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쟁 스포츠로서의 등산
이영준 한국산악회 학술문헌위원장
전통적인 등반가들은 누구나 “등산은 스포츠가 아니다”라는 말을 금과옥조로 여겨왔다. 대자연의 산을 오르는 일은 스포츠에서와 같이 일정한 규칙도 없으며, 누군가와 속력, 지구력, 기능 따위를 겨루는 활동이 아니라 오직 산과 자신만이 마주하는 스포츠 이상의 철학이 담긴 고고한 활동이라는 생각에서다.
하지만 지난 등산의 역사를 보면, 등산은 스포츠가 아니라고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스포츠와 같은 규칙과 경쟁 속에서 진행되어 왔다. 특히 등산과 스포츠 모두 인간의 신체활동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등산을 바라보는 시선은 마치 스포츠를 관람하는 것처럼 각각의 등산활동을 경쟁적 관점에서 관람하는 것으로 변질되어 갔으며 거기엔 미디어를 통한 왜곡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 특히 산업화와 함께 등산 산업이 발달하고 매스미디어가 성장하며 이 같은 ‘등산=스포츠’의 등식은 더욱 공고히 되었고, 나아가 스포츠클라이밍의 탄생을 가져왔다.
때문에 지금의 시점에서 “등산은 스포츠가 아니다”라는 말은 허공의 메아리 같은 표현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산을 오르는 당사자인 등반가들은 “스포츠 선수와 등반가는 다른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이번 세미나의 주제인 등산과 스포츠클라이밍의 상생 가능성을 묻는 것 또한 이러한 등산 활동의 자기모순에서부터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 글에서는 등산사 속에 나타난 경쟁 사례에 대해 살펴보고 나아가 이러한 경쟁이 스포츠클라이밍이라는 종목으로 어떻게 변화해 갔으며, 전통 등산을 바라보는 시각은 이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지녀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해보고자 한다.
몽블랑 초등부터 시작된 등산가들의 경쟁
알려져 있다시피, 근대등산은 1786년 8월 8일 미셀 파카르와 자크 발마가 알프스 최고봉 몽블랑 정상에 선 것부터 시작되었다고 본다. 몽블랑은 1760년 스위스의 자연과학자 오라스 베네틱트 드 소쉬르가 초등자에게 상금을 내걸며 지역 사람들에게 이목을 끌기 시작했는데, 이후 26년간 총 13차례의 시도가 있었다. 당연히 이들은 거액의 상금을 위해 그 산을 오르고자 했으며, 서로 경쟁했다. 아래 내용은 더글라스 프레쉬필드(1845-1934)가 기록한 내용을 바탕으로 정리한 것이다.
1761년과 1767년, 1774년, 1779년, 1785년 다섯 차례 샤모니를 찾아 시등했던 소쉬르를 제외하고 상금을 목적으로 처음 등반을 시도한 사람은 1762년 제앙 빙하와 보송 빙하를 통해 등반을 시도했던 피에르 시몽이었다. 하지만 그는 가능성이 없다고 보고 단념했으며, 이후 1775년 미셀 파카르, 프랑소와 파카르 형제와 빅터 티세, 쿠테랑 등 네 명이 그랑뮬레까지 올랐지만 탈진해 돌아섰다. 이후 8년간이나 등반 시도가 없다가 1783년 샤모니 주민인 쿠테, 뮤니에르, 카리에르 등 세 명이 등반을 계획해 7월 12일 보송 빙하를 횡단해 돔 뒤 구테아래 프티 플라토까지 도달했지만 부상과 일기 불순으로 하산했다. 이 등반은 이전보다 600미터를 더 전진한 것이었다. 같은 해 9월 15일 제네바에 살던 화가인 마르크 테오도어 부리도 지역 가이드와 함께 등반을 시도했지만 보송 빙하와 타코네 빙하의 분수령인 몽타뉴 드 라코트까지 오르는 것에 그쳤다. 그는 1784년에는 다른 루트로 등반을 계획해 생제르베를 기점으로 9월 15일 출발, 테테로제까지 도달했지만 고산병으로 더 이상 오르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고용한 가이드였던 프랑소와 구테는 계속 전진해 에귀 드 구테를 오르고 돔 뒤 구테를 가로질러 현재 발로 산장 자리인 4362미터 지점까지 도달했다. 구테는 1785년 뮤니엘과 함께 에귀뒤 돔 정상에 올랐으며, 같은 해 소쉬르와 부리, 가이드 등 14명도 구테 루트로 등반을 시도했다.
