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고 생각나게 하라
2024. 3. 3(주일낮예배) 요한복음 14:26
여러분은 요즘 무슨 생각을 많이 하고 있는가? 자기개발서를 많이 쓴 밥 프록터는 위대한 확언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생각을 하지 않는지를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의 1%만 생각하고, 3%는 본인이 생각을 한다고 생각하고, 나머지 96%는 생각하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한다.
100명이 있으면 96명은 뭐 그렇게 골치 아픈 것을 생각하느냐?고 말하며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3%의 사람은 실제로 생각은 하지 않으면서 나는 생각하는 사람이다는 생각을 하며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밥 프록터는 “사람들이 생각한 대로 말할 수 있다면 우리 모두는 벙어리일 것이다”. 는 말을 한다. 사람들이 얼마나 생각을 하지 않는지 생각하는 것이 그대로 말로 표현된다면 모두 벙어리가 되어져 있을 것이다는 것이다.
그런데 혹시 저와 여러분이 이렇게 생각없는 삶을 살고 있지 않는가? 제가 청소년기에 친구들과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은 무엇을 생각할까?하는 질문을 자주 하였다. 턱에 손을 대고 팔꿈치를 무릎에 올리고 있는 생각하는 사람의 조각상은 온 몸의 근육이 긴장한 상태로 세워져 있다. 로뎅은 씨름선수가 상대방을 넘기기 위하여 온 힘을 다쓰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지금 온 힘을 다하여 생각하고 있음을 표현하였다. 그런데 저는 청소년기에 친구들과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은 무엇을 생각할까? 아마 오뎅을 사먹어야 하나? 떡복기를 사먹어야 하나? 를 고민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겠는가?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은 단테의 신곡 지옥문 편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1880-1882년 청동으로 조각된 생각하는 사람은 지옥문 앞에서 심판받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사는 것이 진리의 삶일까? 하는 것을 지옥문 앞에서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고민의 생각을 사는 날 동안에 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창세기 42장은 요셉의 형제들이 애굽에 곡식을 구하러 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가나안 땅의 기근으로 먹을 것이 없었던 형님들은 애굽에 곡식을 구하러 가서 총리가 된 요셉 앞에 무릎을 꿇는다. 그때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꿈이 생각났다고 창세기 42장 9절은 기록한다.
(창 42:9)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정탐꾼들이라 이 나라의 틈을 엿보려고 왔느니라
만약 여러분이 요셉이었다면 무엇이 생각났겠는가? 제가 요셉이었다면 형님들이 요셉을 팔았을 때가 생각났을 것이다. 요셉이 형님들을 찾아 세겜으로 간다. 그런데 형님을 찾지 못한 요셉은 도단으로 간다. 그렇게 형님을 찾아서 헤매던 요셉은 드디어 도단에서 형님을 만난 것이다. 그때 요셉은 엄청나게 반갑게 형님을 부르며 달려갔을 것이다. 그런데 형님들은 그렇게 달려오는 요셉을 죽이기로 의논한다. 그래서 요셉이 도착했을 때 형님들은 채색옷을 벗기고 구덩이에 던져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음식을 먹고 있는데, 미디안 상인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우리의 동생을 죽이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고 말하고 은 20에 요셉을 팔아버린 것이다.
제가 조금 상상을 해 보면 구덩이에 던져진 요셉은 밥을 먹고 있는 형님들에게 눈물을 흘리면서 살려 달라고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형님들은 그 요셉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어떤 형님은 그러한 요셉을 향하여 꿈꾸는 자여 이제 그 꿈이 어떻게 되는지 한번 보자 라고 조롱도 했을 것이다. 그렇게 피눈물을 흘리며 형님의 이름을 불렀는데 오히려 조롱하였던 그 형님들이 생각났을 것이다.
아니 제가 요셉이었다면 보디발의 집에서 고생했던 일들이 생각났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보디발의 집에서 아니 시위대 뜰에서 고생한 것은 형님들이 때문이었다고 생각해서 모든 원망을 다 쏟아 내었을 것이다. 그런데 요셉은 형님들이 자신을 팔 때를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애굽에서 고생한 그의 삶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때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꿈이 생각났던 것이다. 그래서 요셉은 너희는 정탐군이다는 터무니 없는 누명을 씌운다. 그리고 요셉은 3일동안 형님들을 감옥에 가두었는데,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났는지 창세기 44장 21절을 함께 읽기 바란다.
