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린야구는 서울팀의 선두주자이며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명문중의 명문팀입니다
배성서ㅡ김충ㅡ한동화ㅡ박용진ㅡ김우열ㅡ이해창ㅡ유남호ㅡ박준영ㅡ이길환ㅡ정종현ㅡ김광수ㅡ김문영ㅡ윤석환등 수많은 야구스타를 배출한 서울군의 최고 인기팀이었습니다.
79년도에도 윤석환과 1학년천재 박노준을 앞세워 윤학길의 부산상고를 15대1로 대파하며 대통령배를 우승하였으며 청룡기에선 준우승을 하였습니다.
1980년에도 우승2번과 준우승1번을 함으로서 명실공히 그해 최강팀으로 군림하였습니다
그런데 80년 황금사자기우승을 마지막으로 35년간 한번도 우승을 못하면서 슬럼프에 빠지게될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우선 80년 선린상고의 라인업을 살펴보겠습니다.
투수ㅡ나성국(3학년),박노준(2)김건우(2)
포수ㅡ김현성(3)
1.이정철ㅡ유격수ㅡ3
2.이경재ㅡ중견수ㅡ2
3.박노준ㅡ우익수ㅡ2
4.유지홍ㅡ1루수ㅡ3
5.김건우ㅡ3루수ㅡ2
6.김현성ㅡ포 수ㅡ3
7.김웅대ㅡ좌익수ㅡ2
8.한두영ㅡ2루수ㅡ3
9.나성국ㅡ투 수ㅡ3
대타ㅡ김종호ㅡ3, 조영일ㅡ2
ㅡ대통령배ㅡ
1회전에서 선동열과 허세환이 활약한 광주일고에 5대떡으로 셧아웃당합니다.
에러를 무려 8개를 범했는데 당시 라디오중계를 하시던 박종세캐스터가 울부짖으며 서울야구의 자존심이 무너졌다고 성토하더군요.
결국 우승은 광주일고가 차지하고 준우승은 김태업과 이순철,장채근이 활약한 광주상고에게 돌아걉니다.
ㅡ청룡기ㅡ
대통령기에서 한개임 8개의 실책을 범한 내야진에 특훈을 실시한 결과가 나타나 결승까지 무난히 오르며 박동수의 마산상고를 5대0 으로 가볍게 누르고 우승합니다.
이때부터 박노준의 천재성이 방송에 입을타면서 모든 대학팀의 강한 러브콜을 받습니다.
ㅡ봉황대기ㅡ
청룡기에서 내야를 재정비하여 막강한 투타의 위력을 선보인 선린의 우승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16강에서 또 복병 세광고를 만납니다.
민문식이 9회까지 선린타선을 잠재우며 한점차로 승리하자 다음날 모든 신문들이 앞다투어 선린의 침몰을 앞다투어 보도합니다.
당시 세광은 민문식이외에 2학년이던 한희민도 있었기에 결코 만만한 팀이 아니었고 기어코 대붕기에선 우승까지 거머쥡니다.
봉황기우승은 이상군,김상국,전대영,조양근이 버틴 북일고가 김진원투수와 1학년 검객타자 노찬엽이 분투한 배재를 누르고 창단이후 첫우승의 감격을 누렸습니다.
배재 김진원투수는 연대로 진학하여 거의 마운드에 서지도 못했고 얼마후 은퇴합니다.
ㅡ황금사자가ㅡ
강팀들이 대거 참석하여 왕중왕전의 성격을 띤 수준높은 대회였습니다.
거두절미하고 선린상고와 광주일고의 결승전을 기억해 보겠습니다.
선동열대ㅡ박노준이라는 슈퍼스타의 맞대결과 서울의 기수와 호남팀의 맹주가 만난다는 결승전의 흥분은 동대문야구장앞을 일대 교통혼잡으로 수놓았으며 암표상의 암표가격이 비공식적으로 최고였다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광주일고가 먼저 선취점을 뽑으며 승기를 잡는듯 했으나 유지홍이 역전2루타를 날리며 전세를 뒤집은 선린은 박노준이 선동열로부터 3점홈런을 선린응원단이 진을친 우측펜스로 선사하며 5대3으로 승리하며 왕중왕임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박노준은 홈런포함 3안타를 뽑아냈으며 구원투수로나서 깔끔하게 무실점으로 광주일고의 타선을 틀어막았습니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며 2학년들이 주축이된 선린상고가 81년에는 최소2관왕은 할걸로 모두들 믿어의심치 않았지만 고교야구사상 최악의 불운이 기다릴줄은 누가 알았겠습니까?
