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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당의 역사
12092971 안형욱
Ⅰ. 서론
정당이라 함은 국민의 의사를 정책에 반영하고, 국민이 정치에 참여하는 수단을 일컫는다. 현대 민주 정치는 정당 정치라고 할 정도로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과정에서 정당들이 내세운 공약이나 정책을 통해 시민들의 요구를 수용하는 정당의 역할을 중요시 하고 있고 이로 인해 정당이 정치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는 몇 달 후 치러질 18대 대선을 앞두고 안철수, 박근혜, 문재인 등 여러 당의 후보들이 득표를 얻기 위해 각축을 벌이고 있으며 그들의 과거나 발언 등은 하루 종일 미디어에 오르내리는 등 많은 논란이 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자주 언급되는 새누리당, 민주통합당, 통합진보당을 비롯하여 수많은 정당들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렇게 많은 정당이 생겨나기까지 우리나라는 중간중간에 독재정권이 들어서기도 했으며 많은 정당들이 서로의 노선이나 정치적 지향점의 차이 등으로 인해 새로 통폐합되기도 하였고 지도자의 행보에 따라 새로운 정당을 창당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해방 이후부터 지금까지 이어진 우리나라 정당의 역사를 당시의 사회적 배경과 정당을 이끈 세력들을 바탕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Ⅱ. 본론
1. 해방 후
1945년 해방을 맞이한 우리나라는 큰 맥락에서 보면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이룬 독립이 아니었기 때문에 패전국의 식민지 영토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일본이 패망하고 물러간 후 우리나라는 미국과 소련의 이해관계에 따라 기득권들의 경쟁이 다시 한 번 시작되었다. 또한 독립운동을 하던 여러 지도자들이 모여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당시 38선을 필두로 분할점령이 되어있던 상태였지만 지도자들은 서울을 중심으로 집결하였다. 정치세력은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온건좌파인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 김구의 상해임시정부, 재미독립운동가인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 김성수의 한국민주당이 존재하였다. 여운형, 안재홍 등이 중심이 된 건국준비위원회가 발족하였으나 김성수와 송진우 등의 우익세력들은 건국준비위원회를 인정하지 않고 불참하였으며, 미군정에게도 인정받지 못하였다. 또한 김구와 이승만에게도 ‘임시정부의 정통성‘ 과 ’친일 청산의 반대‘라는 이유로 인해 거절당하며 사라지게 된다. 당시 건국준비 위원회에 대응하여 한국민주당(한민당)이 창당하였다. 한민당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정식 정부로 맞이하자고 주장하였으며, 임시정부 간부들과 독립 운동가들을 포섭하여 중도파와 우익을 아우르는 정치세력이 되었다.
2. 제 1 공화국
1) 한국민주당
대한민국의 정당사의 시작은 한국 민주당으로부터 시작된다. 한민당은 1945년 광복 후 민족주의 보수세력이 집결하여 창당한 정당으로써 여러 우익진영 정당들이 모여 결성되었다. 한민당은 한국의 지주계층, 자산가들이 주축이 된 정당으로서 그들의 이념과 성격은 보수적이며 민족주의적 자유민주주의를 추종하는 세력이었다. 그들은 이승만·김구·이시영등을 영수로 추대하였고 수석총무에 송진우를 추대하였다. 그 외 각 부서에 당시 대다수의 민족지도자들을 배치함으로써 어떤 정치단체보다도 많은 세력들이 총집결되었다. 한민당은 5.10국회의원 총 선거에서는 두 번째인 29명의 의석을 확보하였으나 정치활동면에서는 가장 강력한 주도권을 잡았다. 그들은 제헌의회에서 내각책임제를 통과시켜 내각을 장악하고 정국을 주도하려던 계획을 세웠으나 헌법 제정의 마무리 단계에서 이승만이 강력히 반대하여 대통령중심제가 되자 한민당은 정국에서 밀려나고 이승만과 결별하게 된다.
