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행한 대로 [로마서 2장 6-11절]
오늘 본문은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 로마서 2장 6절입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이것이 한 마디로 - 하나님께서 사람을 심판하시는 대원칙입니다. - 여기에서 첫 단어인 “하나님께서”가 중요합니다. - 기업에서는 상사가 직원의 근무상태에 대한 고과 점수를 매깁니다.
그리고 연말이면 – 그 고과표에 따라 인사를 결정합니다. - 그런데 사람이 쓰는 고과표는 한계가 있습니다. - 그것은 사람은 감정의 지배를 받고, 다른 사람에 대해 –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 그래서 인간의 것은 불완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이 행한 대로 쓰시는 고과표는 -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 왜입니까? -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4장을 보면,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입니다. - 그런데 어디에서 동생을 죽였습니까? - 그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죽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 동생 아벨이 어디에 있는지 물으시자 – 가인은 모른다고 하면서 – 자신이 동생을 지키는 자냐고 반문했습니다. - 이에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시기를 - 네 동생의 핏소리를 - 땅에서 들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 대한 고과표에는 - ‘너는 살인자’라고 쓰신 것입니다.
성경에 사도 바울이 위대한 인물로 나옵니다. - 사실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 – 바울이라는 사람이 - 로마 감옥에 수감되어 결박당하고 - 그 안에서 편지를 쓴 것이 그리 대단한 일이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한 사람의 인생을 높이 들어 -그 삶을 통해 세계를 바꾸셨습니다.
왜 입니까? - 하나님의 고과표는 – 정확하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바울의 삶이 화려하지 않았지만, - 하나님은 그 중심과 진실 됨을 평가하시어 – 시공은 초월하여 지금도 - 우리 앞에 바울을 우리 앞에 우뚝 세워 주신 것입니다.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하면서 – 하나님께서 스시는 고과표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면 – 그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은 없습니다.
만일 이 회사에서 좋은 고과표를 못 받으면 – 다른 회사로 옮겨 잘 받으면 그만입니다. - 그러나 하나님께서 스시는 고과표는 영원불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 영원불변의 고과표를 쓰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 그 고과표의 공란을 채우는 것은 - 우리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 그렇다면 우리가 언제 이 고과표를 채우고 있습니까? -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고과표를 채우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깨어 바른길을 걸어가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6절에서 ‘하나님께서“ 다음에 나오는 말은 - ”각 사람에게“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고과 점수를 단체로 매기지 않고 - 개별적으로 매기십니다. - 우리가 이 시간 함께 하고 있지만 – 세월이 흘러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천국에 간다고 할 때 – 우리의 고과 점수가 모두 똑같겠습니까? - 그렇지 않습니다. -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물으십니다.
즉 자기 삶에 대한 책임은 -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이 지는 것입니다. - 다른 사람이 대신 져 주지 않습니다. -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에게 두 가지가 중요합니다.
첫째, 어디에 있느냐 입니다. - 그리스도인은 늘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 누구와 함께 있느냐 입니다. - 그래서 믿는 사람들과의 교제가 삶에서 끊어져서는 안 되며 - 더욱 풍성해져야 합니다. - 그래서 서로에게 긍정적인 자극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그릇된 장소 –그릇된 만남이 반드시 바뀝니다. - 만일 바뀌지 않는다면 – 그 사람은 거듭난 것이 아닙니다. -바뀐 사람은 그릇된 상황에 처해 잇는 다른 사람들에게 – 주님을 증거하며 살아갑니다.
6절에서 “각 사람에게” - 다음은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입니다. ‘보응하다’는 헬라어 ‘아포디도미 ἀποδίδωμι’의 뜻은 ‘값을 치르다’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선한 값이든 - 악한 값이든, - 반드시 그 값을 치르시는 분입니다.
