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방
정수정
스무 살. 대학교에 들어가니 누가 뭐라 하든 상관없는 자유로움을 얻은 것이 행복했고, 혼자 놀러 다니는 것도 너무 좋았다.
그 시절 나는 극장에서도, 미술관에서도, 카페에서도 할 일 없이 앉아있는 걸 즐겼다. 또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과 학교 앞 그린호프에서 돈을 모아 가장 싼 안주와 맥주를 먹으며 어떤 고민도 걱정도 없이 봄은 봄대로 여름은 여름대로 계절을 흠뻑 느끼며 보냈다.
스무 살 가을.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동네에서 성북동이란 곳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새로운 동네는 다니던 교회가 있던 곳이라 낯설지도 않았고, 그래서인지 학창 시절을 보낸 정든 동네를 떠난다는 아쉬움이나 서운함도 없었다.
이사하면서 가장 크게 생겼던 변화는 우리 집과 작은 집을 오가며 지내던 할머니가 우리와 함께 산다는 점이었다.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할머니의 이미지는 푸근하고 정이 많고 넉넉한 느낌에 옛날 만화영화 ‘호호아줌마’가 연상되지만, 우리 할머니는 키가 크고 마르고 말이 없고 차가운, 어찌 보면 무섭기까지 한 느낌을 주었다. 나보다 두 살 위 두 언니도 그런 할머니를 어렵고 힘들게 생각했다.
고등학교 때, 목감기 걸린 친구가 집에 전화를 걸었는데 할머니가 받고 “아니 왜 남자가 수정이를 찾아?” 하며 전화를 그냥 끊으셨다고 한다. 다음 날 학교에는 ‘수정이네 할머니 완전 무서워’하고 소문이 났을 정도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내 친구들에게도 우리 할머니는 어느새 ‘무서운 할머니’가 되었다.
하지만 나는 할머니가 그렇게 무섭거나 어렵지 않았다. 엄마는 나를 낳고 바로 일을 하러 다녔고 나는 할머니가 키웠다. 나에게 할머니는 그냥 말이 별로 없는 사람, 밀가루를 반죽해서 홍두깨로 밀어 만든 칼국수를 세상 누구보다 맛있게 만드는 사람, 남의 험담이나 뒷담화는 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다. 큰언니는 아빠를, 작은 언니는 엄마를 닮았고 나는 할머니를 닮았다고 했다. 난 할머니를 닮았다는 게 좋았다.
성북동으로 이사를 오고 나서 할머니는 자기의 방에서 자주 나오지 않았다.
방학 때 집에 있으면 할머니는 “수정아, 커피 한 잔 타 줘라!”라고 하셨다. 초등학교 때부터 할머니가 커피를 타 달라고 하면 손님들 올 때나 쓰던 하얀 커피잔과 받침을 꺼내 커피 하나, 프림 둘, 설탕 둘. 커피를 타서 갖다 드렸다. 다 드시고 빈 잔을 갖고 나오면서 “맛있게 잘 먹었다. 고맙구나”라고 하시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셨다.
엄마와 아버지는 ‘등산’이라는 공통의 취미가 있었고 봄이 되면 등산은 산나물 캐기로 바뀌었고 더덕에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더덕을 캐 와서 ‘오늘 엄청 큰 거를 캤다’고 자랑하고 ‘생채기 나지 않게 캐야 하는 데 잘못했어!’ 하며 속상해했다.
더덕을 캐 온 다음 날, 할머니 방은 더덕 향기로 가득했다. 할머니는 방에 앉아 더덕 껍질을 까고 저녁에는 엄마가 더덕을 두드려 더덕구이를 했다. 더덕구이는 오로지 할머니를 위한 음식이었다. 할머니는 저녁을 다 드시고 “이 산삼보다 귀한 더덕을 먹고 내가 아프지 않는 거 같구나. 맛있게 잘 먹었다. 고맙구나” 하고 또 방으로 들어가셨다.
이제 세월이 흘러 할머니는 안 계시고 할머니에 대한 기억만 남았다.
