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상 변호사가 《월간천관》에 '이청준문학관 건립을 위하여'라는 주제로 故 이청준 작가의 인물과 문학세계를 심층적 소개 중이다.
2022년 8월호를 시작으로 9월호, 10월호, 11월호, 12월호, 2023년 1월호, 2월호, 3월, 4월호, 5월호, 6월호, 7월호, (8월호 쉼), 9월호, 10월호, 11월 12월호, 2024년 1월호, 2월호, 3월호, 4월호, 5월, (6월호 쉼), 7월호 이번이 스물두 번째 연재기고이다. (편집자 주)
이청준, 그 유행가와 ‘금지곡 시대’
-이청준 문학관을 위하여(22)
1. 이청준과 음악, 노래, 소리
선생님의 가창 모습을 직접 목격하거나 다른 사람한테 전해 들은 적은 없다. 개인적인 부끄러움 때문이었을까?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아니하셨고, 특별한 애창곡도 없으셨던 것 같다. 짐작이지만, 노래와 소리에 대한 각별한 관심은 귀명창 수준에 가까웠을 것. 선생님은 음악과 노래, 소리 등을 소재로 삼은 소설을 꽤 남기셨다. 이 풍진 세상을 함께 건너가려면 음악적 화합과 조율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셨던 것일까? 딱히 음악소설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상한 나팔수(1969), 전쟁과 악기(1970), 현장사정(1972), 귀향연습(1972), 조율사(1972), 서편제(1976), 소리의 빛(1978), 여름의 추상(1982), 금지곡 시대(1989), 돌아온 풍금 소리(1993), 흰옷(1993)" 등이 그러하다. 거기에 등장한, '그 시절 유행가들'과 '유행가론', '판소리론' 등을 소개해 본다.
2. <현장사정, 1972>
'새농촌연구회'의 간부 겸 강사로 종사하면서 '새농촌 봉사상'을 표창받은 K고교 동창의 연락을 받고 참석한 왜식집 회식 현장에서 일어난 일이다. 남도 K시, Y읍, J읍 출신의 세 친구들이 모였고, '새농촌연구회' 강회장과 동료직원들도 참석했다. 그날 남들은 잘도 불러댔지만, 판사시 보인 '나'는 현장 분위기를 살리지 못 하고서 망신을 당했다. 그날 '나'의 왼손 집게 손가락 위에 남겨진 흉터 자국과 땀으로 범벅된 촌놈의 손이 그 노래 대신에 관심을 끌었다. 그날 노래들은 주로 고향을 그리는, 옛 유행가들이었다. 맨발의 청춘(1964), 고향 무정(1966) 명동 부르스(1960) 등 가까운 시기의 노래도 있었지만, 낙화유수(1927), 목포의 눈물(1935), 애수의 소야곡(1937), 해조곡(1937), 나그네 설움(1940), 찔레꽃(1941), 선창(1941), 꿈에 본 내고향(1943), 고향만리(1949), 비내리는 호남선(1956), 유정천리(1959) 등이었다. 그날 '내'가 시도한 '선창, 낙화유수, 애수의 소야곡'은 모두 실패하였다. 촌놈의 '소심증' 때문에 그랬을까? 시골 출신인 '나'는 문득 '시골 유행가'와 '노랫가락'를 생각하게 된다. '시골 유행가'는 시골에서 유통되고 간절하게 기억될 만한 사정을 따로 갖는다. 유행가 '낙화유수'에는 막내 누님에 대한 추억과 회한이 남아있다. 이청준은 '시골 유행가, 촌놈 음악'에 대한 자신감의 회복에 대하여 <귀향연습, 1972>에서 별도로 언급했다.
3. <귀향연습, 1972>
이청준은 <귀향연습>에서 이른바 '유행가론(論)'을 개진한다. '촌놈 음악, 유행가'는 정녕 '클래식 음악'에 비하여 열등한가? 악기소리(音)의 조합에 불과한 클래식 음악이 '인간의 오장(五臟)에서 나오는 소리(聲)'보다 우월하다는 말인가? '사람의 목소리가 없는 무의미하고 복잡한 악기의 신호'가 더 고급한 것인가? '그 가사와 노랫가락에 얽힌 곡절과 사연'이 악기 소리보다 소중하지 아니한가? 동백골 귀향은 어린 시절에 새겨놓은 '그 노랫가락'과 '내 유행가'를 찾아가면서 촌놈의 '소심증'을 치유하고, '내 유행가'에의 자신감을 회복하려는 시도에 해당한다. "내 부르고 싶은 대로 '내 유행가'를 부르고 싶다."고 했다. 이청준은 1976년에 <서편제>를, 1978년에 <소리와 빛>을 발표했다. 한편 <귀향연습, 현장사정>이 발표된 1972년경에 '박정희'가 작사 작곡한 '새마을 노래'가 등장하고, 1972년 10월에는 유신헌법이 제정되었다.