(창 44:21)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형님들이 요셉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 요셉은 형님을 알아 보았지만, 형님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다. 17살에 애굽에 팔려온 요셉은 30살에 총리가 된다. 그리고 풍년 7년동안 정책을 잘 펼쳤던 이제 7년의 흉년 중에 2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때 형님을 만났다. 그러므로 요셉이 애굽에 종으로 팔려와서 형님들을 다시 만나기까지 대략 22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것이다. 그런데 22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형님들을 한눈에 알아보았는데, 10명의 형님들은 요셉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왜 알아보지 못했겠는가? 요셉이 총리가 되리라는 고는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 그들은 22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내가 판 요셉은 애굽에서 어떻게 살까? 하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은 것이다. 그랬던 형님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정탐군이라는 말에 형님들은 감옥에 3일동안 갇히게 되었을 때 요셉을 생각하고, 또 요셉을 판 행동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하나님이 주신 꿈을 생각한 요셉은 형님들에게 원수를 갚기보다 그 형님들이 잘못을 깨닫게 하여 하나님께 돌아오게 한 것이다. 그래서 창세기 마지막을 보면 아버지 야곱은 죽은 후에 요셉은 형님만이 아니라, 그 조카들도 다 책임을 지겠다는 말을 한다. 형님이 묶은 볏단이 요셉이 묶은 볏단에 절하는 꿈을 꾼 요셉은 형님과 그의 가족을 섬김으로 정말 머리 숙여 존경받는 자리에 서게 된 것이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꿈을 생각했기에 형님들이 무릎을 꿇었을 때 원수를 갚는 것이 아니라, 그 꿈을 이루는 계기를 만들어 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성도로서 무엇을 생각하며 살아야 하겠는가? 2016년 12월 25일 KBS 스페셜에서 에디냐와 함께한 4년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가 방영되었다. 이 다큐멘터리를 담당한 PD는 도전골든벨 등 교양국과 다큐멘터리국에서 일을 하였는데 즐겁지가 않았다. 그렇게 재미없는 나날을 보내던 PD는 결국 삶의 길을 잃어버렸고, 죽음을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게 죽음을 찾던 PD는 우리나라 최초의 호스피스 사역을 한 갈바리의원을 찾아간다. 그리고 발안마사로 섬기면서 죽음의 현장에서 사역하는 호스피스와 임종을 맞이하는 사람과 가족들을 영상에 담았다.
그 호스피스 사역을 하는 수녀님들의 인터뷰한 부분만 함께 보시기 바란다.<에디냐와 함께 한 4년>
에디냐 수녀 : 죽음을 부정한다고 해서 죽음이 안 오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러므로 에디냐 수녀는 죽음을 생각하면 물질이나 명예에 얽매이지 않고, 좀 더 보람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는 말을 한다.
마리아 막달레나 수녀 : 죽음을 생각하면 내일로 미루지 않고, 오늘을 성실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스텔라 수녀 : 삶은 개떡같이 살다가 잘 죽을 수는 없거든요. 삶과 죽음은 붙어 있는 것이므로 잘 죽으려면 잘 살아야 한다.
박희원 원장 : 죽음은 삶을 비추는 거울이다. 죽음 앞에 한번 서면 내 인생이 어떻구나! 하는 것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삶에 대한 흥미를 잃고, 또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하던 PD는 죽음의 현장에서 죽음을 본 이후에 살아있음이 감사라는 말을 제일 먼저 한다. 그리고 PD는 죽음을 생각할 때 가야할 삶의 길이 보였다고 말한다. 어찌보면 말이 앞뒤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죽음을 생각할 때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러분은 죽음을 기억하는가?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죽음을 기억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예수님은 성령님이 오실 것인데, 그 성령님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또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고 말씀하신다. 먼저 오늘 본문을 읽기 바란다.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보혜사는 옆에 불려 온 자라는 뜻을 가진 법정용어이다.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사람 옆에서 그를 대변하면서 위로해 주는 것을 하는 분이 보혜사라는 것이다. 그런데 성령 하나님을 보혜사 성령이라고 하여서 우리의 위로자가 되시고, 또 우리를 대변하는 일을 담당하는 분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 보혜사 성령은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또 예수님이 그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였는지?를 가르쳐 주실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보혜사 성령은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생각나게 하여 주실 것이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에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이 생각나서 어떤 상황에서도 참된 평안을 누리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 하나님의 사역이다.
그 사역이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가? 지금 옆의 분을 한번 보시기 바란다<부탁>. 지금 옆의 분을 보시면서 이 집사님은 내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반찬싸서 찾아온 분이다. 하는 생각이 나면 고마운 것이다. 그런데 옆의 분을 보는데, 이 사람은 항상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다는 생각이 나면 짜증이 나는 것이다.
그렇지 않는가? 그런데 보혜사 성령은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 사랑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여서 마음의 기쁨과 평안을 가득하게 하여 주시는 것이다.
여러분은 지금 성령 하나님의 생각나게 하는 은혜를 누리고 있는가? 생각나게 하다(ὑπομιμνῄσκω)는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7번 나오는데, 서신서에서는 사도와 목회자의 사역으로 소개된다. 쉽게 말씀드리면 목사가 하는 일은 예수님을 가르치고, 또 생각나게 하는 일을 감당하는 것이다는 것이다.
성령의 은혜로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풍성히 알아 하나님의 세움을 받은 종들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구가 되어서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나게 하는 사역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무엇을 생각하고, 또 무엇을 생각나게 하는 사역자인가? 저와 여러분은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하나님의 은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우고 생각나는 은혜를 풍성히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뿐만 아니라, 이제 그 은혜와 사랑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생각나게 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게 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