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안에서 문안 합니다.
매월 첫째주 화요일과 셋째주 화요일은 구조분석 방법론을
함께 연구 할수 있도록 하신 성령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목사님들께서 동참하시여 성서의 깊은 성찰이 있기를 기도 하겠습니다.
많은 은혜 받으시고 하나님만 자랑해 주세요.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는 것을 아주 좋아 하세요.
주제절
외울 말씀 8장 34절 이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8:1 그 무렵에 또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8:1 무렵에 다시 큰 무리가 모여 있었는데, 먹을 것이 없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놓고 말씀하셨다.
8:1 그 무렵에 다시 큰 무리가 있었는데, 먹을 것이 없었으므로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놓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직역: 그날들 중에 다시 큰 무리가 있었는데, 그런데 그들이 가진것이 없으니 무엇을 먹을 것인가?
예수께서 제자들을 앞으로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8:1 Ἐν ἐκείναις ταῖς ἡμέραις πάλιν πολλοῦ ὄχλου ὄντος
중에 그 그 날들 다시 큰 무리가 있어 (분사: 현재 능동태 소유격 단수)
καὶ μὴ ἐχόντων τί φάγωσιν, (동사: 가정법 과거 능동태 3복)
그런데 없으니 가진것이 무엇을 그들이 먹을 것인가? (분사: 현재 능동태 소유격 복수)
προσκαλεσάμενος τοὺς μαθητὰς λέγει αὐτοῖς·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앞으로 부르시고 그 제자들을 말씀하신다. 그들에게 (분사: 과거 중간태/디 주격 단수)
주해
▣ 그 즈음에. - 이는 '그 날들 동안'(엔 에케이나이스 타이스 헤메다이스; 이란 문자적 의미를 지닌다. 즉 본사건 앞서 일어난 귀 먹고 어눌한 자를 치유한 사건과 본 사건이 시간적으로 연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연이어 나오는 '또'(팔린)라는 말은 본 사건이 얼마 전의 5천명을 먹이신 사건과 별개의 사건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즉 마가는 사복음서 모두에 기록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과 본절 이하에 나오는 사천 명을 먹이신 사건은 어떤 연관이 있으면서도 분명히 별개의 사건이라는 것을 나타내려 한 것이다. 한편 마가는 이 일이 일어난 장소에 관해 밝히지 않지만 대체로 갈릴리 호수 동편에 위치한 "데가볼리"로 추정된다. 즉 예수께서 갈릴리 전도 후기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배척을 받으시고 난후 이방 지역으로 가서 사역을 마치고 다시 갈릴리 동쪽 지역으로 돌아오신 전 ․ 후로 해서 일어난 일들을 마가는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 큰 무리가 있어. - '큰 무리'(폴루 오플루)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신 예수의 이적과갈릴리 호수 주변에서 행하신 이적을 듣고 예수께 큰 관심을 보인 바 있었다.
▣ 제자들을 불러. -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것은 5천명을 먹이신 첫 번째 급식 때와 마찬가지로 제자들을 적극적으로 참여시킨다는 점에서 일치성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5천명을 먹이실 때에는 제자들이 직접 예수께 나아와 굶주림에 대해 호소한 것과는 달리 이제는 예수께서 능동적으로 제자들을 부르고 계신다. 이로써 5천명을 먹이신 사건과 본 사건은 동일한 사건이 아님이 명백히 드러난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8:2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도다
8:2 "저 무리가 나와 함께 있은 지가 벌써 사흘이나 되었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가엾다.
8:2 "내가 저 무리를 불쌍히 여긴다. 그들이 벌써 삼일 동안이나 나와 함께 있었는데, 그들에게 먹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직역: 내가 저 무리에 대하여 측은히 여긴다.
그들이 이미 나와 삼일 동안 함께 머무나 그들이 그 어떤 먹을만한 것을 가지지 못하였기 때문이라.
8:2 σπλαγχνίζομαι ἐπὶ τὸν ὄχλον,
내가 측은히 여긴다. 대하여 그 무리에 (동사: 직설법 현재 중수디 1단)
ὅτι ἤδη ἡμέραι τρεῖς προσμένουσίν μοι
때문이라 이미 일들이 삼 그들이 함께 머무나 나와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복)
καὶ οὐκ ἔχουσιν τί φάγωσιν· (동사: 가정법 과거 능동태 3복)
그런데 못하기 가지지 어떤것도 그들이 먹을만한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복)
주해
▣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 5천명을 먹이신 경우에도 그 근본 동기가 무리에 대한 예수의 긍휼히 여기심이었다. 즉 4천명을 먹이시는 본 사건에서도 예수께서는 동일하게 연민의 정을 가지고 무리들의 필요에 응하신 것이었다. 한편 본문에서 '불쌍히여긴다'(스플랑크니조마이)는 말은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자신의 몸까지도 희생하시는 긍휼과 동정심 내지는 연약한 인간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연민의 정을 나타내는 말이다. 우리는 여기서 또 한 번 우리 주님의 긍휼과 인간들을 향한 참사랑을 본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도를 향한 사랑의 손길은 지금도 여전히 동일하시며 또한 모든 문제에 대해 해결책을 갖고 계심을 우리는 스스로 상기해야 한다.
▣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 '이미 사흘이매'라는 말은 본 사건이 5천명을 먹이신 기적과 구별되는 사건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구절이라 할 수 있다. 즉 막 6:30-44의 사건은 당일에 모든 것이 이루어졌으나 여기서는 3일 동안 무리가 예수와 함께 머물렀음을 명백히 하는 것이다. 물론 사흘 동안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또한 그들이 3일 동안 내내 아무 것도 먹지 못했는지도 분명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계속되는 뒷 구절로 보아 굶주린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3일 동안 내내 굶주렸다기보다는 준비했던 식량이 다 떨어지고 굶주림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듯하다. 왜냐하면 오병이어의 사건에서도 보여지듯 3일간 계속 굶주림 가운데 있었으면 이미 그 이전에 예수께서 어떤 조처를 취하셨을 것이며, 또한 당시 제자들에게는 떡 일곱 개와 생선 두어 마리가 남겨져 있었던 상태에 있었기(5,7절) 때문이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8:3 만일 내가 그들을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느니라
8:3 내가 그들을 굶은 채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더구나 그 가운데는 먼 데서 온 사람들도 있다."
8:3 만일 그들을 굶겨서 그들의 집으로 돌려보내면 그들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멀리서 왔다."
직역: 그래서 만일 내가 그들을 굶겨서 그들의 집으로 보내게 된다면 그 길들 안에서 기진하게 될 것이다.
그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멀리서 왔다.
8:3 καὶ ἐὰν ἀπολύσω αὐτοὺς νήστεις εἰς οἶκον αὐτῶν,
그래서 만일 내가돌려보내면 그들을 굶겨서 으로 집 그들의 (동사: 가정법 과거 능동태 1단)
ἐκλυθήσονται ἐν τῇ ὁδῷ·
기진하게 될 것이다. 안에서 그 길에 (동사: 직설법 미래 수동태 3복)
καί τινες αὐτῶν ἀπὸ μακρόθεν ἥκασιν.
또한 어떤사람들은 그들중의 부터 멀리서 왔다 (동사: 직설법 완료 능동태 3복)
주해
▣ 만일 내가 저희를 굶겨 집으로 보내면‥‥멀리서 온 사람도 있느니라. - 예수께서 친히 굶주림의 고통을 겪으셨다. 때문에 무리들의 배고픔을 알고 계셨다. 게다가 예수께서 크게 염려한 것은 두로나 시돈 너머의 먼 곳에서 온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되돌아가는 길에 기진하여 쓰러질 것을 염두에 두신 것이다. 이처럼 인간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육에 대한 문제에까지 세심한 이해와 동정을 보이고 계신다. 이로 보건대 그리스도의 사역의 목적은 비록 영의 문제에 대한 것이었지만, 이를 수반하게 되는 육신의 문제도 결코 등한히 하시지 않았음이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실제적인 이해와 동정이이 이적의 동기였던 것이다. 한편 여기에서는 5천 명을 먹이신 이적과 분명한 차이점이 보이고 있다. 즉 막 6:35,36에서는 제자들이 무리들의 배고픔을 알고 예수에게 해결책을 제시하는 반면, 본 사건에서는 예수께서 먼저 무리들의 상태와 요구를 아시고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고 적극적으로 그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인간에게 필요한 것을 아셨던 예수께서는 오늘날도 여전히 우리의 궁핍함과 필요를 감찰하시고 개개인에게 다가오신다. 인류에게 생명의 양식을 주러 오신 예수는 우리 육신의 필요한 것도 채우셔서 영․육간의 전인적 구원을 이루어 주시는 것이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8:4 제자들이 대답하되 이 광야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8:4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이 빈 들에서, 어느 누가 무슨 수로, 이 모든 사람이 먹을 빵을 장만할 수 있겠습니까 ?"
8:4 제자들이 대답하기를 "이 광야에서 누가 어떻게 빵을 구하여 이 사람들을 배부르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직역: 그의 제자들이 예수께 대답하였다. 이 광야 위에서 누가 어디서 떡들로 이들을 배부르도록 할수 있을 것인가?
8:4 καὶ ἀπεκρίθησαν αὐτῷ οἱ μαθηταὶ αὐτοῦ
그리고 대답하였다 그에게 그 제자들이 그의 (동사: 직설법 과거 수동태/디 3복)
ὅτι πόθεν τούτους δυνήσεταί
때문이라 어디서 이들을 할수있을 것인가? (동사: 직설법 미래 중간태/디 3단)
τις ὧδε χορτάσαι ἄρτων ἐπ᾽ ἐρημίας;
누가 여기서 배부르도록 떡들로 위에서 광야 (부정사: 과거 능동태)
주해
▣ 이 광야에서 어디서 떡을 얻어. - 제자들은 얼마 전에 오병이어의 사건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불신앙적인 대답을 하고 있다. 즉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인적이 드문 광야이기 때문에 음식물을 얻기에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한편 혹자는 이러한 제자들의 대답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자들의 대답이 될 수 없다고 보고 본장의 사건이 오병이어 사건의 다른 변형이라 보기도 한다. 그러나 신앙이 좋은 사람도 때로는 주위의 환경에 압도되어 신앙적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는 점과 예수가 이적을 남발하지 않으시는 분이므로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일단 합리적인 대응책을 생각해 볼 수도 있기 때문에 반드시 본절의 대답이 오병이어의 사건을 전제 하지 않는다고 볼 필요는 없다. 마태와 마가가 오병이어 사건과는 별개로 4천 명을 먹인 사건을 언급하며 본 사건과 오병이어의 사건이 유사하기도 하지만 두 이야기에서 언급되는 시간적, 장소적 배경이 다른 것으로 보아 별개의 사건임이 분명하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8:5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이르되 일곱이로소이다 하거늘
8:5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기를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 하시니, 그들이 대답하기를 "일곱 개가 있습니다" 하였다.
8:5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너희가 빵을 몇 개나 가지고 있느냐?" 그들이 말하기를 "일곱 개입니다." 라고 하였다.
직역: 그러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너희가 얼마나 많은 떡들을 가지고 있느냐?