2) 자유당
한민당과 결별한 이승만 대통령은 1951년 임시수도였던 부산에서 열린 8·15광복절 기념식에서 신당조직의 필요성을 언급하였다. 당시 국회의석은 민주국민당을 포함한 야당의 우위로 이승만의 재선가망성이 희박한 상태였다. 이승만의 신당조직의 필요성 발언 이후 국민회, 대한청년단․ 대한노동조합총연맹․ 농민조합연맹․ 대한부인회 등 5개 사회단체 대표자들은 공동으로 신당을 발족시키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둘러싼 의견대립으로 자유당은 ‘원내자유당’과 ‘원외자유당’이라는 두가지 정당으로 출범한다. 그 후 원외자유당이 주도권을 잡게 되었고 1952년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켜 대통령직선제개헌을 관철시킨 ’부산정치파동‘을 부른다. 그 후 이승만은 자유당의 주도권자이자 조선민족 청년단을 이끄는 이범석을 대신해 함태영을 부통령 후보로 하였고, 1953년에는 이범석을 축출한 뒤 이기붕을 2인자로 세웠다. 그 결과 자유당은 이승만 1인의 권위주의적인 정당으로 변하게 된다. 이후 자유당은 이승만의 종신적인 집권을 위한 개헌인 ’대통령 3선 제한’을 위해 무소속위원들을 포섭하여 137개의 의석을 확보한다. 이때부터 자유당의 횡포는 극에 달하게되고 국회의 국무원불신임권을 삭제하는 내용인 하는 헌법개정안을 4사5입의 계표방법으로 통과시켜 사사오입개헌파동을 일으켰다. 자유당은 정권욕에 사로잡혀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를 맞아 3.15부정선거를 일으키게 되고 결국 4.19혁명이 발발하여 인해 자유당은 종말을 맞게 되었다.
3)민주국민당
민주국민당은 한국민주당의 위원장이었던 김성수가 독자적인 노선을 걷고있던 신익회 등과 의견의 일치를 봄으로써 1949년 2월에 탄생한 정당으로써 자유당에 대한 견제와 대결을 지속적으로 한 우리나라 최초의 야당이다. 민주국민당은 이승만에 반대하는세력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제일 우선적으로 이루고자 한 것은 헌법을 내각책임제로 다시 환원하는 것이였다. 그러나 그들의 개헌 추진은 표결에 붙여졌으나 부결되어 기대한 바를 달성하지는 못하였다. 이에 위협을 느낀 이승만은 자유당을 결성하여 민주국민당과 자유당간의 정당차원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이후 민주 국민당은 자유당과 이승만의 부정에 대응하여 무소속과 대책을 협의하였고 1954년 11월 30일 ‘호헌동지회’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또한 이를 모태로 하여 신당촉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신당결성을 위한 준비에 나섰다. 결국 1955년 9월 18일 민주당이 결성되면서 해체를 하였다.
3. 제 2 공화국
1) 민주당
민주당은 제 2공화국의 집권여당이다. 민주당은 반 이승만세력이 모여서 결성하였으며 초대 대표위원은 신익회, 최고위원은 장면과 조병옥 등을 들 수 있다. 민주당은 자유당이 4.19혁명으로 무너져 내린 뒤 정국의 주도권을 잡았고 내각제 개헌을 이끌어 내었다. 또한 7월 29일에 이뤄진 선거에서 2/3의 의석을 확보해 다수당이 되었고 대통령에 윤보선, 국무총리에 장면을 선출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경제개발계획과 각종 국가 재건계획을 내놓았다. 그러나 자유당 시절의 후유증으로 억압된 민중의 욕구들이 폭발적으로 분출되었고 치안의 문제로 인해 안정적인 통치를 하지는 못하였다. 또한 신파와 구파와의 갈등으로 인해 구파가 신민당으로 떨어져 나갔으며 남은 신파에서도 여러 파벌로 분리되 안정적인 정치를 하지 못하였다. 결국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인해 와해되었다.