여기서 이런 질문이 제기 될 수 있습니다. - 내가 내 인생을 사는데 – 왜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시는가? - 이에 대한 답은 – 질문을 바꾸어 보면,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내가 내 인생을 사는데 – 내가 다니는 회사에서 – 왜 상사가 내 고과표를 쓰는가? - 그 이유는 내가 회사에 출근을 해서 퇴근할 때까지의 근문 시간은 – 나 개인의 시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그 시간은 회사의 시간입니다. - 그래서 고과표에 의해 내가 행한 대로 보응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내 삶에 보응하십니까? - 내 삶이 내 것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 생명이 - 나만을 위한 생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시기 위해 -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하나님의 피조 세계를 우리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삶을 감독하시고 우리의 삶에 보응하시는 것은 당연한 귀결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인식하지 못하면 – 우리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고백하면서도 – 하나님과 무관한 삶을 살기 쉽습니다. - 그리고 자기가 필요할 때만, 주님을 부르게 됩니다.
여기에서 또다시 질문이 제기 될 수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면, - 과연 하나님의 보응을 피할 사람이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보응을 피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 나의 중심이 어느 쪽으로 향해 있느냐입니다.
쉽게 예를 들면, - 어떤 사람이 살인을 해서 전과자가 되었다고 하십시다. - 그런데 대통령이 특별 사면해 주어 – 가석방 되었습니다. - 이후 이 사람이 자신의 삶의 방향을 어디에 두고 있느냐에 따라 – 그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 ‘이제부터는 새사람으로 살아가겠다.’고 하면서 – 실제로는 예전에 몸담았던 환락가와 범죄소굴에 다시 발을 담그고 있다면 – 그의 인생은 끝난 것입니다.
입으로 아무리 새 삶을 다짐해도 – 그런 곳과의 접촉점을 끊지 못하면 – 다시 죄를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는 달리 – 그가 새로운 자리, - 새로운 사람들을 향해 걸어간다면 – 비록 실수하며 넘어지고 – 흔들릴지언정 – 시간이 지나면 – 결국 그의 삶은 승리의 열매를 맺어 –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고, 도전을 줄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방향은 – 주님을 향하고 있습니까? - 아니면 자기 자신을 위한 방향으로 맞추어져 있습니까? - 분명한 사실은 - 우리의 삶이 주님을 향하고 있느냐, - 아니면 자기 자신을 향하고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주님을 행해 있는 한, - 실수하고 넘어지더라도 - 주님께서 이런 것을 문제 삼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 그것은 - 주님을 향해 걸어가는 한, - 그 삶은 반드시 변화됩니다. - 주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 삶의 방향에 대해 – 구체적으로 살펴보십시다. - 먼저 주님을 위한 삶의 반향을 보시겠습니다.
첫째, - 주님을 향한 삶의 방향은 - 예수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좁은 길”, "좁은 문”을 향해 걸어가는 것입니다. - 이 길이 본문 로마서 2장 7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그런데 한글 성경과 헬라어 원문의 순서가 다릅니다. - 헬라어 원문에는 ‘영광’을 구하는 사람이 먼저 나옵니다.
여기서 “영광”을 나타내는 헬라어 ‘독사 δόζα’는 - ‘하나님의 영광’을 의미합니다. - 영광은 사람에게 해당하는 말이 아닙니다. - 즉, 자신이 진리를 향해 서 있다면,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행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만일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이 – 자기 주머니만 챙기기 위해 –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면 – 그런 사람을 가리켜 - ‘모리배’라고 합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 나라의 존영과 국민을 생각하지 않고 – 그 권력으로 자기의 부귀만 추구한다면 – 그런 사람을 일컬어 - ‘정상배’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 하나님을 이용해 자기의 유익과 영광을 구하는 사람은 그릇된 신앙의 모리배요 정상배입니다. - 하나님께 영광을 구하는 것은 -우리의 삶으로 굳어져야 합니다.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습관이 되지 않으면 – 언제든지 자신의 유익을 따라가게 됩니다. - 그리고 아쉬울 때만 – 주님을 찾게 됩니다.