1786년 6월에는 샤모니 지역민 두 팀이 등반을 시도해, 요세프 카리에르, 장 코니에르, 프랑소아 파카르, 요세프 발마 팀은 기존 시도되었던 그랑뮬레 루트로 올라 에귀 디 비오나세이에 닿았으며, 다른 한 팀은 마리 구테와 피에르 발마는 구테 루트로 등반에 에귀 디 돔을 다시 올랐다.
이처럼 초등 이전까지 몽블랑을 시도한 횟수는 총 13차례에 이른다. 이것이 상금을 목적으로 했건, 소쉬르나 부리와 같이 호기심에서 시작했건 이들은 밖에서 바라보기엔 경쟁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는 구도다. 몽블랑의 초등을 이룬 미셸 가브리엘 파카르와 자크 발마를 둘러싸고 상금과 명예를 가로채기 위해 벌였던 왜곡은 앞서 몽블랑을 오르려 했던 이들의 욕망이 어떤 경쟁을 낳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파카르는 이탈리아 트리이 대학을 마치고 파리에서 유학한 의사로, 박물학에도 조예가 있던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그는 부리의 등반대에도 참여했으며 자신이 직접 등반대를 꾸려 등정을 시도하기도 했다. 발마는 수정을 채취하는 것을 생업으로 삼던 지역민으로, 사흘쯤은 눈만 먹고 걸을 수 있다고 할 정도로 놀라운 체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순전히 상금을 위해 산을 오른 인물로, 1786년 6월 샤모니 지역민들의 등반에 몰래 따라갔다가 동료들에게 침입자라고 소외되었지만 하산 중 그랑 플라 부근에서 수정을 캐러 간다고 속이고 빠져나와 홀로 하룻밤을 지내고 등반 루트를 정찰하기도 했었다. 그는 파카르가 상금에는 목적이 없는 인물이라고 판단했으며, 함께 등반하기를 제안했다. 또한 만일 정상에 섰을 때 이를 입증할 수 있는 증인이 필요하기도 했다. 등정 후 내려와 이들은 자크 발마의 친구이자 샤모니의 가이드였던 미셸 카리에르를 찾아가 자신들의 등반을 설명하고 상세히 기록해 각서로 남겼다.
발마는 이후 소쉬르를 찾아가 거액의 상금을 받고 이 역사적인 사건은 끝나는가 싶었지만, 이들의 등정을 바라보는 시선은 달랐다. 두 차례 몽블랑을 시도했던 부리의 질투와 파카르가 죽고난 뒤 당시의 사실을 왜곡해 전달한 발마가 그 원인이었다.
부리는 제네바의 성 베드로 교회의 목사이자 동판화가이기도 했는데, 목사 지위를 이용해 알프스 탐험을 해왔으며 이후 루이 16세로부터 연금을 받는 알프스 역사학자로 지명되기도 했다. 몽블랑 초등 이후 그는 발마를 알프스의 콜럼버스로 추켜세웠지만, 소쉬르는 아마추어로 폄하하고 파카르에 대해서는 아예 이름을 잘못 표기해 기록하기도 했다. 파카르는 자신의 등반 기록을 책으로 남기려 했지만 부리는 이를 방해하고 신문에 그의 등정을 부인하는 기사를 게재하는 등 경쟁이 낳은 질투로 역사를 왜곡하는 일을 벌였다.