이에 그 제자들이 "일곱개"라고 말씀드렸다.
8:5 καὶ ἠρώτα αὐτούς·
그러자 그가물으셨다 그들에게 (동사: 직설법 미완료 능동태 3단)
πόσους ἔχετε ἄρτους;
얼마나 많은 너희가가지고있느냐 떡들을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2복)
οἱ δὲ εἶπαν· ἑπτά.
그들이 이에 말씀드렸다 일곱개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복)
주해
▣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일곱이로소이다. -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 분이 왜 제자들에게 이러한 질문을 하시는가? 그리고 '일곱'이라는 제자들의 대답을 통해 예수께서는 무엇을 의도하셨는가? 그것은 다음 두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는, 제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도움을 얻을 수 있는 방편이 있다면 그것들을 찾아내어 최선을 다하게 함으로 인간적인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며,
둘째는, 일곱이라는 숫자를 마음 속 깊이 새김으로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하나님의 이적의 능력을 통해서 가능케 됨을 아주 현저하게 드러나게 하려는 의도이다. 이것은 이 사건 이후에 예수께서 오병이어의 사건과 이 사건을 상기시킨 19, 27절을 통해서 그 효과가 드러난다. 즉 예수께서 두 이적에 나타나는 숫자, 즉 5(보리떡의 수효), 5000(먹은 사람의 수효), 12(남은 떡을 담은 광주리의 수효); 그리고 7(떡의 수효), 4000(먹은 사람의 수효), 7(남은 떡을 담은 광주리의 수효)을 다시 한 번 제자들에게 상기시켜 주심으로써 그리스도의 신적 권능을 명심케 하신 것이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8:6 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여 땅에 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를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나누어 주게 하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나누어 주더라
8:6 예수께서는 무리에게 명하여 땅에 앉게 하셨다. 그리고 빵 일곱 개를 손에 드시고, 감사를 드리신 뒤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니, 제자들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8:6 예수께서 무리에게 땅 위에 앉도록 명령하시고 빵 일곱 개를 가지사 감사기도를 드리신 후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며 무리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나누어 주었다.
직역: 그랬더니 예수께서 그 무리에게 그 땅 위에서 기대앉는 것을 명령하셨다. 그리고 떡들 일곱개를 취하신 후에
감사하시고 떼셨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에게 주시고 있었다. 그들이 그 무리들 앞에 놓게된다면 놓기 위함이라.
그래서 그들이 무리들 앞에 놓았다.
8:6 καὶ παραγγέλλει τῷ ὄχλῳ ἀναπεσεῖν ἐπὶ τῆς γῆς· (부정사: 과거 능동태)
그랬더니 예수께서 명령하셨다 그 무리에게 기대어앉는것을 위에서 그 땅의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καὶ λαβὼν τοὺς ἑπτὰ ἄρτους
그리고 취하신 후 그 일곱개를 떡들 (분사: 과거 능동태 주격 단수)
εὐχαριστήσας ἔκλασεν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단)
감사하시고 떼셨다 (분사: 과거 능동태 주격 단수)
καὶ ἐδίδου τοῖς μαθηταῖς αὐτοῦ
그리고 주시고있었다 그 제자들에게 그의 (동사: 직설법 미완료 능동태 3단)
ἵνα παρατιθῶσιν,
위함이라 그들이 앞에놓게된다면-놓기 (동사: 가정법 현재 능동태 3복)
καὶ παρέθηκαν τῷ ὄχλῳ.
그리고 그들이 앞에 놓았다 그 무리에게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복)
주해
▣ 명하사 땅에 앉게 하시고. - 오천 명을 먹이신 이적과 본장의 기사 내용이 세부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막 6:39에서는 무리들을 푸른 잔디 위에 혹 백색, 혹 오십 씩 나누어 앉도록 명하신 반면, 본 기사에서는 그냥 땅에 앉도록 명하셨다. 이것은 곧 시간적 장소적 차이와 더불어 급식 방법상의 차이를 나타내 준다.
▣ 떡 일곱 개를 가지사 축사하시고. - 본절에서 '축사'(유카리스테사스)는 '감사한다' 혹은 '감사를 돌린다', '감사한 마음을 가진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막 6:41에 사용한 '축사'(율로게센 )는 '찬양' 혹은 '칭찬' 그리고 '축복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전자는 일상외 식사 기도에서 자연스럽게 사용된 말이며, 후자는 기적을 위한 축복의 간구로 사용된 듯하다. 따라서 4,000명을 먹이신 이적은 마치 일상의 식사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음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이 역사 본장의 사건과 오병이어 사건이 별개의 사건임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 떼어‥‥주어 그 앞에 놓게 하시니. - 헬라어 어법상 '떼어 주어'(에클라센 카이 에디두)는 단순 과거와 미완료 시제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떡을 나누어 주는 일을 계속 하셨음을 알 수 있고, 아울러서 제자들은 그것들을 계속해서 무리들 앞에 상을 차리듯 갖다 놓는 모습을 회화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8:7 또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는지라 이에 축복하시고 명하사 이것도 나누어 주게 하시니
8:7 또 그들에게는 작은 물고기가 몇 마리 있었는데, 예수께서 그것을 축복하신 뒤에, 그것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셨다.
8:7 또 작은 물고기 몇 마리가 있었는데, 이것들을 가지시고 감사기도를 드리신 후 이것들도 나누어 주라고 말씀하셨다.
직역: 또 그들이 물고기 두어마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것들을 예수께서 축복하신 후에 이것들을 앞에 놓도록 말씀하셨다.
8:7 καὶ εἶχον ἰχθύδια ὀλίγα·
또 그들이가지고 있었다 물고기 두어마리를 (동사: 직설법 미완료 능동태 3복)
καὶ εὐλογήσας αὐτὰ εἶπεν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단)
그래서 축복하신 후에 그것들을 말씀하셨다. (분사: 과거 능동태 주격 단수)
καὶ ταῦτα παρατιθέναι.
역시 이것들도 앞에놓도록 (부정사: 현재 능동태)
주해
▣ 작은 생선 두어 마리. - 오천 명을 먹이셨을 때에는 물고기 두 마리가 있었으나, 여기서는 '작은 생선 두어 마리'로 생선의 숫자가 불분명하게 언급되고 있다. 한편 '생선 두어 마리'에 해당하는 원어는 '이크뒤디아 올리가'로서, 여기서 특히 '올리가'란 헬라어가 '적은', '소수'를 뜻하기 때문에 이는 '약간의 물고기' 혹은 '몇 마리의 물고기'로 번역될 수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생선 몇 마리'(공동번역)로 번역하는 것이 보다 타당하다. 한편 당시의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식사에는 떡과 함께 건조한 작은 생선을 곁들었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8:8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 일곱 광주리를 거두었으며
8:8 그리하여 사람들이 배불리 먹었고, 남은 부스러기를 주워 모으니, 일곱 광주리에 가득 찼다.
8:8 그들이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들을 일곱 광주리나 모았으며,
직역: 그리하여 그들이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들이 일곱 광주리나 거두었다
8:8 καὶ ἔφαγον καὶ ἐχορτάσθησαν, (동사: 직설법 과거 수동태 3복)
그리하여 그들이먹었다 그리고 배부르게 되었다.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복)
καὶ ἦραν περισσεύματα κλασμάτων ἑπτὰ σπυρίδας.
그리고 거두었다 남은 것들을 조각들을 일곱 광주리들을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복)
주해
▣ 배불리 먹고‥‥일곱 광주리를 거두었으며. - 오병이어의 이적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매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배불리 먹었으며 또한 예수께서는 그 남은 것을 거두어 광주리에 담게 했다는 유사점을 지닌다. 이는 곧 두 이적을 통해서 공히 넉넉하게 만족할 만큼 먹었다는 사실과 더불어 영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을 낭비치 않으려는 예수의 성실을 잘 보여 준다. 특별히 이 사건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시 광야에서 만나가 필요한 양만 내린 것과 비교해 볼 때 참 생명의 떡을 주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축복이 신약 성도들에게 얼마나 풍성한 가를 암시해 준다. 한편 본절에 언급된 '광주리'(스퓌리스)는 오병이어의 기적 때 사용한 '광주리'(코피노스)와는 다르다. '코피노스'는 단단한 나무 가지를 엮어서 만든 바구니로 조그마한 휴대용 바구니이고, '스퓌리스'는 유연한 재료로 만든 큰 용기를 말한다. 이는 '코피노스'보다 훨씬 큰 것으로 사도 바울이 다메섹을 탈출할 때 창문에서 타고 내려온 광주리와 같은 용기이기도 하다(막 9:25). 즉 이것은 휴대용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가정 에서 물건을 담아두는 용기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본 사건에서 남은 일곱 광주리의 떡은 오병 이어 기적 때보다 훨씬 많은 양의 떡이었을 것이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8:9 사람은 약 사천 명이었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흩어 보내시고
8:9 사람은 사천 명쯤이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헤쳐 보내셨다.
8:9 사람들은 사천 명 정도 되었다. 예수께서 그들을 돌려보내셨다.
직역: 그사람들이 그때에 약 사천명이나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을 헤쳐 보내셨다.
8:9 ἦσαν δὲ ὡς τετρακισχίλιοι.
그들은 있었다 때에 약 사천명이나 (동사: 직설법 미완료 능동태 3복)
καὶ ἀπέλυσεν αὐτούς.
그래서 예수께서 헤쳐 보내셨다 그들을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단)
주해
▣ 사람은 약 사천 명이었더라‥‥흩어 보내시고. - 마태는 병행 기사에서 '여자와 아이 외에', 곧 남자만 4천명이라 밝힘으로써(마 15:38) 본절의 기록을 보완하고 있다. 이로 볼 때 실제로, 본 이적을 체험한 자는 적어도 4천명의 몇 배 정도에 이르는 많은 사람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이적에 동참한 사람의 숫자를 언급하는 것은 이러한 이적이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없는 신적 권능의 표현임을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오병 이어의 이적 때와 같이 무리들을 권면하여 집으로 돌려보낸 것은 말씀을 들을 뿐만 아니라 이를 실천해야 하며 또한 가정의 중요함을 아셨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는 여기서 두 번에 걸친 놀라운 급식 이적을 통해서 주님이 의도하신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비록 두 이적이 약간의 차이는 있다할지라도 예수는 연민으로부터 그리고 사람들의 필요에 응해서 행동하셨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아울러서 두 번 모두 제자들을 적극적으로 참여시킨다. 예수는 제자들을 불러 축복 후에 그들에게 떡과 생선을 주고, 그들에게 사람들 가운데서 그 음식을 나누라고 지시한다. 이런 방식으로 제자들을 이방인들의 급식 이적에 적극적으로 참여시킨 것은 장차 제자들이 수행해야 할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어 주어야 하는 역할들을 암시하고 있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8:10 곧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시니라
8:10 그리고 곧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올라,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셨다.
8:10 그리고 즉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셨다.
직역: 그리고 즉시 그의 제자들과 함께 배 안으로 오르신 후에 달마누다 지방들 안으로 예수께서 오셨더라
8:10 Καὶ εὐθὺς ἐμβὰς εἰς τὸ πλοῖον μετὰ τῶν μαθητῶν αὐτοῦ
그리고 즉시 오르신 후 안으로 그 배 함께 그 제자들과 그의 (분사: 과거 능동태 주격 단수)
ἦλθεν εἰς τὰ μέρη Δαλμανουθά.
