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와미 시바난다 사라스와띠는 현대를 대표하는 성인으로 인도의 영적 스승 중 한 사람이며, 높은 경지를 성취한 20세기의 위대한 요가 스승이다.
유년 시절
1887년 9월 8일목요일 아침 이른 시간에 하늘에 바라니 별이 기울어지고 있었을 때, 남인도의 탐라파라니의 강둑에 있는 파타마다이의 마을에 한 아이가 태어났다. 이 아이의 두 부모 모두 신을 외경하는 신실한 사람들이었다. 이 행복한 부부는 독실한 브라만 가정을 꾸리며 살아가고 있었고 시바신을 헌신적으로 섬겼다. 그들은 마지막이자 세번째 아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이름을 쿠푸스와미(Kuppuswamy)라고 지어 불렀다.
소년 쿠푸스와미는 영적인 성향이 강했고, 매우 총명하면서도 장난기가 넘쳤다. 부모의 헌신적 예배와 키르탄 자파수행을 따라 참여하는 것을 좋아했다. 소년은 어릴 적부터 자기를 절제하고 포기하는 덕과 형제애를 드러내 보였는데, 불쌍한 사람들을 동정하여 집 대문 앞에서 굶주린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었고, 아버지에게 부탁해 지나가는 빈민들의 손에 파이를 쥐어주도록 했다. 그는 가끔 어머니로부터 케익과 사탕과자를 얻어다가 더 어린 친구들과 개와 고양이, 까마귀와 참새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주었고, 그 자신은 조금도 먹지 않았다. 그는 또한 아버지가 시바신에게 예배할 때 꽃들과 바엘 이파리들을 따다가 드리곤 했다.
그는 성장하면서 명석하고 튼튼하여 공부와 운동을 모두 잘했다. 고등학교 시절 그는 항상 반에서 1등을 하였고 매년 상을 탔다.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와 놀라운 기억력을 가졌다. 마드라스 지사가 방문했을 때, 그는 철도역 승강장에서 환영의 노래를 불렀다. 그는 대학에 입학해서는 토론과 연극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1905년에 공연했던 세익스피어의 <한여름밤의 꿈>에 헬레나 역을 연기하기도 했다.
그는 신분을 막론하고 사람들에게 공손히 대했으며 카스트 계급을 넘어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당시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던 카스트 제도를 못마땅하게 여겼으며, 청년이 되었을 때 불가촉 천민(인도 최하층 계급)에게 펜싱을 배우면서 카스트 제도라는 오래된 관습에 저항했다. 그 당시로서는 최하층 계급의 사람에게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는 남의 고통을 해결하는 의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학업에도 뛰어나 두각을 나타내었다. 첫번째 기술시험에 합격하고 나서 쿠푸스와미는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서 탄조르에 있는 의과대학에 들어갔다. 그는 결코 휴일에도 집에 가지 않을 정도로 대단히 열심히 공부했다. 그는 병원에서 모든 시간을 보냈다. 그는 교수들의 허락으로 수술실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열성적으로 공부하는 노력과 실력에 감동한 교수들이 그를 불러 시술에 참여시킬 정도로 그는 공부에 열성적이었다. 그는 모든 과목에서 1등을 하였다. 남들이 탐낼 정도의 지식을 의사들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었다. 불과 의과 1학년 때에, 그는 졸업반 학생들도 풀 수 없는 시험에 답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쿠푸스와미는 의과과정을 이수하고 의사자격을 따서 23 살에 내과의사가 되었다. 실습기간 중에 ‘암브로시아(천상의 맛난 음식)’라는 이름의 의학잡지를 시작했다. 잡지를 간행하는데 드는 초기 비용으로 그의 어머니로부터 100루피를 얻었다. 후에 그의 어머니가 150루피가 드는 축제행사에 돈이 필요했을 때, 어머니를 위해 돈을 준비해 드렸다. 그는 잡지를 무료로 배부하곤 했으며, 사람들에게 기부금을 요청하는 것을 매우 부끄러워했다. 이때 그는 영적인 지식과 건강에 대한 정보를 세상에 널리 전파하려는 꿈을 가지게 되었다.
