의 가슴에도 충분히 호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이원고는 2012년 7월 10일 광명문인협회 주최 문학강연 원고임(광명시민회관 18: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