특히 파카르가 죽고난 뒤 5년 후인 1832년 당대의 작가인 알렉산드르 뒤마가 발마를 찾아와 한 인터뷰와 이를 기록으로 남긴 책을 발간하며 이러한 왜곡은 이후 1904년 발마의 수기와 당시 샤모니에서 망원경으로 두 사람의 등반을 관찰한 독일 과학자 게르스 돌프의 일기와 스케치가 발견되어 공개되기 전까지 근 100여 년 동안 계속되었다. 발마는 뒤마와의 인터뷰에서 “파카르는 등반 중 몰아친 바람에 모자가 날아가며 겁에 질려 더 이상 오르지 못했고, 내가 혼자 1200미터를 올라 정상에 서서 망원경으로 샤모니 마을을 내려다보며 모자를 흔들어 신호를 했다”는 요지의 말을 했고 이는 출판되어 책이라는 미디어를 통해 공중에게 전파되었다.
미디어의 성장과 스포츠로 변화해간 등산
근대등산의 시작이 이처럼 경쟁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점은 이후 이어진 등산사에서 수많은 등반가들이 자신들의 행위에 다른 의미를 부여했다 하더라도 외형적으로 스포츠에서와 같은 경쟁의 구도를 계속 유지하게 했다. 미국 사회학자 에드워드 사이드는 “최초란 무언가의 의미를 부여해가는 첫 단계”라고 말했다. 그러한 관점으로 본다면 산의 초등은 등반가들이 경쟁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대표적인 등산사에서의 사건인 1865년 에드워드 윔퍼와 장 앙투안 카렐의 마터호른 초등을 둘러싼 경쟁을 비롯해 알피니즘 철의 시대에서 수많은 희생자를 낸 아이거 북벽 초등까지 등산가들의 경쟁은 계속되었다. 초기의 경쟁이 등산가들 개인의 욕망으로부터 비롯되었다면, 특히 나치 정권의 프로파간다가 깊게 작용한 아이거 북벽 초등은 국가와 권력이 산을 오르는 일의 의미를 어떻게 변화시켜갔는가를 잘 보여주는 예이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나치가 보여주고자 했던 건 아리안 민족의 우수성이었다. 히틀러는 레니 리펜슈탈이라는 시대를 앞서간 영화감독을 고용해 올림픽을 최대한 미학적으로 촬영하게 했으며, 리펜슈탈은 <열방의 축제>와 <미의 제전>이라는, 전편은 국가체제의 우수성을, 후편은 아리안계 선수들의 다져진 몸을 향한 시선을 모은 영화를 제작했다. 한편으로 베를린 올림픽은 최초로 티비로 생중계된 올림픽이기도 했다. 나치는 베를린 전역에 28개 티비 상영관을 설치해 실시간으로 올림픽 경기를 홍보했으며, 영국도 이 전파를 받아 자국에 중계했다. 기존의 도서와 신문 같은 미디어에서 확장과 파급력을 비교할 수 없는 영화와 티비라는 새로운 매스미디어가 등장하며 스포츠뿐 아니라 산으로 무대를 옮겨 등반가들의 모습을 대중에게 전달하게 된 것이다.
스펙터클(spectacle)이란 ‘보는 이를 압도하는 이미지로 구성된 거대한 장관’의 의미로 쓰인다. 산업혁명 이후 유럽 사회가 성장하며 일반 대중이 닿지 못하는 수직의 세계를 오르는 등산은 스펙터클의 한 분야로 여겨지게 되었고, 그만큼 대중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대중이 산을 오르는 행위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통로는 티비나 영화와 같은 영상미디어였으며, 따라서 어느 순간 등산가들은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산이라는 무대에서 각본 없는 연극을 해야 하는 배우가 되기도 했다.