81년의 우리 선린야구는 추락하는것은 날개가 있다라는 사실을 똑똑히 보여주며 2005년 이영하와 김대현이 활약하기까지 황금사자기를 되찾는데 무려 35년 암흑의 세월을 보냅니다.ㅡ35년간 준우승은 여러번함ㅡ
생각하기도싫은 81년의 선린라인업입니다.
1.김웅대ㅡ좌익수ㅡ대주자하면 딱 알맞음
2.김국진ㅡ유격수ㅡ알까기의 명수
3.박노준ㅡ우익수
4.김건우ㅡ투 수
5.조영일ㅡ1루수ㅡ봉황기결승에서 알까기
6.이경재ㅡ중견수ㅡ찬스에 강함
7.조홍기ㅡ포수ㅡ1루주자는 2루에 공짜진루
8.김명배ㅡ2루수ㅡ수비좋고 타격도 좋음
9.박지원ㅡ3루수ㅡ그해 평균실책이 가장 많았던 선수로서 구본호감독의 총애를 왜 받았는지 아는사람은 다 압니나.
백업투수ㅡ이바오로ㅡ실력은 있는데 구본호감독이 왠만해선 믿질못해서 경기에 많이 못나옴
1981년의 준우승만 세번한 최악의 불운은 어쩌면 부정부패로 찌들었던 구본호감독의 공이 컸다고 볼수있습니다.
구본호감독은 펑고볼조차 쳐줄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1981년을 이제 제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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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생각하기도 싫은 81년의 우승팀을 살펴보면
대통령기ㅡ우승~군산상고(조계현ㅡ1,장호익ㅡ3,이동석ㅡ2,이건열ㅡ3) 준우승~천안북일(김상국포수ㅡ3,안성수,김대중투수ㅡ2,하인수ㅡ3)
청룡기ㅡ우승~경북고(3학년ㅡ성 준,최무영,홍순호,권택재,구윤, 조광덕2학년ㅡ유중일,1학년ㅡ문병권)ㅡ선린보다 한수 아래로 평가되었으나 짜임새있는 팀컬러와 고비때마다 에러를 남발하는 선린의 박지원,김국진,조영일,조흥기덕택에 박노준과 김건우를 침몰시킴)
기억력이 상당히 좋으시네요.선린상고가 전력이 좋음에도 불구하고 에러 등으로 우승기회를 많이 날려 버린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한테 81년은 악몽이었습니다.
선린출신들은 초등학생한텐 지더라도 경북고에겐 콜드게임으로 이기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니깐요.
봉황대기ㅡ경북고 우승
선린상고 준우승
박노준의 발목이 돌아가면서 선린의 운명도 뒤틀어짐ㅡ6대4로 경북승리
황금사자기ㅡ경북고 우승
광주진흥 준우승
박노준과 김건우가없는 선린상고가 빠지자 경북이 손쉽게 우승하며 3관왕.
광주진흥의 김정수투수는 연대로 진학하여 팀숙소를 여러번 이탈하고 게임에도 거의 나오지않는등 싱싱한 어깨를 가지고 해태에 입단
화랑기(봉황기 직전에 열렸음)ㅡ신일고 우승(이재홍투수,서효인포수,민경삼유격수)
선린상고ㅡ준우승ㅡ에러가 또 발목잡음
서울팀을 응원하는 저로서는 선린상고 야구의 흑역사는 마음아픈 일이었습니다.
저도 그때만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화끈한 공격야구까진 좋은데 수비가 너무 엉망이었습니다.
주전10명이 3학년이었는데 그중 두명정도는 야구선수라 볼수없을 정도의 실력이었습니다
구본호감독은 바로 짤리고 자취를 감추고 말았으니 아무 증거가 없지요.
81년 대붕기는 어디가 우승했나요?
세광고등학교가 우승 ㅡ인천고ㅡ80년도
대구고우승ㅡ군산상고 준우승ㅡ81년도
화랑기는 몰라도 대붕기는 권위가 좀 떨어지더군요.