말레이시아에서의 의사 시절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곧바로 의사 쿠푸스와미에게 말레이시아에서 전화가 왔다. 그는 모험정신이 강했다. 1913년 인도를 떠났다. 그는 브라만 가문에 속해 있어서 배에서 육식을 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가 싱가포르에 도착했을 때쯤엔 거의 반은 죽어있었다.
의사 쿠푸스와미는 말레이시아에서의 경험을 이렇게 묘사한다.
" 나는 육지에 상륙하자마자 곧바로 의사들이 있는 거처로 갔다. 닥터 아행가는 내게 그의 친구이자 세렘반에서 개업한 의사인 닥터 해롤드 파슨에게 가보라고 소개장을 써주었고, 내가 거기에 도착했을 때 닥터 파슨은 나를 자신의 병원을 가진 근처의 고무농장부지 감독인 로빈 씨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불행히도 내게는 로빈 씨는 단지 그쪽 병원에서 일할 조수를 구하는 사람일 뿐이었다. 그는 거인의 풍모를 지녔고, 키가 크고 튼튼하게 생긴 데다 난폭한 기질을 가진 무서운 사람이었다. 그는 내게 " 당신 혼자서 병원 일을 전부 할 수 있겠어?" 라고 물었다. 나는 " 예, 병원 세개라고 해도 전 해낼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지. 나는 대번에 채용되었다. 나는 그들이 자신의 정책에 따라, 한달에 백달러도 안되는 보수를 주겠다고 하여 나는 거절하였고 그 때문에 그들 사이에서 자신들을 거절한 인도 레지던트로 알려졌다. 그래서 로빈 씨는 내게 처음을 한달에 150달러를 주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에 동의했다."
의사 쿠푸스와미는 열악한 조건에도 매우 열심히 일했다. 비정상적으로 열악한 대우 때문에 그가 그 일을 사임할 것처럼 느껴졌지만, 로빈 씨는 그가 떠나가도록 하락하지 않았다. 그는 점차 고무 농장과 연계해 두 개의 병원을 10여년 동안 운영하며 의료활동을 했다. 수천명의 인도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인도인들의 공동체를 위해 봉사 활동을 했다. 그는 가난한 환자들에게는 치료비를 받지 않았으며, 덕망있는 의사로 알려졌다. 그는 실력있고 명망 높은 의사로 소문이 자자했다.
쿠푸스와미는 의사로서 매우 친절하고 동정심이 많고 유머와 위트가 있었고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절망적인 상태로 그에게 찾아왔어도 그는 늘 성공을 확신했다. 그래서 어디엘 가든 사람들은 그가 환자들에게 효과적이고 기적적인 치료를 할 수 있도록 신에게서 특별한 재능을 부여받았다고 말했고, 그가 매력적이고 당당한 인격을 가진 매우 친절하고 동정심 많은 의사라고 칭찬하였다. 심각한 환자의 경우에는 그는 거의 밤을 새워 불침번을 서며 환자를 돌보았다. 개인 실습 때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찾아가서 방문비나 상담비를 받지 않고 돌보았다. 오히려 그는 특별 식이요법을 위한 돈을 그들에게 주거나, 병원에서 퇴원시킨 다음 그들의 비용을 자신이 대신 치르기도 하였다. 그는 돈을 물을 쓰듯 대수롭지 않게 불쌍한 사람들에게 주었다.
한번은 가난한 사람이 한밤중에 비에 흠뻑 젖은 채로 그를 찾아왔다. 그사람의 아내가 산고를 치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아내를 돕기 위해 곧바로 그 사람의 오두막으로 가서 그녀를 돌본 후에, 비가 억수같이 퍼붓고 있음에도 꼬박 비를 맞으며 오두막 밖에서 머물렀다. 아이를 무사히 구하고 난 후에, 그는 다음날 아침에 집으로 돌아갔다.