‘뉴스란, 기자가 뉴스라고 판단하는 것이 곧 뉴스’라는 말이 있다. 미디어를 이용하는 전달자, 저널리즘은 세상의 모든 일을 그대로 공중에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고 편집하는 과정을 거친다. 때문에 매스미디어에 있어서도 ‘카메라에 잡히는 것’ 또는 ‘제목과 리드문장의 형식’ 등 저널리스트 개인의 영향이 포함될 수밖에 없다. 이는 산을 바라보는 시각에서도 마찬가지라, 앞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미디어는 필연적으로 최초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일에 가중치를 둘 수밖에 없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등산가 개인의 의도와는 별개로 대중은 등산가의 행위를 미디어를 통해 바라보고 판단해왔으며, 특히 2차 세계대전 이후 이어진 서구 열강들의 히말라야 8천미터 봉우리 초등 과정 또한 일정한 경쟁 속에 진행되었다. 이는 한국의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일제강점기 조선에 수입된 새로운 문화인 등산은 1928년 일본 문부성의 각급 학교 체육교사 연수를 통해 스포츠의 한 과목으로 자리 잡게 되었으며, 심신단련, 극기와 같은 의미를 부여해가는 과정에서 등산을 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일정한 규칙과 성과의 테두리에 머물게 했다. 특히 일본제국주의의 강요 속에 등산과 군대식 문화가 결합하며 등행대회와 같은 경쟁스포츠로서의 등산이 초기 우리 산악계에서 시행되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은 현재의 우리가 여전히 “등산은 스포츠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과는 사뭇 상반되는 현실이다.
히말라야와 같은 해외 고산으로 향했던 1970-80년대, 그리고 현재까지도 일부 등산가들은 자신들에게 국가대표 스포츠 선수와 같은 의미를 부여하며 가슴에 태극기를 달고 산을 올랐다. 함께 가는 동료와 경쟁하지 않았더라도 그들의 걸음에 개인을 통해 투영되는, 어떤 다른 나라와의 비교잣대를 삼는 민족국가의 이미지가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러시를 이루었던 한국 첫 8천미터 14봉 초등을 바라보았던 우리들의 마음은 어떠했는지 돌아보자. 그리고 이후 이어진 여성 첫 8천미터 14봉 초등과 이를 경쟁적으로 앞다투어 보도했던 신문과 방송들, 장애인 최초, 무산소 최초, 알파인 스타일 최초, 또 무슨 무슨 최초를 부여하고 이를 바라보며 흥미진진하게 대리만족을 느꼈던 대중들의 시각은 스포츠클라이밍 월드컵 경기를 바라보며 금메달을 염원하는 그 마음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8천미터 14봉을 오를 때 모든 봉우리에서 산소를 사용하거나, 여성이 14봉을 등반할 때 한 사람은 홀로 모든 걸 준비하고 한 사람은 남성 조력자가 있는 상황이라면 대중들의 평가는 어떻게 갈릴까? 스포츠클라이밍 경기에서 퀵드로를 잡고 오르는 선수가 있다면 우리는 그를 훌륭한 선수로 바라볼 수 있을까?
결국 등산은 스포츠가 아니라고 말해왔지만, 등산가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행위에 일정한 룰을 정하고 그에 따르지 않으면 반칙과도 같은 부정한 행위로 낮춰 바라보는 시각을 키워왔으며, 대중들의 시선도 다르지 않았다. 곧 엄밀히 말하자면 등산은 스포츠와 같은 규칙과 ‘정복’의 의미가 부여되는 ‘등정’이라는 성과와 스포츠 경기에서의 관객까지, 스포츠에서의 구성요소를 모두 갖춘 또 다른 스포츠가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여전히 등산은 스포츠가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은 우리들은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최근 UK클라이밍 닷컴에 발표한 아래 존 포터의 글은 등반가의 모습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숫자에 굴복한 산악계(Climbing has Succumbed to Numbers)
글 존 포터 번역 이영준
등반가, 작가이자 전 영국산악회 회장인 존 포터는 최근 K2에서 파키스탄인 포터 모하마드 후산이 100명이 넘는 등반가들의 외면 속에 사망한 사건부터 현재 영국등산협회(BMC)의 금융 위기까지, 작금의 산악계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결국 돈과 숫자로 귀결된다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은 글을 발표했다. - 편집자 주
빅토리아 시대의 작가이자 문화 비평가이자 산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던 존 러스킨은 그와 같은 시대의 등반가들에 대해 “지구의 성당을 경주 코스로 바꿨다”고 말한 적이 있다. 지금도 대부분의 전통적인 등반가들은 8,000m급 14개 봉우리를 완등하는 레이스와, 자신의 이력서에 쓰기 좋아 보이는 산에서의 속도 기록, 7대륙 최고봉, 7대륙 2위봉 도전 등에 대해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등산이란 위험하고 허무주의적이며 영적으로 초월적인 취미였으나, 여기 스며든 상업주의로 인해 등산은 산악관광과 모험을 파는 중성화된 상품으로 평준화되었다.