그가오셨더라 안으로 그 지방들 달마누다의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단)
주해
▣ 제자들과 할께 배에 오르사 달마누다 지방으로. - 오병이어의 이적 후에는 제자들만 벳새다로 보내고 예수님은 혼자 남아 기도하신 반면 여기서는 예수께서도 제자들과 더불어 '달마누다' 지방으로 갔음을 말함으로써 본 사건과 오병이어 사건이 별개의 사건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리고 마태는 본문과 달리 '마가단 지경'으로 간 것을 기록하고 있으나 이 두 지명은 동일한 곳임에는 틀림없다. 많은 학자들은 이곳을 오늘날은 '메지델'로 불리는 곳으로 게네사렛 땅 디베랴에서 북쪽으로 수마일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 곳으로 추정한다. 또한 혹자는 '마가단'과 '막달라'가 철자가 비슷하다는 점에서 확인하여 이곳은 주님께서 일곱 귀신을 쫓아내주신 막달라 마리아의 출생지인 막달라와 동일하게 생각하기도 한다. 막달라 역시 갈릴리 바다 서안에 위치한 도시이므로 타당한 주장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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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1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께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8:11 바리새파 사람들이 나와서는, 예수에게 시비를 걸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예수를 시험하느라고 그에게 하늘로부터 내리는 표적을 요구하였다.
8:11 바리새인들이 와서 예수님과 논쟁하기 시작하여 그분을 시험하려고 그분께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였다.
직역: 그러자 그 바리새인들이 나왔다. 예수님과 논쟁하는것을 그들이 시작하였다. 그 하늘로 부터 오는 표적을 찾으며,
예수님을 유혹하며,
8:11 Καὶ ἐξῆλθον οἱ Φαρισαῖοι
그러자 나왔다 그 바리새인들이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복)
καὶ ἤρξαντο συζητεῖν αὐτῷ, (부정사: 현재 능동태)
그리고 그들이 시작하였다 논쟁하는것을 그에게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단)
ζητοῦντες παρ᾽ αὐτοῦ σημεῖον ἀπὸ τοῦ οὐρανοῦ,
찾으며 그를 표적을 부터 그 하늘로 (분사: 현재 능동태 주격 복수)
πειράζοντες αὐτόν.
유혹하며 그를 (분사: 현재 능동태 주격 복수)
주해
▣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 앞절과 관련하여 생각해볼 때 이 사건은 갈릴리 지방에서 있었음이 분명하다. 예수께서는 갈릴리 지방을 떠나 여러 지방을 다니시며 큰 이적을 행하신 후 다시 갈릴리 지방에 이르렀으나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논쟁이 벌어진다. 한편 여기 언급되는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본거지인 유대 땅에서 파견된 자로서 예수를 책잡아 시험하기 위해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마태는 이때 바리새인들이 사두개인들과 함께 예수께 나아온 것을 말하며, 본장 16절에서는 헤롯당원도 같이 있었던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로 보건대 서로 앙숙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그리고 헤롯 당원까지 함께 예수께 나온 것은 당시 종교 ․ 정치적으로 기득권을 갖고 있었던 저들이 결탁하여 예수를 민중들과 유지시키려 했음이 분명하다.
▣ 힐난하며. - '논쟁하는것을', '힐난했다'(쉬제테오)라는 말은 단순히 상대방의 말을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개입시켜 비난조의 어투로 논쟁하는 것을 말한다.
▣ 시험하여. - 문자적으로는(페이라조) '유혹하다'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이 단어는 예수께서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시고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도사용된 말로서 본문에서도 바리새인 등이 사탄의 하수인으로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방해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말이다. 당시 예수를 유혹하던 바리새인처럼 진리를 알며 진리를 위해 일하기 보다 더 큰 관심이 있는 자는 타인을 타락케 하는 사탄의 하수인이 되기 쉽다.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자신에 대하여 말씀하는 것과, 행하신 이적들이 참이라는 증거, 즉 표적(세메이온; 을 요구하고 있다. 실제로 저들은 예수의 능력은 사탄의 힘을 빌어 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한편 여기서 '표적'이란 말은 신적인 권위를 도저히 거부할 수 없도록 만들 정도로 강력한 외적인 증거를 표현할 때 사용되는 말이다. 특히 공관 복음서보다 요한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자신이 메시야임을 입증하기 위해 이 말이 독특하게 사용되었다. 이것은 예수께서 행하신 '이적'(뒤나미스) 이상의 신적 증거인 것이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하늘로서 부터 오는 표적'을 구했다. 이는 곧 예수 자신이 예언자요 메시야라는 것을 증명하는 어떤 표식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이 이것을 요구한 목적은 예수를 메시야로 신뢰하기 위함이 아니라 시험하여서 무리들 앞에서 책잡으려는 악한 의도에서 였다. 저들은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셨을 때 이를 귀신의 왕을 힘입은 것이라 억지를 부림으로써 어떠한 표적을 두더라도 그것을 거부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이었다. 한편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논쟁을 벌인 사건들에 대해서는 눅 6장 연구자료를 보다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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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2 예수께서 마음 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8:12 예수께서는 마음 속으로 깊에 탄식하시고서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아무 표적도 받지 못할 것이다."
8:12 예수께서 심령에 깊이 탄식하시며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하니, 이 세대에게는 표적을 주지 않을 것이다." 하시고,
직역: 이에 예수께서 영혼으로 깊이 탄식하시고 말씀하신다. 어찌하여 이세대가 표적을 찾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에게 비록 한 표적이 주어질 지라도,
8:12 καὶ ἀναστενάξας τῷ πνεύματι αὐτοῦ λέγει·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이에 깊이 탄식하시고 그 영혼으로 그의 말씀하신다. (분사: 과거 능동태 주격 단수)
τί ἡ γενεὰ αὕτη ζητεῖ σημεῖον;
어찌하여 그 세대가 이 찾느냐 표적을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ἀμὴν λέγω ὑμῖν,
진실로 내가 말한다 너희에게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1단)
εἰ δοθήσεται τῇ γενεᾷ ταύτῃ σημεῖον.
비록 주어질 지라도 그 세대에게 이 한 표적이 (동사: 직설법 미래 수동태 3단)
주해
▣ 병행 귀절인 마 16:1-4에는 천기를 분별하면서도 시대의 표적을 분별치 못하는 것에 대한 책망과 요나의 표적이 자신과 관련을 가짐을 말하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생략되어 있다.
▣ 마음 속에 깊이 탄식하시며. - 여기서 '마음'(프뉴마)이란 '영혼'으로도 번역되며 인간의 지 ․ 정 ․ 의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또한 '깊이 탄식하시며'(아나스테나조)란 본래는 '위에'란 의미가 있으나, 접두어로 사용될 때는 '반복'과 '강렬함'을 의미하는 '아나'와 '슬픔에 젖어 신음하다'란 의미가 있는 '스테나조'(의 합성어로서 큰 슬픔의 탄식을 가리킨다. 따라서 예수는 심령 깊은 곳에서 저들을 향해 의분과 슬픔을 가지셨던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 선지자들이 예언한대로 자신이 참으로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확실한 증거를 여러 이적들을 통해 보여 주셨는데 또 다른 표적을 요구하며 그것을 오히려 올무로 삼으려는 것은 깊은 통탄을 자아내게 할 영적 범죄인 것이다.
▣ 어찌하여 이 세대가. - '어찌하여'(티스)는 일차적으로는 '누구', '무엇'을 가리키는 의문대명사이나, 여기서는 강한 부정을 나타내는 탄식형으로 쓰였다. 즉 예수께서는 이 단어를 사용하여 표적을 요구하는 바리새인들의 요구에 단호한 거부를 나타내고 있다. 주님에서 이렇게 하신 것은 그가 메시야이신 것을 증명하는 최상의 표적은 인간의 안목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낮아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으며 이것은 오히려 그들에게 조롱으로 받아들여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 세대'(헤 게네아 하우테)는 당시 시점에서 그리스도를 적대하던 바리새인들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하며 신앙심 없고 악행을 저지르며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을 포괄하고 있다. 즉 형식주의에 사로잡혀 예수를 힐난하며 책잡기 위해 왔던 적극적으로 메시야를 대적하던 바리새인들뿐만 아니라 불신앙적인 자세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던 유대 민족 전체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본절은 이들을 향한 심판적 의미 가 깃들여 있다.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 앞부분과 또한 뒷부분과 마찬가지로 표적의 거부가 더 이상 재론될 수 없을 만큼 명백함을 보여 준다.
▣ 표적을 주시지 아니하리라. - 문자 그대로 직역하면 '만약 이 세대에게 표적이 주어진다면․․․․'(에이 도데세타이 테 게네아타우테 세메이온)이다. 그러나 조건을 나타내는 기본 불변사 '에이'가 때로는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강한 부정을 나타낸다. 혹자는 이를 히브리 생략법으로 '만일 이 세대에게 표적이 주어진다면 나에게 저주가 임하리라'는 후반부가 생략된 강한 부정의 표현으로 본다. 이처럼 바리새인들의 요구를 단호히 거부하신 것은 예수께서 이미 그 메시야 성을 입증할 충분한 표적을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런 표적들을 보고도 받아들이지 않고 다시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니 그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단호한 예수님의 행동은 당시나 오늘이나 불신앙인들을 향한 심판적 메세지이다. 한편 하나님을 아는 참다운 지식은 성령의 능력과 지혜로 말미암는 믿음으로부터 가능하며, 믿음이란 증거나 표적에 의지하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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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3 그들을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시니라
8:13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들을 떠나,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
8:13 그들을 떠나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
직역: 그리고 그들을 떠나서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을 향하여 떠나가셨다.
8:13 καὶ ἀφεὶς αὐτοὺς
그리고 떠나서 그들을 (분사: 과거 능동태 주격 단수)
πάλιν ἐμβὰς ἀπῆλθεν εἰς τὸ πέραν.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단)
다시 배에 올라 떠나셨다 향하여 그 건너편을 (분사: 과거 능동태 주격 단수)
주해
▣ 저희를 떠나. - 메시야를 알지 못하고 또 다른 표적을 구하는 자들에게 심판의 말씀을 마치신 뒤 곧바로 그들의 곁을 떠나셨다. 이와 같은 행동은 그들의 불신앙은 치유 불가능하며 심판만이 있을 뿐임을 보여주는 단호한 행동으로 볼 수 있다. 이로 말미암아 예수와 유대주의자들은 사이가 더욱 멀어지게 되었다.
▣ 건너편으로 가시니라. - 건너편이 구체적으로 어디인지 알 수는 없지만 22절을 근거로 할 때 '벳새다'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곳이 구체적으로 어디 든 예수께서는 갈릴리 바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늘나라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바다를 여러 번 건너 다니셨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사 9:1에 있는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는 예언의 말씀을 성취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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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4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밖에 그들에게 없더라
8:14 제자들이 빵을 가져 오는 것을 잊었다. 그래서 그들이 탄 배 안에는 빵이 한 개밖에 없었다.
