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禮)의 운동 유도(柔道)
최 순 태
요즈음 날씨가 아침, 저녁으로 서늘하다. 역대 최악의 폭염도 서서히 사라져 간다. 이러한 여름을 잊게 하는 청량제가 있었으니 바로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팔렘방에서 개최된 아시안 게임이다.
이 대회에는 여러 가지 종목의 운동경기가 있다. 나는 축구, 농구를 비롯한 구기종목도 좋아하지만, 개인종목인 유도 경기를 즐겨보는 편이다. 내가 유도를 처음 접한 일은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였다.
김천의 다른 고등학교와 달리 우리 학교에서는 체육과목과 별도로 유도를 정식 교과목으로 삼고 일주일에 한 시간씩 수업하였다. 그래서 모교의 학생들이 졸업할 즈음이면 유도 공인1단 정도의 실력을 가지게 된다.
유도를 배우던 당시 나는 다른 사람에 비해 운동신경이 둔했으므로 그 시간이 매우 성가셨고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수업시간에 도복을 깨끗하게 세탁하는 일은 기본이고, 맨발로 하는 운동이라 반드시 몸의 청결상태 유지가 요구되었다.
만일 도복과 몸의 청결을 소홀히 하면 당시 유도대학을 졸업하고 공인4단이신 선생님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때로는 집에서 도복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서 급히 옆 반의 친구들에게 빌리는 일도 있었다.
유도는 예(禮)로 시작하여 예(禮)로 끝나는 운동이다. 나는 제일 처음 기초부터 배웠다. 수업이 시작되면 선생님과 학생들은 가벼운 목례로 서로 인사를 하면서 수업이 진행된다. 그런 다음 유도의 기초인 낙법부터 숙달에 들어간다.
낙법은 상대방의 유도 기술이 들어가 내 몸이 매트에 떨어질 때 나를 방어하는 기술인데 전방낙법, 후방낙법, 측방낙법, 회전낙법이 있다. 전, 후, 측방 낙법은 별로 어려운 점이 없었으나, 나는 회전낙법을 습득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멀리서 달려와서 왼손과 오른손을 매트에 집고 몸을 굴리는 것인데 나는 왼쪽 방향은 잘되는데, 오른쪽 방향은 잘되지 않았다. 유도선생님인 박 선생님은 “너처럼 운동신경이 둔한 녀석은 처음이다.” 라고 하면서도 성의껏 지도하셨다.
유도의 기술에는 크게 메치기와 굳히기로 나눌 수 있다. 메치기는 대표적으로 업어치기와 허리후리기 등으로 나누어져 있고, 굳히기는 누르기와 조르기가 있다. 모든 기술은 경기할 때 복합적으로 적용되어 상대방과 겨루기가 이루어진다.
보통 체육 선생님들은 학생들을 지도하는데 상당히 엄하였으나, 유도 선생님은 자애로운 성품으로 학생들을 가르쳐 학생들로부터 평판이 좋은 선생님으로 기억하고 있으며, 지금도 선생님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학창시절 매년 가을이 되면 학생들을 대상으로 승단대회가 개최되었다. 승단할 실력이 안 된 나는 출전하지 않았지만 우리 마을 옆 동네에 사는 셋째형 친구인 선배가 참가하여 관람할 기회를 가졌다.
이윽고 승단심사가 시작되었고, 선배의 차례가 되었다. 양 선수는 치열한 접전을 벌였으나 점수를 내지 못하고 판정으로 승부를 가렸으나, 상호간 유효한 점수가 기록되지 않았다. 이 때 심판은 누가 공격을 많이 했느냐를 평가하여 판정을 하는데, 이때 적용하는 원칙이 우세승이다. 이날 경기에서 선배가 우세승으로 이겼다.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우리나라는 종주국 일본과 유도에서 금메달을 양분하는 양상으로 경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나는 경기를 지켜보면서 내 나름대로 심판을 하였다. 효과, 유효, 절반, 한판승으로 승부가 결정되는 유도경기를 보면서 마치 내가 경기장에서 뛰는 듯한 착각을 하였다.
가족들과 경기를 보며 경기 진행상황을 모두에게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막바지로 진행되는 아시안게임 유도경기에 올해 처음으로 남녀 혼성경기가 추가되었다. 각 체급별로 남녀 각각 2명의 선수와 후보 각1명이 출전하는 방식이다.