과거 낭만주의 시대 이전의 신화에서는 산에 용이나 괴물이 산다고 믿어왔으나 이제 그곳에는 매우 다른 새로운 악마, 즉 인간이 공포의 존재로 등장했다.
먼저 돈이 등반에 미치는 영향을 전반적으로 생각해 보자. 모든 비즈니스에서 돈을 벌기 위해서는 시장이 필요하고,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야 한다. 등산 마케팅의 한 끝에는 8,000m 정상, 특히 에베레스트 등정까지 판매하는 능력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크리스틴 하릴라와 텐진 셰르파가 92일이라는 기록적인 시간 내에 8,000m급 14개 봉우리를 모두 등정하는 도전과 같이 대중에게 하나의 업적으로 판매될 수 있는 개인 브랜드를 개발하는 것도 있다.
8000미터급 산악 관광은 오르막을 오르는 것 외에는 기술적인 등반 기술이 거의 필요하지 않다. 비아 페라타와 같은 ‘비아 코르다(Via Corda)’ 등반으로, 고산 작업자는 금속 발판과 손잡이 대신 로프로 안전장치를 만든다. 유능하고 체력이 좋은 셰르파와 고산 작업자들은 고객에게 안전하다는 느낌을 줄 뿐만 아니라 고객들이 고산에서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산소를 비롯한 물품과 장비를 각 캠프에 운반해준다. 이들은 늘 고객들을 위해 생각하고 계획을 세운다.
일부 고산 작업자는 비교적 괜찮은 수입을 올릴 수 있지만, 어떤 이들은 적절한 훈련이나 장비를 갖추지 못한 채 착취를 당하고 있다. 원정등반 대행사 중 일부는 저렴한 비용으로 고산 체험을 제공하고 수익을 올리기 위해 고산 작업자에 대한 주의 의무를 소홀히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세태 속에서 원정대의 고객들 역시 이들 고산 작업자의 가치를 간과할 수 있다.
최근 K2에서 발생한 파키스탄인 포터 모하마드 하산의 비극적인 죽음, 사람들로 가득찬 산에서 경험이 부족하고 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포터가 수십 명의 사람들이 정상에 오르는 데만 몰두한 나머지 구조의 필요성을 외면당한 사건은 우리로 하여금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이게 한다.
지난 7월 27일, K2 8,200m 고도에서 사망한 27세의 청년 하산은 어머니의 당뇨병 치료비를 벌기 위해 그곳에서 일하던 중이었다. 그가 추락해 다쳐 무력하게 누워있을 때, 150여 명의 사람들이 그 옆을 지나쳤고 결국 그는 죽었다. 한 보도에 따르면 하산은 8천 미터를 오르는 데 필수적인 원피스 우모복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크리스틴 하릴라의 팀과 다른 사람들은 하산을 도왔다고 주장하며 방치 의혹을 부인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상황은 이러한 대규모의 사람들이 동료의 생명을 구하는 것보다 정상에 오르는 것에 왜 우선순위를 두었는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돈과 숫자의 증가가 등산에 가져올 수 있는 위험 외에도, 나는 현대의 산악 관광 문화가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에 대한 이해, 즉 높은 산의 희귀하고 섬세한 환경이 제공하는 독특한 경험에 다가가려는 인간의 노력을 상품화했다고 생각한다.