2)신민당
신민당은 7월 29일 선거를 통해 집권당이 된 민주당 내 구파가 분리되 나와 창당한 정당이다. 신민당의 창당은 민주당 내 두 개의 계보간의 오랜 갈등과 대립에서 비롯된 것인데, 이들은 한국민주당과 민주국민당으로부터 갈라져 내려온 전통적인 보수 세력으로서 신익회 조병옥 윤보선등의 인물이 있다. 그러나 신민당도 민주당과 마찬가지로 5.16 군사쿠데타로 인해 해체되었다.
4. 제 3·4 공화국
1) 민주공화당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뒤 군사정부의 중심인물들은 1963년 정치활동을 다시 허용함과 동시에 신당 창당에 몰두하였다. 그들은 1963년 2월 26일 민주공화당을 창당하였고 박정희를 총재로 선출하였다. 또한 10대 제 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윤보선을 15만표 차이로 제치고 박정희를 당선시켜 집권여당이 되었고 역대 정당 가운데 가장 장수한 집권여당의 위치를 구축하게 된다. 그 이후 제 6대 대선에서도 박정희가 재선에 성공하게 되었다. 그러나 제 7대 대선에서는 김대중을 근소한 차이로 제치고 재선을 하게 되자 위기감을 느낀 민주 공화당은 1972년 10월에 대통령 간선제와 국회의원 1/3의 대통령 임명권 등을 내용으로 하는 유신체제를 발표한다. 그러나 민주공화당은 10월유신 이후 유신정우회라는 대통령 친위집단이 등장함으로써 그 기능이 위축되었으며, 10·26사태로 인해 당의 기능이 마비된다. 결국 1980년 10월에 민주공화당은 강제 해산되었다.
2)신민당
박정희의 민주 공화당이 여당으로 집권한 당시 야당은 정치활동 금지 등으로 인해 세력이 매우 위축되어있었고 활동도 매우 미미했다. 정치규제가 풀린 후 과거 민주당의 신파와 구파, 그리고 국민의 당이 결합한 민중당이 결성되었고 이후 민중당은 윤보선 중심의 신한당과 통합하여 신민당이 탄생한다. 신민당은 6.8 부정선거 무효화 투쟁, 3선 개헌 저지 투쟁, 선거 투쟁 등 많은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각종 선거투쟁에서 실패하고 1971년 대선에서는 김대중을 후보로 내세웠지만 90여만표 차이로 패배하고 말았다.
5. 제 5 공화국
1) 민주정의당
1979년 10.26사태가 일어나자 최규하 국무총리는 대통령에 취임하게 되었다. 그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앞으로의 정국 방향을 미국과 군에 의해 좌우될 것임을 시사하였다. 그리고 유신의 잔당들은 최규하와 선혁환 등을 내세워 구속자 석방, 언론통제의 완화, 유신헌법 등의 철폐등을 통해 새로운 정치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국민들을 회유하려 하였다. 그 후 12.12 사태때는 전두환의 중앙정보부장의 취임이 있었고 기타 다른 반민주적 계획을 진행하였다. 결국 그들은 신군부세력과 함께 민주 정의당을 창당하게 되었으며 통일주체 국민회의를 통해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선출하기에 이른다. 그들은 전두환을 총재로 선출하고 11대 총선에서 승리하여 집권여당의 지위를 차지하였다. 민주정의당은 6월 민주항쟁으로 인해 위기를 맞았으나 노태우의 6.29선언을 통해 상황을 수습하였다. 그러나 1988년 국회의원선거에서 125석만을 차지해 여소야대라는 불안정한 정국을 맞이하였고 13대 노태우 대통령때에는 결국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신민주공화당의 김종필 3당합당을 선언하였고 민주자유당이 출범하면서 해체되었다.