혼성경기가 벌어진 어느 날 중국과 몽골의 8강 경기에서 판정에 불만을 가진 몽고 선수들이 경기가 끝나고 상호 인사를 하지 않고 퇴장하는 일이 벌어졌다. 예를 중시하는 유도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심판의 판정에 불만이 있더라도 결과에 깨끗이 승복하는 일은 스포츠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고등학교 시절 유도를 배운 일은 나의 인성과 예절을 함양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비록 내가 남처럼 상냥하고 활발한 성격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배려하려는 마음을 항상 가지려고 노력하고 있다.
유도를 정규 교과목으로 하는 학교가 얼마나 되는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대구 지역에도 유도를 잘 하는 고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그 학교가 유도를 전교생이 수강토록 업하는지 궁금하다.
이런 면에서 내가 유도 배우기를 참 잘했다고 생각한다. 유도는 체력 단련 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인성 함양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지.덕.체를 중시하는 우리 고등학교의 학풍 외에도 유도와 같은 교과목을 편성하여 학생들의 심성을 맑게 만든 까일은 인성 함양의 지름길이다. 만일 기회가 되면 언제든지 다시 한 번 매트에서 흰 도복을 입고 유도를 하며 건강을 다지고, 고교 시절 유도 수업을 회상하는 시간을 갖고 싶다.
다가오는 인생의 황금기
최 순 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영혼의 메시지를 전하는 유명한 철학자인 김형석 교수가 올해로 100세가 되었다. 그는 그가 펴낸 “백세를 살아보니”라는 책에서 “인생의 황금기는 바로 65세에서 75세 사이이다.”라고 말하였다.
사람은 태어나서 학교를 다니는 유년기와 대학을 졸업하여 직장을 구하는 청년기를 거쳐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고 그들을 보살피는 중년기를 보내는 동안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생활하며 정신없이 이 세상을 살아간다.
이렇게 바쁜 일상을 보내다 어느새 정년이 되어 현직에서 물러나면 비로소 자기만의 시간을 가지고 이제까지 하지 못한 일을 하면서 삶의 여유를 만끽한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꿈도 많았다. 국어시간에 선생님께 지명되어 책읽기를 하면 선생님이 낭랑하게 글을 잘 읽는다고 칭찬을 받은 적이 있다. 이때부터 말로서 생업을 하는 직업을 가져볼까 하는 막연한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이른바 중학교 입학시험 마지막 세대인 나는 초등학교를 나와 중등학교로 들어가는 관문에서 뜻대로 되지 않아 잠시 그 꿈을 잊고 있었다. 또한 학교생활에 적응해 나가느라 실천하려는 마음을 가지기 어려웠다.
우여곡절 끝에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시도하였으나 내가 원하는 직업을 구하기는 쉽지 않았고 차선책으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받아 안정적인 공직생활을 하게 되었다. 정년퇴직이 되기 전인 약 3년 동난 시청문우회의 문을 두드려 평소 하고 싶었던 글쓰기에 도전하여 수필, 시 등을 문우회지를 통해 작품을 기고하였다.
퇴직 후 공무원연금공단의 수필창작교실에서 수필 강의를 들으며 꾸준히 글쓰기를 하고 있다. 수필은 자기체험적인 글이어서 처음에는 나를 드러내어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일이 썩 내키지 않았다. 글을 쓰면서 지난날을 반성하고 잘못된 일을 되풀이하지 않는 순기능이 더 많아서 나는 이 일을 계속하고 있다.
2005년부터 시작한 합창단 활동도 퇴직 후 2년이 지날 때 까지 계속하였다. 그동안 각종 대회나 연주회에 참가하여 동료들과 호흡을 맞추면서 협동심과 남을 배려하는 품성을 기를 수 있었다.
합창단 활동을 하면서 개인 레슨을 받아 쌓은 내공을 바탕으로 비록 전문가에 미치지 못하는 실력이나 학교동문 모임이나 다른 단체의 행사에 불려나가 노래를 불러서 그들의 영혼을 위로해 주고 있다. 나의 재능이 남을 즐겁게 해 줄 수 있다는 사실에 보람을 느낀다.