산악 관광이란, 입으로는 지구를 보호한다고 하면서 정반대의 행동을 하는 또 다른 예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음 세대에 끔찍한 본보기가 된다. 크리스틴 하릴라와 텐진 셰르파는 헬리콥터의 도움을 받아 92일 만에 8,000미터급 14봉을 가장 빨리 완등하는 기록을 세웠지만, 이는 또한 두 명의 등반가가 최단기간에 가장 많은 탄소 발자국을 남긴 기록도 세웠을 것이다. 그리고 또한 가장 비싼 산악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하릴라는 이 프로젝트에 약 18억 원이 넘는 비용이 들었다고 언론에 밝혔는데, 이는 늘어나고 있는 우주 여행 상품처럼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게 판매할 수 있는 ‘피크 패키지’이기도 하다.
등산의 상업화와 경쟁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알피니즘의 황금기에는 알프스의 높은 산을 등정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했다. 그 당시와 그 후 한 세기 동안 등반에 있어 ‘최초’는 가장 중요한 숫자였으며, 최초 등정, 최초 신루트 등정, 최초 단독 등정, 최초 연속 등정, 최초 멀티 피크 등정, 여성, 최연소, 최고령, 장애인 등 다양한 등반 기록이 쏟아져 나왔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는 각국이 8,000m급 봉우리를 초등하기 위해 막대한 돈을 쏟아부었다.
그러나 당시의 금액은 오늘날 ‘등산 스포츠’를 주도하는 금액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었다. 부유층을 대상으로 산에서 돈을 벌기 위한 마케팅은 1억6천만원짜리 ‘럭셔리’ 원정대 상품까지 출시할 정도이니까.
일반 대중에게 에베레스트 등반은 대단한 업적처럼 보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돈과 적당한 수준의 체력만 있다면 자신도 에베레스트를 ‘정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인간이 자연의 어떤 부분이라도 ‘정복’할 수 있다는 생각은 진정한 등반가들을 움찔하게 만든다. 100년 전 조지 말로리의 말처럼, “정복하는 것은 오직 자신뿐”이라는 생각은 현재의 자기 브랜드화 추세와는 정 반대의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하릴라의 8,000m 봉우리 레이스가 ‘알피니즘의 황금기’를 현대적으로 재현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윔퍼는 마터호른 레이스에서 우승했지만 4명이 목숨을 잃는 비극적인 대가를 치렀다. 하릴라와 셰르파의 업적은 이제 상황과 상관없이 죽음으로 얼룩지게 되었다. 등산은 아직까지 숫자 경쟁에서 완전히 벗어날 만큼 성숙하지 못했다.
산악 관광으로 인한 폐해 중 어떤 것들은 좀 더 미묘하다. ‘모험’이라는 단어가 지나치게 일반화되면서 위험을 감수하는 것, 즉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의 진정한 가치는 낮아졌다. 나의 세대의 등반가 대부분은 반항아, 비순응주의자, 괴짜, 보헤미안적인 반체제 인사, 반대파, 우상을 숭배하는 이단자 등 이상한 사람들로 묘사할 수 있었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19세기의 멋진 시인들이나 20세기의 언더그라운드 예술가, 재즈 뮤지션, 로큰롤러처럼 원시적이고 원초적인 동기로 무언가 다른 것을 창조하고자 했던 사람들에 비유할 수 있다.
소셜 미디어는 모든 것을 빠르게 파악하고 습득할 수 있다는 착각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세대는 산에서 수천 시간을 보내며 산의 육감을 키우는 기술과 경험을 쌓고 위험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웠다. 그리고 지금과 마찬가지로 어떤 산을 초등할 때에는 위험을 감수했다. 브라이언 홀의 끔찍한 보드맨 태스커상 수상작 『하이 리스크(High Risk)』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산에서 사망했다.