2) 통일민주당
전두환 정권은 1980년 11월에 ‘정치풍토 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을 공포해 정치 활동을 규제하였다. 그 이후 정치활동규제가 풀리게 되었고 김영삼과 김대중은 신한민주당소속 국회의원들을 포함 범 민주세력을 통합한 통일민주당을 창당한다. 이들은 대통령중심 직선제개헌, 비폭력적·평화적 민주화투쟁, 진정한 민주화 등을 내세웠다. 통일 민주당은 6월민주항쟁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고 6.29선언을 이끌어내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1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대중과 김영삼의 분열로 김대중이 탈당하여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였고, 김영삼은 1987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하였다. 또한 1988년 총선에서도 의석을 59석밖에 얻지 못하였다. 이후 1990년 1월 민주정의당, 신민주공화당과 함께 민주자유당으로 3당합당하면서 해체되었다.
3) 평화민주당
평화민주당은 오랜 라이벌이였던 김대중과 김영삼의 갈등과 세력다툼으로 인해 김대중이 탈당하여 1987년의 대선을 노리고 김대중이 창당한 정당이다. 그러나 김대중 역시 노태우에게 패배하였다. 이후 민주자유당이 출범함으로써 어려운 국면을 맞게 되고 1991년 신민주 연합당으로 이름을 바꿨다가 9월 10일에 민주당 잔류파인 이기택과 재야입당파인 이부영 등의 민주당과 합당하여 민주당을 출범시키고 해체되었다.
4) 신민주공화당
1987년 6.29선언이 발표되자 민주화는 크게 확대되었고 김종필을 중심으로 한 구 민주공화당 계열의 정치인들은 정치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구 민주공화당의 핵심인물이였던 김종필은 새로운 정당을 창당하기 위한 활동을 개시했고 신 민주공화당이 창당되었다. 김종필은 13대 대통령 선거에서 유효투표의 8.1%밖에 획득하지 못하여 패배하였으나 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35석의 의석을 획득하여 제 4당의 지위를 획득하였다. 이후에 3당 통합을 통해 민주자유당에 참여하였다.
6.제 6 공화국
1)민주 자유당
제 5공화국때부터 집권당이였던 민주정의당에게는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 군사정권 청산요구 등이 큰 위협이 되고있었다. 이런 상황하에서 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은 과반수 의석확보에 실패하였고 노태우 정권은 여소야대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통일민주당과 신민주공화당과 함께 민주자유당을 출범시킨다. 민주자유당은 노태우를 총재로, 대표위원에는 김영삼을, 최고위원에는 김종필을 내세우며 지도체제를 구성하였다. 결과적으로 민주자유당은 215석의 의석을 확보하여 거대 여당으로 거듭났다. 그러나 이들은 완전히 융합되지 못하고 파벌로 변질되어 치열한 권력암투를 벌였다. 그리고 이 권력암투는 14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는 해인 1992년에 절정에 달하였다. 결국 김영삼이 대통령 후보가 되었고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탈당하여 새한국당이라는 정당을 만들었으며 노태우 또한 탈당하였다. 이후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이 당선되었고 김종필은 자기의 계파를 이끌고 탈당하여 자유민주연합이라는 정당을 만든다. 또한 김영삼은 민자당에 남아있는 민주정의당의 잔재를 청소하기 위해 당의 명칭을 신한국당으로 변경하였다. 여기서 민주자유당이 출범하게 된 3당 합당을 다시한번 살펴보면 민주자유당의 출범은 역사적으로 부정적 평가와 비판을 피할수 없는 사건으로 볼 수 있다. 3당 합당으로 인해 민주진영의 핵심 인물인 김대중이 홀로 남게 되었으며 민주진영 내부에서는 허탈함과 실망을 일으키게 되었고 국민들에게는 민주진영에 대한 분열과 불신을 초래하였다. 또한 이들은 기회주의적 성격을 가진 정당이였고 지역감정을 부추겨 영남과 호남지역의 갈등과 지역주의의 고착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2) 민주당
민주당은 1990년 6월 15일 3당 통합을 거부한 이기택과 구 민주당 잔류 의원, 무소속 의원 박찬종,이철등이 중심이 되어 창당한 보수야당이다. 이들은 1991년 9월 김대중의 신민주연합당과 합당하였고 김대중과 이기택은 공동대표체제로 당을 이끌었다. 14대 국회의원선거에서는 97석을 얻어 제1 야당이 되었다. 그러나 1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김대중은 민주자유당의 김영삼에게 패하였고 김대중은 12월 정계은퇴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그 이후 이기택을 최고 대표의원으로 선출하여 단일대표 체제로 나아가게 된다. 그러나 김대중의 정꼐복귀와 함께 이기택과 김대중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결국 8월 전당대회를 앞두고 7월 18일에 김대중이 자신의 계파를 이끌고 탈당하였고 원내 30석의 제2 여당으로 전락하였다. 이후 민주당은 12월 16일 제 15대 국회의원선거를 앞두고 개혁신당과 합당하여 통합민주당으로 당명을 바꾸었다.