환갑이 조금 넣은 이 나이에 나의 관심사는 우리 가족의 건강과 더불어 글쓰기와 노래, 등산이다. 노래와 글쓰기는 나의 내면을 충실하게 하는 일이고, 외적으로 건강한 삶을 위하여 한 달에 한번 시행하는 동문 산악회에 거의 빠지지 않고 참가하여 체력단련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 국내의 유명한 산은 거의 등반한바 있으며, 설악산이나 지리산은 각 봉우리를 수차례에 걸쳐 등정하였다. 산악회 100회 산행 기념으로 중국 황산을 다녀오기도 하였다.
문학 활동을 하는 이유는 유능하고 훌륭한 작가가 되어 이름을 후세에 날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수필을 쓰면서 이제까지의 인생을 되돌아보고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기 위함이다.
노래를 부르는 까닭은 부르는 그 순간은 세상의 시름을 잊을 수 있고 잠시만의 휴식을 취하며 다른 일을 위해 잠시 쉬어가는 중간단계로 생각한다. 물론 나의 노래를 듣고 남이 위로를 받는다면 그것은 덤이다.
사람이 나이가 들어가면 자연적으로 체력이 떨어져서 자기가 가고 싶은 곳이나 유명한 곳의 관광이 곤란하다. 늙을수록 근력을 키워야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다. 이러한 연유로 꾸준히 근력을 키우기 위한 헬스와 더불어 등산이 제격이다.
우리나라 노인들 10명 중 3명은 말년에 치매에 걸린다고 한다. 치매를 예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끊임없이 머리를 쓰고 생각을 해야 한다고 들었다. 치매예방에 최적의 방안은 노래를 부르거나 글을 쓰는 일이다.
노래를 부를 때 멜로디뿐만 아니라 가사도 외워야 함으로 당연히 두뇌를 사용하게 되며, 글쓰기도 많은 생각이 필요하므로 뇌의 활동이 활발하게 된다. 이러한 정신활동을 잘 하게 도와주려면 체력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내가 좋아하는 활동이 건강하게 노년을 지탱하게 해주는 동시에 그것을 즐기는 생활을 계속 하기 때문에 내 인생의 황금기가 곧 도래하리란 점은 확실하다. 나는 계속 이 길을 걸어가려고 한다.
어느 특별한 초대
최 순 태
“컬러풀코러스(대구시청직원합창단)”란 단어는 내게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의미로 다가온다. 내가 10년 이상 몸담았던 합창단이었고, 정년퇴직 후에도 2년간 더 활동 하였으며, 합창단원으로서 꾸준한 연주를 한 곳이기도 하였다.
6월 어느 날 합창단 관계자로부터 한통의 메시지가 도착하였다. “선배님! 우리 합창단의 정기연주회가 있으니 시간이 있으면 꼭 참석 바랍니다.”라는 내용이었다. 나를 잊지 않고 불러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나보다 먼저 합창단에서 활동하다 퇴직한 선배님께 전화를 드리니 본인도 초대를 받았단다. 공연시간이 오후 7:30이어서 조금 일찍 집에서 출발하여 대구콘서트하우스 챔버홀 앞에 도착하여 선배를 기다렸다.
콘서트하우스에는 공연을 보러 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기다리면서 잠시 주위를 살펴보니 멀리서 내가 성악 레슨 할 때 반주를 하던 반주자 선생님이 보였다. 서로 눈이 마주쳤을 때 너무 반가운 마음에 가벼운 인사를 나누었다.
이윽고 도착한 선배와 함께 공연장에 들어서니 입장권이 동이 났다고 한다. 주최 측에서 급히 자리를 마련하여 가까스로 입장할 수 있었다. 합창단의 위상을 대변하듯 공연장이 만석을 이루어 통로에서 관람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과거 내가 공연하던 시절 중간 중간 빈자리가 발견되던 때와 대조가 되었다.
공연이 시작되고 사회자의 간단한 멘트가 있었다. “저는 이 합창단 단원의 가족입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내가 누구의 딸인지 알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나는 처음 그녀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연주회가 시작되어 첫 번째 무대로 “합창으로 배우는 음악사”(일명 합배음)이란 곡이 연주되었다. “사계”로 유명한 바로크 시대의 비발디로부터 고전파인 음악의 아버지 바흐, 음악의 어머니 헨델과 다른 작곡가의 주옥같은 곡들이 이어졌다.
