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18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끝으로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4장 1-2절『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끝으로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배웠으니 곧 너희가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우리가 주 예수로 말미암아(디아 투 크리아 예수) 너희에게 무슨 명령으로 준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주 예수로 말미암아라고 번역된 것의 헬라어 원어는 『디아 투 크리아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라는 의미다. 주 예수로 말미암아는 2000년 전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로 말미암아 라는 의미다. 그러나 예수를 통하는 것은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예수를 통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성도가 구원을 받는 것은 2000년 전의 예수를 믿어서가 아니라 현재적 예수 그리스도 안(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예수)에서 믿는 것이다.
4장 3-5절『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대할 줄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따르지 말고』음란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포르네이아스(πορνείας)다. 그리고 아내는 스큐오스(σκεῦος 큰그릇이라는 의미)로 표기되었다. 스큐오스는 몸(영적 몸)이라는 의미다. 성령으로 인을 치신 몸은 이전에 하나님을 떠난 몸(음란한 몸)이지만, 이제는 영적인 몸이라는 것이다. 개역개정에서 아내라고 표현된 것은 영적인 몸(그릇)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바울은 당시 상황을 빗대어 영적인 간음에 대해서 경고를 한다. 이방인과 같은 색욕은 복음을 따르면서, 율법주의, 영지주의에 빠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당시의 사람들은 성윤리에 대해 무감각했다. 성적으로 타락했을 뿐 만 아니라 성적인 만족을 위해 탈선은 물론이거니와 타인의 아내까지도 넘보는 일이 종종 일어났다. 사회적으로 아내는 자녀를 출산하고 가정을 돌보는 하나의 도구로 인식되었고, 이혼은 행해졌으며, 혼외관계를 갖더라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사회 전반적으로 성적인 욕망이 금지되기는커녕 용인되고 조장되는 시대였다. 그런 상황 속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성적 방종에 동참하지 않는 거룩한 삶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함을 권면하고 있다.
4장 6-8절『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언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라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니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바울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자세로 형제 사랑을 말하고 있다. 형제는 영적인 형제를 의미하며, 형제를 해한다는 것은 영적으로 형제를 공격 하는 것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갚아주신다. 분수를 넘어서 하지 말하는 것이다. 성도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들에게 징계하는듯한 그런 행동을 하지 말고, 권면하라는 말이다. 형제를 공격하게 되면, 정말 하나님을 떠나는 일이 있게되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4장 9-10절『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들 자신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에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욱 그렇게 행하고』형제 사랑과 관련하여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우들에게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다며 그들을 칭찬했다. 그들이 교회 내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온 마케도니아에 있는 형제들, 곧 마케도니아에 있는 교회들에게도 사랑을 잘 실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3장 34절에서『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4장 11-12절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자기 일을 하는 것은 헬라어로 필로히메스다이(친구에게 가치있게 하는 것) 친구에게 가치있는 일을 하는 것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신을 침묵하게(조용히) 하고, 자기의 일을 하고(프라젠 타 이디아), 너희 손으로 일하고(에르가제스다이)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을 세가지로 비유할 수 있다. 들맆세스(주님의 강권), 히포모네(주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머무는 것), 파루시야(주님의 임재). 들맆세스와 파루시야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고, 성도가 하는 일은 히포네스다. 히포네스는 오늘날 주님의 임재를 바라보는 기도가 되는 것이다. 헤쉬카제인은 임재기도를 시작하라는 것이다. 조용히 라는 말의 단어는 헤쉬카제인이다. 『프라젠타 이디아(자기 일을 하는 것)』라는 것이 바로 히포모네를 하라는 것이다. 에르가제스다이(너희 손으로 하는 것)가 바로 파루시야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의 손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행동주의 복음을 강조한다. 그래서 사역을 중시하는데, 이 세가지 절차를 무시하고 사역하는 게 문제가 된다.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사역은 하나님께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런 의미를 모른채, 오늘날 교회 사람들이 재림신앙으로 데살로니가 교회를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재림신앙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생각을 보면,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자기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고 권고했다. 당시 주의 날, 곧 종말이 시작되었다는 거짓 가르침에 속아 일상의 일을 포기하고 생업을 내려놓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났다. 일은 하지도 않으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든 도와주시겠지 하며 무작정 기다리는 그리스도인들이 등장했다. 그에 대해 바울은 그런 그릇된 신앙풍조에 동요하지 말고 하던 일에 전념하기를 권유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믿지 않는 불신자들로부터 빈축을 살 뿐 만 아니라 결국 경제적으로 궁핍한 상황에 내 몰리게 될 것이 뻔 하기 때문이었다”. 라고 잘못 해석하게 되는 것이다.
4장 13-14절『형제들아 자는 자들(코이모네논)에 관하여는 너희(로이포이)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아세이)』 코이모네논은 누워있는 자들이다. 로이포이(구원받는 자들)는 누워있는 자들과 대조를 이룬다.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예수를 통하여(헬라어디아 투 예수) 자는 자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역을 하다가 죽은 자들을 의미한다. 그들이 하나님 나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아세이는 오는 것이 아니라 『데려가다』라는 의미다.
4장 15절『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파루시안)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페릴레이포메노이)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자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역을 하다가 죽은 자를 의미한다. 페릴레이포메노이는 죽어있던 영을 살려 파루시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자들이다. 파루시안을 강림으로 번역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파루시안은 주님을 통해서 죽었던 영을 살리는 일을 의미하는 것이다. 강림하는 것은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먼저 죽었던 자들이 영의 몸을 입고 하나님 나라로 가고, 그 다음에 지금 살아있는 자들이 하나님 나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4장 16-18절『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여기에서의 강림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의미하는데, 헬라어로 『카타베세타이καταβήσεται 』이다. 4장 15절에서 강림으로 번역된 파루시안(παρουσίαν 임재)과 4장 16-17절의 강림인 카타베세타이(재림)는 다른 의미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재림시에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죽은 자들이 먼저 하나님 나라로 가고, 다음에 영의 몸을 입고 있는 성도들도 영의 몸으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현재적으로 살고 있는 성도들은 영이 영의 몸으로 변화되어, 호 로고스를 영접(파루시안(παρουσίαν 임재)하게 된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51-52절에서『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영의 몸에 대한 이야기다. 변화라는 것은 육의 몸이 갑자기 영의 몸으로 전환되는 것이 아니라 육의 몸은 죽고, 영의 몸으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육의 몸이 죽고 성령의 능력으로 영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재림시에 살아남아서 영의 몸을 입고 있는 자는 부모로부터 받은 육이 홀연히 사라질 것이다(휴거). 그리고 공중에서 주를 영접할 것이다(카타베세타이καταβήσεται.)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삼일만에 부활하셨다. 죽으신 예수님의 몸은 사라지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이 나타나신 것을 통해서 우리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죽으신 예수님의 몸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과 다른 것이다.
예수를 믿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지 못한 자에게도 심령 속의 영안이 열려서 그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 것을 깨닫고 뒤늦게 회개하고 주를 영접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때가 늦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