바쁜 나날 속에서도 쿠푸스와미는 사두들, 산야신들과 거지들에게 봉사했다. 그는 결혼식과 파티, 그밖의 사회적 모임에도 참여했다. 말레이시아에서 의료 활동을 하던 시바난다는 어느 날 한 방랑 수도승을 치료하게 되었다. 그때 그 방랑 사두승은 그에게 스와미 사치다난다의 책을 주었다. 그리고 요가와 베단타에 대해서도 가르쳐 주었다. 그 일은 그의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되었다. 그 후 그는 인생의 의미를 보다 깊이 성찰하기 시작했다. 그는 삶의 커다란 의문에 대해 깊이 사색하였고, 마침내 사람들의 육신의 고통만이 아니라 마음의 고통도 치료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되기를 소망하게 되었다.
그 일은 그에게 잠자고 있던 영적 열망에 불을 질렀다. 그는 스와미 라마 티르타, 스와미 비베카난다, 샹카라, <예수를 본받아>, 성서, 신지학의 저작들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는 매일 규칙적으로 예배, 기도, 요가 아사나를 행했다. 바가바드 기타와 라마야나, 마하바라타와 같은 신성한 경전들에 대한 공부가 그의 위대한 헌신으로 이루어졌다. 그는 때로 찬송도 하고, 난단 차리탐도 행하고 키르탄 악기를 연주하기도 했다. 그는 아나하타 라자 요가와 스와라 수행을 실천했다.
그에게는 기이한 물건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었다. 상위계층의 멋진 의류와 호기심나는 수집품, 금과 은으로 된 기호품과 백단향은 늘 그를 매료시켰다. 때로 그는 다양한 종류의 금반지와 목걸이를 구입하여 곧바로 그것들을 착용하곤 했다. 그는 열개의 손가락에 열개의 반지를 끼기도 하였다. 그가 상점으로 들어갔을 때, 그는 물건을 고르고 흥정하고 깎는데 결코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그는 그가 본 모든 호기심나는 물건들을 수집하였다. 그는 상점주인에게 까다롭게 굴지 않고 바로 지폐를 지불했다.
아무 것도 이 의사를 시험할 수 없었다. 그의 가슴은 히말라야의 눈처럼 순수했으며, 그의 무한한 박애와 봉사와 포기의 정신은 그가 모든 것들을 사랑하게 하였다. 사람들은 그를 사랑스럽게 ‘사랑의 가슴’이라 불렀다. 그는 조금의 휴식도 없이 일했지만, 자신이 먹는 음식을 직접 요리하였고. 때때로 그는 요리에 몰두했다. 한번은 자신이 요리하는 것을 사진에 담고 싶어했다. 그래서 그는 기쁜 마음으로 제일 좋은 사진관에 가서 옷과 신발과 모자를 쓰고 사진을 찍기도 했다.
포기
여러 날이 지나 그는 더욱 더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면서, 세상을 포기하기를 원했다. 영적인 성장과 깨달음에 대한 강렬한 열망에 충만한 그의 가슴은 사랑의 봉사를 통해서 정화되어있었다. 마침내 돈벌이를 즐기던 쿠푸스와미는 1923년 싯달타 왕자처럼 세상일을 포기하고 말레이시아를 떠나 인도로 향했다. 아프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10년 동안 봉사를 한 스와미 시바난다는 말레이시아를 떠남과 동시에 그동안 안락한 생활을 보장해 주었던 중산층의 삶을 떠나 인도의 정신적인 전통을 따르는 방랑 수도사가 되기를 바란 것이다.
그는 마드라스에서 친구집에 머무르기로 하고 거기에 짐을 두고는 순례를 시작했다. 베나레스에서 여러 위대한 영혼들과 사원들을 방문하여 다르샨을 가졌다. 그는 챤드라바가 강둑에 위치한 마을인 달랴이에서 우체국장을 만났고 그와 함께 지냈다. 그는 그 우체국장의 요리사가 되기를 자처했고, 우체국장이 저녁에 집에 돌아왔을 때, 그가 만류하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발을 닦을 준비를 했다. 우체국장은 간절한 열망을 지닌 이 의사가 혼자서 명상하기 위한 장소를 원했을 때, 그에게 리쉬케시로 갈 것을 제안한 사람이다.