중간에 감미로운 “울게 하소서”가 울려 퍼지고, 교향곡의 아버지인 하이든이 조는 관중을 깨우려고 작곡했다는 “놀람 교향곡”이 장엄하게 연주되었으며, 천재 음악가인 모차르트가 완성한 오페라 “마술피리” 중 소프라노가 부르는 “밤의 여왕 아리아”를 공연하는 어느 단원이 솔로로 불러 무대를 빛나게 하였다.
마지막으로 악성 베토벤의 대표작인 “9번 합창 교향곡”으로 마무리 되었다. 다음에 낭만파들에 대한 노래가 시작되었다. 이 노래 하나를 통해서 서양의 음악사를 대강 알 수 있었으며, 작곡가들의 유명한 교향곡을 감상하는 호사를 누렸다.
옆에서 같이 관람하던 선배가 내 옆구리를 찌르면서 “제일 앞줄 좌측에서 세 번째 단원은 마치 인형 같아”하면서 이야기 하였다. 나는 그녀가 누구인지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 단원은 소프라노 파트의 “M”이었다. “M”은 나이에 비해 동안이었다. 여자들은 본인의 외모에 대한 칭찬을 받으면 상당히 기분이 좋다고 한다.
장엄한 연주가 끝나고 나서 다음 무대로 특별 출연한 꽃무리 하모니카 봉사단의 연주가 있었다. 다양한 연령대의 단원들이 우리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인 “연가” 등의 아름다운 음악을 선사하였다. 이들은 연주회뿐만 아니라 다양한 봉사활동도 하고 있었다.
찬조 출연이 끝나고 단원들의 2번째 무대로 이 계절에 어울리는 여러 곡의 노래가 공연장에 청아한 선율을 자아내었다. 단원들은 때때로 손뼉도 치고, 율동을 가미하면서 신나는 연주를 하였다. 지휘자 선생님도 신명나는 율동으로 관객들의 분위기를 주도하면서 노래를 듣는 사람들을 즐겁게 했다.
특히 “여미에서”를 들을 때 어린 시절 고향생각이 나서 잠시 숙연해졌다. “맑은 하늘 내린 저 개여울”로 시작되는 가사가 내 고향 배천의 모습과 흡사하였다. 2막이 끝나고 향토에서 활동하는 첼리스트의 감미로운 연주가 있었다. 피아노와 어우러진 협연이 환상적이었다.
마지막으로 마음에 힐링을 주는 합창이 시작되었다. 내가 합창단에서 활동할 때 불렀던 “아지랑이”, “산유화”, “철새” 등이 연주회장에 들릴 때 나도 모르게 따라 부르는 모습을 보고 나에게 아직도 합창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느꼈다.
모든 공연이 끝나고 앙코르 무대로 유명한 그룹사운드인 “퀸”의 노래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남녀 34명의 단원들이 각 파트별로 서로 호흡을 맞추며 합창을 이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흐뭇하였다. 앙코르 중간에 독창을 한 단원들도 훌륭하였다.
후배들을 격려하기 위해 대기실로 가다가 예전의 남녀 단원들을 만나 반갑게 인사하며 격려하였다. 한편 합창단의 전 단무장 부인을 만나 안부를 묻고 인사를 나누었다. 단복을 입은 모습을 보니 합창단의 일원인 듯하였다. 그 순간 공연 시작 때 의문을 가졌던 “사회자가 누구일까!” 하는 수수께끼가 풀렸다.
사회자는 그 두 분의 딸이었던 것이다. 부부는 합창단원으로 딸은 연주회의 사회자로 성공적인 공연에 크게 기여하였으니 진정한 음악가족이라 아니할 수 없다.
오늘 연주회에 참석하여 노래를 들어보니 합창단의 역량이 예전보다 나날이 발전하고, 실력이 일취월장하여 기분이 좋았다. 실력에 비례하여 관람객들이 만원을 이루는 현상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음악을 사랑하고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사람들과 만나고, 그 인연을 오래도록 간직하는 일에 보람을 느낀다. 오늘 나를 초대해준 후배들의 정성을 마음깊이 새기고 감동을 느낀 하루였다. 고마운 마음을 가슴에 간직하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끝.
(2019. 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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