7. 문민정부 (김영삼 정부)
1) 국민회의(새천년국민회의)
제 14대 대통령 선거에 민주당의 후보로 출마했던 김대중은 낙선하게 되고 결국 정계은퇴를 선언한다. 그러나 1995년 6월에 있었던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의 지방선거 후보자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활동을 시작으로 정치활동을 재개하였다. 그러나 김대중의 정계복귀를 당시 민주당의 기득권자인 이기택과 비김대중계의 당원들이 반대하였고, 김대중은 새로운 정당인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였다. 새정치국민회의는 15대 총선에서 호남지역의 강한 지지로 인해 제1야당이 되었고 15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1997년에 김대중은 자민련의 대통령후보인 김종필과 의원내각제 개헌을 추진한다는 전제조건을 걸고 김대중을 두 당의 연합후보로 공천하였다. 그 결과 김대중은 호남과 충청지역의 압도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집권당이 되었으나 국회의원의 수가 적어 집권당의 역할을 제대로 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새정치국민회의는 야당의 국회의원을 새정치국민회의로 끌어들이려는 노력을 하였고 결국 105개의 의석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러나 김대중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후 자민련과 약속했던 내각책임제의 추진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옷 로비사건, 국민연금제 실시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이 고조되었다. 결국 국민회의로는 총선에 승리 할 수 없다고 판단한 김대중은 새천년민주당을 새로 창당하였고 동시에 새정치국민회의는 해체되었다.
2) 자유민주연합(자민련)
제 13대 총선 이후 민주자유당이 창당되었으나 민주자유당은 계파갈등에 휩싸였다. 이때 김종필은 2월 공화계 세력을 이끌고 탈당하였고, 3월 30일에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였다. 자유민주연합은 충청지역을 기반으로 하여 활동하였으며 보수세력의 대표적인 활동을 하였다. 이들은 보수주의를 지양한 만큼 5.18특별법 제정에 반대하고 의원내각제를 주장하였다. 제 1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대중과 공동정권을 만들었다. 김종필은 국무총리를 맡아 활동하였다. 그러나 이후 총선에서 의석을 확보하지 못해 군소정당으로 전락하였고 김종필은 정계은퇴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그 뒤 2006년 한나라당과 통합하게 된다.
3)신한국당
김영삼은 노태우의 비자금 비리 폭로, 제5·6공화국의 부정과 비리의혹 등에 대응하고 대외적 이미지쇄신, 그리고 김영삼의 지도력 강화를 위해 민주자유당의 이름을 신한국당으로 명칭을 바꾸도록 한다. 1996년 4월에 있었던 제 15대 총선에서는 139석을 차지하여 제 1당이 된다. 이후 1997년 이회창이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인제는 신한국당을 탈당한다. 1997년 9월 30일 신한국당 전당대회에서는 이회창을 총재로, 김영삼을 명예총재로 각각 선출한다. 그러나 이때 김영삼의 이인제에 대한 지원 의혹으로 인해 김영삼과 이회창의 갈등은 고조된다. 결국 김영삼은 신한국당을 탈당한다. 1997년 11월 신한국당은 민주당과 통합하여 한나라당을 창당한다.