둘째, “존귀”를 구하는 것입니다. - 존귀는 헬라어로 ‘티메 τιμή’인데 - 그 본뜻은 ‘가치’입니다. - 예수님께서는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마 7:6)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돼지에게 진주를 주는 경우는 없습니다. - 왜냐하면, - 돼지는 가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돼지는 배를 채우기 위해서라면 – 썩은 것이든 – 상한 것이든 – 영양가가 잇는지, 없는지 따지지 않고 먹습니다. - 돼지는 배만 부르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 이런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 정말로 ‘이것이 가치 있는 것인가?’ 하고 따지기 전에 - 자기 욕망과 이권에 쫓아 자기 배만 부르면 먼저 취하고 봅니다.
우리가 주님을 향해 삶을 결정짓는다는 것은, 모든 욕망과 야망을 뛰어넘어 영원히 가치를 추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셋째,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것입니다. - 진정한 가치는 썩지 않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썩지 않는 것이 무엇입니까? - 진리입니다. - 주님을 향해 삶을 결정짓는다는 것, - 주님의 영광만을 드러낸다는 것, - 영원한 가치를 따진다는 것은 - 진리만을 위해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3장 6절은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고 말씀합니다. - 육에 관심 있는 사람은 - 썩어질 것밖에 보지 않습니다. - 그러나 영에 속한 사람은 썩지 않는 진리를 주목합니다.
성인 남자들은 – 거의 매일 면도를 하는데, 면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하루 10분으로 잡는다면 – 10분으로 잡고 평생을 계산해 보면,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남성분들은 – 면도하기 위해 10분을 사용하는 만큼, - 영적인 삶을 위해서도 그만큼의 시간을 투자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영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으면, - 진리를 안다 해도 -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은 될 수 없습니다. - 진정으로 영에 속해 있어야 – 진리를 실천하는 힘을 갖게 되고 – 진리를 실천해야 – 진리가 주는 기쁨을 알 수 있습니다.
한 번이라도 진리를 실천해보지 않으면 – 진리가 주는 참된 기쁨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 진리와 하나가 되지 못하고 – 늘 평행선을 긋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 주님을 향해 방향을 결정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 존귀를 구하고, - 썩지 않을 것을 구합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평소에 신앙생활을 하면서 -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해주시고, - 존귀케 해주시고, - 진리를 위해 살게 해달라는 말들을 - 흔히 듣고 또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로마서 2장 7절은 이것만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에 있는 - “참고 선을 행하여”라는 구절은 – 정확하게 말하면 - ‘참고 선을 행하면서’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구하고 – 존귀를 구하고 – 썩지 않는 것을 구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왜입니까? - 그 구함이 진짜가 되기 위해서는 - 참고 또 선을 행하는 구체적인 삶이 가시적으로 드러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 행하지 않고 내뱉는 소리는 공허한 메아리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참는다’고 할 때, 무엇을 참는다는 말입니까?
외적인 것에 대한 참음과 – 내적인 것에 대한 참음 모두를 의미합니다.
내가 상상조차 못한 상황에 처하게 되어도 - 참을 수 있어야 하고, - 내 속에서 말할 수 없는 증오심이 일어도 참아야 합니다. - 그렇다면 어떻게 참을 수 있습니까? - 그리고 참는 것이 정말 주님을 위한 길입니까?
‘참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 ‘휘포메노 ὑπομένω’인데, - ‘휘포 ὑπο’는‘...의 밑에’라는 뜻이고 ‘메노 μένω’는‘거하다’라는 뜻입니다. - 그러므로 참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 밑에 거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못 참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 다른 사람 위에 올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
이겨야하기 때문에 못 참는 것입니다. - 그러나 내가 다른 사람보다 밑에 있다고 생각하면 – 못 참을 일이 없습니다. - 자존심도, 감정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아내가 남편 밑에만 있겠다고 생각하면 – 못 참을 일이 없습니다. - 남편이 아내 밑에만 있겠다고 생각한다면 – 못 참을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다른 사람의 밑에 있으면 - 주님을 위한 삶의 방향이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의 밑에 거할 때, - 비로소 제자들의 발밑, - 가장 낮은 곳에서 인간을 섬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내가 다른 사람의 밑에 거할수록 - 주님께서 그런 나를 자꾸 높여 주십니다. - 그러나 내가 나를 높이려 하면 – 반드시 사람들의 경멸을 받게 됩니다.
