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벽두 어느 날 베란다 외벽 실외기 보관함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진 나뭇가지들을 발견했다. 나뭇가지가 강풍에 날리더라도 아파트 18층까지 올라오긴 어려울 터이니 위층에서 소품을 만들고 버린 것이려니 하고 수습했다. 그러곤 며칠 후 아내가 전하는 말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까치들이 떼거리로 몰려와 야단법석을 떨더라는 거였다. 아마도 녀석들이 집을 짓기 위해 운반해 놓은 건축자재를 어디로 치웠느냐며 한바탕 난리를 쳤던 모양이다.
8백 세대가 넘는 아파트에서 에어컨을 설치하지 않은 집은 우리 집을 비롯하여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몇 안 된다. 나와 같은 노년세대들이 기억하는 까치들의 전통 집은 마당에 선 감나무나 신작로의 가로수 그리고 들판의 버드나무 같은 데에 주로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주거환경이 획기적으로 바뀌고 토지개발이 이어지면서부터 까치들은 생존에 큰 위협을 느꼈을 터이다. 그들은 자고나면 사라지는 자신들의 안식처에 대한 불안과 번민을 다스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인간들의 거처를 따라 아파트로 옮기기로 해놓고도 과연 말없이 받아줄 것인지를 두고도 밤잠을 설쳤을는지 모른다. 그렇게 오갈 데 없는 처지다보니 녀석들이 발견한 우리 집 텅 빈 철제함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날로부터 며칠 후 다시 나뭇가지를 물어오기 시작했다. 50개 정도를 갖다놓곤 또 한동안 잠잠했다. 나의 거처인 침실과 서재와는 떨어져 있어 조용하다고 느꼈을 뿐 아내는 벌써 며칠째 왜 저 나뭇가지들을 그냥 놔두느냐고 성화였다.
가까운 오봉산 자락에서 집단으로 구했는지 전부가 소나무가지였다. 녀석들이 조용하게 운반해놓고 떠났더라면 아내도 전혀 눈치 채지 못했을 터이지만 말라죽은 나뭇가지를 꺾으면서 있었던 무용담을 풀어놓았던지 꽤나 시끄러웠던 모양이다. 내가 베란다에서 까치를 목격한 건 단 한번으로 녀석은 나뭇가지 하나를 물고 휙 날아가 버렸고 남은 나뭇가지는 며칠이 지나도록 그대로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집단으로 모여서 무슨 행사라도 했는지 바닥 정중앙에다 엄청난 양의 배설물을 싸질러놓은 것이 보였다.
아래쪽엔 수직으로 기기가 17대나 설치되어 있어서 말라붙은 까치 배설물 제거가 쉽지 않았다. 녀석들이 지금 당장 집짓기를 시작하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아파트 도색공사 때문일 것 같았다. 페인트 통을 매단 작업자들이 줄을 타고 수시로 오르내리니 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도색공사는 앞으로 3개월이나 더 걸릴 예정이니 녀석들이 미루지 않고 빨리 집을 지었으면 좋겠는데 그런 바람을 알릴 방법은 없었다. 대부분 까치집들은 3월초에 완성하는데 많이 늦은 편이라 마음이 쓰였다.
인터넷 사이트에서도 아파트 까치집에 대한 찬반논란이 뜨거웠다. 논쟁의 쟁점은 과연 까치가 인간에게 이로운 새냐는 거였다. 아파트 인구가 많아지다 보니 까치들이 아파트까지 찾아들어 둥지를 튼 데서 논쟁은 시작되었다. 현재 아파트 까치집 옹호론자는 절반을 약간 넘는 것 같았다. 그마저도 까치집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는 노년세대들이 들어서 과반을 겨우 넘긴 것 같았다. 2주쯤 걸리는 까치집 짓는 과정을 관찰한 어느 네티즌은 까치들의 지혜에 감동하고 있었다.