존경받는 등반 작가이자 편집자이며 『마운틴』 잡지 시절 나의 상사였던 켄 윌슨은 언젠가 내게 “핵전쟁의 가능성 때문에 등반가들이 개인주의적인 운명을 추구하게 되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내 생각에 우리는 탐험에 대한 욕구, 우리만의 장소와 순간을 경험하고 싶은 욕구에 이끌린 것 같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예술가처럼 길을 만들었고, 리처드 롱의 1967년작 『걸어서 만든 선(A Line Made by Walking)』에 나오는 것과 같은 예술의 울림을 창조해갔다. 그래서 내가 이 글에서 주장하는 첫 번째 요점은 여러 가지 면에서 알피니즘은 스포츠보다는 예술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
자, 아래에서 ‘틀린 것 찾기’ 게임을 해보자.
a) 월드컵 클라이밍 대회
b) 알파인 등반
c) 세계 배드민턴 선수권 대회
d) 크리스틴 하릴라와 텐진 셰르파의 14 x 8,000m 봉우리 레이스
물론 정답은 알파인 등반이다. 다른 것들은 모두 스포츠이고, 알파인 등반은 스포츠가 아니기 때문이다.
알파인 등반과 달리 다른 활동은 모두 시간과 규칙에 따라 승패가 결정된다. 이것이 모든 스포츠의 특징이다. 결과는 누가 1등인지, 2등인지 등 숫자가 매겨진다. 이러한 결과는 승패, 득점, 획득한 메달 등 표로 정리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하면 독자들은 “잠깐만요, 등반가들이 초등 기록을 세우는 건요? 그게 등반가들이 하는 일 아닌가요?”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사실, 어떤 산을 초등한다는 건 이후로 이어지는 일련의 숫자들에 맨 앞에 서는 일이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초등을 하며 흥분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산에서 두 번째, 세 번째 등반을 하는 사람들은 초등 때의 등반가들과는 매우 다른 경험을 할 가능성이 높으며, 이것이 바로 요점이다. 알피니즘은 숫자가 아니라 모험과 경험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황금피켈상은 어떤가? 결국 등반에서 리그 테이블을 만드는 일 아닌가?”하고 물을 수도 있다. 그 상은 등반의 업적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심사위원들은 개인이 아닌 등반 루트에 상을 수여함으로써 이 문제를 비껴갔다. 황금피켈상은 등반의 윤리와 스타일이 가장 중요한 요소다.
2021년 우크라이나의 안나푸르나 3봉 남동릉 등반은 훌륭했지만, 등반 시작과 등반이 끝난 후 베이스캠프까지 헬기를 이용했기 때문에 황금피켈상을 수상하지 못했다. 일부는 심사위원들의 이러한 결정이 그 팀에게 가혹한 잣대였다고 말하기도 한다. 특히 빙하가 빠르게 녹아내리는 상황에서 이제 모두가 헬기를 이용해 등반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헬기를 이용하는 건 등반에 있어 경험을 감소시키고,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증가시키며, 현지인들과 소통할 필요성을 없애고, 지역사회의 경제적 이득을 빼앗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비행이 꼭 필요하다면 윌 심과 그의 팀처럼 패러글라이딩을 해보는 건 어떨까? 평생을 등반가로 살아온 이들 대부분은 등반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산에서의 여정을 즐기는 경우가 많다.
나의 절친이자 선구적인 폴란드 등반가 보이테크 쿠르티카는 인류가 숫자의 횡포 속에서 살고 있으며, 우리의 정신이 사회가 기대하는 수치와 통계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했다. 성과는 연봉, 속도, 연비, 비거리, 타율, 파워 비율 등 숫자로 측정된다. 암벽 등반가의 경우 V급, E급, 6a, 6b 등 등반의 등급이 정해지면 온 사이트, 핑크 포인트, 레드 포인트 또는 솔로 등 ‘1’로 수식되는 숫자가 거기 다시 나타난다.