가령 누가 여러분 앞에서 – 저에게 부당한 욕을 한다고 가정을 해보십시오. - 그러면 제가 넥타이를 풀고 여러분 앞에서 그와 한 바탕 싸울 수 있습니다. - 그 이유는 제가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 그리고 제가 그 사움에서 이겼다고 하십시다.
제 속은 시원할지 모르나 – 여러분들은 저를 가리켜서 속으로 - ‘저 사람이 목사인가?’ - 싶을실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 제가 수모를 용납하며, 지혜롭게 넘긴다면 – 잠시 잠깐 제 속은 괴로울지 몰라도 –여러분은 저에 대해 존경하는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 왜냐하면,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감동시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 마태복음 23장 12절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 예수님께서 하늘 위에서 추상적으로 전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독생자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낮은 땅에 오셔서 전하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 분을 믿는다면- 이 말씀을 받들어 -다른 사람의 밑에 기꺼이 거해야 합니다.
“참고 선을 행하여”라는 구절에서 이제 ‘선을 행한다’는 것의 의미를 살펴보십시다. 성경에서 말하는 모든 선은 - 사랑으로 귀결됩니다. - 사랑이 빠진 그 어떤 것도 선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 고린도전서 13장 3절입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남의 눈에 티끌을 찾아내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마땅히 그 사람을 사랑할 때, - 우리가 구하는 것이 - 삶에서 구체적으로 열매 맺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2장 7절 하반절에 - 이런 사람에게 -“영생”이 주어진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요금은 영생이라는 말이 – 우리 마음에 잘 와닿지 않는 것 같습니다. - 영생은 영어로 'eternal life'입니다. - 주님을 향해 삶의 방향을 바꾸는 사람에게 –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참고 선을 행하면서 -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않는 것을 구하는 사람의 삶은 – 이미 영생에 맞닿아 있는 겁니다. - 그래서 그에게는 죽음이란 마치 옷을 갈아입는 것과 같습니다. - 고린도후서 5장 1절입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은 – 이 땅의 장막이 무너지면 – 하늘 위의 새로운 장막이 – 우리에게 펼쳐진다는 것입니다. - 마치 번데기가 허물을 벗고 나비가 되어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듯 말입니다.
주님께로 향하는 삶이 - 좁은 문, - 좁은 길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형통한 길이자 영원한 길입니다. - 또한 전혀 어렵지 않은 길이기도 합니다. - 그래서 삶의 방향을 틀면, - 그 속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고 - 영원한 삶이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시는 것은 – 달리 말하면 – 우리의 가치관으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 하나님의 가치관을 갖지 않으면 – 우리는 늘 속게 될 것입니다.
두 가지의 삶의 방향 중 – 나머지 하나는 – 주님이 아닌, 자신을 위한 방향입니다.
자신을 위한 삶의 방향은 - ‘넓은 길’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 이에 대해 로마서 2장 8절이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여기에서 “당”에 해당하는 - ‘에리데이아스 εριθείας’는 - 서로가 서로를 비방하기 위해 짝을 짓는 것을 말합니다. - 오늘은 이 사람과 짝하여 - 저 사람을 욕하다가, 내일은 저 사람과 짝하여 이 사람을 욕하는 것입니다.
몇 몇 사람이 모여서 술을 마십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화장실을 가자 – 나머지 사람들이 그를 욕했습니다. - 또 다른 사람이 화장실을 가자 – 이번에는 그 사람을 나머지 사람들이 욕을 하는 겁니다.
서로가 이 사실을 알게 되자 – 아무도 화장실을 못 갑니다. - 왜냐하면, 자기가 없는 자리에서 – 자기에 대해 무슨 욕이 있을지 – 모르기 때문입니다.