스승과의 만남
의사 쿠푸스와미는1924년 8월 8일 리쉬케시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그해 6월 1일에 성자 스리 스와미 비슈와난다 사라스와띠가 그리로 왔다. 그는 그 승려에게서 스승을 보았고, 그 승려는 그 의사에게서 제자를 보았다. 간단한 몇마디를 나눈 후에 의사 쿠푸스와미는 스와미 비슈와난다로부터 샨야신의 이니시에이션을 받았다. 스와미 비슈누데와난다지 마하라지는 비라쟈 호마 의식을 거행했다. 그 스승은 그 의사에게 스와미 시바난다 사라스와띠라는 법명을 주어 그는 시바난다로 거듭나게 되었다. 시바난다는 베나레스에서 산야신의 법에 대한 필수적인 계를 받아 적었다. 시바난다는 수행을 위해 스와르그 아쉬람에서 머물렀다.
수행
스와미가 된 후 10 여년 동안 시바난다는 치열한 수행에 전념한 끝에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수행 중에도 자선 진료소를 열어 자신의 전공 기술을 통해 사두, 순례자, 빈자들을 돌보았다. 또 그는 스리 오로빈도, 라마나 마라히쉬의 아쉬람 등을 포함해 인도 전역에 걸쳐 영적인 순례 여행을 하기도 했다.
그는 매우 검소하게 생활하면서 침묵을 유지했다. 가끔 그는 여러 날 동안 단식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방에 빵을 저장했다가 갠지즈 강물을 함께 먹기도 했다. 그는 추운 겨울 아침에 갠지강에 엉덩이를 담그고 서서 자파 수행을 하다가 해가 뜨면 나왔다. 그는 매일 2시간 이상을 명상으로 보냈다. 그의 치열한 고행 중에도, 그는 병든 자들에 대한 봉사를 거절하지 않았다.
그는 약을 가지고 사두들이 사는 오두막을 방문하여 그들에게 봉사하였고, 그들의 다리를 씻겨주었다. 그는 그들을 위해 음식을 구걸하여 아픈 사람들을 자신의 손으로 먹였다. 그는 갠지즈강물을 떠가져와서 그들의 옷을 세탁했다. 그는 콜레라와 천연두가 일어나는 곳에 갔다. 필요하다면 그는 병든 사두의 침대 곁에서 밤을 새워가며 지키기도 했다. 그는 아픈 사람들을 그의 등에 메고 병원으로 갔다. 그의 보험이 만기가 되어 나온 약간의 돈을 가지고, 그는 1927년에 락쉬만줄라에서 자선 양호실을 시작하여 순례자들에게 봉사했으며, 그는 그들에게서 비슈누신을 보았다.
스와미는 모든 다양한 요가를 실천하고 그 경전들을 연구했다. 치열하고 연속적인 수행으로 그는 니르비칼파 사마디를 즐겼다. 그는 그의 영적 여행의 끝에 도달했던 것이다.
그는 종이조각들을 모아 봉투로 사용했고 그것들을 모아 꿰매어 공책으로 만들었다. 그는 공책에다가 자기를 위한 훈계를 만들었다.
그 중의 일부를 보면,
" 소금을 포기하고, 설탕을 포기하라. 양념을 포기하고 야채도 포기하라. 사기꾼을 섬기고 아랫사람들을 섬겨라. 대변을 치우고, 사두의 옷을 빨아라. 기쁨으로 물을 떠날라라."
또 다른 페이지에는
" 앙갚음하지 말고, 악에 저항하지 말고, 악을 선으로 갚아라. 모욕과 상해를 견뎌내라." "누군가로부터 상해를 입었어도 어린아이처럼 즉시 잊어버리고는, 결코 그것을 마음에 담아두지 말라. 그것은 증오의 불을 당긴다. 형제애와 측은지심, 자비와 사랑, 용서의 덕을 길러라."