짤막한 나뭇가지를 물어다가 사이사이에 걸치면서 기초를 만들고 그 위쪽으로 나뭇가지를 서로 맞물리게 끼우면 끝날 거라고 그는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중간을 움푹 파이게 테두리 주변으로만 쌓아올려 아늑한 까치집을 완성하더라는 것. 그런데 나뭇가지가 부실하면 기초를 세우는데도 개고생을 하더란다. 겨우 걸쳐놓으면 내려앉고 다시 걸쳐도 또 주저앉는 게 인간들의 집짓기와 별반 다르지 않더라고 했다. 마지막 내부처리는 진흙을 발라서 바람도 막아주면서 견고하게 짓더란다.
둥지 안쪽에는 지푸라기나 마른풀을 깔고 그 안쪽에는 사람들의 옷가지나 새의 깃털 또는 비닐이나 솜뭉치 같은 보온재까지 깔아서 포근하도록 꾸미는 것까지 관찰하여 전했다. 여기에 비해 까치를 쫒아내고 나뭇가지를 거둬들이면 끝난다는 까치집 반대론자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이들은 까치 깃털이 날고 먼지가 일어 실외기에 쌓이면 발생할 수 있는 화재까지 걱정했다. 그러면서 조망도 가려지고 생각보다 까치집 덩치가 크기 때문에 미관도 볼썽사납다고 했다.
다 짓고 나면 새끼도 키워야하니 엄청 시끄러울 것이고 분비물로 인한 피해를 이웃에 끼칠 것도 걱정했다. 이러한 반대론자의 주장을 에둘러 반박하는 네티즌의 목소리는 잔잔한 감동을 안겨주고 있었다. 이 세상에 모든 일이 무조건 나쁘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베란다에 까치가 날아들어 집을 짓기 시작했다면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무척 즐겁고 고마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많은 아파트 베란다 중에서 까치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은 보통 인연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당신처럼 지저분하고 시끄럽고 번거로운 일이 벌어진다며 꺼려하는지도 모르고 까치는 오로지 자식 길러낼 욕심으로 인간의 곱지 않은 시선에도 불구하고 아파트에 터를 잡기까지는 무척 고르고 망설여서 결정하였을 터이지요. 정 마음에 걸리면 허물어 버리세요. 그러면 까치는 허물고 허물어도 다시 집을 지을 겁니다. 그래서 집짓는 곳에 다른 물건을 갖다 올려놓으면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겠지요. 까치에게는 참으로 미안하고 야박스런 짓이지만 인간의 이기심을 어찌하겠어요. 원망하며 떠나갈 수밖에요.
그러나 한편으로 당신이 마음만 바꾸면 굉장한 즐거움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잠자리에서 눈뜨기 전 깍깍대는 까치의 낭랑한 목소리는 하루의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어주는 촉매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시끄러운 것이 아니라 낭랑한 기상나팔 소리가 아닐까요. 까치가 알을 낳고 새끼를 기르는 과정을 슬쩍슬쩍 훔쳐보는 재미도 제법 쏠쏠할걸요. 누구도 누리지 못하고 또 누릴 수도 없는 행복을 당신은 맛볼 수 있답니다. 어린 자녀들이라도 있다면 자연공부도 되고 관찰을 해보도록 하면 탐구학습도 되겠지요.
일부러 그런 학습 자료를 구하고 싶어도 도저히 구할 수 없는 기쁜 일이 될 겁니다. 밖에서 바라볼 때에도 “아! 까치집 있는 저 집” 하며 동네 명물이 될걸요. 아이들 입장에서는 남이 갖지 못한 것을 까치가 만들어 줌으로써 어깨가 으쓱해질 수도 있는 일이지요. 물론 이웃에 피해가 될 수도 있겠지만 당신이 계획적으로 까치를 불러들여 의도적으로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닌 이상 아파트에서 공동으로 짊어져야 할 짐이 아닐까요.
까치와 함께 인간이 더불어 살아가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가면 어떨까요. 여러 마리의 새끼를 길러내어 둥지를 떠날 때 당신도 아마 한없는 희열을 맛볼 수 있을 겁니다. 정서가 메말라가는 작금에 까치 부부가 오히려 그 동네에 훈훈하고 따뜻한 사랑의 메신저 역할을 해줄 수도 있겠네요. 당신의 마음이 정 내키지 않는다면 할 수 없이 매몰차게 까치를 내치면 될 겁니다.