며칠 전에 언니에게 “언니는 할머니 생각하면 뭐가 먼저 생각나?” 하고 물었다.
“우리 집의 모든 빨래를 할머니가 갰잖아. 성격대로 각 잡아서. 그리고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성경책 읽던 거….”
언니가 그렇게 대답했다.
“나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데”
나는 할머니를 추억하려고 애썼다.
“너는 여기저기 놀러 다니느라 생각나지 않을 걸”
어느새 나는 할머니를 추억공장에서 펌프질로 길러내기 시작했다.
나는 그 작은 방에서 할머니의 하루가 얼마나 길고 지루했을까 생각했다.
할머니는 초등학교 때부터 설날 아침에 검은색 작은 수첩을 내밀며 친구 분 전화번호를 적어 달라고 했다. 검정색 모나미 싸인 펜으로 크게 적어주면 “고맙다”고 하셨다.
이사를 온 후에도 수첩을 적는데 “이 사람, 이 사람은 쓰지 마라, 죽는 사람이 너무 많아”하시면서 그 다음 해부터는 전화번호를 적어 달라고 하지 않았다.
서로 안부를 묻고 연락하던 사람이 하나둘 사라지는 것이 어떤 것인지 스무 살의 나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거 같다.
할머니의 방에서 할머니는 해가 뜨기 전부터 일어나 성경책을 읽었다. 때론 멍하니 앉아 있다가 빨래를 개면서 가족을 위한 기도를 하고 낮잠을 자다가 깨서 지구상에서 인간이 차지할 수 있는 가장 좁은 면적을 차지하듯 불편한 자세로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아마도 수첩에 적혀 있던 친구와 있었던 즐거운 일을 생각하고 살아온 날을 생각하며 언제인지 모를 다가올 죽음을 맞는 자기의 모습을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내가 할머니의 방에 가는 이유는 그 방에 있는 TV를 보는 것, 한가지였다. 보고 싶은 TV 프로그램이 있으면 문을 살짝 열고 들어가 벽에 기대앉아 나란히 TV를 보았다.
혼자서 키득키득 왁자지껄 웃으면 “수정이 너는 그게 그렇게 재밌냐? 나는 그렇게 웃는 너가 더 재밌구나” 하셨던 할머니. 왜 나는 할머니의 방에 어떤 이유나 목적 없이 들어가 할머니와 아무 얘기나 하지 못했을까.
어느덧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벌써 16년이 지났다. 새해 첫날 할머니께서 식사 기도할 때의 든든함을 기억한다. 사소한 것에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고맙고 감사하다”라고 얘기하던 목소리도 여전히 생각난다.
모두가 바쁘고 더 재미난 많은 것들이 좋아서 마냥 들떠 지냈던 스무 살 그 때. 무겁던 삶의 시간을 지나 길기만 한 하루하루를 지내던 할머니에게 더 살갑고 따뜻하게 대하지 못한 것, 할머니에게 고마운 마음을 한 번도 말하지 못한 것이 많이 죄송스럽다.
그래도 할머니는 지금도 할머니가 계신 새로운 방에서 우리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을 것이다.
“이제야 말해요. 할머니 고맙고, 감사해요.”
프로필 정수정
대학에서 섬유디자인을 전공하였고 20년 동안 컴퓨터로 대학교재와 공공기관의 보고서를 만드는 일을 하였다. 욕심을 내지 않고 뿌린 대로 거둔다는 당연함을 생각하며 새로운 것을 계속 배워 매일 자라나길 바라는 사람이다. 현재 강북여성인력개발센터에서 <1인 출판사 창업> 과정을 배우고 있다.
글의 주제문
무겁던 삶의 시간을 지내던 할머니에게 고마움과 그리움을 전한다.
첫댓글
흐잉.. 원고 읽다가 엄마 아빠 생각나서 눈물 쏟았네요. 잔잔한 바람을 느끼듯 글을 읽었어요.
작가님의 따뜻한 시선과 담백한 글, 완전 제 취향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