"좋은 예절과 극도의 공손함과 호의, 예의, 좋은 품행, 고귀함과 우아함과 온화함을 기르라. 결코 무례하거나 거칠고 잔인해지지 말라. 이 세상에 증오받을 만한 존재는 없다. 증오는 무지일 뿐이다. 사물이나 사람에게 대한 모든 증오는 사랑과 분별력으로 제거되어야만 한다."
시바난다는 방랑승으로 살아가는 동안 인도 전역을 여행했다. 그는 라메스와람을 포함한 남부지역의 중요한 순례지를 방문하였다. 오로빈도 아쉬을 방문하여 마하리쉬 수하난다 바라티를 만나고, 라마나 아쉬람에서 그는 스리 라마나 마하리쉬를 그의 생일에 접견하였다. 그는 노래를 불렀고 라마나에 헌신하는 박티요기와 함께 황홀경에 빠져 춤을 추기도 하였다.
조직과 저술
그는 순례에서 돌아와 1936년 거룩한 갠지즈(강가)강의 강둑에다가 ‘신성한 삶의 학회’(The Divine Life Society)의 씨앗을 뿌렸다. 그는 거기에서 황폐하고 사용하지 않아 버려진 외양간처럼 보이는 오래된 오두막을 발견하였다. 그에게 그 장소는 궁전보다 더 좋은 것이었다. 그 건물에는 네 개의 방이 있었다. 그는 오두막을 깨끗이 청소해서 그 장소를 차지했다. 그 후 그를 찾는 제자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면서 확장의 필요성이 생겼다. 그들은 더욱 많은 외양간과 거주할 수 없을 정도로 불결한 비어있는 장소를 찾아냈다. 방 하나에는 나이든 목동이 살고 있었고, 다른 방들은 건초더미와 거름으로 가득했다. 거의 일년 안되어 그 나이든 목동도 방을 비우게 되었다. 신성한 삶의 군대가 완벽하게 그곳을 점유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신성한 삶의 학회가 처음으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시바난다의 성실하고 관대하며 겸손하고 순수한 연민과 기쁨을 보고, 어려움과 고통으로 가득찬 삶을 이끌어 줄 인도자를 찾던 사람들이 그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조그맣게 시작한 학회는 조금씩 성장해서 나라 안팎으로 많은 수의 지점을 가진 세계적인 조직이 되었다. 그는 1936년에 신성한 삶의 학회를, 영적 지식을 보급하고 인간에게 사심없이 봉사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하는 자선단체로 등록했다.
그 이후 인도 북부, 리쉬케시에서 3킬로 떨어진 시바난다나가르의 갠지스 강변에 시바난다 아쉬람을 설립하여 학회의 본부로 사용했고, 이후 평생 그곳에 살면서 가르침을 펼쳤다.
영적 문헌의 무료 배포는 제자들의 꾸준한 흐름을 만들어냈다. 그는 유능한 인재들을 얻어, 가슴을 정화시키고 영성을 증진시키기 위해 적합한 분야의 활동을 제공하기 위해 다양한 부서를 발족시켰다. 시바난다의 생일 축하행사에 맞추어 정기 월간잡지 간행물인 <신성한 삶>의 출판이 1938년 9월에 개시되었다. 세계는 2차 대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었고, 전 세계적인 평화의 물결을 만들기 위해, 그리고 곤경에 처한 사람들의 마음을 돕기 위해, 그는 1943년 12월 3일 아칸다 마하만트라 키르탄 Akhanda Mahamantra Kirtan (끊임없이 밤낮으로 다음과 같이 마하만트라를 노래하는 것, Hare Rama Hare Rama; Rama Rama Hare Hare; Hare Krishna Hare Krishna; Krishna Krishna Hare Hare)를 시작했으며, 이어 12월 31일에는 매일 2번 규칙적인 예배를 하는 성스런 비슈와나트 사원을 건립하였다.
스와미 시바난다는 요가에서는 물론이고 인간의 고통을 경감시키는 데 있어 모든 것의 통합을 믿었다. 의학에서의 이종요법 치료법은 그와 신성학회 그리고 심지어 Swarg아쉬람에서의 초기시절과 뗄래야 뗄 수 없는 분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는 휘귀한 히말라야 약초를 재료로 하는 진정한 아유르베다의 치료법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봉사할 필요성을 느꼈다. 따라서 그는 1945년에 시바난다 아유르베다 약국을 설립하여, 지금까지 날로 증가되는 사람들의 수요를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시켜왔다.