8:14 제자들이 빵을 가져오는 것을 잊었으므로 배 안에는 빵이 한 개밖에 없었다.
직역: 제자들이 떡들을 취하는것을 잊었다. 그래서 배 안에는 자신들과 함께 떡을 한개 외에는 가지지 않았다.
8:14 Καὶ ἐπελάθοντο λαβεῖν ἄρτους (부정사: 과거 능동태)
그리고 제자들이 잊었다 취하는 것을 떡들을 (동사: 직설법 과거 중간태/디 2복)
καὶ εἰ μὴ ἕνα ἄρτον οὐκ εἶχον μεθ᾽ ἑαυτῶν ἐν τῷ πλοίῳ.
그래서 는 외에 한개 떡을 않았다 가지지 함께 그들자신과 안에 그 배에 (동사: 직설법 미완료 능동태 3복)
주해
▣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 본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떡이 구체적으로 어떤 떡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아마 4천명을 먹이고 난 뒤에 남은 떡을 말하는 듯하다. 제자들이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과 예수의 논쟁에 몰두했으며 또한 그곳을 급히 떠나야 했기 때문에 떡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린 듯하다. 우리는 여기서도 복음 전파에 너무나 바빠 식사할 겨를이 없이 활발히 움직이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게 된다.
▣ 떡 한 개밖에‥‥없더라. - 제자들은 떡 한 덩이는 아무런 가치가 없으며 굶주림을 면하는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임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에 떡 '한 덩이'가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아마 이러한 언급은 곧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신 두 번의 이적을 제자들이 염두에 두었으며 또 다른 이적을 기대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전과 같이 이 떡을 이용해 육신적인 굶주림을 면케 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적인 교훈을 주시는 기회로 삼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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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예수께서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8:15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경고하여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새파 사람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8:15 예수께서 경고하여 말씀하시기를 "주의 하여라.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하셨으나,
직역: 그런데 예수께서 엄히 명령하셨다.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삼가라.
그리고 바리새인들의 누룩으로부터 또 헤룻의 누룩으로주의하라.
8:15 καὶ διεστέλλετο αὐτοῖς λέγων· (분사: 현재 능동태 주격 단수)
그런데 예수께서 엄히 명령하셨다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동사: 직설법 미완료 중간태 3단)
ὁρᾶτε,
삼가라 (동사: 명령법 현재 능동태 2복)
βλέπετε ἀπὸ τῆς ζύμης τῶν Φαρισαίων
주의하라 부터 그 누룩으로 그 바리새인들의 (동사: 명령법 현재 능동태 2복)
καὶ τῆς ζύμης Ἡρῴδου.
또 그 누룩으로 헤룻의
주해
▣ 경계하여 가라사대. - '경계하여'(디에스텔레토 )라는 말은 동작의 계속적인 상태를 묘사하는 미완료 중간태를 사용하고 있어, 예수에서 여러 번 반복해서 제자들의 영적 긴장을 촉구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 성경에서 '누룩'은 마 13:33의 '천국 비유'에서와 같이 천국의 점진성과 확장적 성격을 묘사할 때처럼 좋은 의미에서도 사용되지만, 대부분 본문에서와 같이 나쁜 의미로 사용되었다. 즉 누룩은 원래 부풀게 하고 퍼져나가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이런 성질을 통해서 점차 눈에 보이지 않게 팽창하고 넓게 침투하는 악의 특수한 성질을 묘사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본은 비록 다른 상황에서 주어졌지만 눅 12:1에서는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이라고 밝히고 있는 점에서도 명백하다. 한편 본절의 '헤롯의 누룩'이 마 16:6에는 '사두개 인들의 누룩'으로 나와 있는데 이와 같은 묘사는 당시 사두개인들 중에는 세속적 정치 세력인 헤롯 당원이 되는 자가 많았고, 사두개인 역시 현세주의자로서 헤롯 당원과 호흡을 같이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형식주의와 세속주의가 영적 각성이 없는 자에게 쉽게 침투함을 경계하면서 이들의 세력을 이겨낼 것을 촉구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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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6 제자들이 서로 수군거리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
8:16 제자들은 서로 수군거리기를 "우리에게 빵이 없어서 그러시는가 보다" 하였다.
8:16 그들은 빵이 없는 것 때문에 서로 의논하고 있었다.
직역: 그러자 제자들이 서로 함께 의논하기를 우리들이 떡들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8:16 καὶ διελογίζοντο πρὸς ἀλλήλους
그러자 그들이 의논하기를 함께 서로 (동사: 직설법 미완료 중간태 3복)
ὅτι ἄρτους οὐκ ἔχουσιν.
것을 떡들을 못하다는 그들이 가지지고 있지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복)
주해
▣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 여기서 '의논하다'(디엘로기존토)는 말은 '상의하다', '숙의하다', '염려하다' 혹은 '고민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동사의 시제가 미완료형으로 표기됨으로써 당시 제자들이 떡이 없음에 대해 계속 걱정하며 숙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 제자들은 예수의 교훈을 떡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책망하시는 것으로 생각했는지 아니면 바리새인의 법대로 떡을 사지 말라고 하시는 것으로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예수께서 외식주의와 세속주의의 그릇된 교훈을 걱정하고 계시는 동안 제자들은 육신의 떡을 염려하고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책망을 받을 자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뿐만 아니라 실로 믿음이 적은 연고로 영적인 풍성함을 체험도 못하며, 영적진리를 세속적인 관점으로 이해하는 제자들 역시 질책의 대상이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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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7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8:17 예수께서 이것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빵이 없는 것을 두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 너희의 마음이 그렇게도 무디어 있느냐?
8:17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왜 너희는 빵이 없다고 의논하느냐? 너희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굳어졌느냐?
직역: 그러나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어찌하여 떡들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을 의논하느냐?
아직도 너희가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게 되어 너희가 간직하느냐?
8:17 καὶ γνοὺς λέγει αὐτοῖς· (분사: 과거 능동태 주격 단수)
그러나 아시고 그가말씀하신다 그들에게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τί διαλογίζεσθε ὅτι ἄρτους οὐκ ἔχετε;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2복)
어찌하여 너희가-의논하느냐? 것을 떡들을 못한 가지고있지 (동사: 직설법 현재 중간태 2복)
οὔπω νοεῖτε οὐδὲ συνίετε;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2복) (분사: 완료 수동태 목적격 단수)
아직도 못하고 너희가-이해하지 도 못하느냐 깨닫지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2복)
πεπωρωμένην ἔχετε τὴν καρδίαν ὑμῶν;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2복)
둔하게 되어 너희가-간직하다 그 마음을 너희의 (분사: 완료 수동태 목적격 단수)
주해
▣ 예수께서 아시고. -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왜곡된 생각을 알아차리시고 그들의 영적 둔함을 꿰뚫어 보셨다. 예수께서는 초월적인 이해력으로 제자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고민을 간파하셨으며 이를 해결하시고자 그들에게 말을 건네셨던 것이다.
▣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논하느냐. - 병행 본문인 마 16:8에서는 '서로'라는 말이 첨가되어 당시 제자들의 상황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즉 제자들은 영적 무지로 인한 고민거리를 예수께 아뢰기보다는 자신들끼리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문제의 본질을 파악치 못하는 제자들을 향하여 예수께서는 다소 격한 어조로 꾸짖고 계신다.
▣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 영적인 가르침에 대하여 알려고 하기는커녕 떡에 대한 관심에 몰두하고 제자들의 모습에 한층 더 강한 어조로 책망하고 있다. 병행 구절인 마 16:9에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라는 한 마디의 언급만 나오는데 비해, 마가는 여러 말을 첨가시켜 제자들의 영적 무지를 3중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한편 본문에 표현된 '알지 못하며'(우포 노에이테)는 마땅히 알아야 될 바를 지각하지 못하는 이해력 결핍을, '깨닫지 못하느냐'(우데 쉬니에테)는 사실의 핵심과 의미를 바로 꿰뚫지 못하는 통찰력 부족을, '마음이 둔하냐'(페포로메넨 에케테 텐 카르디안)는 영적인 깨닫는 것이 느림을 의미한다. 실로 제자들에게 있어서는 영적인 깨달음이 부족했으며, 또한 육신적이며 현상적인 것에 대해서만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영적 진리에 대해 둔감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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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8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8:18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 기억하지 못하느냐 ?
8:18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가 기억하지 못하느냐?
직역: 너희는 눈들을 가지면서 보지 못하며 또 귀들을 가지면서 듣지 못하느냐? 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8:18 ὀφθαλμοὺς ἔχοντες οὐ βλέπετε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2복)
눈들을 가지면서 못하며 너희는 보지 (분사: 현재 능동태 주격 2복)
καὶ ὦτα ἔχοντες οὐκ ἀκούετε; (분사: 현재 능동태 주격 2복)
또 귀들을 가지면서 못하느냐 듣지 (분사: 현재 능동태 주격 2복)
καὶ οὐ μνημονεύετε,
또 못하느냐 기억하지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2복)
주해
▣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기억지 못하느냐. - 사 6:9의 말씀을 인용하여 제자들의 영적 무지함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미 막 6:52에서 예수의 능력에 대한 그들의 망각을 꾸짖은 적이 있으며 막 4:32에서는 군중들을 대상으로 본절과 동일한 꾸중을 하셨다. 이런 측면에서 두 번씩이나 충분한 떡을 제공하셨던 이적을 기억지 못하던 제자들은 마치 예수의 메시야 되심을 거부하던 군중들보다 나을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행하신 일과 말씀을 깊이 생각하여 영이 어두워져 육신적인 일만 도모하는 자가 되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제자들과 같은 책망을 면치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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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9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열둘이니이다
8:19 내가 빵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에, 너희는 남은 빵 부스러기를 몇 광주리나 가득 거두었느냐 ?" 그들은 그에게 "열두 광주리입니다" 하였다.
8:19 내가 빵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에, 너희가 남은 조각을 몇 바구니나 거두었느냐?" 그들이 말하기를 "열둘입니다." 하니,
직역: 내가 떡(빵) 다섯개 들을 오천명에게 떼어줄었을 때에, 너희가 남은 조각들을 얼마나 많은 바구니들을 가득차게 거두었느냐? 그들이 예수님께 열두 이라 말하니라.
8:19 ὅτε τοὺς πέντε ἄρτους ἔκλασα εἰς
때에 그 다섯개 떡들을 내가떼어주었을 에게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1단)
τοὺς πεντακισχιλίους,
그 오천명
πόσους κοφίνους κλασμάτων πλήρεις ἤρατε;
얼마나많이 바구니들을 남은 조각들의 가득차게 너희가거두었느냐?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2복)
λέγουσιν αὐτῷ· δώδεκα.