이제는 화랑기ㅡ대붕기ㅡ무등기가 완전 폐지되었습니다
60년대부터 80년대 초반까지 선린상고에는 초고교급 선수로 불리며 일찍부터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선수들이 많이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고교 졸업 후에 대성한 선린출신 선수는 의외로 적은 것 같습니다.
60년대 중반에 고교생 홈런왕으로 이름을 떨쳤던 김태석, 이영완 등 강타자들은 제일은행에 입단한 후에 두각을 보이지 못했고... 오히려 같은 시기에 조용히 제일은행에 입단했던 김우열 선수만이 실업야구 2, 3년차부터 홈런타자로 명성을 얻으며 국가대표선수로 크게 활약했었습니다.
(선린출신 중에서는 60년대 졸업생인 김우열 선수가 첫 손으로 꼽을 레전드일 것 같네요. 그 다음에는 건대 72학번이었던 이해창 정도?...)
이상하리만큼 선린출신 선수들은 고교 졸업 후에 잘 풀리지 않은 아까운 선수들이 많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저만의 생각일까요?
박노준은 고1 때인 79년 대통령배대회에서 최우수선수상을 받았고 고2 때인 80년 청룡기대회에서 또 최우수선수상을 받는 등 일찍부터 투타를 겸비한 초고교급선수로 그 명성과 인기가 하늘을 찔렀지만... 역시 이후에 큰 선수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고교야구사에서는 가히 전설적인 선수로 꼽힐 만큼 인기가 높았던 박노준이었지만... 프로야구에 진출해서는 12시즌 동안 통산타율 0.262, 통산홈런 28에 100안타 이상을 친 시즌이 2회뿐인, 아주 평범한 선수였습니다.
네.아오이님의 기억도 선린상고 출신들이 졸업후에 많이 뻗어나가지 못한 선수들로 남아 있군요.안타깝네요.
선린선수중 유남호만큼 대학이나 실업에가서 추락한 선수도 없을겁니다.
69년 고교전국대회를 싹쓸이하고 연대에 진학했지만 부진한 모습을 보였고 아마롯데에서도 거의 던지질 못했으니깐요.
저는 유지홍이 3루나 숏 스탑으로 기억 합니다. 김건우가 3루를 자주 하구요.. 선수는 얼마나 진정으로 아껴주는 감독이 만나느냐 못 만나느냐에 따라 선수의 미래가 크게 좌우 된다고 생각 합니다. 마산 상고와 결승전이 5대0 이었던가요. 그럼 13대 12로 이긴 경기는 다른 대회였나 보네요.. 마산상고가 또다른 준우승이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 놀랐습니다.ㅎㅎ
1964,2014,21016,2017년 황금사자기에서 준우승만 무려 4번이나했습니다.
용마고(마산상고)도 꼭 우승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유지홍은 1루수였고 유격수ㅡ이정철, 3루수에는 원래 김종호라는 62년생 강타자가 있었는데 80대통령배 광주일과의 대결에서 혼자 4개의 실책을 범하는 바람에 외야에있던 김건우를 3루수로 불러들입니다.
그후 김종호는 대학에 진학후 야구를 그만둡니나.
2004년 대구에서 열린 대붕기에서 우승했지만 마산상고는 서울의 메이저4개대회에서는 준우승만 5번을 차지한 불운한 팀입니다.
이제 용마고로 이름도 바뀌었으니 반드시 우승하리라 믿어의심치 않습니다.
그렇죠.. 그래서 핫코너 수비수들은 아주 중요하죠..서울팀들이 내야 수비에 문제가 있더군요. 최동원이 27승 하던날 직관했는데 mbc청용 3루 였나 1루였나.. 그쪽에 가면 그냥 에러 인거예요.. 정말 프로선수인가 이심이 들었습니다. 아마 루키 선수 였던거 같아요.. 아무리 초창기 프로야구 이지만 내야 백업이 그렇게 없을수가 앗나 싶더라구요..
맞습니다.
마산용마가 작년과 재작년에 덕수한테 져서 준우승할때도 다 이긴걸 에러때문에 분위기 다운되면서 패한겁니다.
경북ㅡ부산ㅡ덕수ㅡ광주일고 이런팀들은 얄이울정도로 수비가 강하고 짜임새있습니다.
그래야지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