8. 국민의정부 (김대중정부)
1) 새천년민주당
새정치국민회의는 2000년 확대개편하여 민주주의,시장경제, 생산적 복지를 3대 이념으로 하는 새천년 민주당을 창당한다. 2003년에는 노무현계열 인사들이 열린우리당을 창당하여 분리되어 나갔다. 2005년에는 민주당으로 당명을 변경한다. 그 이후 2007년 통합민주당으로 개칭했다가 2달만에 다시 민주당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제15대 대통령 선거에 이어 제 16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노무현이 당선되어 여당이 되었으나 2003년 11월 11일 노무현이 열린우리당을 창당하여 분당함으로써 다시 야당이 되었다. 제17대 대통령선거에서는 이인제가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여 대권을 잡지 못했다.
2)한나라당 (국민의 정부~2012.2.12. 새누리당 명칭 개정까지)
1997년 김영삼과 이회창간의 대립각이 극에 달하고, 김영삼이 탈당 한 뒤 1997년 11월 21일 신한국당과 민주당이 합당하여 한나라당을 창당하였다. 한나라당은 전반적으로 보수 정당으로 분류되고 있으며 주로 영남에서 지지율이 높다. 1997년 12월 18일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회창이 낙선함으로써 여당의 지위를 잃고 야당이 됐으며 제 16대 대통령선거에서도 패배했다. 그러나 2007년 12월 19일 제17대 대통령선거에 이명박을 후보로 내세워 당선시킴으로써 10년 만에 재집권에 성공했다.
9. 참여정부
1) 열린우리당
새천년민주당, 한나라당, 개혁국민정당에 있던 정치세력은 2003년 11월11일 정치개혁을 명분으로 노무현을 중심으로 하여 열린우리당을 창당한다. 2004년 3월 12일에는 노무현이 정치적 중립을 지키지 않았다는 명분으로 타 정당들이 탄핵소추안을 통과시켜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17대 총선에서 152명을 당선시키면서 제 1당이 되었다. 열린우리당은 국가보안법, 사립학교법, 언론관계법, 과거사법의 4대 개혁입법을 추진하였으나 야당의 반대로 이루지 못하였다. 결국 2007년 대선직전에는 지지도가 급락하였으며 통합파 의원들이 집단으로 탈당한다. 결국 국회 과반을 유지하는데 실패하였고 2008년 2월 민주당과 합당해 통합민주당이 된다.
2) 민주노동당
민주노동당은 1997년 민주노총을 기반으로 창당한 국민승리21이 전신이다. 2000년 1월 30일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를 극복하고, 민족 통일국가를 건설한다는 내용을 필두로 창당하였다. 2002년 제16대 대선에서 권영길이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노무현, 이회창에 이어 3위를 차지하였다. 2007년 12월 제17대 대통령선거에 권영길이 다시 출마하였으나 5위에 그쳤다. 2008년 2월 대통령선거 패배에 따른 책임론과 당내 노선 갈등 등의 이유로 민중민주 계열의 노회찬·심상정 등이 탈당하여 진보신당을 창당함으로써 분당되었고, 4월 9일 치러진 제18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는 총 5석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 이후 2011년 12월 5일 국민참여당, 새진보통합연대와 합당하여 통합진보당이 출범함으로써 해체되었다.
10. 실용정부 (이명박정부)
1)새누리당
한나라당이 창당된 이후, 같은 해 12월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 이회창이 출마하였으나 낙선함으로써 야당이 되었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선거에서도 이회창이 새천년민주당의 노무현에게 패배하였으나, 2007년 12월 17대 대통령선거에서는 이명박 후보가 당선되어 10년 만에 집권 여당이 되었다. 제19대 총선과 제18대 대통령선거에 대한 위기의식이 고조되자 당의 전면적 쇄신을 위해 2011년 12월 19일 박근혜를 위원장으로 하는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였고, 2012년 2월 13일 지금의 당명으로 변경하였다.