까치집 철거를 묻는 이들은 대부분 젊은 주부들로 보이는데 “이 골치 아픈 까치집을 어찌 하오리까”였다. 그러다가 가끔씩은 “옛날 사람들은 까치가 왜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했을까요?”란 질문도 있었다. 여기엔 삼국유사에 아진포에서 까치소리를 듣고 배에 실려 온 궤짝을 열어 보았더니 잘생긴 사내아기가 있었는데 그 아이가 훗날 탈해왕이 되었다는 석탈해신화가 있어서 까치는 귀한 인물이나 손님의 출현을 알리는 새로 여겨지게 되었다는 대답이다.
까치집을 찍은 사진들엔 대부분 까치집이 실외기 옆 공간에 위치했고 그곳엔 전기배선도 함께 들어 있었다. 그래서 답변하는 이들도 하나같이 까치집으로 인한 화재발생을 우려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기화재는 그리 쉽게 일어날 수가 없다. 배선보호용 차단장치가 그만큼 완벽하게 설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원인이 밝혀지지 않는 화재 대부분을 전기화재로 모는 우리나라 현실이 참 안타깝다. 건물은 전기배선 없는 곳이 없고 보험처리하기도 편해서 전기합선과 전기누전으로 때린다니 더더욱 걱정이 아닐 수 없다.
까치들이 지금 계획대로 자신들의 거처를 우리 집에 마련한다면 아내와는 서로 불목할 것이 뻔해 보인다. 아내의 침대가 유리문 하나를 경계로 실외기함에 바짝 붙어 있기 때문이다. 까치들은 수시로 드나들면서 부산을 떨 것이고 밤중엔 아내가 또 코를 심하게 골아 녀석들의 숙면을 방해하게 될 것이다. 현직 때인 1970년대 중반부터 골치를 앓기 시작한 조류사고에 비상이 걸려 본사에서는 전국 사업장 분임토의 발표대회까지 열면서 현장의 아이디어를 모았다.
그 결과 배전선로 충전부가 노출되는 걸 막기 위해 철제구조물과 전선에 절연체를 씌우는 작업이 시작되었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까치가 전주에 접근하는 걸 막기 위해 번쩍거리는 거울을 부착하거나 싫어하는 식초를 병에 담거나 나프탈렌을 매달아 냄새를 풍기는 방법으로부터 뱀이나 청설모 모형까지 설치했지만 영리한 까치는 속아주지 않았다. 직장을 떠나온 4년 후인 2002년엔 급기야 전력회사가 수십억 원 예산을 들여 첨단기술로 만든 까치 퇴치기를 개발하기도 했다.
까치가 전주 반경 5미터 이내에 접근하면 감지기가 동작해서 까치가 가장 혐오하는 총소리와 까치가 죽을 때 내는 비명소리를 내는 원리인데 당하는 까치로선 기절초풍할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첨단기기는 한 대당 20만원이나 호가한다니 전기요금 원가에 끼칠 악영향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현직 때 배전선로에 집을 지으면서 정전사고를 일으키는 까치들로 인해 매년 산란기인 정초가 되면 비상이 걸리면서 골머리를 앓았다.
급기야는 정전피해 당사자이기도 한 시민들로부터 전주 위 까치집 짓는 현장을 신고받기에 이르렀다. 15년 넘게 금정구와 부산진구 민방위강사를 맡아 구청을 찾으면서 연중 발생하는 정전사고의 40%를 차지했던 까치집 사고 실태를 알렸다. 그러고 대원들에게도 까치집 짓는 곳이 보이면 신고해 줄 것을 당부했다. 아래 URL은 그때 상황을 그린 졸작 <까치집> 수필로 벌써 5년 세월이 흘렀다.
첫댓글 까치이야기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석탈해신화" 까지.....
글솜씨 정말 대단하십니다 ^^--^^
우리 남양산성당에 작가분이 계셨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