그들이 말하니라 그에게 열둘을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복)
주해 19-20절
▣ 몇 바구니‥‥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 제자들의 영적 무지에 대하여 책망을 마친 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참여하고 목격했던 두 개의 중요한 이적들을 상기시킨다. 즉 5천 명을 먹이고, 4천명을 먹인 이적의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느냐는 물음이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먹고 남은 바구니의 숫자들을 그들로 하여금 대답케 하심으로 제자들로 하여금 바른 깨달음을 주시려고 했던 것이다. 한편 여기에서 주목할 바는 급식 이적과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을 경계하라는 말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는 급식 이적을 통해서 예수의 떡은 실제적으로 모든 사람은 굶주림으로부터 참된 풍성함을 제공해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교훈도 사람들을 죄악에서 구원해 줌으로 예수는 전인적 인간의 구원자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반면, 바리새인들과 헤롯을 통해 주는 떡, 즉 그들의 교훈은 악한 것으로 사람들에게 구원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8:20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일곱이니이다
8:20 "빵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에는, 남은 부스러기를 몇 광주리나 가득 거두었느냐 ?" 그들이 "일곱 광주리입니다" 하니,
8:20 "빵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주었을 때에는 너희가 남은 조각을 몇 광주리나 거두었느냐?" 그들이 말하기를 "일곱입니다." 라고 하였다.
직역: 내가 떡(빵) 일곱개를 사천명에게 줄 때에, 너희가 남은 조각들을 얼마나 많은 광주리들을 가득차게 거두었느냐? 그들이 예수님께 일곱 이라 말하니라.
8:20 ὅτε τοὺς ἑπτὰ εἰς τοὺς τετρακισχιλίους,
때에 그 일곱개를 에게줄 그 사천명
πόσων σπυρίδων πληρώματα κλασμάτων ἤρατε;
얼마나 많은 광주리들을 가득차게 남은조각들의 너희가 거두었느냐?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2복)
καὶ λέγουσιν [αὐτῷ]· ἑπτά.
또 그들이말하니라 그에게 일곱이니다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복)
주해 19-20절
▣ 몇 바구니‥‥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 제자들의 영적 무지에 대하여 책망을 마친 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참여하고 목격했던 두 개의 중요한 이적들을 상기시킨다. 즉 5천 명을 먹이고, 4천명을 먹인 이적의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느냐는 물음이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먹고 남은 바구니의 숫자들을 그들로 하여금 대답케 하심으로 제자들로 하여금 바른 깨달음을 주시려고 했던 것이다. 한편 여기에서 주목할 바는 급식 이적과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을 경계하라는 말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는 급식 이적을 통해서 예수의 떡은 실제적으로 모든 사람은 굶주림으로부터 참된 풍성함을 제공해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교훈도 사람들을 죄악에서 구원해 줌으로 예수는 전인적 인간의 구원자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반면, 바리새인들과 헤롯을 통해 주는 떡, 즉 그들의 교훈은 악한 것으로 사람들에게 구원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8:21 이르시되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8:21 예수께서 그들에게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 하고 말씀하셨다.
8:21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라고 하셨다.
직역: 그러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고 계셨다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8:21 καὶ ἔλεγεν αὐτοῖς·
그러자 그가말씀하고게셨다 그들에게 (동사: 직설법 미완료 능동태 3단)
οὔπω συνίετε;
아직도못하느냐 깨닫지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2복)
주해
▣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 본서는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 제자들이 깨달았는지의 여부에 대해 제자들에게 되묻는 말로써 이야기의 끝을 맺고 있다. 그러나 마태는 보다 자세하게 예수의 가르침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의 교훈을 경계하라고 한 것임을 제자들이 깨달았다고 모사하고 있다. 이것은 마태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우월성을 강조한 반면 마가는 제자들의 영적 미성숙함을 의도적으로 부각시키려는 까닭 때문에 이에 대한 생략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8:22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8:22 그리고 그들은 벳새다로 갔다. 사람들이 눈먼 사람 하나를 예수께 데려와서, 손을 대어 주시기를 간청하였다.
8:22 그들이 벳새다로 갔다. 사람들이 한 맹인을 예수께 데려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그분께 간청하였다.
직역: 그리고 그들이 벳새다 안으로 이르매 그러자 예수님께 그들이 한 소경을 데리고 온다. 그리고 그를 간청한다.
그에게 예수께서 손을 대어 주게 된다면 대어주기 위함이라.
8:22 Καὶ ἔρχονται εἰς Βηθσαϊδάν.
그리고 이르매 안으로 벳새다 (동사: 직설법 현재 중간태 3복)
Καὶ φέρουσιν αὐτῷ τυφλὸν
그러자 그들이 데리고 온다 그에게 한 소경을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복)
καὶ παρακαλοῦσιν αὐτὸν
그리고 간청한다 그를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복)
ἵνα αὐτοῦ ἅψηται.
위함이라 그에게 그가손을 대어주게된다면 대어주기 (동사: 가정법 과거 중간태 3단)
주해
▣ 벳새다에 이르매. -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바다 북동쪽의 '벳새다 율리아스'에 도착한 것을 말한다. 한편 이곳은 막 6:45에 언급된 가버나움서편의 벳새다와는 다른 곳이다. 또한 이 벳새다는 분봉왕 빌립이 재건 발전시킨 곳으로, 아우구스대제의 추방당한 딸 율리아의 이름을 기념하여 이곳을 '율리아스'로 불렀다.
▣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손대시기를 구하거늘. - 복음서의 많은 구절들에는 반복적으로 예수께서 병자들에게 친히 그 손을 대시거나 사람들이 손을 매어 병을 고쳐 주시기를 바라는 사실이 나타나 있다. 이처럼 손을 대는 행위는 당시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능력이 효과적으로 전달되는 하나의 방법으로 여겼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8:23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8:23 예수께서 눈먼 사람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 두 눈에 침을 뱉고, 그에게 손을 얹으시고서 "무엇이 보이느냐 ?" 하고 물으셨다.
8:23 예수께서 그 맹인의 손을 붙잡고 그를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의 두 눈에 침을 뱉으시고 그에게 안수하시며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고 물으시니,
직역: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그를 마을 밖으로 이끌고 나가셨다. 그리고 그의 눈들 속으로 침을 뱉으시고,
그에게 두 손을 얹으신 후 그에게 묻고 계셨다. 너는 무엇이든 보이느냐?
8:23 καὶ ἐπιλαβόμενος τῆς χειρὸς
그래서 붙드시고 그 손을 (분사: 과거 중간태/디 주격 단수)
τοῦ τυφλοῦ ἐξήνεγκεν αὐτὸν ἔξω τῆς κώμης
그 소경의 이끌고 나가셨다 그를 밖으로 그 마을의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단)
καὶ πτύσας εἰς τὰ ὄμματα αὐτοῦ,
그리고 침을뱉으시고 속으로 그 눈들을 그의 (분사: 과거 능동태 주격 단수)
ἐπιθεὶς τὰς χεῖρας αὐτῷ ἐπηρώτα αὐτόν· (동사: 직설법 미완료 능동태 3단)
얹으신 후 그 두 손을 그에게 묻고 계셨다 그에게 (분사: 과거 능동태 주격 단수)
εἴ τι βλέπεις;
이든 무엇 너는 보이느냐?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2단)
주해
▣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 복음서에서 상술되어 있는 소경을 고치신 일들 가운데서 어느 하나도 같은 방법을 취하신 것이 없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 사실은 곧 예수께서 사랑과 지혜로써 모든 사람들을 개별적으로 대하신다는 것을 보여 준다. 본 사건에서도 소경의 인도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친히 환자의 손을 붙잡고 마을 밖으로 가셨음을 보게 된다. 또한 우리는 이를 통해 앞을 보지 못하는 환자에 대한 예수의 친절함과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연민의 정을 볼 수 있다. 한편 예수께서 왜 밖으로 고의적으로 나갔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경우와 귀먹고 어눌한 자를 고치신 경우를 비추어 볼 때 다른 사람의 방해를 받지 않고 환자와의 인격적 만남을 원하셨거나 아니면 일반 무리들과 격리된 곳에서 치유함으로 병 고침의 소문이 퍼져나가는 것을 방지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 눈에 침을 뱉으시며. - 침을 사용하여 치료하는 의료 행위는 당시에 일반적인 관습이었고 예수께서도 여러 번 사용하셨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런 치병 행위에서 침이 치료에 직접적인 효력이 있었다기보다는 환자에 대한 예수님의 자상하심을 보여주는 것으로 환자로 하여금 예수께 대한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 무엇이 보이느냐. - 예수의 여러 치병 행위 가운데서 이곳에만 보이는 방법이다. 이는 예수께서 환자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한 질문이라기보다는 환자가 직접 회복의 과정을 체험케 함으로써 예수를 더욱 신뢰하게 만들고자 의도하신 것이다. 즉 예수는 육신의 눈을 밝게 하심과 더불어 영혼의 치유자로 오신 그리스도를 보는 영혼의 눈을 밝게 하시고자 하신 것이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8:24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8:24 그 사람이 쳐다보고서 말하기를 "사람들이 보입니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다니는 것 같습니다" 하였다.
8:24 그가 쳐다보며 말하기를 "사람들을 봅니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다니는 것을 봅니다." 하므로,
직역: 그러자 그가 쳐다보며 말하고 있었다. 내가 사람들을 봅니다. 나무 같은 것과 걸어다니는것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8:24 καὶ ἀναβλέψας ἔλεγεν· (동사: 직설법 미완료 능동태 3단)
그러자 쳐다보며 그가말하고 있었다 (분사: 과거 능동태 주격 단수)
βλέπω τοὺς ἀνθρώπους
내가 봅니다. 그 사람들을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1단)
ὅτι ὡς δένδρα ὁρῶ περιπατοῦντας. (분사: 현재 능동태 목적격 복수)
때문이다. 같은 나무들과 보이기 걸어다니는 것을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1단)
주해
▣ 사람들‥‥나무 같은 것들의‥‥보나이다. - 다른 치병 기적이 대부분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에 비해 점층적으로 그 효과가 나타는 것 역시 다른 경우에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장면이다. 이런 치유의 과정을 통해서 환자로 하여금 능력의 근원이 예수께로 나음을 확신시키려 했던 것이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8:25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8:25 그 때에 예수께서는 다시 그 사람의 두 눈에 손을 얹으셨다. 그런 다음에, 그가 뚫어지듯이 바라보더니, 시력을 회복하여 모든 것을 똑똑히 보게 되었다.
8:25 예수께서 다시 그의 두 눈에 안수하시니, 그가 주목하여 보게 되고, 회복되어 모든 것을 분명히 보게 되었다.
직역: 그때에 다시 그의 눈들 위에 두손을 얹으셨다. 그러자 그가 밝히 보았다. 그리고 그가 회복하였다.
그래서 모든것을 분명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8:25 εἶτα πάλιν ἐπέθηκεν τὰς χεῖρας ἐπὶ τοὺς ὀφθαλμοὺς αὐτοῦ,
그때에 다시 얹으셨다 그 두 손을 위에 그 눈들 그의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단)
καὶ διέβλεψεν
그러자 그가 밝히 보았다.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단)
καὶ ἀπεκατέστη
그리고 그가 회복하였다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단)
καὶ ἐνέβλεπεν τηλαυγῶς ἅπαντα.
