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씨 집안의 평화를 이루다
문민순
매달10일은 장씨 집안 며느리들이 모이는 날이다. 이 모임은‘장씨 며느리 친목회’이다. 회비는 각기 월3만원. 걷은 돈은 매달 돌아가면서 한 사람에게 주고, 돈을 받은 사람은 그달 모임의 장소 및 음식을 제공한다. 이 모임은 장씨 집안에 시집온 사람은 무조건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할 만큼 장씨 가문의 가풍으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90이 다 되어가는 장조카 형님에서부터 젊은 새댁들까지, 나이도 천차만별이요, 고향도 다르고 성씨도 각성바지지만 장씨 ‘며느리’라는 신분은 하나의 공감대를 이룬다.
결혼하고 몇 년간은 남편 직업상 한 곳에 정착할 수 없는 상황인지라 모임에 불참 할 수밖에 없었다. 생활이 안정되어지면서 참석하기 시작해, 수십 년 나의 일상 중 하나가 되어 마음에 잔물결을 일으키며 번져갔다. 처음에는 만리동 에서 한의원 하시는 큰댁에서 모이다가 나중에는 돌아가면서 각기 집에서 음식을 차려 대접하기도 했다. 지금은 만리동에 있는 식당 하나를 정해놓고 매달 모이고 있다.
그 모임은 곧 장씨 집안의 소통의 장이 되는 것은 물론이요, 집안 대소사에는 서로가 잘 뭉치게 되는 계기가 된다. 뿐이랴, 저마다의 소식과 안부도 나누고, 사촌 네 사업 확장이며 조카의 승진 등, 집안의 애경사를 모두 알게 되는 그야말로 정보 소식 통로이다. 또한 새로 며느리를 보면 데리고 나와 인사시키기도 하고 각개인의 건강이나 자식의 진로 같은 고민도 함께 나눈다.
여자들의 입담은 끝이 없다. 그토록 하고 싶은 말들을 어찌 참고 지냈을까 싶다. 누군가의 이야기는 한 편의 영화 같고 누군가 들려주는 심중의 고백은 가슴 짠한 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 가끔 장씨 남자들이 나올 때가 있다. 가부장적인 풍습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런 날은 남자들이 주로 분위기를 이끌어 간다. 옛날 옛적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결국 고향 개성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젊은 시절에는 흥미 없던 얘기들이 언제부터인가, 할머니가 들려주던 옛날 얘기처럼 귀가 솔깃 열린다. 아니 장씨 가문의 오랜 속살을 들여다보는 재미라고나 할까, 추억을 불러낸 남자들 역시 그 옛날 그리움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꽃을 피운다.
생각해 보면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한 집안의 중심을 이루고 산다는 게 신기하기 이를 데 없다. 30명이 넘는 며느리들이 각기 다른 고향에 두고 있다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좁은 땅덩이 안에서도 지방마다 풍습도, 먹거리도 다른 걸 보면 박물관이 따로 없지 싶다. 이 모임을 하게 된 동기도 어쩌면 개성에서 피난 나와 정착한 곳이 주로 서울 경기지역이다 보니 피난민의 외로움도 달랠 겸, 장씨 집안의 결집과 단합된 힘을 갖고자 며느리들의 자발적인 모임을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장씨 집안 며느리들의 모임 외에도 일 년에 서너 번 온가족 이 만난다. 한식날이면 봄나들이 삼아 소풍을 가듯 임진각으로 모두 모인다. 북녘 땅을 바라보며 고향 땅 개성에 살고 있는 남은 가족들의 무사안일을 염원한다. 여름이면 모두 모여 천막촌을 이룬다. 아이들은 물놀이 하고 어른들은 고기를 천렵한 고기를 끓여 먹는 맛은 아주 특별하다. 가을이나 겨울이면 2박3일의 여행을 떠난다.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을 사색하는 묘미도 즐겁지만 무엇보다 서로 닮은 얼굴들이 모여 호호 하하 마주 쳐다보며 대화하는 재미는 세상 그 어떤 여행보다 즐겁고 재미지다.
90년대 어느 겨울이다. 오색온천을 시작으로 2박3일의 강원도 여행길에 오른 적이 있었다.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만 돌아오는 길에 뜻하지 않게 심한 폭설을 만났다. 대절했던 버스는그대로 길바닥에 멈춰 선채 움직일 수도 없었고 대관령 휴게소까지는 거리가 너무 멀어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처지였다. 다행스럽게도 동행한 남자 친척 몇 분들이 있었는데, 그 분들이 휴게소에 헬리콥터로 공수해준 물이며 라면, 과자들을 날라다 주셨다. 먹고 나니 화장실이 문제였다. 그때는 환경이 취약했던 터라 고립된 길에 화장실이 있을 리 만무 했다. 자연적인 현상을 어쩌지 못해 결국 버스 주변에다 볼 일을 보아야 했다. 저만치서 남자들이 망을 보고 여자들은 볼 일을 보았는데, 거기엔 시숙님도 계시고 서방님도 계시었으니 그 민망함을 어찌하랴. 고립되었음에도 두려움 없이 시시닥거릴 수 있었던 것도 남자 친척분 들이 곁에 계시는 든든한 마음이었지 싶다. 핸드폰도 없는 시절이라 뉴스에 나온 것이 개선장군의 귀향처럼 느껴지던 때였으니….
한 세대가 끝나면 그 자손들이 중심으로 대를 이어 나간다. 그 또한 자연적인 현상일 터이지만 다시는 형님들을 볼 수 없다는 게 씁쓸해진다. 격의 없는 수다를 떨어가며 함께 웃고 떠들던 모습이 사진처럼 박혀 지금은 내 가슴에 걸려 있다. 그러나 귀한 모임을 만들어 주신 배려를 잊지 않으려는 듯 비록 구심점이 사라져가도 면면히 이어져 오는 가문의 서열처럼 지금도 항렬순서대로 구심이 되어 장씨 가문의 친목회가 활성화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시대가 급변해 가듯 사람들의 생활도 하루가 다르게 변해간다. 그러다 보니 형제자매도 가까운 친척도 자주 만나기가 어렵다. 결혼식장이나 장례식장에서 만나는 것이 고작이다. 몸이 멀어지니 마음이 멀어지기 마련이런가, 대화도 낯설고 분위기도 어색하다. 어쩌다 만나는 사람에게는 공통분모를 찾을 수가 없다. 거기다 요즘은 자식들도 많이 낳지 않으니 가까운 친척도 몇 명 되지 않는다. 친척이 적을수록 자주 만나 혈육의 정을 나누고 가풍을 이어가는 것을 계속 물러 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