에리데이아 εριθείας의 본래 뜻은 -“경쟁”입니다. 로마서 1장 29절에 나오는 ‘시기’의 뜻도 경쟁이라고 했습니다. -남을 정죄하고, 비방하며 당을 짓는 일을 누가 합니까? 헛된 경쟁심을 가진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태 23:13-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많은 교인들이 전도에 열심을 냅니다. - 그런데 자기가 전도한 사람이 – 자기보다 더 열심히 봉사하게 되면, - 그 모습에 배 아파합니다. - 왜입니까? - 에리데이아 εριθείας 때문입니다. - 로마서 2장 8절입니다.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8절에서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라는 구절은, - 우리가 아무리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고 - 헌금을 많이 낸다 해도 -헛된 경쟁심으로 남을 정죄하고 – 중상 모략한다면 진리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진리를 따르지 않으면 무엇을 따릅니까? - “불의를 따르는 자”입니다. - ‘불의’라는 헬라어 ‘아디키아 αδικια’인데, - ‘부정’이라는 뜻과 ‘공평치 않은 것을 행함’을 뜻합니다. - 그러므로 나 하나 잘 되기 위해 수많은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불의입니다.
8절에 또 다른 단어가 ‘따르다’인데, - 이는 헬라어 ‘페이도 πείθω’인데, 두 가지 듯이 있습니다. - ‘믿다’와 ‘설득하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 세상을 양심대로 살아서는 - 절대로 안 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듣는 성경말씀과 목사님의 설교 말씀 모두 너무나 좋다고는 말하면서도 – 그 말씀대로 살아서는 안 된다고 철석같이 믿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려면 - 적당하게 부정하고 불의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 바로 불의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또한 이런 사람들은 - “예수 믿는 것은 좋은데 – 그렇게 고지식하게 살면 안 돼”라며 –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고 – 불의를 조장합니다. - 이미 살펴 본 로마서 1장 32절의 내용도 ‘페이도 πείθω’입니다.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그런 사람은 자기 혼자만 불의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불의를 행하도록 격려해 가며 공범을 만드는 것입니다. - 이런 사람을 주님께서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8절 하반절)고 말씀하셨습니다.
‘분노’란 헬라어 뒤모스 θύμος는 – 격노라는 뜻입니다. - 이 단어는 뒤오 θύω ‘라는 동사에서 왔는데 – 그 의미가 ’잡다’, ‘죽이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 끊임없이 당을 지어 – 사람을 정죄하고, 진리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 불의를 확산시키는 사람들을 -
하나님은 심판의 대상으로 멸절하신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2장 7절-8절이 우리 인생이 끝나는 날에 주어지는 심판에 관한 내용이라면 – 로마서 2장 9절 – 10절은 – 살아있는 동안 주어지는 심판을 말합니다. - 로마서 2장 9절입니다.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하나님을 향해 삶의 방향을 돌린 사람이 -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설령 그에게 환란과 곤고가 주어진다 해도 - 반드시 그는 일어서게 됩니다. - 고난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위해 삶의 방향을 튼 사람에게는 - 환난 자체가 - 죽음이자 저주요, 그것이 영원히 지속됩니다. - 남을 비방하고 중상하면 – 마음이 편한 것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 이것은 도처에 자기 적을 만드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겉으로는 편해 보일지 모르지만 – 속으로는 절대로 편할 수 없습니다. - 불법으로 권세를 잡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 그래서 언제 누가 자신을 해칠지 몰라 늘 불안합니다. - 즉 자신을 위한 삶을 사는 사람에게 진정한 평강이란 없습니다. - 로마서 2장 10절 말씀입니다.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주님을 향해 방향을 돌리고 -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삶을 살면, - 이 땅에서도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일을 행하실 때 - 사람을 차별함 없이 공평하게 하십니다(11절).
성도 여러분, 주님께 어떤 심판을 받을지는 - 이제부터 우리 삶의 방향에 달려 있습니다. - 지금 하나님을 향한 좁은 길을 걸어가고 계십니까? - 하나님의 깊고 오묘한 은혜가 여러분의 삶에 가득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