스와미 시바난다는 1945년 12월 28일 전세계 종교연맹을 조직하고, 1947년 2월 19일에 전세계 사두연맹을 설립했다. 1947년에는 학회의 활동이 크게 확장되었다. 이 해는 이 위대한 혼의 탄생 60주년되던 해였고, 많은 건물들이 이 해에 축조되었다. <요가 베단타 숲 아카데미: Yoga-Vedanta Forest Academy>는 1948년 설립되었고, 이것은 그 지역에 거주하는 수행자들에게 체계적인 영적 훈련을 제공하고 그곳을 방문하는 구도자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다. 이때부터 그는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후학을 양성하고 봉사하면서 여생을 보냈고, 많은 전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책에서 영향을 받았고, 그에게 찾아와 가르침을 받았다.
스와미 시바난다는 나라 전역으로 그의 신성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1950년에 인도 전 지역과 스리랑카의 실론으로의 여행을 전격적으로 감행했다. 그는 실제로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도덕적이고 영적인 의식을 불러 일깨워주었다. 그 효과는 엄청난 것이어서, 그 이후로 아쉬람을 찾는 혼들의 물결이 끊이지 않았다. 또한 모든 나라로부터 열망자들의 편지가 날아들었는데, 그것은 진리를 더욱 강렬하게 유포해달라는 요구인 셈이었다. <요가 베단타 숲 아카데미>는 1951년 9월에 건립되었는데, 이는 지식을 폭넓게 보급하는 데 강력한 수단이 되었다. 그는 시바난다 아쉬람에서 1953년 세계 종교회의를 개최하였다.
작은 약국이 스와미 시바난다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는데, 그것은 점차 성장해서 나중에 X레이와 다른 설비를 갖춘 정규병원이 되었다. 시바난다 안과 병원은 1957년 12월에 정식으로 오픈되었다. 그 병원은 입원환자를 위한 30개 침대를 구비하고 있는 규모로 확장되었다.
출판 연맹은 시바난다의 거의 모든 저작들을 출판하였고, 제자들은 스승의 저작들을 연구할 필요성을 느꼈으며. 이는 <시바난다 문헌 연구회>의 건립을 촉발시켰다. 제자들은 스승의 저작들이 인도 각지의 언어들로 체계적으로 번역, 출간할 것을 결정했다. 그리하여 S.L.D.위원회가 1959년에 설립되었고, 이 위원회는 각 지역 언어 위원회를 그 아래 두고 활동하고 있다.
그가 자신의 생에서 그의 사명을 완수한 것을 본 1961년에 <신성한 삶 학회>의 25주년식이 거행되었다. 스와미 시바난다는 300여 편이 넘는 그의 책들과 정기간행물 잡지와 편지들을 통해 전 세계의 모든 분야에 봉사와 명상 그리고 신아의 실현에 대한 신성하고 고아한 봉사의 메시지를 방사했다. 그의 헌신적 제자들은 세계의 모든 종교들과 신조들, 숭배자들로부터 온 사람들이다.
스와미 시바난다는 자신의 요가를 <통합의 요가>라고 의미심장하게 불렀는데, 이는 카르마 요가와 즈냐나 요가와 박티 요가의 실행을 통해서 ‘손’과 ‘머리’와 ‘가슴’의 조화로운 계발 이라는 효과를 가져온다.
1963년 7월 14일 위대한 혼, 스와미 시바난다는 강가강의 강둑에 있는 그의 오두막에서 마하사마디(세속적 번뇌를 떠나 신성한 자아의 실현에 듦)에 들었다.
첫댓글 정말 대단한 분이십니다. 존경하고 닮고 싶은 분입니다. 감사합니다.
아라한과를 성취하신 분이니, 우리가 여러모로 그 행적을 본받고, 가르침에 귀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여러 측면의 훌륭한 가르침을 본 란에 소개해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