2)민주통합당
민주통합당은 18대 국회의 제1야당인 민주당, 시민통합당, 한국노총이 통합하여 2011년 12월 16일 창당되었다. 민주통합당 출범으로 민주당은 2008년 7월 통합민주당에서 민주당으로 당명을 변경한 지 3년 5개월 만에 사라지게 되었다. 현재 민주 통합당은 중도진보를 표방하고 있지만, 시민통합당과 한국노총의 입장이 강령에 반영되면서 종전의 민주당보다 진보 성향이 강해졌다.
3)통합진보당
통합진보당은 제19대 총선과 제18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진보 진영이 단일 진영을 형성하기 위하여 창당한 정당이다. 2011년 12월 5일 민주노동당과 국민참여당 그리고 새진보통합연대가 합당을 결정하고 1정당 등록을 함으로써 공식 출범하였다. 통합진보당의 출범으로 진보정당 최초로 제3당의 지위에 올랐던 민주노동당은 2000년 1월 창당 12년 만에, 국민참여당은 2년도 안 되어 사라졌다.
Ⅲ. 결론
우리나라 정당들은 이승만 대통령을 시작으로 박정희·전두환·노태우의 군부세력과 3김으로 일컫어지는 김대중·김영삼·김종필을 중심으로 해방 이후로부터 현재까지 수많은 정당들이 창당되었다가 사라지거나 통합되어왔다. 이들이 중심이 되어 이끌었던 정당들의 모습을 살펴보면 과거 우리나라의 정당사는 얼룩지고 안정되지 못한 역사였다고 볼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이 이끌었던 자유당이 집권하였던 1공화국 시절 그들은 국민을 상대로 권위주의적이었으며 그들의 이익과 장기집권을 위한 횡포를 저질렀다. 또한 박정희의 민주공화당이 집권당이였던 제 3·4공화국 당시에는 시민들의 민주화 열망은 무시당한채 군부의 독재를 강화하기 위한 정당정치가 이루어져왔다. 또한 전두환·노태우의 신군부정부 당시에는 민주공화당이 집권하였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독재와 이득을 위해서 정당정치가 이용되었으며 민주화 또한 억압을 당하였고 여러가지의 부정부패와 비리가 난무하였다. 군부세력이 물러가고 집권한 이후 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 정부가 차례로 집권을 하였으나 집권한 정당들은 국민적 지지를 얻어낼 만한 정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으며 때때로는 국민적 반감을 일으키는 정책을 내세우고 있는 상황이다. 현재 제 19대 대선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인데 정당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정책이 아닌 국민적 지지를 얻어낼 수 있는 정책을 제시하기를 바란다.
참고자료 : 한국 정당사 네이버 지식백과
각 정당별 명칭- 네이버 지식백과
대한민국 선거사 , 양승태(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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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우리나라에 어떠한 정당이 있었고 정치가 어떻게 흘러왔는지 크게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아 잘 모르고 있었는데 레포트를 작성하면서 우리나라 정치의 흐름을 어느정도 알게되어 좋은 계기가 되었고 생각합니다.
정당사의 흐름에 관한 그림첨부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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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어느 나라건 정치와 행정이 연계되어 있지 않은 경우는 없지만 우리(후발 개도국)는 좀 더 복잡하게 밀착되어 있죠. 그래서 한국 정당발전사를 아는 것은 한국행정 뿐아니라 한국 사회전반을 이해하는 데 아주 큰 이해의 틀을 제공해줍니다. 간략하면서도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했습니다.
읽으면서 제가 잘 알지못했던 4,5공화국 당시의 정당의 흐름을통해 왜 노태우 대통령 당선 당시의 김대중 김영삼 후보가 단일화하지않았는지까지의 흐름을 잘 알수있었습니다.조금 덧붙이면 자유당 집권당시 정치사에서 중요한 사건이라고 제가 나름 생각하는 진보당 사건에대해 말할수있었다면 좀더 좋았을것같습니다.