그래서 쳐다보고 있었다 분명하게 모든것을 (동사: 직설법 미완료 능동태 3단)
주해
▣ 다시 안수 하시매. - 예수의 치병 행위가 반복적으로 시행되는 것은 예수의 능력에 한계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런 방법을 통해서 절대적 주권을 갖고 계신 주님께서 어떤 특정된 방법으로만 역사하도록 제한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보여 주신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니면 더 나아가서 이미 언급한바 있지만 이적의 능력을 수용하는 사람의 신앙이 점점 강해짐에 따라 예수의 능력을 증가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그래서 예수에 대한 소망을 보다 크게 갖도록 만들고자 의도했으리라 본다.
▣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밝히 보는지라. - 본절에서 '본다'를 나타내는 두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주목하여 보더니'(디에블렙센)는 '~을 통하여'(디아)와 '응시하다'(블레포)의 단회적으로 보되 자세히 응시하는 것을 말하며(부정과거 시제), '보는지라'( 에네블레펜)는 '~안으로'(엔)와 '응시하다'(블레포)의 합성어로서 주의 깊게 응시하되 계속적으로 보는 것을 말한다(미완료 시제). 이처럼 마가는 소경의 치유 사건을 기술하되 예수께서 다시 안수를 하시매 점차적으로 시력이 완전히 회복되어 계속 보게 되는 그 과정을 자세히 표현하고 있다. 이런 치유의 과정을 통해서 이 소경은 자신에게 부여되고 있는 측량할 수 없는 축복의 본질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었으리라 본다. 예수의 치유 사건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눅 10장 자료노트, '예수의 치유 사역 이해'를 보다 참조하라.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8:26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이르시되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8:26 예수께서 그를 집으로 돌려보내시며 말씀하시기를 "마을로 들어가지 말아라" 하셨다.
8:26 예수께서 그를 집으로 보내시며 말씀하셨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지 마라."
직역: 그리고 예수께서 그를 그의 집으로 보내셨다. 말씀하시기를, 너는 마을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들어가지 말라.
8:26 καὶ ἀπέστειλεν αὐτὸν εἰς οἶκον αὐτοῦ λέγων· (분사: 현재 능동태 주격 복수)
그리고 그가 보내셨다 그를 으로 집 그의 말씀하시기를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단)
μηδὲ εἰς τὴν κώμην εἰσέλθῃς.
말라 안으로 그 마을 너는 들어가지 (동사: 가정법 과거 능동태 2단)
주해
▣ 집으로 보내시며‥‥마을에도 들어가지 말라. - 예수께 고침 받은 소경은 벳새다 거민이 아니었기 때문에(22절) 그가 예수를 만났던 벳새다에 들어가지 말고 바로 본 집으로 돌아가게 하셨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치유 받은 소경이 벳새다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을로 들어가지 말라'란 명령을 '마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지 말라'란 말로 이해하여 치병 이적이 있은 뒤 항상 그랬던 것처럼 무리들이 그릇된 메시야 관으로 인하여 복음 전도의 본질적 사역에 방해를 받지 않으려고 특별히 단속하신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밖에도 고침 받은 소경으로 하여금 사람들과의 접촉을 막는 것은 자신이 받은 크나큰 축복을 묵상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8:27 예수와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길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8:27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빌립보의 가이사랴에 있는 여러 마을로 길을 나서셨는데, 도중에 제자들에게 물으시기를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 하셨다.
8:27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빌립보의 가이사랴에 있는 마을들로 가시면서 길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말씀하시기를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니,
직역: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빌립보의 가이사랴 있는 마을 안으로 나가셨다. 그런데 예수님이 길에서 그의 제자들에게
묻고 있었다.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 사람들이 나를 누구이라고 말하느냐?
8:27 Καὶ ἐξῆλθεν ὁ Ἰησοῦς καὶ οἱ μαθηταὶ αὐτοῦ
그리고 나가셨다 그 예수께서 와 그 제자들이 그의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단)
εἰς τὰς κώμας Καισαρείας τῆς Φιλίππου·
안으로 그 마을들을 가이사랴의 그 빌립보의
καὶ ἐν τῇ ὁδῷ ἐπηρώτα
그런데 에서 그 길 그가 묻고있었다 (동사: 직설법 미완료 능동태 3단)
τοὺς μαθητὰς αὐτοῦ λέγων αὐτοῖς·
그 제자들을 그의 말씀하시기를 그들에게 (분사: 현재 능동태 주격 단수)
τίνα με λέγουσιν οἱ ἄνθρωποι εἶναι; (부정사: 현재 능동태)
누구 나를 말하느냐 그 사람들이 이라고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복)
주해
▣ 가이사랴 빌립보. - 이는 팔레스틴 북부 요단강의 수원(水源)인 헤르몬 산의 남서쪽 기슭에 있는 성읍이다. 이곳의 원래 지명은 '파니아스' 였으며 오늘날에는 '바니아스'로 그 이름이 남아있다. 이곳은 전략적 요충지일 뿐 아니라 비옥한 지역으로 B.C. 20년에 황제 아구스도는 이곳을 헤롯왕에게 주었다. 헤롯은 이곳에 대리석 신전을 세워 다시 황제에게 바쳤다. 그리고 B.C. 4년에는 헤롯이 죽은 후 이곳을 그의 아들 빌립이 다스렸는데, 빌립 왕은 이 성읍을 확장하여 아름답게 꾸미고 황제 디베료 가이사와 자기 자신의 이름을 따서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명명하였다. 한편 이곳 주민들의 대개는 이방인들이었으며 헬라 및 로마 문화의 중심지로서 중요한 도시이기도 하였다. 이제 예수께서는 벳새다 부근에서 요단 계곡을 따라 북행하셔서 이곳 가이사랴 빌립보 성읍으로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그 주변 산록 지대로 나가신 것으로 믿어진다.
▣ 노중에서. - 예수와 제자들은 걸으면서 대화를 나누셨음을 보여 준다.
▣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 세상 사람들이 예수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란 질문은 결국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유도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의 수난과 죽으심에 대하여 공적으로 드러내는 계기를 이룬다는 점에서 예수의 본절과 같은 질문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 질문은 자신의 활동이나 거취에 대한 단순한 정보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메시야로서의 정체성을 알리기 위한 예비적 물음인 것이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8:28 제자들이 여짜와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8:28 제자들이 예수께 대답하였다. "침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8:28 그들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어떤 이들은 세례자 요한이라고도 하고, 다른 이들은 엘리야라고도 하고, 또 다른 이들은 선지자들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하였다.
직역: 이에 그들이 예수님께 대답하여 다른사람들은 세례 요한이나 또 다른사람들은 엘리야 이나 그러나 그 선지자들 중의 하나라고 말씀드렸다.
8:28 οἱ δὲ εἶπαν αὐτῷ λέγοντες (분사: 현재 능동태 주격 단수)
그들이 이에 말씀드렸다 그에게 대답하여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복)
[ὅτι] Ἰωάννην τὸν βαπτιστήν,
이나 요한 그 세례
καὶ ἄλλοι Ἠλίαν,
또 다른사람은들은 엘리야
ἄλλοι δὲ ὅτι εἷς τῶν προφητῶν.
다른사람들은 그러나 것을 하나라 그 선지자 중의
주해
▣ 세례인 요한‥‥선지자 중의 하나. - 마태는 '어떤 이는 예레미야'라는 말을 첨가하고 있다. 이러한 대답으로 보아 당시 사람들이 예수에 대해 얼마나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보여 준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은 메시야가 아니라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자였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에 유대인들 사이에는 말 3:1과 4:5에 근거하여 엘리야가 다시 살아온다는 사상이 퍼져 있었는데, 그 엘리야 역시 메시야이신 예수의 길을 예비하는 자였을 뿐 인류를 구원할 참 메시야는 아니었다. 또한 선지자 중의 하나는 모세가 예언한 오리라 기대된 선지자를 가리키는 것이긴 하나 당시 사람들은 이를 완전히 알지 못하고 예수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등장한 수많은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일 뿐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다. 실로 메시야를 오래도록 대망해 오던 유대인들이 참 메시야이신 예수를 메시야로 알지 못했다는 것은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8:29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8:29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8:29 예수께서 또 그들에게 물으시기를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니, 베드로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주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하였다.
직역: 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묻고 있었다. 그러면나 너희는 나를 누구이라고 말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예수님께 말한다. 당신은 그분 그리스도 이시나이다.
8:29 καὶ αὐτὸς ἐπηρώτα αὐτούς·
또 그가 묻고있었다 그들에게 (동사: 직설법 미완료 능동태 3단)
ὑμεῖς δὲ τίνα με λέγετε εἶναι; (부정사: 현재 능동태)
너희는 그러면 누구를 나를 말하느냐? 이라고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2복)
ἀποκριθεὶς ὁ Πέτρος λέγει αὐτῷ·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대답하여 그 베드로가 말한다 그에게 (분사: 과거 수동태/디 주격 단수)
σὺ εἶ ὁ χριστός.
당신은 이시니이다. 그분 그리스도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2단)
주해
▣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 세상 사람들의 메시야관에 만족하지 못하신 예수는 이제 제자들에게 눈을 돌려 그들의 메시야관에 대해 물으신다. 본문은 '그렇다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휘메이스 데 티나 메 레게테 에이나이)로 특별히 '너희'에 강조점이 있다(강조형 대명사). 즉 질문을 받는 바로 '너희'의 생각을 물으신 것이다. 한편 제자들을 향한 이와 같은 질문은 참 제자가 되길 원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 각자에게 항상 던져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 제자들을 대표하여 베드로가 고백한 것이다. 한편 그 내용이 마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로 각기 언급되는데, 이는 누가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로, 누가는 종합적이며, 마태는 신앙 고백문적으로 가장 상세하다는 것을 그 특징으로 한다. 그러나 마가 역시 짧으나마 핵심은 정확히 전달하고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크리스토스)라는 표현은, 유대인들이 말하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로서의 '메시야'를 가리킨다. 구약 성경에서 '기름부음 받은 자'는 곧 제사장이나 선지자, 왕 등을 지칭하는데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 말 속에는 '하나님에 의해 개인적으로 선택받은 자', '하나님의 직무를 위해 선택된 부름 받은 성별된 자'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칭호는 예수가 구약 성경에 나타난 제사장 선지자 왕의 완성이며 하나님의 백성에게 이러한 직분을 완벽히 수행할 것임이 잘 표현되고 있다. 어쨌든 이 같은 베드로의 고백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의 본질을 정확히 드러낸 것으로 기독교 신앙 고백의 기초를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은 '메시야 직'에 대한 이해가 불완전했다는 점이다. 즉, 메시야의 영광은 바라보았으나 메시야가 필연적으로 겪게 될 고난당하며 배척받고 끝내는 죽으실 것에 대한 이해는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8:30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고하시고
8:30 예수께서 그들에게 엄중히 경고하시기를, 자기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8:30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자신에 관하여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경고하셨다.
직역: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엄히 명하셨다. 자기에 관하여 말하게 된다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기 위함이라.
8:30 καὶ ἐπετίμησεν αὐτοῖς
이에 그가 엄히 명하셨다 그들에게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단)
ἵνα μηδενὶ λέγωσιν περὶ αὐτοῦ.