등반을 측정하는 건 어려운 일이며 아주 오래된 논쟁이기도 하다. 1894년 제1회 올림픽 대회에서 등반을 종목에 포함하려고도 했지만, 등반의 성과는 각 봉우리마다 다른 환경, 고도, 난이도 등 다양한 조건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무산되었다. 등반은 달리기 경주나 다른 많은 스포츠처럼 동일한 경기장에서 진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스포츠클라이밍 경기에서 선수들은 다른 스포츠와 마찬가지로 인공 구조물 위에서 등반하고 결과를 얻기 위해 노력한다. 영국등산협회(BMC) 경영진은 메달 획득 가능성에 너무 홀린 나머지 회원들 모르게 지난 2년간 적립금을 털어 작년 라토에서 IFSC 월드컵을 개최하기로 결정한 것을 포함해 영국 산악계에 막대한 초과 지출을 해왔다. 이후 영국등산협회 회장 폴 데이비스는 “스포츠클라이밍에 관심 없는 회원들이라도 회원 1인당 5천원 꼴의 비용을 지불한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결정이 ‘좋은 가치’를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총 1억 5천여 만원의 손실로 마무리된 이런 행사를 계획한 것은 이상한 비즈니스적인 결정이었으며, 이 또한 숫자의 횡포에 의한 또 다른 기만 행위에 불과했다.
상품화, 소비주의, 경쟁에 대한 패스트푸드 같은 집착 속에서 등반과 등산에 대한 철학도 사라지고 있다. 매 순간을 즐기지 않는다면 정상을 주워 담는 건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 있으며, 즐거움 없이 그저 숫자를 세는 운동이 될 수 있다. 고인이 된 영국의 등반가 폴 넌은 “등반을 할 때는 한 발을 다른 발 앞에 두고 최대한 멀리 가지만, 돌아오는 여정에는 한 발 한 발 똑같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만 그런 걸까, 아니면 셀카에 집착하는 피크 배거(peak bagger)들에게서는 이러한 정서를 발견하기가 어렵거나 불가능한 것일까? 이러한 결과, 우리는 그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해 ‘좋은’ 돈을 지불했기 때문에 산에서 죽은 자를 밟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발견하곤 한다. 항상 그래왔듯이, 책임자가 돈을 벌고 일부 사람들은 생계를 위해 무엇이든 기꺼이 하는 곳에서는 어떤 가치란 제거되거나 최소화된다. 다시 말해, 그러한 산행에서는 자연이나 인간에 대한 관심은 거의 보이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다른 인간 활동에서의 행동과 다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며, 사람들의 말처럼 인간에겐 모든 종류의 것들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다만 인간은 학습하고 변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모하마드 하산의 이야기의 이면에서 대중들은 분노했으며, 8,000m급 고산 등반가들 중 일부는 자신의 동기와 가치관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산에 대해 책을 쓰고, 강연을 하고, 페스티벌에 출연하는 우리 등반가들은 위선자라고 할 수도 있다. 우리 모두는 오늘날의 우리가 있기까지 이어진 산악사의 사슬에 연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건 어디서 시작되었는가? 마터호른 초등? 아니면 1953년 에베레스트 등정? 에베레스트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이자 상징적인 정점이다. 1969년 인류가 최초로 달에 착륙한 것과 같이 등반가들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곳으로, 에베레스트 등정은 어느 국가가 처음 올랐던지와 상관 없이 인류의 업적인 것이다. 하지만 그곳을 바라보는 시각이 오늘날과 매우 다른 점은 파괴적인 세계대전으로 점철된 20세기의 중반에도 ‘정복’이라는 개념이 당시 여전히 반향을 일으켰다는 점이다. 오늘날 인간은 무엇을 ‘정복’해야 할까? 말로리는 그것이 자아의 망상이라며 이미 우리에게 해답을 제시한 바 있다.
우리가 지구에 미치는 인위적인 영향에서 살아남으려면 이제 우리의 열망은 성숙해져야 한다. 많은 등반가들에게 중요한 유일한 숫자는 그들이 산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뿐이다. 등반가는 그 시간 속에서 자연과 생명의 연약함과 아름다움에 대해 배워야 한다. 알피니즘은 존재와 그 연약함, 한계와 무의미함에 대한 인식을 뚜렷이 하며, 삶의 스트레스를 줄여준다. 그건 직관적이지 않지만 분명한 진실이다. 숫자를 놓고 경쟁하는 건 스트레스를 높이고, 결국 우리 모두를 파괴할 수도 있다.
|
첫댓글 오~오랜만에 보는 영준씨~~~!!
여기에도 올려줘서 고마우이. 앞으로도 계속~^^
반갑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