우리나라의 정당은 첫 정당인 한민당을 시작으로하여 지금의 새누리당, 민주당 등에 이르기까지 많은 변천을 겪어왔습니다. 현재는 민주적인 제도로 선거와 정당정치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초기에는 1인이 권력을 장악하는 독재의 형태를 보여왔습니다. 제 1공화국의 이승만대통령과 자유당, 3·4공화국의 박정희 대통령과 민주공화당, 5공화국의 전두환 대통령과 민주정의당에 이르기까지 개인을 중심으로한 정당이 막강한 힘을 갖고 다른 정당들을 압도하는 형태를 보여왔습니다. 특히 박정희 정권시절에 발효되었던 정치활동금지는 민주주의의 퇴보라고 할 수 있을만큼 극단적인 예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독재정권이 몰락한 이후 김영삼 정권을 시작으로 하여 수차례의 총선과 대선들이 이루어져 왔습니다. 과거 독재시절에 비해 민주적인 방법으로 정당간의 대결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정당들이 안정을 갖추지 못한 채 설립되었다가 짧은 시간 내에 다른 정당들과 통합되거나 사라지기를 반복하였습니다. 또한 과거 정당정치가 보수와 민주세력으로 대표되는 정당들의 대결이였다면 최근에는 이러한 세력들 외에도 진보성향의 정당이 새로 생겨나고 있습니다.
이제는 대선이 한달도 남지 않은 시점입니다. 각 정당들은 과거처럼 선거가 자신들의 권력을 위한 선거로 변질 되지 않도록 주의 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정당들은 말로만 그럴싸하고 실행불가능한 이상적인 정책이 아닌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실현이 가능한 정책을 내놓도록 해야 합니다.
·진보당 사건이란: 1956년 5.15 선거에서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조봉암이 비록 낙선하였지만 많은 득표를 얻어 이승만과 자유당의 강력한 경쟁자로 등장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이승만과 자유당은 진보당에 북한의 주장과 유사한 평화통일방안 주장했다는 혐의를 씌워 간부들을 구속하고 2월 25일 정당등록을 취소합니다. 또한 조봉암은 사형당하게 됩니다. 진보당 사건은 전혀 민주적이지 않은 우리나라 초기 정당정치의 독재와 부패성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최근 대선을 앞두고 그동안 우리의 정당역사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의 정당역사를 살펴보면 국민의 목소리를 탄압했던 독재정권도 있었고, 민주주의와 복지를 주창한 국민정부까지 다양한 정당이 형성되었었는데, 중요한 점은 그 어떤 정당이든 현재 국민의 마음에 쏙 드는 정당이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 공통점이라는 점입니다. 이점은 우리의 정당역사가 그리 국민의 의사와 염원에 반영되지 않았다는 점을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국민의 소리를 듣고 모두의 뜻을 일치시키는 이상적인 정당의 형성은 불가능 하겠지만, 그 어떤 정당이든 국민들의 의견을 조금 더 귀 기울였다면 그리고 그에 대한 정책을 폈더라면 좀 더
나은 평을 듣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과거 정당의 과오를 발판삼아 진정한 정당의 실현을 앞으로 출범하는 새 정권이 보여주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우리나라의 정당의 역사와 흐름을 다시금 정리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국 정당의 변천사의 이해를 통해 전체적인 한국 정치에 대한 틀이 더 체계적으로 잡히게 된 것 같습니다. 유익한 글 감사합니다.
정당의 본질적인 변화없이 이름만 변경하거나 정권을 잡기 위해 의견의 차이를 무시하고 합당을 하는 등 우리나라의 정당에 대해 평소에 좋지 않은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관심있게 알아보지 않아서 정당에 대한 지식이 없었는데 이 글을 통해 우리나라의 정당의 역사와 변천과정을 정확히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FTA 문제에 대하여 노무현 정부 때와 이명박 정부 때 여당과 야당의 찬반입장이 뒤집히는 걸 보고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들 대한민국의 미래를 생각하는 것이 아닌 상대당에 반대하기 위해서 반대를 하는 것 뿐인 것 같아서요. 정당들이 국회의원의 이익집단이 아니라 서로 다른 국민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