위함이라 아무에게도않기 말하게된다면말하지 관하여 자기에 (동사: 가정법 현재 능동태 3복)
주해
▣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계하시고. - 마태의 병행 구절에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들으시고 이러한 지혜의 근원이 하나님이며 이러한 신앙 고백 위에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를 세울 것이라는 계획을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마가는 이러한 예수님의 칭찬과 베드로를 통해 이루실 계획을 모두 생략하고 있다. 이는 본서의 저자인 마가의 스승으로서 본서 기술의 정보를 제공한 것으로 보이는 베드로가 스스로에 대한 겸손함으로 침묵을 원했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본절을 통해서 예수는 그의 메시야 성을 부정하신 것이 아니라, 단지 아직 이를 공포할 시기가 아닌 것을 밝히는 것뿐이다. 왜냐하면 제자들의 믿음이 확고하지 못한 상태였으며, 당시 사람들도 메시야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메시야이심이 노출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8: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8:31 그리고 예수께서는, 인자가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서, 사흘 뒤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8:31 예수께서 그들에게,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해야할 것과 삼일 후에 부활해야 할 것을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직역: 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는 것을 시작하셨다. 사람의 아들이 많은 일들과 고난격는 것을 반드시해야 한다.
그리고 장로들과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 배척당하는것을 그리고 죽임당하는 것을 그리고 삼일 후에 다시살아나는 것을
8:31 Καὶ ἤρξατο διδάσκειν αὐτοὺς (부정사: 현재 능동태)
그리고 시작하셨다 가르치는것을 그들을 (동사: 직설법 과거 중간태 3단)
ὅτι δεῖ τὸν υἱὸν τοῦ ἀνθρώπου πολλὰ παθεῖν (부정사: 과거 능동태)
것을 반드시해야한다 그 아들이 그 사람의 많은일들을 고난격는것을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καὶ ἀποδοκιμασθῆναι ὑπὸ τῶν πρεσβυτέρων
그리고 배척당하는 것을 의하여 그 장로들부터 (부정사: 과거 수동태)
καὶ τῶν ἀρχιερέων καὶ τῶν γραμματέων
그리고 그 대제사장들 과 그 서기관들에
καὶ ἀποκτανθῆναι
그리고 죽임당하는 것을 (부정사: 과거 수동태)
καὶ μετὰ τρεῖς ἡμέρας ἀναστῆναι·
그리고 후에 삼 날들을 다시살아나는 것을 (부정사: 과거 능동태)
주해
▣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 공관복음서는 다같이 베드로의 신앙 고백과 관련하여 그리스도 자신의 수난을 연결시키고 있다. 다시 말해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계기로 예수가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것이 그가 세상에 오신 목적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한편 본문에서 메시야의 고난과 관련하여 쓰인 '인자'(휘온스 투 안드로푸)라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의미를 가지고 성경에서 사용되었다. 즉 시편에서는 이 용어가 주로 단순히 '사람'을 의미하는 말로, 에스겔서에서는 주로 '예언자'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신약에 나오는 '인자'라는 칭호는 이러한 구약적 개념과 더불어 장차 종말의 때에 오게될 분으로서 단 7:13,14의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그 외에도 부가적인 의미가 있는데 그 가운데서 특히 중요한 것은 본절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인자가 고난 받고 죽게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다른 복음서들과 마찬가지로 본서의 '인자' 개념 역시 종말에 나타날 영광에 둘러싸인 인자와 고난 받아 죽는 인자의 모습이 함께 반영되어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전제로 하여 예수께서 베드로의 신앙 고백 직후 제자들에게 '인자'가 고난 받다가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친 것은 예수가 '인자'라는 말을 자신이 메시야임을 가르치기 위해서 선택된 칭호로 사용하셨음이 틀림없다. '인자'의 이해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눅 12장 자료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 이들은 유대인들의 사법과 행정 및 입법에 있어 최고 기관인 산헤드린을 구성하는 3대 세력으로서 지금까지 예수를 핍박하여 왔을 뿐 아니라 장차 사형을 의결하고 빌라도에게 고발하는 자들이었다. 예수는 본절에서 이미 이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 - 전자가 그리스도의 수난을 예고하는 비극적인 예언이라면 이 부분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심을 보여주는 승리의 예언이다. 한편 '사흘 만에' 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3일 후에'(메타 트레이스 헤메라스)란 의미이다. 이에 비해 마태와 누가는 '제 삼일에'라고 기록하여 '셋째 날에'라는 의미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미묘한 표현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두 예수께서 단 3일, 즉 72시간 이후에 살아난다는 의미가 아님은 동일하다. 한편 '살아나야'(아나스테나이)라는 말은 자신 스스로 죽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 구절은 예수가 스스로 신적 권능으로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일어나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한편 이와 병행 구절인 마 16:21에서는 '살아나야 할'(에게르데나이)로 나오는바 이는 수동태로서 죽음에서 살아나심을 입을 것이란 표현이다. 즉 이는 본절과는 다르게 하나님에 의해서 부활하게 될 것을 보여준다 하겠다. 그러나 이 역시 마가복음과는 상충되는 것이 아닌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권능 및 자신의 권세로 죽음을 극복함을 보여준다 하겠다.
▣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 예수가 전에 이미 자신의 수난을 예고하신 바 있지만, 그때는 암시적으로 밝힌 반면에 이제는 공개적으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메시야직에 대해서 가르치기 시작했다는 차이점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공적인 예고에는 항상 3일 만에 부활하신 것을 동반시킴으로써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 전제된 바와 같이 승리적인 측면이 내포된 것이 주목할 만한 일이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8:32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8:32 예수께서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꼭 붙들고, 예수께 항의 하였다.
8:32 예수께서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잡고 항의하기 시작하였다.
직역: 그런데 예수께서 드러나게 말씀되어진 것을 말씀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곁에서 예수님을 붙들고 예수님을 말리는 것을 시작하였다.
8:32 καὶ παρρησίᾳ τὸν λόγον ἐλάλει.
그런데 드러나게 그 말씀되어진 그가-말씀하셨다. (동사: 직설법 미완료 능동태 3단)
καὶ προσλαβόμενος ὁ Πέτρος αὐτὸν
그러자 곁에서 붙들고 그 베드로가 그를 (분사: 과거 중간태 주격 단수)
ἤρξατο ἐπιτιμᾶν αὐτῷ. (부정사: 현재 능동태)
시작하였다 말리는 것을 그에게 (동사: 직설법 과거 중간태 3단)
주해
▣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 '드러내 놓고'(파르레시아)라는 말은 '명백하게'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신약에서 보통 '담대히'로 많이 번역되었다. 그리고 '말씀을 하시니'에 해당하는 헬라어(엘랄레이)는 미완료 능동태로 계속해서 말씀하고 계셨음을 보여 준다. 따라서 예수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 있은 후부터는 노골적으로 자신의 장래를 거듭 밝혀 그 일들의 확실성과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 예수를 붙들고 간하매. - 예수의 고난 예고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이 매우 간곡했음이 드러나고 있다. 본문에서 '붙들고'라는 말은 '곁으로', '취하다', '당기다'란 뜻이다. 즉 이는 예수를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겨 자기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현했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간하매'(에피티마오)라는 말은 다음 절에 나오는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꾸짖다'라는 표현과 동일한 단어로서 노골적으로 비난함을 의미한다. 이로 보건대 베드로는 자신의 신앙 고백과는 달리 예수께서 고난을 받을 것이라는 말에 대해서 있을 수 없는 일로 생각하고 심하게 항변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마태는 이 사실을 더 상세히 묘사하여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본 구절을 공동 번역은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펄쩍 뛰었다'라고 번역하였다. 이러한 베드로의 반응은 육적이며 인간적인 측면에서 나온 행동으로서 당시에 팽배해 있던 정치적 힘에 의한 해방을 가져다주는 그릇된 메시야 관에 사로잡혀 있음을 본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8: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8:33 그러나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시고, 베드로를 꾸짖어 말씀하시기를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셨다.
8:33 예수께서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말씀하시기를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이는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라고 하셨다.
직역: 그러나 예수께서 다시 돌이키시고 제자들을 보신 후에 그의 베드로를 엄히 꾸짖었다. 그리고 말씀하신다.
사탄아 나의 뒤로 떠나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들을 생각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라. 도리어 사람의 일들을 생각한다.
8:33 ὁ δὲ ἐπιστραφεὶς
그분께서 그러나 다시 돌이키시고 (분사: 과거 수동태 주격 단수)
καὶ ἰδὼν τοὺς μαθητὰς αὐτοῦ ἐπετίμησεν Πέτρῳ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단)
그리고 보신후에 그 제자들을 그의 엄히 꾸짖었다 베드로를 (분사: 과거 능동태 주격 단수)
καὶ λέγει·
그리고 말씀하신다.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ὕπαγε ὀπίσω μου, σατανᾶ,
떠나가라 뒤로 나의 사탄아 (동사: 명령법 현재 능동태 3단)
ὅτι οὐ φρονεῖς τὰ τοῦ θεοῦ
때문이다 아니하고 네가생각하지 그일 그 하나님의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2단)
ἀλλὰ τὰ τῶν ἀνθρώπων.
도리어 그(일들) 그 사람들의
주해
▣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 마태는 꾸짖음의 대상을 베드로에게 국한시켜 묘사하나, 마가는 제자들 전체를 향하여 보신 것과 베드로를 꾸짖으시는 것을 병행시켜 묘사하고 있다. 이처럼 마가는 베드로 한 사람이 아닌 제자들 모두를 언급함으로써 당시 제자들 모두도 마음 속으로는 베드로와 똑같은 메시야관을 가지고 있었으며 예수께서는 이들도 책망의 대상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통해 제자들을 책망하셨으나 실제로는 그 배후에서 역사한 사탄을 꾸짖으신 것이었다. 왜냐하면 베드로의 그와 같은 마음은 사탄에게서 온 것임을 예수께서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아울러서 예수의 이 같은 단호한 반응은 자신이 이미 선언한 고난의 길이 사탄의 유혹으로 방해받을 수 없음을 보여 준다. 사실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고난을 받고 죽임당할 것을 수납하기란 힘든 일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이 과정이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예수께서 이 전에 마귀를 물리치셨을 때도 똑같은 말씀으로 사탄을 단호히 물리치신 것을 기억하자.
▣ 하나님의 일‥‥사람의 일. - 예수께서 베드로의 생각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심을 통해 제자들을 꾸짖으신 이유를 밝힌다. 그것은 곧 베드로가 하나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을 더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일'이란 하나님의 영원하신 구속의 계획을 따라 고난의 십자가를 지는 길이고, '사람의 일'이란 고난과 죽음을 포기하고 정치적 메시야로서 예루살렘 왕 위에 올라 안일함과 편안함을 추구하는 일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이 결코 양립할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신의 안락과 현재의 생활에 마음을 더 들 때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그의 하수인이 되기 쉬운 것이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8: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8:34 그리고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무리를 불러 놓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8:34 예수께서 무리를 제자들과 함께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직역: 또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과 함께 무리를 가까이 부르신 후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만일 나의 뒤를 따르는 것을 원하면 자기자신을 철저히 부인하라 그리고 그의 십자가를 짊어지라.