4. <여름의 추상, 1982>
소설 중간에 남도 사투리에 관련한 이청준의 '판소리론(論)'이 들어있다. 이청준은 먼저 출판한 <남도사람> 책 제목을 <서편제>로 개칭하였다. 이른바 섬진강 물길을 기준으로 동,서편제를 구분하는 지역적 이분법을 그대로 따르지 아니했다. 그런 이분법은 <조선창극사, 1940, 정노식>에야 등장하였지만, 그 논거가 빈약했다. 이청준은 전라도 일대의 걸쭉 질펀한 사투리 권역을 널리 싸잡아 '남도소리 서편제'로 보았다. "표준말은 사실적인 지시성을 넘어설 수 있는 자유가 제약된다. 가장 넓고 큰 자유를 누리는 말은 노래인데, 그 서민적 민요조 노래 가운데에서도 서민적인 사설이 두드러진 남도소리 경우가 가장 많은 자유를 누리는 말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사투리가 더 많은 자유를 얻어 남도소리가 되어간 거라면 그야 지나친 속단일 테지만"이라는 유보적 단서를 달면서도, 다시 "남도소리를 그 흥(興)이나 말의 자유, 혹은 우리 삶에 대한 그 사랑의 양식으로 해명해 보려는 사람이 적은 게 이상한 일이다"고 부연했다. 한편, 통설에 의하더라도, 계면조 위주의 처연한 스타일은 서편제로 보되, 다만 상대적으로 우조 위주의 호령조 스타일은 동편제로 본다는 것이니, 어쨌거나 동서 이분법은 지역적 이분법이 아닌, 음양(陰陽)적 이분법에 해당한다 할 것. 그러니 이청준에게는 음양을 포용하는 남도소리 서편제가 능히 존재할 수 있게 된다. 남도사람이더라도 그 소리꾼의 목청 특성과 세계관에 따라 동편제를 수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덧붙이면 판소리는 조선 후기 이래 그 시대적 변모 양상에 따라 '구파(古제, 舊제, 중고제)'와 '신파(新제)'의 차이를 드러냈으며, 새롭게 등장한 '신파(신제)' 안에서 다시 서편제와 동편제가 나름대로 병존하였던 것. 그러다가 점차 전라도 사투리 억양과 감정, 노랫가락 표현의 질펀함이 서편제 양식으로 확장되었다고 할 것. 서편제는 남도 정서와 몸짓의 현장성에 부합되고 있다. 그럼에도 최근에는 이른바 '중고(中古)제'를 지역적 연고에 따른 분류개념으로 오해한 나머지 충청도 판소리를 중고제 판소리로 분리하자는 일부 주장이 있다.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식이다. 이청준 선생님은 생전에 '판소리 분류론'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지 않으셨다. (<소설 서편제, 소리의 빛>은 다른 기회로 미루기로 한다.)
5. <금지곡시대, 1989>
<연작, 가위 밑그림의 양화와 음화 3편>에 해당한다. 여기서 <금지곡시대>는 군부독재 정부가 규제하던, '대중가요 금지곡 시대'와 구별되는 개념이다. 예컨대, 즐거운 노래 또는 슬픈 노래는 그 이분법에도 문제가 있지만, 시대적 기준의 변천에 따라 그 평가가 달라지는 양가성이 있다는 것. 개인적 상황과 사회적 기준에 따라 선택의 호불호가 엇갈린다. 때론 즐거운 노래가 금기시되는가 하면, 슬픈 노래가 선호되기도 한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이분법적 금지(금계)망은 당대 상황과 분위기에 따른 상대적 선택일 뿐이다. 이청준에게는 육이오 전란기에 체험한 '농악소리 + 박수소리 + 합창소리'의 현장기억은 지금도 늘 즐겁지 못하다. 이청준은 <금지곡시대>에서 '1)수수께끼의 얼굴들, 2)금지곡에 대한 향수, 3)악몽의 그림자' 등, 세 항목을 언급하면서 '소설가 개인에게 설정되는 사회적 금계(禁戒)망의 역설적인 위축효과'를 제시하였다. 예컨대 다시 추락하는 식으로 거듭되는 추락악몽도 있다지만, "은혜와 신세를 진 사람들에게 적절하게 보은하지 못한 데서, 배은의 죄책감이 악몽의 그림자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이래저래 권력이 직접 규제하는 금지 형식이 아니더라도 '여러 상황과 상대방에 따라 억압받는 위축효과', 즉 사회적 금계망에 홀로 또한 스스로 갇혀버릴 수 있는, 자기 검열의 표현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6. <해변의 육자배기>, <해변 아리랑, 1985>
<산문집, 광대의 가출, 1993>에는 '어린 날의 추억 독법' 편에 <해변의 육자배기>가 실려 있다. 이청준은 "남도 여인들은 흔히 그 한숨을 내뿜는 듯한 이상스런 가락의 노랫소리 같은 것을 응얼대길 잘하는데, 말이 곧 노래가 되고 노래가 곧 말이 되는 그 육자배기 가락 같은 응얼거림의 소리는 여인네가 모이는 밭머리 근처엔 더구나 흔했다."고 했다. <해변아리랑>에는 "모친 금산댁이 우우우우 노랫 가락도 같고 바람소리도 같은 이상한 소리를 몸에 싣고 오가며 돌을 추리고 김을 매었다", "우우우우 그 노랫가락도 같고 울음소리도 같은 암울스런 음조를 바람기에 흩날리며 조각배처럼 느릿느릿 밭 이랑을 오고갔다"고 했다. <해변 아리랑>에서 비목으로 남은 '노래장이 이해조'는 '이청준'일 수 있겠다. 박형상변호사(前서울중구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