그리고 나를 따르라
8:34 Καὶ προσκαλεσάμενος
또 가까이 부르신 후에 (분사: 과거 중간태/디 주격 단수)
τὸν ὄχλον σὺν τοῖς μαθηταῖς αὐτοῦ εἶπεν αὐτοῖς·
그 무리를 함께 그 제자들과 그의 말씀하셨다 그들에게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단)
εἴ τις θέλει ὀπίσω μου ἀκολουθεῖν, (부정사: 현재 능동태)
만일 누구든지 원하면 뒤를 나의 따르는 것을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ἀπαρνησάσθω ἑαυτὸν
철저히 부인하라 자기자신을 (동사: 명령법 과거 중간태/디 3단)
καὶ ἀράτω τὸν σταυρὸν αὐτοῦ
그리고 짊어지라 그 십자가를 그의 (동사: 명령법 과거 능동태 3단)
καὶ ἀκολουθείτω μοι.
그리고 따르라 나를 (동사: 명령법 현재 능동태 3단)
주해
▣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 베드로의 신앙 고백과 예수의 첫 번째 수난 예고가 시작되는 27절을 보면, 이는 예수와 제자들이 길을 가다가 되어진 상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제자들 외에 '무리'가 또다시 등장함으로써 이제부터 가르치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의 자세에 대한 예수의 교훈은 제자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무리에게로 그 대상이 확장되고 있음을 본다. 한편 이러한 교훈은 본서의 일차적 독자가 로마의 치하에서 종교적으로 고난 받는 그리스도인이었다는 점에서 고난의 당위성과 그로 인한 영원한 구원의 도를 전하는 이 부분은 그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 '~ 하려거든'(델레이)은 능동적으로 '결정하다' 혹은 수동적으로 '기울어지다'란 뜻의 '델로'의 현재 직설법이다. 따라서 이는 '예수를 따르기로 결정했거나 예수를 순종하기로 열망하는 의지가 있으면'이란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이를 오늘날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기독교인이 되려면'이라 이해할 수 있다.
▣ '부인하고.' - ‘자기를 부인한다'(아팔네오마이)는 말은 '멀리 떨어지다'란 뜻의 접두사 '아포'와 '단절하다', '부정하다'는 뜻의 동사 '알네오마이'의 합성어로서 자기의 본래 성품이나 죄된 생각과 습관에서의 '완전한 단절'을 의미한다. 즉 이 단어는 육의 소망을 억제하는 차원 정도가 아니라 자신 안에 내재된 악의 모습을 완전히 끊어버리고 이를 완전히 다른 것으로 대체함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자신에 대한 완전한 포기는 자기를 십자가에 내어줄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 보여진 바와 같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성도들도 이러한 스스로에 대한 포기를 함으로써 의를 이를 수 있다.
▣ 자기 십자가를 지고. - 이 말을 아전인수 격으로 이해하여 인간이 생활 가운데 겪는 물질고나 살아가면서 맞는 근심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죄인들을 위해 고난을 당하신 것처럼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당하는 성도의 고난과 죽음을 의미한다. 사실 당시의 관습으로는 십자가에 못 박힐 자가 스스로 십자가를 메고 처형 장소까지 가야 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이 처음부터 사형 선고를 받은 죄인임을 깨닫고 자신을 포기하며 그리스도께서 친히 담당하신 고난의 길을 좇아야할 것이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8:3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8:3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
8:3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려 하는 자는 그것을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그것을 구원할 것이다.
직역: 왜냐하면 누구든지 자기의 목숨을 구원하는 것을 원하면 그것을 잃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자기의 목숨을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잃으면 그것을 구원하리라.
8:35 ὃς γὰρ ἐὰν θέλῃ τὴν ψυχὴν αὐτοῦ
누구 왜냐하면 든지 원하면 그 목숨을 자기의 (동사: 가정법 현재 능동태 3단)
σῶσαι ἀπολέσει αὐτήν· (동사: 직설법 미래 능동태 3단)
구원하는것을 잃어버릴것이다 그것을 (부정사: 과거 능동태)
ὃς δ᾽ ἂν ἀπολέσει τὴν ψυχὴν αὐτοῦ
누구 그러나 든지 잃으면 그 목숨을 자기의 (동사: 직설법 미래 능동태 3단)
ἕνεκεν ἐμοῦ καὶ τοῦ εὐαγγελίου σώσει αὐτήν.
위하여 나 와 그 복음을 구원하리라 그것을 (동사: 직설법 미래 능동태 3단)
주해
▣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일을 것이요. - 본문은 '왜냐하면'(가르)이라는 접속사로 시작하여 34절에서 주어진 명령의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즉 자기 부인과 고난과 죽음을 명령한 이유를 역설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에서 강조하는 바는 자신의 유익을 위해 진리를 거부한다면 그는 이미 죽음의 길을 선택한 것과 다름 없다는 것이다. 이로써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무리들에게 생명에 관한 바른 가치관을 제시함으로 제자된 자의 삶이 어떠한가를 보여 주신 것이다.
▣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 예수를 부인함으로 육적인 생명을 구원받을 수 있을지 모르나 영원한 생명은 잃게 될 것을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의 참 제자가 되기 위해 자신을 부인하는 자는 고난과 함께 육적인 생명을 잃지만 영생과 구원은 보장받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이런 말씀의 의중에는 죽음이 없이는 생명이 없고,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 없이는 부활이 없다는 것을 의도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역설적인 메시지를 통해서 자신뿐만이 아니라 자신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맞이할 박해와 고난을 예견하셨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8: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8:3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
8:3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직역: 왜냐하면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의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8:36 τί γὰρ ὠφελεῖ ἄνθρωπον κερδῆσαι τὸν κόσμον ὅλον (부정사: 과거 능동태)
무엇이 왜냐하면 유익하게하리요 사람을 얻고도 그 세상을 온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καὶ ζημιωθῆναι τὴν ψυχὴν αὐτοῦ;
그리고 잃게 되는것이 그 목숨을 자기의 (부정사: 과거 수동태)
주해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 본문에서 말씀하신 '온 천하'는 34절에서 언급한 예수를 따르기 위해서 포기해야 할 것들 전체를 의미한다. 곧 참 제자가 되기 위해서 버려야 할 것, 즉 땅 위에서 얻고자 하는 소유물과 세상의 권위 권력 등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본절의 '목숨'(프쉬케)은 '영원한 생명'을 의미하는 '조에'나 '영혼'(프뉴마)을 뜻하는 말과는 달리 '육체적 생명' 혹은 '현재의 생명'을 의미한다. 이것은 현재의 육체적 생명이 비록 영원한 생명이나 영혼보다 낮은 가치를 지니고 있으나, 사람이 참 제자의 도를 얻기 위해 버려야 할 것들에 비해서는 보다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 볼 때 인간의 현재 생명도 그러하거니와 영원한 생명은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족히 비교할 수 없이 귀중한 것이다. 따라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영원한 생명의 주이신 그리스도를 따라야 하는 것이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8:37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8:37 사람이 제 목숨을 되찾는 대가로 무엇을 내놓겠느냐 ?
8:37 사람이 자기 목숨의 대가로 무엇을 주겠느냐?
직역: 왜냐하면 사람이 자기의 목숨을 무엇과 바꾸어 줄것인가?
8:37 τί γὰρ δοῖ ἄνθρωπος ἀντάλλαγμα τῆς ψυχῆς αὐτοῦ;
무엇과 왜냐하면 줄것인가 사람이 바꾸어 그 목숨을 자기의 (동사: 가정법 과거 능동태 3단)
주해
▣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 이 문장은 표현적으로는 목숨과 바꿀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가르친다. 그러나 그 이면적 의미는 오히려 36절에서 말한바 천하보다 귀중한 목숨과 바꿀만한 것이 무엇인지 질문하는 것이다. 그 해답은 이미 35절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참으로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추구해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 그리고 그로 말미암는 영원한 생명일 것이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8: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8:38 음란하고 죄가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인자도 자기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8: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악된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 가운데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직역: 왜냐하면 누구든지 내 말들 안에서 나를 심히 부끄러워 한다면 음란하고 죄가 많은 이 세대다.
역시 사람의 아들도 그를 심히 부끄러워할 것이라.
인자의 아버지가 오게 된다면 영광 중에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것이다
8:38 ὃς γὰρ ἐὰν ἐπαισχυνθῇ με
누구 왜냐하면 든지 심히 부끄러워한다면 나를 (동사: 가정법 과거 수동태/디 3복)
καὶ τοὺς ἐμοὺς λόγους ἐν τῇ γενεᾷ ταύτῃ τῇ μοιχαλίδι
그리고 그 내 말들을 안에서 그 세대에 이 그 음란하고
καὶ ἁμαρτωλῷ,
그리고 죄가 많은
καὶ ὁ 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 ἐπαισχυνθήσεται αὐτόν,
역시 그 아들도 그 사람의 심히부끄러워할 것이라 그를 (동사: 직설법 미래 수동태/디 3단)
ὅταν ἔλθῃ ἐν τῇ δόξῃ τοῦ πατρὸς αὐτοῦ
때 그가 오게된다면 중에 그 영광 인자도 아버지의 그의 (동사: 가정법 과거 능동태 3단)
μετὰ τῶν ἀγγέλων τῶν ἁγίων.
함께 그 천사들과 그 거룩한
주해
▣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 - 본 구절은 가르치신 35절과 병행되며, 또한 35절을 보충한다. 즉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결국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리는 현 상황을 지적하는 말씀인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음란하다'(모이칼리스)는 말은 기혼자의 성적 부정을 뜻하는 말로서 우리의 영원한 보호자 되시는 하나님을 거부하고 다른 의뢰자를 찾는 상황을 묘사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이어 나오는 '죄 많은'(하말톨로스)이란 표현에도 나타나는데 이는 참 생명을 버리고 세상의 일시적인 쾌락에 빠지는 타락한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 본문의 '부끄러워하다'(에파이스퀸데)는 말은 '부인하는 것', 즉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자신의 의사를 명백히 밝히는 것을 말한다. 실로 당시의 유대인들은 영적으로 매우 음란한 상태였을 뿐 아니라 스스로의 위선과 독선에 빠져 구약에 명백히 예언된 메시야의 속성이 예수에게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그리스도되심을 부인하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유대인에게서 뿐만 아니라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한 자들 가운데서도 환난을 당하여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가 많았으므로 당시 마가는 이 부분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
▣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올 때에. - 예수께서는 자기 자신을 '인자'로 밝히고 있는바 일반적으로 이 명칭은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종으로서 오신 그리스도의 낮아지신 상태를 일컫는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 명칭을 마지막 때에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분이시며 심판주되심을 가리키는데 사용함으로써 '인자'란 이름을 그리스도의 승귀와 관련시키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당시 예수의 말씀을 듣는 무리들은 지금 그들 앞에서 말씀을 선포하시는 분이 낮아지셔서 인간의 몸을 입고 걸으나 그 본질은 하나님이심을 알아야만 했다. '인자의 이해'를 보다 참조하라. 아울러서 본절은 그분이 재림하실 때 그분이 지닌 메시야로서의 절대적인 가치를 외면한 자들은 영광스러운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고 수치와 부끄러움과 영원한 모욕을 당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경고를 들으면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면서도 세상 사람들을 의식하여 그것을 드러내어 증거하기를 부끄러워하는 자가 아닌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